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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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플렉트뤼드는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단조롭고 게으르고 목적 없는 헛된 삶을

견뎌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애는 자신의 치열한 생활과 금기에 안도했다.

적어도 자신은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1. 요약

 

        19살짜리 아내가 남편을 죽여 버렸다. 그것도 임신 중에. 감옥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플렉트뤼드라는 중세식의 이름을 지어주고는 자살을 해버린 어린 엄마. 그리고 이모의 집에서 셋째 딸로 자라게 된 플렉트뤼드. 소설은 비극적으로 시작한다.

 

        자라면서 아름다운 외모와 평범하지 않은 기질로 주목을 받던 플렉트뤼드는, 그녀에게 매료된 이모이자 엄마의 적극적인 지지(어쩌면 애착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는)를 받아 강한 자의식과 함께 감정적인 기질을 키워나간다. 그런 그녀가 춤, 그것도 발레에 흥미를 느낀 것은 자연스러운 일. 발레의 여주인공만큼 그녀의 강한 자의식과 격정적인 감정상태를 잘 드러내줄 만한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발레학교에 들어가고, 그러면서 많은 것을 얻고, 또 잃어버린 플렉트뤼드. 갑작스러운 사고는 그녀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러는 동안 독자는 또 다른 갑작스러운 사고에 맞닥뜨리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2. 감상

 

        ‘나를 죽인 자의 일생에 관한 책’이라는 거창한 부제가 딸려 있는 책이라 기대감을 가지고 뽑아들었다. 사실 이미 작가의 다른 책들을 보고 작가 자신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설사 다른 이름이 붙어 있더라도 당연히 뽑아들었을 책이다. 하지만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생각보다 책의 내용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작가의 다른 책이, 독자의 마음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의 능수능란한 글솜씨를 자랑했던데 비하면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스토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단조로움 때문일 듯싶다. 주인공인 플렉트뤼드의 일상을 있는 보여주는데 그치고 있다.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적도, 어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있었다고 해도 그다지 부각되고 있지 않다. 심지어 마지막에 작가인 ‘아멜리 노통브’가 왜 등장하는지도 별다른 설명이 없다. 스토리 중심의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참 실망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어렵다.

 

 

        소설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이 보여주는 ‘평균 이상’의 감정적인 격앙상태에 관한 묘사들을 잘 생각해보면 이 책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만, 사실 지금으로선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고, 너무 피곤하다. 지금으로선 그나마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칭찬받을만한 일이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자신을 죽여버리다니. 당혹스러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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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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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 어려운 것은,

개혁으로 손해를 보는 기득권층은

개혁하면 손해라는 것을 금방 알기 때문에 격렬히 반대하는 반면,

개혁으로 이익을 볼 터인 비기득권층은

개혁이 뭐가 어떻게 이로운지 몰라서

당분간은 지지하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거나 미지근하게 지지하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1. 요약 。。。。。。。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세 아들 -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과 두 명의 조카 -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였지만 한 차례의 숙청과 내부 갈등으로 최후의 계승자가 된 것은 둘째인 콘스탄티우스였다. 위기의 제국을 홀로 통치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깨달은 그는 처음에는 사촌인 갈루스에게, 그리고 그가 숙청된 후에는 갈루스의 동생인 율리아누스에게 제국 방위의 책임을 나누어 준다.

 

     콘스탄티우스가 죽고 제위를 계승한 것은 율리아누스였다. 이제까지 철학도였던 율리아누스는 생각보다 제국 통치의 과업을 훌륭하게 수행했지만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하던 중 죽음을 맞는다. 신하들은 호위대장이었던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7개월 간의 짧은 통치를 하고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요비아누스를 대신해 황제가 된 것은 순수하게 계르만족의 혈통이었다는 발렌티니아누스였다.

 

     11년간의 제위 기간을 북방의 이민족들과의 싸움으로 보낸 발렌티니아누스의 뒤를 이어 선제의 아들인 16살의 그라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른다. 이 시기 훈족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이민족들의 등장으로 마치 도미노처럼 동고트족이 서고트족의 영역으로 밀려들어왔고, 서고트족은 로마쪽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제국의 동방을 책임지던 선황의 동생 발렌스가 죽고, 제국 서방을 책임지던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를 발탁해 그에게 동방을 맡긴다. 이후 그라티아누스가 반란으로 죽임을 당하면서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전체의 황제가 된다.

 

     제국을 위협하는 이민족들의 침입이 점점 더 강력해지는 것과 동시에, 이 시기를 특징짓는 것은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였다. 율리아누스가 로마의 전통 종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애썼던 것은 예외적인 움직임이었다. 388년 테오도시우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기존의 로마 종교의 공식적인 폐지를 결정한다.

 

 

2. 감상평 。。。。。。。        

 

     로마 제국은 착착 그 최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역사의 결과를 아는 후세인들이 보는 관점이고,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당면한 위기를 하나씩 대처하기 위해 애를 썼다. 출신도 배경도 성장환경도 다 달랐던 당시의 황제들이 동분서주하며 제국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후세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로마 말기의 황제들은 황궁 안에서 먹고 마시며 제국의 안위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열네 번째 책의 부제를 ‘그리스도의 승리’라고 붙였다. 물론 그녀의 이전 책들을 읽었다면 이 표현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 자신은 종교문제에 관해 꽤나 중립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표현에는 묘하게 비꼬는 뉘앙스가 담겨있는 듯하다. 진짜 그리스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꽤나 늘 자기들끼리 싸우면서도 기독교를 제국통합의 기치로 삼고자 했던 황제들 덕분에 결국 황제들까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제국의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식이다.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유물론자인 저자의 종교적 이해는 대단히 제한적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 더 자주 푸념처럼 등장하고 만다. 결국 대단히 피상적인 관찰과 해석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쯤 해서 저자가 이 시리즈를 내면서 자신을 역사가가 아니라 아마추어 역사학도로 소개하는 목적이 짐작이 간다. 역사가로서 역사책을 저술한다면 그가 결코 절대적으로 객관적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객관적 관점을 띄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마추어 역사학도라면 굳이 그런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 책 자체는 역사가처럼 서술하면서 독자들의 저항감을 낮춰두고는 틈틈이 자신의 생각을 객관적 서술인 것처럼 집어넣는다. 그래도 누군가 이에 반론을 제기한다면 자신은 전문가가 아니라 아마추어일 뿐이라고 한 발을 뺄 수 있다. 대단히 영리한 자리잡기이다. 아무튼 저자는 영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아예 포기하고 있는 듯 한데, 이 점은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한 축을 스스로 내차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시오노 나나미가 책을 재미있게 쓰고 있지 못하다(책 자체가 아니라 책을 쓰는 저자의 심적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애착을 갖고 쓰고 있는 로마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시기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날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의 마음과 비슷할까. 고대의 많은 역사가들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는지, (자기가 생각하기에) 책의 대상이 되는 국가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붓을 꺾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꿋꿋이 이야기를 연결시켜나가고 있는 나나미 여사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열네 번째 책은 ‘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부분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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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버러지 2006-07-04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미의 편향적 역사관점은 독자인 나로서도 이제 슬슬 짜증이 나게 만든다. 그녀는 마치 로마는 원래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로마다와야 하고, 14권의 로마답지 못한 기독교 동화과정은 로마사에서 없었어야 할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찌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마는 극단으로 흐르는 것은 오히려 공감을 잃게 만드는 약점이 있다

노란가방 2008-10-01 19:05   좋아요 0 | URL
저도 동의합니다.
이전 책들에서 저자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원칙을 깨뜨리고 있죠.
후세의 관점으로 과거를 억지로 재단하려는 태도..
 
긍휼
헨리 나우웬 외 지음, 김성녀 옮김 / IVP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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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 중 하나는,

우리가 이전 어느 때보다도 세계의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으나

그것에 반응하는 비율은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 요약 ]

 

        인간은 과연 긍휼을 베풀기를 좋아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기꺼이 긍휼을 베풀기 좋아하는 부류에 넣지만, 왜 여전히 이 세상은 폭력과 분열, 외로움, 상처로 찢겨지고 있는가. 헨리 나우웬은 긍휼이란 상대방과 함께 고통받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리고 이런 의미를 알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피하고 싶은 것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긍휼이란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긍휼이야말로 우리가 온전히 회복해야할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말한다. 긍휼을 통해 우리의 인간성이 충만한 데까지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먼저 서술한다.(1부) 하나님이야말로 진정한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기꺼이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으시기 원하시는 분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자신을 비우시고 우리 곁에 오셨다. 예수님의 이 낮아짐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제자이다.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면 우리는 이제 경쟁적인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긍휼을 베풀며 살 수 있게 된다.

 

        2부에서는 긍휼이 실제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긍휼은 자신의 약점을 기꺼이 내보이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긍휼을 가진 사람은 자발적으로 ‘안정’으로부터 ‘불안정’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들은 결코 ‘평범한 한 사람’으로 적당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긍휼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3부) 이 훈련은 인내와 기도, 그리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특징 지워진다. 그들은 조급함에서 벗어나 충만한 시간을 살아가게 되며, 기도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린다. 또, 악에 대해 정면으로 싸워나가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 감상 ]

 

        언제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헨리 나우웬의 책. 이번 책에서 그는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악의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 자체가 형이상학적인 원리들의 무미건조한 나열들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우웬의 책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실제적인 고통과 불의, 슬픔의 원인을 고민한다. 그가 내리고 있는 진단은 사람들이 긍휼이란 것을 베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긍휼을 갖도록 해야만 한다. 과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성직자로서, 헨리 나우웬은 사람의 원래 모습에서는 도무지 해결책을 이끌어낼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인간은 누구나 너무 경쟁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에서 배울 것을 요청한다. 그래야만 이 상황에 반전의 기회가 생길 수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직접 살고 있는 헨리 나우웬이기에, 그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부분을 읽더라도 쉽게 저자를 추궁할 수 없다. 사실 그들이 갖는 불만이란, 그의 말이 지키기에 너무 어렵다거나,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원래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상을 갖는 사람에게 무의식적인 경외감을 품기 마련이다. 이번 책도 거의 비슷하리라. 헨리 나우웬은 아예 사람들에게 경쟁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긍휼의 삶으로 들어올 것을 초청하고 있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우웬이 제시하는 길과 이상들은 - 그의 사고의 근본인 성경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 이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들과는 거의, 아니 정반대에 서 있다. 나 역시 경쟁적인 삶의 태도로 살아왔고, 내가 나의 삶을 계획하기를 원했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진정한 긍휼의 자리로 가기 위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멀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고통을 받기 위해, 지금의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더 낮은 자리로 움직이는 것. 책을 일고 난 뒤 머릿속은 고민들로 가득 찬다. 결국은 내가 나가야 할 자리가 그 곳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그 자리를 향해 발을 내딛을지도 모르겠다.

 

         헨리 나우웬의 다른 책보다, 약간 문장들이 깔끔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번역자의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것은 아닌데, 어딘가 사람을 쭉 빨아들이는 면이 좀 부족해 보인다.

         이 책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점은, 약한 자와 함께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불의와 싸우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칫 소위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이들의 오류 - 인간의 현실상태 개선을 구원과 동일시하는 -에 빠질 수 있으니 말이다.(물론 저자는 이 부분을 옳게 분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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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노크소리 믿음의 글들 193
클레이본 카슨 외 지음, 심영우 옮김 / 홍성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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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제 교회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은

교회는 국가의 주인도 시녀도 아닌 국가의 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국가의 안내자이자 비평자가 되어야지

결코 국가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선지자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면

도덕적?영적 권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한낱 사교 단체로 전락하고 말 게 뻔합니다.


 

 [요약]

 

        흑인인권운동가(흑인으로서 인권운동을 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흑인을 위한 인권운동을 했다는 의미일까. 아마 둘 다 해당할 듯)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요한 설교들을 편집해 놓은 책이다. 전에 읽었던 ‘마틴 루터 킹’이라는 책이 그의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한 ‘연설들’을 주로 모아 놓았다면, 이 책은 그의 ‘목사’로서의 면보가 부각되는 ‘설교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 감상 ]

 

        채 마흔 살이 되기도 전에 암살을 당한 젊은 목사.(서른아홉에 암살당함)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설교에서 느껴지는 힘은 그의 나이를 잊어버리도록 만든다. 비록 책으로만 읽을 수 있었지만, 읽는 내내 킹 목사의 외치는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듯 했다. 어떻게 이렇게 힘이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이런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성경의 이야기를 단순히 ‘그 이야기’로만 건조하게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늘, 나의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킹 목사의 놀라운 솜씨가 매우 인상적이다.

 

        비록 ‘설교’라고 하지만, 그의 설교에는 사회적은 관심이 배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의 내용은 그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다. 그의 설교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세대가 반드시 회개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악인들의 신랄한 말과 폭력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주위에 앉아 때를 기다리라고 말하는 선인들의 무시무시한 침묵과 무관심을 회개해야 합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국가 권력의 협박 앞에서도 성경의 진리에 입각한 메시지를 담담하게 선포하는 용기. 매력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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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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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갈증은 일주일을,

허기는 이 주일을 참을 수 있고,

집 없이 몇 년을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외로움은 참아낼 수 없다.

그것은 최악의 고문, 최악의 고통이다.

 

[요약]

 

        꿈 많은 브라질 소녀 하나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몇 번의 풋사랑에서 실패를 했던 마리아는, 그 문제들을 잘 정리해줄 좋은 조언자를 만나지 못한 채 보냈고, 그 결과 사랑에 관한 한 자신을 옭아매는 소녀로 자란다.

 

        19살이 되던 해, 마리아는 휴가 차 갔던 해변에서 한 외국인을 만난다. 그는 스위스의 클럽에서 브라질 식의 삼바 댄스를 출 댄서를 구하던 중이었다. 마리아는 그의 눈에 띄어 스위스로의 여행을 떠난다. 얼마 간 그 곳에서 댄서 생활을 하던 마리아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무단으로 결근을 했고, 가게에서 쫓겨나게 된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마리아. 그녀는 모델이 될 꿈을 품고, 자신의 사진을 여러 곳에 보낸다. 몇 달이 지나서야 온 전화. 하지만 전화의 내용은 그녀가 기대하던 내용과는 달랐다. 전화의 상대는 그녀와의 하룻밤을 사려는 남자였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현명할까? 마리아는 고민을 하지만, 1000프랑이라는 거금의 돈을, 그녀는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날부터 마리아는 몸을 파는 여자로 살아간다.

 

        코파카바나라는 가게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마리아. 그녀는 하루에 세 명의 남자에게 몸을 파는 대가로 900프랑의 돈을 번다. 수많은 사람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오직 돈을 벌어 고향에서 농장을 가꿀 생각에만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마리아에게, 어느 날 랄프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랄프는 화가였다. 마리아에게서 ‘빛’을 발견한 그는, 급격히 마리아에게 빠져든다. 처음에는 경계를 취했던 마리아도, 조금씩 랄프에게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진정한 정신적 사랑을 경험한다. 오랫동안 자신을 사랑으로부터 ‘분리’ 시켰던 마리아도 마침내 랄프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감상]

 

        다시 읽게 된 파울로 코엘료. 이번 책은 섹스에 관한 책이었다.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성행위에 대한 묘사들은, 자연히 이 책에 ‘19금’이라는 등급표시를 붙이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리라. 왜 사람들은 성행위를 자세하게 묘사한 책에는 제약을 가하는 걸까? 아마도 코엘료는 충분히 이런 질문을 할만한 사람이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성(性)에는 성(聖)적인 부분도 당당히 한 축을 차지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인 ‘11분’이란, 파울로 코엘료가 생각하는 성행위의 지속시간이다. 고작 11분. 사람들은 그 11분을 위해 결혼을 하고, 직장에 나가고,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다.(저자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좀 억울하다고 생각한 걸까? 저자는 이 11분에 좀 더 성스러운 의미를 집어넣고 싶어 한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신적합일의 상징으로서의 성창(聖娼)을 인용하며, 성행위에 좀 더 신비로운 무엇인가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코엘료의 재능은 이런 주장을 매우 감미로운 어휘들을 사용해, 독자에게 부드럽게 전달한다는 점이다. 그 부드러움을 통해 기존의 가치체계(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적’인)의 허위와 가식을 공격한다. 코엘료는 ‘다빈치 코드’ 식의 ‘무식한’ 때려 부수기 식의 공격법을 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더 위험해 보인다. 코엘료는 ‘혼동시키기’라는 방법으로 독자의 사고를 뒤흔든다.

 

        상대적으로 성적인 부분에서 개방적인 유럽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쉽게 용납되기 어려운 성에 대한 관념이 책 전체에 걸쳐 매우 자유롭게 써져 있다. 반복은 이상함을 평범함으로 만드는 힘이 있는 법. 책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묘사되는 주인공의 매춘행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독자들에게 덜 이상하게 느껴진다. 반복되는 고통과 아픔은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못한다. 무서운 힘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은, 최근에 나온 ‘오 자히르’라는 책에 나온 것과 거의 유사하다. 인물들의 처지와 이름이 달라졌지만, 소재는 달라졌지만 핵심부에 이르러서 두 작품은 매우 유사한 느낌이다. 여기에 코엘료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한 ‘연금술사’라는 작품에서 말하는 것도 크게 보면 거의 같은 맥락이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처음의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There is nothing noble, in his no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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