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
유성준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큰 규모는 실제로 효과를 반감시킵니다.

그것은 오히려 반문화적이기 때문에

깊이를 가지고 문화로의 중독을 거부하고

진정으로 복음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세이비어교회는 숫자를 통해서 오는 힘의 유혹을 의도적으로 거부합니다."

 

 

. 요약 。。。。。。。              

 

     대형 교회가 곧 좋은 교회로 여겨지고 있는 요즘, 이런 추세와는 정반대로 나가는 교회 공동체가 하나 있다. 바로 ‘세이비어 교회’이다. 세이비어 교회는 작다. 교인으로 등록된 사람이 고작 수십 명(지금은 좀 더 늘어났을지 모르겠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작은 교회가 다른 수 천, 수만의 교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세이비어 교회만의 철저한 훈련과 올바른 비전의 제시가 이 놀라운 일을 일으킨 원동력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세이비어 교회를 탐방한 저자가 그 교회에서 받은 감동을 나누고, 교회의 몇 가지 사역들을 소개함으로써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종의 교훈을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였다.

 

 

 

     자원봉사자들이 무보수로 매년 7,000시간씩 봉사를 함으로써 운영되는 무료 병원인 ‘콜롬비아 로드 진료소’, 노숙자들을 돌보고 보듬어주기 위해 세운 ‘그리스도의 집’, 마약과 알콜 중독자들을 위한 ‘사마리아인의 집’, 인근의 낡은 아파트 두 동을 구입해 집이 없는 이웃들에게 저렴한 임대료로 보급하기 시작해 이제는 수십 동의 아파트를 사용할 수 있게 발전한 ‘희년 주거사역’. 빈민지역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만나 주거사역’ 등, 이름만 들어도 크고 놀라운 일들을 어떻게 그 작은 공동체가 추진하고 있었을까를 설명하는 1장과 2장이 지난 후, 저자는 잠시 논의를 밖으로 돌려서 교회사 속에서 나타난 공동체 운동의 흐름을 살피며 세이비어 교회와 같은 시도가 역사적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3장) 4장부터 6장까지는 저자가 받은 감동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바람직한 교회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 감상평 。。。。。。。          

 

     오랜만에 멋진 교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소위 ‘성공하는 교회’, ‘부흥하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교인 숫자가 많이 늘고, 큰 건물을 지은 교회들을 소개하는 책은 많지만, 정작 성경에 나온 정신과 비전에 충실한 교회를 소개하는 책은 생각보다 드문 것이 현실인데, 이 책은 달랐다.

 

     세이비어 교회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교회의 외형보다 본질에 충실하고자 애쓰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되고자 노력을 안하는 수준이 아닌, 아예 사람이 늘어나는 것 자체를 경계하는 고든 코스비 목사의 생각은 약간 충격적이기까지 했다.(물론 나는 교인이 늘어나는 현상 자체까지를 부정적으로는 보지는 않는다.)

     또 한 가지를 꼽는다면 세이비어 교회의 폭넓은 사역이다. ‘나눔과 섬김’이라는 비전 아래 이루어지는 여러 사역들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이 세상에 실현하는 현장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이비어 교회와 같은 시도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고무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세이비어 교회 자체에 대해서는 많은 도전을 주는 책이지만, 책 자체로서의 구성이라는 면에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은 세이비어 교회의 사역들을 설명하는 책인가, 아니면 세이비어 교회에 관한 저자의 감상을 쓴 책인가. 저자는 이 책의 장르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책을 만들고 있다. 세이비어 교회의 사역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저자의 감동과 의견이 나오는가 하면, 교회의 인물들의 자서전에 자신의 자서전을 끼워 넣기도 한다. 때문에 책의 흐름이 자주 끊어지는 듯 한 느낌이고, 책이 좀 가벼워 보이기도 한다.

     두 번째로 교회사에 관한 저자의 사관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감리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저자이기 때문에 감리교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까지는 뭐라 하기 어렵지만(사실 감리교가 영국사회에 일으킨 혁명적인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고대의 몬타누스와 같은 인물까지 호의적으로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책이 설명하는 내용은 참 좋지만, 저자의 약간은 성가신 개입이 몰입을 살짝 방해하는 책. 과유불급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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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존 몰리뉴 지음, 최일붕 옮김 / 책갈피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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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러한 갈등을 푸는 길은 오직 하나,

노동자들이 착취의 효과에 맞서는 싸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산수단을 손에 넣고 노동력 판매를 끝장냄으로써 아예 착취의 싹을 도려내는 것뿐이다. 


1. 요약 。。。。。。。                      

 

     책 제목에 나온 것처럼 ‘도대체 사회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의 형식으로 쓰인 책이다. 저자인 존 몰리뉴는 실제로 영국 사회주의노동당의 당원이며, 자신이 신봉하고 있는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매우 강렬한 필치로 설명을 해 나간다.

      제 1장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2장에서는 사회주의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혁명’의 불가피성에 관한 설명을 한다. 나머지 장들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사항들에 대해 교정을 시도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2. 감상평 。。。。。。。                     

  
     생각보다 강력한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어서 약간 뜨끔했다. 사실 처음 책을 선택한 이유는 사회주의도 제법 타당한 면이 있음을 완곡하게 설명하는 책으로 생각했었다.

 

     저자의 현실 인식은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자본주의라는 악이다’라는 명제에 근거한다. 사실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 자체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는 이미 우리도 피부로 느끼고 있는 바이니, 저자의 주장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갖고, 없는 사람은 더 많이 잃어버리도록 만드는 것이 소위 ‘완전자유시장경제’의 가장 큰 폐단이 아닌가. 경제 공황으로 인해 값이 폭락한 멀쩡한 목화를 창고에 쌓아두다 못해 모두 불태우면서까지 값을 올리려고 했던 대자본가들의 눈에는 당장 입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 따위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 스미스 식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시장경제라는 환상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로 인해 ‘자본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생각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 놓으면 뭐하나, 인간의 욕심이 그것을 자신에게만 유리한 무엇으로 만들어버릴 텐데. 저자는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는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였다면서 사회주의라는 제도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탈린 같은 인간이 사회주의 치하의 국가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 제도의 허점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물론 저자는 전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간단히 반론을 펼지 모른다. 하지만 인류 역사 언제, 단 하나의 사상이 전 세계를 지배했던 시기가 있었던가? 그런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사회주의라면,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아니 몽환적인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혁명을 위한 폭력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제체제와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제거해버려야 한다는 식이다. 이래서야 비싼 집 가진 사람에게 세금 좀 더 걷겠다고 말하는 정부더러 빨갱이니, 좌파정권이니 하는 식으로 욕설을 해대는 우리나라의 모 정당이나 수구언론들과 무엇이 다른가. 둘 다 철저하게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만 든다.


     물론 누구나 자신이 믿는 바를 주장할 수 있고, 그것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누구도 비난할 무엇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그래서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생각을 신봉하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체제 자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히 그 사상도 당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제시되었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타당성도 인정받고 있기에 오늘날 세계의 많은 국가가 자본주의 요소에 사회주의 요소를 첨가한 ‘수정자본주의’를 근본 정책으로 택하고 있는 것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자체를 극단적으로 신봉할 때 나타났던 많은 문제들과 유사한 것들이 사회주의를 극단으로 이끌고 갔을 때도 나타날 것 같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어나갈 수록 더욱 강하게 든다.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책의 문장들은 참 깔끔하게 쓰였다. 일차적으로는 번역자와 저자 모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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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타락 구속 - 20주년 확대개정판
알버트 월터스.마이클 고힌 지음, 양성만.홍병룡 옮김 / IVP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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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오랫동안 고대했던 그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을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또한 그 나라가 도래했음을 증시하는 것이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특히 행하시는 예수님은 그 자체가 바로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한 증거였다.

 

 

     

. 요약 。。。。。。。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이 책은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설명하는 책이다. 목차를 보면 대략 내용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저자는 우선 ‘세계관’이란 무엇인지를 논하고(1장), 이어서 세계관적인 질문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답변을 한다. 저자는 특별히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세 가지 주제들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을 설명하고(2-4장), 5장에서는 그 실제적인 적용을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여준다.

  

 

   

. 감상평 。。。。。。。                    

 

     기독교 세계관의 고전 가운데 한 권이다.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진지하게 따져보지 않는 ‘세계관’이라는 주제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첫 번째 유익이다.

 

     특별히 ‘구조와 방향의 구분’이라는 한 장(章)을 할애해, 기독교 세계관의 직접적인 적용의 예를 다루고 있는데, 비교적 초기에 쓰인 이 책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매우 탁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에 익숙해서 잘 아는 사람을 소개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까? 거의 일 년 간 세계관에 대해 공부하고 나름대로의 연구를 지속해 온 내게 이 책은 참 익숙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책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도리어 이 책의 면면에 대한 분석이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사실 책의 비중 상 진작 읽었어야 했다)

 

     논리적으로 잘 짜인 순서대로,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쉽게 제시하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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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섬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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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살이 멈춘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 깊이 뿌리박힌 증오가

언제 또 다른 폭력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부질없는 보복을 막는 방법은 사람들 스스로 용서의 신성함을 깨닫게 하는 길뿐이었다.

 

 

 

 . 줄거리 。。。。。。。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단지 자신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아니 상대를 사람이 아닌 뱀이나 바퀴벌레로 여기는 일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은 백 명, 천 명 단위가 아닌 수십 만 명에 이르고, 한 번 그렇게 비인간성을 보여준 공동체는 씻을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계속하게 될 위험에 빠졌다.

 

 

 

     르완다 내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르완다 내전에서 살아남은 ‘임마꿀레’라는 이름의 한 여인의 경험담을 담고 있다. 후투족과 투치족이 공존하며 살아가던 르완다에 벨기에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그러했듯, 벨기에는 르완다의 식민통치를 쉽게 만들고자 두 종족 사이를 갈라놓았고,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독립 후, 다수이면서도 오랫동안 억눌렸던 투치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후투족에 대한 차별정책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잔인한 인종청소가 벌어진다.

 

     임마꿀레는 후투족 소녀이다. 후투족 여자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까지 받았다. 그녀의 가족은 이웃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지만, 정부는 투치족을 선동해 후투족에 대한 비인간적인 학살을 자행한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 둘째 오빠, 남동생을 모두 잃어버린 임마꿀레는, 한 투치족 목사의 도움으로 그 집의 욕실에 다른 여섯 명의 여자들과 함께 숨어 지내게 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임마꿀레는 끊임없이 그가 믿는 하느님을 찾으며 힘과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끝난 대학살. 하지만 임마꿀레에게 남은 일들은 적지 않았다.

 

 

 

 . 감상평 。。。。。。。                     

 

     아프리카 판 안네의 일기를 읽은 느낌이다. 사실상 인간이 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비이성적인 대학살의 한 가운데서 살아남은 저자의 이야기는, 무슨 특별한 미사여구나 아름다운 문장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을 폭도들의 손에 잃었고, 더구나 그런 만행을 저지른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와 가까이 지내던 이웃들임을 알게 되었을 때 임마꿀레가 느꼈을 충격과 공포가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무엇이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을 초래했을까? 무엇이 어린 아이들까지 사람의 목숨을 벌레 목숨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잔인성을 갖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이웃이 이웃을, 동료가 동료를 잔인하게 죽이면서도 웃고 떠들 수 있게 했을까? 임마꿀레는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들을 던진다. 비단 그녀가 아니라도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질문을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으리라.

 

     사실 르완다 내전이 아니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텔레비전 뉴스만 잠시 보더라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잔인한 범죄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성년자를 감금하고 성매매를 강요하는 파렴치범이 있는가 하면, 어린 아이를 성추행하고 범행을 감추기 위해 살인을 하는 인면수심의 악한들도 있다. 공사비를 떼어먹기 위해 부실공사를 하고 그 때문에 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이 되는가 하면, 조직 폭력배를 동원한 보복폭행으로 대기업의 회장이 구속되기도 한다.

 

     지금의 세상을 보면 인류가 무엇인가 명백히 큰 잘못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C. S. 루이스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정말로 인류는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과학과 이성을 새로운 신으로 믿으며 달려온 지난 1, 2백년을 지나면서 인류는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을까.

 

 

 

     살인자들에 대한 임마꿀레의 근본적인 진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녀는 살인자들이 악마성에 지배를 당했을 뿐, 사실은 그들도 또 하나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들의 타락한 심성은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에 마땅히 가해자로서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해결책에 있어서는 임마꿀레의 그것과 같은 생각이다.

 

     임마꿀레는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진정한 용서’를 제시한다. 극한의 사건을 경험한 임마꿀레가 이 상황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보복의 순환은 점차 강도가 높아지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 파괴의 고리를 끊어야 하며, 아마도 그 유일한 방법은 ‘용서’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데에는 그녀의 종교적 신념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신을 믿지 않으면서 인간을 이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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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07-06-0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인자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일단 임마꿀레는 종교적 관점에서 그들을 보고, 그들을 용서했어요.
관점은 약간 다르지만, 푸른숲에서 나온 희망여행을 보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 서로 용서하는 과정이 있어요. 종교적 관점을 떠나, '용서'를 생각할 수 있답니다. ^^

노란가방 2007-06-07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일단은 공통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할테니까요.
문제의 해결책으로서의 '용서'라는 방법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반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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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부는 창의적인 기업가들과 사회, 문화, 교육 부문의 기업가들에게

수많은 기회와 새로운 삶의 궤적을 제시해 줄 것이다.

또한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극심한 빈곤에 대한

참신한 해결책도 던져 줄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적인 미래로의 초대장에는 한 가지 중요한 경고가 담겨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위험이 산술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 요약 。。。。。。。                      

 

     저자는 새로운 시대에 나타날, 아니 이미 나타나고 있는 ‘혁명적 부’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이 책을 썼다. 인류가 이제까지 누려보지 못했던 엄청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 인류가 당하고 있는 큰 어려운 가운데 하나인 빈곤과 결핍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말한다고 잔뜩 바람을 잡고 있기에, 이 책을 진지한 마음으로 손에 든 독자라면 다음 내용이 기대가 되어 견딜 수 없게 된다.

 

     저자는 이어서 이 혁명적 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심층기반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2장) 저자가 말하는 혁명적 부의 심층기반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식. 이어지는 장들(3-5장)에서는 이 각각의 심층기반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해 부를 창출해 내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미래 사회의 경제 형태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프로슈머와 데카당스)을 설명한 뒤(6-7장), 이것들이 가져올 미래의 모습을 예상한다.(8장)

 

     저자가 보는 미래의 모습은 너무나 낙관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혁명적 부로 말미암아 지난 시대의 발전 양상이 그러했듯, 미래에도 큰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9장) 이 모든 것들이 가져올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말하면서(10장) 책을 마친다.

 

 

 

. 감상평 。。。。。。。                    

 

     언제나처럼 앨빈 토플러의 책은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있다. 무엇보다도 너무 두껍다. 늘 마음은 있지만 섣불리 읽기를 시작하지는 못하고 있다가, 지난 겨울방학을 맞아 알라딘에서 ‘이 주의 서평’에 뽑혀서 받은 적립금으로 확 구입해버렸다. 방학 동안 한 번 도전해 보자는 생각에서였지만, 웬걸.. 방학 내내 겉장조차 넘겨보지 못하다가 학기가 시작하고 나서야 읽기 시작했고, 여름방학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지금에서야 드디어 다 읽어냈다.

 

     책은 분량만이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느끼도록 만드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무엇보다 저자의 책이 주로 ‘경제’라는 영역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어려움 가운데 하나다. 나처럼 경제와는 아주 거리가 먼 전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역시 괜한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처음 가지고 있던 어려움은 금새 사라져버린다. 저자는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을 매우 작은 단위로 잘라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자주 놓쳐버리게 만드는 수 페이지짜리 문장 따위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또, 저자의 글쓰는 방식도 신문에 실려 있는 칼럼 수준의 평이한 문체를 즐겨 사용하고 있어서,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다.(이 점에 관해서는 어쩌면 번역자에게도 감사를 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주요 개념이자,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몇 가지 개념들은 ‘(시간과 공간의) 비동시성’, ‘프로슈머’라는 개념, 그리고 ‘지식’의 특성과 작용에 관한 새로운 조망들이다. 많은 요소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현대에서, 그 각각의 요소들이 정확한 시간이나 장소에서 만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비동시성의 개념은 오늘날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의 원인을 설명하는 주요 개념이다. 프로슈머는 오늘날 주류 경제학의 방법으로는 측정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소비자들의 무보수 생산활동을 가리키는 말로, 이어지는 지식의 개념과 연결될 때 혁명적 부의 근본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시대의 흐름을 살피면서 구조를 읽어내고,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을 찾아내는 저자의 예리한 관찰력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저자는 인류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그것은 진보를 향한 역사였다고 진단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 흐름은 앞으로도 영원무궁토록 계속될 것이다. 비록 여러 가지 위험에 대한 경고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과거에도 있었던 것들이고, 사람들은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매우 낙관론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고, 이는 과학적 합리주의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점은 거의 전적으로 논리적 추론이라기보다는 저자의 믿음에 근거한 주장이다. 물론 소위 ‘미래학’이라는 분야 자체의 특성이 ‘예측’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의 믿음이 개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저자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은 매우 강한 확신과 함께 제시된다. 이런 면에 있어서 저자의 생각은 과학이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던 근대의 이상주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저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부 창출 구조가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정도. 여기에 저자 특유의 애국심이 더해지면서 미국이 선도하는 혁명적 부가 만들어낼 유토피아를 찬양하는 데까지 이른다. 바로 이런 점이 저자의 주장을 신나게 따라가다가도 그 의견에 완전히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저자는 현실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저자가 분석해 놓은 도구들은 매우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의 중요성을 상당부분 간과하고 있으며, 대부분을 물질적인 것들로 설명하고 있다.(이런 유물론적인 면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주의나 현대의 과학만능주의는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저자의 예측에 매우 큰 변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언제나 ‘더 나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 전체는 언제나 논리적으로 합당한 결론을 따라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현명한 독자라면 유물론에 근거한 이런 낙관론을 주의하면서 저자의 주요한 고찰들을 지혜롭게 이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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