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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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궤적

- 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다산책방] (2025)

 





김주혜 작가의 밤새들의 도시를 읽은 지 몇 달이 지나 가물가물하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은 나탈리아다. 그녀는 러시아의 수석 발레리나가 된 인물이다. 이야기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 시절과 그의 탄생 이후 발레에 우연히 입문하게 된 사연과 성장기가 가족사와 더불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며 나아간다.

 


어느 분야든 정상의 자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 타인의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인물, 나아가 자신의 완성을 열망하는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한편 이 여정은 다른 경쟁자와의 대결이면서 결국엔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에 이른다. 작가의 전작 작은 땅의 야수들에서 내뿜는 에너지와 사뭇 다른 이번 작품은 예술 분야, 특히 발레에서 한 재능 있는 발레리나가 정상에 오르는 과정과 내리막길의 서사를 담고 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예술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일은 치열한 자기 탐구의 시간을 요한다. 이 여정을 통과하는 이는 결국 자신이라는 존재를 자신이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순간이 오고야 만다. 이를테면 자기 인정의 과정이 통과의례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예술의 완성이라는 목표가 삶과 하나가 되어야 가능한 단계가 아닐까 싶다. 나탈리아 주변의 모든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은 각자 자신의 여정에서 예술적 지향점을 향한 열망이 가득한 존재들이다.

 


문제는 이 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불확실성을 품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나탈리아를 비롯한 동료 발레리나들은 모두 정상혹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치 구름에 가린 에베레스트처럼 가까이 다가가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이 각자 나름의 지향점을 열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정답은 없다. 구도자와도 같은 이들의 무의식 속에 각자 나름의 의미를 찾는 기대와 욕구가 있을 텐데, 이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가끔 예술 활동이란 것이, 죽게 마련인 인간 존재들이 수행하는 일종의 구원 행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이는 정상급 예술가의 예술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삶의 구원을 향한 일상의 행위 역시 예술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전작 작은 땅의 야수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의 독립 영웅들에 모티브를 얻은 작품었다. 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것으로 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인 작가의 한국적 소재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반갑다. 다만 한국인으로서 이 책에 활용된 이야기들은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온 독립 영웅들의 이야기가 겹쳐 있어 어떤 부분은 이미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외국인들에게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정서를 좀 더 내밀하게 소개하는 소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작업이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소개된 밤새들의 도시가 좋았다. 작은 땅의 야수들이 작가 자신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붙들고 탐구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보다 많은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을 소재로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성을 담고 있다. 또한 영화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가 특히 좋았다. 아마도 작가의 예술, 특히 발레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느껴져서일 수도 있겠다.


 

학술적으로 정립된 개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소설의 흐름을 구분하는 두 가지 영역이 있다. 하나는 톨스토이 스타일이다. 이 스타일의 소설은 작가의 친절하고 치밀한 묘사와 설명이 풍부하다. 묘사가 디테일한 작품이 많다. 이중 가끔은 톨스토이처럼 글에 담긴 정보나 흐름의 방식이 TMI라고 느껴지는 대목도 종종 만나게 된다. 반면 이와 대척점을 이루는 소설의 스타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분위기로 성취해내는 작품들이다. 이른바 체호프 스타일이다. 대체로 큰 사건이나 변곡점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대화와 대화 사이, 장면의 분위기를 통해 인물의 심리가, 고뇌가 보이는 듯한 소설이 그것이다. 이 스타일의 대표 작가라면 레이먼드 카버와 같은 이들이다.

 


이 두 가지 소설 스타일 중에서 김주혜 작가의 스타일은 톨스토이 스타일과 체호프 스타일 사이의 어디인가로 느끼는데, 내겐 톨스토이 스타일에 좀 더 가까운 것처럼 느낀다. 대신 작가의 문장은 TMI라고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반면 지적이면서도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가 압권이라 여겨질 때가 있다. 이런 특징이 전작 보다는 밤새들의 도시에서 만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히 책읽기를 늦게 시작한 나에게 작가의 작품은 첫 작품부터 지켜보며 함께 나이드는 기분이라 남다른 느낌을 받는다. 세월이 지나 세계적인 대작가로 인정받게 되면 좋겠다. 그때는 나도 작가의 모든 작품을 세월과 함께 다 읽어가고 있지 않을까.

 


소설의 자세한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밤새들의 도시의 책장을 덮은 후의 감흥은 아직 남아 있다.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맑은 하늘을 마구 가로지르는 비행운들처럼 걸려 있는 소설이다.






"용기를 가지시오. 신이 결정하였다면 우리의 갈 길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니."
- 나탈리아의 생부 니콜라이가 재인용한 단테의 문장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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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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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작가의 의도와 의미를 찾으려 하는 우리의 관습에 장렬한 똥침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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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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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상상력이 비추어 준 인간의 초상

-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2012)

 



아마도 걸리버 여행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소인국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로 도배된 어린이용 도서 이후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본 독자는, 나를 포함하여 매우 드물 것 같다. 이 책의 전체적인 인상을 먼저 이야기해보자면, 1장과 2장은 걸리버가 소인국과 거인국을 만나 거주민들과 교류하며 여러 가지 대비를 보여준다. 특히 걸리버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그가 처한 위상에 따라 다른 행동 양식을 보여준다. 걸리버가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기를 반복한다. 그는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 4(소인국거인국-라퓨타-휴이넘 왕국)에 순서대로 도달하는데, 그가 이곳에서 겪는 167개월의 여정을 보여준다.


 

걸리버가 처음 방문하는 소인국에서 그가 처음 상대하는 작은 인간은 중년의 고위 관리다. 걸리버는 이방인임에도 이곳에서 자신이 지닌 신체적 우월함을 적극 활용한다. 불이 난 궁전 위에서 거대한 폭포수 같은 소변을 누어 화재를 진압하는가 하면, 이웃하는 섬과의 전쟁에 개입하여 상대국의 전함을 한 손에 끌고 옴으로서 전쟁을 종식하는 일에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우월한 위치에서 왕국을 보호하는 선한 신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하지만 걸리버의 지위는 거인국에서 정반대로 뒤바뀐다. 돌봄을 받고 보호받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우월감을 느끼는 거인들 앞에서 작고 무기력해 보이는 존재가 이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이며 주목을 받고, 급기야는 많은 거인들 앞에서 전시되기도 한다. 마치 아프리카의 코이산족(문명 세계에서 부시맨이라는 경멸적인 별칭으로도 불리는) 몇 명이 유럽인들 앞에서 거의 나체 상태로 전시되었던 역사적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1700년대에 유럽의 남성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을 내세워서 그를 상대화해보고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도는 상당히 신선한 실험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그는 거인국에서 주인집 딸의 돌봄을 받고, 나중에는 여왕에게 기쁨을 주며 돌봄을 받는 피보호자의 신분으로 지내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거인국 브롭딩낵에서 언제나 돌봄을 제공하는 존재는 여성으로 전형화되어 있다.


 

한걸음 나아가 인상적인 장면은 걸리버가 보여주는 남성성의 부재다. 예를 들어 짓궂은 거인 여자 하인이 자신의 가슴 위에 걸리버를 올려놓고 희롱한다던가, 걸리버의 앞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갈아 있는 행위는, 그의 존재 자체를 투명인간처럼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자 하인을 보는 걸리버가 불쾌감을 강하게 느끼는 장면을 보고 혹자는 걸리버의 창조자조너선 스위프트가 성불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 모양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 반응을 보인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의 행위 몇 가지로 작가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기에는 다소 성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이 견해를 알게 되었을 때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표피적인 특징이라는 결론에 가깝다.


 

오히려 그가 밝힌 바는 없지만, 동성애적 성향 같은 퀴어한 성향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말이 지배하는 휴이넘 왕국에서 인간을 닮은 야만적인 야후들중 한 암컷 야후가 강에서 목욕하는 걸리버를 덮치려고 했을 때, 지극히 혐오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나, 휴이넘의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인 영국에 돌아왔을 때 동료 인간을 혐오하고 심지어 아내를 야만적이고 냄새나며 더러운 존재로 경원시하는 장면을 보면 말이다.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모습이나 행위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걸리버의 몇 가지 모습만으로 저자를 성불구라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좀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에서 더 들여다볼 때 걸리버가 보여주는 행동은, 성적불쾌감을 주는 대상이 남성이나 여성의 구분이 없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불쾌감을 주는 주체가 남성만도 아니며, 이는 특정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우월적인 지위 아래 이루어지는 역학 관계라는 것, 나아가 인권에 관한 문제라 파악할 수도 있겠다. 이쯤 되면 소인국의 세계는 남성적인 규범과 질서의 수호자로서 걸리버를, 거인국에서는 제한적이나마 여성적 규범과 미덕이 두드러지는 세계의 수혜자로서 걸리버를 발견할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 작가 스위프트는 걸리버가 처하게 되는 환경의 스케일을 달리함으로써 세계를 파악하는 감각과 인식의 경계 넘기를 시도한 셈이다. 이는 자신을 극단적으로 상대화하는 실험을 해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소설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걸리버가 확연히 다른 왕국 네 곳을 여행하고 다시 복귀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한 기회로든 자연의 거대한 힘에 의해서든, 걸리버는 새로운 왕국에 갈 때마다 그곳의 언어를 빠르게 배우며 소통에 성공하고야 만다. 18세기임에도 보기 드문 현지 적응 능력이다. 이 점이 너무나 매끄럽다고 느껴지긴 한다. 또한 그의 자세는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디딜 때 나는 문명화된 유럽 국가에서 왔다는 자의식을 놓지는 않는 듯하다. 소인국에서는 소인들과 그 왕국에 대한 우월감으로 활약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거인국에서는 보살핌을 받으며 다소 무력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이성으로 이룩된 문명국에서 왔음을 끝없이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열심인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내가 여기서 주목한 지점은, 걸리버가 어느 왕국을 가더라도 그 지역의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있는 나름의 악습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악습의 종류는 다르지만 말이다. 심지어 그가 휴이넘의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치 인간 혐오자가 되어 돌아온 듯하다. 인간 존재 자체를 악에 물들기 쉬운존재로 규정하며 꽤나 냉소적인 인간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걸리버가 이런 관점과 태도를 유지하는 한, 그가 n번의 여행을 더 하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결국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점이 의문이었다. 소설에 소개된 네 군데의 왕국은 어쩌면 인간의 다른 모습을 비춰주는 일종의 거울일 수 있기에, 그가 수많은 여행을 더 하고 돌아온다 해도 나는 그가 어김없이 인간의 부정적인 면모와 악습을 더 많이 발견할 것만 같다. 따라서 걸리버가 수많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배워온다 한들, 개인의 내면이 자기 종족인 인간에 대한 혐오와 멸시, 냉소로 채워진 인물이 무엇을 새로 배우거나 건설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 문제는 걸리버 자신이 발을 딛고 선 그 자리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내부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선 인간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거두고 작은 희망을 되찾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테다. 또 어떤 사회의 규범이 그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과 충돌할 경우, 그 규범의 존재 가치를 재평가하고 수정해 나가거나 새로운 규범까지도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키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걸리버가 동료 인간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잘 이해하고 포용하여 인간애를 되찾을 수 있다면 소설의 마지막에서 말하듯 영국에서 살고 있는 야후들의 악덕에 가득한 사회를,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이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375)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악덕이 가득해 보이는 세계에 살면서도 이따금 희망이 닿는 지점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책속으로]

[1] "적어도 덕성을 지닌 사람이 잘 몰라서 실수를 하게 될 경우에도, 악덕한 기질이 가지고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적당히 처리하거나 변호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의 행위처럼 사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69, 제1부 릴리퍼트 기행) - P69

[2] "이 일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친절한 독자들은 용서를 해주기 바란다. (...) 매사를 깊이 사고하려는 현명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야말로 자신의 사고와 상상력을 깊고 풍부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개인이나 사회인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여행을 비롯한 여러 여행기를 세상에 내보내는 이유다."(116,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16

[3] "왕은 로열 서브린 호의 돛만큼 커다란, 하얀색의 왕홀을 가지고 뒤에 기립해 있는 대신을 향해 몸을 돌리고 ‘인간의 위대함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와 같이 작은 벌레도 그것을 흉내 낼 수 있다니 말이다."(132,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32

[4] "그대의 이야기와 내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대의 민족 대부분이 세상의 표면에 기어 다니게 된 생물 중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167, 거인국 국왕이 걸리버에게 한 말) - P167

[5]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영국의 독자들은 그의 인품에 대해 낮게 평가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큰 사람들의 이러한 결함이 무지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물질문명이 이룩한 것처럼 정치를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171,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71

[6] "많은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거인)도 인류 전체가 겪고 있는 똑같은 악습으로 인해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귀족은 권력을 위해, 시민들은 자유를 위해, 왕은 절대적인 지배력을 위해 서로 다투어 왔다."(174,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74

[7] "그들을 서로 비교해보니, 로마의 원로원은 영웅과 반신반인의 모임처럼 보였으며, 오늘날의 국회는 봇짐장수, 소매치기, 강도, 깡패들의 집단처럼 보였다."(249,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49

[8]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인가에 대해 나는 가끔씩 생각하고는 했다. 스트럴드블럭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행운이 온다면, 영원한 생명과 죽음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함으로써 나는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내가 가장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은 불사신들이다."(266-267,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66

[9] "죽지 않는 생명을 얻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최대의 적으로 여기면서 하루만이라도 더 살았으면 하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도망을 치게 마련이다."(269,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69

[10] "혈연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싸우고 싶은 욕망은 커지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는 궁핍하고, 부유한 나라는 교만하다. 교만과 궁핍이 부딪히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군인은 가장 명예스러운 직책으로 간주된다. 군인이란 그를 결코 공격한 적이 없는, 그와 같은 종족을 가능한 많이 죽이도록 고용된 야후이기 때문이다."(315,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15

[11] "나는 돈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하얀 것을 검다고, 검은 것을 하얗다고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노예나 다름없다."(318,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18

[12] "나는 주인을 따라서 모든 허위나 기만에 대해 완전한 혐오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결심했다."(329) - P329

[13] "정부와 법률 체계는 막대한 결함을 지니고 있는 이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331,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31

[14] "호수나 샘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게 될 때, 나는 한 마리의 야후에 불과한 자신에 대해 증오와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나 자신의 모습보다는 차라리 야후들의 모습을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참을 수 없었다."(353,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53

[15] "훌륭한 이성을 지니며 살고 있는 휴이넘은 자신들의 좋은 덕성에 대해 교만스러운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튼튼한 다리와 팔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다리나 팔이 잘린다면 슬픈 일이지만, 어떠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다리와 팔이 건강하다고 해서 교만한 마음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영국에서 살고 있는 야후들의 악덕이 가득한 사회를,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이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도덕함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날 생각조차 하지 않기를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경고한다."(375, 마지막 문장)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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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의 현상학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음, 주성호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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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못하겠지만 또 샀군요. 꾸준히 다시 번역되고 재평가되며 재해석되는 책들이 나오겠지요. 또 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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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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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인형: 구슬 @kooseul23]


 


문명의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의 '우주 고딕' 소설


궤도

 


서맨사 하비(Samantha Harvey) 지음

송예슬 옮김 [서해문집] (2025)

 



서맨사 하비의 소설 궤도(Orbital) 2023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이어서 2024년에는 곧바로 부커상을 수상하고, 국내에는 2025년 여름에 출간되었다. 말하자면 이 번역서는 하비의 따끈따끈한 작품이다. 소설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실려 있는 한 그림에는 세계 지형의 윤곽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지도 위에 1에서 16까지 숫자가 적힌 곡선이 이어져 있고, ‘북반구가 낮일 때 지구 궤도의 24시간이라는 캡션이 붙어 있다.


 

처음 책을 펼쳐보았을 때 이 책은 은유로서가 아니라 정말 우주선의 궤도를 그린 지도구나라는 점을 알게 된다. 나아가 소설을 어느 정도 읽고 나서야 이 무질서해보이는 번호들은 지구를 도는 우주선 혹은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우주정거장이 매90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으로 인공위성/우주정거장의 궤도가 한쪽 방향으로 조금씩 밀려나는 듯한 선들이 보인다. 게다가 이 선들이 순차적으로 이동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언가 규칙적인 운동을 암시한다. 그러면 또 궤도는 왜 16개일까 싶은데, 이는 지구주위를 도는 우주정거장이 약 90분 동안 지구 상공을 한 바퀴 돌며 이동하는 궤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소설은 처음부터 다음과 같이 시작하며 낯선 느낌을 만들어 낸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돌다 보면 너무 함께이고 또 너무 혼자여서 생각과 내면의 신화조차 이따금 한데로 모인다.”(7, [궤도 1])

 


이제 독자는 우주에서 벌어질 스펙터클이 조만간 시작되는 건가, 기대해보다가도 책의 절반을 넘어서까지 아무런 사건이 보이지 않으면 당황하기 시작한다. 소설이 그만큼 점점 더 낯설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른 소설에서 체감되는 플롯이 이 작품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일 테다. 이 소설의 목소리는 한편으로 칼 세이건이 태양계 탐사선 보이저호가 태양계 밖을 나가기 전에 카메라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 지구를 바라보았던 시선에서 창백한 푸른 점을 발견하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고립감 속에서 독자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시선이 바로 이 작품에서 제일 먼저 드러난다.

 


이 소설은 과감하면서도 실험적인 문체, 시와 같은 잔잔한 리듬과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지구 표면를 벗어나 자신이 떠나온 지점을 바라보는 우주적 존재로서 자신에 대한 자각, 우주 속의 작은 점과 같은 존재가 자기 자신과 지구의 운명에 대해 명상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정보만 주어지기에 캐릭터 혹은 서사에 대한 몰입이 약하게 다가올 수 있다. 이 점은 기존의 소설 문법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생소하고 밋밋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반면, 캐릭터들이 지구를 바라볼 때 느끼는 독특한 정서를 담은 표현들은 매우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특히 화자가 독백하듯 들려주는 이야기는 거대한 에코 체임버(반향실) 속에 있는 한 지구인의 목소리가 배경 소음처럼 이어지는 반향같이 들린다.

 


화자는 자신이 타고 있는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을 거대한 금속 알바트로스라고 비유한다. 이 말이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던 것은, 1년 넘게 땅을 밟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 하늘에 떠 있는 태평양의 알바트로스처럼 그의 우주선이 지구 주위를 도는 동안 끈임 없이 추락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곳은 지구와 가깝고 중력이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자유 낙하 상태다. 그러니까, 나는 게 아니라 추락하고 있었다.”(191, [궤도11]) 이는 놀라운 관점의 전환이다. 점처럼 무한히 작아 어떤 존재로도 느껴지지도 않는 존재, 하지만 사유하는 존재의 자기 발견의 순간이 아닌가. 고립된 우주정거장에서 우주인들끼리 서로 부대끼면서도 이들 사이의 대화는 작품에서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 여겨진다. 독자는 이 금속 알바트로스에 타고 있는 우주인들의 생과 사 이 경계에 자리 잡고 자신과 문명을 사유하는 존재 에 더 주목하게 된다.

 


수많은 소설의 형식과 달리, 이 이야기에서 화자는 역동적인 체험이나 사건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우주인 각자의 인간적인 문제,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나 회상이 의식에 따라 두서 없이 자리를 잡는다. 뿐만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생각, 인류의 오만과 지나친 자기애, 그리고 멈추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 젠더 갈등과 서로에 대한 몰이해의 문제 등으로 사유를 넓혀 간다. 더 나아가면 인간과 지구라는 행성과의 관계에 대해 관조하기도 한다. 이른바 인간이 야기한 환경 문제와 지구 온난화의 문제를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태양도 수명이 있듯이 지구와 인류에게도 종말은 불가피하다. 지금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인류의 종말이 인류에게 다가 온다는 자각, 또는속도에 따라 다라 옮아 대신 덮는다. 바로 이것이 중요한 건 속도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우주의 한 가운데에 금속 알바트로스인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자신과 인류를 사유하고, 나아가 문명의 죽음을 상상하는 시선을 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문학 속의 고딕과 관련한 전통을 떠올려 보았다. 중세 유럽의 문학에서는 어떤 기준으로부터 이탈하여 이질적이고 괴이한 이름부터, 공포스러운 정서에 이르기까지. 여기 에 주목한 유럽적 고딕 양식이 있었다면, 이 정서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 오면서 황량하고 거대한 육지의 깊은 내륙에서 지독히 고립된 인간들의 군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미국 남부의 고딕이 있다. 이쯤되면 미국 사회에서 이 모습을 산업화의 여파로 이어진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맞물려 독특한 정서를 전달한다. 이를테면 이 분야에 대한 에드거 앨런 포를 위시하여 플래너리 오코너, 셔우드 앤더슨, 팀 오브라이언, 존 윌리엄스 등의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궤도 에서도 미국 남부의 고딕에서와 같은 다른 듯 같은정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구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추락하고 있는존재의 절대적인 고립감, 금속벽을 경계로 삶과 죽음의 두려움과 문제들을 직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 화자 혹은 작품 속 캐릭터 개인의 서사가 강하게 개입되면서도, 지구인 대부분이 경험해보지 못한 환경(이를테면 하루에 16번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금껏 누가 경험해 보았겠는가?)은 인간의 문제를 좀 더 먼 거리에서 지켜보고 고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극적인 플롯이 없음에도 매우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우주인, 인간은 결국 이런 존재론적인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다. 장소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든 시간대에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117)는 경험을,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처음 사용하는 감각인 까닭이다.

 


하비의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유럽의 고딕이나 미국 남부의 고딕 문학이 주는 정서의 연장에서, 한편으로는 이전의 고딕 문학과 달리 지구를 벗어나 있는 인간의 시선과 그 인간이 느끼는 내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고딕양식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물론 처음 읽을 때는 이게 소설인지 아니면 우주인 남긴 실제 보고서에 메모를 해둔 글인지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달리 말해 이 글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나아가 이 소설처럼 뚜렷한 플롯이 부재하면, 독자들은 몰입을 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소설이 중반 이후 넘어가면 비로소 아무 플롯도 없어 보이는 고요한 작품이 비로소 조금씩 익숙해지고 눈에 들어온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서맨사 하비의 소설을 우주 고딕’(Cosmic Gothic)이라 새롭게 부를만하지 않을까 제안해본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라도 이미 사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주인들의 경험도 점차 확대되면서, 우주인들이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사건들을 반영한 문학이 본격적으로 나온 현상에 새롭게 주목해 보는 것이다. 지구 중력에 속박된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에 고립된 채, 지구라는 행성이 직면한 위기와 문제를 직관하고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시도야말로 기존에서 보았던 고딕 양식과는 차별점을 갖는다. 나아가 인류의 멈출 줄 모르는 정치 행위와 인류가 서서히 맞이하게 될 문명의 죽음을 마주하고 명상하는 일은 결국 앞서 언급한 우주 고딕으로서 어울리지 않은가.

 


저자가 주목한 바와 같이 인류가 현재 마주한 큰 문제들에 대해 구성원 개개인이 인간 스스로 가속화한문명의 몰락을 중단 시킬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인류의 문명이 쇠락해가고 종말을 맞이할 것이란 사실 앞에서 이를 중단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말이다. ‘우주 고딕에는 이런 압도적인 운명, 하지만 어느 누구도 회피할 없는 흐름에 대한 두려움의 정서가 있다. 이는 기존의 고전적인 고딕양식의 정서를 계승하면서도 지구 밖에서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일탈과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우주 고딕이란 표현은 나름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혹은 이 소설이 우주라는 절대 고립 속에서 지구를, 인류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며 동시에 인류가 마주한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는 지구인의 아포리즘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책속으로]

[1] "가끔은 놀라운 생각을 한다. 자신들이 진공 심연을 홀로 지나는 잠수함을 타고 있다는 생각. 밖으로 나가면 안전할 것 같지 않다. 지구 표면에 다시 떨어졌을 때 이들은 생경한 존재들이리라. 미쳐 버린 낯선 세상을 배우러 온 외계인들."(39, [궤도3, 상행]) - P39

[2] "지구가 하찮고 작은 행성임을 깨닫고 우주 속 지구의 자리를 비로소 이해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멀리 지구와 떨어져야 한다."(51, [궤도4, 상행]) - P51

[3] "왜 이러고 있지? 절대 번영할 수 없는 세상에서 바득바득 살아 보려고 하는 이유는 대체? 완벽한 지구가 저기 있는데 굳이 우주가 원치 않는 곳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갈망은 호기심일까 아니면 배은망덕함일까."(89, [궤도 5, 상행]) - P89

[4] "신경질적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인류를 어떻게 아름답게 봐줄 수 있겠는가? 인간의 오만함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그에 필적할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뿐이다. 남근을 닮은 우주선을 우주로 쏘아 보내는 것만큼 오만한 행동은 또 없다. 우주선은 자기애로 미쳐 버린 종족의 토템이다."(96, [궤도 5, 상행]) - P96

[5] "눈 모자를 쓰고 양옆에 구름을 끼고 있는 안데스산맥 너머 북쪽으로 향하자 연한 빛이 보인다. 구름이 듬성듬성해지면서 저 아래 화재로 물러터지고 맨살이 훤히 드러난 아마존이 나온다."(99, [궤도 5, 상행]) - P99

"이게 세상이야. 남자들의 놀이터, 남자들의 실험실. 경쟁할 생각은 하지 마. 그래 봤자 결국 사기만 떨어지고 열등감과 열패감을 느끼게 되니까. 왜 절대 못 이기는 경주를 시작하고, 기를 쓰고 지려고 달려드니. 그러니 딸, 꼭 기억하렴. 너는 열등하지 않아. 그걸 굳게 명심하고서 존엄한 존재로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가렴. 엄마를 위해 그렇게 해 주겠니?"(108, [궤도5, 하행]) - P108

[7] "달을 걷는 사람들을 경이롭게 생각해도 되지만 그 영광의 순간을 위해 인류가 치른 대가를 절대 잊지 말거라. 인류는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몰라."(109, [궤도5, 하행]) - P109

"우리(우주비행사들)에게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디에서든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가상의 공간 같은 이곳 우주선까지 오기 위해서 말이다. (...) 국가도 국경도 없는 이 최후의 전초 기지는 생명체의 한계를 밀어낸다."(112, [궤도 6]) - P112

[9] "그렇게 유럽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당신 참 안쓰럽네요, 음성은 여전히 따스하게 말을 건넨다. 모든 시간대에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요. 이 거대한 금속 알바트로스를 타고 경도를 넘나들면서 두뇌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요구받는다니요."(117, [궤도 6]) - P117

[10] "오염되고 온난화되고 남획되는 대서양에서 아찔한 네온색 또는 붉은색 조류가 대발생하는 현상은 대부분 정치와 인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정치의 영향력은 너무나 자명하게 보인다. (...) 인간의 욕망이라는 실로 놀라운 힘이 지구를 형성한다."(130-132, [궤도 7]) - P130

[11] "빛나는 서구 자본주의가 꿈꾸는 우주 같은 건 여기 없다. 이곳은 불굴의 공학 기술과 천재적인 실용주의를 숭배하는, 칙칙하고 효용을 중시하는 육중한 사원이다."(170, [궤도 10]) - P170

[12] "우리는 다른 존재들보다 부싯돌 몇 번 부딪친 것만큼 앞서 있을 뿐이다."(187, [궤도11]) - P187

[13] "이들은 지구의 낮이나 밤 풍경이 펼쳐진 창가에 떠 있다가 새삼 자신들이 추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이곳은 지구와 가깝고 중력이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자유 낙하 상태다. 그러니까, 나는 게 아니라 추락하고 있었다."(191, [궤도11], 관점의 전환) - P191

[14] "지금 우리는 무상하게 피어난 삶을 살고 있다. 광란의 존재가 딱 한 번 손가락을 튕기면 모두 끝나리란 것도 안다. 여름에 터져 나오는 이 생명은 새싹보다 폭탄에 가깝다. 이 풍요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201, [궤도13]) - P201

[15]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지구는 물질성이 희미해지고 환영이나 성령에 가까워진다. 전 지구가 발아래를 지나갔다."(225, [궤도13])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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