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187호 - 2020.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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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규격’ & ‘스피커 읽고

서영처 지음 | [창작과 비평 봄호(187)]

 


도시는 우리의 자연이다



코로나19 전염으로 집에 갖히다시피 지내고 있지만 오히려 마음을 가다듬고 글자를 읽기가 힘들다. 왜일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재난 문자 푸쉬음소리에 놀라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기 때문이다. 수시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하루 사용 시간이 세배 늘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이용자가 부쩍 줄어든 지하철 에서도 사람들은 잠시도 스마트폰을 놓을 모른다. 역에 내리려고 문가에 있는 동안에도 10초마다 스마트폰을 껏다 켰다를 반복하는 어르신도 있다.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모습이려니 생각한다. 나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착각이다.    


     이런 마음이 가라앉질 못하고 한동안 창작과비평 봄호가 제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던 . 다른 일들을 중단하고 이번 호에 실린 시들을 읽기 시작한다. 아직 시읽기는 자신이 없다. 시인들은 여전히 내게 다른 별에서 사람들만 같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글자를 따라간다. 그나마 시인이 묘사하는 풍경이 나의 기억과 맞닿았다. 서영처 시인의 도시의 규격 읽었다.  주욱 읽어보기도 하고, 띄엄띄엄 읽어보기도 한다. 어느 시인이 바라보는 풍경은 기억 속의 장면을 불러내온다



     오래 친구와 술을 마시고 헤어진 걸었던 어느 늦은 밤거리, 일어날 말듯 다가오는 거리의 불빛을 떠올렸다.  시인이 묘사한 도시의 거리는 커피점과 편의점이 마치 벽지나 화장실의 타일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어 나타난다. 편의점에서 세어나오는 하얀 빛과 24시간 카페에서 뿜어내는 누런 , 그리고 사이를 화려한 성형외과의 네온사인이 채우던 도시의 생경함을 기억하고 있다. 낮과 다른 밤의 낯선 모습과 새로운 규격들. 그리고 낮에는 성형외과에서 새로운 미의 규격을 만들어내고 있을 터였다



     우린 이런 일정한 간격으로 규정되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 시인은 도시 거리의 일정한 모습을 보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공 생각한다. 여공이란 존재가 도시의 규격에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도시를 채우는 일정한 간격사이에 여공과 같은 존재가 여전히 어디엔가는 있다는 자각은 오히려 시간적인 간격에 대한 감각을 불러오는 같다. 성형외과의 네온사인 숲에서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는  잊혀져갈 지모르지만 70년대 여공들의 아들딸들은 여전히 콜센터에서, 시인이 언급한 편의점에서, 그리고 치킨집에서 일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담보대출의 일정하고 상환날짜 만큼이나 일정하게, 하지만 보다 호흡으로 여공들의 삶이 어디에선가는 일정하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선은 이제 조금 다른 눈으로 도시의 거리를 바라본다. 보도블록 위의 총총한 자국 처럼, 그리고 틈을 채우는 촘촘한 담배꽁초처럼, 도시인의 삶은 조밀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도심을 떠나버렸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도 식당과 기타 개인사업자들이 속속 문을 닫는 모습을 보고 있다. 도시는 촘촘하면서도 비어있는 것이다. 청구서처럼 도시의 규격에 들어가 있어야 안심하는 도시인의 삶이란 바로 이곳이 우리의 자연(自然)’임을 강변한다. 사전에 담긴 자연 정의에는 비인공적인요소를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상에 비인공적인대상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 장소는 이제 남아있지 않다. 고래 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들러붙어 사는 이곳이 바로 도시인의 자연이 아닐까.



     따개비들의 꿈들은 자연스럽게 시인의 스피커라는 시로 안내해주는 같다. 봉분을 뭉개고 마련된 황망한 대지 위에 들어선 아파트들이 있는 도시의 공간이다. 고래 위에 오밀조밀 붙어 있던 따개비들이 꿈꾸는 대상. 아파트는 가장 노골적으로 도시의 규격을 생산하는 존재다. ‘깎아지른봉우리에 있는 하나의 표정에 창과 벽돌이 일정하게 배치되고, 사람이 사는 공간은 이목구비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끔 해보곤 한다.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는 오랜 시간 수많은 동물과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 묻힌 곳이라는 자각이다.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의 역사 위에 도시인들의 이라고 표현되는 욕망이 쌓이는 곳이 바로 도시의 아파트일 것이다. ‘도시의 규격 스피커 구름들이 헛헛한 인간의 자연을 내려다보며 부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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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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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를 읽은 감상

 


내게 문학이란 무엇일까



 

예기치 않은 눈이 펄펄 나린, 이번 겨울에 나와 함께 했던 계간지 창작과비평 겨울호(186) 다시 돌아본다. 나라가, 아니 세계가 바이러스로 신경이 곤두서 있다. 문득 진부한 의문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문학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계간지의 표지에 정리된 글들의 제목과 주제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모두 담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문학은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불완전성과 부조리함이 없다면 태어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문학은 우리와 사회를 가감없이 비추고 있었다



 

불과 전만 해도 조국사태 일본의 경제 제제 움직임과 일본 제품 불매 우리의 화두였다. 이제는 바이러스 기사 우리의 모든 관심사가 뒤바뀌어 버린   같다. 마치 언제 그런 문제가 있었냐는 말이다. 국내 확진자의 동선이 낱낱이 공개되고, 사생활이 드러난다. 중국인들은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눈총을 받고, 기피 대상이 되어갔다. 서울의 어느 카페 입구에 No Chinese라고 놓은 것을 지인이 보았다고 했다. 작년 말에 우리 사회는 No Japan 자랑스럽게 차에 붙이고, 가게 앞에 붙이지 않았던가. 이제는 차이니즈라니. 물론 극히 일부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전염성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팍팍함 이유로, 또는 우리만은 살아 남기위해, 곤경에 처한 이들을 격리하고 배제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위험이 닥치지 않겠는가?’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문제는 당연시라는 지점에 있다. 겨울에 문예계간지 창작과비평 처음 만나고, 틈틈이 읽으면서 내게 문학이란 무엇일까를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성인이 되고도 한참을 지나 문학과 만나게 나에게, 진부한 질문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문학이 자리매김하는 자리는 바로 우리 삶에서 당연한 당연하지 않다라고 바라보는 곳에 있지 않을까. 아마 문학의 역할이 이런 것이기에, 내가 계간지의 표지를 보며 문학의 존재는 인간의 삶과 사회의 부조리함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라는 막연한 물음을 갖게 것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 에서 동물로서의 인간이 유전자를 나르고 퍼뜨리는 생존 기계라고 표현한 대목이 떠오른다. 바이러스라는 개체 전체의 전략에 인간이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그나마 공포도 똑똑한 인간이 앎을 통해 추가된 공포다) 바이러스의 위협에 문학 가장 강력한 백신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감염된 타자(사람과 다른 동식물을 포함하여) 격리하거나 배제하는 일을 당연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기술 지식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 집단의 전략을 극복할 있는 것은 문학적 상상력 것이다. ‘문학 내가 타인의 시선과 관점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해줄 기회를 있다. 문학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문학적 상상력 통해, 당연한 현상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음 상상하고 발견하도록 한다. 이것이 문학 우리에게 있는 가장 강력한 효용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문학이란 백신은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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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

촌평 미래는 오지 않는다》를 읽고

(전치형·홍성욱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9)


 

미래 예측이란 바로 우리의 현재를 보살피는 일이며

자체로 미래를 만드는 행위다


 

이번창작과비평 겨울호(186) 실린 촌평 모두 흥미롭게 보였는데, 중에서 개인적인 관심사에 따라 과학기술의 담론과 관련 있는 미래는 오지 않는다(전치형·홍성욱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9) 대한 서평을 먼저 읽게 되었다. 서평을 작성한 강연실 교수는 마치 상공에서 새의 눈으로 지상을 조망하듯, 책의 경계 넘나들며 책이 다루는 문제의식의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에게는 기술이 주도권을 사회에서 기술이 중심이 미래상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서평자 강연실 교수는 미래는 오지 않는다에서 저자들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 의식을 주의 깊게 포착하여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래 예측은 이론과학이나 실험과학이 다는 . 인간 사회는 자연에 적용하는 정확한 예측 메커니즘을 그대로 적용할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예측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를 수행하는 사람의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기술 진보를 거론하며 진행하는 미래 예측은 전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담론이 되는 미래 예측에는 누가 미래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가 중요해진다. 소위 전문가 집단이 기술에 대한 기대를 만들어내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미래 예측이란 자체로 미래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퍼포먼스로 이해할 있지 않을까.


가지   주목한 부분은, 서평자가 책을 소개하는 몇몇 일간지의 소개글을 비판하는 대목이었다. 물론 서평자는 독자가 책의 핵심 논제를 오독할 가능성을 지적하는 대신, 책을 소개하는 주력 일간지들이 책의 핵심주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독자들이 흔히 지나칠 있는 오독의 전형을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책을 소개했던 일간지 담당자는 책을 읽지 않았을 같다. 서평가의 표현대로 주요 일간지의 책소개 글은 책이 비판하는 기술결정주의적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평자는 사례를 통해 언론이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책의 논지를 간과했든, 의도적으로 회피했든), 우리가 어떤 가치를 향해 나아가려면, 우리의 현재 어떻게 바꾸고 변화해야 하는지를 되묻는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 아마도 기술산업사회의 가장 위대한발명품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미래라고 하는 거대한 허구속에 우리가 노오력 해야하는 이유, 우리가 월급으로 평생 마련하지도 못할 아파트를 꿈꾸며 달려가야 이유, ‘인공지능 유토피아 꿈꾸며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는 이유가 녹아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미래는 오지 않는다에 대한 서평은 미래 예측이 미래의 기술을 예견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임을 환기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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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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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를 읽고



'식민주의라는 오랜 바이러스'의 존재

 


이번창작과비평 겨울호(186) 통해 문학계간지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동시대 작가들의 시와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글과 인터뷰 등을 통해 우리 삶과 닿아 있는 현상들에 대해 예민한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 문인들의  존재를 느낄 있었다.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를 위협중이다. 하지만 내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일본과 관련한 편의 글에 드러난 현상이었다. 바로 일본의 패전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과 관련하여 벌어진 ‘4.24 교육투쟁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였다. 편의 글을 읽고, 뇌리에 남은 단어는 식민주의라는 글자다. 4.24 교육투쟁(1948) 패전 일본 사회에 남아 있던 식민주의에 미군의 반공프레임이 개입되어 진행되었던 불행한 사건이었다. 한편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는 식민주의의 관성이 키워낸 거대한 인재였다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가 전무하고, 심지어 가해자로서의 인식마저 결핍된, 일본 식민주의의 현재성을 확인할 있었다. 사건 모두 식민주의 관점에서 드러난 국가 폭력 사례들인 셈이다.


특히 4.24교육투쟁은 이번 겨울호를 통해 처음 알게 역사였다. 저자 정영환은 2010 2 24일자 <아사히 신문> 사설에 언급된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고교무상화제도 배제 움직임을 언급하며 글을 시작한다. 고교무상화법은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고유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본래 취지다. 그런데 일본 사회에서는 유독 조선학교 교육문제에 북한에 이익을 준다 정치적 이유를 들어 교육의 형평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위배하고,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다. 저자는 현상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며, 야당 보수층과 여당 모두 논리에 동조하게 현상의 근원을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배제 정책이라는 역사적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엉뚱한 논리를 들이대며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거나 논점을 흐리고 물타기를 하는 양상, 그리고 공산주의자의 선동이라는 색칠하기 수법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비단 뿐일까. 2020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감지할 있는 부분이다. 작년에 일본의 어느 미술관에서 소녀상 전시가 중단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전시 중단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표현의 자유를 훼손했다 점이었다. 마치 이번호에 실린 고교무상화제도에서 조선학교를  배제하려는 일본정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아사히신문> 논지를 보는 같았다. 내가 보기엔 이들 일본의 언론 역시 문제의 본질을 벗어난 영역에서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천황제에 기반한 일본의 식민주의라는 막강한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이것이 코로나바이러스보다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식민주의 바이러스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터져 나온 곳이 후쿠시마가 아닐까. 문제를 일본 내에서 꾸준히 언급해왔던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표현을 일부 빌려 얘기해보면, 식민주의라는 바이러스는 타자의 고통에 둔감하고, 이들의 희생을 요구하며, 이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바이러스는 오키나와에도 오래 머물고 있지만, 아직도 세가 약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도 들어와 단지 잠복하고 있는 것만 같다. 사회의 자정능력, 면역기능이 떨어지는 순간 바이러스는 언제든 다시 숙주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본지에 소개된 조선학교의 교고무상화제도 배제 ‘4.24교육투쟁’, 그리고 후꾸시마 오염수문제는 식민주의라는 바이러스가 다르게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처음 만난 창작과비평 겨울호(186)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건재를 과시하는 식민주의 바이러스의 존재를 강하게 느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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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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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

현장


 '함께 풀어야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를 읽고

 


이번창작과비평 겨울호(186)에는 2011 3 지진으로 이어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최근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발생되고 있는 오염수 처리 문제에 대해 언론에서 자주 접하고 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사로만 접하고 있어 관련 문제 전반에 대해 사실 알지 못했던 부분이 많았다. 벌써 핵발전소 사고가 난지 9 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특히 작년 여름 일본에 수차례 태풍을 맞아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되거나 처리된 제염토 자루가 유실되었다는 기사를 기억한다. 일본 본토의 오염 상황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심각할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나라다. 이번 글을 작성한 정의당 생태에너지본부장 이헌석의 우려대로 후쿠시마 사고의 가장 피해를 주는 이웃국가는 우리가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후쿠시마 사고는 우리에게도 절실한 문제인 셈이다.


그동안 단편적인 기사로만 후쿠시마 사고 관련 상황이나 문제점들을 접해왔다. 이번 호에 실린 글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후쿠시마 문제가 더욱 심각하고 장기적으로 대처해야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분명한 것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사고 수습(제염과 복구) 대한 전적인 책임은 도쿄전력과 일본정부에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기억해야할 점은 도쿄전력과 일본정부가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세계의 환경을 오염시키고,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가해자로서의 책임의식을 갖는 일일 것이다. 어느 과학자가 언급한 사고 실험이 생각난다. 오염된 컵을 바다에 버린 다음, 지구의 바닷물에 고르게 희석시켰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지구 어디에서나 바닷물을 떴을 , 물컵에는 최소한 오염된 컵에서 나온 분자 100 이상은 담겨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60-7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사용이 중지된 살충제 DDT 여전히 전세계의 수산물에서 미량이나마 계속 검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2019 9 기준으로 누적 오염수의 (원자로 냉각을 위해 쏟아 부은 물과 지하수 유입으로 오염된 ) 116 톤에 이르고 있다는 , 그리고 현재도 매일 110 정도의 오염수가 계속발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암울한 소식 가지는 방사성물질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점과 부실하고 신뢰성 떨어지는 관리 문제다. 2013년부터 도쿄전력은 플루토늄과 텔루륨 62 핵종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방사성물질의 일종인 삼중수소의 경우, 이를 제거하는 설비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도쿄 전력은 현재 삼중수소 제거에 손을 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오염수에 포함된 삼중수소의 농도는 리터당 120Bq(베크렐) 수준인데, 세계보건기구(WHO) 음용수 기준으로 제시하는 삼중수소 농도의 상한치는 1Bq라고 한다. 그러니까 삼중수소 농도만 해도 세계 기준의 120 수준에 달하고 있다는 의미다. 발생되는 오염수의 막대한 양과 비용 때문에 방치된 오염수 문제는 현재 장기간 지구 환경에 영향을 주게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오염수 방류 문제는 결국 고농도의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 희석시키는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염수의 방대한 양과 현재도 계속해서 발생하는 오염수와 지하수 오염을 통한 바다 유입의 문제는 분명히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에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는 끊임없이 피폭 노동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이루어지는 원격작업만 해도, 여기에 참여하는 작업자가 한번의 작업으로 반년치 이상의 피폭을 입고 있다고 한다. 글에 따르면, 방사선량 6Sv(시버트) 피폭되면 사람이 즉사하는 수준인데, 후쿠시마 발전소 원자로 내부에는 시간당 최대 530Sv 방사선이 측정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사실 아직도 작업자들이 원자로 내부에 직접 들어가서 작업할 수는 없는 상황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작업을 해야 하겠지만, 작업 노동자들에 대한 피폭문제는 무엇보다 일본정부가 우선시해야 사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재 도쿄전력과 일본정부의 부실하고 신뢰가 가지않는 수습과정을 보면서 희생의 시스템이란 관점에서 일본사회의 문제들을 검토했던 동경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를 떠올렸다.  데쓰야 교수와 재일한국인 서경식 교수는 후쿠시마 사고와 오키나와 문제 모두 배경에는 일본의 식민주의 공고히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희생되는 존재가 필요하고, 결과 (희생되는 대상) (희생을 요구하는 ) 구별되는 차별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이 사실 후쿠시마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대도시인 도쿄에 전력을 공급하도록 마련된 시설이다. 그러니까 도쿄 외곽에, 후쿠시마 지역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설립된 시설인 것이다. 도쿄라는 나라의 수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차별적인 대상(후쿠시마 지역과 지역민들) 있고, 중앙정부는 이를 당연시하게 되는 구조이다. 결과적으로 희생의 시스템은 민주주의적인 의견이 수렴되는 절차가 제대로 지켜질 없는 구조다


서경식 교수는 일본정부의 후쿠시마 사고 대응방식에는 2020 도쿄 올림픽이라는 추가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살펴보고 있기도 하다. 이번 글의 저자 역시 간단히 이를 간단히 언급했지만, 후쿠시마 사고 대응에 대한 일본정부는 움직임에는 도쿄올림픽이라는 국가 행사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정부는 올림픽이 예정된 여름까지 국내외 여론을 살피며 자신들의 부실한 대응과 오염수 문제를 언론에서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 올림픽이라는 국가의 사업, 행사를 명분으로 언론이 통제되고, 세세한 정보가 은폐되고 있으며, 부실한 관리 실태가 국내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결국 도쿄 올림픽을 위해 일본의 거주자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안전을 담보로 이들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 일본정부는 아직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인식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점을 염두에 둔다면, 2020 도쿄올림픽 개최 이전에는 일본정부가 오염수 배출 문제를 언론의 관심을 가능한한 받지 않도록 것이라는 점을 눈여겨 봐야 것이다. 희생의 이벤트 끝나면 일본정부는 전격적으로 오염수 방류를 발표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나아가 이번 여름 일본에 태풍이 경우, 사고지역에서 오염수나 제염토의 유실 또는 방류(?) 문제가 더욱 가속화되지 않을까 예견된다.


저자는 오염수와 제염폐기물이 동북아가 함께 풀어야할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제는 피해규모와 계속되는 오염수 발생을 , 동북아시아만의 문제로 제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국제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하여 떠오른 생각은 중국의 동해안에 건설중인 원자력 발전소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성이 있겠다는 점이다. 현재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여러 대의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체르노빌 사고나 후쿠시마 사고만 보아도,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문제는 국가만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중국의 동해안에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다가 사고가 생겨, 후쿠시마와 사고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 대한민국에 주는 영향은 후쿠시마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원자력의 이용에는 국제적 공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나아가 국제적 개입이 필요할 같다. 왜냐하면 원전 사고의 방사능 피해에는 국경이 없고, 피해규모는 인류 전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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