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 DVD 세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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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가 동물들에게 겪게 했던 것을 우리 자신이 겪고 있는 거야"

 

 

        밖이 보이지 않는 유리 상자 같은 곳에 한 남자가 갇혀 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여자가 또 그 상자 안으로 떨어진다. 그 둘은 그 곳에서 처음 만났다. 남자는 화장품 회사의 연구원이고, 여자는 서커스단의 호랑이 조련사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너무나 낯선 곳에서 만났다. 그 곳은 어디일까? 왜 그들은 그 곳에 있는 것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다른 소설에서 이미 이와 유사한 착상이 반영된 글들이 있었다. 때문에 책의 극 초반부에서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었지만, 너무 잦은 설정이 아닌가 하고, 반전(?)을 기대했으나, 역시나 같은 설정이었다. 그들은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사육 상자' 안에 갇힌 것이다. 


 

        일견 무슨 황당한 설정이냐고 반문을 할지도 모르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점은 그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제법 심각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베르나르는 이 책을 통해 ‘어려운 이야기꺼리’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에 관한 논의를 시도한다. 

        상자 안에 갇힌 두 사람의 시시각각 변하는 심리상태의 변화, 그리고 그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저자는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그리고 인류의 모험이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논의는 그들을 사육하던 외계인들이 핵전쟁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는 장면을 텔레비전(논리상 난감한 소설적 장치다.)을 통해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통해 촉발된다. 이제 남은 인간은 그들 둘 뿐이다. 스스로 자살을 해버린 인류. 과연 그들 둘은 2세를 낳아 인류라는 종을 지속시켜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지는가가 문제의 일차적인 초점이었다. 



        결론은 저자로서도 명확하게 내고 있지는 못하다. 상자 안의 두 사람은 그 문제를 두고 모의 법정을 열어(다분히 프랑스인적 기질이 강한 인물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연극이라니..) 결론을 내고자 한다.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계속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재판’의 논리적인 결론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리로는 상황의 변화를 전혀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변화의 요인은 감상적인 요소였다. 남자 주인공의 과거의 아픔을 들은 여자 주인공의 심적인 동요가 그들을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저자는 인류의 지속은 그런 논리적이고 당위적인 결론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과 심리적인 요소에 더 큰 영향을 받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다.) 



        책 전체에는 베르나르 특유의 유물론적인 관점과 반종교적인 관점이 남자 주인공인 라울을 통해 상당히 자주 표출되고 있다. 이 점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였다. 이는 뉴에이지적인 저자의 또 다른 경향과 어떻게 생각하면 배치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저자 자신에게는 큰 문제가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 제시는 시도했으나, 그 결론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풀어나가는 부분이 약간 부족했던, 20% 부족한 느낌이 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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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역사 21세기
마이클 화이트.젠트리 리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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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재미있는 시도를 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책의 필자를 22세기에 살고 있는 한 가상의 인물로 설정해 두고, 그의 시각에서 ‘지난 시대’인 21세기에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가상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자신이 보는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 책을 영 황당한 공상과학소설로 볼 수도 없는 것이, 저자들의 이력이 단순하지 때문이다. 책에 나온 저자이력이 모두 사실이라면, 한 명은 수백 편의 논문을 제출한 과학 교수(정확히 전공이 무엇인지는 안 나온다.)이고, 다른 한 명은 NASA의 주임 연구원인 것이다. 

     이런 저런 면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책의 정확한 성격은 일종의 미래학 서적과 유사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용이 아주 딱딱하거나 하지는 않다. 책의 형식은 역사서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상의 구체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내용 중 일부는 마치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듯 했다. 

 


 

    책에서 그리는 미래는 긍정적이지만도, 부정적이지만도 않다. 

    일면, 미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매우 긍정적으로 그려질 것처럼 보인다. 생명공학(특히 유전공학)의 발달로 의학 분야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최근 연구되고 있는 줄기세포와 같은 연구들이 완성되어, 대부분의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수명까지도 연장된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 정확히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그것으로 인해 치명적인 위험도 예상된다. 

    5장과 같은 부분은 과학으로 지은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들의 삶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한 가족의 구성원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그려진 5장은, 세계의 네트워크화, 대부분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로봇을 이용한 자동화, 재택근무, 의학의 비약적 발전, 각종 인간에게 만족을 주는 기기들의 등장 등, 말 그대로 과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미래형이자 가능성을 담고 있는 표현)’ 유익들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미래의 어두운 측면들도 그리고 있다. 20세기 초에 있었던 것과 같은 세계적인 경제공황과 빈부격차의 심화, 자연재해(지진), 사이비 종교가들의 불안심리 조장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대혼란’의 시기, 우발적인 핵전쟁이 남길 끔찍한 고통과 심각한 위협들,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대륙의 어린이들. 저자는 이런 것들을 그리면서 미래에 닥칠 수 있는 심각한 위협들로 표현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원천을 ‘인간의 선의’에서 찾는다. 그런 위기와 문제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 문제들을 인간 공통의 선의로서 풀어나갈 수 있는 위대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세계적인 핵확산 방지와 핵무기 감축을 위해 뛰는 한 의사, 기아퇴치세를 세계적으로 추진하는 어떤 사람, 하는 식이다. 
 




    요컨대, 저자들은 과학은 인간에게 전반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며, 일부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인간들 내부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선으로서 그것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 과학자다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관점은 이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책의 내용 가운데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은 매우 낮으며, 동성애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 부분은 매우 위험스러운 정도이다. 저자는 물질적인 면에만 집중할 뿐, 정신적인 영역, 영적인 영역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저자가 생각하는 정신적인 면이란, 기껏해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인간들의 모습에서만 나타난다. 

    과연 그럴까? 이렇게 우연적인 요소(인간의 선의)에 많이 기대어도, 미래라는 사건이 온전한 모습을 유지할까?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지, 나로서는 놀라울 뿐이다. ‘인간’이라는 새로운 신앙의 대상을 찾아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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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름으로
헨리 나우웬 지음 / 두란노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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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 대한 유혹이 막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사랑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대한 손쉬운 대체물을

힘이 제공하기 때문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나님 되는 것이 더 쉽고,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컨트롤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기독교 영성에 관한 여러 책으로 유명한 헨리 나우웬의 책이다. 이번 책은 21세기의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한 강연회에서 그가 한 연설을 엮은 것이다. 영성운동의 대가가 말하는 리더십의 요건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기대감을 품고 읽기를 시작했다.


        저자가 말하는 기독교 리더의 요건은 목차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세 가지였다. 지나치게 현실 지향적일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성 중심으로 임할 것과,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진실한 ‘목회’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자신이 무엇이든지 결정하고 이끌어간다는 우월적인 자리에서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는 자리에 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강연을 목적으로 한 글을 엮은 얇은 책이기 때문에 책을 읽어나가면서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헨리 나우웬 특유의 영성이 넘치고 감동이 배어있는 글솜씨 때문에, 내용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만든 책이다. 약간은 힘들고 어려워지는 요즘 내 사역에, 작은 위로를 받기도 했다.

        헨리 나우웬의 글이 이토록 감동적인 것은, 그의 뛰어난 영적 고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말과 일치하는 삶 때문일 것이다. 그가 쓴 글들에는 언제나 그의 치열한 삶의 고백과 경험들이 담겨 있는데, 이 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정말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아쉬운 점은,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용어들을 개신교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책의 서두에도 이를 미리 밝혀놓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헨리 나우웬의 다른 책에서 보이는 ‘저자의 체취’가 반감된 듯 하다. 카톨릭 사제인 저자의 글을 개신교 출판사에서 펴내려다보니까 아무래도 좀 거슬렸나보다. 그래도 번역의 제일되는 기본원칙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인데, 지나치게 이런 저런 용어들을 바꿔버린 것은,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결국 기독교인이라면 어디에 서든지 리더가 되어야 할 사람들 아닌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하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리 길지 않아서 어렵지 않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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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안경 - 쉽게 풀어 쓴 신국원의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
신국원 지음 / IVP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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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은 근본적 신념의 문제로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영성 또는 영적인 힘이다.
삶의 한 부분에 영향을 이치지 않고 종합적 안목에 영향을 미치므로
과학적 분석과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는 책이다. 유사한 내용의 몇 권의 책들을 봤지만, 다른 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쓰인 책이다.


        제목에 표현되어 있듯이, 저자는 세계관을 ‘안경’에 비유한다. 모든 사람은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 이해(先 理解)’적인 것으로, 이성적 사유와 과학적 연구 조사의 전제로서 기능한다. 누구나 인식을 하던, 하지 못하던 자신의 세계관에 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저자는 그렇게 한 사람의 생각의 전제가 되는 세계관 중, 가장 올바른 세계관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추천한다. 그리고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유명한 축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에 대해 살핀다. 아울러 각각의 축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실제적인 인식과 행동의 변화가 필요한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실제적인 조명은 이 책의 특징이면서 책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부분이다.


        특별히 오늘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기독교 세계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바른 세계관을 회복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보는 ‘세상’ 자체에만 집중할 뿐, 그 세상을 보는 자신의 ‘눈’에는 깊은 관심을 갖지 않기 마련이다.

        자칫 이런 이야기는 내용이 딱딱해지기 쉽다. 또, 지나치게 논의가 발전하면서 실제적인 삶의 정황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자주 예로 들고, 논의마다 적절한 실천적인 문제(특히 교회 공동체 내에서 있을 수 있는)들을 연결시키면서 논의가 공중에 뜨는 것을 미리 막고 있다. 덕분에 '머리에 쥐가 나는 일‘ 없이 논지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읽어내려 갈 수 있다.

        아직 세계관에 관한 책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먼저 추천하고 싶다.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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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부정
M. 스콧 펙 지음, 민윤기 옮김 / 김영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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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요점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질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고작 육체적인 현상일 뿐이다.

 

1. 요약 。。。。。。。                      

 

     이 책은 제법 무거운 주제인 ‘안락사’를 다루고 있다.

     1부에서 저자는 안락사의 정의에 대해 논하면서 그것을 색다른 정의인 ‘플러그를 뽑는 일’로 설명한다. 사실 여기에 적혀 있는 대부분의 내용은 ‘안락사’ 자체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고통’이라는 주제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를 옹호하는 주요한 근거로 내세우는 ‘끔찍한 고통’이 사실은 현대 의학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이제 충분히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죽음에는 반드시 육체적 고통이 수반되리라는 가정 하에 그 육체적 고통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서 안락사를 찾는다. 그러나 그들의 공포는 불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육체적 고통을 적절하게 완화시켜줄 수 있는 의학적 약품창고가 있으며, 우리의 약품창고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풍토가 개선되고 있고, 치명적 말기 질병 환자들에게 병원에서 나와 호스피스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음을 고려해 볼 때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음에 따르는 지속적인 공포를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2부에서는 안락사 논쟁에 뛰어드는 저자의 독특한 전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자신의 기독교적 배경을 이 문제에 대입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는 ‘사실’과 ‘가치’를 구분 지으려는 현대의 세속적인 흐름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어서 저자는 ‘죽음’이 사람의 성숙에 주는 많은 영향들을 설명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는지에 집중하라고 권한다.

     마지막인 3부에서는 좀 더 기술적(技術的)인 차원에서 안락사와 조력 자살을 구분한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기계론적 견해에 근거한 안락사 지지는 결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수 없음을 강하게 주장한다.

 


2. 감상평 。。。。。。。                    

 

     책을 읽으면서 가장 헷갈렸던 점은 저자는 안락사에 관해 찬성을 하는가, 반대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어쩌면 이런 이분법적인 견해를 저자는 썩 내켜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사고에 익숙해 있는 나로서는...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우선 이 부분을 정확히 알기가 참 힘들었다. 다 읽고 나서야 저자가 제한된 의미에서의 안락사를 ‘플러그를 뽑는 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플러그를 뽑는 일’이란, 치명적 질병의 말기에 이르러 어떠한 의료적인 시술도 환자를 치료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단지 기계장치들을 이용해 ‘억지로’ 육체적인 활력을 유지시키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강제적인 생명유지장치들을 환자로부터 떼어내는 일을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분명히 자살이나 그와 비슷한 다른 유의 생명을 끊는 행위와는 구별된다. 예컨대 뇌사 상태에서 뇌나 신체 조직이 극도로 손상된 상태에서 인공호흡장치와 각종 주사액으로 생명을 유지시키는 상태가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저자가 안락사의 정의 자체를 하기 싫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들의 속성상 한 번 정의를 내리면, 그 안에서 무궁무진한 빠져나갈 구멍들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본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저자는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영혼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이다. 동시에 오늘날 무사공평하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 또한 사실상 하나의 ‘판단’과 ‘가설에 근거한 믿음’이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부분도 중요한 내용이다.(이 부분에 관해서는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서평을 쓸 때 조금 더 서술하려고 한다.)

     미국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공교육에 끼친 결과로 ‘더 이상 학교에서 가치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는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가치’가 아닌 ‘정보’만을 가르치는 교육이 우리 사회의 도덕적 붕괴를 낳고 있다는 증거들이 점점 자주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책에 담겨 있는 주요한 함의는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논거로 사용되어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책에는 내가 갖는 견해와 다른 견해들도 몇 가지 등장하곤 한다. 육체적 부활의 부정이라든지, 제한된 의미에서의 안락사에 대한 찬성도 아직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주제를 다루는 저자의 조심스러우면서도 세심한 접근과, 저자의 주장이 담고 있는 실천적인 영역에서의 유효함은 결코 깎아내릴 수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안락사에 대한 보다 진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게 된 기회를 얻은 것 또한 개인적으로는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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