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 - 광복을 염원한 사람들, 기회를 좇은 사람들
선안나 지음 / 피플파워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황이 인간을 만들까? 인간이 상황을 창조할까? 역사의 갈림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황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팔자는 자기가 만든다.'라는 말이 있듯이, 같은 역사적 상황이라하더라도 어떤한 길을 갈 것인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이라는 책은 7개의 커다란 주제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짝을 이뤄 재미있게 설명했다. 청소년용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선택해서 읽었으나, 일반인을 위해서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대부분 우리가 잘아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삶을 소설 읽듯이 재미있게 풀어써서 대중성을 확보한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첫번째 주제 '명문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나'는 많은 것을 생각케한다. 진정한 명문가란 무엇일까? 대전에는 노론의 영수라고 말하는 가문이있다. 대전에서는 대단한 명문가 인것 처럼 선전하고 있으나, 나로서는 헛웃음만 나온다. 이회영가문이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을 위해서 재산을 팔아 만주로 가서 풍찬노숙을 했는데, 조선을 주무른 노론의 영수집안이 나라가 망했을 때 무엇을했는가? 그러고도 명문가라 말할 수 있는가? 명문가는 주어지는 것이아니라, 만드는것이다. 이것을 이회영집안과 이근택 집안을 비교해서 저자 선안나는 말하고 있다. 

  두번째 주제 '망해가는 나라의 부자들이 사는법'이라는 주제는 씁쓸함을 더해주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안희제는 고문으로 순국했는데, 망국을 이용해서 부를 축적한 김갑순의 이야기는 너무도 씁쓸했다. 비단 이러한 씁쓸함은 이후의 주제들에서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수 많은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가난에 허덕이는데, 친일의 길을 갔던 친일파의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을 우리는 후손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 악인이 승리하는 현실속에서 우리 자식들에게 정의를 위해서 살아라라고 말할 수 있있을까? 최근의 대선을 보면서 들었던 씁쓸함을 책을 읽으며 다시 느꼈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만화영화에서는 악인이 패배하고 선인이 승리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선인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얼마난 큰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지를 알게되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를 우리는 느끼고 있다. 그러한 희생을 각오하고 정의를 실현하라고 자손들에게 말해도 될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서 눈덮힌 파촉령을 넘으면서 "우리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 자손들에게는 이런 고생을 절대 물려주지 말자."라며 동지를 끌어안고 밤새 잠들지 않으려 동지를 깨우던 장준하선생의 말씀이 기억난다. 못난 조상이 정의가 패배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정의를 실현하려는 조상도 온몸을 던져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사회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 오늘 우리가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못난 조상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 대한제국 외교관에서 러시아 혁명군 장교까지, 잊혀진 영웅 이위종 열사를 찾아서
이승우 지음 / 김영사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러시아어와 영어,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세계 시민, 이위종이 있었다. 그가 원했다면, 그는 자신의 재능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편안한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활약한 3인의 특사 중에는 25세의 이위종이 있었다.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와 영어, 러시아어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 시민들에게 알렸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조국을 위해서 사용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거기까지였다. 이위종이 불현듯, 러시아로 가는 바람에 특사들의 입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위종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져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우라는 재야사학자는 4년여 동안의 끈질긴 탐구를 통해서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을 다시 복원해냈다.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이라는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그의 삶을 살펴보자. 


 우선, 이위종이 고종의 특사로 활동하다가 갑자기 러시아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아내 엘리자베타의 와병 소식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아내를 보살펴야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왜? 이때 아팟을까?라는 원망도 있었지만, 어쩌랴! 가장 소중한 아내인 것을..... 

  이위종은 다시 헤이그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을 근거로 미국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했다. 거중조정! 타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이 중재해주기로 약속했던 이 조항을 미국은 사뿐히 즈려밟고 갔다. 어떤 학자들은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것은 "무모한 시도"라며 실패한 투쟁으로 보려는 자가 많다. 그러나 "적어도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가했던 국가들은 대한제국을 전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실패한 투쟁으로 볼 수 많은 없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계란이 깨진다할지라도, 적어도 바위는 계란 자국으로 올룩진다. 체면을 구긴 바위에게 계란의 투쟁은 의미없는 투쟁일 수 없다. '논어'에는 공자를 '안되는줄 알면서도 하려는 사람'이라 세상 사람들은 평했다고 쓰여있다. 안되는줄 알면서도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면 그길로 나아가야한다. 이위종은 그러한 사람이다. 아니, 우리의 독립운동가들 모두가 그러한 사람들이다. 

  이 책에는 이위종의 삶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위종의 삶과 함께 녹아들어 있다. 그중에서 나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두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째, 1908년 국내 진공작전의 좌영장을 맡은 엄인섭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안중근 의사와 함게 손가락을 자르며 조국독립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맹세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1911년 이후 밀정으로 활약하며 수많은 동지의 뒤통수에 비수를 꽃았다. 

  두번째는 지금의 명동성당인 종현성당의 토지분쟁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서 600명의 신민회 회원들이 고통을 받아야했다는 사실이다. 안명근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빌렘신부는 안명근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서울에 있는 뮈텔 대주교에게 알렸다. 뮈텔 대주교는 아카시 모토지로에게 고발하였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600명의 신민회 회원이 일제에게 잡혀와서 105명이 구속되었다. 이중에는 백범 김구도 있었다. 결국, 뮈텔 대주교는 종현 성당 토지 분쟁 소송을 해결할 수 있었다. 1911년 1월 13일 영하 21도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카시 모토지로는 뮈텔을 찾아왔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자신의 이름과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장군의 이름으로 다시 감사하려 왔다." 뮈텔 대주교의 일기에 적혀있는 친일의 기록을 읽으며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명동성당에 이러한 친일의 역사가 새겨져있다는 사실이 가슴아팠다.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면 우리 마음은 언제나 쓸쓸해진다.'라는 노암 촘스키의 말이 생각난다. 가장 믿어 의심치 않았던 독립운동의 영웅과 종교적 스승들에게 배신의 칼날을 받고 쓰러져가야했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영혼은 얼마나 슬펐을까?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특사 활동 이후 이위종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내용이다.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에는  그 이후의 이야기가 그려져있다. 

  이위종의 삶은 그의 아버지 이범진의 행동으로 무거운 짊을 질머져야했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1911년 이범진의 자결은 이위종에게 조국 독립을 위해서 인생을 바치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의 울분을 참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많은 애국지사를 일부 사람들은 의미 없는 죽음이라 폄하하기도한다. 과연, 그분들의 죽음이 헛된 것일까? 물론, 살아서 한명의 친일파, 한명의 일제의 앞잡이를 죽인다면 더 뜻 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의 자결로 모든 불명예가 자신들에게 돌아왔다고 생각했다."라는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의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범진의 죽음은 이위종의 삶을 독립 운동이라는 길로 빠져들게했다. 

  이위종은 블라디미르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 된다. 러시아를 움직여 조국을 되찾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바램과는 달리,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부전선에 투입된다. 1차 세계대전은 우리 역사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 조선인 이위종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에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영화를 통해서 잘알려져 있지만, 1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 이위종이 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 역사가 얼마나 파란만장한지를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위종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붉은 군대의 장교가 된다. 이때 시베리아의 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연해주의 의병들을 하나로 규합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행방불명된다. 그래서 이위종의 죽음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졌다. 아카시 모토지로의 덧에 걸린 이위종은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조국 광복의 선봉장이 될 찰라에 생을 마감한다. 너무도 가슴이 아파왔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진 이 부분을 다르게 해석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다는 말이 된다. 마오쩌둥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했지 않은가! 혹시, 시베리아의 별이라며 명성이 자자한 이위종이 연해주의 의병을 하나로 모은 군대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면 소련의 입장에서도 경계 대상이었을 수도있다. 이위종 실종의 진실을 밝히려면, 일제뿐만 아니라 소련의 자료도 면밀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어디까지 나의 상상력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일제의 특무대가 이위종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가장 큰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저자 비숍은 연해주 지역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을 묘사하면서 "이곳의 조선인이 부유하게 된 것은 조선에서 처럼 민중의 피를 빠는 '면허 받은 흡혈귀' 같은 양반이나 관리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지적했다. 게으르고 지저분한 조선인이 '면허 받은 흡혈귀'가 없는 세상에서는 가장 근면하고 부유한 삶을 살아갔다. 거꾸로 말하자면, '면허 받은 흡혈귀'들에 의해서 조선의 발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면허 받은 흡혈귀' 중에서 상당수는 나라를 빼앗기자 일제에 빌붙어 동포의 피를 빨기 시작했다. 일제와 일제에 빌붙은 '면허 받은 흡혈귀'에 맞서서 조국 광복을 위해서 온 몸을 불사른 이위종과 같은 별들이 있었다. 광복이 된 지금, 우리는 조국을 팔아버린 '면허 받은 흡혈귀'들이 다시 활개치도록 방조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고 싶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면허 받은 흡혈귀'를 감시하고, 조국을 위한 별이 되려할 때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선생은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독립운동사 - 해방과 건국을 향한 투쟁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9
박찬승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라는 말이 있다. 친일파의 후손이 정계, 재계, 학계에 있으면서 친일의 성채를 견고히 쌓고 있다. 낡은 옷을 입고, 누추한 집에서 사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며 씁쓸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생각하며, '한국독립운동사'를 펼쳐들었다.

 

1. 처음 알게된 5.30 만주 봉기

  1930년 두도구 방면에서 한인의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조선인 민회 사무실과 일본 영사관 분관이 습격당했으며, 용정에서는 전화선을 차단하고 발전소를 습격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간도출장소에 폭탄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간도영사관 경찰에 39명이 체포되었다. 5.30봉기 실패 이후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지에서 12월 까지 봉기가 계속되었다. 일본경찰이 2천여 명을 체포하여 4백명을 예심에 넘겼고, 272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중 12명이 옥사하고 22명이 사형을 언도 받았다. 참으로 격렬한 민중봉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봉기를 이책을 통해서 처음알았다. 사회주의 계열의 강렬한 항일운동이라서 교과서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5.30 만주 봉기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했다면 좌우익을 가릴 필요가 없다. 김원봉에 대한 서훈을 아직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아직도 한국사회의 갈길은 멀다는 생각에 쓸쓸함을 느낀다.

 

2.  누락된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박찬승이라는 저명한 역사학자가 우리의 독립운동을 정리한다기에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박찬승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가장 강렬한 항일 운동이 무장투쟁을 누락시켰다. 그중에서도 1930년대 남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양세봉 장군의 조선혁명군과 북만주를 호령했던 지청천 장군의 한국독립군을 누락시켰다. 대전자령 전투는 제2의 청산리대첩이라 불리는 유명한 전투이다. 이를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빠뜨려서는 안된다.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이러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박찬승 교수는 누락시켰다.

  박찬승 교수가 일부러 누락시켰다기 보다는 그가,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도 항일 무장투쟁사에 대한 평가가 낮고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추후라도 이부분은 반드시 보충해주길 기대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정리하고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한 책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지만, 박찬승교수 조차도 한국 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을 모른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추지 한다. '암살'이라는 영화의 한배우는 "우리 잊으면 안돼"라고 외쳤다. 만주벌판에서 쓸쓸히 쓰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라고... 우리는 기억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그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 - 우리가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2
정혜경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3.1절과 8.15가 되면,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우리의 항일 투쟁에 대한 각종 특집 방송을 방영한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소개해주는 방송은 드물다. 이러한 모습은 내가 일제 강점기 일제의 식민통치에 관한 서적을 찾으려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욱 심했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를 자세히 기록한 책들이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는다는 '시장의 논리'가 작용한 면도 있겠지만, 승리의 역사는 기억하려 해도 패배의 역사는 기억하기 싫어하는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억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없고, 그 역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반복된다. 이것이 내가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이라는 책을 펼쳐 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영화 '군함도'는 진실을 담고 있는가?

20178'군함도'가 개봉되었다. 영화는 기대와는 달리 만족스러운 흥행을 가져오지 못했다. 매스컴과 소설로 대중에게 많이 소개된 '군함도'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자 정혜경은 '사실과 다르다.'라는 관객의 반응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일본당국에 의해 착취당하는 조선민중'의 슬픈 모습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일본 당국의 하수인인 조선인들이 동포들을 착취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라 추정한다.

군함도는 진실을 담고 있다. 소년 광부도 존재했으며, 조선인 하수인이 동포를 착취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일본민족 VS 한국 민족'이라는 구도가 아닌, '조선인 하수인 VS 조선인 노무자'의 구도가 불편했다. ? 관객들은 '조선인 하수인 VS 조선인 노무자'의 대립구조가 불편했을까? 대부분의 관객들은 학교에서 '일본민족 VS 한국 민족'의 대립구조로 일제강점기를 배웠다. 그러나 일본인이 조선을 원활히 식민통치하기 위해서는 협조자가 필요했다. 그 협조자를 우리는 '친일파'라고 부른다. 1910년대 일본 헌병 밑에는 2명의 조선인 헌병 보조원이 있었다. 소수의 헌병으로 다수의 조선인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인 헌병 보조원'의 협조 덕분이다. 1920년대부터는 소위 '문화통치'가 실시되면서 친일파를 육성해서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는 민족분열 통치를 했다. 1930년대는 일제의 폭압적 민족말살통치로 인해서 일제에 굴복하는 친일파들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에게서도 나타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와 있듯이, 나치가 유대인을 홀로코스트에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었던 이유도, '유대인 위원회'의 협조 덕분이다. 한나 아렌트가 금기시 되었던 '유대인 위원회'의 나치 협조 행위를 책으로 발표하자,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금서로 정한 것도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일제에 협조했던 조선인들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고, 악마 같은 일본인과 선량한 조선인의 대립구도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영화 '군함도'는 너무도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었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영화 '군함도'는 말하고 있다. 이제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저자 정혜경은 우리가 '군함도'에 열중한 나머지 '조선 침략의 정신적 근거지 '쇼카손주쿠' 등재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군함도'가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 장소라면, '쇼카손주쿠'는 메이지 유신의 싹이 튼 곳이요. 일제 침략전쟁의 사상의 요람이었다. '쇼카손주쿠'를 세운 요시다 쇼인이 묻힌 신사는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가 되었으며, '쇼카손주쿠'를 나온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병탄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눈에 보이는 강제 동원문제에는 적극적으로 대처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 침략정신을 만들어낸 쇼카손주쿠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막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을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침략정신을 만들어낸 '쇼카손주쿠'가 비극의 씨앗이라면, 눈에 보이는 '군함도'의 강제동원 역사는 비극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비극의 씨앗과 비극의 열매 모두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비극을 막아낼 수 없다. 불편한 진실, 우리가 마주하기 힘든 진실과 마주하며 '진실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2. '진실의 무게'를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일본 극우파는 "피해자들 대부분이 포승줄로 꽁꽁 묶여간 것이 아니라 자기 발로 걸어갔는데 무슨 강제냐"라고 주장한다. 소년 지원병에 떨어져 울었던 소년도 있었다. 징병 혹은 지원병으로 전쟁터로 떠나는 장병을 위한 환송연도 있었다. 그렇다면, "강제"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소위 '일베'와 일본 극우파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가슴이 탁 막혀온다. 그러나 막상 논리적인 반론을 해주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 가야 "강제"라는 단어를 쓸수 있다는 그들의 일차원적 주장에 저자 정혜경은 "강제성이란 '신체적인 구속이나 협박은 물론, 황민화 교육에 따른 정신적 구속, 회유, 설득, 본인의 임의 결정, 취업 사기, 법적 강제에 의한 동원"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일 학계의 결론이며 2002년 일본 변호사협회의 주장이기도하다. 폭력에도 육체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이 있다.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도 있는 만큼, "강제"'포승줄에 묶여' 끌려가야만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이 책에 소개된 다음 일화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의 위력을 잘 말해준다.

 

"내가 아홉 살 때 할머니하고 어머니하고 내 밑의 동생 둘을 데리고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관부연락선을 탔습니다. 배 민 밑의 홀에, 배가 제일 흔들리는 곳에 .... 조선 여자들이 많더라구요. ....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을 다녀서 일본말을 할 정도가 되니까 가족들을 인솔했습니다. 아버지 주소만 들고 찾아가는데 시모노세키 선착장에 내려서 길 가는 사람에게 주소 적힌 종이를 주면서 플랫폼을 물어보니까 길을 가르쳐주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알려준 곳으로 가도 가도 허허벌판만 나오는 겁니다. 할머니는 지쳐 있고, 어린 동생은 어머니가 업고 동생 하나는 내가 손을 잡고 걷고, 그러다가 원래 왔던 곳으로 다시 와보니까 플랫폼이 바로 옆에 있는 겁니다. ... 그때 일본 사람에 대한 증오를 느꼈습니다. 아직 그 일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가다가 먹으려고 떡하고 엿을 만들었어요. 조선 사람들 인정이란 게 옆에 사람들 두고 그냥 못 먹잖아요. 할머니가 옆 사람에게 떡을 나눠주라고 해서 일본 여자에게 갖다주니까 "더러운 조선인들!"이라면서 내 손을 탁 칩니다. 바닥에 음식이 널렸을 것 아닙니까. 나도 민망해서 주섬주섬 주웠어요.

참 그때 내 가슴에 아! 같은 민족인데, 같은 사람인데, 왜 저럴까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내선일체를 배워 일본 사람과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됐습니다. 어린 내 인격, 우리 가족, 조선인의 인격을 모독한 것 아닙니까."-107

 

"학교에서 내선일체를 배워 일본 사람과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다는 소년 구연철의 증언을 통해서, 일제 황국신민화 교육의 위력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민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황에서 주입되는 교육은 스스로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자각을 하기 전까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일제의 노예로 길러진 것이다. 그들이 지원서에 도장을 찍었다한들, "강제"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식민지 노예교육""폭력"에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공식 통계로 강제동원 피해자는 7804,376명이다. 그러나 이 명단은 정확한 숫자가 아니다. 강제동원에 대한 연구 논문도 가뭄에 콩나듯하며,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에 개인정보가 담겨있어 국가가 나서서 연구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연구에 진척이 있을 수 없다. 저자 정혜경운 이 책 곳곳에 "피해국가인 한국의 관심이 이 정도인데 누구에게 답을 구해야 할까"라는 푸념 섞인 말을 내뱉는다. 독일이 지금도 유대인에게 사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끈질긴 과거사에 대한 고발과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서 유대인 처럼 끊질긴 투쟁을 했는가? 과거 친일 정권이 의도적으로 강제동원문제를 기피했다. 이제는 아픈 기억과 대면하길 싫어하는 우리의 무의식이 강제동원 피해자 숫자도 정확히 내놓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징용"은 일본이나 사할린, 남양 등지로 떠나야 "징용"으로 인정하고 있다. 저자 정혜경은 동원지역에 따라 '한반도 내''한반도 외'로 구분하는 것은 현재적 관점이며, 당시 조선은 나라를 잃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이러한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보국대' 혹은 '봉사대'로 동원되어 노동력을 착취한 것도 "징용"에 포함되어야한다. '얕은 지식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징용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선입견으로 '한반도 내' 징용 피해자들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았다. '진실의 무게'를 마주하는 일은 이렇게 힘들고도 조심스럽다.

일제는 조선인이 '노동자' 아니라, '노무자', '근로자'이기를 바랬다. 노동자와 노무자 혹은 근로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댓가로 임금을 받는'. 따라서 고용주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파업을 일으킬 수 있다. 반면, '노무자' 혹은 '근로자''수동적 개념의 용어'이다. '일방적으로 순종하는 분위기를 요구' 받았다. 그들에게 노동자와 같은 '파업'의 권리는 없었다. 일제가 조선인을 '노동자'가 아닌, '노무자' 혹은 '근로자'가 되도록 강요했다. 우리는 일제의 강요에 충실히 순응하며 '노무자'로 살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최근 일반 징용 실시의 취지를 발표하자, 일부 지식계층과 유산계급 중에는 서둘러 중국 방면으로 탈출하고 혹은 주거를 전전하여 당국의 주거 조사를 어렵게 하거나 혹은 급히 징용 제외 부문으로 취직을 기도하고, 일반 계층도 의사를 농락하여 병으로 입원하거나 일부러 화류병에 걸려 질환을 이유로 면하려고 기도하며, 그중에는 자기의 손발에 상처를 내고 불구자가 되어 기피하는 자, 심지어는 읍면 직원 내지 경찰관의 전자(專恣)에 기인한 덕으로 곡단하여 이를 원망하여 폭행, 협박하는 등 실로 일일이 헤아릴 수 없고, 최근 보고사범만으로도 20여건에 헤아리는 상황이다. 특히 지난번 충청남도에서 발생한 송출 독려차 부임한 경찰관을 살해한 사범은 그간의 동향을 말해준다. 특히 최근 주목되는 집단 기피 내지 폭행 행위로서 경상북도 경산경찰서에서 검거한 불온 기도 사건과 같은 것은, 징용 기피를 위해 청장년 27명이 결심대(대왕산죽창의거)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식도, 죽창, 낫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산 정상에서 농성하여 끝까지 목적 관철을 기도하는 것에서 첨예화한 노동계층 동향의 일단을 알 수 있다."-148

 

일제의 징용에 대항하여 '결심대'를 조직고, 경찰관을 살해하는 적극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지역에서 발생한 태업과 파업의 기록도 '노무자''근로자'로 살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일제 강점의 어둠을 헤치고 밝은 새벽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토록 '근로자'라는 딱지를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우리는 그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개발 독재 시대, 독재정권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근로자'이길 바랬다.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사업주가 시키는데로 열심히 일만하는 '근로자'이길 바랬다.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 정권이 들어섰지만, 사회의 통념을 변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날'이 아직도 '근로자의 날'로 불리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처럼 보도하는 언론을 보며,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근로자'라는 말이 일제가 조선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염원이 담긴 말이라는 '진실의 무게'를 마주한다면, 이제는 '노동자'라는 말을 이 땅의 노동자에게 돌려주어야할 것이다.

 

3. 일본인은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전쟁기간 동안 제국 일본 영역의 민중들은 '자신의 말'을 빼앗겼다." 저자 정혜경의 말이다. 일본은 폭압적인 전체주의 사회이다. 일본제국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만주사변,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전개할수록, 전선은 넓어졌고, 총력전 상황에서 일본인의 고통도 가중되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 중에 일본인 310만명이 죽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일본군 전사자 중 약 60%'넓은 의미의 아사자'였다는 사실이다. 필리핀 전투에서는 약 80%'넓은 의미의 아사자'였다.

 

"아사! 굶어 죽었다는 말이다. 보급 부대 없는 현지 보급원칙이 일본군의 굶주림을 악화시켰다.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은 황군(천황의 군대)이 아닌 황군(메뚜기 군대)이었다. 용맹한 군인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식량과 땔감을 찾아 민가를 뒤지고, 밥을 짓다가 적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 것이 일본군의 현실이었다."-40

 

보통 일본군은 치밀한 계획과 목숨바쳐 돌격하는 용맹함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마침내는 아시아 태평양전쟁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 속의 일본군 모습은 너무도 달랐다. 일본군 지도부는 '천황 폐하'라는 이름으로 목적을 위해서 일본인 병사의 목숨을 기꺼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전쟁을 하려면, 적에게 폭탄을 던지는 일보다, 아군에게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서 보급로를 개척하는 일에 공을 들여야 한다. 아무리 용감한 군대도 먹지 못하면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시기, 우리 수군의 활약으로 수륙 병진작전이 실패하고 결국 일본군은 명군이 참전하자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에 웅거할 수밖에 없었다. 보급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그러나, 일본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기억하지 않았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벌이먼서도 '현지 보급'이라는 기상천외한 원칙을 세웠다. 그들에게 병사들의 생명은 일회용 휴지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던 것일까?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하는 일본인들이 했던 말도, "완전 재수없는 거죠"라는 말이다. 상관이 시켜서 일본군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서 일본군 병사들은 미군 포로를 죽였다. 명령에 복종했던 그들은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그 병사에게 미군 포로를 죽이라며 '천황의 뜻'이라고 말한 상관은 죽지 않았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일본인의 문화 속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없었다.

전범 히로이토는 소련과의 강화를 이뤄내기 위해서 60만의 관동군을 소련에게 넘겨주려했다. "천황은 전쟁 당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신민의 고통과 피해를 외면했다." 일본인 병사들은 "천황폐하"를 위해서 죽어갔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천황폐하"는 그들을 한낫 휴지조각 정도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황 히로이토는 전쟁이 끝나자 전쟁책임을 외면하고 평화주의자로 변신했다.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짝사랑이 일본인을 비극속에 머물게했다.

광기의 시기! 일본인의 모습을 보면, 마치 노예들의 집합소라는 느낌이 든다. 상관이 시키기에, "천황폐하의 뜻"이라는 말에 인간이 저질러서는 안되는 전쟁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던졌다. 누구든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아이히만 처럼 악마가 될 수 있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에 보냈던 아이히만은 총통 히틀러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이것이 옳은 일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했다. 일본에는 수많은 아이히만이 있다. 무사가 천년을 지배했던 사회! 천황을 위해 개인의 목숨을 던지는 사회! 이제는 아베가 전권을 휘둘러도 침묵하는 사회가 되었다. 일본인은 아직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아직 '자신의 목소리'를 낼 자격을 얻지 못했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일본이 패전 후, 미국에 의해서 주어진 민주주의였다. 그들은 '주어진 민주주의'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그리고 '주어진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을 얻지 못했다.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서,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거리로 뛰쳐나올 용기가 없다면, 그들은 영원히 천황의 노예, 아베의 노리개가 되어야할 것이다.

 

저자 정혜경은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에 무관심한 한국사회에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에게 귀기울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개인 연구자로서는 이룰 수 없는 연구를 위해서 정부가 제발 관심을 갖아 달라고 몸부림치고 있다. '조선인 강제동원'과 일제강점기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알려주는 서적이 너무도 없다며 한탄한 나에게 정혜경은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새롭게 밝혀내야할 진실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며,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되풀이되어서는 안되는 역사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행을 막기 위해서 정혜경은 정부의 지원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만들것을 당부한다. '진실의 무게'를 알기 위해서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길을 이제는 찾아나서야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이지 유신 초기의 조선침략론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3
현명철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베의 도발이 시작되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三菱)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금지불을 거부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한 한일갈등은 아베의 경제전쟁 선포로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아베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 정통 극우파들의 세례를 받은 아베는 다시 한번 '정한론'을 펼치고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이다. '메이지 유신 초기의 조선 침략론'이라는 책을 꺼내들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 일본인의 이중적 한국관

한일간에 경제전쟁이 한창이다. 일본은 반도체 핵심소재에 대해서 한국수출을 금지하고, 한국에 대한 혐한 방송을 매일 송출하고 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원칙에 따라 대응하고, 국민은 일본 관광을 자제하고, 일본 물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아카바 가즈요시 일본 국토교통상은 "우리 정치인들도 한일 우호를 위해 대화해야 합니다. 한국은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은인의 나라입니다." 라는 말을 한일문화축제에서 했다. 한국에 대한 경멸적 말을 하고, 심지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 경제는 되살아난다는 망언을 하는 극우파들을 보아왔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발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인을 이해하려면, '혼네''다테마이'라는 일본의 이중성을 이해해야한다. 그들이 하는 다테마이를 듣고 그들의 혼네라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생각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는 조선에 관한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외교 표면에 나타난 적례를 기반으로 한 교린관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을 이으려는 대외평창론이었다."-16

 

일찍이 요시다 쇼인도 일본의 '고사기''일본서기'를 읽으며 신공황후 시기의 '위대한' 일본을 재현하기를 소망하지 않았던가! 지진과 화산폭발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섬나라 사람으로서, 대륙으로 나가고 싶은 것은 본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이러한 본능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1천년 이상 칼이 지배해온 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낸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이를 숨겼다. '통신사'!! 믿음으로 소통하는 사절이라는 아름다운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통신사를 맞이면서도 사쓰마번을 비롯한 서남부 다이묘들은 '조선 정벌'이라는 혼네를 감추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관은 쓰시마번도 마찬가지였다.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자, 쓰시마번은 조선과의 교린관계를 '구폐'로 멸시한다.

 

"원래 세견을 약속한 것은 차래지식(嗟來之食, 업신여기며 주는 음식)을 받는 것으로 일시적 구급지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다년간 영지 회복을 꾀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성공하지 못하여 조선에 기대지 않고서는 국력을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관례가 생기어 외국에 번신의 예를 취하여 수백년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개절치합니다. -1868, 쓰시마 번주 소 요시아키라의 봉답서

 

조선의 교린정책에 따라서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었던 쓰시마번이 "수백년간 굴욕을 받았"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최근 쓰시마섬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받지 않는 가게와 숙박업체가 있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한국인 관광객의 도움으로 쓰시마섬의 경제가 지탱되는데도 그들은 한국인을 싫어한다. 한국인 관광객이 뚝 끊기자, 지역경제가 위기에 빠졌다며 중앙정부에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혼네다테마이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한일관계를 정립할 수도 없으며, 일본인을 이해할 수도 없다. 역사는 이를 말해준다.

 

 

2. 정한론의 뿌리

정한론의 뿌리를 캐어본다면, 멀리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임나일본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있었던 정한론을 다시 수면위로 끌어 올린 것은 에도 막부 말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겁이 많고 게으르며 유약한 한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들의 관할에 들어갈 것입니다. 일본이 양이를 단행하면 그들(서양)의 불만이 조선을 향하게 되어, 조선을 (침략하여) 교두보 삼아 일본 각 지역을 약탈할 것이므로 이는 쓰시마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큰일입니다. (중략) 서양 오랑캐가 조선에 침입하기 전에 책략을 세워 신군(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 200여 년의 화교(신의로써 조선을 원조한다는 뜻)로 복종시키고, 만일 복종하지 않을 때는 병위를 보내야 합니다. -"오시마가 문서"'어원서사'-59

 

일본은 내부의 위기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 전쟁을 선택했다. 임진왜란도 내부 다이묘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이킨 전쟁이다. 쓰시마번도 서양세력의 침략이라는 충격속에서 쓰시마번이 살아 남기 위해서 조선 침략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익선''주권선'이라는 개념의 원형이 쓰시마번주의 글에서 묻어나고 있다. 주권선인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서 조선이라는 이익선을 차지해야한다는 논리는 이미 에도막부 시기부터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일본의 본능 속에 대륙으로 진출해야한다는 신념으로 잠재해있었을 뿐이다.

일본이 '정한론'을 주장한 직접적인 이유를 우리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은 조선에 새로운 국교 수립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냈지만, 조선은 국교 수립을 거부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 정부 내에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제기되었다."-미래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172

 

우리 교과서에 보이는 이 서술이 사실은 일본측의 주장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고 깜짝 놀랐다. 조선이 왕정복고를 알리는 쓰시마 번의 대수대차사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정한론'이 발생했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현명철은 주장한다.

 

"18692월 대수대차사 서계가 조선 조정에 보고 되어 논의되고 있을 때였으며, 받아들이지 말라는 지침이 동래부로 내려오기 전이었다. 동래부가 대수대차사 서계 등본을 보고한 것은 1869년 정월 29일이며, 조정(예조)이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동래부에 전달한 것은 18692월 말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일본에서 등장한 조선 침략론은 조선이 대수대차사 서계를 거절한 것과는 상관없음을 알 수 있다."-84

 

실사구시라는 말이 떠오른다. 과연 그러한지 탐구한 다음에 사실을 믿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흥선대원군의 어리석은 외교정책으로 '정한론'을 유발시켰다는 생각을 했다. 정한론은 일본의 서계를 받지 않은 우연한 사건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혼네속에 침잠해있다가 제국주의 시대라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3. 강화도조약에 대한 평가

강화도 조약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대부분 일본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에 의해서 맺어진 불평등조약이라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명철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조일수호조규는 수많은 갈등과 대화가 결실을 맺은 것임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쓰시마 번을 매개로 이루어진 양국의 대화가 일본의 정권 교체와 집권 과정을 통해 드디어 정부 간의 대화로 변모한 것이다. 단순히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여 맺은 조약은 아니었다."-158

 

과히 충격적인 주장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폐번치현을 결정한다. 이로인해서 기유약조는 붕괴된다. 조선이 입항절차를 엄중히 관리하던 왜관은 언제 분쟁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한일간의 최전선이 된다. 이 시기부터 조선과 일본과는 새로운 외교관계가 정립되어야했다. 이 시기 일본과 조선 사이에 기나긴 줄다리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는 이에 대한 서술을 무시하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일본배 운요호가 포격을 하면서 조약체결을 강요했고, 이에 굴복하여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대한 현명철의 날카로운 지적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맺어지는데 운요호사건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며, 이후, 강화도조약이 일본의 경제침탈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짧지만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를 현명철은 그의 책 마지막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주체적인 역사 서술만이 실패로 나타난 사건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159

 

일본의 시각에서 한국사를 들여다본다면, 우리의 역사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패배의 역사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면, 그는 타인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일본과의 경제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속에서 우리가 일본여행을 자제하고, 일본제품 소비를 하지 않아야하는 이유는 다시는 그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서 끊임 없이 주장되어온 '정한론'의 역사를 직시한다면, "No Japan 운동"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눈으로 우리역사를 바로보고,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책을 펼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