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책

야콥 폰 윅스퀼 지음

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2012)





동물행동학자 야콥 폰 윅스퀼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2012)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저자 윅스퀼은 에토니아 출신의 독일 생물학자로 현대적인 생태학을 제시한 과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생물학자로서 윅스퀼은 생명체가 주변 환경을 어떻게 인지하는지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1934년에 제안한 움벨트(umwelt)라는 용어는주변 세계’(um: 주위/주변 + welt: 세계)정도로 해석된다. 윅스퀼은 감각이 가능한 모든 생명체(짚신벌레, 아메바, 진드기 등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가 각 생물종의 감각기관에 의해 인지된 세계를 의도했다. 따라서 그의 움벨트는 불변하고 어느 생물종에게나 동일한 세계가 아니었다. 각 생물종의 고유한 감각기관에 의해 재구성된, 주관적인 세계의 존재를 인정한 셈이다. 곧 각 생물종에게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하나의 객관적인 세계/우주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생물종에게는 각 개체에 의해 파악된 고유한주관적 세계가 존재하게 된다. 그의움벨트개념은 주관적인 세계이자 전체 우주의 일부라고도 볼 수 있다.


 

윅스퀼은 각 생물종에게서 형성된움벨트가 크게 두 가지 작용을 거쳐 순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이 관계의 과정을기능적 원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기능적 원환과정에는, 우선 외부 자극을 감각하고 이 자극을 수용하는 과정, 그리고 신경계를 통해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작동적) 과정의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체가 체온이나 체내의 이온농도를 조절하듯, 생명체의 생존 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음의 피드백(되먹임)을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영국의 과학 저술가 에드 용은 자신의 책 <이토록 굉장한 세계 An Immense World>에서 본격적으로 여러 동물의 감각에 대해 주목한다. 그가 처음부터 윅스퀼의 움벨트개념을 소개하는 점이 흥미롭다. 에드 용은 이 개념에 대응하는 자신의 용어로,‘감각거품(sensory bubble)이란 참신한 표현을 사용한다. 각 생물종이 고유하게 인지한 세계 영역을 은유한 표현으로 그럴듯하지 않은가?

 
















윅스퀼의 사상은 세계를 이해하는 기존의 큰 틀인 기계론(mechanism)과 물활론(animism)의 관점을 벗어나며 동시에 인간중심적인 의인주의를 벗어나고자 했다. 큰 틀에서 움벨트개념은 모든 생명체가 나름의움벨트를 지니는 주체라는 인식에서 칸트주의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기존의 인간중심적/인간우월적인 시각을 탈피하여 모든 생명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비인간의 대상까지 고려하여 확장하게 해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 지점은 현재 모든 생물종이 무생물과 관계 맺고 서로 얽히는 존재로의 시각 전환 및 확장을 시도하는 현대의 철학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윅스퀼의 사상을 간단히 다시 정리해보면, 그는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한 생물(주로 동물에 해당)주변 세계와 맺는 관계, 그리고 이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미에 주목했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각 생물(동물) 주체의 지각(감각) 공간과 행위(동작) 공간으로 구성된 틀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했다. 이번 책읽기에서는 윅스퀼이 제시한 다양한 동물들의 주변 세계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고, 타자에 대한 이해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도 했다.


 

사실 윅스퀼이 제안한 용어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물루 밀러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자신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으로 언급한, <자연에 이름 붙이기>란 책에서였다. 이 책은 미국계 진화생물학자 캐럴 계숙 윤의 분류학에 관한 역사를 다룬 책이었다. 이 책의 초반부터 캐럴은 윅스퀼의 움벨트개념을 소개하며, 18세기 초의 카를 린나이우스가 <자연의 체계>를 발표하며 동식물에 관한 이명법을 정립한 이야기를 한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자연을 분류하고 이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인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안의움벨트가 크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의 책에서는 린나이우스 이후 현대 분류학에 이르는 역사를 통해, 인간의 감각을 불신하고 배제해온 여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을 우리의 감각을 배제함으로써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심감을 얻은 동시에, 우리는 자연과의 단절을 격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캐럴은 윅스퀼이 90년 전에 모든 생물체를 하나의 주체로 인정했던 것처럼, 세계를 보는 틀이자 시선인 우리 안의 움벨트를 거부하고 배제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에서 다시 자연과의 연결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면 거의 90년 전에 한 생물학자가 제기한 개념을 우리가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은, 최근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로봇/AI/포스트휴먼과 관련한 시선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윅스퀼은 짚신벌레, 진드기 한 개체에도 주체의 지위를 부여했는데, 우리는 로봇이나 AI에게 주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현재의 상황에서는 없을 것 같다. 주체에게 기대되는 책임이라는 윤리적법률적 관점 또한 AI나 로봇에게 온전히 기대할 수는 없는 단계라고 이해한다. 이를테면, AI로 구동되는 자율주행 차량이 오작동을 일으켜 인명 사고를 내거나 운전자가 사망한 사례를 접하곤 한다. 이런 경우, 정확히 누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의 법적 문제를 판단하는 일도 무를 자르듯 간단명료하게 결론이 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가 처음 겪는 중이다.


 

한편 윅스퀼이 주로 동물의 감각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감각과 자극의 인지는 신체/을 통하지 않고서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달리 말하면, 신체를 지니지 않은 존재가 세계를 인식하고 체험할 수 있을까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로서는 AI나 로봇이 우리가 보는 외장이 아닌 진정한 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주체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앞으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AI나 이 능력을 장착한 로봇이 자신의 몸을 감각하고 인지할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 겠다.


 

이번 책읽기에서는 각각의 독립된 주변 세계를 형성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과연 이해할 수 있을지, 곧 타자에 대한 이해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았다. 사실 이 논의의 명확한 결론보다는, ‘움벨트가 이러한 논의와 노력의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함께 했더랬다. 한 참석자는 기존에 잘 알려진 서사를 다른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쓴 소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 인간종 가운데에서도 서로 얼마나 몰이해와 오해 속에서 살고 있는지 깨닫곤 한다. 아울러 타자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반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체험치, 그러니까 경험적인 움벨트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는 말을 더한 의견도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책에서는 환경 세계의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시작한 장을 꺼내 이야기해 보기도 했다. 윅스퀼이 떡갈나무를 예로 든 부분이 나온다. 삼림 관리인이 이 나무를 바라볼 때 그에게는 이 나무가 목재나 땔감으로 보일 것이라 말한다. 반면 어느 여자아이에게는 떡갈나무가 요정이나 악령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고, 여우나 올빼미에게는 각각 뿌리 부분이나 줄기가 안식처를 제공하며보호라는 내포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새들에게는 가지가 둥지를 지을 수 있는 안식처(보호)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 말한다. 이런 상황을 이해했다면, 우리의 삶에서도 이 움벨트가 지니는 고유한 특징 혹은 제한을 염두에 두고 타자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타자를 이해하는 일이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타자와의 접점을 부지런히 마련하고, 우리 각자의 움벨트 영역을 타자의 그것에 대입해 보려는 노력이 따라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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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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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어긋남과 파국적 운명에 관한 우화

-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알마] (2024)

 



이 투툼한 분량의 책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 것일까? 간단히 말한다는 것은 커다란 벽처럼 느껴진다. 처음부터 몇 페이지가 지나도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문장이 이어지는 만연체는 이 벽을 무한히 늘리는 느낌이다. 거대한 우주의 먼지 하나와 같은 인물들의 내면에서 흘러가는 의식을 몽롱한 상태로 따라간다. 그럼에도 눈에 들어오는 실마리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건 여러 등장인물들이 맺는 관계들이었다. 소설의 인물들이 서로 맺는 관계가 하나같이 소통에 실패하고 파국에 이르기 때문이다. 결코 만날 수 없는 다중우주의 세계가, 한 점에서 만나 응축된 상태로 스쳐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곳은 헝가리의 어느 중소도시다. 남작 벵크하임 벨러는 청소년기에 이곳에서 살다가 가족을 따라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고, 46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기에 10대 시절 잠시 벵크하임과 썸을 타던 여인 머리커가 이야기 구조상 눈에 들어오는 중심인물이다. 두 사람은 결국 재회하지만, 남작은 머리커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상대를 앞에 두고 마치 다른 사람에게 하듯 머리커를 향해 머리커에 대한 고백을 전하는 남작. 아무리 반세기가 지났다고 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옛 연인과 마주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마치 치매 증상을 겪는 가족을 앞에 둔 가족의 심정이 이러하지 않을까.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다. 마주보고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언어로는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떠올리게 해주는 듯한 장면이다.


 

또 다른 문제는 남작의 귀향으로 고향 도시 전체가 들썩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도시의 시장이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투사하여 만들어 낸 착각과 확증편향 때문이기도 하다. 도시 전체가 집단 망상에 빠져든 것 같은 상황이다. 한편 남작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우연의 유희를 즐기는 귀빈의 성향’(240)이라고 표현한 도박벽이었다. 그의 귀향을 재촉하게 했던 것도 어느 정도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도박판에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시장의 기대와는 달리, 남작은 그야말로 빈털터리 상태였다. 반면 시장은 남작이 말년에 거액의 재산을 고향으로 가져와 환원하는 것이라 굳게 믿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작의 귀향 목적은 자신이 어릴 때 걷던 공원과 추억의 장소들을 마지막으로 거닐어보는 것이었다. 도박벽으로 몰락한 상황과는 다르게 남작의 소망은 소박하고 순수하기까지 하다. 오래전의 두 연인은 결국 재회했지만 그들이 어긋나버린 관계만큼이나, 이 도시나 시장과 남작과의 관계는 결국 거대한 파국에 이르게 될 운명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맺는 관계가 이처럼 파국적으로어긋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가 정답처럼 제시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내가 처음 주목해본 실마리는 남작의 오래전 연인 머리커에서 우선 찾아본다. 남작의 귀향 목적 그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오로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이 도시를 걷고, 그곳에 있던 옛 연일을 만나보는 것이었으니까. 이 소망만큼은 천박하거나 속물적이지 않다. 머리커 역시, 옛 연인이 귀향하여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서 설레는 감정으로 행복하기까지 했다. 이건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솔직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닌가. 여기까지도 큰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소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만큼 복잡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이 무한한 행복을 누군가와, 친척이나 지인과 나누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나눌 사람을 아무도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도러에게는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허사였고 이렌조차도 이것을, 그녀 영혼의 유일한 비밀을 감당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276)


 

머리커가 자신의 내밀한 행복감을 나눌 사람이 없다고 여긴 대목은, 머리커가 매우 고독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녀는 자신의 피붙이였던 손녀딸 도러나 15년 이상 사귄 친구 이렌과도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나누고 공유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고립된 섬처럼 느꼈다. 이런 모습에서 머리커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을 부각시켜주는 인물로 보인다. ‘고립된 섬으로서의 인간, 나아가 고독한 현대인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 하나는, 고독한 존재인 인간들이 서로 맺는 관계와 어긋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해준다.


 

이처럼 작품의 이야기가 수많은 관계들의 어긋남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 점이 이야기의 전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 점을 생각해보다 화자가 언급한 칸토어의 원에 관한 문장이 기억에 남았다. 소설에서 언급된 칸토어는 수학에 집합 개념을 도입하고, 무한에 대한 탐구를 했던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를 가리킨다. 그가 했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칸토어가 자신의 답을 제시한 문제는 모든 것이 원을 그리며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칸토어, 상트페테르부르크 할레의 이 불운한 혜성과 함께 우리는 수만 번 출발한 그 지점으로, 수만 번 돌아간 그 지점으로 돌아가는 거야...”(473)


 

원에서는 어느 한 점에서 출발하더라도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정신병원에서 고독하게 죽었던 칸토어. 그가 이야기한 처럼, 원은 무언지 모를 신비함을 품고 있는 듯하다. 특히 출발점으로 회귀하는 모티프는 고대 지중해 지역의 신비주의 전통을 떠올리게도 한다. 다만, 회귀의 특성이 기하학의 원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과연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현실에서의 삶은 기하학처럼 정확히 출발점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세계에는 늘 우연성이 개입하는 까닭이다. 이 세계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우연성, 혹은 불확실성의 요소는 우리의 삶을 오히려 출발점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요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의 인물들이 맺는 관계의 총체적 어긋남 역시 현실 속의 우연성때문이 아닐까. 달리 표현하면, 현실은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명의 힘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우연성의 힘이 겨루는 장이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 비가역적인 현실의 역설을, 인물들이 맺는 파국적 관계로부터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소설이나 현실에서 인물들이, 혹은 존재 자체가 서로 맺는 수많은 관계가 어긋나고, 때로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이는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고립되었다는 것, 존재의 고독감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마치 칸토어 이론에서처럼 모든 존재가 스스로를 가두는 감각의 거품과도 같은 세계 속에서 서로가 하나의 접점을 공유하며 돌아가는 원과 같은 존재로 이해해볼 수는 없을까. 각각의 존재는 이 우연성의 요소 때문에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상태다. 존재는 본질적인 고립 속에서 소통 불능이라는, 이미 불가피한 상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 현실을 극복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까? 이처럼 질문해볼 수 있겠다. 따라서 소설이 내게 말하고 있는 바는, 본질적인 관계의 파국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정말 지내고 있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정리해보자. 소설에서 내가 느꼈던 것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들의 맺는 관계는 늘 어긋나고 결국 파국에 이른다. ‘고립된 섬으로서의 존재들은 결국 이 운명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은 칸토어의 명제처럼 돌고 돌아 수동적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존재일 뿐일까 하는 문제가 걸린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어쩌면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고독한 존재로서 무기력하게만 느껴지는 이 상황을 바꿀 여지는 없는가. 나는 무모해보이긴 해도, 벵크하임 남작의 고백에서 극복의 가능성을 찾아보기로 한다.

 


나의 능력 중에서 영원히 부서지지 않는것 단 하나가 있는데, (...) 이 도시 안에서 당신을, 마리에타를 떠올릴 때 그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오. 이제 나는 예순 다섯이 넘었소, 어쩌면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내 삶을 지탱한 두 가지를 고백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소만 그것은 내가 한 도시를 알았고 그 도시에서 당신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또한 털어놓을 수 있는바 내게 이것의 의미는 오직 하나라는 것으로, 그것은 이 생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이 도시,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당신이라는 것이니 내가 여기서 무슨 대단한 비밀을 실토하는 것이 아님을 당신도 분명히 알 터인데,...”(223-224)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문장 속에서도 남작의 고백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외롭고 고독한 존재들이 각자의 무거운 삶을 지탱해갈 수 있게 한 힘이란 어쩌면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것들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남작은 곧바로 나에게도 묻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 당신을 살아가게 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 같았다. 남작의 경우, 그 대상은 결코 거대한 재산은 분명히 아니었다. 모든 재산을 도박판에서 다 잃고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을 놓지 않게 해주는 무엇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작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던 도시’,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 머리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머리커의 미소와 그녀가 미소지을 때 볼에 패이는 보조개와 같은 구체적인 기억이 남작 자신을 지탱하게 해주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친애하는 부인-정말이지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저를 살아 있게 했습니다, 그 미소가요, 마리에타에 대한 저의 사랑 말고는 제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무엇 하나 가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어떤 학식에도 흥미가 없었습니다, 예술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는데, 언제나 그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368)


 

비록 현실의 우연성과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 내미는 손길로 남작은 끔찍한 결말로 세상을 뜨게 되지만, 나는 최소한 그의 인생이 불행했다라는 평가를 내리지 않으려 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에게는 머리커에 대한 기억(미소)과 용서를 구하고자 다시 만나야 겠다는 욕구를 다시 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고독하고 힘겨운 삶의 여정 속에서도 그는 최소한 존재의 고통을 견딜만한 기억하나는 지니고 간 인물이 아닌가. 우리의 삶이 무한히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듯해 보여도, 현실에서 기억을 지닌 존재가 정확히 같은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의 차례를 보면, 형식상 악보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경고의 전지적 화가가 악단의 지휘자처럼 음을 따라 부르다가 마지막에는 다 카포 알 피네(Da Capo al Fine)’라고 표기해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다 카포(Da Capo, 혹은 D.C.)’처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다. 알 피네이 표기가 있는 곳에서 곡을 끝내라는 지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목차의 마지막에 도달하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작가는 지시해놓은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소설의 마지막이 인상적이다. 도시 전체가 불타고 있는 상황에서, 고아원 출신의 지체장애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급수탑에 올라 불타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들리지 않는 음악에 맞추어 지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지전능한 존재는 지체장애인의 육체, 곧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거대한 소멸혹은 청소를 지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의 우연성, 혹은 불확정성을 일거에 무화하고 다시 칸토어의 원처럼, 원점으로 되돌아가도록 지휘하는 듯한 장면이다. 실로 그로테스크적인 풍경의 정점을 찍는 장면이면서 압도적인 결말이다. 이번 기회로 작가 라슬로의 작품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 작품 전반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암울하고 비극적인 사회 현실과 인간의 고독한 운명을 기괴하거나 때로는 극단적인 과장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는 유럽적인 부조리극의 전통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남작의 사망 전까지는 곳곳에서 희극적인 요소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는 암울하고 비극적인 상황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희극과 비극의 공존을 통해 더욱 그로테스크한 성격이 부각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당신에게는 당신을 살아있게 하는, 살아가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가?’라고 묻는 작품이었다.








[책 속으로]

[1] "나의 능력 중에서 영원히 ‘부서지지 않는’ 것 단 하나가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이 도시를, 그리고 이 도시 안에서 당신을, 마리에타를 떠올릴 때 그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오. 이제 나는 예순 다섯이 넘었소, 어쩌면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내 삶을 지탱한 두 가지를 고백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소만 그것은 내가 한 도시를 알았고 그 도시에서 당신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또한 털어놓을 수 있는바 내게 이것의 의미는 오직 하나라는 것으로, 그것은 ‘이 생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이 도시,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당신’이라는 것이니 내가 여기서 무슨 대단한 비밀을 실토하는 것이 아님을 당신도 분명히 알 터인데,..."(223-224) - P223

[2] "당신도 알다시피 마리에타, 나는 가장 힘들 때 이 도시를, 그리고 그 속의 당신을 생각하면 언제나 기운이 솟았고 실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당신을 찾아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으니 나의 사랑하는 마리에타, 당신이 있기에-그는 이렇게 썼으나 이제 종이가 피아노 책상 표면을 저절로 미끄러지다시피 하여 쓰레기통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당신의 얼굴, 당신의 미소, 그리고 당신이 미소 지을 때 아담하고 어여쁜 뺨에 생기는 자그마한 보조개 두 개는 내게 무엇보다, 다른 무엇보다 귀중했소."(224) - P224

[3] "그녀(머리커)는 자신이 느끼는 이 무한한 행복을 누군가와, 친척이나 지인과 나누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나눌 사람을 아무도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도러에게는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허사였고 이렌조차도 이것을, 그녀 영혼의 유일한 비밀을 감당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276) - P276

[4] "그녀가 두 편지 중 하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단연코 아무도 없었던 것은 자신이 느끼는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고..."(279) - P279

[5] "하지만 너무나 실망스러운 때에 이 일이 자신(머리커)의 삶에서 한 번 더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어서, 그녀는 기적이, 그녀가 언제나 기다렸으나 언제나 실망으로 끝난 기적이 또다시 일어나리라고는 조금도 믿을 수 없었던바..."(279) - P279

[6] "친애하는 부인-정말이지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저를 살아 있게 했습니다, 그 미소가요, 마리에타에 대한 저의 사랑 말고는 제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무엇 하나 가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어떤 학식에도 흥미가 없었습니다, 예술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는데, 언제나 그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368) - P368

[7] "칸토어가 자신의 답을 제시한 문제는 모든 것이 원을 그리며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칸토어, 상트페테르부르크 할레의 이 불운한 혜성과 함께 우리는 수만 번 출발한 그 지점으로, 수만 번 돌아간 그 지점으로 돌아가는 거야,..."(473) - P473

[8] "두려움이 인간 존재를 정의하는 것임은 그것이 단순한 감정이요, 쉽게 없애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인데,..."(483) - P483

[9]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에 의해 유도되는가의 문제는 우연성에, 그것도 지독하게 의존하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훨씬 철저히 다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니, 말하자면 우연성은 더도 덜도 아닌 우연성이 조건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성질이요, 이제, 사건의 지평선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덩어리로, 하지만 무한하지는 않아도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 덕에 단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덩어리로 돌아가-여기서는 우리 또한 우주의 일부라고 말해야 하는데..."(487) - P487

[10] "내가 말하고 싶은바 문화를 낳은 것은 바로 두려움과 그 무지막지한 힘이기 때문이니 (...) 네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인류 문화의 요람이 황하 유역이나 이집트가 아니라, (...) 두려움 자체라는 것이며..."(489)


"우리가 이해한다면, 모든 인류 문화의 토대가 거짓임을 우리가 정말로 깨닫는다면, (...) 그렇다면 우리의 열정을 자극한 모든 것, 인간의 창조적 정신이 낳은 모든 유일무이한 작품들이 환상에 기대고 있으며 그 환상에서 생겨났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니,..."(491) - P489

[11]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사람이 왜 죽어야 하는지가 아니야,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가라고, 라고 벵크하임 벨러 남작이 곰곰이 생각하다가..."(494) - P494

[12] "그는 이 착각 덕에 숲을 통째로 독차지하고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고독을 달콤한 맛을 음미할 수 있었으며 이제 다시 이곳에 찾아와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이 길을 다시 한번 거닐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선물이라며 남작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했으나 애석하게도 다시 한번 눈에 눈물이 가득 찬 것을 느꼈는데,..."(509) - P509

[13] "그가 태어나 이 삶을 마지막 나날에 이르기까지 살아야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말하자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야 했던 것은 왜인가, 그는 이미 몇 차례 그랬듯 걸음을 멈추었는데, 마치 맞은편에서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였으나 아니었고..."(515) - P515

[14] "그렇다면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넘어서는 그 무엇도 일어나지 않았고, 또한 그런 정도로는 일어나지 않은 그런 삶은 어떤 삶인가, 그 안에는 사랑이, 세상 안에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이 환상이라는 사실이 만년에야 드러난 것은 그것이 실제로도 환상이고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마도 결코 존재하지 않은 것은 실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요, 그 대상이 결코 실재일 수 없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마도 결코 존재하지 않은 것은 실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요, 그 대상이 결코 실재일 수 없었기 때문이지, 그때의 그것, 그리고 지금 그 자리를 차지한 그것은 처량하고 적막하고 공허하고 기만적이었으니 이 모든 일에 무슨 의미가 있었느냐며 남작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 좋으신 주님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죽음은, 침목 사이로 행진하면서 그가 생각하길 ‘여전히’ 지금 당장이라도 올 수 있었으나 오고 싶어 하지 않았던바..."(516) - P516

[15] "인간 본성은 사건, 풍문, 방식, 말하자면 조작으로 빚어지며 이 인간 본성은 연약해요, 에스테르..."(577) - 시립도서관장의 말 - P577

[16] "내 말은 이것일세, 도시관리사업소장이 말하길 하루 이틀만 지나면 다들 완전히 잊어버리고, 장담컨대 일주일이 지나면, 그리고 한 달이 지나면 악몽의 기억처럼 그 모든 야단법석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580) - P580

[17] "시의 공직자 중 하나라도 그들에게 정확한 짓침을 내려주었다는 말은 부정하는 바이니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 또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 어디 있는지 통 모르겠습니다..."(734) - P734

[18] "첫 번째 연사가 이제 다시 묻길 이 시민 지도자라는 자들은,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다면 왜 리본을 자르고 기념식에서 축사를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냐고, 왜 시민 지도자라는 자들은 죄다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누가 말 좀 해줄 수 있느냐고 묻자..."(735) - P735

[19] "며칠째 아무것도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던바 전화도 인터넷도, 죄다 먹통이어서, 바깥세상이 사라져 버렸거나 마치 똑같은 두려움 때문에 이 나라의 모든 동네, 도시, 주가 세상과 자발적으로 격리된 것 같았으니..."(748) - P748

[20] "하나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하나의 어마어마한 불 공격이, ‘도시 자체보다 훨씬 큰’ 불 공격이 도시를 강타했기에 뭔가 이야깃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으며..."(752) - P752

[21] "끝으로 그는 하늘을,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양손을 들어 누군가, 아마도 지휘자가 전에 하는 것을 똑똑히 본 모양으로, 보이지 않는 관객에게 몸짓하면서 객석을 향해 활기차게, 자 이제 다 같이."(754) - P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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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의 아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7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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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가 요청한 인간의 조건


- 모두가 나의 아들

(원제: All My Sons)


아더 밀러(Arthur Miller, 1915.10.17-2005.02.10)

최영 옮김 [민음사] (2012)



 

어제(2025.02.10)는 미국의 극작가 아더 밀러(Arthur Miller, 1915-2005.02.10)20주기되는 날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메릴린 먼로의 남편 혹은 <세일즈맨의 죽음>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집어 들어 본 작가의 연보때문인지, 대출하고 말았다. 그는 20세기를 거의 온전히 살아내고, 나와 동시대를 호흡했던 작가였기에 좀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작가 연보를 보다보니 아더 밀러가 유독 나치 수용소 생존자와 만나 대화하거나 나치 전범 재판을 직접 찾아가 참관한 행보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알지 못했지만, 그가 어떤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뉴욕 할렘가에서 출생한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다. 물론 유대인이라고 모두가 그처럼 적극적으로 나치의 범죄에 대해 파고들지는 않았을 테다.


 

우연히 빌려온 그의 희곡 <모두가 나의 아들 All My Sons>(1947)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희곡이다. 켈리 집안의 가장 조 켈리는 항공기 부품을 납품하는 군수업자로 자성가한 인물이다. 현재는 아내 케이트 켈리, 큰아들 크리스 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조와 케이트의 둘째 아들 래리는 군용기 파일럿이었고,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경제 대공항을 겪은 미국 사회와 이를 겪으며 살아내는 한 가정을 배경으로 한 대표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이 작품도 당대의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여 작품에 녹여 내었다. 이 작품은 외형상 한 군수업자 일가의 몰락을 그린 비극이다.


 

연극의 시작은 켈리 집의 마당에 있던 사과나무가 밤새 험한 날씨에 부러진 어느 8월 일요일 아침이다. 이 때는 래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다. 래리의 형 크리스는 동생 래리의 약혼녀 앤에게 청혼을 하려고 그녀를 초대했고, 이를 직감한 앤은 이를 받아들이고자 초대에 응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계기를 시작으로 하여 오랜만에 모인 앤과 그의 오빠이자 변호사로 개업한 조지가 켈리 집안에 모임으로써 과거에 덮였던 추악한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가장인 조 켈리가 하자 있는 비행기 부품이 있음을 알면서도 군에 납품하도록 강행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의 부하 직원이자 앤의 아버지인 스티븐만 억울하게 수감된 상태였다. 조는 곧바로 혐의를 벗고 지금껏 존경받는 가장이자 경영인으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의 회사가 납품한 하자 있는 비행기 부품으로 21대의 전투기가 추락하게 된 것에는 스티븐 외에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당신을 위해서, 여보, 당신과 크리스를 위해서였어. 그게 내 삶의 목적 전부였어...”(130)

 


결국 드러나는 전말은, 조 켈리가 오로지 자신이 이룩한 모든 성공의 결실을 가족을 위해, 특히 큰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일할 뿐이다. 둘째 아들 래리가 비행기를 몰고 자살하기 전에 그의 애인인 앤에게 보낸 유서를 통해 래리의 항공기 사고가 우연이 아닌, 아버지의 추악한 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이었음이 결국 드러난다.

 


이 작품은 세상에 나온 지 70년이 지났지만, 전쟁과 자본 논리에 마비되고, 개인적 욕망에 눈이 멀어버린 한 인간의 양심에 관한 문제를 묻고 있다. 형식은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속의 주제 의식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한편 작품의 제목인 모두가 내 아들이라는 표현은 인간에 대한 연대의식과 책임을 요청하는 작가의 구체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연히 읽게 된 아더 밀러의 작품을, 그의 20주기에 맞춰 짧은 기록으로 남겨보았다.

 

 

 

#모두가나의아들 #아더밀러 #민음사 #비극 #최영번역가

[1] 크리스 켈리: "온종일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면, 적어도 저녁에는 삶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어요. 저는 가정을 원하고, 아이들을 원하고,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뭔가를 이루고 싶어요."(29) - P29

[2] 조 켈러: "애니. 우린 늙어 가고 있단다."(41) - P41

[3] 크리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개들이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다면 다들 오늘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다는 거. (...) 그런데 나에게 전에 없던 게 생겨난 것 같더라. 일종의 ... 책임감이라는 것 말이야.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이해하겠니?"(61) - P61

[4] 크리스: "내 말은 다들 자기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전쟁에서 얻은 것들이며, 자기 차를 몰면서도 그게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그리고 그로 인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거야."(62) - P62

[5] 조 켈러: "크리스, 내가 널 위해서 이루어 놓은 것들을 누렸으면 좋겠어..."(66) - P66

[6] 크리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도대체 아버지는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인가요? 젊은이들이 그 실린더 헤드에 의지해서 공중에 떠 있었어요. 아버지는 그걸 알고 계셨다고요!"
조 켈러: "널 위해서다, 너를 위한 사업이었으니까!"(120)
크리스: "대체 아버지는 뭐예요? 아버지는 짐승조차도 아니에요."(121) - P121

[7] 짐: "프랭크가 맞아요... 누구나 별을 하나 갖고 있다는 거요. 자신의 정직함이라는 별을요. 우린 그걸 찾기 위해 인생을 다 써 버려요. 그런데 그 별은 일단 빛이 꺼지게 되면 다시는 빛을 발하지 않거든요."(125) - P125

[8] 케이트(어머니): "여보... 가족을 위해서 그 일을 했다는 게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129) - P129

[9] 조 켈리: "당신을 위해서, 여보, 당신과 크리스를 위해서였어. 그게 내 삶의 목적 전부였어..."(130) - P130

[10] 크리스: "이 땅은 거물급 개들의 나라야. 이곳에서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 잡아먹을 뿐이야! 그게 법칙이지. 우리의 유일한 생존 법칙... (...) 여긴 동물원이야, 동물원이라고!"(136) - P136

[11] 조 켈리: "내가 감옥에 간다면 이 빌어먹을 나라 절반이 감옥에 갇혀야해! 그게 네가 내게 그러게 말 못하는 이유다."(138) - P138

[12] 조 켈러: "이 편지가 내게 그렇게 말하는게 아니라면 이 편지는 대체 뭐란 말이오? 물론이지, 그 애는 내 아들이었어. 하지만 래리는 그들 모두가 내 아들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생각에도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군.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아. 곧 내려오겠소."(141) - P141

[13] 케이트(어머니): "우리가 이 이상 더 뭐가 될 수 있겠니?"
크리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단 한번만이라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것과 거기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아는 것 말이에요. 만일 그걸 모르신다면 두 분은 당신 아들을 저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바로 래리가 죽은 이유니까요."(142)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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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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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자기만의 시간들

- 금지된 일기장

(Forbidden Notebook)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 (2025)

 




어느 영어 관련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기쁨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들 중 joy/pleasure/delight가 있는데, 이걸 구분할 수 있는지 물으셨다. 결론부터 말하면(내 기억에 남아 있는 대로 적어본다면) joy는 보편적이고 즉각적인 즐거움과 관련이 있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사이다를 마실 때 느끼는 쾌감 같은 기쁨을 떠올릴 수 있다. 이와 달리 pleasure는 보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이 있다. 보다 목적성이 뚜렷하다고 할까.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하면서 얻는 쾌감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이어서 delight의 경우는 더 나아가 어떤 노력이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정의 결과 얻지는 보다 수행적인 의미가 강조되어 있는 느낌이다. 따라서 delight이란 단어는 종교인이 고된 수행을 통해 얻는 희열에 더 가깝다. 이렇게 기쁨을 뜻하는 여러 단어들이 담고 있는 뉘앙스는 이렇게나 차이가 크다.


 

쿠바 대사였던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금지된 일기장을 읽으며 나는 이 기쁨을 의미하는 여러 단어들을 떠올렸다. 일기 형식의 이 소설에서 화자이자 43세의 주부 발레리아는 일기장을 산 소소한 기쁨(joy)에서 시작하여 몰래 일기 쓰는 시간에 대한 기쁨(pleasure),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기쁨(delight)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소박하면서도 놀라운 솜씨로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변화는 그녀가 우발적으로 산 일기장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을 위해 꽃을 사고 싶어 들어간 상점에서 우연히 검은 노트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이렇게 삶은 우연과 필연이 직조되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가족은 남편 미켈레, 법학도인 큰 아들 리카르도와 딸 미렐라로 이루어진 단란한 중산층이었다. 가족들 몰래 간직하게 된 노트를 자신만의 비밀로 하면서 발레리아의 생활에 변화도 생겼다. 23년간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자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노트의 존재가 가족에게 들킬세라 그녀는 2주 동안 한 글자도 쓰지 못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도대체 일기 쓰기가 뭐라고 새벽 2시에 가족 몰래 고단한 몸을 일으켜 일기장을 펼치게 되었을까. 그렇다고 그녀가 더 행복해졌던가? 화자인 발레리아는 그렇지는 않다고 일기장에 고백한다. 삶에 비밀이 생기고, 새로운 활력도 생긴 듯 느껴지지만 부작용도 함께 발생했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즐거웠던 일만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괴로운 일을 상기하고, 그럼으로써 그 기억이 더 오래 남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그나마 다락방 한 구석이라도 있었으면 마음 편히 쓸 수도 있으련만, 그럴 호사까지 누릴 처지도 아니었다. 부엌에서 조심스럽게 써가는 일기일지언정 발레리아는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직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연으로 시작했으나 그녀는 일기를 쓰게 될 운명이었다.


 

발레리아에게 일기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자신에게 비밀을 만들어준 물건이다. 곧 그녀는 혼자서 무언가를 써서 채워 넣고 싶다는 욕구, 잠깐의 평화를 조금씩 욕망하게 되었다. 물론 23년이란 시간이 누르고 있는 관성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을 터였다. 처음에는 고단한 일상 외에는 쓸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저녁에 침대에 눕는 순간 밀려오는 피로감이 평안의 원천이다.”(35)라는 한 문장이 장황한 설명을 대신한다. 이 과정에서 발레리아는 자신의 처지와 존재에 대해 가격지심과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일기를 쓰기 전에 그녀는 항상 자신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한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 그리고 양육과 가정을 돌보는 일처럼 특별한 것이 있을까. 어쨌든 20세기 중반을 살아간 여성이 가정을 돌보는 관습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21세기 현재, 우리 사회의 가정은 어떤가. 여전히 엄마는 늘 고단한 존재. 이 소설에는 100여 년 전에 태어난 유럽 작가의 삶이 녹아 있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닿아 있는 듯하다. 발레리아의 일기장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못 다한 말들을 쓰는 빈 서판으로 기능하기도하고, 성인이 된 딸 사이의 긴장과 삐걱거리는 관계에 대해 불만과 고민을 성토하는 고해소가 되기도 했다. 일기장의 곳곳에서는 삶의 여러 국면들이 교차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삶에 따라오는 불안과 혼란스러움 까지도 번번이 등장하고 있다. “일요일 한낮의 적막에 싸인 빈집에 홀로 앉아 있자니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67)는 고백처럼,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일은 이전의 생활과는 다른 고독과 불안의 순간에 적응하는 일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몰래 쓰는 일기는 가족이 모두 잠든 시간, ‘여기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비로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을, 보다 주체적으로 향유하게 해주었다.

 


일기장의 새하얀 백지는 나를 매혹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혼자 거리를 거닐 때처럼 말이다. (...)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처음으로 나를 위해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94)


곧 발레리아에게 일기쓰기란, 그녀 자신을 규정하고 제약하는 관습의 경계를 넘어 그 바깥을 경험하게 하는 행위로 볼 수 도 있겠다. 목적지 없이 혼자 혼잡한 거리를 걸었던 경험을 떠올려 본다. 발걸음이 늦춰지고 주위의 시야가 눈에 들어온다. 발레리아도 일기를 쓰면서 때론 무의식적으로 침투하는 생각들을 따라 길을 잃기도 했을 테다. 오히려 그녀의 일기 쓰기는 의도적인 길 잃기로의 초대이기도 했다. 이처럼 실수로 산 일기장은 그녀에게 살아 있음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괴로운 기억과 마주해야 했지만 말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의 삶이 일기 쓰기 전과 후가 분명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일기를 씀으로써 일기를 떠 쓰고 싶은 욕망을 발견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계획도 떠올리게 된 것이다. 딸의 생일 파티 계획을 세우고 싶다는 소망과 더불어 처녀 시절처럼 들뜬 기분도 느낄 수 있게 된 것. 이런 내밀한 기쁨들은 기쁨의 단어 중에서 pleasure에 가깝지 않을까.


 

그럼에도 매일 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50)이라는 깨달음도 얻는다. 친정 엄마와 자신과의 관계를 떠올리다 딸 미렐라와의 삐걱거리는 관계를 돌아보며 딸의 행동을 좀 더 이해하는 길로도 나아간다. 특히 딸을 생각하며 쓴 기록은 시간의 세례를 받으며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과정이 보인다. -부인-엄마로서 한 여성의 삶이 성숙해가는 장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가족이 함께 모여 마치 하나가 된 듯한 순간을 만끽한 발레리아의 심정은 다름 아닌 delight의 감정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기쁨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아니었으므로.

 



저자 알바 데 세스페데스는 일기 형식의 이 소설을 통해, 마치 모노드라마 연극의 배우처럼 여성으로서의 삶을 내밀하게 구성해 놓았다. 비록 70여 년 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작품에 녹여 내었다. 현실의 삶에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도 하며 투옥되었던 작가로서, 그만큼 현실의 삶도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작가가 화자로 내세운 발레리아는 파시즘은 아니지만, 또 다른 사회의 관성에 글쓰기로 저항하는 인물이다. 작가의 또 다른 분신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발레리아에게 일기장은 자신의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었으며,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이기도 했다. 나아가 삶이라는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戰場)이기도 했다. 일기장은 과거의 시간 단위가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연결되며 연속성을 갖게 해주는 공간이기도 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가정을 지켜내면서도 자신의 존재 이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숭고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한 인간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삶의 시간들이 이토록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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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새기는 빛 - 서경식 에세이 2011-2023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연립서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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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교수가 떠나신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빈자리는 크게 느껴집니다. 훌륭한 후학들이 그 자리를 많이 메워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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