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록웰 켄트 그림,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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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1850 12 16 오후 1 15 15.

31세의 청년 작가가 자신의 소설(초고의 절반을 넘어간 시점이다) 시각을 기록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게다가 그는 시각을 축복의 순간이라고 쓰며, 고래가 내뿜는 물줄기가 정말로 물인지 아니면 수증기인지 의문이라는, 엉뚱한 화제로 글을 시작했다.


엉뚱한 작가의 이름은 허먼 멜빌이다. 그의 대표작 모비딕 어느 () 시작하는 부분에서 가져왔다. 소설은 이슈미얼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선원으로 포경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보고 들은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어린 시절 축약본으로 접해보았을 소설은 사실 방대한 서사를 다룬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완역본을 읽은 사람은 드물 같다. 소설을 읽어내는 일은 포경선을 타는 만큼이나 험난하게 느껴진다. 내가 읽은 판본은 유명한 일러스트 작가 록웰 켄트의 그림들이 곁들여진 일러스트판 모비딕이다.  일러스트판을 읽는 내내 멜빌이 던져놓은 텍스트의 그물을 건져올리며 강렬한 그림들을 함께 감상할 있었기에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어낼 있었던 같다.



경계인으로서의 이슈미얼


소설은 유명한 문장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 시작한다. 장로교파의 청년으로 나오는 화자, 이슈미얼은 이미 상선에서 선원으로 바닷물을 맛본 인물이다. 작가 허먼 멜빌은 구약성경에서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이슈메일을 소설의 화자로 삼았다. 성경에서 이슈메일의 이미지는 추방자’, ‘사회에서 버려진 암시한다. 결국 소설의 화자인 이슈미얼은 이미지에 걸맞게 곳에 정착하는 붙박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떠돌이 나온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관습과 구속에서 보다 자유로운 자로 수도 있다. 구속에서 자유로운 자는 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로, 육지에서 바다로 향하기 마련이다. 이슈미얼이 바다로 나가게 되는 당위성을 화자의 작명에서부터 세심하게 찾아볼 있다.


이처럼 이슈미얼은 사회에서 소속이 명확하지 않은, 물과 같이 유동적인 존재다. 아울러 멜빌의 분신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이슈미얼이 멜빌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표출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슈미얼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낯설게 보기’, ‘뒤집어 보기 아는 인물이었다.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와 침대에서 자게되는 에피소드를 통해 기독교 문명-백인의 시선을 대표하는 이슈미얼이 이교도-유색인을 대변하는 식인종 퀘퀘그를 인간이자 동료로 바라보게 되는 장면은 19세기 중반의 보편적인 인식을 고려할 놀라운 시선/고정관념 뒤집기 보여준다. 멜빌의 뒤집기는 여기서 나아가 성경의 가르침(이웃이 내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내가 이웃에게 해줄 ) 그대로 따라 숭배의 의미 되묻고, 이교도 퀴퀘그가 자신의 신을 숭배하는 의식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이슈미얼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이교도의 신을 숭배하는데 참여하는 이율배반을 보여주었다


이슈미얼은 어느 하나의 대상 혹은 현상에 대해 표면적인 모습과 이면의 모습 모두를 대등하게 놓고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은 작가 자신이 현상의 측면 위에 발을 딛고 서서 양쪽을 들여다보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경계인으로 부르겠는데, 역할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떠돌이 이슈미얼에게 제격으로 보인다.


소설에서 드러나는 경계인이슈미얼은 기독교도이면서도 신성한 성경구절을 패러디하여 풍자하거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주목하기도 한다.  


토요일 밤에 정육 시장에 가서 살아 있는 두발짐승 무리들이 죽은 네발짐승들이 길게 내걸린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보라. 식인종도 입을 벌리게 만들 광경이 아닌가? 식인종? 식인종이 아닌자, 누구란 말인가? 다가올 기근에 대비해 야윈 선교사를 소금에 절여 지하실에 저장해둔 피지 사람들이 참아줄 만하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일이 닥쳐오면, 거위를 땅에 못으로 박아놓고 간이 터질 정도로 배불리 먹여 만든 파테드푸아그라를 포식하는 문명화되고 개화된 그대 대식가들보다 검약한 피지 사람들이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472)


이처럼 허먼 멜빌은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서양인들과 이들 문명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대목들은 소설의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멜빌이 이런 시각을 가질 있었던 배경에는 멜빌의 가정환경도 무시할 없을 같다. 스코틀랜드계 집안(아마도 카톨릭 집안) 출신의 아버지와 네덜란드 칼뱅파 집안의 후손이었던 어머니가 일군 가정이라면 충분히 그럴 있을 듯하다. 멜빌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멜빌은 은행원, 학교 교사 뿐만 아니라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상선의 선원, 포경선 선원, 해군으로 입대하여 배를 타게 되었던 . 소설의 피쿼드호에는 흑인, 북미 원주민(인디언), 마닐라 배화교도를 포함하여,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몰타, 시칠리아, 아조레스, 중국, 동인도, 타이티, 포르투갈, 덴마크, 영국, 스페인, 산티아고, 벨파스트 등에서 다양한 선원들이 승선하고 있다. 멜빌이 실제로 상선과 포경선을 경험은 당시 19세기 중반의 평균적인 미국인들과 비교하면 지극히 이례적인 것이라고 있다. 멜빌의 독특한 시각은 아마도 이런 폭넓고도 예외적인 경험을 통해 자라나지 않았을까.  아래 문장은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멜빌의 관점이 드러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물과 현상을 공정하게 바라보려는 경계인의 시선에서 말이다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천상의 어떤 것에 대한 직관, 둘을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게 되며, 그러한 사람은 양쪽 모두를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579)


공정한 시선을 바라보려는 멜빌의 의지는 소설 전반을 통해( 군데를 제외하고) 발견할 있었다.



에이해브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


이슈미얼이 타게된 포경선 피쿼드호 선장은 에이해브다. 화자 이슈미얼이 지난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것과 다르게, 에이해브는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방향을 결정하고, 사건의 진행을 추동하는 중심인물이다. 작가는 선장의 이름(에이해브) 역시 구약성경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폭정을 일삼았던 아합에서 가져왔다. 이슈미얼이 피쿼드호에 오르기 전에 피쿼드호의 선주 펠레그 선장과 나눈 대화를 살펴보자



(펠레그 선장) 그는 에이해브란 말이지. 그리고 그대도 알다시피 옛날에 에이해브는 왕관을 왕이 아니었겠나!

(이슈미얼) 게다가 몹시 나쁜 왕이었죠. 사악한 왕이 살해됐을 개들이 그의 피를 핥지 않았던가요?

(149)


소설에서 이슈미얼이 퀴퀘그와 마치 부부처럼 운명의 밧줄로 연결되어 있다면, 에이해브와 같은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물은 마닐라의 이교도 페달라이다. 베일에 가려져 있고, 말이 없는 페달라는 존재감이 미미해 보이지만  페달라는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본다. 은폐된 페달라의 존재는 피쿼드호의 선장을 맡은 에이해브 자신의 내밀한 목적을 대변한다. 페달라는 바로 에이해브의 다리를 앗아가고 자신의 존재를 밟아버린 모비딕 쫓기 위해 고용된 용병인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에이해브는 모비딕 추격하는 일에 잠시 고뇌하고 머뭇거리지만, 페달라는 선장을 파멸의 길로 흔들림없이 안내하는 죽음의 안내인이자 선장의 운명을 예언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페달라는 1인칭 화자로 서술되는 소설의 한계를 어느 정도 보완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한편 에이해브 선장은 피쿼드호의 폐쇄된 공간 내에서 왕과 같이 군림하려 든다.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 선장이 모든 선원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선동을 시작하자, 일등항해사 스타벅만은 모비딕에 복수하려는 선장의 계획에 의문을 제기한다. 스타벅은 모비딕에서 집단의 양심을 대변하며 에이해브 선장과 온건하게나마 대립한다. 스타벅은 잠든 선장 앞에서 머스킷 총을 들고 에이해브 선장의 지휘권을 무력화한 다음, 모비딕을 추적하는 일을 중단할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벅은 조심스럽고 양심적이지만,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런 인물형은 아닌 같다. 스타벅은 집단 속에서 고뇌하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우유부단한 인물로도 보인다. 에이해브가 자신의 복수에 눈이 멀어 파멸로 치닫게 되는 것처럼, 스타벅도 피할 없이 선장과 배를 타며 피쿼드호의 운명에 동참하게 된다. 이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에이해브 선장을 중심으로 대립 혹은 보강하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비극을 암시하는 상징들


영미 문학의 대표적인 비극으로서 모비딕 곳곳에서는 피쿼드호의 파멸과 죽음의 상징을 찾아볼 있다. 우선 피쿼드호의 피쿼드 절멸한 매사추세츠의 인디언 부족 이름이다. 소설에는 물론 백인들에 의해피쿼드족이 절멸했다는 언급은 나오고 있지 않지만.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에이해브의 이름을 따온 성경의 아합왕은 폭정으로 살해되는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다. 피쿼드호의 출항 직전 이슈미얼 일행은 불길한 느낌을 주는 낯선 사내의 예언과도 같은 횡설수설을 듣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낯선 남자의 이름이 일라이자였다. 이름은 성경에서 아합왕의 파멸을 예언한 엘리야를 말하는데, 것은 에이해브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에서 죽음과 관계 있는 상징으로서 이미지가 여러 등장한다. 번째 장에서부터 관이라는 단어가 보이는가 하면, 뉴베드퍼드항의 여인숙 주인의 이름은 연상하게 하는 피터 코핀이기도 하다. 페달라의 예언에 의하면 가지 관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는 모비딕, 다른 하나는 피쿼드호가 되었다. 여기에 가지 떠올려보면 퀴퀘그가 갑자기 열병에 걸려 죽어갈 목수가 만들어 주었던 관이 있다. 그런데 퀴퀘그의 관은 죽음 파멸을 암시하는 관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 관이었다. 목수가 관을 밀봉하여 구명부표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피쿼드호가 침몰했을 , 유일하게 떠올라 이슈미얼을 구해주었던 것이 바로 퀴퀘그의 관이었다. 퀴퀘그의 관은 예외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관이다.


멜빌은 소설에서 색채를 활용하여 죽음 이미지와도 연결시킨다. 무엇보다 에이해브가 추격하려는 향유고래는 고래다. “무엇보다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던 것은 고래가 흰색이라는 점이었다”(311) 이슈미얼은 흰색이 지니는 고귀한 우월성과 기쁨 같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결국 백색이 주는 공포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모든 감미롭고 명예롭고 숭고한 연상들에도 불구하고 색의 가장 내밀한 관념 속에는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가 숨어 있어서 공포스러운 피의 붉은 색보다 영혼에게 더욱 극심한 공포를 안겨준다”(312)


여기에 더하여 이교도 페달라의 흰색 터번’, 그리고 앨버트로스의 흰색 등이 불길한 분위기를 더한다. 망망대해에서 피쿼드호가 목격한 거대 오징어 역시 크림색이었다. 이등항해사 스터브는 오징어를 보며 오징어를 이들이 살아서 항구로 돌아간 이가 거의 없다 불길한 믿음을 전한다.



에필로그


일러스트작가 록웰 켄트의 그림이 곁들여진 모비딕 읽는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독서 경험을 준다는 의미다. 소설에 등장하는 켄트의 그림은 그가 주로 작업하던 목판화가 아니라 붓과 펜으로 그려낸 결과물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켄트의 작업은 강렬한 흑백대비를 보여주는데, 이런 분위기는 빛과 그림자(어둠) 통해 모비딕에 대한 복수라는 맹목적인 광기와 우울감을 더해주는 듯하다. 실제로 이슈미얼은 빛과 어둠의 대조를 말하기도 하다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 육신에는 빛이 어울리지만, 실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바로 어둠이라는 듯이 말이다.”(111)


이렇듯 빛과 어둠이 어우러진 켄트의 그림은 수면 ’(인간의 세계/) 수면 아래’(고래의 세계/어둠) 대비, 기독교 문명과 이교도 문명의 대비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만의 상상인 것일까.


밖에 일러스트 모비딕에서 향유고래가 고래 추격용 보트를 공격하고 있는 장면(427) 사람들이 던진 작살을 그대로 몸에 꽂은 상태로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등장하는 장면(601) 압권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무엇보다 소설 인물들, 특히 에이해브를 그린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다. 피쿼드호의 뒷갑판 위에서 성한 다리와 고래뼈로 깎아 만든(소설에서는 어디에도 왼쪽 다리라고 언급된 적은 없지만) 왼쪽 다리를 굳건히 내딛고 서있는 에이해브(264) 위풍당당한 모습과 손은 뱃전을 단단히 잡고, 다른 손은 일자코트에 찔러 넣은 모비딕에 복수를 다짐한 , 혹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는 바다를 응시하는 에이해브(345) 음울하고도 강렬한 눈빛을 담은 그림은 책을 덮어도 여전히 여운을 준다. 펜이 만들어 내는 날카로운 선과 붓이 완성하는 강렬한 흑백의 대비는 모비딕이라는 비극을 완성하는  핵심요소라고 생각한다.


이슈미얼이 침몰하는 피쿼드호에서 올라온 관을 구명부표 삼아 바다에서 수면 , 인간의 세계로 귀환하는 장면은 다시 소설의 처음을 환기시킨다. 소설의 문장에서부터 이슈미얼이 인간의 세계에서 배를 타고 물의 세계, 바다로 나가는 순환적인 구조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건 끊임없이 회귀하고 반복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점에서 모비딕 인간이 단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고래를 추격하는 비극적인 이야기, 그리고  방대한 고래학과 포경업에 대한 지식의 규모를 넘어서 인간의 삶과 운명에 대한 멜빌의 통찰이 담긴 소설이기도 하다.


모비딕 덮고 다시 1850 12 16 1 15, 선장실 같은 자신의 서재에 앉아 글을 쓰다가 시계를 확인했을 법한 멜빌을 떠올려본다. 멜빌은 축복의 순간 웅장한 쓰고 싶은 열망으로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았을까.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고래를 요약한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이다”(695)라고 말하고 있듯이, 멜빌은 고래 이야기와 정면대결하듯 글쓰기를 해나가며 고래가 내뿜는 물기둥을 상상했을 같다. 나는 소설을 읽다가 예상치 못하게 만난 지점을 좋아한다. 작가는 순간 소설 속에서 자신의 손을 내밀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고, 2020년의 어느 독자가 손을 맞잡게 되었다. 내가 직접 멜빌과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지점이다. 소설이 끝나며 바다에서 구출된 이슈미얼은 육지로 나갔다가 언젠가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을까. 이제 모비딕이란 심연을 빠져나온 나는 언젠가 다시 모비딕으로 돌아가게 같다.    






"오오, 인간이여! 고래를 찬양하고 고래를 본받을지어다! 그대로 얼음 사이에서 온기를 유지하라. 그대도 이 세상에 살되 그 속에 속하진 마라. 적도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극지에서도 계속 피가 흐르게 하라. (…) 그 어떤 계절에도 그대만의 체온을 유지하라"

《모비딕》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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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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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

문학초점



문학계간지를 처음 읽어보고 있다. 지난 주는 문학초점이라고 하여 최근에 출간한 또는 소설에 대해 대담형식으로 소개하는 코너다. 이번 겨울호 문학초점에서는 시인 박연준, 문학평론가 김나영, 문학평론가 노태훈 세명이 소설 또는 소설집 종류와 시집 권에 대해 소감을 나누고 정리했다


     우선 명의 대담을 따라가면서 시나 소설에 대해 이렇게 다양하고 예민하게 읽어내고 자신의 언어로 정리할 있다는 사실이 내겐 충격이었다. 시를 읽지는 않았지만, 평론가나 시인이 인용하는 싯구를 따라가면서도 행간을 읽으며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점이 놀라웠던 것이다. 소설 또한 내가 소설을 읽을 하는 습관대로 소설 전체를 요약해야한다는 압박에서 사람은 자유로운 같다. 무엇보다 대담자들에게는 화제에 대해 동일한 출발선 상에서 이야기를 나눌 있는 공통의 기반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나도 소설이나 시를 읽지 않았기에 어려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 감안하고 대담자의 대화를 따라가 보았다.


     사실 가지 소설과 가지 모두 흥미로웠지만, 아직 소설과 시의 독법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로서 내게 무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장 먼저읽어보고 싶은 소설은 정소현 작가의 소설집 품위 있는 이었다.   이유는 박연준 시인이 편안하게 읽은소설이기도 하고, ‘좋은 문장들이기에 독자를 피로하게 하지 않는다 언급 때문이었다. 나머지 명의 소설집도 모두 흥미로웠지만, 내게는 소설을 소설읽기를 시작하기에 좋은 출발점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계간지 창작과비평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고, ‘문학초점 소개된 소설가와 시인들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문학잡지를 통해 나처럼 어떤 작가들을 처음 알게되면 여기에서 시작하여 관심있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찾아 읽어보면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침 박연준 시인도 소설가 정소현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기대이상으로 좋았기에 소설집도 찾아 읽어야겠다고 한다. 문학과 친근하지 않은 같은 독자들에겐 소설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짚어주는 사항 이외에 읽기 관한 방법을 간접적으로나마 배울 있는 기회였다.


     특히 품위 있는 대해 시인은 작가가 이야기에서 진실 드러내는 방법이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소설에서의 진실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점은 소설을 읽고 익숙해지면 생각해볼 있는 부분일 듯하다. 아울러 소설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이미 죽은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 비교해서 읽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파묵의 소설에서는 다양한 시점에서 화자가 주기적으로 바뀌며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취하는데, 정소현 작가의 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도 궁금해진다


     내게 시는 소설보다 읽기 어려운 상대이지만, 먼저 읽어보고 싶은 시집을 선택하라면 성동혁 시인의 아네모네 선택해보겠다. 이유로는 노태훈 평론가가 시집에 대해 만약 한편만 읽는다면 감동이나 감각의 폭이 제한될 같다는 생각이 정도로 한권으로서의 의미가 시집입니다라고 대목 때문이었다. , 편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를 통해 시인에 대해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평론가와 시인의 명료한 언어와 사고로 이해하고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시집 전체를 통해 단어를 고르고 자신을 형상화해내는 시도가 내게는 시에 접근하는데 보다 정통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문학초점에서는 문학평론가와 시인이 소설의 어느 대목, 시의 어느 구절에 대해 상반된 감상을 내놓은 경우가 있었는데, 대담에서 이러한 부분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정답이 있는 읽기와 공부에 익숙해져있던 내게 열린 텍스트로서 문학이 사실은 아직도 낯설다. 하지만 시인과 평론가가 상반된 감상을 드러내면서도 상대방의 이해에 수긍하고 공감하기도 있는 점이 문학의 매력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마치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숱한 문제들이 항상 결말이 명확하거나 행복한 결말, 혹은 슬픈 결말로만 일관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문학초점 통해 작가들은 편의 소설이나 시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리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그런 질문들이 독자의 읽기행위를 통해 다른 질문으로 혹은 응답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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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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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김미현 지음 | [창작과 비평 겨울호(186)]



토니 모리슨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

 

 

이번 주에 창작과비평 겨울호 특집에서 관심있게 읽었던 글은 편이 있다. 하나는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한국 SF 새로운 리얼리티에 관한 논의가 담긴 글이고, 다른 하나는 김미현 교수가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의 타계를 계기로 그녀의 문학적 유산에 대해 글이다. 나는 아직 SF장르에 대해 다소 낯선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영화 <칼라 퍼플> 통해 토니 모리슨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었기에 김미현 교수의 글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토니 모리슨은 미국 여성 흑인으로서 처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관심이 갔다. 이번에 실린 글을 통해 나중에 그녀의 작품을 읽게 맥락을 짚는데 도움을 받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지난해 여름, 토니 모리슨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적이 있다. 나는 젊은 오프라 윈프리가 노예 소녀를 연기했던 <칼라 퍼플> 어렴풋이 떠올렸다. 영화를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학창시절에 이러한 영화를 보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영화는 내게도 그러한 충격을 전달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미국의 노예제라고 하는 표현의 이면에 어떤 구체적인 삶들이 있었을지를 그나마정제된 수준에서 보여주었고, 상상할 있게 되었던 같다.

 


나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 중에서 가장 푸른 읽었던 기억만 난다. 내용의 상당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흑인과 백인 사이의 넘을 없는 근본적인 편견의 벽과 흑인들에게 내재화되어버린 자기혐오와 같은 정서들을 갑갑한 마음으로 느꼈던 기억만 남아있다. 김미현 교수의 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읽으면서 모리슨이 일생동안 일구었던 작품 세계와 노력들이 하나의 단단하고 통합된 덩어리로 다가왔다. 특히 작가에게 문학 인생은 본인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와 한시도 떨어질 없는 것이었을 테다. 그녀에게 좋은 , 좋은 예술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의식은 소속감과 정체성 확립의 문제로 이어졌을 것이다.

 


토니 모리슨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인종주의/식민주의라는데 많은 이들이 동의할 같다. 김미현 교수는 11권의 소설을 남긴 토니 모리슨의 문학적 인생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그의 소설은 미국 흑인의 정체성, 기억과 역사, 가족과 공동체 관계에 대한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탐구이자 인종주의에 물들지 않은 언어와 비전을 찾는 과정이라 있다.”(72)

 


여기에 더하여 모리슨의 글쓰기는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단지 과거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하여 이를 복원하거나 재해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이란 역사가의 일일 같다. 하지만 과거를 되살리는 소설가란 의지가 가해진 창조 통해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찾는 작업이라고 의미를 살피고 있다. 소설가로서 모리슨은 지금 여기 삶에 우리의 과거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끊임없이 되물었던 같다. 그렇기에 속에서의 정치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그녀의 문학 인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주목하게 다른 내용은 인종주의가 가져온 심리적 분열 대한 부분이었다. 과거부터 미국인들이 경험했던 노예제의 가운데에는 흑인들의 자기 혐오나 흑인 내부의 심리적 갈등과 상처뿐만 아니라 백인을 포함한 모든 미국인들에게 역사의 모순과 분열의 경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일명 백인들의 죄의식 white guilty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백인들의 분열적 심리는 전체의 제목과 같이 인종주의/식민주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라고 이해된다. 모리슨이 이런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했다고 평가한 윌리엄 포크너 같은 작가들 외에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인종과 상관없이 인종주의/식민주의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불편해할 같다.

 


 나는 김미현 교수의 논평을 읽으면서 토니 모리슨이 일생을 통해 보여준 문학적 유산의 현재성은 미국 사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종주의/식민주의 식민지의 기억을 갖고 있는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작품을 나는 흑인 말고 다른 이들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78)라고 언급했지만, 말은 흑인만이 중요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것이다. 작가로서 모리슨은 본인이 가장 알고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이 흑인/흑인문제 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리슨은 인종주의 문제의 관점에서 천착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모리슨이 지니고 있던 문제의식이 바로 우리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모리슨이 남기고 유산을 우리의 문제에 대입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재일한국인 서경식 교수가 여전히 일본사회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민주의 문제삼는 일은 모리슨의 문제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리슨의 현재성은 한일 무역분쟁의 이면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식민주의 잔재를 이야기할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이러한 인종주의/식민주의 대한 기억은 보다 분명한 소속감 정체성 범주에 있었다고 있다. 그런데 문제를 세계화 문제와 결부시켜보면, 다소 혼란스럽다. 세계화과정에는 국경과 국제법 전통적인 영역의 경계 약화시키는 과정이 수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가 다양성의 측면 보다는 문화적, 언어적 차이와 정체성을 무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점은 새롭게 유발되는 타자(혹은 낯선 ) 대한 공포와 배제기작이 더욱 강화되지 않을지 우려가 되는 사항이다. 난민 문제를 떠올려보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현대의 난민 문제는 세계화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내게 문제는 고민과 판단이 필요할 같다.     

 


이번 특집을 통해  궁금했던 토니 모리슨의 작품과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장 학자가 이해하는 소설가의 문학 인생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와 의의를 지니는지 엿볼 있었다. 김미현 교수가 조명한 모리슨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한 소개를 통해 나는 넓은 의미에서 예술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모리슨에게 문학이란 삶과 결코 분리될 없는 기억하기이므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의 글쓰기는 이러한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예술가는 과거의 기억과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무던히 되돌아가고 바라봄으로써 끊임없이 의미를 묻고 이에 응답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리슨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준 성찰은 행동과 변화에 대한 기대도 품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리슨은 이러한 노력들이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에 놓인 언어라는 새의 운명은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앞으로 모리슨의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그가 남기고간 문학적 유산을 떠올리며 읽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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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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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조해진 지음 | [창작과 비평 겨울호(186)]




테두리가 투명한 감옥에 사는 작은 삶들 이야기



소설의 화자는 특성화고에서 기간제 영어 교사로 일하는 최씨 성을 가진 여선생이다. 소설은 화자가 계약갱신 2개월을 남겨놓고 직장으로부터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후부터 시작한다. 기간제교사로서 매년 재계약을 해야만했던 화자는 이번에 해고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결혼을 기대하고 있는 기현이란 이름의 남자 친구와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평택에 있는 플라스틱 사출공장에 취직한 은하나라는 이름의 여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하나는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어두컴컴하고 외로운 시골길을 걸어가며 전화기를 통해 다짜고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내뱉는다. 담임 선생인 화자는 하나에게 남의 받는 원래 쉽지 않아. 그건 남들도 똑같아라며 인내하고 견디라는 말만을 해줄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경우를 많이 경험하고 기억해낼 있지만, 사실 이런 대답은 타인의 삶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현대인의 선언이기도 하다. ‘너의 삶은 나와 무관하다는 ’,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는 순간을 손쉽게 기억해낼 있을 것이다.  현대 문명이 고안해낸 발명품 중에는 바로 타인의 삶에 공감을 느끼지 않으려는 개인이 있다는 생각마저 해본 적이 있다.


소설의 화자는 남자 친구의 어머니와 결혼을 염두에 두고 저녁을 함께하는데, 공장에서 다친 하나에 대해 자신이 하나에게 했던 말과 닮은 말을 예비 시어머니로부터 듣게된다. 예비 시어머니는 10 시절 성수동의 편직물 공장에서 여공(일명 시다)으로 하루 15시간 고되게 일했던 경험이 있다. 예비 시어머니는 70 대에 많았던 여공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오야지라고 불리는 공장의 권력(주로 남자 상사)으로부터 욕설과 폭언, 폭력을 당하면서도 안오는 약을 먹으며 일해야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법정기준 근무시간의 거의 배에 달하는 강도로 일하던 시대의 희생자들이었다. 여성들의 고단한 삶은 형태를 달리해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도 지속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젊은 세대인 하나의 추락 사건에 대해 요새 젊은이들은 상황이 과거에 비해 좋아졌는데도 공장에서 일하기 싫어한다 평을 내리고 있다. 화자는 예비 시어머니의 말에 안의 모든 것이 출렁이는느낌과 함께 묘한 기시감 느끼게 된다. 과거의 희생자가 현재의 희생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현실. 이들 각자의 고통은 마찬가지로 지극히 개인화되고 고립되어 있다. 하나의 사고에 대해 담임 선생인 화자와 예비 시어머니 모두 일종의 방관자가 수밖에 없는 무력한 현대인들이다


화자는 사회가 부과하는 보이지 않는 굴레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바로 결혼이라는 굴레 때문이다. 여성의 지위가 많이 향상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개선된 같지는 않아 보인다. 화자가 남자 친구 예비 시어머니와 저녁을 함께한 자리에서 예비 시어머니의 일방적인 결혼 준비 이야기를 듣게된다. 결혼 당사자인 화자와 남자 친구는 결혼식의 들러리처럼 배제되어 있다. 그런데 화자는 경제적으로 준비가 안되어 있는 상황에서 결혼을 결정해야하는 기로에 놓여있다. IMF 여파를 겪어낸 대한민국호는 대다수의 탑승자 들의 삶을 불확실한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전통적인 관례상 남성들이 벌어오는 수입만으로 가정과 자녀를 키우기 힘들어진 한국 사회에서는 이제 여성들의 수익창출활동이 당연시 되고 있다. 화자는 비혼주의자도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경제적으로도 준비가 되기를 바라는 독립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직장으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은 상태다. 그대신 수원에 있는 사립고등학교의 영어 교사 자리를 알아보고 있지만, 정교사가 되려면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암시를 실감한다. 일종의 관행으로서 이년치 연봉을 내야한다는 사회의 부조리와 마주하는 것이다. 화자는 사회가 강제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한 취업 사이에서 고민하며 선택을 요구받는다. 우리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선택의 기로에서 잠시나마 머뭇거릴 여유마저 빼앗아버린 듯하다. 결국 화자의 인간적인 관계맺기 역시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것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남자 친구와의 관계 역시 흔히 보아온 결별의 모습과는 다르다. 마치 컴퓨터에 저장해둔 오래된 사진 파일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서서히 서로의 존재를 잊으며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헤어짐을 슬퍼하고 때로는 애도하는 것마저 이들에게는 사치인지도 모른다


단편 소설 하나의 에는 다양한 인물들(여성들) 겪어야만 하는 현실이 위에 새겨진 십계명처럼 공고히 드러난다. 하나가 마주한 현실은 어떤가. 하나는 공장에서 추락하기 전날 사직 의사를 밝혔다. 이에 대해 하나가 속한 부서의 팀장이 보여준 반응은 사회적 약자가 감내해야만 하는 다른 현실을 드러내준다. 팀장은 고등학생일 뿐인 하나에게 공장에서 일할 거면 미리 운동해서 길러놓지 않고 뭐했는냐, 살이 근육이면 내가 일을 안주겠냐, 가방끈 짧은 애들이 자기 관리도 못한다 으름짱을 놓고, 모욕감을 주고 있다. 이런 반응은 내가 경험했던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를바 없으며 이를 매우 실감나게 묘사한다. 팀장의 말은 특히 경제적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비인간화된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우선 인격이 거세된 불모의 구성원들이다. 하나의 팀장이 보인 반응은 경찰이나 군인들을 뽑는 과정에서 남녀 모두 동일한 체력기준을 강요해야한다는 인터뷰를 실은 뉴스를 떠올리게 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인간으로서 남성과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의 성숙도가 아직 미흡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추락은 어쩌면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성숙도와 인식이 추락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등이라는 명분 이전에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한편 하나가 사고를 당한 이후, 하나의 어머니는 공장을 방문하는 하나의 담임 선생인 화자에게 동행해줄 것을 부탁한다. 하나의 어머니는 대한민국 사회라는 굴레가 낳은 명의 사생아이다. 미혼모로 하나를 낳고 홀로 키워온 그녀는 사회의 하층부에 자리잡고 살아야만 하는 운명이다. 하나의 어머니는 하나가 다치고 의식불명으로 중환자실에 있을 , 딸을 간호하기 위해 일하던 마트를 관두고 병원 근처 모텔 방에 장기 투숙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집을 가져보지도 못하고, 안정된 직장을 가져볼 기회마저 차단된 한가운데에 있다. 그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소외되어 잊혀지는 작은 삶들을 대변한다. 이런 처지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 사회에 대한 분노란 이미 철지난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체념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의 선언과 같이 느껴진다. 하나의 어머니는 하나의 추락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못나서 하나가 저렇게 된거예요. 고등학교 중퇴에 미혼모에, 못난 맞잖아요.사회의 부조리하고 메마른 구조 속에서 이들은 고립되고 소외되어 있다. 나아가 이들이 느끼는 불편함과 고통은 등장 인물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각자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로 변형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 어머니의 말은 사회로부터 배제된 개별 존재로서 우울증세에 가까운 무기력증을 반영한다. 이들 각자는 부조리한 삶의 무게를 감내해야하는 현대 사회의 시시포스들이다.           


소설에는 마치 테두리가 투명한 감옥에서 살고 있는 듯한 4명의 여성들을 삶을 조명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너무나 투명하게 노출되어 취약하다. 한편 이들의 삶은 사회가 강제하는 굴레에 둘러싸여 있다. 사회의 굴레를 벗어나 없는 것이다. 소설의 현실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일면들을 치밀하게 엮어두고 있다. 특히 취약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녹녹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문제를 비롯하여 비정규직 문제와 이들의 산업재해 문제, 여공의 역사가 보여주는 노동 인권의 문제, 결혼 문제(결혼의 굴레), 미성년자 문제 우리가 보아온 묵직한 주제들이 날줄과 씨줄처럼 엮여 있다. 독자로서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계층이 부쩍 증가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화자와 하나 어머니가 평택의 공장을 방문했을 입구에서부터 제지당한 것처럼, 등장 인물들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사회의 관심으로부터 배제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각자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이라는 속박에 허우적대면서도 생존에 취약한 계층을 대변한다고 있다. 그러므로 소설에서는 등장 인물이 여성이 주가 되지만 사회의 굴레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을 포함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 모두가 거대한 대기 속에서 사는 존재들이란 자각이다. 내가 들이 마신 공기 분자는 억년 공룡이 들이 마신 적이 있었던 공기 분자이기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가 내쉰 숨은 대기로 퍼져 우리 모두 일부를 들이마시게 것이다. 등장 인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사회에서 보다 취약한 여성들을 대표로 부각시키고 있지만, 남녀노소 모두 우리는 대기를 통해서도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등장인물들처럼 취약 계층을 묘사하고, 사회가 만들어 놓은 모순적인 방식을 각자에게 강요하고 기대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아가 소설은 인물들이 느끼는 고통 기원이 과연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답을 명확히 알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들이 사는 곳은 테두리가 투명한 감옥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피해자들은 있으나 가해자는 없는 사회의 부조리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소설은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는 현대인의 삶의 양태를 밀도있게 보여준다.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일까? 소설을 읽은 후에는 내게 커다란 물음이 남았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모두 테두리가 투명한 감옥에서 살아가며 하나의 숨을 쉬는 작은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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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배6구역 읽으며

윤재철 지음 | [창비]

 


 

「주인 떠난 빈집

   대문에는 출입금지 노란 테이프 두르고

   철거 예정 딱지 붙은

   이미 갇혀버린 좁은 마당 한켠에

   70년대생 늙은 감나무


   아직도 푸른 잎사귀 사이로

   주황색 가득 매단

   골목길 내다보고 있다

   벌써 무릎만큼 자란 풀들은

   길바닥으로 내려서고


   들여다보는 사람 하나 없이

   이별은 발밑에 있는데

   70년대80년대90년대2000년대2010년대

   아무 의심 없이 내려섰던

   지층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감나무는 이별을 모른다

   단지 겨울 지나며

   도시 어딘가 숨어 사는 텃새들

   마지막 사랑처럼 날아와 맞출

   주황색 가득 매단          


 (계간지 《창작과비평》 2019 겨울호, 109-110)





[서툰 감상]


솔직히 고백하자면 시를 어떻게 읽어야할지 모르겠다. 시나 소설은 내게 외계어나 마찬가지다. 소위 문과생들에게 수식이 가득 과학책이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해보면 비슷하지 않을까? 오랫동안 나는 시를 모르겠다고 말하기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해하지도 못할 시집을 사서 만다라처럼 책상 앞에 놓아두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문학계간지를 읽어보는 경험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도 호기심을 가지고 나의 심리적인 벽을 넘어보려 시도해본다. 일단 그냥 글자를 따라 읽어나간다. 사실 어떤 시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잡지에 실린 중에서 윤재철 시인의 방배6구역이란 시를 읽다가 어떤 기억을 떠올렸기에 나는 시를 읽으며 떠오른 단상을 글로 잡아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서울이란 대도시를 바라볼 때마다 떠오른 생각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지녀왔던 무언가를 망각하기로 결심한것이 아닐까하는 점이었다. 도시의 골목 골목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고, 살던 사람은 장소를 떠나고 있다. 내가 어렸을 살던 집터는 이제 건물과 간격이 거의 없을 정도로 들어찬 오피스텔이 들어서있다. 사실 재개발 구역 뿐만 아니라 서울의 상가들은 점점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있다.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서울 시내에는 임대라는 글자를 걸어둔 상가가 많아지고 있다. 반면 어디에선가는 새롭고 번듯한 대형상가 혹은 백화점과 같은 몰이 등장한다. 언젠가 이태원 재개발 지구에 올라가본 적이 있다. 이태원 역에서 골목길로 올라가면 인적이 드물고 출입금지 테이프가 둘러쳐진 집들을 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집들과 앙상한 나무 혹은 인적이 없는 마당에 수북히 났던 잡초의 흔적들을 있다. 윤재철 시인이 방배6구역에서 묘사한 바로 풍경을 있는 것이다



시에서는 아직 푸른 나뭇잎이 달려 있지만, 시간이 지나 한겨울이되면 푸른 감나무잎마저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에는 주황색 감들만 매달리게 것이다. 이태원 재개발 구역을 다녀볼 , 여름 사람이 관리하지 않아 마당에 무덤마냥 수북하게 자라난 잡초와 내부의 곳곳에 둘러쳐진 거미줄을 기억한다. 아직 재래주택이 모여있는 골목길 담벼락에는 심심치않게 감나무가 서있는 것을 발견할 있다. 주인없는 감나무들은 언제 베이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올해도 나뭇가지 가득 감을 내놓는 것이다. 아직 나무에 매달린 감들을 보며 상상해본다. 감나무가 처음 감을 열기 시작했을 무렵, 시부모를 모시고 신혼살림을 시작한 어느 며느리가 한가득 매달린 감을 따는 모습을 말이다. 며느리는 작은 바구니에 가득 감을 담아 이웃과 나누어 먹었을 법하다. 어렸을 보았음직한 이런 풍경은 이제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주인이 떠나고 철거가 예정된 집들과 감나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윤재철 시인의 시는 어쩌면  인간이라는 글자와 이별이 예정된 우리의 모습을 경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유치한 감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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