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다, 경계에서 저항하다

(다시 쓰기 혹은 속편)

-야만인을 기다리며(2019), 시간 時間(2020)을 읽고

 



작년 말에 일러스트 모비 딕, 그래픽 노블 모비 딕,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묶어서 간단한 리뷰를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오늘은 모비 딕을 제외하고, 일본 작가 혼타 요시에의 장편소설 시간 時間(2020)을 더하여, 전에 썼던 리뷰의 구조를 그대로 차용해서 리뷰 다시쓰기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은 큰 틀에서 보면 작가 또는 작중 인물의 경계 넘기경계에서 저항하기의 구도 속에서 다른 두 소설에 대해 다시 써보려고 했던 시도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J.M.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경우, 이전의 리뷰에서 대부분 가져오되, 홋타 요시에의 시간 時間과 비교해보며 읽어본 것이다.

 


경계를 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백인작가 쿳시는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가 법률로 공식화된 1948년보다 조금 이른 1940년 태어났다. 그리고 이 소설은 야만적인 인종차별 정책이 한창이던 1980년에 출간되었다. 외견상 소설의 시간 및 공간상의 배경은 배제되어 있지만, ‘작가의 시공간을 염두에 두고 읽어 나갈 수 있다. 소설을 관통하는 배경은 제도의 경계 밖에 있던 존재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정복하고자 했던 문명의 제국주의적 맥락과 닿아있다. 백인 작가 쿳시는 내부고발자의 시선으로 문명과 야만의 경계 넘기를 시도하며 화자의 입으로 문명의 야만성을 고발한다.

 

소설의 화자는 제3제국에 고용되어 변방에서 30년을 보낸 치안판사다. 이 변방은 제국이 구축한 식민지에 요새를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곳이기도 하다. 치안판사는 변방에서 아무 일 없이권태롭지만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취미로 유목민들의 폐허를 발굴하고, 이따금 유곽을 들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앞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제3제국 소속 경찰 졸 대령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린다. 졸 대령의 임무는 야만인들을 정복하고 몰아내어 야만인들의 위협으로부터 문명세계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3제국 경찰 졸 대령이 보이지 않는 유목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고 잡아들였던 것은 무지로 인한 공포가 만들어 낸 증오 때문이다. 치안판사가 제국의 경계를 넘어가 졸 대령이 잡아들였던 유목민 여자를 유목민에게 넘겨주고 복귀하자, 치안판사는 적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된다. 이처럼 사회의 질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계를 지우고, 경계의 안쪽에 자리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치안판사는 졸 대령이야말로 문명에서 온 야만인이라고 비판하고, 경계의 어느 쪽에 서기를 거부한다. 그는 이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꿈꾸었기에 고초를 당해야 했다.

 

치안판사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에게조차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치욕의 원인이라고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254)라고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그렇다면 치안판사가 야만인을 기다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기록된 역사의 표면 아래에 묻힌, 진정한 삶과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문명이 야만으로 규정한 유목민의 시간은 문명과 상관없이 도도히 흐른다. 계절의 법칙에 따라 오고 가는 아이들과 같은 시간속의 삶을 살 뿐이다. 3제국의 경찰의 만행으로 유목민의 삶이 파괴되고 땅은 생산력을 잃어버린다. 판사는 건강하고 진솔한 삶을 바랬기에 부조리한 이데올로기, 관습의 억압을 통과하지 못하고 수모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제국이 보여주는 무자비한 만행을 지켜보는 치안판사의 시선은 인종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슈미얼의 시선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앞선 리뷰에서 언급한모비 딕에서는 문명화된 퀘이커교도가 소유하여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포경선의 이름이 백인들의 정복활동으로 멸종한 인디언 부족 피쿼드에서 따온 것임을 상기해보았다. ‘문명화된 백인들이 야만인들을 몰아내고자 스스로가 야만인이 되어버린 역설을 두 소설에서 발견한다. 쿳시가 소설에서 구체적인 시공간을 배제한 이유도 제3국의 하수인들이 보여주는 행동이 특정 시기, 특정 사회의 문제만이 아님을 제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백인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문명사회가 지니는 편견과 억압적 관습에 관한 것이며, 쿳시는 이 문제의 본질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쿳시의 소설에서 검은 선글래스를 쓰고 나타난 문명인의 모습은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시간 時間에서 검은 뿔테 로이드 안경을 쓴 일본인 장교 기리노 중위와 오버랩 된다. 이 소설의 시공간은 1937년 중국 난징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중국을 점령한 일본군이 수 개월간 자행한 학살사건이 소설의 배경이다. 소설의 화자는 중국군 정보 장교 천잉디. 그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 하인까지 데리고 모두 탈출한 형의 가족을 배웅했다. 반면 화자는 탈출하지 않고 집에 남아 일본군에 의해 임신한 아내와 아들을 잃는 고초를 겪는다. 소설은 화자가 대학살 전후 1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기록한 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작가의 색다른 경계 넘기에 있다. 작가 요시에는 대학을 졸업한 뒤, 태평양전쟁 당시 징집되어 중국에서 복무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복자가 아닌 피정복자의 시선에서 소설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역사소설과 다른 이 소설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소설의 몇 군데에 일본인의 무의식이 드러나긴 하지만, 작가는 입장(인식)의 경계를 넘어피정복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작가가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고, 몇 개월 만에 자국의 군대가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던 만행을 고발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길가에 있던 시체의 목을 물어뜯던 짐승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경계에서 저항하다

 

홋타 요시에의 소설 시간 時間1955년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나에게도 충격이자 울림으로 다가오지만,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가해국의 작가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상상해보려 했다. 작가의 경계 넘기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작가의 경계 넘기와 화자인 천잉디의 경계에서 저항하기가 대비되는 지점에도 주목해본다. 천잉디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인간(사랑)과 물질의 수준(질서/비인간성) 사이의 경계 넘기를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인간으로 남길 선택하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집을 점거한 기리노 중위의 하인으로 지내면서도, 엄혹한 운명 속에서 익사해서는 안 된다’(138)고 다짐하며, ‘노예적인 숙명과 파괴적인 인생관에 굴종하지 않기’(109)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도 치안판사는 경계에서 저항하기를 시도한다. 쿳시가 인식의 경계 넘기를 시도하는 반면, 소설의 화자는 문명과 야만, 비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계에서 저항한다. 치안판사는 제3제국 경찰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아 손이 부러지고, 코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잡혀 와서 노예처럼 끌려온 유목민들을 보고 우리는 위대한 생명의 기적이야! (...) 이 사람들을 봐라! (...) 사람들이다!”(177)라고 항변한다. 그리고 치안판사가 나와 졸 대령은 다르다”(76)라고 생각했을 때의 인식은 시간 時間에서 천잉디가 인간/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넘지 않고자 했던 양심이 내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 時間의 마지막에 이르러 화자는 비인간적인 세상과 인간의 세상, 그 둘 사이의 경계를 헤매고’(125) 갖은 고초를 겪고 살아남아 회복 중이던 사촌 동생 양양에게서 생명의 강한 회복성과 희망을 발견한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야 해야 하는 것’(250)이라고 보고, 엄연한 생의 질서를 한 번 더 믿기를,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해 한 번 더 의지하고자 한다. 곡식을 수확하는 것처럼 인생은 몇 번이라도 발견’(250)되는 것임을 믿는 것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마지막에서는 야만의 시기가 지나가고 다시 평온을 되찾은 변방에 첫 눈이 내린다. 치안판사가 눈사람을 만드는데 열중해있는 아이들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은 긴 여운을 남긴다.

 

지금까지 전편의 리뷰와 마찬가지로 경계 넘기그리고 경계에서 저항하기의 관점에서, 인종차별과 대학살을 다룬야만인을 기다리며시간 時間을 함께 읽어보고자 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이 작품들에서 파악되는 대립되는 세계가 어떤 경계에서 충돌하되 어느 접점, 곧 정지와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지난 리뷰에서 읽어본 허먼 멜빌의모비 딕을 떠올릴 때, 나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끝나면 지면의 한계를 벗어나 또 다시 바다에서의 삶이 이어질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아가 이것이 경계에서의 저항하기를 너머 경계를 무화하기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야만인을 기다리며시간에서는 야만적인 문명에 의해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가 훼손되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여기에 저항하는 인간의 꿈틀거림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계속되는 삶과 질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다시 해가 뜬다는 엄연한 질서를 한 번 더 믿는 것이라 믿었던 천잉디의 독백처럼 말이다

 

책을 덮고 나는 성년이 한참 지나 읽기 시작한 책읽기, 그리고 소설 읽기란 내게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해보았다.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책을 경계로 나와 다른 세계와 마주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아마도 어떤 종류의 경계에 다가가고, 때론 이를 넘는 시도를 상상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 작업이 경계의 자리를 선택하거나 혹은 그 경계를 무화시키는 노력을 요구하기도 할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이질적인 두 세계가 있을 때, 두 세계는 으레 그 경계에서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루며 존재한다. 이 세계의 안과 밖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내가 경계의 자리를 가늠하고, 그 경계를 넘을 것인지, 혹은 경계의 어디에 설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작업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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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전기

옌스 안데르센(Astrid Lindgren) 지음 | 김경희 옮김 | [창비]

 


한 아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 ‘아이들은 영혼에 바르는 연고임을 잊지 말라

 

나는 결혼할 때 텔레비전을 사지 않았다. 여러 집을 전전하고 현재 살고 있는 집에는 부엌에 인터넷으로 연결된 테블릿 크기의 티비가 설치되어 있어서 가끔씩 주방에 앉아 TV를 본다. 보통 TV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가끔 뉴스를 볼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지 깨닫고 놀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뉴스를 볼 때마다 충격을 많이 받고, 심리적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금 한 아이가 학대받아 사망한 일로 수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나는 어제 저녁에나 뉴스를 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제 본 뉴스시간에는 아이의 죽음뿐만 아니라, 차에 묶여 끌려 다니다 죽은 강아지에 대한 뉴스, 음주 운전 차에 치여 열심히 내일을 준비하던 젊은 여성이 사망한 사건 등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요즘 TV를 볼 때마다 나는 지금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닌지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매일 TV를 통해 뉴스를 보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런 뉴스에 익숙해져있겠지만, 가끔씩 TV를 보는 사람이 이런 뉴스를, 그것도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꺼번에 접하게 얼마나 충격을 받고 스트레스를 받을지 상상해보라. 어제는 뉴스를 보면서 정말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원래 새해가 되면 삐삐롱 스타킹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전기에 대해 좀 밝은 독후기를 작성해볼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 겪은 개인적인 아픔과 시련을 딛고 많은 이들이 존경할만한 삶을 살았던 작가로서 말이다. 하지만 한 아이의 충격적인 죽음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다만 이 사건과 관련해서 다시금 린드그렌을 떠올렸다. 그녀는 보통의 부모들처럼 아이들의 심정과 미래를 고민하고 걱정하던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린드그렌은 단순히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캐릭터 삐삐를 창조한 아동문학 작가로 정리되는 인물이 아니다. 이 전기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을 읽고나면, 린드그렌이 인간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매일 용감하고 진실하게 삶을 살았으며, 아이와 젊은이들의 미래를 고민하고 걱정했던 어른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의 작가 옌스 안데르센은 동화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전기와 프레데릭 왕세자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덴마크의 전기 작가라고 한다.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성과 같아서 그의 후손이거나 친척이 아닐까 추축해본다.

 

뉴스를 통해 한 아이의 안타까운 사망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이 책이 생각났고, 책의 제목이 된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이란 문구를 떠올렸다. 전기에 따르면 이 문구는 린드그렌의 동화 미오, 나의 미오에서 주인공들이 당면한 위험이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기적을 기대하며 암송하는 기도문의 일부였다. 사망하기 전까지 학대받았던 아이는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매순간 여기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바램만을 갖지 않았을까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볼 뿐이다.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를 듣는 일은 어른들의 책임이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의 기도를 외면했던 침묵의 카르텔의 일부라고 해도 변명하기 힘들 것 같다.

 

린드그렌은 아동을 위한 작품에서도 삶의 주요 문제들, 이를테면 고독, 고립, 어둠, 죽음, 슬픔과 같은 삶의 보편적인 고민들을 담아, 아이들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어른으로서 우리가 염려하듯이 아이들이니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르다’, 라고 동화에서 배제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린드그렌은 합당한 방식으로 이런 주제들을 다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이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대하고, 아이들이 이런 충격에도 각자 나름대로 이를 소화해 나간다는 믿음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린드그렌의 견해에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반대할 교육자들도 분명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이들을 단순히 미성숙한 인간으로만 보는 시각도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현대 사회에서보다도 더 삶과 죽음이 가까이 있었던 조상들의 삶을 떠올려보자. 아이들이라도 늘 부모나, 형제자매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일이다. 이에 대해 린드그렌의 생각을 좀 더 들어보자.

 

예술적으로 합당한 방법이라면 이야기를 통해 죽음이라는 주제도 진솔하게 다룰 수 있으며, 이를 소화해 내는 것은 어린이의 몫이다. 죽음과 사랑은 나이를 막론하고 인류의 경험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도 예술을 통한 충격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다. 누구나 이따금 눈물 흘리고 두려움에 떨 필요가 있다.”(337)

 

젊은 시절 첫 아이를 낳고 곧바로 고통 속에서 헤어졌던 경험, 사실상 싱글맘으로서 생계를 위해 분투했던 린드그렌의 청년기를 떠올려본다. 이 때의 고통스럽고도 생생한 체험은 이후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린드그린은 앞서 언급한 미오, 나의 미오에서 슬픔새노래새를 언급하는데, “우리 머리 위로 슬픔새가 날아다니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요”(291)라고 자신의 어린 펜팔 수신인에게 말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린드그렌은 어린 상대에게도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며 이들이 삶의 진실을 배우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를 소화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린드그린은 특히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이들의 교육과 미래에 대해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세계의 운명은 요람에서 결정 된다’(276)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무엇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지에도 연장되어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작가였다. 린드그렌이 지녔던 신념, ‘우리는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길 바라는 대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라는 입장은 나이와 지역, 계급 및 시대와 무관하게 진리일 것이다. 이 진리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성립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린드그린에게 글쓰기는 무엇보다 특별했다. 특히 결코 만만치 않았던 그녀의 삶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행복을 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린드그렌은 어떤 때는 행복하고 어떤 대는 슬프다. 나는 글을 쓰며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290)라고 했다. 그녀의 동화를 보면 언제나 행복했던 시기를 보낸 사람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개인적으로 힘든 시련과 2차 대전을 겪은 인물이다. 그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전기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린드그렌이 삶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 나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신나고 풍성해서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고민할 겨를이 없어요. 하루하루가 가져오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요. 매일을 마치 삶의 마지막 날처럼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늘 하루가 인생이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데 그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 실제로 삶이란 재빠르게 스쳐가는 부조리이며,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은 커다란 침묵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짧은 시간 동안에는 최대한 풍성하게 채워야 합니다.”(449)

 

린드그렌의 전기에는 인생의 후반에 작가가 실천적인 활동가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력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인본주의자로서, 문명비판론자로서, 또 정치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년에는 끊임없이 환경, 여성, 동물복지 등의 문제에 관해 글을 기고하고 사회적인 논의를 끌어낸 인물이기도 했다. 다만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른으로서, 그리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작가를 계속 따라가 보려 한다.

 

1973년에 한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린드그렌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어린이가 최소한 한 명의 어른과 바람직한 정서적 유대를 가져야만 안전함을 느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삶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383)

 

그녀가 공개적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는데, 아마도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멀리 떨어진 위탁 가정에 맡기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몇 년 간의 절실한 체험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내일이 불안한 나날 속에서 매순간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야 했던 아이의 심정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는 린드그렌이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간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전기의 작가 역시 린드그렌 철학의 핵심은 살아가는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449)이라고 강조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른과 정서적으로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한 아이, 아니 심지어 학대받고 방치된 아이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다. 이 아이는 린드그렌이 아이들로부터 기대했던, 슬픔과 고독 속에서도 매 순간 (삶에) 집중하면서 우리가 진실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느껴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차가운 땅속에 묻힌 아이에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린그드렌은 학대를 하고 방치했던 양부모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얻고 웃음을 잃어가던 아이를 외면한 어른들에 대해 분노했을 것 같다. 나아가, 아이에게는 고독과 외로움의 상처에 대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위로해주고 싶어 했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고독 속에 갇혀 있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단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작고 외로운 존재야”(447)라고 말이다. 린드그렌이 창조해낸 삐삐는 어쩌면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방치되고 심지어 학대받은 아이들이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지키려고 했던 생에 대한 의지의 은유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이를 학대하고 방치한 양부모뿐만 아니라, 이를 알고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입양기관, 그리고 신고를 받고도 이런 상황을 방치한 경찰들, 그리고 아동학대법방지를 위한 법제정에 한동안 무관심했던 국회위원들을 비롯한 기득권을 가진 모든 어른들, 이 모두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방치했다면, 우리 어른들은 가해자의 편에 가까운 혹은 그 일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 린드그렌의 한 마디를 전해주고 싶다. “아이들은 영혼에 바르는 연고”(368)임을 잊지 말라고. 아이들이야말로 오히려 병든 어른들의 영혼을 치유해줄 수 있는 귀한 존재들이라고 말이다. 한번도 진실로 살아있음과 유대감을 느껴보지 못했을 아이의 죽음을 애도한다.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221) - P221

"교육에서 자유란 안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존중과 애정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를 존중하는 것입니다."(250) - P250

"어떤 때는 행복하고 어떤 때는 슬프다. 난 글을 쓰며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290) - P290

"이건 마치 오늘 하루가 일생의 전부인 양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야. 매 순간 집중하면서 우리가 진실로 살아 있음을 느껴야 한다는 거지."(348)
- 열일곱살의 린드그렌에게 작가 엘렌 케이가 해준 토마스 토릴드의 격언 - P348

"모든 어린이가 최소한 한 명의 어른과 바람직한 정서적 유대를 가져야만 안전함을 느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삶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383) - P383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고독 속에 갇혀 있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단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작고 외로운 존재야."(447) - P447

"‘오늘 하루가 인생이다.‘ (...) 실제로 삶이란 재빠르게 스쳐 가는 부조리이며,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은 커다란 침묵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짧은 시간 동안에는 삶을 최대한 풍성하게 채워야 합니다."(449)
-환갑의 린드그렌이 기자에게 해준 말 - P449

"아이들은 영혼에 바르는 연고야"(368)
- 손주들과 함께하던 시기,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쓴 표현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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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 모비 딕 - 허먼 멜빌
크리스토프 샤부테 각색.그림, 이현희 옮김, 허먼 멜빌 원작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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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다, 경계에서 저항하다

 

- 일러스트 모비 딕(2019), 그래픽 노블 모비 딕(2019), 

야만인을 기다리며(2019)을 읽고

 


경계를 넘다

 

문학사에서 간결하고 매력적인 첫 문장을 지닌 소설을 꼽으라면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빼놓을 수 없다. 반면 이 소설은 출간 이후 신성 모독적이고 불경한소설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비주의적이고 이교도적인 분위기와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소설 여기저기에서 드러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멜빌이 일종의 경계 넘기를 시도한 소설로 읽었다.

 

이점을 이해하려면 우선 작가의 시대부터 시작해야한다. 멜빌이 이 소설을 썼던 1850년 즈음, 미국사회는 흥분과 기대감, 그리고 온갖 모순이 뒤섞인 혼돈 상태였을 것이다. 이때는 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하고, 기차가 건설되어 대륙 양안이 연결되었고, 때마침 캘리포니아 주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시작된 시기였다. 여기에 문명화된자본주의 사회는 고질적 병폐인 공황의 후유증을 앓으며, 노예제도라는 야만을 기반으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모비 딕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이 소설을 복수심에 불타는 포경선 선장이 카샬로 블랑슈(흰 향유고래)를 스토킹하다 파멸하는 이야기로만 읽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풍부한 층위가 존재한다. 이슈미얼은 배를 타고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뛰어 들었다. 화자의 공간적 경계 넘기는 인종에 대한 편견을 넘는 인식의 경계 넘기로 이어진다. 작가는 1장에서부터 이 세상에서 노예 아닌 자 그 누구란 말인가?”(39)라고 당시에 민감했던 문제를 건드린다. 하지만 멜빌은 백인 사회의 모순이 초래한 긴장을 한 에피소드에서 위트 있게 해소한다. 이슈미얼은 배를 타기 전 머물게 된 여인숙에서 머리를 팔러 다니던식인종 퀴퀘그와 한 침대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이슈미얼은 편견과 무지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편집증적인 거부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편견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관찰한 화자는 퀴퀘그와 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에는 담배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친구가 된다. 이슈미얼이 저 남자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다. 내가 그를 무서워하는 것만큼 그도 내가 무서울 것이다. 술 취한 기독교인이랑 자느니 정신 멀쩡한 식인종이랑 자는 게 낫지”(67), 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가 사회의 관습과 편견이 만든 경계를 넘은 사건으로 읽었다. 멜빌은 자신의 문제의식을 이 에피소드에서 솜씨 있게 드러냈다. 백인 문명이 피부색으로 규정했던 문명과 야만의 경계는 포경선 안에서처럼, 한 이불 아래에서도 그 존재 의미를 상실했다.

 

이번엔 조금 다른 경계 넘기그래픽 노블 모비 딕을 읽어본다. 일러스트 판에서 판화가 록웰 켄트는 간결한 선으로 인물들의 모습을 강렬하게 그려냈다. 반면 크리스토프 샤부테가 각색하고 그린 그래픽 노블에서는 소설의 주요 장면들이 생동감 있게 담겨있다. 그런데 두 작품 사이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차이점 하나는 모비 딕이 물어뜯은 에이해브의 다리가 서로 다르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러스트 판에서 에이해브가 고래뼈로 만든 의족을 댄 곳이 왼쪽 다리인 반면, 그래픽 노블에서는 오른쪽 다리에 나무로 만든 의족을 대고 있다.

 

원작에서는 모비 딕이 선장의 어느 쪽 다리를 물어갔는지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미국의 여러 대중 매체에서 묘사되는 에이해브를 살펴보니 모두 일러스트 판처럼 왼쪽 다리에 의족을 대고 있었다. 사소해 보이는 이 현상이 내겐 꽤나 흥미롭고, 결코 사소하게 보이지 않았다. 대서양을 경계로 두 작가는 에이해브가 의족을 댄 다리를 다르게 선택한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프랑스의 작가 샤부테가 한쪽 사회에서 통용되던 관습의 경계를 넘고, 보다 자유로운 해석을 가미한 것으로 읽었다.



그림1  (왼쪽) 일러스트 모비 딕, 록웰 켄트가 그린 에이해브

(오른쪽) 그래픽노블 모비 딕, 크리스토프 샤부테가 그린 에이해브



마찬가지로 경계 넘기의 관점에서 J.M.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어본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작가 쿳시는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법률로 공식화된 1948년보다 조금 이른 1940년에 태어났다. 이 소설은 야만적인 인종차별 정책이 한창이던 1980년에 출간되었다. 외견상 소설의 시간 및 공간적 배경은 배제되어 있지만, ‘작가의 시·공간을 염두에 두고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소설의 배경은 제도의 경계 밖에 있는 존재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정복했던 문명의 제국주의적 맥락에 닿아 있다. ‘백인작가 쿳시는 내부고발자의 시선으로 문명과 야만의 경계 넘기를 시도하고, 화자의 입으로 문명의 야만성을 고발한다.

 

소설의 화자는 제3제국의 변방에서 30년을 보낸 치안판사다. 이 변방은 제국의 식민지에 요새를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곳이기도 하다. 치안판사는 변방에서 아무 일 없이’, 권태롭지만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취미로 유목민들의 폐허를 발굴하고, 이따금 유곽을 들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앞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제3제국 경찰 졸 대령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뒤바뀐다. 졸 대령의 임무는 야만인들을 정복하고 몰아내어 야만인들의 위협으로부터 문명세계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사실 졸 대령이 유목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고 잡아들였던 이유는 무지로 인한 공포와 증오가 더 컸다.

 

제국경찰의 무자비한 만행을 지켜보는 화자의 시선은 인종간의 편견을 넘나드는 이슈미얼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모비 딕에서 퀘이커교도가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포경선의 이름은 백인들의 정복활동으로 멸종한 인디언 부족 피쿼드에서 따온 것이다. ‘문명야만을 몰아내고자 스스로가 야만인이 되어버린 역설을 두 소설에서 발견한다. 쿳시가 소설에서 구체적인 시·공간을 제거한 것도 제3제국 하수인들의 만행이 특정 시기와 사회의 문제만이 아님을 환기하고자 했을 것이다. 곧 이 문제는 보편적인 문명사회가 지니는 편견과 억압적 관습에 관한 것이며, 작가는 이 문제의 본질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경계에서 저항하다

 

쿳시가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인식의 경계 넘기를 시도한 반면, 소설의 화자는 문명과 야만, 비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계에서 저항한다. 치안판사는 제국의 경계를 넘어가 졸 대령이 잡아들였던 유목민 여자를 유목민에게 넘겨주고 복귀한 후, ‘적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된다. 사회의 질서,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계를 지우고, 경계의 안쪽에 자리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화자는 졸 대령이야말로 문명에서 온 야만인이라고 비판하고, 경계의 어느 쪽에 서기를 거부한다. 그는 이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꿈꾸었기에 고초를 당해야 했다.

 

치안판사는 제3제국 경찰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아 손이 부러지고, 코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노예처럼 끌려온 유목민들을 보고 우리는 위대한 생명의 기적이야! (...) 이 사람들을 봐라! (...) 사람들이다!”(177)라고 경찰을 향해 항변한다. “나와 졸 대령은 다르다고 주장해야 한다!”(76)라고 다짐할 때 그는 내면의 소리에 따라 제국의 야만인이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야만적인 문명에 의해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가 훼손되는 엄혹한 상황에서도 이에 저항하는 인간의 꿈틀거림을 발견할 수 있다.


일러스트 모비 딕에서도 이슈미얼이 고래의 강인한 생명력을 본받아 경계에서 저항할 것을 외치는 대목이 나온다. “오오, 인간이여! 고래를 찬양하고 고래를 본받을 지어다! 그대도 얼음 사이에서 온기를 유지하라. 그대도 이 세상에 살되 그곳에 속하진 마라. 적도에서 냉정을 유지하고, 극지에서도 계속 피가 흐르게 하라.”(483) 자신의 생명력을 위엄 있게 지키는 고래처럼 우리도 인간다움을 지켜나갈 것을 선언하는 멜빌의 문제의식이 여기에 담겨 있다. 나는 이 대목을 가장 좋아해서, 모비 딕을 언급할 때마다 이슈미얼의 이 외침을 떠올린다.

 

일러스트모비 딕의 마지막 그림은 이슈미얼이 침몰하는 피쿼드호의 소용돌이를 뒤로하고 관-구명부표를 붙든 채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장면이다. 반면 그래픽 노블 모비 딕은 이슈미얼이 관을 붙들고 바다 위에 외롭게 떠 있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그림 치고는 평범해 보이는데, 작가는 원작의 첫 문장을 마지막 장면에 배치해서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영원회귀를 떠올리게 하는 이교도적 특징을 강하게 부각한다. 관습의 경계에서 저항하고, 그 경계를 뛰어 넘는다. 뫼비우스의 띠를 떠올리게 하는 경계의 무화라고 할 수 있을까. 오독일지라도 작가의 신선한 해석과 새로운 시도를 발견하는 일은 이 그래픽 노블을 읽는 묘미다.

 

지금까지 세 편의 작품을 경계의 관점에서 읽어보고자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작품 속의 세계가 대립하고 충돌하되, 어느 접점 곧, 정지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모비 딕은 이야기가 끝나면 지면의 경계를 벗어나 또 다시 바다에서의 삶이 이어질 것만 같다. 이것은 경계에서 저항하기를 넘어 경계 무화하기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마지막에 이르러 요새에는 다시 평온이 찾아오고, 치안판사는 다시 야만인을 기다린다. 아마도 그 이유는 문명이 기록한 역사의 표면 아래 묻힌 유목민들의 진실한 삶을 다시금 기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계속되는 삶과 질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뜬다는 것이 이러한 삶과 질서를 한 번 더 믿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림2  리뷰한 책들

  일러스트 모비 딕, 그래픽노블 모비 딕야만인을 기다리며

표지그림: 초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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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09 0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비딕을 읽는 좋은 코드를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잘 보았습니다! 즐건 하루되십시요!ㅎ

초란공 2020-12-09 19:12   좋아요 1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쓰고나서 좀 유치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

막시무스 2020-12-09 19:16   좋아요 1 | URL
별말씀을요!ㅎ 내년에 모비딕 다시 잡으러 갈라고 생각중인데 너무 소중한 책의 항로 하나를 알려주시네요!ㅎ 덕분에 쿳시라는 작가를 알게된건 보너스구요!ㅎ 즐건 저녁시간되십시요!

초란공 2020-12-09 19:21   좋아요 1 | URL
쿳시를 여러 권 읽으신 분이 <철의 시대>를 권하시더라구요~ 저도 읽어보고 싶어서 보관해두었구요.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
 
사악한 책, 모비 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의 모비 읽기와 쓰기에 관한 보고서

- 사악한 , 모비 (2017)




《사악한 책, 모비 원제는 모비 딕을 읽는 이유. 벽돌같은 소설 권을 여러 읽고, 소설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 글을 쓰고, 심지어 소설의 배경이 장소에서 여생을 살고 있는 덕후 작가가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한 답으로 나아간 과정이 이 책에 담겨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책은 허먼 멜빌이 불후의 고전 모비 어떻게 쓰여졌는지 생생한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작가 멜빌 주변의 인물과 기록들(편지들) 참고하고 이를 적절하게 배치해서 창작 과정의 단면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있도록 해주는 인상적인 글쓰기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읽기와 쓰기라는 키워드로 읽어보려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허먼 멜빌이 모비 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엿볼 있는 그의 읽기와 쓰기 대해, 후대의 독자로서 우리가 소설을 어떻게 읽을 있을지, 독자이기도 후대의 작가들이 모비 쓰기 어떻게 바라보았을지를 구분해서 살펴보아도 흥미로울 같다.


      앞에서 책의 저자를 덕후라고 표현했는데, 이건 멜빌의 소설에 대해 진지하고 깊은 이해를 갖추고 있는 작가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기도 하다. 책의 목적은 후대의 독자가 모비 읽게하는 인데, 실제로는 작가 자신이 책을 읽는 이유를 살펴봄으로써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다. 자신이 책을 얼마나 아끼며, 어떻게 읽었는지를 책의 독자들과 나눔으로써 말이다.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4년에 이미 모비 문장을 읽는 순간 낚여버렸다고 고백하는 대목이었다.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권을 읽었던 나와는 매우 다른 행복한 시간을 가졌던 사람 같다. 이렇게 학창 시절에 인생책 만나는 일은 이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같다. 최근에 출간된 평론가이자 작가 수전 손택의 평전 수전 손택에는 그녀가 전미도서상 수상할 촬영된 사진이 나온다 사진에서 손택과 나란히 서있는 너새니얼 필브릭의 모습을 발견할 있다전미도서상 수전 손택 옆이라니! 게다가 사진에서 필브릭이 들고 있는 책이 바로 모비 모티프가  에식스호 사건 다룬 논픽션 바다의 가운데서 In the Heart of the Sea이다.



허먼 멜빌의 모비 》창작 과정 읽기와 쓰기   


     《사악한 책, 모비 읽고나면, 훗날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미국의 성서라고 불리게 모비 쓰는데 가장 영향을 사람이 주홍 글씨 작가 너새니얼 호손임을 있다. 물론 필브릭은 호손이 멜빌에게 문학적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감정적 영감의 원천”(52) 되어 주었다고 영향을 보다 세밀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유를 찾아보려면, 아마도 멜빌이 모비 초고를 완성한 것으로 보이는 1850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저자가 언급하는 멜빌의 창작 단계에서  시기의 모비 초고에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기도 에이해브 선장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성실한 인물로 묘사되는 일등항해사 스타벅 같은 인물만으로 고래와 대결하는 이야기를 이끌어가기에는 뭔가 부족했다고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특히 멜빌은 다섯살 연상인 호손을 1850 8월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때는 마침 역사상 마녀사냥으로 유명했던 세일럼이라는 도시 출신 너새니얼 호손이 주홍 글씨 완성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였다. 멜빌은 그의 작품을 읽고, 작품에 대한 비평을 다음 셰익스피어에 눈길을 돌린 것이 우리가 지금 읽게 되는 모비  빚어내는 방향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게 바로 하나의 우연이자 신의 한수 아니었을까. 물론 멜빌이 젊은 시절에 상선의 선원, 교사, 포경선 선원, 해군으로 일한 경험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저자 필브릭은 모비 진정한 시작점 1849 2월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즈음 멜빌이 7권으로 나온 활자판 셰익스피어 희곡집을 구했기 때문이다. 모비 원문을 참고해보면,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표현이 많이 보인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멜빌에 대한 호손의 영향이 문학적이기보다 감정적인이유는 아마 호손의 비밀스럽고 우울한 무언가를,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읽을 있는 운명적인 우울감을 읽어내고 창작에 중요하게 적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모비 초고처럼 에이해브 등장하지 않는 모비 이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필브릭의 책에는 멜빌이 창작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책과 논문 등의 읽을 거리를 수집하고 닥치는 대로 읽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모비 본문 이전에 나오는 인용문 발췌록 봐도 멜빌이 각종 고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최신 이론인 진화론에 관한 초창기 버전의 이론까지도 섭렵하고 있었음을 알게된다. 셰익스피어, 밀턴, 베르길리우스 등의 책을 게걸스럽게 읽었던 , 구입했던 셰익스피어 희곡집의 뒤쪽 면지에, 에식스호의 생존자 오언 체이스의 기록이 담긴 도서의 뒤에 상당한 메모를 하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두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따라서 웅장한 책을 쓰려면 웅장한 주제를 골라야 한다”(71)라는 이슈메일의 선언처럼, 멜빌은 거대한 카샬로 블랑슈(흰색 향유고래)’ 이야기를 쓰기 위한 준비과정과 노력이 실로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음은 멜빌의 집필과정, 그러니까 그의 글쓰기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모비 젊은 시절 멜빌 자신의 경험이 토대가 작품이다. 하지만 수많은 책을 읽은 만큼, 책들로부터 글쓰기에 관한 실질적인 영감을 얻은 것도 물론이다. “멜빌에게 글쓰기 과정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의 글을 취합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일이기도 했다.”(26) 호손이 멜빌에게 (감정적)영향을 주었다는 필브릭의 견해는 아마도 멜빌이 호손의 작품을 읽고 비평을 것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폭포수처럼 자기 생각을 쏟아놓는멜빌과 달리 호손은 말없이 온화하게 받아들여주고 침묵으로 일관하는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호손은 솜씨좋게 글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이었지만한편으로 상당히 과묵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던 같다. 멜빌은 호손의 정신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호손의 작품을 면밀히 읽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간파했을 것같다. 호손의 작품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고나서야 멜빌은 1 남짓 전에 사두었던 셰익스피어 희곡집에 다시 관심을 돌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후에라야 모비 에는 어둠의 , 파멸로 나아가는인물 에이해브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필브릭은 이렇게 표현했다. “호손은 멜빌이 셰익스피어의 뒤를 따라 어둠 속으로 빠져들도록 추동하는 인물이었다.”(52) 그러므로 멜빌의 글쓰기, 특히 모비 세상에 나오게 되기 까지 호손(감정적 영향) 셰익스피어(문학적 영향)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평가할 있겠다.


     글쓰기 자체가 하나의 노동이라는 것은 여러 작가들이 이미 언급한 있다. 특히 광대한 대양을 배경으로 거대한 리바이어던의 이야기를 쓰고 말겠다는 야심을 지녔던 멜빌에게 글쓰기는 지독한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는 과정이었. 그런 이유로 필브릭은 《사악한 책, 모비 에서 멜빌이 나중에 사악한 예술이라고 부른 것을 쏟아붓는 과정은 정신을 소모하고 갉아먹는 경험’(55)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공감하고 있다.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글쓰기 무엇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넣는과정에 다름 아니다. 다만 멜빌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일은 집필 과정에서 눈을 크게 상하게 만든 같다. 눈을 지나치게 혹사한 나머지 어떤 날에는 눈을 거의 감다 시피한 채로 글을 썼다고도 한다그러니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책에 대한 혹평을 하기 전에 작가가 겪었을 법한 창작의 고통을 떠올려야 같다. 앞으로는 책을 읽을 저자의 보이지 않는 노력을 번쯤 생각해볼 것이다.


     호손과 셰익스피어를 재발견 이후, 멜빌은 달라진 눈으로 초고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소설의 대성공 이후 멜빌은 집필에 전념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가장의 역할로부터 벗어나기 힘들었던 같다. 어머니와 부인, 자녀를 건사해야하는, 글쓰는 가장으로서 느낄법한 고충을 충분히 상상해볼 있다. 멜빌은 호손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편지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 일이 계속 저를 훼방합니다. 글을 쓰는 필요한 차분하고 느긋하고 조용하고 풀이 자라는 환경이 저에게는 도무지 주어지지 않네요.”(112) 지금도 그렇지만 전업으로 글을 쓰는 일이란 20대에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평생 여행과 공부에 몰두 있었던 데카르트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다수의 작가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였고, 지금도 그렇다. 모비 이란 엄청난 작업을 작가는 일이 결코 완성되지 않을 임을 약간의 좌절감과 더불어 말하기도 한다. 멜빌은 호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책도 초고일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입니다”(72)라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필브릭의 책을 통해 알게 된다.



독자의 모비 》읽기 그리고 쓴다는 것   


     필브릭의 책에서 우리는 관찰자로 모비 탄생과정을 생생하게 엿볼 있었다. 저자는 무엇보다 독자가 멜빌의 소설을 읽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의 모비 읽기 철학을 전한다. “나는 독자들에게 모비 읽어서는 된다고 말하고 싶다. 책을 만들어낸 개인적 예술의 힘을 이해하려면 편지들을 읽어야 한다.”(111) 여기서 편지들은 멜빌이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을 말하는데, 특히 너새니얼 호손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호손은 모비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 멜빌의 서간집이 나와있다면,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사실 모비 읽어나가는 일도 벅찬 일인데, ‘서간집이 웬 말이냐라고 반문할 있겠다. 하지만 서간집은 작가 멜빌과 그의 작품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뿐만 아니라, 주홍 글씨 과묵하고 은둔자적인 작가 호손과  작품을 파악하는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것이다.  


     필브릭은 자신의 의욕 다소 누그러뜨리면서 일반 독자들에게 소설을 읽을 의욕을 북돋아주기 위한 당부 말도 잊지 않는다. “ 문장이라도, 구절이라도 좋다. 중요한 것은, 소설에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하고, 읽으면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뭔가 긴박하고 긴요한 말이 있어 불쑥불쑥 등장하는 유령들처럼, 책을 쓰는 동안 멜빌의 몸을 타고 흘렀던 다양한 목소리에 이입해 글을 느끼는 것이다.”(18) 실제로 이해는 되지 않지만, 멜빌이 쓴 원문을 소리내어 읽으면 시를 읽는 것처럼 리듬감을 느낄 . 소리를 들어보고 폭포수처럼 자기의 생각을 꺼내놓는멜빌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모든 부분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군데에서 마치 랩을 듣는 같은 리듬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멜빌의 문장을 읽던 순간은 제한적일지 몰라도 문자의 아름다움이 내용뿐만아니라 짜임새와 소리를 통해서도 전달될 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독자에게 가지 당부를 하는데, 그것은 고래가 단지 상징 아니라 진짜라는 점이다. 그래서 백과사전이나 다른 글에서 흔히 말하듯 고래가 무얼 상징하는지 고민하는 일을 그만두기 바란다’(114)라고까지 일러주는 것이다. 고래는 실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기로 하자.


     그렇다면 독자이기도 다른 작가가들은 멜빌이란 작가 혹은 모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필브릭은 윌리엄 포크너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언급한다. 포크너는 모비 자기가 썼더라면 하는 생각이 드는 하나의 작품’(15)이라는 아쉬움 섞인 극찬을 적이 있다. 허먼 멜빌이라는 작가는 말년이 다가오던 헤밍웨이에게 넘어서고 싶은 작가 자리잡았던 모양이다. 이외에도 다른 유명 작가들 상당수는 멜빌과 모비 남다른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의 평전그리고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에도 색스가 청년 시절 자신을 사로잡은 소설로 모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아가 셰익스피어와 모비 만으로도 족하다’(해당책, 237)라고 까지 언급했던 것이다.  신경과의사에게 멜빌과 셰익스피어가 차지하는 비중을 충분히 짐작할 있다. 허먼 멜빌에게는 셰익스피어와 호손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했던 셈이다.


     지금까지 멜빌과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작가의 모비 읽기 그리고 쓰기에 관한 생각들을 따라가 보았다. 창작의 고통, 눈을 비롯한 육체의 고통, 가장으로서의 역할 현실적인 고충, 아내와의 불화 등등을 겪으면서도 멜빌은 소설과 시를 쓰고, 끊임없이 읽기를 계속해 나갔음을 있었다.   너새니얼 필브릭은 멜빌과 호손과의 관계, 그리고 멜빌이 주변 지인과 주고 받은 편지들을 곁들여 모비 세상에 나오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한편 필브릭은 모비 에서 터번을 마닐라 출신 주술가 페달라의 역할을 깨달았다고 시인했다. 에이해브를 파멸로 이끄는 동인으로서, 또 ‘부추기고 다그치는존재로서 페달라의 중요성에 주목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구도가 멜빌과 호손사이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에이해브에게 악으로 향하도록 추동하는 페달라가 있었다면, 멜빌에게는 우울과 암흑의 심연을 보여준 호손이 있었던 것이다. 필브릭은  호손의 불가해한 본질이 모비 사방에 존재한다”(53)라고 언급하며 멜빌의 작품에 대한 호손의 전방위적인 영향력에 주목하고 있다. 말년에 뉴욕 26번가의 책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방에서 세상을 때까지 읽고 쓰는 습관을 이어나갔을 멜빌의 그림자를 상상해본다.      


그렇다면 이제 가지 궁금한 점이 남아 있다. 바로 책의 원제, ‘모비 딕을 읽는 이유 대한 저자 너새니얼 필브릭의 답변이다. 지금까지 멜빌의 창작과정에서 멜빌의 읽기와 쓰기 과정, 그리고 독자로서의 읽기와 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정작 저자의 생각에는 주목하지 않았. 이유에 대한 실마리는 책에서 찾아보길 바란다.  





 

"《모비 딕》도 태평양으로 고래를 잡으러 떠난 항해에 대한 소설이자 또한 남북전쟁을 향해 광분하듯 치닫는 미국, 그리고 그 이상을 말하는 소설이다." - P11

"이 소설은,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이 그렇듯이 내 안에서 점점 자라난다. (...) 미국 역사와 문화 그리고 서양 문학의 본질이 담겨 있는 책이다." - P17

"한 문장이라도, 한 구절이라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에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하고, 읽으면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뭔가 긴박하고 긴요한 할 말이 있어 불쑥불쑥 등장하는 유령들처럼, 책을 쓰는 동안 멜빌의 몸을 타고 흘렀던 다양한 목소리에 이입해 글을 느끼는 것이다." - P18

"멜빌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지만, 다른 작가들의 글을 엄청나게 훔쳐오기도 했다." - P26

"멜빌은 호손에 대해 글을 쓰면서 셰익스피어를 이용해 에이해브를 위한 초석을 닦은 셈이다." - P51

"호손은 멜빌에게 문학적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감정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 P52

"에이해브 선장이 이렇듯 강력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세상을 상징적으로 바라보는 에이해브에게서 멜빌이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 P54

"《모비 딕》을 읽는다는 것은 포경선에서 여러 해 동안 강렬한 경험을 하고, 자기가 본 것 전부를 마음에 새기고, 7년쯤 더 지나 셰익스피어, 호손, 성서 등등을 읽고 흡수한 다음, 젊은 시절의 경험을 앞날에 공포할 목소리와 방식을 찾아낸 작가를 마주하는 일이다." - P77

"이 일 저 일이 계속 저를 훼방합니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차분하고 느긋하고 조용하고 풀이 자라는 환경이 저에게는 도무지 주어지지 않네요." - P112

"흰 고래는 상징이 아니다. 나나 여러분 같은 진짜다. (...) 그러니까 흰 고래가 무얼 상징하는지 고민하는 일은 그만두기 바란다." - P114

"멜빌은 늘 그러듯 신의 섭리와 미래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 그뿐 아니라 인간의 이해 범위 밖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논하며 자기는 ‘소멸될 결심을 거의 굳혔다‘고 알렸다. (...) 그가 줄곧 고집스럽게(나와 알고 지낸 이래로 늘 그랬고 아마 한참 전부터 그러했을 것이다) 그 황무지 위를 헤매려고 하는 게 이상하다. 우리가 앉아 있는 모래 언덕 만큼이나 음울하고 단조로운 곳을. 멜빌은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 편하게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너무 정직하고 용감해서 어느 한쪽이든 버릴 수가 없다. 그에게 종교가 있었다면 그는 최고로 신심 깊고 경건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고결하고 고귀한 사람이다. 우리 중 누구보다도 불멸을 누릴 자격이 있다."
- 영국에서 멜빌을 만난 호손이 남긴 일기 기록에서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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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아 吾友我 : 나는 나를 벗 삼는다 - 애쓰다 지친 나를 일으키는 고전 마음공부 오우아 吾友我
박수밀 지음 / 메가스터디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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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꼭 드는 날

<오우아(吳友我)>를 다시 읽으며

- 박수밀 글 | [메가스터디북스]

 


코로나19가 급속하게 퍼지던 지난 여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본다. 책 미치광이라는 의미의 간서치로 불리는 이덕무 선생의 단상을 모아놓은 책이다. ‘나는 나를 벗 삼는다는 의미의 <오우아(吳友我)>이덕무 선생은 호를 여러 개 갖고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오우아거사(吳友我居)’라고 한다. 당대의 신분적 제약으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지독히 가난한 환경에서 지내야 했다. 그 삶의 고단함은 지금 내가 속한 환경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일 테다. 그에게도 친분을 나누던 박지원, 홍대용 등 선배, 친구가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고난은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붕이 뚫려 있고 기둥마저 기울어가는 초가집 단간 방에서 한겨울 엄습해오는 외풍을 막기 위해 책을 뜯어 막고, 이 책들로 이불삼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슬픔이 닥치면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해서 그저 한 치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고, 살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진다.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중에서 재인용(43)


그럼에도 이덕무는 다행히두 눈이 있고, 책을 읽을 수 있어 절망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고요를 찾을 수 있었노라고 말한다.


나 역시 나의 부족함 때문에, 나와 가족이 어려운 환경에 놓이기도 한 것 같아 그저 막막하고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나마 책을 읽곤 하는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 때론 내가 더 열심히 살지 않아서일까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무기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의 고민과 죄책감과 미안함, 때론 땅 깊숙이 꺼질 것 같은 좌절감을 알 길이 없다. 그저 나의 좋은 환경만을 보거나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를 보라고 할 뿐. 이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실없는 소리만 하는 별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문해본다. 나는 타인의 삶을 제대로 공감한 적이 있는지, 혹은 노력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지 말이다.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내 삶을 지금까지 되돌아보면 좋은 가족과 친구, 지인들에 둘러싸여 유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언제나 나는 이 세상에 홀로 던져져서 나의 힘으로 생존해야만 한다는 두려움과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엔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말이다. 무엇이 두려워서 타인의 친절을 거부하거나,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가장으로서 막막한 심정을 이덕무의 글에서 만난다.

 


복숭아 나무아래서 붓가는 대로 쓰다


다시 <오우아>를 뒤적이다가 또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한다. 이덕무 선생이 아이의 손을 잡고 복숭아 나무 아래로 갔다. 나뭇잎을 따고, 아이와 함께 나뭇잎에 붓으로 글씨를 썼다. 마음이 가는대로. 이덕무 선생의 생각이 이어진다. ‘형편이 좋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누구나 근심 걱정은 있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일 년 아니 한 달에 마음에 딱 맞는 날이 얼마나 될까?

-이덕무 <만제정도(謾題庭桃)>중에서 재인용(44)


지금으로부터 358년 전인 1762621일의 기록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나뭇잎에 마음 가는 대로 쓴 글자들을 보며 미소 짓는 두 부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가난, 가족들의 병치레에 근심이 끊이질 않았을 그의 서글픔을 느끼다가도, 이 찰나의 행복감을 잊지 않은 선생의 마음을 읽어본다. <오우아>의 저자가 한 상상대로 이덕무는 아이와 저물녘 마루에 앉아 순간의 평화로움을 즐겼을 것이다. 문득 사람이 일생을 마칠 때, 이런 일상의 추억 하나 남아 있지 않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소똥'을 아끼다


이덕무 선생의 고난과 근심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시하고 포장하는 나의 모습도 발견한다. 나 자신을 너무나 오랫동안 불신해왔던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나를 드러내고, 나의 견해를, 합리적인 근거에 의해 도출된 견해를 단정해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 것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의 두려움, 나의 무지를 제대로 마주보고 들여다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의 감정을 느끼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감정이 과연 어떤 것인지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는 일을 말한다. 바쁜 사회생활에 매몰되어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이런 나의 두려움, 무지, 나의 결핍을 제대로 인식해보고 나의 입장을 정하는 것, 나름의 답을 구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을 줄곧 회피해온 것은 아닐까. 이 작업은 누구나 홀로 해내야 하는 것이지만, 이 과제의 양상이 나만의 것임이 아니라는 점에 약간의 위안을 얻기도 한다


다만 내가 책을 읽는 일은 나의 결핍을 자각하고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는지 자문해본다. 책을 통해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만의 문제에 대한 정답이 책에 쓰여 있을 리 없다. 다만 수많은 이들이 남긴 사유의 기록만이 내 앞에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기록만은 아니고, 개별적인 의식의 수준을 넘어서 공유되는 보다 보편적인 의식이 있을 것 같다. 선배들이 지나온 과정을 통해 내가 내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난 길을 갈지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이덕무 선생이 당신의 호를 오우아거사로 한 것이 어떤 어려움과 고난에도 자신을 긍정하고 아끼겠다는 다짐과도 같이 느껴진다.



소똥구리는 소똥 경단을 스스로 아끼기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중 재인용(189)


이덕무의 <선귤당농도>는 그가 20대 중반에 쓴 산문집이라고 한다. ‘선귤당또한 이덕무 선생의 호다. ‘매미와 귤이 어우러진 집에서 활짝 웃는 이덕무 선생을 상상해본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아름다운 문장들로 씌여 있다. 오늘 무언가에 근심과 서글픔을 느꼈다면,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발견하고, 나에게 주어진 나만의 소똥이 있을 것이다. ‘나의 소똥을 아끼는 것. 이게 오늘 나에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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