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2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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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카이사르는 장발의 갈리아에 있다. 갈리아인들과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반발은 잠잠해질 것 같지가 않은 상황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정돈이 되어 가는 느낌이지만, 콜린 매컬로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전쟁이 과연 끝나기는 할까 하는 회의감이 좀 더 짙게 든다. 두 작가 모두 카이사르라는 인물에게 푹 빠져 있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이 시기를 보는 관점이 퍽 다른 게 재미있다.


갈리아 전쟁 후반부에서 카이사르를 가장 괴롭혔던 인물은 베르킹게토릭스(보통은 베르킨게토릭스라고 쓰는데 이 책에선 이렇게 표기한다)였다. 갈리아인이라고 통상 부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 협력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갈리아 하면 오늘날 중부 유럽의 대부분을 가리키는 넓은 땅이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갈리아 전역이 일치단결한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땅과 인구는 많지만 갈리아인들이 로마군에게 연전연패했던 것은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던 베르킹게토릭스는 이 불가능한 작업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는데, 그의 출신 부족이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좀 더 큰 부족을 이끄는 이들은 그가 앞으로 나서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고, 형식적으로는 머리를 숙였으나 내심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그가 아이두이족 같은 유력한 부족의 대표였다면 갈리아전쟁의 결과는 달라졌을까.


이야기를 읽어 나가면서 오늘날의 EU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2천 년 전 베르킹케도릭스가 꿈꿨던 갈리아의 통일(물론 EU는 당시 갈리아인에게 큰 위협이었던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의 땅도 포함되어 있긴 하다)이 마침내 실현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EU 내부의 알력과 각 국가별로 다른 정치적, 경제적 상황 때문에 다들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으니 여전히 EU가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지는 미심쩍다.





그래도 전쟁에서 수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모든 갈리아인들이 다 함께 들고일어난 것은 아니라도, 당장 모인 수만 해도 족히 수십 만 명이었으니, 제한된 수의 군대만 이끌고 갈리아 전역에서 싸워야 했던 카이사르로서는 가볍게 볼 수 없는 적이었다. 만약 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로마군과 대규모 회전을 벌이겠다는 생각만 안 했더라면...


갈리아 전쟁의 대미는 알레시아 공방전이 장식한다. 알레시아 요새를 둘러싼 로마군의 압도적 포위망, 외부에서 적의 지원군이 올 것까지 대비해 성을 둘러싼 방향만이 아니라 그 바깥에도 대비가 되어 있는, 어떻게 보면 도넛 모양으로 안과 밖에서 적과 맞서야 하는 일종의 배수진 비슷한 전술이었지만,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그 어려운 걸 해 냈고, 마침내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난다.


전체의 윤곽을 그리고 시간대 별로 변해가는 상황을 서술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시오노 나나미와 일종의 극으로서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콜린 매컬로의 방식은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차이를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로마인 이야기의 방식을 더 선호하는데, 어느 정도 선이해가 없이 보면 그냥 ‘치열하게 싸웠다’ 수준을 넘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사실 말이야 쉽지 포위망의 안팎에서 공격해 오는 적과 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배수진은 퇴로를 차단해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도록 아군을 몰아가는, 마지막 전술 같은 건데 이런 전술이 늘 유효하지 않다는 건 임진왜란 초기 조선 기마군을 사실상 전멸시킨 신립의 탄금대 전투가 잘 보여준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했던 건, 역시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카이사르의 능력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실제 작품 속에서도 그런 언급이 자주 보인다). 전적인 신뢰, 그리고 존경 어린 시선을 받는 장군은 그의 부대가 갖고 있는 힘 이상을 끌어낼 수 있다. 물론 그런 존경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의 “능력”을 여러 차례 보여주어야 했을 거고. 탁월한 리더는 단순히 말빨이나 심리조종이 아니라 확실한 능력 위에 공정함과 너그러움, 정치적인 감각 또한 갖춰야 했다.





한편 로마 본국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막장 행보가 계속 이어진다. “보니”라고 불리는 원로원 내 보수파들은 어떻게든 카이사르를 실각시키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그가 저지르지 않은 온갖 범죄혐의를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그의 적법한 요구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를 반역자로 몰아 일찌감치 포섭해 둔 폼페이우스를 동원해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시도까지... 결국 아마도 다음 편에 나올, 루비콘 도하는 보니파가 작정하고 카이사르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는 보니파도 뭐 대단한 것 하나 없었다. 그들 모두가 태생적인 귀족 혈통이었던 것도 아니었고(오히려 카이사르가 속한 율리우스 씨족이 대표적인 파트리키였다), 대표적인 반 카이사르파였던 카토는 평민귀족 출신으로 같은 보니파 내에서도 과하다고 여길 정도로 자기 고집에 빠져있는 유아독존적 인물로 묘사된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의 평정이 깨진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그러면서도 또 그녀를 잊지 못해 새 남편이 죽자 다시 그녀와 재혼을 하는 뭣도 아닌 그런 인간.


사실 곧 이어질 내전을 앞두고, 카이사르의 반대편에 서게 될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깎아내리고 있는 콜린 매컬로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갈리아 전쟁 내내 카이사르의 오른팔 같은 인물로 묘사되던 라비에누스는 야만적 성향이 강한 촌뜨기로(그는 내전이 시작되면서 폼페이우스에게 달려가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그가 폴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카이사르의 애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던(그리고 카토의 조카였던) 부르투스는 겁쟁이라 전쟁터는 늘 피해 다니면서 고리대로 돈벌이를 하는 데만 빠져있는 쫌생이로 묘사하는 식이다.


그리고 내전까지는 카이사르의 편에 서 있었지만, 훗날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던 안토니우스도 어느 정도 군사적 재능은 있었지만 허영심이 좀 과한 인물로 등장한다. 훗날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들이 보면 살짝 미소가 띄워지는 부분. 카이사르를 당장 제거해야 할 무슨 심각한 범죄자로 몰아가던 이들이, 정작 일상에서는 철저하게 비틀린 인물들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건 뭐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이야기가 점점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 그래도 아직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그날까지는 책이 여러 권 남아 있으니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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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의 성경
후스토 L. 곤잘레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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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 관해 믿고 보는 저자 후스토 곤잘레스의 새 책이다. 서문에 팬데믹 상황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정말로 최근에 쓴 책인가 보다. 제목에 나와 있듯, 이 책은 성경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성경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는지, 초기 기독교 시기를 배경으로 탐색해 보는 쪽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성경이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1부가 가장 재미있었다. 구약은 대체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일부 아람어 포함),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였다. 하지만 포로기 이후 신약시대까지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언어는 아람어였다. 신약은 처음부터 번역의 과정을 거쳐 쓰였던 것.


구약의 경우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거룩한 글로 사용해 온 책들과 대부분 겹친다. 하지만 여기에 외경이라고 불리는 주로 포로기 이후 쓰인 책들의 성격을 두고 이견이 생겼다. 70인 역에서는 이 외경도 중요하게 여겼기에, 전통을 따라 가톨릭교회에서는 외경도 제2의 경전으로 여긴다. 하지만 원문에 대한 연구를 중요시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유대인들의 인정해 온 히브리 성경에 실려 있는 책들의 권위만을 인정하려 했다. 결국 구약의 목록에 차이가 생긴 이유다.


처음 성경은 가죽 위에 써서 두루마리 형태로 말아 보관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코덱스’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책과 같은 형태를 일찌감치 널리 사용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 성경과 같은 책을 쉽게 찾기 위해서는 코덱스 형태가 훨씬 편하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성경을 장과 절로 구분하는 관행이 어떻게 나왔는지, 성경의 필사본들이 어떤 식으로 전달되면서 오류 생겼고, 그것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인쇄술이 발명이 교회의 신앙생활 방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등이 이어진다.


2부에서는 성경이 다양한 정황 가운데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3부에서는 성경의 내용에 대한 초기 교회의 해석법으로 시작해, 당대 중요하게 여겼던 성경 속 주제들 몇 가지를 검토한다.





책이 얇기도 하고, 자연히 내용도 개론에 가까운 쉬운 수준인지라 금세 읽을 수 있었다. 위에서 얘기했듯 흥미로운 내용들이 적잖이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큰 부담 없이 즐거웠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말씀”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각각의 시기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최선이라고 여기는 태도로 말씀을 귀하게 여겼지만, 또 지금 보기에 그들의 모습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을 띨 때가 있었다.


우선 인쇄기의 발명과 그로 인한 성경의 대략 출간이, 그 이전 시기 필사라는 방식을 통해 성경을 제작해온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 중 일부는 이 새로운 발명품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성경의 필사 자체를 영적 훈련의 하나로 여겨왔던 이전 시대의 관념을 반복하며 큰 문제가 생겼다고 우려를 표한다.


본질과 부수적 유익을 혼동하거나,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세대의 저항으로 볼 수도 있지만, 누구나 성경을 값싸게 손에 들 수 있는 오늘날, 그렇다고 사람들이 성경에 더 익숙해졌는지를 자문해 보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말씀을 읽고 쓰고 하는 행위 속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것들을 훈련하고 익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몸으로도 예배를 해야 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또 하나는 말씀예전과 성찬예전의 긴장관계에 관한 서술이다. 이방인들이 대거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시기에는 성경의 내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라도 말씀을 굉장히 강조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와 함께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는 논리로 말씀이 오히려 약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개혁자들이 가톨릭의 성찬 교리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가했던 데에는 어쩌면 이런 이유도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초기 교회 시기에 관한 내용이 주가 되지만, 자연스럽게 그와 연결된 이후 시기에 관한 내용도 언급되니 더욱 좋다. 저자의 간명한 문장이 복잡할 수도 있는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개론서에 가까운 책인지라 좀 더 자세한 세부사항을 알고 싶으면 다른 책을 펴야겠지만, 또 그렇다고 아주 단편적인 정보만 실려 있는 건 아니다. 성경에 대한 상식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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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 - 우리가 알고 싶은 우주에 대한 모든 것
미치오 가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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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다시 도전한 물리학 책. 뭐 그래봤자 대중교양서로 쓰인 책이라 아주 전문적인 내용은 아니다(그렇다고 내용이 쉽다는 뜻은 아니고). 책 제목에 “평행우주”라고 떡하니 써 있지만, 다짜고짜 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법, 책의 1부는 우주의 발생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우주론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다.


뉴턴의 고전역학에 기초한 과학은 초기설정값만 알면 앞으로 진행될 모든 일들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기계론적 우주관(일종의 숙명론, 예정론과도 비슷하다)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뉴턴의 이론에 (어떤 의미에서) 창의적인 파괴를 이뤄낸 아인슈타인에게서도 발견되는 태도였다. 시간과 공간마저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던 아인슈타인도 우주에 절대적인 실재와 진리가 있다는 주장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놈의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모든 게 흔들렸다. 어떤 원자의 물리적 위치와 운동값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그래서 우리는 모든 걸 확률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이 기발한 주장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기존의 주장을 완전히 폐기시키고 말았다. 물리적 최소단위인 양자의 세계에서는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일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저쪽에 빛보다 빠르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더 이상 세상은 기계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뉴턴의 고전역학이 통하는 것처럼 살고 있다. 사과는 여전히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우리는 그걸 중력이라고 부른다. 공을 던지면 저쪽으로 날아가지 던진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는 걸 볼 수는 없다. 물은 한 번 쏟아지면 다시 컵으로 담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될 확률이 다른 사건이 일어날 확률보다 무지막지하게 크기 때문일 뿐이다. 우주의 어딘 가에서는 아래로 떨어져 깨진 컵이 다시 식탁 위로 올라와 원래대로 복구되는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실제로 일어난다는 뜻과는 좀 다르다).





아무튼 이 양자역학을 파고들다 보니 좀 더 큰 그림도 보이기 시작했다. 우주에는 크게 네 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이 있는데, 이 중 나머지 세 개는 서로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중 가장 약한 중력은 도무지 다른 것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를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네 가지 힘의 상호관계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이론”이야 말로 물리학자들의 성배와 같은 목표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여기에 뭔가 실마리를 던져주는 듯하다. 다만 이 주장을 따라가려면 세상이 10차원이나 11차원쯤으로 되어 있다는 가정이 강력하게 필요하다(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건 현재로서는 검증할 수 없는 주장이지만, 일단 그렇게 가정하고 보면 꽤 많은 난제들이 풀리는 걸 보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느냐는 입장이 꽤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어딘가에서 평행우주라는 개념이 나온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어떤 양자는 동시에 이곳에도, 저곳에서, 아니 아예 우주 전체에 존재할 수 있다. 사람이 그걸 관찰하는 순간 하나의 위치값을 갖게 되는 거니까. 그런데 이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꺼낸 것이 평행우주론이다. 양자는 그것을 관찰하는 순간,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자리가 실현되는 다양한 우주로 분화된다는 설명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이 오렌지를 먹는 순간, 오렌지를 먹지 않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실현되는 우주가 이 우주와 독립적으로 생겨난다는 거다.(쉽지 않다)





사실 비슷한 내용의(그리고 두께의) 책을 앞서 두 권 정도 읽어봤기에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또 책이 출판된 게 지금으로부터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기에, 그동안 또 새롭게 발견된 사항들은 당연히 반영되지 않았다(물론 물리학계에서 최근 20년 동안 판을 바꿀 결정적인 뭔가가 등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책 제목에 평행우주라는 이야기가 떡 박혀 있으니, 이 쪽에 관해 좀 더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겠다 싶었다. 이 부분은 또 어느 정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고.


물리학계 일각에서 우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의식’의 중요성을 주장한다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가 대상을 볼 때 비로소 그 정확한 위치값이 확정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의 다양한 요소들이 실제로 그 자리에 있으려면 누군가 그것을 의식해야만 하지 않느냐는 취지다. 물론 이 주장이 저자를 포함한 자연주의자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꽤 신선한 내용이지 않은가. 왠지 오래 전 라이프니츠의 신적 조화 같은 것도 떠오르고.


주류 물리학자들에 의하면 이 우주는 언젠가 끝장이 나고 말 운명이다(사실 이건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대책으로 다른 우주로의 이주 같은 개념도 나오는가 보다. 다만 이런 주장은 아직은 그냥 아이디어쯤에 불과하고 아주 진지한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건, 우주에 별다른 섭리나 인간의 존재 자체의 필연성 따위도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저자의 태도다. 그건 과연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일까.


확실히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도 한 번 기분전환을 했으니, 이제 다시 인문학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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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04-21 0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 나랑 똑 닮은 도플갱어는 평행우주에서 우리세계로 떨어진 또다른 내가 아닐까 싶네요
 
- 탐욕의 대상에서 사랑의 도구로 그리스도인의 일상 중심 잡기 1
손성찬 지음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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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의 저자와는 학부 4년, 신대원 3년을 같이 다닌 친구다. 몇 년 전 개척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어느 샌가 책을 한두 권씩 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인기 있는 작가가 된 듯하다. 그 사이 한두 번 만나기도 하고 했던 것 같은데, 정작 책을 제대로 읽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이런 친분 관계가 서평에 영향은 전혀 주지 않았다. 물론 뭐 내가 정한 중립성을 지켜가며 리뷰를 써 온 것도 아니기도 하고, 이게 무슨 대단한 글도 아니니 애초에 상관 없기도 하지만.


한 해에 백 여 권 정도 책을 읽고 있지만, 그 중 설교집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작년 같은 경우 딱 한 권을 읽었는데, 유진 피터슨의 “잘 산다는 것”이라는 책이다. 그나마 그 책도 설교집이라기 보다는 교인들에게 쓴 일종의 목회서신 비슷한 것이었고. 그 전 몇 년을 검색해 봐도 설교집 리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설교집에 따로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설교라는 자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로 인해, 전개할 수 있는 내용의 범주와 깊이가 제한되기에, 탁월한 무엇을 얻기 쉽지 않기도 하고, 내가 그 자리에서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있지 않는 이상은 온전히 그 내용을 내 것으로 수용하는 게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읽을 만한 설교집을 만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손성찬 목사가 쓴 이 설교집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평가를 내려도 될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앞서 말한, 설교라는 자리가 안고 있는 상황적 한계 때문에 논지를 좀 더 깊게 들어가지 못하거나, 너무 날카롭지 않게 다듬었던 게 아닐까 싶은 부분이 보이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이 주제에 대해 깊은 고민과 그로부터 나온 통찰이 잔뜩 묻어난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설교는 제목처럼 돈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처음 세 편은 일반론적인 고찰로, 돈이라는 것이 기독교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다룬다. 그것은 그 자체로 복의 상징이라거나, 반대로 무조건 멀리해야 할 악의 결과물이 아니라 중립적인 도구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물론 과연 돈이 “중립적”인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들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도구로서의 돈은 쉽게 목적으로 치환된다. 이른바 돈이 신(우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매우 경계하며, 특히 복음서에서는 이런 방향을 바꾸어 돈을 하나님을 향해 사용하는 법에 관해 일부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반복이지만, 그 안에서도 저자의 통찰력이 언뜻언뜻 튀어나온다.


예를 들어 저자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에서, 주님이 그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시자 “심히 근심”했다는 구절에서, 그가 이제까지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겨왔다고 자부하던 생각이 허상임이 드러났다(58)고 지적한다. 또, 같은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다 팔아 나누어 주라는 명령에 관해 저자는 이를 “네가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을 버리고 비우라”는 명령으로 읽어내기도 한다(67).


책의 후반부인 4장부터는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다룬다. 사실 이 책의 진가는 이 부분에서 좀 더 두드러지는데, 단순히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하면 된다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날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인 근로소득과 자본소득의 비대칭성, 그리고 그 대표적인 부작용인 투기의 문제까지 직접 지적한다(해본 사람은 안다. 이런 주제를 설교의 자리에서 꺼내는 것이 어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그리스도인의 돈벌이에 관해 저자가 마무리 부분에서 하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윤의 결과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보다 조금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걸 기억하라는 부분이다. 이 정도면 젊은 목사 치고 꽤 용감한 발언이 아닌가.





이 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인상적인 구절들이 적지 않다. 사실 돈에 관한 성경 본문이라는 것이 은근 해석하기가 난해한 것들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용기 있게 그런 구절들 앞에 서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 주제에 관해서 교회 안에 온갖 얼치기 진단과 처방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만 해 줘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쉬운 부분은 여덟 번째 장에서 시도했던, 희년을 고리로 해서 좀 더 큰 사회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도가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뭐 한 편의 설교에서 다루기엔 조금 큰 이야기였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쉽고 짧은 문장에, 논리 전개에도 뭉개짐이 없다. 또, 책에서 중심에 두고 있는 돈이라는 주제에 대해 피해가는 바 없이 담백하게 직면하는 부분도 좋다. 썩 괜찮은 설교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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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소유하는 새로운 방법 - NFT로 만나는 예술과 콘텐츠의 미래
박제정 지음 / 리마인드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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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의 블라인드 이벤트로 골라온 책이다. 책을 포장지에 싸서 표지를 볼 수 없게 하고, 간단한 소개글 한 문장만 보고 대출을 하는 이벤트였는데, 나름 흥미로운 시도였다. 영화 블라인드 시사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참고로 이 책에는 “디지털 예술 혁명 소유를 넘어 가치의 공유로”라는 묵직한 단어들이 잔뜩 나열된 소개글이 달려 있었다.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듯, 이 책은 최근 유행 중인 미술품의 NFT화(化)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NFT란 Non-Fungible Token의 줄임말이라고 하는데, 풀이하면 대체불가능한 토큰이라는 뜻이다. 토큰하면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잠시 본 적도 있을 텐데, 버스 탈 때 가운데 구멍이 뚫린 금속재질의 동전 비슷한 것을 기리 킨다. 일일이 몇백 몇 십원 하는 식으로 돈을 내기 번거로우니 사전에 그 금액에 해당하는 토큰을 구입해 한 개씩 내는 식이다. 토큰이란 화폐 대용으로 사용하는 무엇을 가리킨다.


이 기술은 또 다른 최신 기술인 블록체인을 바탕으로 한다. 기본적으로 이 개념은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온라인상에서 어떤 데이터를 나타내고 사용하려면 그것을 저장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소위 서버를 구축해야 한다는 말인데, 기존에는 그 데이터를 관리하는 주체가 직접 서버공간을 만들어서 저장하고 관리를 해야만 했다면, 블록체인은 이 작업을 그 데이터에 연결된 모든 사람에게 분산시켜 저장하고 관리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게 뭐가 좋은가 하면 기존 방식에서는 소위 해킹의 위협이라는 게 늘 존재한다. 그리고 한 번 뚫리면 그 안의 데이터가 유출되어 개인정보라든지 중요한 데이터값의 임의적 수정이라든지 하는 피해가 생긴다. 하지만 블록체인에서는 애초에 이 해킹이 불가능에 가까운데, 어떤 데이터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그 네트워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데이터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체불가능한 토큰” 같은 개념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최근에는 예술품도 이런 NFT로 만드는 시도가 있다. 저자는 이런 시도가 가져올 수많은 장점들을 이 작은 책에 가득 채운다. 일단 NFT화된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굳이 무거운 분위기의 미술관 같은 데를 갈 필요가 없으니 개인의 인적 정보를 노출해야 하는 불편함이 없고, 예술가들은 각종 수수료(판매, 경매 과정의)를 떼지 않고 직접 작품을 판매할 수 있으며, 구매자도 작품을 보관하기 위한 환경(온도와 습도 관리 등등)을 애써 구축할 필요 없이 언제나 온라인에만 접속하면 볼 수 있어서(?) 편하다. 여기에 그 토큰을 구입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커뮤니티가 작가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도 있고, 자신이 구입한 작품의 작가를 홍보하는 서포터즈가 될 수도 있다는 내용도 보인다.


아무튼 여러 면에서 좋다는 말인데, 책을 읽으면서 정작 중요한 내용이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작품을 NFT로 구입(소유)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 걸까? 물론 책 후반에는 이와 관련된 기술적인 내용이 약간 실려 있지만, 정작 실제적인 묘사가 부족하다. 그건 어떤 작품의 이미지를 다운로드 받아서 모니터로 볼 수 있다는 것일까? 다운로드 쪽은 좀 다르지만, 모니터를 통해(각종 증강현실 기기 등을 포함해) 볼 수 있다는 것은 맞는 내용인 듯하다. 과연 그게 실제로 그 작품 앞에 서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경험일까?


텔레비전 화면이 아무리 발달하고 기술이 좋아진다고 해서 직접 경기장에 가서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것과 같은 경험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AI가 어느 정도나 발전할지는 모르지만, 그 냄새와 바람과 옆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강한 아드레날린의 분출, 처음 본 사람들과 같은 것을 바라보며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경험 같은 것들이 온전히 온라인으로, 디지털 기기로 재생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영양소가 포함된 알약을 삼키는 것으로 우호적인 교제와 함께 이루어지는 식탁을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도 단순히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과는 좀 다른 요소가 필요한 건 아닐까?


토큰 구매자들의 커뮤니티는 현재의 연예인 팬클럽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칫 그 안에서 작가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 행사를 하려는 시도나 악플러들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고, 또 저자가 NFT의 장점으로 꼽는 것 중 하나인, 복잡한 공부가 없이도 좀 더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폐쇄적인 커뮤니티 안 “똑똑이”들로 인해 또 다른 꼰대문화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현상에 관해 가장 우려 되는 부분은, 역시나 미술품의 NFT화와 그 거래라는 마당에서 벌어질 투기적 위험이다. 저자도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 현재 이 바닥은 미술품의 감상과 공유보다는 돈을 벌 수 있는 마당이 열렸다는 식의 투기적 심리가 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건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코인투기판으로 바꿔버린 앞서의 예를 봐도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저자가 예상하는 “예술을 소유하는 새로운 방법”은 “예술품으로 한탕 크게 버는 새로운 투기법”으로 전락할 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이를 우려했던 듯, 새로운 좋은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덧붙이지만 여전히 우려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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