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만찬 1
하비에르 시에라 지음, 박지영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그와 더불어서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이

실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점 역시 깨닫게 될 거요.

마지막 하나, 진실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라오.

 

 

 요약                                                                                                

 

        또 ‘제 2의 움베르토 에코’님이 나오셨단다. 책 겉장에 삽입되어 있는 사이비 종교 교주처럼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찍은 사진(하필 이렇게 나온 사진을 실은 이유가 뭔지..)을 보니 저자에 대한 기대감이 반으로 확 준다. ㅡㅡ;;


 

 

        저자는 이번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어디서 많이 봤던 설정이다. 달라진 점은 이번 이야기에서 레오나르도는 시온 수도회의 수장이 아닌 카타리파의 핵심요인으로 나온다는 것.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바로 이 ‘카타리파’이다.

 

        아무튼 레오나르도는 이 카타리파의 일원으로, 자신이 맡은 작품들에 카타리파의 비밀 교리들을 상징을 사용해 숨겨 놓았고, 누군가 이 사실을 알고서는 아고레로라는 가명으로 로마 교황청에 레오나르도의 작업을 막아야 한다는 편지를 보낸다. 이 사건을 맡아 밀라노로 파견된 종교재판부의 레이레 신부. 레이레는 그 곳에서 아고레로가 누구인지, 그가 경고하고 있는 일의 진상이 무엇인지 수사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수사는 좀처럼 진척이 되지 않았고, 실마리는 레이레 신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부터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최후의 만찬’에 숨겨진 비밀 상징.


 

 



↑ 이게 문제의 저자 사진..;;


 

 

 감상평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나로서도 특별히 할 말은 없지만, 문제는 소설이 사실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 말미에 번역자의 입으로 이 책은 80:20의 비율로 사실과 상상이 섞여 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니, 책의 내용에 담긴 특성상 나도 어쩔 수 없이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을 지적하는 ‘변증적’ 성격의 약간은 지루해질 지도 모르는 감상평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먼저 소설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카타르 파’에 대해 잠깐 설명이 필요하다. 책에는 ‘카타르파’로 번역되어 있는 이 이름은 아마도 영어의 Cathars를 음역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아는 신학서들에서는 모두 라틴어 Catari를 음역한 카타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아마도 그 당시 그들을 언급한 문서들이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가능한 현장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했다면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카타르’보다는 ‘카타리’라고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예를 들어,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를 영어식 발음인 시세로로 읽겠다고 우긴다면야 뭐 할 말은 없지만, 키케로 자신은 자기를 부르는 지 못 알아듣지 않았을까?)

 

        책에도 약간 실려 있는 것처럼, 카타리파는 중세에 등장했던 이단 종파 중 하나이다. 사실 카타리파의 성격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듯 하다. 어떤 학자들은 기독교의 다른 모습이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단지 기독교적 외형장식만을 차용한 ‘전혀 다른 종교’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카타리파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엄격한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세상은 선과 악의 전쟁터이며,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므로, 사악한 물질세계에서 선한 영혼의 세계로 탈출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교리적 문제 때문에, 비록 그들의 조직이나 행동들이 수도원적 생활이나 가난하지만 진실된 설교자들과 비슷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일찍부터 이단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보다는 바빌로니아의 종교인 마니교와 더 유사해 보인다.


 

 

        이 정도의 선지식을 가지고 책을 들여다보면, 저자는 책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배경부(당시의 종교적 분위기나 특정한 건물, 인물 등에 대한 묘사 중 일부)를 빼고는, 이야기의 스토리를 이루는 중요한 고리들의 대부분은 상상에 의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나마 사실관계에 있어서도 오류를 보이는 부분이 많다. 1권 96쪽의 주에 실려 있는 내용은 ‘영지주의(그노시즘)’이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자’라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그노시즘은 그리스어의 ‘지식’이라는 어휘인 ‘그노시스’에서 온 말로,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만이 진짜 지식을 가졌고, 그 지식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빈정대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비밀스런 지식~’ 어쩌구 하는 존칭의 의미는 들어있지 않다.

 

        또, 저자는 카타리파를 그노시즘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다시 그노시즘을 플라톤 사상과 동일하게 보고 있지만, 이들 사이의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보여주는 근거는 없다. 그저 비슷해 보이면 다 연결지으려는 진화론적 사고방식의 오류이다. 숟가락과 삽이 비슷하다고 해서 숟가락이 발전해 삽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99쪽에 나온 것처럼 ‘고태 카타리 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카타리파가 상징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2권 124) 저자의 설명에 대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교회의 신학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다. 예컨대 성경이 교회에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을 신의 계율을 어긴 일이라고 말한다고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며 주장하는 것(2권 137)은 저자의 편견이 반영된 설명일 뿐이고, 소설에 나오는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가 ‘위험한 신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설명(2권 181)은 ‘신학적 가치’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오해에서 비롯된 말이다. ‘나그 함마디 문서’가 사해사본보다 중요하다는 저자의 확신(2권 277)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도 나그 함마디 문서의 기록시기를 3, 4세기에 가깝게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초기 교회의 문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쯤 해서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책에는 자주 ‘고도의 지적 게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책이 끝날 때 까지 나는 도대체 그 ‘고도의 지적 게임’이 어디에 등장하는 지 발견하지 못했다. 문자에 숫자를 대입해서 원하는 단어를 만들어내는 케케묵은 수법이나(사실 오늘날에는 컴퓨터의 발달로 원하는 모든 단어를 이런 식으로 조합할 수 있다), 말하지 못하는 그림에서 자신이 원하는 말을 (‘상징’이라는 멋들어진 방식을 통해) 이끌어내는 수법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이런 방식들은 말 그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내용 밖에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이 치밀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해 갈 것이라는 기대는 종반부로 갈수록 점점 줄어들고 만다. 책에는 특별히 ‘사건의 진행’이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의 설정대로 이야기의 끝까지 거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많지만, 그들 모두가 사건에 충분히 개입되지는 못하고 있고, 내용의 진행과 함께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은 매우 적다. 책에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에 관심이 별로 없는 독자라면, 이내 질려버리고 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반부에 아고레로가 누구인지 찍었는데,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이 책을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의 중간쯤으로 소개하는 건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인물들이 중세에 살고 있다는 점을 빼면 ‘장미의 이름’과 닮은 점이 별로 없고, 교회를 뒤집을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의 발견이라는 허풍을 뺀다면 ‘다빈치 코드’와도 비슷한 점이 적다. 오히려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의 아류작쯤으로 보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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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인가
제임스 사이어 지음, 이나경 옮김 / 이레서원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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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저 정보를 얻겠다는 생각으로만 책을 읽는 행위는

원색적으로 표현해서, 독서라는 예술의 매춘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 。。。。。。。                                                     

 

        부제가 눈에 확 띈다. ‘세계관 탐색적 독서법’.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세계관’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데다가, 제임스 사이어라는 저자 이름까지 보고나자 당장에 사버렸다.


 

 

        책의 내용은 말 제목에 잘 나타난다. ‘천천히 읽는 방법’이 전부다. 책을 천천히 읽는데 무슨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묻는 당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으리라. 단순히 읽는 속도를 느리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저자는 한 편의 글(책)을 읽을 때, 단순히 훑어가며 개략적인 정보만을 얻어내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완독(緩督, slow reading)'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천천히 읽되 그 안에 담긴 저자의 세계관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저마다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며 글을 쓴다. 자신과 하나님, 훌륭한 삶, 인간 인식의 타당성 등에 대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전제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과 전달 방식 모두를 지배한다.’



 

        저자는 책의 내용에서 정보를 읽어내는 것만큼이나, 저자의 세계관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1장 전부를 이를 강조하는데 할애한 저자는, 2장과 3장, 4장을 통해 각각 시, 논픽션, 소설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잘 읽을 수 있는지를 약간은 따분하게 설명하고 있다.(워낙에 기초적인 부분이라고 느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5장은 모든 장르의 책과 글을 읽는데 공통적으로 필요한 ‘배경(컨텍스트)’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부분이고, 마지막 6장은 책을 읽고 새롭게 독서습관을 기르고 싶은 이들을 위해 책을 선택하는 부분부터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실제적인 독서지침들이 실려 있다.



 

 감상평 。。。。。。。                                                  

 

        방학을 하고 처음으로 손에 든 책이다. 책의 서두가 워낙에 흥미로워서 끝까지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었다. 세계관 탐색적 독서법이라는 부제도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놓쳐버리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평소에도 했었지만, 정확히 어떤 부분을 지적해야 하는지를 정리하지 못했던 차에 좋은 책을 만났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세계관 탐색적 책읽기’를 설명하는 1장 부분이다. 이 부분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책의 50% 이상은 소화했다고 보면 된다. 비단 책에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라, 영화나 만화, 일상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말도 이런 식으로 분석하며 이해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교묘하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이 시대의 많은 변사들에게 올바로 대응하기 위해서, ‘저자가 당연히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넘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하라’는 저자의 권고는 너무나 중요하다.

 

        장르별로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지를 설명하는 2장부터 4장, 그리고 5장의 부분은 아예 독서를 처음 하는 사람들을 지도하기 위한 부분으로는 유용하지만, 어느 정도 책 읽기에 익숙하고 ‘더 나은’ 책 읽기를 배우고 싶어서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에게는 약간 지루할 듯 보인다. 다만 6장의 경우에는 좋은 독서습관을 가지고 싶은 이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차피 이 시대는 우리가 모두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도저히 머리에 담아둘 수 없을 만큼 폭발적으로 지식과 정보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시대에 100권의 책을 대충 읽기보다는 10권의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아마 저자도 동의하리라.) 책을 읽고는 싶은데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방향을 잘 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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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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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이렇게 늘 서로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일까.

 

 

 요약                                                           

 

        열흘 전에 결혼한 한 쌍의 부부가 있다. 가장 달콤해야 할 시간이지만, 왠지 모르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 싸움이라도 한 걸까? 그런 종류의 냉기는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는 보다 미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무츠키. 의사를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그는 ‘곤’이라는 이름의 대학생과 동성연애를 하고 있다. 여자의 이름은 쇼코. 단순한 알콜 중독자라고 부르기에는 좀 모자란 감이 있다. 그보다 그녀를 더욱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어휘들은 ‘극단적인 조울증(조증과 울증이 반복되는 질환이다. 조증은 극단적인 심리적 고양기가, 울증은 반대인 극단적 저조기가 나타나는 증세)’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왜 결혼을 했을까? 무츠키의 아버지가 쇼코에게 한 말이 이 두 사람의 상황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 하다.


        “그 녀석과 결혼을 하다니, 물을 안는 것이나 진배없지 않느냐.”

 

        서로의 문제를 어느 정도 알고 결혼에 이르렀던 두 사람.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애를 쓰고 싶어 하지만, 본의 아니게 자주 상대를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고 만다. 이 두 사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아니, 두 사람에게 미래라는 게 있긴 한걸까? 


 

 

 감상평                                                         

 

        동성애자 남편과 극단적인 조울증 환자인 아내. 언뜻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심상치 않은 조합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이런 극단적인 조합을 그림으로써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책을 보는 내내 끊임없이 계속된다.

 

        무츠키와 쇼코는 결코 정상적인 부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쇼코가 뒤에 무츠키의 애인인 곤까지 자신의 부부 사이에 끼어 넣으려는 노력을 하는 장면에서 더욱 심화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결국 이런 식의 생활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순한 감정적 만족 그 이상이 뭐가 있는가. 너무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이 아닐까.

  


        이 소설이 던지고 있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가정’ 혹은 ‘부부’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배려 그 이상이다. 무츠키와 쇼코가 서로에게 잘해주고 싶어 하면서도 계속해서 상처를 주는 모습은 이를 보여준다. 결론부에 이르러서도 이 문제만큼은 해결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이 ‘순수한 사랑’ 비슷한 것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역자 김난주 씨의 말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뭐가 순수한 사랑이란 말인가. 동성연애자 남편과 조울증에서 비롯된 알콜 중독자 아내, 그리고 남편의 남자 애인이 함께 살 수 있도록 만드는 힘?

 

        결국 인간적 차원의 해결책으로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사랑’이다. 하지만 그 사랑조차 너무나 왜곡되어 있기에,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데는 많은 문제가 따를 수밖에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의 원리가 필요하다. 인간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도 결코 낼 수 없는 그것. 하나님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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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설공주 이야기 흑설공주
바바라 G. 워커 지음, 박혜란 옮김 / 뜨인돌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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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페미니스트의 입장(물론 이 단어는 대단히 넓은 스펙트럼을 포함하고 있기에 단순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이 책을 보면서 든 생각은 성평등을 목적으로 하는 페미니스트보다는 여성우월론자라는 느낌이 좀 더 강하다)을 가진 저자에게 기존의 동화는 매우 불만족스럽다. 기존 동화는 아름다운 여자들만을 좋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던 '마녀'를 악의 화신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여성을 어머니와 아내라는 '전통적' 역할로만 그리고 있는데다가, 심지어 동화의 주인공이 하나같이 남성이기 때문(근데 이게 동화의 책임일까? 동화가 쓰일 당시 사회 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이다.

 

     마침내 저자는 기존의 '남성우월의식이나, 남성적 입장에서의 편견이 강한' '잘못된' 이야기를 배격하고,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위해, 남성적 편견을 제거한, 대신 ‘페미니즘적 편견이 가득한 새로운 동화’를 이 책을 통해 써 냈다.

 

 

2. 감상평 。。。。。。。

 

     기존의 작품들을 패러디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하려는 시도는 이미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이 책의 경우는 지나친 목적성이 이야기의 문학성을 삼켜버린 듯한 모습이다. 좌파냐 우파냐 하는 이념적 지향을 떠나서, 이렇게 되면 문학적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예로 알라딘을 패러디한 한 동화에서 ‘여성 알라딘’은 램프의 지니에게 모든 무기를 없애버리고, 세금 징수원과 군인들을 양과 양치기 개로 바꿔버리고, 모든 궁전과 판잣집을 중간 크기의 집으로 바꾸라는 주문을 한다. 그렇게 했더니 군 지휘관들은 다른 일을 찾아가고, 백성들은 지배층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가 되었으며, 사람들 사이에는 빈부 격차와 상하 계급이 사라져서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 솔직히 이건 동화 보다는 20세기 초 어느 공산주의 국가의 선전물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각 이야기들 사이의 일관된 통일성도 부족하다 않는다. 초반의 이야기들에서는 아름다움을 선과 동일시하는 소위 '남성적 잣대'를 문제로 삼더니, 이야기의 후반에 가서는 진취적인 인어공주가 적극적으로 쟁취해서 '멋진' 왕자와 결혼한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물론 강조점이 달라졌다는 건 인정하는데,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을 얻기 위해 하는 행동은 비판의 대상이고, 여성이 멋진 남성을 얻는 과정은 칭찬받아야 할 행동인 건가? 너무 자기편의 위주는 아닌지...

 

     '퀘스타 공주'는 갖은 역경을 거친 공주가 마침내 시민혁명을 일으켜서 아버지인 왕을 대신에 '여왕'이 되었고, 그랬더니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다. 남성이 아닌 여성이 사회를 지배하면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환상.(박 뭐시기 대통령 때는 그래서 행복하셨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폭력까지도 감수 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저자가 주장하는 것들을 모두 모아 놓으면, 이야기가 될 수 없을 정도의 모순 된 사회가 탄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무엇보다도 가장 우려되는 점은, 이러한 이야기들에 내재된 위험한 역사인식이다.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억압해 왔으며, 교회는 이를 강화하는 도구를 제공했다는 것, 먼 과거 언젠가에는 아름답고 정의가 올바로 서는 모계 사회, 여신숭배 사회가 존재했다는 것이 그들의 역사인식의 주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채 확인되지도 않은 ‘가상의 아름다운 과거’를 설정해 두고, 그것으로 돌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식의 논의는, 원시공산사회를 운운했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만든다. 과연 여신을 숭배하는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가 고대의 일반적인 사회의 모습이었는가? 그리고 그리로 돌아가면 정말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여기는 건가?

 

     책 내내 하나의 걸고 넘어지기 좋은 '꼬투리'만 하나 발견하면 무조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우겨대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말은 되게 하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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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 상식사전 - 비범하고 기발하고 유쾌한 반전, 대한민국 1%를 위한 상식사전
롤프 브레드니히 지음, 이동준 옮김, 이관용 그림 / 보누스 / 200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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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제목에서 알 수 있든, 유머들이 실펴 있는 책이다. 당연히 ‘전혀’ 어렵지 않으며,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갈 때 들고 가면 딱 좋을 만큼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유쾌하다. ^^


        저자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이용해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을 수집했다. 때문에 이야기의 ‘내용’이 완전히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2006년에 새롭게 만들어진 책이라, 적어도 ‘신선한 감각’들이 담겨 있다는 점이 이 책만의 장점으로 꼽힐 수 있다.



 

 감상평                                                                     

 

        전부는 아니지만 내용의 절반 이상은 일상적인 대화나 강연에서, 또는 설교 시간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도입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몇몇 유머들은 특정 범주에 속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선택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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