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의 안경 - 쉽게 풀어 쓴 신국원의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
신국원 지음 / IVP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관은 근본적 신념의 문제로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영성 또는 영적인 힘이다.
삶의 한 부분에 영향을 이치지 않고 종합적 안목에 영향을 미치므로
과학적 분석과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는 책이다. 유사한 내용의 몇 권의 책들을 봤지만, 다른 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쓰인 책이다.


        제목에 표현되어 있듯이, 저자는 세계관을 ‘안경’에 비유한다. 모든 사람은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 이해(先 理解)’적인 것으로, 이성적 사유와 과학적 연구 조사의 전제로서 기능한다. 누구나 인식을 하던, 하지 못하던 자신의 세계관에 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저자는 그렇게 한 사람의 생각의 전제가 되는 세계관 중, 가장 올바른 세계관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추천한다. 그리고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유명한 축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에 대해 살핀다. 아울러 각각의 축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실제적인 인식과 행동의 변화가 필요한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실제적인 조명은 이 책의 특징이면서 책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부분이다.


        특별히 오늘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기독교 세계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바른 세계관을 회복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보는 ‘세상’ 자체에만 집중할 뿐, 그 세상을 보는 자신의 ‘눈’에는 깊은 관심을 갖지 않기 마련이다.

        자칫 이런 이야기는 내용이 딱딱해지기 쉽다. 또, 지나치게 논의가 발전하면서 실제적인 삶의 정황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자주 예로 들고, 논의마다 적절한 실천적인 문제(특히 교회 공동체 내에서 있을 수 있는)들을 연결시키면서 논의가 공중에 뜨는 것을 미리 막고 있다. 덕분에 '머리에 쥐가 나는 일‘ 없이 논지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읽어내려 갈 수 있다.

        아직 세계관에 관한 책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먼저 추천하고 싶다.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혼의 부정
M. 스콧 펙 지음, 민윤기 옮김 / 김영사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문제의 요점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질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고작 육체적인 현상일 뿐이다.

 

1. 요약 。。。。。。。                      

 

     이 책은 제법 무거운 주제인 ‘안락사’를 다루고 있다.

     1부에서 저자는 안락사의 정의에 대해 논하면서 그것을 색다른 정의인 ‘플러그를 뽑는 일’로 설명한다. 사실 여기에 적혀 있는 대부분의 내용은 ‘안락사’ 자체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고통’이라는 주제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를 옹호하는 주요한 근거로 내세우는 ‘끔찍한 고통’이 사실은 현대 의학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이제 충분히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죽음에는 반드시 육체적 고통이 수반되리라는 가정 하에 그 육체적 고통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서 안락사를 찾는다. 그러나 그들의 공포는 불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육체적 고통을 적절하게 완화시켜줄 수 있는 의학적 약품창고가 있으며, 우리의 약품창고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풍토가 개선되고 있고, 치명적 말기 질병 환자들에게 병원에서 나와 호스피스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음을 고려해 볼 때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음에 따르는 지속적인 공포를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2부에서는 안락사 논쟁에 뛰어드는 저자의 독특한 전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자신의 기독교적 배경을 이 문제에 대입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는 ‘사실’과 ‘가치’를 구분 지으려는 현대의 세속적인 흐름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어서 저자는 ‘죽음’이 사람의 성숙에 주는 많은 영향들을 설명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는지에 집중하라고 권한다.

     마지막인 3부에서는 좀 더 기술적(技術的)인 차원에서 안락사와 조력 자살을 구분한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기계론적 견해에 근거한 안락사 지지는 결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수 없음을 강하게 주장한다.

 


2. 감상평 。。。。。。。                    

 

     책을 읽으면서 가장 헷갈렸던 점은 저자는 안락사에 관해 찬성을 하는가, 반대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어쩌면 이런 이분법적인 견해를 저자는 썩 내켜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사고에 익숙해 있는 나로서는...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우선 이 부분을 정확히 알기가 참 힘들었다. 다 읽고 나서야 저자가 제한된 의미에서의 안락사를 ‘플러그를 뽑는 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플러그를 뽑는 일’이란, 치명적 질병의 말기에 이르러 어떠한 의료적인 시술도 환자를 치료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단지 기계장치들을 이용해 ‘억지로’ 육체적인 활력을 유지시키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강제적인 생명유지장치들을 환자로부터 떼어내는 일을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분명히 자살이나 그와 비슷한 다른 유의 생명을 끊는 행위와는 구별된다. 예컨대 뇌사 상태에서 뇌나 신체 조직이 극도로 손상된 상태에서 인공호흡장치와 각종 주사액으로 생명을 유지시키는 상태가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저자가 안락사의 정의 자체를 하기 싫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들의 속성상 한 번 정의를 내리면, 그 안에서 무궁무진한 빠져나갈 구멍들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본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저자는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영혼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이다. 동시에 오늘날 무사공평하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 또한 사실상 하나의 ‘판단’과 ‘가설에 근거한 믿음’이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부분도 중요한 내용이다.(이 부분에 관해서는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서평을 쓸 때 조금 더 서술하려고 한다.)

     미국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공교육에 끼친 결과로 ‘더 이상 학교에서 가치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는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가치’가 아닌 ‘정보’만을 가르치는 교육이 우리 사회의 도덕적 붕괴를 낳고 있다는 증거들이 점점 자주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책에 담겨 있는 주요한 함의는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논거로 사용되어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책에는 내가 갖는 견해와 다른 견해들도 몇 가지 등장하곤 한다. 육체적 부활의 부정이라든지, 제한된 의미에서의 안락사에 대한 찬성도 아직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주제를 다루는 저자의 조심스러우면서도 세심한 접근과, 저자의 주장이 담고 있는 실천적인 영역에서의 유효함은 결코 깎아내릴 수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안락사에 대한 보다 진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게 된 기회를 얻은 것 또한 개인적으로는 큰 수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양용의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자신들의 스승께서는 극심한 고난과 수치스러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고 계시는데,

그 고난과 죽음의 길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더 놓은 지위에만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매우 역설적이면서도 충격적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복음서에 제시된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사항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에 대한 평신도와 목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음을 밝힌다.

        저자는 이 책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차분하게 정리’한 것이라고 밝힌다. 어떤 새로운 주장을 펴기 위한 논문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이제까지 발표된 여러 주장들을 저자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준거해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본문 자체가 많이 수록되어 있고, 그렇게 실린 본문들의 문맥적 의미를 살피는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 의미들의 실천적인 면까지 함께 실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라’는 지리적, 지역적 의미를 갖고 있기 보다는 다스림이나 통치와 같은 추상적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지닌다. 책의 나머지 부분에는 성경의 비유나 기적, 성령의 임함 등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교리가 올바로 우리에게 인식될 때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조목조목 살핀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에 실린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의 핵심적인 교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하다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이미 다른 책이나 자리를 통해서 이 책에 실린 내용의 대부분의 핵심적 사항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그렇게 알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여러 주제들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여러 자리를 통해 얻게 된 내용을 한 자리에서 정리된 모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물론 그렇게 될 경우 각각의 논의가 상당히 축약된 형태로 실릴 수밖에 없다는 단점도 있겠지만 말이다.)

        내용도 약간 수준은 있지만,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난해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문장 역시 처음부터 우리나라 말로 쓰였기 때문에 대체로 깔끔하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추천해줘도 괜찮을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회 IVP 조직신학 시리즈
에드먼드 클라우니 지음, 황영철 옮김 / IVP / 199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교회론은 자멸하는 것이고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분의 목표를 무시하는 것은 그분의 주되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제목과 저자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보수적인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다. 저자는 우선 성부, 성자, 성령의 교회라는 측면에서 교회의 본질을 살피고 있으며, 교회의 외적인 표지는 무엇인지, 교회의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이 주제들에 관한 성경적 서술은 매우 풍성하고 깊게 되어 있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이고, 성령님과 함께 하는, 세속의 단체들과는 분명히 다른 특별한 모임이라는 저자의 설명은, 오늘날 교회를 단순한 사교클럽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분명하게 집어줄 수 있는 책이었다. 

        교회 자체에 대한 서술에 이어서 나온 것은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성에 관한 서술이었다. 역시 보수주의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저자답게, 교회와 사회와의 첫 만남을 예배(예배에 있어서 세상의 문화를 얼마큼 받아들일 것인가)와 선교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어서 나온 것은 보다 실제적인 문제, 즉, 세상의 문화와 정치에 교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살핀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인 이번에 ‘문화연구’라는 강의를 들었기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자세하게 살펴 읽었지만, 아쉽게도 그다지 깊이 있는 서술을 하지는 못한 듯싶다. 관련분야의 전문가적 서술이라기보다는, 비전문가의 개괄적인 서술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세 번째는 교회 내에서 나타나는 각종 은사에 관한 설명이다. 저자의 은사에 대한 생각은 매우 제한적이어서,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은사는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설명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여성의 사역에 관한 견해도 매우 완고한 입장이다. 물론 아직 이런 부분에 관해 나만의 입장을 분명히 주장할 수 있는 시점은 아니다. 어쩌면 그런 입장이 되었을 때 나 또한 저자의 입장에 동의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은사들에 대한 지나친 제한은 오히려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인 생각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옅게 든다. 




        전반적으로 매우 잘 짜여있고, 교회론에 관한 건전한 교훈을 담고 있는 책이다. 청년들에게 교회에 관해 설명해 줄 때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듯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뽑아 든 책이다. 그리고 읽은 후의 느낌은, 역시 이름값은 하는 책이구나 싶었다. 책은 신선한 시도를 담고 있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여기서의 종교는 카톨릭이다) 사이의 대화라는, 나로서는 흥미가 생길만한 시도였다. 일반적인 대화의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를 근거로 한 난장판 식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의 관점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사고를 한 사람들 사이의 대화였기 때문에, 그 대화의 주제뿐만 아니라, 주제에 대한 대답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매우 깊이 있는 대화, 아니 토론이었다. 정치인들이 나와서 물고 뜯는 싸움박질이나 하는 삼류 텔레비전 토론과는 그 격이 달랐다. 하지만 그래서 더 우려가 되기도 한 대화였다.




        주제는 크게 네 가지였다. ‘세계의 종말’, ‘인간 생명의 기원’, ‘교회의 여성관’, 그리고 ‘비신앙인들에게 있어서의 윤리의 근원’이라는 문제였다. 하나 같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고, 형이상학적인 ‘근원의 문제’였다. 대부분의 대화에서는 에코가 보낸 공개서한에, 마르티니 추기경이 역시 공개적인 답신을 보내는 형식으로 이뤄졌고, 마지막 대화에서만 그 순서가 바뀌었다.

        에코는 묻는다. ‘신앙인들과 비신앙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희망의 개념이 존재합니까?’(20:9-10) 세기말을 앞두고 있는 상황(책이 만들어졌을 때의 상황)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들이 함께 시작할 수 있는 시작점이 과연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그런 개념은 어떤 식으로든 실재할 것’(26:5-6)이라고 전제한 뒤,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는 ‘고결한 가치’를 위해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고결한 가치’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매우 모호한 일치점만을 제시-이것이 한계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땅에서의 인류의 공동번영’을 위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었다.

        생명의 기원은 어디서부터 생각해야하느냐는 에코의 물음에, 추기경은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바로 그 지고하고 구체적인 생명과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47:12-14)이라고 옳게 지적 하면서, 그 시작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다시 ‘누구나 한 인간 생명의 운명과 대면할 때마다 느끼는 고민과 불안’(51:1-2)을 언급하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공통의 ‘그 무엇인가’를 기초로 접근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질문에서 에코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여성차별(?)’에 대한 논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교회의 입장을 묻는다. 추기경은 ‘신학은 가능성이나 <만일 ……라면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며, 계시 진리의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들에게 출발하여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82:20-23)이라고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 문제는 어떤 ‘신비’(84:20)가 있으며, 그 신비는 아직 교회에서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86:7-8)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네 번째 질문은 마르티니 추기경의 것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의 윤리의 기준은 신에게서 오지만, 비신앙인의 윤리는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과연 에코는 어떤 ‘논리적인’ 대답을 할 것인가. 놀랍게도 에코는 ‘제약에 대한 보편 개념’(104:14-15)이라는 것에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나간다. 그 관념은 자연적인 것(본유관념)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 하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타자에 대한 의식’(106:5-7)이 또한 있고, 거기서 파생되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삶의 계속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절대적인 의무감’이 윤리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대담자들이 당대의 지식인들인 만큼, 하나하나가 매우 깊이 있는 질문과 답변들이었다. 때문에 자칫 깜빡하는 사이에 논지를 잃어버리기 쉬웠다. 책을 읽고 가장 의아하게 여겨졌던 부분은, 충실한 인본주의자, 이성주의자로 여겼던 움베르토 에코의 대답이, 너무나 ‘종교적’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근원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면,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