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판미동 출판사 입니다.

도서『종교 없는 삶』의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종교 없는 삶의 의미를 포괄적이고 설득력 있게 조망하는 획기적인 책!”

<올해의 책(2014)> 퍼블리셔스 위클리

 

종교 없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 없는 삶』은 종교적 바탕이 강한 미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무종교가 제법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국내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저자는 빠르게 탈종교화된 유럽,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의 흐름에서 분명한 예외처럼 보였던 미국 역시 지난 25년간 무종교인이 두 배로 늘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무종교인이 전체 인구의 56.1%를 차지했다. 종교 없는 사람들이 인구의 과반을 넘은 것은 1985년 첫 조사 이래 처음 있었던 일이다. 저자는 또한 탈종교화의 원인으로 종교와 정치적 보수주의의 결탁, 종교지도자들의 부정부패,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 동성애로 대표되는 사적 자유에 대한 이해 증진, 인터넷과 SNS의 발달 등을 꼽는다. 이러한 지점들은 탈종교화 현상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지켜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벤트 참여방법>

 

1. 이벤트 기간  :  9월 8일 ~ 9월 16일 (출간 9/11)

   당첨자 발표  :  9월 17일

   발송  :  당첨자 발표 이후 정보 수집시 순차적으로 발송

 

2. 모집 인원  :  5명 

 

3. 참여 방법

- 이벤트 페이지를 스크랩하세요. (필수)

- 스크랩한 이벤트 페이지를 홍보해주세요. (SNS필수, url주소 댓글)

-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함께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 무성의한 댓글 참여는 당첨에서 제외됩니다.

 

4. 당첨되신 분은 꼭 지켜주세요.

- 도서 수령 후, 7일 이내에 '개인블로그'와 '알라딘' 에 도서 리뷰를 꼭 올려주세요.

 

 * (미서평시 서평단 선정에서 제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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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야심차게 나온 권력 시리즈 삼부작을 모두 읽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나갔는데 내용은 생각보다 많이 무거웠고, 잘 모르는 부분에 있어 배운 것도 많았다. 사회 거의 전분야에 걸쳐 국정농단이 이루어지고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보니 이런 기획도 나온것 같다. 권력과 검찰 시리즈는 가장 어렵게 읽혔는데 아무래도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였던 것 같다. 사법부를 함께 읽으며 조금 보충할 수 있었다. 권력과 검찰은 검찰청을 다루고, 사법부는 사법부를 다루는 만큼 권력및 자본과 결탁한 변호사집단에 대한 책이 아쉽다. 하나 나왔으면 한다.

 

권력과 언론은 예전부터 관심이 많은 부분이라 좀 더 재밌고 쉽게 읽혔다. 권력과 언론에서는 공영방송의 구조적 문제와 장악과정, 종편의 문제, 방송의 미래 부분을 잘 설명했다면 뉴스를 읽어드립니다는 아직 박근혜치하에서 나온 책으로 지상파와 종편문제를 재밌고 보다 심도있게 다루었다. 그리고 대학초년때 읽은 신문읽기의혁명은 한때 백분토론을 진행하기도 했던 손석춘씨가 쓴 것으로 신문과 권력의 결탁, 신문기사가 나오는 과정에서의 비민주성과 수직적 구조를 잘지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읽고 본격적으로 소개할 책이 권력과 교회다. 언론과 검찰에 비해 교회와 권력의 관계는 은근히 수면 아래에 있는 편이다. 검찰이 확실한 공권력이고 언론이 준 공권력이라면 교회는 민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민간의 영역이 공공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되며 올바른 정치세력에 의한 견제와 개혁도 어렵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라 할 수 있다. 교회가 정치권력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강한데 이미 대한민국의 대통령중 3명이 교회 장로였고(이승만, 김영상, 이명박), 국회의원 중 기독교신자 비율(가장 암울한 국회였던 19대는 무려 41.5%가 기독교 신자)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총인구의 20%를 밑도는 수치만이 기독교신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인구대비 기독교 출신의 정치권력층 비율은 매우 높은 편이다.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90년대 중반까지 성장일로에 있었고, 미국등 서방세계의 종교라는 점에서 선진적인 종교로 여겨지기도 했다. 한때 그들은 지친 도시노동자의 쉼터이자 사회안정망이기도 했고, 심지어 민주화 운동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영화를 잃은지 오래다. 각종 보수단체 집회에 적극 가담하거나 가담을 독려하는 노골적 설교를 하는 가 하면, 자신의 재산도 아닌 하느님의 재산인 교회를 과감히 친자에게 물려준다. 또한 세금납부를 거부하고 있으며 교회의 재정공개 및 조직의 모든 투명성을 거부한다. 그 결과 신도의 성장은 정체에 머무르고 있으며 사회적 신뢰도는 우리나라 3대종교중 압도적 꼴찌이다. 책은 교회의 이런 변질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시작은 거의 100여년 정도 전인 청일전쟁 러일전쟁시기이고 장소는 평안도다. 조선시대 평양감사 자리에 대한 선호가 컸던 만큼, 서북지역은 중국과의 주요 교역지로 물산이 풍부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하지만 그랬던 것이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이후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피폐화된다. 특히, 러일전쟁중 일본군의 진격로가 되면서 엄청난 수탈을 당한다. 당시 청일전쟁의 참상을 겪고 국가도 지켜지주 못하는 평안도 주민들에게 러일전쟁의 피난처가 되어준 것이 교회였다. 교회는 대부분 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것으로 당시엔 대사관같은 역할을 해 일본군이라도 교회로 피신한 피난민을 함부로 건드릴 수 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로 모여든 피난민들 사이에서 자연히 교회에 대한 신앙이 싹튼다. 서북지역의 교회는 미국인들이 세운 교회인데 문제는 이들이 근본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교회의 근본주의적 신앙은 초기 자본주의 시기에 급격한 도시화과정에 생성된 것이다. 미국의 도시노동자들은 도시화과정에서 굉장한 이질감과 폭력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신앙도 그렇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국노동자들의 삶과 서북의 조선인들이 처한 삶은 근본주의가 혹독한 현실과는 달리 절대적인 근본진리가 관철되는 세계에 대한 동경을 근본으로 하는 점에서 이들에게 호소력이 높았을 것이다. 서북지역은 경제력이 좋아 교육수준이 높은 지식인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서북지역의 교회신앙이 근본주의적 성격을 띠자 회의를 느끼고 사회주의쪽으로 대거 선회하게 된다. 이들이 빠져나간 서북지역의 개신교는 더욱 근본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해방 이후, 남과 북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서북지역의 개신교는 탄압을 받게 된다. 물론 북에서의 종교 탄압은 전방위적인 것이었고 개신교만이 그 대상은 아니었으나 이들이 다른 종교에 비해 다소 많은 탄압을 받았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근본주의적 성격에 많은 피해를 받았다고 여긴 이들 집단은 더욱 극단화한다. 그리고 이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적극 이용하기 시작한다.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은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남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주의 정권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군정은 남하한 개신교 목사에게 일본의 적산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불법적으로 불하하였고 이들은 이런 지원을 통해 강력한 우익, 반공, 친미세력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 유명한 백색테러단체인  서북청년단이 바로 이들의 지원을 통해 생겨난다. 청년단이 행한 학살과 만행은 실로 대단한데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50년 10월 북한 황해도 신천군에서 무려 3만5천의 민간인을 학살한 신천학살도 그 대표적 예다. 서북청년단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적 이유와 북한을 해방해야 한다는 종교적 정치적 사명감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중세의 십자군 같다고 해야 할까나.

 전쟁이후 남한의 개신교에서 이런 근본주의적 광풍은 부흥회로 변모하게 된다. 당시 남한은 사회기반시설의 붕괴와 국가의 사회안전망 체계 미비, 그리고 도시화로 수많은 도시 빈민들이 각종 질병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치유와 기적을 행하는 부흥사의 부흥회는 실로 대단한 세력을 이루게 된다. 하지많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이런 부흥회는 힘을 읽어갔고 부흥사들 중 일부는 대형교회를 이루어나가게 된다.

 한국교회는 당시 양적으로 매우 팽창해나갔는데 10년마다 신자의 수가 두배씩 증가할 정도로 엄청났다. 여기엔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교회의 경쟁력이 아무래도 타 종교에 비해 엄청나게 강했다는 것이 한몫하게 된다. 샤머니즘은 박정희의 탄압을 그리고 불교는 이승만의 정화운동으로 90년대 이전까지 사분오열된 상태였으며 천주교는 탄압은 없었으나 개신교에 비해 자본이 부족했다. 이에 비해 교회는 한국전쟁시기부터 국가가 외국단체로부터 받은 많은 후원금을 모으고 배분하는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타종교에 비해 많은 사회적 자본을 구축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자원과점 집단으로 자리 매김한 순간이다.

 이후 한국교회는 산업화과정에서 지친 도시 빈민을 수용해나가고 부재한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는 방법을 통해 급격한 성장을 해나간다. 여기엔 한국 개신교가 한국 근대화에 강력한 주체세력으로 도구적인 태도와 자본본위적이고 반인간적 태도를 견지해나간것도 한몫한다. 또한 사회적으로 많은 자본을 갖고 있었기에 엘리트 인재들이 교회에 의해 양상되었고, 또한 역으로 사회의 각 기관들은 교회출신 엘리트에게 상당히 의존하게 되면서 양자의 권력 밀월관계가 본격화 한다. 한편, 50년대부터 존재해온 부흥세력은 이 시기에도 존재했는데 이들은 주로 산기도원에 자리잡아 활동하지만 신도들의 의식이 성장하자 열광적이고 매우 근본주의적인 성격의 산기도원은 점차사라지게 된다. 이후 이들은 거리의 전도사로 활동하나 자신들의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교회로부터도 수용되지 못하자 태극기 세력도 극우집단에 합류하게 된다.

 성장일로를 거듭하던 한국교회는 90년대 들어 처음으로 정체와 적자를 경험하게 된다. 기존의 신자들이 무비판적이고 매우 수용적이었다면 새로운 신자들은 목사의 설교와 스타일을 알아보고 교회를 적극적으로 채택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주로 전후 베이비붐 세대로 강남에 자리잡아 교육수준이 높고 지대 상승으로 재산을 형성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이 지역에 교회에 몰려들어 새로운 교회가 생겨나는데 일부 목사들이 이들의 이런 다소 합리적인 상향을 파악해 새로운 대형교회를 성장시켜 나가게 된다.

 이외에도 교회들은 신자가 더 성장하지 못하고 수평적 이동만 가능한 상황에서 더 많은 신자들은 이끌어내기 위해 청년 결혼 알선이나 단기해외 체험 활동등 여러가지 상품을 개발 해내 성장을 유지해나간다.

 이렇게 성장해온 한국교회들은 여러가지 문제를 갖는다. 우선 교회자체가 계층적 문화적 필터링을 한다는 것이다. 과거 빈민 계층까지 수용하던 교회는 대형화하고 위치의 지대가 상승하자 사회 중상위계층들만 자리하며 나머지 계층은 버텨나가지 못하는 구조가 생성된다. 또한 목사들의 보수성향도 문제다. 이들은 북한과 동성애에 대해 매우 극단적인데 이 과정에서 성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편집하여 이용하고 이를 절대화한다. 이들의 이런 행태는는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고 내부의 비판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의 적을 찾는 전략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이렇게 닫히고 왜곡된 교회에서 한국 정치권력자의 상당수가 배출되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책은 교회의 개선 방법을 몇가지 제시힌다. 우선 수직적 권력구조를 깨는 것이다. 현행 교회는 목사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데 이들은 성서의 해석에 대한 독점권을 갖고 있으며 교회의 구조자체도 부채꼴로 목사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형태다. 이런 구조를수평적인 형태로개선하고 신자하나하나가 성서화화는 것이 수직적 권력구조를 깨는 방법이다. 또한 교회의 재분배적 기능을 강조한다. 한국 교회는 기복적 신앙으로 비판받지만 기복적 신앙은 종교라면 다 갖고 있는속성이며 복을 누구에게 분배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교회는 복을 일부 권력자에게만 배분분하며 이 과정에서 재정도 불투명해진다. 이를 타파하고 일부 교회의 세습을 깨어나가고 사회의 다수 빈민 계층에게 분배하는 기능을 되찾아나가야 한다.  

 이런 것들이 가능하려면 사회에서의 비판도 필수적이지만 신자하나하나가 비판의식을 갖고 깨어있으며 질문하고 경쟁해야한다고 책을 말한다. 책을 통해 교회의 역사를 고찰해보는 것과 한국인의 무속신앙과 종교에 대한 의식의 관련성은 매우 흥미로웠다. 하지만 제목과는 다르게 좀더 역사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권력과의 밀월관계에 대한 분석은 좀 부차적인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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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1 14: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1 1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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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군대를 다녀온 한국 남자라면 자신이 한때 '개'만도 못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건 비유적 표현이 아니고 정말로 '개'보다도 못한 경우인데, 우선 대우에서 그러하며(군견유지비가 일반 사병보다 더 많이 든다), 군사상 우선순위(넘쳐나는 60만 일반 사병보다 몇백마리에 불과한 군견이 더 회소하다)에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일반 병사는 항상 비인격적으로 취급받고 소모품에 불과하단 생각을 많이 하게되는데 일단 받는 급여가 말이 안되는 수준이고, 온갖 자유를 박탈한채 수용소에 가둬두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급여가 월100만원 이상으로 정상화되고 그걸 바탕으로 자유롭게 부대가 어디든 퇴근도 가능하고 휴대폰 사용도 가능해진다면 군내 인권문제는 단박해 해결되리라고 보는 편이다. 지금의 열악한 인권은 병사 하나에 대한  유지비용이 너무 적게 들고, 가둬놓고, 그것이 외부에 나가는게 막히고, 자기들끼리 가둬두어 일어나는 일이 대부분이다.

 평소가 이러할진데 전쟁이 난다면 어떠할까? 20세기 초반이라 아직 인권에 대한 개념이 정착하지 못하고, 귀족사회의 잔재가 남아있던 시기에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작년에 본 '낙엽이 지기전에'잘 나타나 있는 듯 각국 수뇌부와 군지휘관들은 큰 착각에 빠져있었는데, 설마 전쟁이 날까? 라는 점이고, 우리가 총동원령을 내리면 그들도 감히 겁을 먹고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나면 늦봄이 시작해 적어도 가을전에는 전격적으로 끝낼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었다.

 이런 1차세계대전을 평범하게 소모되는 프랑스의 남자들의 시각에서 풀어낸게 이번에 본 책인 '1차세계대전'과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이다.

 

 전쟁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갑작스레 붙은 총동원령을 보게 된다. 얼마전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총격사건으로 외교관계가 뒤숭숭하다건 알았지만 총동원령이라니. 남자들에겐 사형선고나 마찬기지인 총동원령에 몇몇 사람들은 처음엔 당황하지만 곧 애국심이라는 광기에 휩싸여 자발적으로 대부분이 전쟁터로 향한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지휘관들은 이미 개발된 전쟁기술이 전쟁에 미치는 영향을 너무나도 몰랐다. 기관총이 이미 도입되었음에도 질서정연하게 열과 오를 맞춰가며 적에게 다가가는가 하면 시대착오적이게도 창기병대도 남아있었다. 이들 모두는 기관총과 철조망의 밥이었다. 프랑스 군은 독일보다 더 어이가 없었는데 그들의 밝은 푸르른 군복은 보기에만 멋졌지 눈에 매우 잘 띄었으며 처음에는 철모조차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인들은 참호짓는 것도 무첫이나 서툴러 형편없는 참호를 구축했지만 독일 녀석들은 민족성처럼 나무기둥을 활용해 참호를 매우 멋지게 구축했다. 물론 그렇다고 참호안에서의 지옥같은 상황에 큰 차이가 있진 않았을 것이다.

 병사들은 헌병을 증오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멍청한 지휘관과 무책임한 장교가 호루라기를 불며 기관총 앞으로 돌격명령을 내렸을 때 죽을 것을 알면서도 뛰지 않는 자국 병사들을 쏜게 헌병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녀석들은 뛰는 속도가 느려도 쏘았으며 어쩌다 운좋게 살아남아 낙오상태에서 발견되어도 자국병사를 여러 혐의를 씌워 죽였기 때문이다.

 아군이 평소와는 다르게 심하게 적진을 향해서 포격을 하거나 사기를 올려주는 군수품이라도 나오면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이것은 기관총으로의 돌격 전신호이기 때문이었다.

 양쪽은 조금 도 전진하지 못한채 참호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며 양 참호의 사이에는 무인지대가 형성된다. 무인지대는 죽음의 공간으로 철조망이 쳐져있고, 돌격해서 죽은 병사들과 말이 썩고 있는 곳이었다. 간혹 무인지대에 죽어있는 우리 병사가 잘보여 사기라도 떨어지는 판국에는 멍청하고 무책임한 장교가 누군가를 내보내 그 시신을 수거하게 한다. 당연히 또하나의 시신을 만드는 일이었다.

 참호안은 무척이나 추웠고, 쥐가 끌었으며 시체들이 많았다. 한 병사는 밤새 추위에 떨며 손을 진흑에 파묻었는데 깨어나보니 아군의 내장에 손을 묻고 있었고, 그로인해 감염으로 인한 괴저로 죽는다. 당시 의학기술이 미발달하여 항생제가 없어 병사들은 내장을 보는 상처를 입으면 곧 죽는것으로 받아들였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아군과 적군의 내장을 보며 병사들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내장을 그토록 보호하지 못하고 간신히 담아두고 있었다는데 경악한다.

 1차대전엔 식민지 병사도 동원된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와 베트남의 병사를 동원했고, 영국은 인도의 병사들을 데려왔다. 미국도 흑인 병사를 데려온다. 그런데 그들은 흑인에게 무기를 주진 않았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여서 베트남 병사들이 하는 일은 무덤을 파는 일이었는데 베트남 병사에겐 차별적이고 치욕적이면서도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죽을게 뻔하니 자해하는 일도 생긴다. 한 병사는 다리에 상처를 내 그것에 오염물질을 넣고 다음날 군의관에 찾아간다. 그는 다행히 다리 하나를 잃고 후방으로 후송된다. 파리엔 남자라곤 없을 줄 알았는데 돈많고 힘있는 집 자식놈들은 당당히 후방에서 편안히 있었다. 한 병사는 친구가 후송에 성공한 오염물질을 너무 과감한 나머지 배주위에 넣었다고 괴사가 빠르게 진행되어 죽고만다.

 전장으로 동원되는 신병들은 날이 갈수록 어려진다. 신병들은 대개 오자마자 죽는데 대개의 경우였고 저주스럽게도 그녀석들이 가장 처음 하는일은 탈영병이나 약간의 의심이라도 받는 자국 병사를 처형하는 것이었다. 처형시에는 12발의 총을 쏘았는데 왜 인지는 모르겠다.

 죽음의 전쟁은 결국 끝이나고 천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았다. 병기의 발달은 눈이 부셨고, 사람들은 죽어갔다. 5백만 이상이 부상을 당했는데 대개 팔이나 다리를 잃기도 했으며 얼굴 부상을 당한사람도 적지않았다. 워낙 답답한 참호안이었으니 담배를 피거나 고개를 살짝 들다가 적 저격병에 머리를 당한 것이다. 대개 죽었지만 살아남은 이들의 부상을 흉측하기 이를때 없었다. 임란당시 왜군들이 조선인의 코와 귀를 전공으로 바치기 위해 산 백성의 코와 귀를 베는 일이 허다했는데 당시의 우리 모습과 프랑스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크타르디는 이처럼 전쟁의 참상을 잘 묘사했다. 타르디는 어렸을 적부터 1차대전에 참전한 할아버지가 이런 끔찍한 일을 겪고도 전쟁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은 것이 무척 궁금했었다고 한다. 우린 할아버지들이 전쟁에 대한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 착각하지만 사실 할아버지들은 전쟁에 대해서 영원히 잊고 싶었던게 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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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6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6-27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개만도 못 함은 군대뿐 아니라 사회, 직장에도 있습니다. ㅠㅠ 언제 우리가 개 같은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ㅠ
의도치 않게 비유가 된 개 님에게 죄송합니다. ㅎㅎ
 
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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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찌보면 보기와는 달리 제법 강력한 유물론 책이다. 걷기를 통해서 인간이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질운동을 통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과 외부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은 유물론적 주장이다. 그리고 이에 강하게 동의하는 편이다.

 사람이 걷기에 적합한 동물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걷는 다는 것은 직립과 상당히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사람의 커다란 뇌가 걷기 등의 다른 인간적 특질을 낳은 것으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직립등의 환경의 압력에 적응한 신체적 요소의 변화가 큰 뇌를 낳았다는 가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걷기에만 집중하다면 사람은 직립함으로써 머리와 손에 자유를 얻었고, 특히 걸을 때 머리의 자유로 인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위를 바라볼수도 있으며 주변 풍경을 자연히 감상할수도 있다. 걸으면서 사람은 온전히 자신의 신체를 느끼게 된다. 저자는 걷는 것은 매우 불안한 자세라고 하는데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을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조절하고 언제든지 넘어질 위기를 겪는 실존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걷기가 실존과 관련함은 미처 몰랐다.

 걷기는 또한 생각을 없애준다. 걷다보면 이런 저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오래걷다보면 결국 잡념은 사라진다. 물아일체라고 할까. 갖가지 잡념과 스트레스 속세의 생각이 사라지며 자연스레 자연과 하나가 된다. 반대로 걸은 후에는 사람은 생각이 넘쳐난다. 철학자 칸트가 그토록 오래 걸으며 생각한것도 이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는 나름의 과학적 근거도 있는데 그 내용은 책 운동화 신은 뇌에 나온다.

 책의 골자는 과거의 통념과는 다르게 운동을 하면 오히려 뇌 조직의 생성이 일어나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힘뺀다고 체육과 수업을 자습으로 대체하는 고등학교의 행태나 공부하는데 방해된다고 오후에 체육수업을 하는게 오히려 근거가 없었던 셈이다. 실제로 이 책의 영향으로 교육계에서는 체육수업을 가급적 1교시에 배치하는 것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걷기는 또한 건강에도 좋다. 과거 만난 한 기관의 장학사는 점심을 먹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단다. 교사에서 장학사가 되면서 운동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인데 장학사는 교사와 다르게 점심을 나가사 먹어야만 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식사후 거의 30분 이상을 걷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뱃살의 사라짐이었다. 그래서 위처럼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는 책이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중병을 앓아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환자는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다. 치매환자에게도 걷기를 시키거나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승마를 시키는 것들은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자동차를 비판한다. 자동차가 등장함으로써 그리고 현대의 다양한 이동수단이 우리를 빠르게 움직이게 함으로써 우리는 걷기 본능을 잃었고 나의 발은 사용처를 잃었다. 풍경은 수동적으로 지나갈 뿐이며 우리는 더욱 자연과 멀어진다. 빠른 이동수단으로 공간과 시간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진 셈이지만 역으로 시간과 공간에 더욱 얽메이데 되었다. 예전이면 그 시간에 갈수 없는 공간에 우리는 자본에 얽메여 반드시 가야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도시도 걷기와 관련이 있다. 도시는 걸어 나오는 사람들의 수와 양태로 시시각각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새벽을 걷는 사람들, 술에 취한 사람, 점심시간에서의 사람들의 사라짐. 밤의 붐빔등. 도시에서 걷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다양한 만남을 만들어내며 여러가지 도시만의 색깔을 만들어낸다. 최근 자동차의 발달로 인도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도시 계획과 프랜차이즈 가가게들의 등장은 이런 걷기가 만들어낸 다양한 도시의 색깔을 지워낸다.

 저자는 역사적으로도 걷기를 살핀다. 걷기는 지금이야 자신의 건강과 여유를 위해서 하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생존의 문제인 적도 있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걸음과 스페인 침략자들이 아메리카 토착민에게 되레 당해 수년에 걸쳐 수천킬로미터를 걸어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간 일, 종교순례를 위한 걸음들은 모두 위험했고 생존을 위협했다. 걷다가 잠을 청하는 순간에는 갖가지 곤충과 동물의 위협에 시달리기도 하는데 중국의 삼장이 인도로 향하면 쓴 서유기는 책에 등장하는 온갖 요괴들의 수만큼 과거의 장거리 걷기가 생존에 위협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장거리 걸음이 주는 극도의 피곤함 후의 휴식, 그리고 극도의 갈증후에 느끼는 물마심의 쾌감과 시원함이 걸음이 주는 또하나의 선물이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봄날을 만끽하며 걸어봄이 어떠한지. 한국인은 안그래도 비타민 D 결핍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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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08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자동차와 스마트폰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생활하게 되면 두뇌 능력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상대방과 만나면서 대화를 나누는 행위도 뇌의 진화와 관련이 있어요. 외출을 하지 않고,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삶이 무조건 좋지만 않은 것 같아요.
 

 나에게는 하나의 정치적 소원이 있다. 바로 죽기전에 딱 한번이라도 보수정당에 투표해보는 것이다. 과거엔 투표연령이 지금보다 높았기에 만 20세가 넘어 투표를 시작한 이후로 대선이든, 총선이든, 지방선거든 단 한번도 보수정당에 투표해본일이 없다. 기껏 저지른 일탈은 늘 승리를 위해 투표하던 야당이외에 비례대표정도로는 진보정당을 찍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경우는 딱 두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하나는 정말로 보수정당이 일본우경화세력과 협력하여 북한을 적대시하여 공존해나가는 망국의 길에서 탈피하여 정치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진정한 자본주의 질서를 확립해나가며, 국익이란걸 진정으로 우선시하는 그야말로 진정성 있는 보수로 환골탈태를 하는 경우다. 지금의 그들은 사익이 우선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마도 나의 재산이 정말로 많아져서 나의 이득이 우리나라 보수정당의 그것과 상당히 일치하게 되는 경우다.(물론 나의 하는 짓과 직업으로 봤을때 매우 희박한 가능성이다.) 나에게 다가오는 심각한 재산상의 손실을 각오하면서도 정의를 택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단순히 재산이 많아진다고 해서 모두가 보수적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 역시도 두고 볼 일이다. 그냥 상상속에 기대하는 재밌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어쨌든 지금의 민주사회는 크게 진보와 보수로 구분되며 이는 미국도 우리나라도, 일본도, 유럽의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새가 좌우로 난다지만 불운하게도 좌우가 균형적이거나 합리적인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이는 많은 국가에 불행을 몰고온다.

 최근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었다. 유시민 작가의 책을 여러권 보았지만 이 책은 유시민작가가 정치권에서 쓰라린 패배와 실패를 겪고, 다시 사람 유시민으로 돌아와 낸 첫 책이다. 그래서인지 그 어떤 책보다도 작가 유시민이 잘 드러난다. 책은 유시민의 다른 책들 보다 월등히 읽기 쉬운 편인데 아무래도 지식보다는 삶에 대한 유시민의 깨달음이 책의 주내용이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부분은 앞서 말한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었다. 대개 우리는 진보와 보수를 문과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데 유시민은 의외로 양자의 구분을 과학적으로 한다. 유시민 작가 책을 보면 그가 생각보다 꽤 과학적 소양이 있음을 알게 된다.

  유시민은 우선 진보주의는 보수주의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철학이나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으며, 진보주의는 어떤 이론의 집합이라기보다는 타인과 세상을 대하는 감정 또는 정신적 태도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런 주의는 감정이나 정신적 태도이기 때문에 당연히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며 이를 타인에게 강제하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이 된다. 여러 보수논객과의 토론에서 당연히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수 도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언행은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다.

 유시민은 이어서 보수정당을 싫어한다고 솔직히 고백하는데 그 이유는 보수정당이 인간의 여러 본성 중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부분을 대변하고 부추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심, 독점욕, 증오, 두려움, 강자의 오만, 약자에 대한 괴롭힘 등인데 이런 태도는 보다 원초적인 것인 것이고 인간의 욕망과 본능에 가장 가깝게 자리한다.  유시민은 이런 것에 보수가 기반하기에 상대적으로 인기도 높고 결집이라는 것이 보다 잘 된다고 다른 책에서도 밝히고 있다.

 반면 그가 지지하는 진보정당은 인간 본성 가운데 진화상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자유, 정의, 나눔, 평화에 의존하며 이런 것은 비교적 늦게 진화한 인간의 이타심에 기반하는 것들이다. 유시민은 이런 이타적 본성과 공감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연대라고 칭하며 이 연대가 일 놀이 사랑과 더불어 삶을 가장 의미있고 품격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보와 보수를 과학적으로 구분한 책은 하나가 더 있다. 똑똑한 바보들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나온 책으로 보수와 진보주의자가 서로 다른 뇌를 가졌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인간에게는 경험에 대한 개방성과 성실성, 신경증성, 외향성, 친화성이 있는데 진보와 보수주의자는 개방성과 성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진보주의자들은 개방성이 있어 강정을 보이는 반면 보수주의자는 성실성에서 강점을 보인다.

 실제 양자의 생활공간을 비교하면 진보주의자는 여러 경험을 나타내는 물건과 새로운 것 물건이 비교적 어지럽게 널린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성조기나 국가의 상징물, 달력, 스캐줄 관리, 청소도구등이 가지런히 정렬해있다.

 또한 보수주의는 애매모호한 것에 대한 인내력이 부족하고 독단적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사고과정이 덜 통합적이고, 종결에 대한 욕구가 크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는 이외 정 반대다. 양자는 뇌에서 차이가 나타나는데 보수주의자는 편도체가 발달하고 진보주의자는 회백질이 발달한 편이다. 편도체는 공포와 관련한 본능이 깊이 관련하 부분이며 회백질은 비교적 최근에 발달한 이성과 사고의 부분이다.

 하지만 비교적 현대사회에 유리해 보이는 진보주의자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대개 재산의 형성이사회적 성공부분에서 진보주의자보다는 보수주의자가 더 유리한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정치적 싸움에서도 집결력이 강한 보수가 진보를 이기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역사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처럼 두 책은 진보와 보수가 상당히 선천적인 성향을 갖고 형성됨을 말한다. 물론 유시민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생리적 변화로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 보수화되는 경향을 띈다. 실제로 진보가 보수화 되는 경우는 상당히 많지만 보수가 진보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문에 양자를 서로로 변화시킨 다는 것은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가 되고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가 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양자가 서로 받아들이기 이해하는게 어렵다면(특히 성향상 보수가)서로가 힘을 가졌을때 상대방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수는걸 막는 것 정도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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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3 2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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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3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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