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편집장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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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편집장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기존의 전통과 관행에 균열을 내는 사람

 


언론분야는 개인적으로 생소한 분야다. 굿바이, 편집장 읽고나서 저자에 대한 인상을 마디로 이야기해보면 그는 기존의 전통과 관행에 균열을 내려고 노력해온 사람이라고 정리해볼 있을 같다. 무엇보다 언론인으로서 저자는 일을 만드는사람이다. 사회 조직이나 어떤 형태의 시스템이든 집단에 속해있다면 나서서 일을 만드는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것이다. ‘일을 만드는 스스로 과정과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전통이란 우리에게 하나의 의식이 되고 안정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이 고착화된 관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조직에서 저자 같은 구성원은 일을 벌이고 튀는유형의 사람이 되어버린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일을 만드는유형의 인간이 수는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 자신의 삶을 보다 주도적으로 살기 위해서도 일을 만드는사람이 지금 보다 많아지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기자이자 편집자/편집장의 역할을 맡았던 저자가 일을 만들지 않았다면, 한겨레 토요판 모습은 분명히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고, 한겨레의 가지 굵직한 이슈들이 나오지 않았거나 조금은 다른 양상으로 결과했을 것이다.

 


예를 가지 들면 저자가 기획했던 동물 기사가 있다. 바로 불법 포획되어 서울대공원으로 팔려 훌라후프를 돌리며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던 남방돌고래 제돌이삶에 관한 기사였다. 저자가 토요판을 책임지고 있을 진행되었던 취재와 보도의 결과, 제돌이가 다시 자유를 얻어 제주 앞바다로 나갈 있게된 일련의 과정들이다. 이야기는 개별 동물의 사례를 통해 동물권에 대한 관심과 주목을 요구하였고, 다시 이것이 인권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통찰을 주었던 사례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저자가 일을 만들지 않았다면, 제돌이는 여전히 동물원에서 훌라후프를 돌리고 있을 것이다. 당시 대선을 앞둔 긴박한 시국에 토요판 1면을 돌고래 이슈로 채워넣으려 했던 저자의 시도는 내부에서도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고경태 대표는 당시에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제돌이 문제, 보다 크게는 동물권에 대한 문제의 중요성에을 감지했던 것이다. 저자는 사회에 묻혀있던 굵직한 이슈들의 징후를 예민하게 느끼고 감수하는 능력을 지닌 같다. 나는 이런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예민한 감수 능력을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이들에게는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술가적 감수성을 가지고 시대의 징후 예민하게 느꼈던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일을 만드는편집장에게는 이러한 예민한 예술가의 감수성 또한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관점에서 책은 대한민국 저널리즘의 역사 100 중에서 저자가 언론에 몸담았던 지난 30 년간의 경험이 녹아있는 기록이라 있다. ‘엄숙, 근엄, 진지하기만 했던 언론 매체의 분위기를 김규항과 김어준의 쾌도난담코너를 통해 바꿨던 시도는 단지 가지 예에 불과하다. 한겨레신문의 토요판 기획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내외에서 비판과 마주했던 일들은 다른 인상적인 예이다. 진보 언론사의 성격임에도 여러 사람이 모인 공간이니만큼 견해 차이도 다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가 담았던 조직에서 특히 일을 만드는 책에서 기획을 의미한다. 기획은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완성하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이미 여러 가지가 유치하게 다가올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남의 흉내를 내고 따라하는 이야말로 유치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획단계에서 튀는아이디어를 추진하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상황은 보수 언론사에서도 다를바 없을 것이다. 다만 데스크를 누가 지키느냐의 차이일 같다. 그런 점에서보면 저자가 편집의 책임을 맡은 자리를 지키며 씨끌벅적하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관철해낸 일들을 따라가다보면 신기한 점이 두가지가 아니다. 본인은 뚝심이라고 판단할 지라도, 남들에게는 아집으로 보일 있었을 것이다. 역시 정답이란 없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지 않는다면 반듯한 결과를 얻더라도 기껏해야 칭찬도 진부할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저자가 들려주는 지난 날의 경험들은 다양한 가치와 견해가 공존하는 민주사회, 직장에서 책임을 사람의 자리지킴과 물러남은 어떻게 결정되는가의 물음을 추가로 내게 던져주었다.

 


책을 읽으며 가지 인상적인 사건을 들자면, 역사학자 한홍구 선생과 작가 서해성 선생이 만들어나간 한홍구와 서해성의 직설코너에서 생긴 필화였다.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하여 칼럼의 제목을 감 없이 지은 것이 발단이었는데, 기사가 나간 다음날부터 저자는 분마다 울리는 전화와 욕설, 협박에 한동안 시달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코너의 글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글의 맥락을 차분히 따져보는 사람이라면 신문사에 욕하지는 않았을 같다. 기사 이후 8일간 260명의 독자라는 사람들이 절독선언을 했다고 한다.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다음날 신문 1면에 사과문을 게시한 사례는 다시봐도 아쉬운 사례이긴 하다. 독자들이 기사를 보고 화를 냈다고 해도 모든 사례에 대해 사과를 필요는 없을 터이다. 다만 여기에서도 정답을 알려주는 이는 없다. 실제로 쉽지는 않은 문제다. 사건은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저널리즘 분야의 종사자들 뿐만 일반 독자들에게도 생각해볼만한 꺼리를 준다고 본다. 나아가 강준만 교수의 언급에도 주목해보게 되는데, 일종의 팬심 가지고 특정인에게 충성하려는 행동을 하려면 하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정작 본질적인 이슈 갖고 싸우라는 말이었다. 이것은 특정인에 대한 팬심 갖고 있는 사람들의 미디어 컨트롤에 대한 경계를 경계하는 말이었다. 저널리즘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도 귀담아 듣고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관찰할 염두에둘만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구성에 대한 부분을 가지 언급하자면, 저자가 챕터 뒤에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이 내게는 읽기에 아주 불편하다는 점이다.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생각으로 빠져들곤 하지만, 책의 구성만큼은 책읽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구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짧은 주석이라면 해당 페이지의 하단에 각주 처리하여 책을 뒤적이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보다 주석이라면 책의 뒤에 미주 한꺼번에 모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책을 읽는 습관에 따라 상관없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경우는 주석도 살펴보면서 확인까지 해보며 읽기 때문이다. 매번 챕터의 주석이 있는 부분의 페이지를 찾아  확인하며 읽는 과정은 내게는 고역이다. 책을 읽는 흐름을 깨뜨림과 동시에 손이 분주해져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책의 구성에 정답은 없을 것이지만, 사람에 따라 독자의 읽는 방식에 따라 독서를 하기에 불편을 느낄만한 부분이 있다. 이따금씩 주석에 나온 2 자료를 찾아보는 사람들에게는 저자처럼 주석의 내용이 많은 저자의 글쓰기 방식의 경우, 책의 뒷면에 주석을 한꺼번에 모아두는 것이 나을 같다.  

 


책을 읽으면서 편집자, 편집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일해온 저자의 개인사를 따라가보았고, 나아가 언론 역사의 단면을 있었다. 묻혀 있던 다양한 사회 이슈들을 공론화하였고, ‘걱정 입에 달면서도 많은 일들을 해낼 있었던 저자의 기획 원칙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여러 사건 중에서 역사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을 항상 가져야 결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호기심을 갖고 사람살이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 같다. 저자는 이렇게 나온 유치한 생각’, ‘아이디어들에 꽂히면 즉각 실행해나갔던 것이다. 기획자로서 가장 중요한 행동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놓고 보니 자기 계발서같은 뉘앙스를 같아 조심스럽지만, 일단 해보라 것이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다. 특정인이 관여된 경우라면 일단 이들을 만나고, 이야기해보는 것이다. 걱정많은 사람들에겐 귀담아들을만한 조언이다. 사람이 모든 일에 전문가가 아닌 만큼 함께 만들어갈 사람을 찾고 섭외하는 일도 일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굿바이, 편집장 읽으며  30여년간 언론분야에서 숨가쁘게 지켜왔던 저자의 업에서, 편집장의 자리에서 길어올린 삶의 통찰을 살펴볼 있다.     

 


책의 어디엔가는 편집장으로서 저자의 궤적을 보여주는 시가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이다. 시는 워낙 많은 맥락에서 인용되고 활용되어 식상할지로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며 느끼는 감정은 시가 그래도  일을 벌이는사람의 고단함에 대한 위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대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158, 재인용 부분)  

 


그러므로 저자가 지니고 실천해온 철학을 마디로 뭐라고 묻는다면, 나는 기존의 관행에 균열을 내기라고 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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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닐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이민희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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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 이민희 옮김 | [창비]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고실험

 

인간의 조상은 상당히 오랫동안 생존 유일한 목표였던 시기를 겪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타고 가던 배가 태평양의 가운데에서 조난을 당해 수십일 가까이 표류하다가 급기야는 죽은 동료들을 잡아먹은 실화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안데스 산맥에 불시착하여 생존했으나 조난 당해 속에 넘게 갖혀 지내며 옆에 죽어 있던 사람들을 잡아 먹고 생명을 유지하다 구조되었던 사람들에 관한 실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법과 규칙이 준수되는 현대 문명 사회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우리는 생존에 위협을 받는 나약한 존재다. 《드라이》 저자인 셔스터먼과 재러드 셔스터먼 부자는 심지어 우리 문명 사회에서 생존 최우선과제가 되는 상황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 수도관 공사나 물탱크 청소 등으로 반나절이라도 단수를 경험해본 이들이라면 물의 공급이 예고도 없이 중단되는 상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있는지 실감나게 구성해 내었다.

 

물공급이 중단된 배경은 물이 부족한 지역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공급되는 배수관에 흘러드는 물의 공급이 지역이기주의의 결과로 중단된 것이 발단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물공급 문제가 해결이 기미가 보이질 않자 대형 마트의 물과 음료 코너가 동이나고, 급기야는 사람들과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단수 2일차에 이미 병원행 급수차에 있는 물을 탈취하려다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람이 발생한다. 물이 당장 필요한 사람들 중에서 탈수로 사망하는 사건이 이미 단수 3일차가 되기 전에 발생한다. 우리가 공기오염과 미세먼지로 맑은 공기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기 전까지 공기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얼리샤도 그랬다.

 

예전에는 물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도 못하고 신경도 썼다. 언제나 자리에 있었으니까.”(16)      

 

우리가 일상에서 향유하는 모든 필수 생활요소와 물품은 우리가 결핍의 상황과 마주하지 않는 대상의 편리함과 가치를 생각해볼 기회가 흔치않다. 물은 응당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현금은 으레 현금지급기와 에서 나오는 줄로만 알게되는 것이다. 단수 조치는 지역끼리의 이기주의의 결과였기에 분명한 인재였다. 저자의 상상을 따라가다보면 실로 생각하기도 싫은 불편함과 바로 마주하게 된다. 샤워는 커녕, 용변의 문제로 인한 위생상의 문제가 곧바로 사람들을 취약한 상황으로 몰고감을 있다. 와중에 물을 갖고 있는 가정에 대한 시기심과 생존본능으로 작은 마을에서조차 반목과 다툼이 일어날 있음을 충분히 예상해볼 있다. 상당히 현실감있는 문제다. 특히 우물물을 퍼서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물을 나누어 쓰던 부모님의 세대까지만 해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개울에서, 산에서 물을 길어다가 나누어줄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거의 모든 수자원은 기업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병에 물을 넣어 생수를 파는 세상이 되었다. 물과 지하수는 오염이 되었고, 기업들의 과도한 지하수 사용으로 지하수가 줄었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가 것임은 충분히 상상해볼 있겠다.

 

소설은 주인공인 얼리샤 집안의 부모가 단수 조치 물을 구하러 나간 , 큰딸인 얼리샤와 남동생 개릿, 이웃집 소년 켈턴이 얼리샤의 부모와 물을 찾아 떠나는 일종의 로드무비와 같은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장면마다 새로운 사건과 위기가 다가오기도하고 가장 어린 개릿의 실수로 전체가 위기에 처하기도 하는 안타깝고 긴장감을 자아내는 플롯이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재난이라는 거대한 상황에 휘말린 주인공들이 겪는 일종의 호러 소설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셔스터먼 부자가 애초에 드라마나 영화제작을 염두에두고 구상한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문명 속의 인간에게는 언제나 자리에 있는 하나인 결핍이란 사태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어둠을 어떤 양상으로 끌어내 보일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있다. 책을 읽어나가며 그대로 물을 마시기 위해 이성을 잃은 워터좀비들이 보여주는 폭력성과 인간이 갖고 있는 어두운 면을 다채롭게 상상해볼 있을 것이다.  

 

 

해변에서 만난 소녀 재키가 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켈턴 집안의 비극을 보며 (켈턴의 )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의 피뢰침이었다”(208)라고 혼잣말하고 있는 것처럼, 상황에서 물의 가치는 가격을 따지기 힘들 정도가 된다. 탈수로 고통받는 주인공들 역시 워터좀비가 되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보이던 얼리샤에게도 생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생존이라는 경쟁에서 2등은 무의미하다. 오직 생존 아니면 죽음이 있을 . 급기야 탈수 증상이 심해져 기력을 잃은 동생 개릿을 보며 얼리샤에는 이제 도덕 무의미해진 단계에 이른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 누가 죽어야 한다면, 얼마든지 물을 빼앗고 죽게 내버려 둘테다. 헨리가 맞았다.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돼야 때도 있다. 지금 나는 괴물이다.”(406)

 

속에서 불길이 일행을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와중에 정신을 잃어가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노인에게 유일하게 남은 한잔을 빼앗아버리는 얼리샤의 모습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어두운 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자신의 혹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생존에 영향을 주거나 심지어 짓밟는 것이 정당한가, 혹은 윤리적인가하는 우선적인 문제와 마주하도록 한다.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있을 것인가? 우리는 심심치않게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표현을 접하곤 하지만 물이든 식량이든 우리의 생존에 지장을 줄만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을 , 소설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같은 괴물 되지 않겠다고 확신할 있을까? 소설 드라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인간이 어떤 행동을 있을 것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도 있을 같다.

 

드라이 일주일 정도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단수 사태로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성을 잃고 20만명의 생명이 사라져버린 재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직접적인 단수의 원인(지역 이기주의의 결과) 소설에 등장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파헤치고 있지는 않다. 애초에 이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상존하는지를 고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의 방향은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과 윤리의 문제, 그리고 개개인의 투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염두에 두고 구상된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수 문제가 미국내 여러 사이의 정치적인 문제와 얽혀있으므로 보다 분쟁의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만약 문제가 국가 간의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있을까. 사고실험만으로도 보다 국가 전쟁이 발생할 있다고 상상할 있다. 실제로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의 저서 물전쟁에서 저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어떤 점에서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경우 관심의 대상은 요르단강이다. 요르단강은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 요르단강의 서안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강이다. 요르단강은 이스라엘 물수요의 60% 공급하고 있기에 수자원을 확보하는 문제는 인종분쟁과 종교분쟁을 떠나 전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에는 언제나 물의 결핍에 대한 우려 내지는 두려움이 함께하고 있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나일강은 어떨까. 나일강은 아프리카 북부지역의 10 국가(에티오피아, 이집트, 수단,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콩고공화국, 에리트레아 ) 지나는 강이다. 반나나 시바에 의하면, 지역은 이집트의 아스완댐 건설로 10만명의 수단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물분쟁을 가속화했다. 소설드라이에서는 미국 사이의 정치적 이기주의로 인하여 일주일간의 단수에 머물렀으나, 현실에서 나일강과 같이 다른 민족과 다른 국가가 얽혀있는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예상해볼 있다는 것이다. 물론 드라이에서는 보다 시스템과 국가 분쟁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단순화하고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에 초첨을 맞춘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물과 관련한 문제는 단순히 물부족으로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을 돕는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여러 문제들을 논의해볼 여지가 있다.

 

한편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주인공 일행이 만나게 되는 새로운 인물인 헨리 어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자기계발 분야 구루들의 교훈을 끌어들이는 장면은 다소 어색한 부분으로 남는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워터좀비들이 인간성을 잃고 폭도로 변하여 한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예컨대 헨리가 가지고 있는 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위기는 기회이며, 진정한 부는 사고방식에서 나온다라는 식의 자기계발서들의 교훈을 꺼내드는 것이 소설의 전개과정과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어색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머무는 집에 침입한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감정에 굴복하지 말고, 감정을 이용하야 한다라고 침착하게 되뇌인다고 문제가 해결될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재난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에 이성적인 개인으로서의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행동 강령이 과연 도움이 것인지는 의문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얼리샤가 스스로에게 묻는 대목이 기억난다. “정녕 우리네 삶이 예전으로 돌아갈 있을까?”(442) 재난을 겪은 이들에게 재난 전후의 삶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재난의 고통은 온몸에 각인될 것이고, 사람들은 기억과 함께 살아가게 것이다. 워터좀비가 살아남았다면, 다시 이성을 갖춘 문명인으로 돌아와 도덕적인 상처를 어딘가에 묻은 살아가게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란 문제에 관심을 드라이 읽으며 나는 인간은 잔인한 동물이다라는 말을 가려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이 잔인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표현보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측면이 인간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전제가 아닐까. 인간이란 주어진 환경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잔인해질 있는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소설 드라이 전제하는 인간상의 모습에 적합하지 않을까 판단해본다. 소설은 인간이란 존재에 필수불가결한 부족한 상황이 되었을 이웃들이 워터좀비가 되어 잔인해질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준 흥미로운 사고실험이다.      

 



#드라이 #닐셔스터먼 #재러드셔스터먼 #이민희 #재난소설 #창비 #소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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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 미국 문학의 꺼지지 않는 ‘초록 불빛’ 클래식 클라우드 12
최민석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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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최민석 지음 | [arte]


 

학창시절, 그러니까 오래전에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처음 읽었다. 하지만 일말의 공감도 없었다. 읽었던 소설에 대한 내용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개츠비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지도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나는 부분은 갑자기 부자가 남자가 여자를 잊지 못해 스토커 내지는 변태 수준으로 과거의 여자를 생각하고 그녀를 궁금해하며 흥청망청 파티를 여는 장면 뿐이었다. 도대체 읽었던걸까. 개츠비가 도대체 위대한걸까를 궁금해하기도 전에 나는 수많은 독서인들의 찬사를 받은 소설이 이해가 되지 않아 나의 무식한 교양 수준을 탓할 뿐이었다. 그렇게 《위대한 개츠비》 나의 학창시절 이후 오랫동안 무명의 개츠비 잠수를 타다 앞에 나타났다.

 

소설가 최민석 작가가 피츠제럴드의 자취를 따라가며 일종의 취재를 겸한 여행 정리한 책이 이번에 만나게 《피츠제럴드》이다. 제목이 드러내듯 책은 인간 피츠제럴드에 대한 안내서라고 있다. 그렇다고 보다 포괄적이고 집요한 평전과는 다르게, 짧았던 피츠제럴드의 생애의 후반부를 대상으로 한다. 최민석 작가는 끊임없이 방랑하듯 살았던 피츠제럴드의 생애 중에서도 작가가 판단하기에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장소 곳을 선별하여 인간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생애 어느 순간을 조명하고 있다. 책의 서문 피츠제럴드와 부분을 보자마자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글쓰기를 준비했을 최민석 작가의 마음가짐에 공감할 있었다. 여러 편의 소설집과 에세이집을 펴낸 작가이면서도 대한민국에서 글쓰는 ’, 소설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암시하는 생계형 작가로서의 고백을 따라가며 피츠제럴드 이전에 그가 어떤 마음으로 책을 준비했을지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저자처럼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지는 않지만, 박봉을 쪼개어 아내에게 전달해야하는 가장으로서의 모습을, 무엇보다 그의 문장에서 찾아낼 있었다. 물론 책의 후반에서 소설가인 저자도 처음 《위대한 개츠비》 읽었을 , 소설이 고전인가?’ 반문했다는 고백또한  《위대한 개츠비》 대해 다시 관심을 갖게 해준 요인이었다. 단순히 나의 독서 수준이 낮거나 난독증을 의심할만한 징후가 아니었음을 확인해 해주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공감할 있는 데이터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사회에 나와 살아가면서, 보다 보편적인 삶의 이해와 경험치들이 쌓임에 따라 이제는 《위대한 개츠비》 다시 읽더라도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희망은 얻은 셈이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는 19세기가 끝나갈 무렵(그러고 보니 그의 123 생일을 앞두고 있다)에서 20세기 전반을 살다간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 1 대전의 시기를 겪었고, 유럽에서 일어나 끝난 전쟁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미국의 호황기였던 1920년대를 관통했던 인물이다. 특히 1920년대는 미국의 에포크’(좋은 시절)였다. 비록 20 내내 금주법의 시기였지만, 당시에 주류 생산을 급격히 줄인 결과, 오히려 술값이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등장하듯, 밀주를 팔아서 부를 축적했던 이들 또한 있기 마련이다. 20년대는 또한 일명 재즈 시대이기도 하다. ‘아는 사람 초대되어 들어갈 있는 클럽의 비밀 공간에서 재즈를 듣고,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했던 당시에 끈적끈적하고 매캐한 공기 속에서 피츠제럴드가 하이볼을 손에 들고 자신의 야망과 상승욕구를 불태웠으리라 상상을 해본다.

 

피츠제럴드를 미국적인 작가라고 불렀을 , 표현의 함의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우선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요소와 백인 중심 사회라는 키워드를 떠올려보게 된다. 아마도 피츠제럴드가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버지의 친척 중에는 미국 국가를 작사한 인물이 있으며, 볼티모어 시에는 그의 동상도 있다고 한다. 바로 부계 쪽으로 명망있는 백인 가문이라는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으며, 모계 쪽으로는 185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 미국으로 이민온 부유한 이민자들의 후손으로서의 연결고리를 모두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처음 《위대한 개츠비》 읽었을 아무런 감흥이나 기억나는 부분이 거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미국적이라는 키워드의 함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피츠제럴드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의 커다랗고 공고한 장벽과 처음 맞닿게 되는 프린스턴 대학 시절을 조사한 부분을 주목해본다. 나는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최민석 작가가 프린스턴에서 마주한 발견들을 따라가면서 돈만 있다면 귀한 신분이 있는 대한민국의 사회보다 철저히 근본적인 철옹벽이 둘러쳐져 있는 미국사회의 보수성과 배타성을 새롭게 있었다. 아들이 친구들과 점심먹을 공간을 짓는데 대략 20 원에 해당하는 기부금을 내는 가문들이 미국과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고, 이들의 자녀들은 곳에서 대학생활을 함께하며 평생 사업을 같이 친분을 쌓아 것이다. 사실 저자가 소개한 피츠제럴드의 집안 역시 개츠비에 대한 설정처럼 가난한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어린 시절부터 프린스턴 시절에 이르기까지 강박에 가까울정도로 스스로를 상대화 시키며 자신이 결핍하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소설에서조차  미국인이라면 지느러미를 가지고 태어나야 한다”, “그들은 (미국인들은) 그렇게 태어난 셈이다. 돈이 지느러미다라고 써둔 것이 아니겠는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금수저와 흙수저를 이야기하지만, 이미 1-2세기 전에 자본주의 사회의 최전선인 미국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교훈을 이미 우리에게 주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일종의 돈많은 스토커 있었던 것은 데이지라는 여인 때문이다. 미국의 빈부격차를 극명하게 있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어느 지역에 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지역 이스트 에그(전통 명문가가 사는 , 데이지의 집이 있는 )’ 웨스트 에그(신흥 부자들이 사는 , 개츠비의 집이 있다)’ 있다. 소설에서 장소를 분리하는 물은 개츠비에게 장애물이자, 넘어야할 대상일 뿐이다. 개츠비에게 있어 물을 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라는 지느러미 필요하다. 속을 거스르든, 헤쳐 나가든 하기 위해서는 응당 지느러미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소설 밖에서 피츠제럴드의 또한 상당히 극적이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특히 돈없는 가난뱅이라는 이유로 사랑을 이룰 없었던 피츠제럴드가 어떤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 있다면 상상할 있는 능력 테니까. 물론 피츠제럴드가 겪었을 법한 이런 현실은 극소수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이런 부유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아픈 이들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는 있다.

 

피츠제럴드가 살아간 생애의 실마리를 따라간 이번 기회로 미루어 보면 그는 모든 소설에서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든 글의 소재로 사용했음을 깨닫게 된다. 달리 말하면 최민석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피츠제럴드는 평생 자전 소설을 작가라는 간결 명료한 표현을 곱씹어보게 된다. 1 대전에 참전하기를 갈망하며 대기하던 와중에 전쟁이 끝나 헤밍웨이처럼 전쟁 영웅이 기회조차도 얻지 못했던 피츠제럴드. 이마저도 상처와 결핍이 되었던 그의 삶을 보면, 그의 소설은 작가 피츠제럴드 자신의 욕망을 대리 실현하는 공간으로서 사용했다고도 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전쟁에 참전하여 영웅의 모습으로 복귀하는 설정도 이러한 배경과 저자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따라서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을 단서로서 분석하면, 역으로 그의 결핍과 욕망이 어떤 식으로 투영되고 문자화되었는지를  파악할 수도 있겠다. 특히 최민석 작가가 소설의 화자인 닉이 피츠제럴드의 다른 페르소나로서 있다는 지적은 분명 《위대한 개츠비》 다시 읽어나감에 있어 중요한 키워드가 같다. 피츠제럴드에게 있어 개츠비가 계급이라는 벽으로부터 받은 결핍과 상처의 보상 기작이라고 한다면, 닉은 글을 쓰는 자로서 피츠제럴드의 욕망이 분출된 캐릭터라고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데이지가 젊은 시절 사랑의 실패에 대한 아픔의 기억을 통해 되살아난 캐릭터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피츠제럴드가 평생 자전 소설을 썼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며, 이건 하나의 강박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된다.

 

  최민석 작가의《피츠제럴드》 읽으며 피츠제럴드의 삶을 조금 이해하다보니 다시 《위대한 개츠비》 읽어보고 싶어졌다. 다른 고전들은 경우에 따라 다를 있겠지만, 특히나 피츠제럴드의 경우는 자신이 써낸 작품이 자신의 삶과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고 있다. 잊혀진 작가로 알고 있던 피츠제럴드가 팔리지 않는 자신의 책을 사려고 서점을 방문했을 , 놀란 서점 주인들의 표정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말년에 정신병원에 있던 아내 젤다에게 이제 나는 완전히 잊혔소라고 인정하며 써내려간 순간의 심정은 어땠을까.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아닌 그의 삶을 따라가보며 44 이라는 짧은 생애에 응축된 인간의 고뇌와 상처를 가까이서 느끼고 공감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그의 작품을 읽어보게 되면 소름돋을 정도로 솔직한 그의 내밀한 욕망을 이해할 있지 않을까. 최민석 작가의 말대로 위대한 소설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 존재감을 드러낸다라는 점을 믿어보고 싶다. 머나먼 이국 땅에 묻힌 작가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아는 작가의 말이니까. 내게는 생애의 절반에 가까운 소설이 익는 시간 필요했던 모양이다. 최민석 작가의 진심과 도움을 빌어 나의 감각과 영혼 눈을 뜨는 순간을 나도 기대해보게 된다.                   

 

책이 인간 피츠제럴드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가까워지길 의도한 결과물이라면, 최민식 작가는 성공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책을 읽은 다음 이미 오래 전에 《위대한 개츠비》 읽었을 , 아무런 감흥이나 기억나는 대목하나 남아있지 않은 중년의 어느 초보 독자가 《위대한 개츠비》 주문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문학작품의 뒤에 정리되어 나오는 작가연보 수준이 아닌, 작가의 삶을 보다 생생하고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를 통해 작품과의 관련성을 함께 생각해보게 해주는 시도는 인간의 삶과 그의 작품을 통해 나의 모습도 발견할 있는 기회가 있겠다.

 

마지막으로 최민석 작가가 피츠제럴드의 작품 중에서 인용한 대목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을 재인용하며 마무리해본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오류의 왕관, 판도라의 상자였다. 자부심 가득한 뉴요커의 사람으로 올라갔던 나는 그곳에서 뉴욕의 빌딩 숲은 끝없는 연속이 아니라 유한하다는 사실을, 도시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녹색과 청색의 무한한 자연으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난생처음 그토록 높은 곳에 올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재즈 시대의 메아리》나의 잃어버린 도시중에서 재인용(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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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비치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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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비치

제니퍼 이건 (Jennifer Egan) 지음 |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뉴욕을 배경으로 소설은 이미 많이 나와있다. 하지만 제니퍼 이건의 소설 맨해튼 비치 대한 소개를 읽고 뉴욕을 배경으로 쓸만한 것이 남아 있을까하는 의구심은 곧바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나온 맨해튼 비치 어디인지 궁금해졌고, 특히나 뉴욕의 브루클린에 해군 조선소가 있어서 항공모함을 만들기도 했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지게 것이다. 소설의 시대적인 배경은 금주법 시대(1919-1933) 끝난 시점, 미국의 경제 대공황(1929-1939) 시작되어 진행중이던 1930년대 초에서 2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1940년대 전반의 대략 10여년 전후의 시기를 아우르고 있다.

 

이번 기회에 새로 알게된 소설가 제니퍼 이건은 유명한 중견 소설가였다. 유명 잡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 선정되기도 인물로서 무엇보다 다양한 소설 형식을 실험해본 소설가라는 소개에 주목했다. 고딕소설의 형식 뿐만 아니라, 번에 140자로 한정된 트위터를 통해 SF스파이 스릴러를 연재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리고 이번에 읽게된 맨해튼 비치 역사성과 지역성이 강하게 드러난, 보다 복잡한 사회의 양상을 녹여낸 결과물이. 나아가 저자가 뉴욕이라는 지역의 역사에 대해 철저히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자료를 읽어낸 과정은 역사소설의 글쓰기가 어떠해야하는지를 살펴볼 있게 해주었다. 특히 다이빙 장비를 직접 착용해보거나, 최초의 여성 심해 다이버를 만나 인터뷰하고 구체성을 더한 과정은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온 작가의 작업에 보다 신뢰감 있는 깊이를 더해 주었다고 있다.     



뉴욕, 특히 브루클린이라는 특정한 지역을 배경으로한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등장 인물들의 동선과 바라본 풍경이 어떤 것이었을까를 상상하며 지도를 찾아 재구성해 보았다. 소설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주요 장소는 물론 브루클린 남쪽의 대서양을 마주한 맨해튼 비치이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기나긴 해변으로 유명한 코니아일랜드 있으며, 소설의 주요 인물인 애너 케리건이 일하는 해군공창의 위치는 브루클린 북쪽이다. 바로 맨해튼 동쪽과 브루클린 사이를 흐르는 이스트강 굽이치는 곳에 해군공창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왼쪽에 점선으로 표시된 영역을 확대한 이미지를 오른쪽에 두었다. 소설책의 내지에 나와있는 해군공창 지도의 윤곽을 보면 여전히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오른쪽 지도에서 확인할 있을 것이다. 참고로 스태튼아일랜드와 브루클린 서쪽의 좁아지는 부분이 소설에서 내로우스라고 표기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맨해튼 섬을 향하는 북쪽의 영역을 어퍼 베이’, 남쪽의 만을 로워 베이라고 한다. 대략 정도를 파악하면 인물들이 이동하는 동선과, 인물들이 바라보던 풍경의 위치를 상상하고 따라가면서 흥미있게 읽어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역적 상징성 - 계급과 문화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장치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애너 케리건과 그녀의 아버지 에디 케리건, 그리고 덱스터 스타일스는 1934 브루클린의 남쪽, 맨해튼 비치가 있는 곳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덱스터는 뉴욕의 여러 곳에 나이트클럽을 소유한 암흑가의 보스이며,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이다. 이탈리아식 이름을 미국식 이름으로 바꾸고, 청교도의 후손인 은행가의 딸과 결혼하여 현재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에디는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으로서 지역 노동조합장을 맞고 있는 동료 더넬린의 백맨(bagman)으로 일하며 암흑의 세계에서 돈다발을 나르던 사람이었다.

 

암흑가의 보스 덱스터가 살고 있는 맨해튼 비치 서쪽의 저택가는 부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며, 맨해튼 비치 사유지였기에 적어도 30-40년대에는 타 지역의 일반 거주자들이 들어올 없던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부유하고 성공한 이들이 전유하던 공간이었으며, 흑인들이 전무한 앵글로색슨 백인들의 문화가 지배하는 지역이다. 반면, 맨해튼 비치의 서쪽에 위치한 코니아일랜드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해변으로, 모든 거주민들에게 공개되어 있는 공유지였다. 특히 에디의 , 애너가 아버지로부터 수영을 처음 배운 곳도 이곳 코니아일랜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는 고향과 다름없는, 추억이 깃들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맨해튼 비치가 보다 백인들의 문화로 한정되어 있는 양상이라면, 코니아일랜드는 이탈리아인, 아일랜드인, 폴란드인, 유대인, 푸에르토리코 등의 카리브해 흑인들이 모여 삶을 나누던 다인종 문화가 형성된 장소로서 대비된다. 아울러 맨해튼 비치는 덱스터가 총을 맞고 사망하게되는 곳이기도 반면, 코니아일랜드는 에디 케리건이 추에 묶여 바다에 던져지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맨해튼 비치와 코니아일랜드는 각각 덱스터와 에디의 운명에 변화를 맞는 공간이기도 하며, 애너와 덱스터를 이어주는(맨해튼 비치의 보트 창고에서 사람은 밀회를 갖는다) 공간이기도 하다. 정도 정리를 하게되면 맨해튼 비치 지역이 갖는 함의가 쉽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적/시대적 문제의식 - 성차별과 인종차별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나 있어 진부한 지적일지 모르겠지만, 맨해튼 비치에는 30-40 대에 동시대인들이 공유하던 문화적 유전자가 소설 속에 발현되어 있다. 특히 1941 12 7,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은 연합국에 본격적으로 합류하여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남자의 이었던 전쟁에 남자들이 입대하여 전선으로 가고, 후방에는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싶어하던 많은 여성들이 남게된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전쟁 물자를 제작하고 공급하기 위한 노동에 직접 투입되는데, 애너 역시 해군이 사용할 전함을 제작하는 해군공창에서 부품만드는 일에 투입된다. 어느 애너가 바지선에서 다이버 이후, 그녀는 다이버가 되기를 갈망하게 된다. 하지만 꿈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90킬로그램이 넘는 다이빙수트를 입고 작업을 해야하는 힘든 일에 여자들은 애초에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다이버들의 환경에서는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피부색으로 제한된 차별이었다. ‘남자이긴 하지만 흑인이었던 말리 역시 노동자들 중에서도 백인보다 멸시받는 다른 차별적 위치에 있었다. 애너의 아버지 에디가 선원으로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목도한 풍경은 인종 차별에 대한 보다 선명한 이해를 더해준다.

 

흑인이 하대 받는 모습이라면 에디도 익숙했다 - 웨스트사이드 부두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이 흑인 취급을 당했고 흑인은 그보다 멸시받았다.”(458)

 

이런 사회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되면, 이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현실이 찾아올 있다. 다이빙팀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하면서 허드렛일을 주로 하게된 애너(젠더의 굴레) 말리(인종의 굴레) 경우, 백인(주로 남성 백인)들이 애초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두고 시작했기에 현실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이 점점 약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우 결과에 대한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 개인에게 전가하게되는 집단 심리 원형을 찾아볼 수도 있다.

 

어떻게 마음이 약해지자 불공정한 처사를 결코 묵과하지 않는 감각도 무뎌졌다.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쪽이 기만당하는 것보다 어쩐지 끔찍했다.”(437)

 

이처럼 차별적인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지내다보면,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심리가 하나의 패턴이 되어 여기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차별적인 현실을 분명히 감각하면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흔히 겪을 있는 심경의 변화일 것이다.

 

저자 제니퍼 이건은 여러 인물들의 주요한 문제의식과 갈망들을 놓치지 않고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여기에 가지 추가하자면 백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계급적 의식또한 발견할 있다. 백인 다이버 동료 배스컴은 약혼자의 부모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다이버 경력을 가지고 해군에 들어가기를 열망한. 이처럼 전시 체제 하의 군용 선박을 제작하던 해군공창에서, 힘든 노동이 예견되어 있는 다이버들의 세계에서 여러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욕망을 지니고, 이를 얻기 위해 현실에 맞서고 있다. 소설의 말미에 애너의 고모 브리앤이 무명의 상선 선원들 또한 훈장과 같은 명예도 주어지지 않는 처지에서 온갖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이야말로 영웅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분히 미국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해군공창의 노동자들 또한 일상의 영웅이라고 말할 있겠다.

 

물론 애너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순응하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다. 사실 애너는 전장에 나가 자신도 다른 남자들처럼 전쟁을 직접 겪고 싶었으나, 근본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대신 다이버 생활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전쟁을 느끼고싶어했다. 남성들의 세계에서 이들의 조롱과 무시(“사령관이 말했다. 물리력이 필요한 일이나 극한 조건을 견뎌내야 하는 일은 전부 금지야. 그런 분야의 여자들은 조력자라고 ”(208))에도 아랑곳없이 다이버 되고 싶은 꿈을 위해 힘든 과정을 참아내 성취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애너의 운명은 이미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암시되고 있다. “애너는 부스러기, 어디서건 뿌리내리고 어떤 것도 견디는 잡초였다. 리디아가 고갈시키는 생명력을 애너가 온전히 채워주었다.”(39)  동생 리디아가 선천적인 장애로 몸의 굴레 속에서 평생 갖혀지냈다면, 애너는 자신에게 부여된 여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다. 아울러 애너는 남성의 가치관을 내면화해버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을 외면하는 친구 (“여자는 절대 일해선 안된다는 이이 신조거든. 여자란 남자를 어떻게 홀릴지나 궁리해야 한대.”(345)) 분명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만의 길을 간다. 그리고 상당수의 여성들이 가는 길을 벗어나는 일은 대가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녀의 삶은 전쟁의 삶이었다. 전쟁이 그녀의 삶이었다”(620)라고 평가되어 있듯이 여성들이 치러내야 했던 다양한 맥락의 전쟁을 소설에서 읽어낼 있었다. 물론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분투하는 이들이지만, ‘혁명 기도하는 영웅의 타입은 아니다. 이들은 평범하고 작은 영위하는 우리들의 분신에 가깝다.

 

 

, 바다가 지닌 상징성 - 삶의 양태들을 구분하는 경계로서의 공간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스콧 F.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도 역시 등장한다. 그러나 물이 상징하는 양상은 맨해튼 비치와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개츠비에게 장애물에 가까운 대상으로서, 오히려 이를 헤쳐가야하는 존재로 있을 같다. 물론 덱스터 스타일스처럼 개츠비는 풀장에서 수영하다가 주변에서 맞아 죽긴 하지만, 맨해튼 비치에서 물-바다가 지니는 상징성은 보다 강렬하고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바다는 죽음-(재생) 사이를 매개하거나 사이를 순환하는 통로 내지는 공간으로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선 맨해튼 비치에서 바다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은유적인 의미든, 문자 그대로의 의미든 간에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하고 . 애너에게 바다는 지상의 세계(차별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바라던 (다이빙을 통해 전쟁을 보다 경험하는 ) 다가가는 길이 되는 공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던 것과 구별되는 (차별에 저항한 여성 다이버) 가까이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장소가 바로 바다였던 것이다. 한편 애너의 아버지 에디에게도 바다는 삶과 죽음의 기로가 되고 다른 삶에 이르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에디는 보호소 동기이자 성인이 되어 검사로 일하는 바트 시핸에게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전달했고, 조직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그는 덱스터의 부하들에 의해 의식을 잃고 무거운 추에 묶여 바다로 던져지는 것이다. 바다에 가라앉으면서도 에디는 난국탈출 스턴트맨이자 마술사였던 전설의 해리 후디니처럼, 몸부림을 통해 자신의 몸을 묶었던 사슬을 빠져나와 물위로 떠오른다. 지상의 세계로 올라오면서 그는 이전의 에디가 아니라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된 사람으로서, 새롭게 태어난다. 에디는 마침 뉴욕에 도착해 있는 브라질 화물선의 화부(가장 밑바닥 임무를 맡은 이들) 되어 뉴욕을 떠나 선원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에디는 바다 속의 심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화하고 그림자의 세계/불법의 세계/도덕적 타락의 세계를 벗어던지게 되었으며, 스태튼아일랜드의 어부에게 구출되어 준법의 세계/양지의 세계로 새롭게 태어남을 가능하게 했던 통로는 바로 바다였던 것이다.   

 

에디가 상선(엘리자베스 시먼호) 3 항해사로 배에 올라 파나마운하로 향하던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조난당했을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허우적대던 공간 역시 바다였다. 시기에 애너는 다이빙을 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에디와 애너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서의 역할도 겸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에서 주인공 이슈메일이 바다로 나가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 내지는 운명을 언급하는 대목이  1장에 나온다.

 

하지만 보라!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것처럼 곧장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이상하기도 하지! 육지 가장 끝자락에 서는 말고는 무엇도 그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다니.

-모비 1, 황유원 옮김, [문학동네]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덱스터의 장인인 노인장 기회가 때마다 물가로 나오려고 하는 자신을 보고 바로 모비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이 -바다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모비  맨해튼 비치역시 서로 상당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시 육지로  - 소설의 정서

 

소설모비 영미문학의 3 비극 하나라고 여겨지곤 하지만, 작품 전반에서 묻어나는 정서는 맨해튼 비치와는 분명 다르다. 책을 덮고 나서 내게 느껴진 정서는 오히려 제니퍼 이건의 소설이 슬픔 혹은 비애감'이란 정서에 가깝게 느껴진다. 설명하긴 쉽지 않지만, 모비 에선 에이해브 선장 자신이 추구하는 개인적 복수에 대해 동조한 등장 인물들에 대해 운명이 내린 벌과 같은 인상으로 다가온다면, 맨해튼 비치에서는 운명적인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체념이 느껴져서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이것은 작가가 의도했다기 보다는 피할길 없는 인간이란 존재로서 보편적인 삶의 한계를받아들여야만 하는 미약한 존재들의 삶이 느껴져서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필멸의 존재로서 언제나 삶-죽음의 경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그림자의 세계 벗어나고자 하는 에디가 덱스터의 집을 다녀온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어린 딸을 바라보며 앞으로 번이나 아이를 안아올릴 있을까?라고 되뇌일 느껴지는 그런 슬픔 정서에 가깝다고 있다.

 

혹은 맨해튼 비치에서 소설을 관통하는 슬픔 정서의 정체는 빈곤이란 무형의 실체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뒤흔들 있으며, 파괴할 있는지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끊임없이 다가오고 오버랩되어 겹겹이 쌓이는 슬픔들, 혹은 불확실한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체화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을 지닌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보편적인 정서가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인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피할 없이 끊임없이 줄타기를 계속 해야만 하는 존재들일 것이다. 작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에디와 애너와 같은 이들에게는 그나마 맨해튼 비치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애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에디의 껌딱지 처럼 따라다니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확인할 있다. “어디를 가건 , 의식하지 않을 때조차 애너는 아버지의 손아귀에 자기 손을 밀어 넣었다.”(282) 그렇다. ‘코니아일랜드 이용해야했던 사람들 사이에는 무엇보다 이런 인간에 대한 신뢰감 혹은 유대감이 남아있었다. 이건 맨해튼 비치 사람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마지막이 되는 배경은 대륙의 반대편,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선소 주변의 해변이다. ‘안개가 기억상실증처럼 도시를 집어삼키며에디와 애너 부녀에게 다가 오고 있을 , 무의식적으로 애너는 에디의 손을 잡으며 이리로 오네요라고 말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부녀 사람에게 안개처럼 다가오는 새로운 운명 앞에서 새로운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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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밍업

(원제: The Summing Up )

서머싯 지음 | 이종인 옮김 |  [위즈덤하우스]

 

지난 번에 《달과6펜스》 대한 인상을 기록하면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모습에 근접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60 중반에 이른 자신을 삶을 되돌아보며 남겼던 회고록 《서밍업》에서 서머싯 몸은 바로 자유인과 죽음에 관한 단상을 스피노자를 언급하며 시작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시 보니 서머싯 몸은 칸트도 읽은 모양이고, 과학자의 저서들도 읽고 생각을 남겨두기도 하는 , 폭넓은 독서를 했음을 있었다. 특히 죽음 대한 강박이 있었던 같다. 8 당시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2 아버지는 폐암으로 사망한다. 당시 파리의 공기가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모두 폐에 생긴 병으로 잃고, 자신도 폐결핵으로 청년 시절 고생하는 기록이 보인다. 어쨌든 어린 아이로서 부모의 젊은 시절을 기억할 있을만한 나이에 부모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어린 서머싯 몸에게 죽음 불가해하면서도 너무나 강력했던 기억으로 남게 되었을 같다. 아이러니하게 91살에 세상을 뜨긴 했어도, 그는 평생 죽음의 강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짐작해보자면, 서머싯 몸이 스피노자의 저작 중에서 인상깊게 영향을 받았을 부분은 《에티카》 4 후반에 나오는 자유인과 노예 관한 언급이 아니었을까. 스피노자의 자유인은 합리적인 이성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다. 몸은 《서밍업》에서 스피노자는 자유인은 죽음에 대하여 필요한 만큼만 생각한다고 말한다라고 시작하는 글을 썼다. ‘ 필요한 만큼이란 말은 상당히 모호하긴 하지만, 죽음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강박 혹은 죽음이란 진실에 대한 외면, 회피 또한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달과6펜스》 에서 화자가 스트릭랜드와 대화하는 도중에 이렇게 묻는 대목이 나온다.

 

화자: “죽음에 대해 생각해 적이 있나요?

스트릭랜드: “내가 ? 그게 중요하단 말인가?

 

40 중반의 작가 서머싯 몸이 《달과6펜스》 집필하고 출간(그러고보니 올해가 소설이 나온 100주년되는 해이다)하는 과정에서도 죽음 문제를 떨칠 없었던 모양이다. 등장 인물끼리 죽음 대해 이야기를 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고민이 60대의 서머싯 몸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있다. 어쩌면 몸은 인간이란 존재가 피할 없는 필멸 문제에서 자신은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것인가를 응당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작가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서 우리도 죽음이란 문제에 대한 생각들은 하나의 운명이 되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릭랜드는 내일이란 없는 사람이라고 있다. 내일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집착보다 당장 오늘 그림을 그림으로써 생의 의미를 구하는 인물이 아닐까. 화자가 갑자기 가정을 버리고 사라져버린 스트릭랜드를 찾아와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대화에서 스트릭랜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스트릭랜드: “ 과거를 생각지 않소. 중요한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지.” 

(…)

화자: “지금은 행복하십니까?내가 물었다.

스트릭랜드: “그렇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스트릭랜드를 자유인에 가깝다고 판단한 이유는 그가 현실의 굴레로서 축이 되고 있는 가정, 다시 말해 처와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트릭랜드를 자유인에 가까운 인물로 생각했던 이유가 현실을 벗어버리고 떠났기 때문으로 오인할 여지가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이런 행동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자유인은 인식의 상태를 전제로 하는지도 모른다. 스트릭랜드는 인습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보기에 극도로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예의를 차려야하고, 친절함을 가장하며, 사회가 기대하는 구성원의 어느 역할 따라 살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무례라는 개념과 이기적이라는 개념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스트릭랜드는 이러한 관습의 영역을 초월한 사람이며, 그럼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물론 스피노자가 이야기했던 국가 대변되는 공동체 내에서 자유로울 있는 조건과 부합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한 구원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학이 기대하는 타인과의 관계 대한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스트릭랜드는 고독 속에서 문둥병에 걸려 죽어간다. 사람들은 이런 그의 운명을 동정하겠지만, 본인은 그렇게 인식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기력이 있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며 그저 지속해나가는 것일 뿐이었다. 분명히 서머싯 몸은 과정과 마무리의 중요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서밍업》에서는 인간 개개인의 실존적인 행위를 패턴으로 표현하는 같다. “ 패턴의 용도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런 없다고 대답하겠다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이든) ‘패턴의 요점은 완성되어야 한다는 이라고 말한다. 스트릭랜드는 완전하진 못했지만,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삶이 갖는 실존적 의미로서의 패턴 완성해나가는 , 그리고 이건 개인의 구원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생각 거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스트릭랜드는 스스로를 구원했던 인물로서 봐야한다는 것이 현재 결론이다.  

 

 

 

참고

다른 책에서 발췌하여 인용한 문장에 대한 쪽수를 적어두지 않은 이유로 나는 김경욱 작가의 소설 위험한 독서에서 저자가 각주로 밝힌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문장을 보고 따라해보았다. 그는 인용에 대한 출처를 일부러밝히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의도적인 불친절이 못마땅하거든 앞으로의 각주를 무시하면 일이다. 목마른 우물을 것이니. 만에 하나 정확한 출처가 궁금하다면 해당 책을 찾아 문장부터 읽어볼 일이다. 인용된 문장을 발견할 때까지, 정말로 그런 문장이 있기나 것인지 확인할 때까지. 무슨무슨 영화의, 이러저러한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특정한 벤치나 삼나무 길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섬이나 계속을 실제로 찾아나서는 수고에 비하면 짚고 헤엄치는 격일테니, 부디 당신의 독서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를.

 

자유인 관해 생각해본 글에서 독서의 자유 선언하는 문장을 지나칠 없었다. 글의 인용을 확인하기위해 스스로 책장을 넘기며 확인하는 자유를 회복하는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도서관에서 서가와 선반 사이를 오가며,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뭐든 골랐고, 그렇게  나를 만들어갔다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었던 올리버 색스 할아버지의 지혜처럼, 어쩌면 무모하게 보이는 아날로그적인 행위를 통한 독서는 내게 다른 자유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나아갔던 올리버의 자유 독서또한 다시 생각하니 상당히 인상적이다. 지금은 전산화되어 검색을 통해 바로 책을 찾아 보면 되지만, 분야만 정해져 있지 정리가 되어있지 않던 헌책방에 대한 기억이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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