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휴가 기간에 우연히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를 집어들었다가 첫 페이지에 발견한 시를 공유해볼까 합니다.
저는 아직 호메로스의 저작들을 읽어보진 못했습니다만, 
시를 읽고나니 호메로스의 저작은 언젠가 꼭 읽어싶어집니다.


<오디세이 세미나>에 대한 서평을 작성하신 분들의 글을 읽다보니,
오디세이아라는 인물이 트로이전쟁과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오랜 여정의 기록이 담긴 서사시라고 알게되었네요. 그리고 이타카는 오디세이아의 고향으로 이타카라는 지명은 여러 문학 작품에서 사용되고 있네요. 어떤 이는 '이상향'으로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너무 단순화한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가닿을 수 없는 '고향'의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W.G. 제발트라는 독일 소설가의 <이민자들>에서는 전 세계를 떠도는 유대인들 혹은 여러 이유로 이민자가 된 이들에게 '잃어버린 고향'의 이미지로 활용됩니다. 또는 문명사회로부터 소외된 이가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장소로서의 이미지로 말이죠.


다시 소개하려던 시 '이타카'는 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Konstantinos Petrou Kavafis)[1863-1933]의 시를  <오 자히르>의 번역자가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중에는 <콘스탄티누스 페트루 카바피스 시전집> 한 권이 
출간되어 있지만, 시번역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미리보기 기능에서 동일한 시 '이타카'의 번역일 일부 보았는데, 
번역이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단어 단어가 이어지지 않고 분절되어 있는 표현이 시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시전집 전체를 읽어보진 못해서 역자의 작업 방향도 모르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봅니다. 


혹시 이 한국어 번역이 영화 <페터슨 Paterson>에 주요 모티브가 되고 있는 미국 뉴저지의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모더니즘/이미지즘 시의 느낌으로 번역을 한 것인가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만큼 단어의 의미연결보다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 다가옵니다. <오 자히르>의 번역자(최정수)가 번역한 시 '이타카'는 읽기가 좀 더 편합니다. 한번 감상해보세요. 시를 다시 읽어보니 그리스인 조르바의 삶의 흔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코엘료의 소설 <오 자히르>의 첫 장 제목이 '나는 자유다'인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과 일치하기도 합니다. 우연일까요?

아무튼 호메로스의 저작들은 언제 꼭 읽어보고 싶네요.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

기도하라.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생각이 고결하고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읺고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길이 오래되더라도

늙어져서 섬에 이르는 것이 나으니.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역주-최정수 옮김)

*라이스트라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등장하는 식인 거인족

**키클롭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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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죽음 1~2 세트 - 전2권 -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함지은 북디자이너 / 열린책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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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지음 |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인시피트 - 누가 죽였지?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죽음’, ‘탄생 소멸 운명을 지닌다. 우리는 태어남 대해 나름의 이해를 갖고 있지만, ‘죽음 누구나 피해갈 없고, 보다 생경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폭넓은 호기심을 보여주었던 작가, 독특한 소재와 기발한 발상이 녹아있는 작품을 발표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이번엔 죽음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통해 알게된 베르베르는 언젠가 내가 써보고 싶었던 글쓰기를 보여주었던 작가였다. 이번에 발표한 죽음 추리소설 작가이자 몽상가인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 죽음부터 시작한다. 웰즈의 영혼은 추리 소설의 형식을 빌려 죽음 영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을 누가 죽였는지알아내기 위해 수사를 진행한다. 소설의 시작은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이름은 빨강 유사한 모티브를 갖고 있다. 파묵의 소설에서는 다양한 화자 등장하지만 죽은 화가의 영혼이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고 자신을 누가 죽였는지 궁금해하며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죽음 가브리엘 웰즈도 파묵의 소설에 등장하는 화가처럼 자신이 죽게 경위를 추적하는 형식을 지닌다. 소설이 죽음이라는 진지한 주제로 시작하고 있지만, 작가 자신의 독특한 개성은 소설 전반을 통해 다르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웰즈의 영혼이 살인자를 찾는 과정에서도 간간이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통해 인간의 죽음 관련한 기묘한 역사적 사실들을 곁들이며 죽음이라는 소재에 흥미를 더하고 있다.

  

소설 주인공이자 화자이기도 가브리엘은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전령으로 알려진 대천사와 이름이 같다. 특히 성경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수태고지 하고 있기도 하다. 다른 맥락에서 본다면 대천사 가브리엘의 이미지는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죽음 이미지보다는 탄생 이미지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윤회와 환생의 구도를 기반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고려할 가브리엘은 새로운 탄생 예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소설보다 작가 - 베르나르의 유머와 문제의식

 

소설의 전개는 평이하고 약간의 반전이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다. 다만 여기서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같다. 소설의 사건을 따라가며 내가 눈여겨 보게 부분은 소설을 통해 솔직하게 드러나는 작가 베르베르의 면모들이었다. 특히 옮긴이가 지적하고 있듯이 작가 스스로를 농담과 자조의 대상으로 삼는 유머 감각은 베르나르의 개성이라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관통하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여전히 요소에 무게가 수밖에 없다. 베르베르는 죽음 둘러싼 진실들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위트를 보여준다. 영매 뤼시의 애인, 사미의 행방을 추적 조사하던 할아버지의 영혼이 죽은 아파트 관리인의 영혼과 협상하는 장면이 예이다. 사미의 행방에 관한 정보를 주면 관리인의 영혼이 환생할 브라질 축구 스타 태어날 있는지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하는 모습은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욕망을 가지며 흥정도 하는 영혼들이라니. 베르베르는 사후세계에도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있는 것으로 상상하지 않았을까.

 

한편 소설의 제목인 죽음 대해 작가가 시도한 다양한 생각들도 엿볼 있다. 영매 뤼시가 죽음을 일체의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럽고 유약한 것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 정신만 간직하게 됐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사후세계와 윤회에 대한 색다른 생각들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소설은 이런 구도 하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태어난 모든 이는 죽음을 피해갈 없기에 죽음 역설적으로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중요한 일들을 계속 미루기만 하면서 살았다 후회할 것인가? 이런 고민은 지금 순간 삶이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 지향점과 실마리를 준다. “마지막 순간에 얻는 깨달음을 가지고 죽은 자들이 조금 있다면..”(1 58)이라고 죽은 웰즈의 영혼이 후회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걱정과 두려움은 삶에서 중요한 일들을 미루는데 가장 핑계거리인지 모른다. 모기에 물리는 것은 정말 싫은 일이지만, 할아버지의 영혼이 말하고 있듯이 이것이 죽음의 장점이 되기에는 삶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사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영혼들에게 무료라는 점은 솔깃하긴 하지만 말이다. 베르나르는 이렇듯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위트로 우리의 돌아보게 해주기도 한다. 계기가 심각하고 진지하기만 하는 문학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좀더 진지한 저자의 고민으로는 연명치료 안락사 관련지을 있는 삶의 관한 문제에 주목해본다. 작가 개인적으로 할아버지의 연명치료 대한 경험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환자의 의지와 반하여 삶을 연장하는 문제에 대해 우린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실천을 해볼 있을까. ‘존엄이라는 상태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삶을 누릴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소설 속에서 웰즈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 잠시 생각해볼 있었던 주제이다. 과거에 집에서 맞던 죽음 이제는 병원에서 처리되는죽음의 외주화 현상이나,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장기간 이루어지는 연명 치료에 대해 베르베르의 관심을 엿볼 있다. 아울러  멈추는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1 212)라고 할아버지의 영혼이 반문하는 대목은 안락사문제와 연결지어 수도 있다. 인간의 죽음이란 문제에 정답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존엄을 갖춘 이란 어떤 것일까가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베르베르가 죽음 대해 했던 가볍고도 진지한 고민들을 발견할 있었다. 나아가 저자의 특기인 상상력과 관련한 문제의식도 소설의 주요한 구성 요소다.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면, ‘상상력 문체진영이 서로 비물질 차원의 전투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에서 상상력진영은 상상력이 주요한 특징인 장르문학을 대표하고, ‘문체진영은 제도권 작가들의 문학을 대표한다. 장르 문학을 중심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베르베르의 입장에서는 제도권 문단에서 평하는 사항들을 익히 들어왔을 터이다. 따라서 웰즈의 영혼이 문단의 평론가들을 장르 문학을 하위 문학으로 취급하도록 배운 사람들”(1 145)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프랑스 문단에 대한 베르베르의 비판인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웰즈의 소설 권을 출판해준 편집자 빌랑브뢰즈가 웰즈에게 했던 말처럼 정말 프랑스에서는 비평가의 지지를 받거나 대중의 지지를 받거나 하나일까? 문제는 작가로서 베르베르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부분일것 같다. 다만 부분이 양립불가능한지는 별개의 문제일 있다. 일례로 프랑스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같은 작품들은 문학상과 대중성을 인정받은 소설로 알려져 있다. 다만 문단의 인정과 대중 독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경우가 희소할 뿐이다. 상상력 진영과 문체 진영의 대결 끝에 최초의 드루이드 투안의 영혼이 개입하여 설교하는 대목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대해 생각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내용과 형식은 상반되는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 ‘모든 문학이 존중받는 다양성 수호되어야 한다는 투안 영혼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의 내용보다는 무엇보다 작가 베르나르의 면모, 작가로서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더욱 친밀하게 느끼고 공감할 있었다.

 


 

소설의 전개 아쉬운 점들 - 그런데 혹시 아니라면?

 

소설의 전개상 아쉬운 점들은 군데 있었다. 특히 웰즈의 영혼이 자신의 살인자를 추적 조사하는 가운데 가정부 마리아 콘셉시온은 조사하지 않았을까를 예로 있다. 웰즈가 사망하기 전날 , 웰즈는 가정부가 만들어주는 단백질 음료를 마셨지만 콘셉시온을 용의 선상에 올려 조사하는 과정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웰즈의 영혼이나 뤼시가 용의자들을 찾아가 대화하면서도 이들을 용의자로 의심할만한 실마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럴 듯한 계기없이 뤼시와 할아버지가 살인사건 수사에서 돌연히 손을 떼기로 선언한다던지, 뤼시가 사미와 재회하여 아이를 갖기 위해 애지중지하던 고양이를 떠나보내려하는 상황은 아무리 모성성이 강하다고 해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작가 베르나르가 과거에 발표했던 나무 개미 같이 독특한 소재와 시각, 기발함을 여운으로 남았던 것과는 달리 죽음 이전 작품에 비해 다소 부족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웰즈의 소설을 읽은 코난 도일의 영혼이 웰즈의 작품을 평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아이디어는 훌륭한데 엄격함이 부족해. 아직 등장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다루지 못했어.”(2 97)

 

사실 평가는 죽음 읽어나가는 동안 내가 했던 생각과 유사했다. 코난 도일의 입을 빌어 추리 작가인 웰즈의 소설에 대한 인상을 말하고 있는데, 이런 평가는 베르나르의 작품에 대한 프랑스 문단의 평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런 평가를 소설의 가운데 집어넣어 저자가 갖고있는 문제의식을 솔직하게 드러내보여주는 듯하다. 분명 베르베르는 장르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들어온 평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애초에 죽음이라는 소설이 사건들과 인물의 내면, 그리고 소설적 구조의 정밀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것인가. 일련의 사건들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가 떨어지고 개연성이 부족해보이는 전개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다른데 있다면?   

 

만약 타고난 이야기꾼, 베르베르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들었음직한 평가들을 소설 속에서 드러내고자 했다면, 그야말로 베르베르적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는 틀림없이 소설의 원고를 보며 이를 간파했을 같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평을 코난 도일의 입을 통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스한 내용이 노파의 영혼의 입으로 또다시 등장한다. 2 282-283 참조). 이쯤되면 나는 소설이 죽음 소재로하여 어른들을 위해 준비한 하나의 동화이자 유머가 아닐까 믿게 되었다. 그리고 제도권 문학에 대한 베르베르의 저항심과 자조적이고 넉살 좋은 유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오히려 베르베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당당함이 느껴졌다. 당연히 제도권 문학의 기준으로 장르소설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어가며 베르베르가 배치해놓은 이런 단서들을 만나다보니 소설의 구조니 전개의 미흡함이니 하는 판단은 접게 되었다. 평론가는 생업을 위해 글을 쓰지만, 독자들은 즐거움을 위해 책을 선택할 것이다. 최후의 판단은 독자들이 일이다.  

 

 

 

엑스플리시트 - 나는 누구이며 태어났나?

 

소설을 읽고 남은 인상은 소설 전체가 죽음 소재로, 독자들에게 건네는 기나긴 유머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물론 소설 전체가 유머만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관통하면서도 가볍게써내려가되,  작가 자신의 문제의식 또한 놓치지 않고 표출해낸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베르나르가 슬며시 언급한 화제들에는 죽음 둘러싼 문제의식이 보인다. 예를 들어, 장기간 병원에서 이루어진 할아버지의 연명치료 경험은 소설 속에서 비중있는 부분으로 활용되고 있다. 개개인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할 있는 안락사의 관점에서도 죽음 생각해볼 있다. 소설이지만 이러한 화제를 통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어주는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베르베르의 생각을 발견할 있었다.    

 

영혼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며, 환생하지 않으면 끝없이 떠돌게 된다 저자의 설정도 흥미롭다. 나아가 프랑스 심령술의 창시자 알랑 카르데크의 영혼이 브라질에 있다는 할아버지 영혼의 말은 시사하는 바도 크다. “떠돌이 영혼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도 자기를 가장 기억해 주는 곳에서 지내.”(267) 부분에서 나는 애니메이션 <코코> 떠올렸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처럼 현세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같다. 반대로 누군가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누군가 존재는 비로소 무화된다. 그러므로 할아버지 영혼의 말처럼 떠돌이 영혼들은 정말 자신을 기억해주는 곳에서 지내고 싶어하지 않을까.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웰즈의 영혼은 도입부에서 등장했던 누가 죽였을까? 질문 대신, 이제 나는 태어났지? 묻고있다. 영혼이긴 하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 궁금해하는 것이다. 소설 전체를 떠올려 저자는 죽음에서 시작하여 이유를 지향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 소설 뤼시의 설득에 넘어가 다시 환생하기로 결정했던 웰즈의 영혼처럼, 소설은 죽음에서 다시 ’, ‘새로운 탄생 예비하며 끝을 맺는다. 마치 대천사 가브리엘이 새로운 수태고지 하러 마리아에게 것처럼, 웰즈의 영혼은 자신이 삶에서 배운 교훈을 독자에게 고지하고 있다. 웰즈가 말해주는 여섯 가지 교훈은 다소 교조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기에 간간이 음미해볼 만한 내용이다.      

 

소설을 읽고 나는 일단 오라 구멍이 뚫리지 않도록 자신을 존중하고 돌보는 일이 우선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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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구절들

 

[1] 사랑에 관한 구절들

 

어릴 부모한테 받은 뽀뽀가 마치 포커칩과 같아서 어른이 되어 사랑이라는 포커 게임을 그걸 있다고 했어요. 어릴 받은 포커 칩이 많을수록 게임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1 94)

 

영매인 뤼시가 가브리엘 웰즈의 영혼에게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아이들에게 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대신 아이들은 포커 게임과 포커 칩을 모를 있으니, ‘포커 대신 블루마블게임의 황금열쇠카드 중에서 생일선물 카드 우대권’, 혹은 무인도 탈출같은 카드를 얘기해주어도 되겠다.

 

 

사랑은 지능에 대한 상상력의 승리고, 결혼은 경험에 대한 기대감의 승리다.” (1 209)

 

웰즈의 할아버지 이냐스 웰즈의 영혼이 자신의 인생을 웰즈의 영혼에게 이야기해주는 대목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는 바로 와닫진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유머를 담은 말이란 생각을 해본다. ‘사랑이란 관념은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발명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결코 논리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베푸는 자에게 보다 사랑이 돌아가는 . 그러므로 사랑은 상상력의 영역에 속한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처음 결혼을 해보는 사람에게 결혼에 대한 기대치는 무엇으로도 꺾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결혼을 해본 경험이 있는 이에게도 결혼하냐?’ 묻는 일은 무의미하다. 새로운 사랑을 찾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기대는 경험을 무색케하는 놀라운 현상인 것이다. 아니면 번번히 아픈 경험에 대한 기억이 마비가 되는 것이거나.

      



[2] 인생의 경험과 관대함에 대한

 

인간은 자신의 어두운 면과 맞부닥뜨려 봐야 비로소 그것에서 벗어날 있어요.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질러봐야 고칠 있는 거예요. (…) 실수없이 앎에 도달하는 불가능해요. 경험은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물처럼 쌓이는 거죠.” (2 198)

 

뤼시와 돌로레스의 영혼이 사미에게 해코지를 하려 하자 드라콘의 영혼이 개입하며 하는 말이다. 특별한 말은 아니지만, 부분을 읽는 동안 학창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나만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던 행동들,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고 상처를 주었을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말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에나 해당하는 이야기 아닐까. 중요한 것은 실수를 해보고 경험치가 쌓이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관대한 마음가짐을 가질 있는 사람은 분명 젊은 시절에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를 해본 사람일지도 모른다. 베르베르 역시 작가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해온 결과 관대함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넌지시 이야기해준다. 실수를 저지른 타인에게 우리가 돌을 던지지 않는 관대함을 가진 사람은 어쩌면 과거의 실수를 통해 어떤 종류의 이른 사람의 태도일 것이다. 내가 미숙하던 시절을 끊임없이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를, 그리고 타인에게 관대해야하는 이유를 슬며시 일깨워준 구절이다.

 



  [3] 문학의 본분과 문학인의 지향점에 대한

 

문학을 권력의 도구로 여기는 잘못된 생각일세. 문학은 교육과 성찰과 오락의 도구지. 작가인 자네들이 일은 의식의 고양이야. (…) 나는 모든 문학이 예외 없이 존중받고 수호되야 한다고 믿게 됐네. 다양성이 우리의 힘이야. 특정 문학의 우월성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것일세.” (2 )

 

상상력 문학 진영 제도권 작가 진영 영혼들과 등장인물들의 영혼이 비물질 차원의 전투를 하며 대결하는 장면에서 최초의 드루이드 투안의 영혼이 설교하는 대목이다. 투안의 영혼은 나쁜 문학과 좋은 문학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것을 이야기한다. 특히 문체 중심의 문학과 상상력 중심의 문학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학이란 이름 아래 시도되는 모든 노력들은 존중받아야한다고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우린 생각보다 다양성이 부족한 환경에 놓여있음을 깨닫곤 한다. 상대방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거나 심지어 거슬린다는 이유로 제거하고 배척해야할 대상으로 삼는 태도도 보인다. 소설이긴 하지만 작품 속에서 작가의 문제의식이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는 베르베르가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드러내는 것을 흥미롭게 주목해본다. 작가의 다원주의적 시각 관대함 요즈음 내가 자주 하게되는 고민들과 맞닿아 있다. 투안의 표현대로 문체를 중시하는 제도권 문학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소설을 읽으며 즐기는 동안 작가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접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런 부분을 만나게 되면 작가에게 보다 가까워진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작가는 분명 어느 (species) 갖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내부의 다양성이라는 교훈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과 사회도 다르지 않다. 짧은 순간이지만 책을 읽으며 옆길로 빠졌다가 다시 돌아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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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문장들 - 걷기 좋은 유럽, 읽기 좋은 도시, 그곳에서의 낭만적 독서
강병융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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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문장들

강병융 지음  |  [한겨레출판]




책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다. 눈부신 햇빛이 쨍하고 내리쬐는 , 서부의 초원을 배경으로 어떤 기교를 드러내거나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 사진집을 생각했다. 로버트 애덤스(RobertAdams)라는 사진가의 완전한 시간 완전한 장소 Perfect Times Pefect Places 라는 제목의 사진집이었다. 세상의 모든 중심은 바로 사진가 자신이며, 풍경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가로부터 세계를 향해 마음의 창이 활짝 열려 있다. 밋밋해보이는 수평선, 나른한 낮의 단조로운 풍경이 완벽한 시간, 완벽한 장소라니.

 


사진집의 제목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사진 프레임에 간간이 등장하는 존재들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들이 바로 사진가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사진가 곁에는 바로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반려견이 있어 함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풍경도 이들과 함게 바라볼 있다면 순간이 바로 완벽한 시간, 완벽한 장소임을 증거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야 말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다.

(95)

 


이번에 만나게 강병융의 도시를 걷는문장들에서 문장의 여운으로 돌연히 사진집을 떠올렸던 것이다. 분명 사진집은 저자의 말에 들어맞는 여운을 주었다. 다만, 아름다움 사랑하는 대상과 나누는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과로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 사랑하는 대상이 곁에 있어서 세상이, 내가 혹은 함께 바라보는 세계가 아름다운 아니겠는가.

 


나에게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나를 중심으로 감수성은 세계를 행해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있고,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생각해주는 이가 있다면 지금 곁에 있지 않아도 좋다. 혼자라고 해도 그리움의 여운을 주는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터이다.

 


저자는 여행의 중심에 자신 있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유럽의 여기 저기를 많이 다니는 저자는 대부분의 여행이 출장과 관련된 짧은 여행이다. 느긋하게 여행 자체를 목적으로 것이 아니기에 저자는 여행지에서 잠깐의 여유를 찾는 나름의 방법을 보여준다. 특히나 이런 여행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일상스러운 여행 수밖에 없고, 저자는 여기에서 자신만의 기쁨을 찾고있다. ‘너도 너의 행복과 기쁨을 찾길바란다 저자가 말하는 이유다.

 


저자가 크로아티아의 어디에선가 읽은 마스다 미리의 <뭉클하면 안되나요?>에서 잠시 멈추었다. 마스다 미리가 썼던 표현처럼 사소한 일상에서 뭉클함 느끼는 일은 겉으로 보는 것보다 많은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일상에서 뭉클사라지고 있다면, 당신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충고하고 싶다. 여행은 그곳에서는 감동을, 돌아와서는 뭉클선사할 것이다. 우리가 떠나는 이유는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이다.”(97)

 

우리는 여행을 통해 우리의 일상과 다른 비일상을 경험한다. 반면 저자는 삶은 어디에 가도 같은 삶이고, 우리는 어디에 살든 결국 비슷할 것이라는 최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삶의 구체성에서 다름 보는 것은 여행이 주는 기회이자 선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아가 삶의 보편성 확인하는 단계는 살림살이의 표피, 일상의 화이트 노이즈 걷어내고 나면 보이는 것들일 테다. 결국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 행복하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게 되면 슬퍼지는 것은 모든 지구인의 보편성 아니겠는가. 나이들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삶의 유한성을 느끼는 순간, 나보다 죽음이라는 이별에 가까워지는 부모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보며 뭉클 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벗어나 마주할 있는 우리 삶의 보편성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어디에 살든 우린 결국 비슷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뭉클함을 느끼기 위해선 일상에서 뭉클 근육 키우기 위한 삶의 기술 각자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당부일지도 모른다. 임제 선사가 말처럼 결국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주인이 되는 자리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속한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허물며 자신만의 뭉클 근육 키우고 있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뭉클 근육이 있으면 좋다. 그러니 바쁜 일상을 살아갈 지라도 각자 하나씩 마련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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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부스의 유럽 육로 여행기 - 동화 속 언더그라운드를 찾아서
마이클 부스 지음, 김윤경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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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부스의 유럽 육로 여행기

(원제: Just As Well I’m Leaving: To the Orient with Hans Christian Andersen)

마이클 부스(Michael Booth) 지음 |  김윤경 옮김 |  [글항아리]



어린 시절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릴 그림동화책을 읽었던 기억으로 다시 완역된 동화를 읽어보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우가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아도 상당히 잔인해 보이는 사건들이 즐비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어릴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그림동화책에는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제외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마이클 부스의 경우도 나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같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가지 환경적인 요인과 개인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정말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찾아나섰다는 것이다.

 

여행기의 저자 마이클 부스는 배우였던 덴마크인 배우자를 따라 덴마크로 이주하게 되면서 모든 사건을 예비하게 된다. 덴마크어 어학원에 다니며 과제로 나온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읽은 부스는 경험처럼 과연 안데르센의 동화가 이런 배경과 맥락을 갖고 있었나하는 깨달음과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던 모양이다. 물론 동화 자체에서 시작한 관심은 물론 작가인 안데르센 인물 자체로 옮겨간다. 안데르센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를 맞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사람과 분리하여 생각할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안데르센은 꾸준히 일기를 썼기에 후대 사람들이 안데르센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더욱 이해할 있게 되었다. 부스는 안데르센이 1842년에 출간한 시인의 바자르 A Poet’s Bazaar라는 여행기를 읽고, 안데르센이 여행했던 발자취를 따라가보기로 결심한다. 평생 여행을 다니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다시 여행을 꿈꿨던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따라 계획을 세우며,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의 끼를 발산할 궁리를 하게 것이다. 책에서 부스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시작으로 유럽의 7개국 8 도시를 안데르센의 기록에 따라 방문해나가고 있다.

 

 

안데르센의 여행 중독 혹은 배경

 

글로 성공을 하게 안데르센이 자신의 돈을 모두 부어 일이 바로 여행이었다. 안데르센이 좋아한 독일의 문호 하이네와 괴테가 오랜  여행을 글로 남겼듯이 안데르센도 숱한 여행을 하며 이를 글로 남겨놓았다. 당시에는 이미 문호와 좋은 가문의 귀족들이 유럽을 여행하는 그랜드투어 이미 유행했을 터이고, 안데르센도 이런 여행을 꿈궜을 것이다. 각국을 다니며 왕과 귀족을 만나고 친분을 넓히고 교류하는 , 생각만 해도 근사하다. 다만 단순히 안데르센이 성격상 여행을 좋아한다거나 여건이 되었기에 떠난 같지는 않다. 부스는 안데르센이 남긴 일기와 여러 서신 등을 통해 여행을 떠났던 동기에 주목하고 있다. 지극히 귀족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덴마크 지식인 사회를 견디기 힘들어 했던 정황을 저자는 더욱 파고든다. 당시 덴마크 지식인들은 듣보잡노동자 출신이었던 안데르센의 글에 대해 혹독한 비난을 했었고, 인정욕구가 무척이나 강했던 안데르센에게는 좁은 우물에서 비난이라는 직격탄 세례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스의 평가대로 안데르센의 여행은 불행의 도피처 되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폭발적으로 넓혀주었던 계기가 되었던 같다.  

 

순간을 소비하고 모든 것을 보려고 애쓰며 항상 쉬지 않고 움직인다.”(301)

 

, 여행, 여행이란! 가장 행복한 운명이다! (…) 그렇다, 여행은 우주 만물의 강박 현상이다.”(63)

 

지금처럼 여행이 쉽지 않은 19세기에 안데르센은 모든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욕으로 여행에 임했음을 짐작할 있다. 덴마크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또는 상영된 자신의 연극에 대한 비난과 거리를 안데르센은 타국에서 유명인사를 만나기도 하며,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다. 여행 중에는 생소한 장소와 환경에서의 익명성을 통해 타자가 되어버린 고립감을 극복하기도 하며 여행을 했다. 마이클 부스는 자신의 특기인 유머와 위트로 새로운 장소에서 좌충우돌하며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여기서 안데르센 자신이 남긴 자서전과는 다른 3자의 시선에서 안데르센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다 분명히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여행은 분명히 안데르센에게 다른 학교이자 자신의 숨을 쉬게 해주는 구원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넓은 세상을 자신의 학교로 삼았던 안데르센은 여행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찾을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여행은 자신의 심기증과 까탈스러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경험하고 싶은 기회, 심지어 성적흥분까지도 느낀다고 기록할 정도로 그에게 여행이란 안데르센이라는 인물을 만들어준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있다.

 

 

안데르센이라는 인간을 다시 생생히 그려내다

 

안데르센은 거의 평생 혼자인 살았어요.”(360)

 

마이클 부스가 안데르센의 여행 경로를 따라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했을 , 부스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심리학자 미르토의 말이다. 그녀는 안데르센의 고독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부스가 그려내는 안데르센은 너무나 독특하고 복잡한 인물로 보인다. 그가 그려낸 안데르센이라는 인간은 귀족도 아닌 노동자 집안 출신으로 스스로 자신의 길을 부단히 개척했던 사람, 언제나 인정욕구에 메말라 있고 허영심이 대단하면서도 겸손하기도 했으며, 심각한 심기증을 갖고 있던 사람, 성적으로 모호한 잠정적 양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던 사람이다. 말만 들어도 단순하지 않아보이는 안데르센은 글쓰는 재능과 같은 장점 외에 수많은 단점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부스는 그를 애정어린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다.

 

안데르센이 형식에 참신한 문학적 상상력과 미묘한 재치를 가득 더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이야기 수집가도 해내지 못한 , 다시 말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을 해냈음을 알게 되었다.”(37)

 

과거의 인간을 이해한다는 말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긍정한다는 의미이기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장점과 단점( 판단 기준 자체도 영원한 것이 아님에야) 모두를 인정하고 사회의 규범이나 도덕을 사람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는 말은 쉽지만 말의 무게에 걸맞게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이클 부스는 안데르센이 했던 여행기를 읽고, 경로를 따라가며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마이클 부스는 안데르센의 면모를 군데군데에서 재미있게 표현하면서도, 복잡한 인물의 속내를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면모를 균형있게 지적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신경증에 걸린 공주와 자만심이 강한 쇠똥구리, 사랑에 우는 인어공주, 미운오리 새끼를 하나로 합쳐놓은 인물이었다.”(5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인생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친 주머니에 것을 꺼내 놓으라고 사람이었다. 그는 100퍼센트 자기 의지로 행동한 인물로서, 유년 시절의 가난과 (제독과 국왕들의 전유물이었던) 국제적 명성이라는 눈부신 사이에 놓인,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물들을 차례차례 해체해 나갔다.”(172)

 

원래 안데르센은 동화작가가 아니라 희곡작가로 성공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희곡작가보다는 위대한 동화작가로 후대에 남아있는 그는 사실 우리가 주로 어린 시절 동화책을 접하기 때문에 성인이 일반 독자들의 정당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측면도 무시할 없다. 올해는 안데르센이 14살의 나이에 뜻을 세우고 성공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입성했던 1819년도 부터 정확히 200년이 되는 해이다. 유명 발레리나를 찾아가 무턱대고 앞에서 춤을 추다가 쫓겨난 이야기나, 덴마크 물리학자 외르스테드의 도움으로 자신에게는 2 아버지가 되는 자선가 요나스 콜린을 만나 교육을 받을 있게 이야기, 그리하여 자신의 인생을 역전할 계기를 만든 이야기들  각각은 에피소드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오늘날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공장에서 규격품을 만들어내듯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키워내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안데르센이 살았던 삶에는 분명 누구나 흉내내기 힘든, 것의 삶이 그대로 베어있다. 안데르센은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살아가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이클 부스의 에피소드들

 

책을 읽는 재미는 분명히 마이클 부스가 새로운 장소에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따라가는데 있다. 저자는 낯선 도시에서 현지 사람들과 부대끼고, 때로는 이들의 불친절함에 소심한 복수를 계획하기도 하며, 때로는 유곽을 찾아가서 안데르센의 성적 취향을 궁금해하는 솔직함과 천진난만함을 보여준다. 그뿐만아니라 로마에서 덴마크 대사와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쫓겨난 대한 소심한 복수로, 로마에 방치되다시피 크누트 예배당(덴마크 성인을 기념하는 예배당) 관리 실태에 대해 비난을 하기도 한다. 불친절한 카페 종업원에 대한 복수로 독자에게 카페 주소를 공개하며 여기를 지날 소변을 보라고 것에서도 저자의 유머를 충분히 발견할 있다. 물론 부분에서 다소 과장된 유머가 있거나 혹은 문화적인 차이로 정확히 전달이 안되는 부분이 보이긴 하지만, 부스는 안데르센의 여행 경로를 따라가며 인물의 면모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점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나아가 모든 과정은 안데르센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여행 중에 저자가 기록해 놓은 생각들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여행기이긴 하지만 마지막 다뉴브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어머니와 조우한 다뉴브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의 에피소드는 다소 지친 마음을 충분히 보상해줄만큼 재미있다. 작가가 재미있게 각색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선상에서 부스와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만 보아도 작가의 어머니 또한 작가 못지않은 유머와 위트가 있는 같다. 한편 안데르센은 로마는 나를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준 곳이다라고 로마에 대한 가치와 호감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부스는 로마를 방문하여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안데르센에게 만족스러움과 흥분을 가져다준 이탈리아, 특히 로마에서의 경험과 부스가 안절부절 못하고 불편해하며 소심한 복수까지 하는 장면을 비교하여 읽다보면 흥미로웠다. 부스의 여행기는 독특한 입담과 유머로 재미있는 여행기를 남긴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마이클 부스처럼 히데오 역시 일본 혹은 한국을 비롯하여 주변국을 여행하며 사회를 관찰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재치있는 에세이를 남긴 있다.

 

거의 2세기 전에 안데르센이 자신을 이해해주지도 받아들여주지도 못하는 고국을 떠나 여행을 시작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고생길의 시작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운명의 길을 열어주었다. 안데르센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고향 오덴세를 떠나 코펜하겐에 입성한 이후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행은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의식이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인식의 지평선을 확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확장의 폭은 사람마다, 어떤 경험과 지식을 얻고, 어떤 사유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여행과 다른 점은 새로운 장소, 새로운 문화 유산을 접하는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이들과 교류하는 점이 다른 같다. 오늘날의 여행을 지식의 성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다른 차원에서 여행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관점에서 부스가 안데르센을 따라가며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한 여행이 우리에게 보다 흥미를 주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배우자의 고국에서 살기위해 익숙한 영국을 떠났던 부스가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따라 다시 덴마크를 떠난 것만 보아도 부스는 안데르센 못지않은 노마드가 아닐까. 끝으로 안데르센이라는 복잡하고 흥미로운 인물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면, 안데르센 자신이 남긴 상당한 양의 자서전과 함께 마이클 부스의 여행기를 함께 읽어보면 좀더 입체적으로 인물을 이해해볼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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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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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민자들》

(원제: Die Ausgewanderten)

W.G. 제발트(W.G. Sebald) 지음 | 이재영 옮김 | [창비]

 



역사는 실증적인 방법에 따라 만들어진 기억이고, 신화적 시간을 폐기하는 지적인 순수 담론이다. 그리고 사진은 확실하지만 덧없는 증언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했던 롤랑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펼친 《밝은 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 구절이다. 독일의 소설가 W. G. 제발트가 《이민자들》 읽은 남게된 여운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제발트가 생전에 남겼다는 4권의 소설집 권으로서 《이민자들》 접하게 되었는데, 권만으로도 나는 이미 제발트의 독자 되어버린 듯하다.

 

《이민자들》 4개의 짧은 소설을 담고있다.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제목이 암시하듯, 어떤 이유로든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인 제발트가 주목하고 있는 이민자들은 독일계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가혹한 인종말살 정책을 펼쳤던 조상의 후손으로서, 독일인 제발트가 담고 있는 주제는 매우 드문 시도라고 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갔던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어느 일본인이 이토록 절제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러한 시도가 얼마나 드문 것인지 이해가 것이다. 다만 제발트는 자신의 조상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밝히지는 않는다. 제발트는 살아남은 이들’, 특히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화자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속에서 여러 사진을 놓고 사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시도라고 했다. 이번에 읽은 소설 《이민자들》또한 제발트가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실제 사진을 통해 이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형태를 띤다. 그러므로 옮긴이가 언급한바와 같이 소설은 실제와 허구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제발트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통해 소설로 재구성했다면, 여기에서는 많은 이들이 나의 이야기 받아들일 있는 보편성을 찾아볼 있을 것이다. ‘진실 여부 문제보다 우리는 기억들을 잊지 않고 다음 세대로 들려줄 있는지가 중요해보이는 이유다. 바르트가 사진은 확실하지만 덧없는 증언이라고 , 사진은 사람이 정말로 존재했다 놀라운 사실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보다 확실하게는 지구 멸망의 시점에) 갖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제발트는 실존 인물들 혹은 풍경을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면서 바르트가 떠올렸던 덧없음 마찬가지로 곱씹었을 것이다.

 

 

사자(死者) 귀환’,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고통】

 

소설의 단편 헨리 쎌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주인공들은 공교롭게도 자살한 인물이다. 헨리 쎌윈 박사는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이민자로,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다 영국에 도착하여 정착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파울 베라이터는 조부모 명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3/4 아리아인, 1/4만이 유대인) 젊은 시절 공부를 마치고 교사일을 시작하자마자 쫒겨난 경험이 있다. 반면 아리아인의 피가 섞여 있었기에 6 기갑포병대에서 복무해야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야기 모두 유대인으로서 고향을 잃은이방인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 가해자도 아닌 이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했을까?

 

헨리 쎌윈 박사는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고 공장주의 딸과 결혼하여 평생동안 넉넉하게 살았지만, 자신의 혈통때문인지 부인과의 관계는 점점 소홀해졌다. 쎌윈 박사의 고백대로 시간이 지날 수록 향수병이 심해진다는 그는 정원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점점 고독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7살에 리투아니아의 마을에서 이민길에 오른 그였지만 봤던 풍경의 기억은 쎌윈 박사의 몸에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젊은 시절 깊은 우정을 나눴던 베른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의 돌연한 사망소식은 쎌윈 박사의 기억에서 평생 지울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방인으로서 타지에 오래 살았지만 어린 시절 각인된 환경을 그리워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인 같다. ‘기억이라는 것은 어쩌면 본래 고독한 존재인 인간이 기댈 있는 버팀목인지도 모른다. 리투아니아의 고향 마을도, 요한네스 네겔리도 결국은 쎌윈 박사의 기억으로 들어온 대상들이기에 쎌윈 박사의 고통은 단순한 고향 상실의 문제는 아닐 터이다. ‘관계의 존재 인간이 고독하게 살아갈 수는 있어도, 인간이 의지하는 무엇에 대해 인위적인 혹은 불가항력적인 단절 개입한다면 삶의 의미를 잃게될 수도 있지 않을까. 쎌윈 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불가항력의 단절로 부유하던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소울메이트와 같았던 사람이 돌연 자신의 삶에서 사라려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살아남았지만, 자신을 붙들어주는 끈이 끊어져 세상과의 모든 연결 고리가 사라진 순간 살아남은 이들은 고통스런 기억 기억의 고통 평생 마주해야하는 운명을 지닌다.  

 

쎌윈 박사의 사망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자는 72 만에 빙하에서 요한네스 네겔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이에 화자는 사자(死者)들은 이렇게 되돌아 온다라고 말한다. 쎌윈 박사는 죽음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고, 반대로 네겔리는 죽음의 장소였던 빙하라는 심연으로부터 다시 올라오는 현상은 기억 매개로 해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사자(死者) 귀환모티브는 파울 베라이터에서도 찾아볼 있다. 파울은 화자의 초등학교 은사인데, 나치의 등장으로 실향민이 독일인이다. 파울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의 화자에게 전해주는 란다우 부인이 화자에게 사진 앨범을 보여주자, 사람의 기억 통해 망자들이 소환되고 있다.

 

앨범에 담긴 사진들을 보다보면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같기도 했고, 우리가 그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같기도 했다.”(61)

 

《밝은 방》에서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의 사망 직후 어머니의 어릴 모습이 담겨있는 온실 사진을 보며 사진의 본질을 거듭 생각했고, 자신이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느끼기도 한다. ‘카메라 앞에, 그리고 사진사 앞에 그리고 , 나의 어머니가 정말로 있었고, 어린이가 바로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 깨닫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도 란다우 부인의 앨범을 보면서 어릴 기억하던 은사의 모습과 자신이 모르던 은사의 모습을 맞춰가며 사람의 존재를 다시 회상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림 자체에 시간의 흐름을 수반하고 있는 그림과 달리 순간 포착된 사진이 오랜 시간 뒤에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힘일 터이다. 다시 말해 살아남은 들은 기억을 통해 고통 불러오고, 이를 다시 고통스럽게 기억해야하는 자들이다.  

 

 

【이민자들의 잃어버린 고향 이타카(Ithaca)

 

소설이 담고 있는 편의 소설 중에서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나오는 아델바르트는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니다. 하지만 산업화되어버린 삶의 조건 속에서 실업으로 고향을 상실한 인물이다. 아델바르트는 소설 화자 어머니의 외삼촌이었다. 아델바르트는 실업 ,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유대인 은행가의 집사로 일했다. 화자가 아델바르트의 삶을 조사하고 찾아가면서 알게되는 사실 중에 아델바르트의 말년의 모습에 특히 주목해본다. 그는 집사 생활에서 은퇴한 자진해서 뉴욕 () 이타카 시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가 말년을 보내기로 한다. 특히 50년대 초에 미국에서 유행하던 전기충격 요법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과도한 충격요법으로 몸과 정신이 망가져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아델바르트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화자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은퇴한 정신과 의사인 에이브럼스키 박사였다. 에이브럼스키 박사가 기억하고 있는 아델바르트는 극심한 우울증을 비롯하여, 이와 통상적으로 함께하는 육체적인 퇴락현상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박사의 말로는 아델바르트가 거듭 세상에 작별인사를 하는 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이미 나는 아델바르트 씨의 그런 태도가 실은 자신의 사고능력과 기억능력을 가능한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말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143)

 

말하자면 일반적인 우울증과는 달리 자신의 정신을 의도적으로 파괴 또는 정화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1950년대 정신치료를 위해 전기 요법을 사용한 목적 또한 전기충격을 통해 일종의 기억 저장장치로 보았던 뇌를 포맷하기 위함이었던 것임을 염두해 둔다면 좀더 이해가 간다. 아델바르트가 기꺼이무시무시한 정신충격 요법을 받아들였는지 소설 속에 명확히 나오지는 않는다. 가지 짐작해본다면, 아델바르트가 유대인 은행가 코즈모의 집사로 일하던 세계 여러 곳을 함께 여행하며 보았던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산업화의 진행으로 파괴되어버린 인간다움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은 단서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어느 나라에 가든, 지구상의 어디를 가든 다를 바가 없다. 자동차와 부띠끄 상업, 그리고 온갖 방식으로 점점 확산되어가는 파괴중독증으로 인해 살아남은 곳이 없다.”(147)

 

결국 아델바르트는 실업으로 고향을 잃게된, 후기 산업사회의 디아스포라라고 있다. 상황이 유대인 가문의 집사라는 설정으로 접목이 되어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항상 함께 다니던 주인 코즈모 또한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인물은 결국 각자 타지에서 삶을 마감했던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아델바르트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던 정신병원이 있던 곳이 뉴욕 () 이타카(Ithaca)라는 장소이다. 이타카는 사실 그리스에 있는 섬의 이름이면서, 호메로스의 저작 《오딧세이》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여 페넬로페와의 신혼생활을 중단하고 전쟁에 참전한다. 그는10 동안 전장에서 보내고, ‘트로이의 목마계책으로 승리한 귀향길에 올랐지만 바다의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서 다시 10 지중해를 해매는 운명을 맞는다. 이런 맥락을 고려해보면 제발트가 설정해둔 소설 속의 공간 이타카는 타지에서 떠도는 이들, 이민자들이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고향의 은유로서 사용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델바르트의 비망록을 해독하며 그의 자취를 따라가보는 화자는 그리스의 이타카 섬을 지나는 대목도 잠시 나오는 , 부분도 잃어버린 고향에 대해 다시금 환기시키는 장치로 이해된다.

 

아델바르트가 마지막으로 전기충격 요법을 받았던 , 진료시간을 어긴 그를 찾아간 에이브럼스키 박사에게 창밖을 바라보던 아델바르트가 해준 마디는 상당한 여운을 준다.

 

나비 잡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무심결에 잊어버린 모양입니다.(146)

 

내게 나비 잡는 사람 이미지는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서, 그리고 보호받고 지켜야될 존재 혹은 가치로 다가온다. 인간다움이 존재할 있는 고향을 암시할 같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전세계가 획일화되고, 파괴되어가는 인간의 조건 속에서 현대인들은 모두 고향을 상실한 존재와 다름 없다는 메시지이기도 같다. 그러므로 이는 상징적이긴 하지만 아델바르트가 정신병원이 있는 이타카 이유이기도 것이다.

 

 

【트라우마의 공간, 그리고 망각에 대한 저항행위들】

  

번째 소설 막스 페르버 화자는 스위스 인으로 영국에 이민가기로 하고 맨체스터에 도착한다. 여기서 우연히 만난 화가가 바로 막스 페르버였다. 페르버는 나치를 피해 실향민이 유대인으로, 페르버의 부모는 나치의 유대인 강제 이송 열차를 타고,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다. 페르버가 기억하기 싫어하는 고통 중에는 나치에 의해 부모님이 살해된 후에 소식을 들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페르버가 받은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는 평생을 안고 살아야하는 숙명이 되었다.

 

이따금 나를 엄습하는 단편적인 기억의 영상들은 차라리 강박관념들이라고 해야 것야. 내게 떠오르는 독일이란, 머릿속의 광상(狂想) 같은 것이네. (…) 내게 독일인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무시무시한 얼굴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아야 하네.”(229)

 

페르버의 강박관념 결국 그의 몸에 반복적으로 각인되어 트라우마가 되었을 터이다. 몸에 각인되어 지울 없는 상처. 그건 페르버가 맨체스터라는 공간을 보자마자 몸이 반응했던 이유이기도 것이다. 다시 말해, 맨체스터라는 공간은 페르버라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환기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세계로 확산된 산업화의 발상지였지만 어느덧 무연탄색으로 시커멓게 덮여버린 도시, 만성적인 가난과 몰락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도시로서 맨체스터는 페르버가 앞으로 줄곧 살게 도시였다. 산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원형극장의 바닥처럼 보이는 도시는 가라앉고 있는 도시 이미지를 주면서도 다른 심연(abyss) 이미지를 암시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헨리 쎌윈 박사에서 등산안내인 요하네스 네겔리가 추락했던 빙하 이미지와 상통한다. 네겔리의 빙하도 역시 죽음을 마주하는 공간이자 사자가 귀환하는 공간로서의 이미지를 준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에서도 아델바르트가 죽음을 맞이하는 이타카의 정신병원 바로 막스 페르버 맨체스터와 같이, 죽음을 맞이하고 망자를 소환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소설의 어느 주인공도 결국 자신들이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자신만의 심연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가지 주목해볼만한 부분은 파울 베라이터에서 파울이 자살하는 공간이 철로 라는 것과, ‘막스 페르버 맨체스터를 바라볼 느꼈던 장면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살행위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하나의 행위로 전달하는 메시지의 성격이 있다고 본다. 일종의 사회적 메시지인데, 파울이 누웠던 철로의 공간은 어쩌면 과거에 수많은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날랐던 기차가 가던 길의 모습과 오버랩되고 있다는 말이다. 제발트에 따르면 철도에서 끝을 보다라는 의미가 원래 철도에서 평생 직업을 찾다라는 의미이긴 하지만, 독자로서 나에게는 철로가 파울에게는 돌아오지 못한 가족의 운명을 환기해주는 기호로 보인다는 점이다. 파울은 어쩌면 자신의 일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던 상처와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자신의 일부가 아리아인이라는 이유로 기갑포병대에서 나치를 위해 일했던 자신을 속죄하기 위한 행위로서 철로에 누웠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파울의 철로라는 공간 또한 헨리 쎌윈 박사 요한네스 네겔리의 빙하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에서 아델바르트의 이타카 정신병원 함께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있던 사람이 죽음 마주하고, ‘사자의 귀환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보아도 무방할 같다.   

 

페르버가 몰락하고 있던 맨체스터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살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밤낮없이 나오던 굴뚝의 연기는 전쟁을 경험한 페르버가 전쟁터에서 불타오르던 인간성 몰락과 문명 파괴의 모습, 유대인 수용소에서 끊임없이 시체를 태우던 굴뚝의 풍경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몰락하는 거대한 원형극장처럼 생긴 맨체스터 역시 빙하’, ‘철로그리고 이타카의 정신병원 일맥상통하는 구조를 보인다고 있겠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페르버가 폐기종으로 죽어가는 상황도 결국 밤낮없이 나오던 굴뚝의 연기로 몸에 또다른 상처에 다름 아닐 것이다.

 

독일인으로서 저자 제발트는 소설의 여러군데에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소설 인물의 입을 통해 소설 속에 개입하는 부분이 있다. 많은 독일인들이 선조가 했던 일들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게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은폐를 하려고 했는지를 지적하는 대목이다.

 

파괴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은 그들이 그전에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65)  

 

말은 파울 베라이터의 말년에 대해 이야기 해주던 란다우 부인의 지적이다. 평범한 독일인들도 전후 자신 또는 선조의 행위에 대해 침묵하고 은폐하려 했던 정황을 독일인의 입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자살과 함께 침묵 사회적 메시지를 주는 행위로서 이해될 있다. 결국 독일인 후손들의 침묵 선조의 행위와 마찬가지인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제발트의 비판인 것이다. 이러한 제발트의 개입은 막스 페르버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화자는 페르버의 가족이 묻힌 유대인 공동묘지를 방문하는데, 대목에서 화자는 저자의 생각을 직접 개입하여 독자에게 전달한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독일인들의 정신적 빈곤과 기억상실, 그리고 과거의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린 그들의 교묘함으로 인해 머리와 신경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또렷하게 의식할 있었다.”(287)

 

화자는 유대인 공동묘지를 방문한 , 묘비에 새겨져있는 사자(死者)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읽고 있다. 행위는 보다 적극적으로 망자를 소환하는 의식이기도하고, 망각하고자 혹은 은폐하고자하는 동료 독일인들에 전하는 제발트의 메시지이자, 제발트가 요청하는 집단적인 망각에 대한 저항 행위일 것이다.

   

책을 덮어도 제발트가 담담하게 전해주는 이야기들의 여운에는 나를 위로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제발트가 실제로 관심을 갖고 만나고 사진을 수집하고,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은 모두 한때 분명히 존재했던평범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들 모두 죽었으며, 이들은 모두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고향을 상실한 살아갔던 사람들이었다. 이유가 나치에 의해서든, 산업사회가 소외시킨 결과였든 간에 말이다. 제발트는 실존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설 속의 화자 같은 역할을 한다. 그의 이런 노력 속에는 평범하지만 삶을 살았던 이들의 아픔에 주목하였기에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 허우적대며 부유하는 나를 위로해주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 모두는 이타카라는 고향을 상실한 지구의 이방인이자 이민자일 것이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의 고향은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이미 어디에도 없는 으로서의 유토피아로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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