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444)

 

 

인간-되기는 동사다: 대체 불가능한 인간관계의 형이상학

 


*탁월하게 생각하도록 된 이런 두뇌도 장래에는 한 사상가가 만들어낼 게다.” 거의 200년 전, 독일의 한 문인은 이 문장을 후대에 남겼다. 그는 훗날 인공지능 기술과 생명을 합성하는 단계에 이른 현대의 과학기술을 상상이나 했을까.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처음 발표한 클라라와 태양을 읽으며, 문득 괴테가 쓴 이 문장을 떠올렸다. 이시구로는 인공지능로봇을 화자로 설정하고, 이 로봇의 생각들을 상상하며, 과학기술과 공존하는 인간 세상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인공지능로봇 AF(Artificial Friend)인 클라라는 아이들을 돌보는 로봇이다. 클라라가 다른 AF와 다른 점은,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하다는 점이다. 마침내 그녀는 조시라는 소녀에게 선택받고 인간과 함께 지내며 인간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배워나간다. 조시는 유전자 편집기술을 통해 태어났지만 건강이 좋지 못하다. 조시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족들은 불안해한다. 이에 클라라는 조시를 돌보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만일의 경우 조시가 될 것을 부탁받는다. 클라라가 마주하는 혼란스러움은 이런 국면에서 비롯된다.

 

소설을 읽는 동안 줄곧 붙들었던 물음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였다. AF와 인간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할까? AF와 인간 모두 어떤 대상에 대해 의혹을 품고 회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구성원들과 반목하고 충돌하며 관습에 도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실천하는 의지에 기초하여 행위를 끌어내는 특성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소설은 내게 상황을 제시하고 질문을 던질 뿐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되기의 과정이 결코 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시가 사망할 것에 대비해 새로운 조시를 제작하는 카팔디는 유물론자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고유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이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클라라는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사랑을 느끼면서 자신이 조시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녀에게 조시가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욕구와 충동, 감정 등을 동일하게 갖추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시의 가족이나 그녀를 아는 모든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고, 기억을 복원해야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클라라의 말에 따르면, ‘아주 특별한 무언가는 조시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442) 있었다. 그러므로 이 인간-되기는 사회 속에서 구성원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함께 변화해가는, 비가역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만이 고유하고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가 그 자체로 고유하고 특별하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형성하기에 그 자체로 고유한 것이다. 이 특별함은 비교불가능하다.

 

클라라가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면서 혼란스러워 했던 인간의 특징이 바로 인간관계의 복잡성이다. 유전자 편집을 거쳐 태어난 아이들의 모임에서 조시가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한 클라라는 인간의 다양한 페르소나에 혼란스러워 했다. 규칙적인 징후를 찾던 클라라에게 인간의 복잡한 페르소나는 일관성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이렇듯 클라라와 태양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무미건조해지는 세계에서 인간-AF사이의 새로운 관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클라라가 헛간에서 해에게 간절히 기도하던 대목이었다. 헛간에 해의 무늬가 머물 면, 클라라에게 이곳은 해의 관대함이 드러나는 성스러운 장소가 된다. 해의 무늬가 서서히 헛간에서 물러나며 다른 모습으로 반사하고 희미해져가는 장면이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와 교차하며 뭉클한 감동을 준다. 이 순간이 바로 클라라가 인간의 사랑을 이해하고 이를 구현한 순간은 아니었을까. 클라라와 태양인간-되기라는 물음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 대해 묻는 한 편의 철학 우화다.

 

 

 

*이 문장은 전영애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파우스트 [도서출판 길](2019)에서 인용함.  

**ver1.3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6-04 2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클라라 리뷰중 단연 초란공님 리뷰!
반짝 반짝 빛났는데
제 예감 적중 함요 ㅎㅎ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초란공 2021-06-05 10:31   좋아요 2 | URL
scott님의 과찬에 항상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그레이스 2021-06-04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1-06-05 10:29   좋아요 2 | URL
감솨합니다~ 2관왕 그레이스님~^^

초딩 2021-06-04 2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참 .. 정말 이정도 되면 이건 이제 읽어야할 판이네요 ^^ ㅎㅎㅎ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초란공 2021-06-05 10:38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초딩님도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즐건 주말 보내시기를~
 
초판본 피노키오 - 191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카를로 콜로디 지음, 엔리코 마잔티 그림, 이시연 옮김 / 더스토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판본 피노키오(Pinocchio)

카를로 콜로디(Carlo Collodi) 지음 | 엔리코 마잔티(Enrico Mazzanti) 그림

이시연 옮김 | [더스토리]

 

 

성인이 되어 읽는 피노키오


 

어렸을 때 읽던 동화책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면 어떤 점이 다르게 느껴질까? 초판본 피노키오를 읽으면서 떠올렸던 의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 한번은 읽어보았을 이 책의 내용을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오래전에 읽었던 이야기에서 구체적인 사항들을 기억하여 비교할 수는 없지만, 거짓말을 말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잘 알려진 모티브 외에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내용도 여러 가지 보인다.


우선 저자인 카를로 콜로디의 프로필을 간단히 살펴본다. 동생과 함께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참가하고 풍자적인 정기 간행물을 만들었다는 이력에 눈길이 간다. 그리고 신문 기자로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어린 독자를 주 대상으로 연재한 피노키오같은 책을 여러 권 발표했다. 간단히 정리된 콜로디의 행보를 보면서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떠올렸다. 카잔차키스 역시 정치운동에 깊이 참여했고, 정치적인 성격의 정기간행물을 만들었으며, 유럽 전역을 다니며 기자로 활발한 언론인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 카잔차키스는 젊은 독자를 위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소설을 연재하여 책으로 펴낸바 있다. 두 작가의 행보를 볼 때 이들은 당대의 지성인으로서 여러 모로 닮은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문체 모두 때론 다소 투박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작품이 주는 생명력, 혹은 힘이 느껴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인이 되어 읽은 피노키오에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때로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이어지는 점이 새삼스럽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어린 독자들을 일깨워주려는 저자의 소박한 촌평 또한 정감이 간다. 간결한 이야기 속에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통찰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본다. 이를테면 피노키오가 자신의 금화를 훔쳐간 강도(고양이와 여우)를 고소하기 위해 판사에게 간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동화는 가식적이고 겉치레를 중시하는 기성사회를 이렇게 풍자한다. “판사는 큰 원숭이였습니다. 늙은 큰 원숭이는 그의 많은 나이와 하얀 수염, 특별히 그의 유리 없는 금테 안경 때문에 존경받는 인물 같았어요.”(114) ‘벌거벗은 임금님이야기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어린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언어유희의 장면들도 나온다. 예를 들면 사기꾼 고양이와 여우가 빨간 가재여관에서 고양이는 위장이 아파서 빨간 숭어 서른다섯 마리와 파르마산 치즈로 요리한 소고기 요리를 사 인분밖에 먹지 못했다고 하는 대목이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의 눈과 귀를 붙들만한 재미있는 상황이다. 또 피노키오가 두 사기꾼에게 속아 죽을 고비에 처해 있을 때, 요정이 불러온 돌팔이 의사들이 피노키오를 진찰하고 진단을 내리는 장면이 있다. 선생님들의 소견이 알고 싶다는 요정의 말에, 이렇게 대답하는 식이다. “제 소견으로는 꼭두각시 인형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죽은 게 아니라면 아마도 살아 있다는 확실한 징후겠지요!”(93) 이 대목은 풍자적인 대목이기도 하다. 어린 독자들의 시선에서 이상하게 보일 것이 확신하지만 어른들은 무시하는 사회의 부조리함과 모순을 조롱한다.


제페토 할아버지가 피노키오를 만든 직후부터, 피노키오는 뭐든 자기 멋대로 하는 존재다. 아직 충분한 교육과 분별력을 갖지 않아 줏대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유혹과 감언이설에 쉽게 영향을 받아 문제를 일으키고, 고생을 겪는 단초가 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이들이 악하기만 하거나 애초에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보다 유연한 시선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작품 전반에 고려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보답을 기대하고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 독자들은 친절을 베풀 수 있을 때 베푼다면 언젠간 그와 같은 친절을 받을 수 있다”(243)는 귀뚜라미의 지혜를 자연스럽게 접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서양 문화는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데, 피노키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적 사랑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저자가 이야기 중간에 개입하여 전달하는 교훈들은 다분히 기독교적인 윤리관을 반영하는 내용이 많다. ‘훔친 돈은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거나 부모와 가족을 공경하고 존중하라는 언급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또 제페토 할아버지와 피노키오가 거대한 상어의 뱃속에서 만나는 장면도 있다. 두 사람이 만나는 상어 뱃속 장면은 성경의 요나서에서 영향을 받았음직하다. 성경에서 요나는 하느님의 눈을 피해 배를 타고 세상의 끝으로 도망치려한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피노키오 역시 할아버지로부터 달아나든, 주변 인물들에 의해 한눈을 팔아 새로운 모험으로 이어지든, 언제나 파란 머리 요정의 손길이 피노키오의 주변에 언제나 머물고 있다. 이렇게 신과 같은 요정의 보살핌은 피노키오가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피노키오가 겪는 수많은 모험과 고통은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에 등장하는 각각의 에피소드는 배움이 주가 되는 성장의 시기에 성실하고 부지런해질 것을 요구한다. 나아가 각자 일을 가지고 사회활동에 참여하며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는 여러 조건들을 제시한다. 물론 지금의 가치관에 잘 어울리지 않는 가치관일 수 있지만, 동화가 쓰인 시간적, 공간적 배경 속에서 정직하고 책임감 있는 시민이 되는 덕목을 일러주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피노키오에서 보편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피노키오가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특징이다. 하지만 책에는 거짓말을 하면 바로 알 수 있는 방법에는 길어지는 코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다리가 짧아지는현상이다. 이 책에는 피노키오의 코가 길어지는 종류(?)의 거짓말만 등장한다. 다리가 짧아지는 유형의 거짓말이 어떤 것인지는 이야기에 나와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면 다리가 짧아지는 것과 코가 길어지는 것 중 어느 것을 더 싫어할까? 갑자기 어린 독자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피노키오는 대략 140년 전에 쓰인 동화다. 단테와 보카치오와 같은 문인들을 배출한 피렌체 출신의 작가에 의해 바로 이 지역에서 발표된 작품이다. 원래 성인을 위한 도서로 기획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피노키오가 작품 속에서 겪는 모험에는 사회의 모순과 이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반영되어 있다. 많은 동화가 그렇듯이 다소 잔인해 보이는 장면도 등장한다. 물론 나중에 아동을 위한 도서로 용도 변경(?)이 이루어지면서 호기심을 자아내는 모험적인 요소와 교훈적인 요소가 균형 있게 포함되었을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이 동화는 당시 이탈리아인들이 공유하던 세계관과 윤리적 가치관, 집단의 무의식적 측면도 읽어낼 수 있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무형의 가치들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대 사람들인 우리가 여전히 이런 고전 동화를 읽는 이유는 뭘까.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대한 앎을 확장하는 활동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의 주요 독자는 아동일 테지만, 성인이 되어 피노키오를 읽는다는 것은 아동의 눈높이를 이해하고, 우리의 과거와 만나며,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재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오찬영 지음 / 북드라망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오찬영 지음 | [북드라망]

 



문학이 철학이 되다’: 가벼운 삶을 발견하는 고전 활용법


 

당신은 삶을 즐거운 우주적 놀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는가?”(134) 저자의 이 돌연한 물음에 나는 무심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이 놀이와 같던 적이 있던가? 나의 삶이 극적으로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놀이 같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내 삶이 놀이 같던 시절은 어릴 때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내가 느끼는 삶의 무거움은 사회의 관습과 규칙이 규정한 삶의 조건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삶이 놀이처럼 가벼울 까닭이 없었다.


저자 오찬영의 책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이하 항해로)은 미국의 고전 문학 모비딕을 면밀히 읽고, 다시 쓰는 과정을 통해 자기 탐구의 방향을 보여준 책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개인적인 신앙 해체의 경험을 한 저자는 읽고 쓰는 공부를 통해 철학을 만나고, 자신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 책 항해로모비딕의 두 주요 등장인물인 에이해브와 이슈메일을 삶에 대한 태도라는 관점에서 비교하며 철학하기를 시도한다. 저자는 작품의 배경인 당대 미국 사회의 모순적인 면면을 마주하지만, 그의 공부는 문학 작품의 분석에서 끝나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시선을 자신에게 수렴하고, 자신을 관통하도록 이끈다.


저자는 모비딕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하나는 기독교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다. 이 키워드는 허먼 멜빌의 미국 사회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미국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기독교라는 키워드를 보면, 저자는 성경이 부여한 정복의 자연관을 미국의 가치관으로 읽어낸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투영된 보편적 코드를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멜빌이 자신의 웅장한 책에서 절대적 기표로 고정되어 있던 성경적 질서를 자신만의 기의로 변용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한편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는 멜빌의 시대에 끓어 넘치기 직전의 인종차별, 노예 문제와 연결 지을 수 있다. 모비딕 초반에 등장하는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우정, 땅딸막한 삼등항해사 플래스크와 거구의 흑인 다구에 관한 묘사(“조그만 백인을 받쳐 든 위풍당당한 흑인!”)는 백인 사회의 편견과 계급의 존재를 드러낸다. 멜빌은 모순투성이의 미국을 이미 읽어내고 작품에 담아냈다. 170여 년 전의 미국 사회에서 이 소설이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껄끄럽게 다가왔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저자가 주목한 기독교와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는 다시 모비 딕이라는 상징으로 수렴된다. 소설에서 이 거대한 흰 고래는 남성성의 끝을 보여준다. 이는 백인 남성이 구축해 놓은 미국사회로도 읽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이 공고한 백인 남성의 질서에 도전하는 이는 누구든 살아남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모비 딕의 비밀을 감히 요구하며 도전한 인물이 바로 에이해브였다. 그 결과, 그는 여전히 감춰진 고래의 비밀과 함께 심연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이 지점에서 에이해브가 미국사회의 모순과 광기를 드러내주는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저자 오찬영이 완전히 마초이즘의 관점에서 쓰인 이 소설을, 그리고 파멸하는 에이해브를 철학하기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등장인물의 호감 여부를 떠나 저자의 철학하기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지점이다. 저자는 미국사회를 읽는 매우 중요한 열쇠가 모비딕에 담겨 있음을 탁월하게 전달한다. 이 작업은 미국사회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한국사회의 모습도 읽어낼 보편성으로, 그리고 나에 대한 앎으로도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도입부에서 저자는 문학을 통해 자기 탐구를 향한 철학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특히 두려움을 자양분으로 삼곤 하던 신앙이 자기 안에서 해체된 경험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지점이 바로 문학이 마침내 철학이 되는 지점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알려고 하는 의지에 주목한다. 그가 제안하는 앎의 항해로 나아가기는 지식까지 물신화되어버린 현대 사회에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저항이자 삶의 주체로서의 의무가 된다.


저자는 모비딕 다시쓰기를 통해 우리의 삶을 우주적 놀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내 삶에도 무거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뻗어나가며, 다른 존재와 접속하고 교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나의 결핍을 자각한 자리는 철학이 시작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이라면, 누구든지 보다 가벼워져 우주적 놀이가 된 자신의 삶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름의 배움과 공부가 그 신체를 통과하여 축적되지 않는 이상, 그 존재성은 절대 유지되지 않는다." - P18

"그 동안의 삶의 방식에 어떻게 아니오를 외치고 반격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로 철학아닐까?" - P49

"어린 고전이긴 하지만 <모비 딕>을 통해 시대를 들여다본다는 건 역사적 개념으로 분칠된 미국을 한꺼풀 벗겨 낸 뒤 그 안의 모순, 갈등, 위선이 우글우글 들끊는 괴이한 미국의 면면을 마주한다는 뜻이다." - P73

"미국인들은 이스라엘 히브리 민족의 선민 의식을 그대로 물려받은, 야훼의 나라다. (...)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모비 딕>에서 빠뜨릴 수 없는 키워드다." - P75

"허먼 멜빌은 좀비나 소행성 같은 설정 없이도 바다 위의 포경선 한 척에 미국인들의 종말주의적 신체를 완벽히 구현해 냈다." - P98

"로고스란 자신의 현장에서 배움의 스펙트럼, 앎의 그물망에 끊임없이 접속하고 연결되는 것이고, 이는 타나토스와는 다른 양태의 에로스의 가능성이다." - P110

"자연에 대한 관찰과 앎은 결코 인간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 앎이 확장될수록, 역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 P124

"결국 삶과 운명에 대한 질문은 결국 존재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 (...) <모비 딕>에서 발견한 것은 두 가지의 존재론적 인식이다. 열정과 광기의 타나토스, 웃음과 일상의 로고스." - P138

"<모비 딕> 한 권만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눈이 바뀌어 버린다." - P145

"모든 과정은 반복되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은 반복으로 계속해서 오고 간다." - P163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지, 바로 코앞에 두고 눈 감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 과연 무엇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 이 알려고 하는 의지만이 무지로 인해 마비된 좀비로부터 당신의 생명력을 흔들어 깨울 것이고, 삶과 죽음을 비롯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과 운명의 흐름들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기예를 알려줄 테니까." - P1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작과비평

계간 창작과비평191(봄호)

대화: ‘청년, 한국사회를 말하다'를 읽고

 


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묻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돈과 관련 된 모든 것이 화두가 되었다. 뉴스를 보면 주식과 부동산 이야기, 그리고 비트코인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인 듯하다. 대학생들과 젊은 직장인들의 주요 화제는 주식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어느 유명 연예인이 일반인들의 주식 모임에 가서 주식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본 적도 있다. 최근에 잠시 들린 어느 책방에서는 직원들이 주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듣게 되었다. 마치 내가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새로운 문제는 사회의 분위기가 주식을 하지 않거나, 내 집 마련에 굼떠 보이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다. 주식에 대한 대화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사람은 마치 바보가 된 느낌을 받기 쉽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청년 활동가의 대담에서도 지적된 문제점이다.

 

지인 중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소득 수준이 대체로 좋은 지역의 아이 중에는 부모가 자신의 이름 앞으로 국내 대기업이나 해외 유명 스마트폰 회사의 주식을 사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대학교에는 주식투자를 연구하는 소모임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대담 참여자들의 문제제기처럼 경제가 최고의 가치 중심이 된 사회에서, 나아가 코로나19로 사회의 구성원들이 봉쇄, 혹은 특별 제제 및 관리의 대상이 된 상태에서, 우리 삶의 국면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현실에 직접 예민한 감각의 촉수를 내리고 보다 나은 삶을 꾸려나가고자 도전하는 젊은 활동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든든했다.

 

앞으로의 문제는 팬데믹이 이번 코로나19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우리 삶을 지배하는 자본의 영향력이 더 줄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던 모든 가치가 마치 자본을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 같다. 활동가 공현의 지적처럼, ‘내가 이렇게 (주식/부동산) 공부를 했으니 보상을 받아야 한다, 보상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가치관이 세대를 막론하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본다. 이번 대화편을 통해 모든 참여자들의 진단이 나에겐 새롭게 환기된 사항들이었고, 큰 배움을 주었다. 그 중에서 활동가 공현이 교육 문제를 잠시 언급하며 학생들이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라는 취지로 한 언급이 기억에 남았다. 다시 돌아보니 모든 참여자들의 활동은 각자의 영역에서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의 삶은 본래적으로 결핍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은 한 사람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으며, 무리를 이루고 사회를 구성하는 이상, 각기 다른 욕망들이 충돌하게끔 되어 있다. 이럴 때 구성원들이 마주하게 되는 이런 문제들은 정부가 왜 이걸 해결해주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대담에 참여한 청년 활동가들의 모습은 삶의 주체가 되는 인간되기를 몸소 실천하고 배우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대화자들의 한국사회 진단을 보면서, 나는 사회의 주체적인 구성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청년 활동가들은 사회 곳곳에서 관행에 균열을 내고 변화를 일구어내는 이들이었다. 고심하는 활동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한편 개인적으로 관심을 많이 갖게 된 주제는 에너지 정책 관련한 사항이었다. 아울러 기후/환경 문제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에너지 정책은 어떠해야 할까?’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기후 위기를 비롯하여 우리 삶의 질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여기에 구체적인 문제의 진단과 논의를 더하여, 우리 사회에 좀 더 필요한 것들도 보인다. 우리 가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각각의 참여 활동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다양한 목소리가 많이 나올 수 있어야 하고, 이를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필요성은 코로나19로 전 세계인들이 각자 고립된 하나의 섬으로 되어버린 지금, 모든 사회에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다시금 청년 활동가들의 활동을 응원해본다.




"2020년에 코로나19 관련해서 등교 여부 등을 결정할 때, 정부가 학생들의 의견을 묻지 않았던 것처럼 학생들을 교육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 여전합니다."
- 청소년인권 활동가 공현의 말 - P77

"누구나 나이가 들고 아플 수 있고 다양한 이유로 취야한 상황에 놓일 수 있는데 이를 시설 수용으로 해결하려는 방식이 구조적 폭력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김주온의 말 - P79

"코로나19를 계기로 자본 입장에서 눈엣가시였던 사업들을 가장 먼저 정리해간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모두가 힘든 코로나19 상황에서는 이런 결정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힘드니까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듭니다."
- 영화감독, 작가 이길보라의 말 - P76

"예전에는 정치 냉소주의에 반대했다면 지금은 정치를 제도권 내 정당 혹은 정치인의 지지자나 팬이 되는 것 정도로 인식하는 데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정치를 냉소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도 정치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로 이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누군가를 지지하고 투표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니는 정치행위인 것 같습니다."
- 공현의 말 - P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인생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 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이기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인생 Mein Leben

: 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Marcel Reich-Ranicki) 지음 | 이기숙 옮김 | [문학동네]

 


파란만장한 20세기를 살았던 문학비평가의 자서전

 


80세가 되도록 하루에 두 번 씩 면도하는 노인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20세기를 마무리하던 1999년에 자신의 삶을 기록한 문학비평가가 있다. 그런데 그는 이 책을 집필하던 당시까지도 하루에 두 번 씩 면도한다고 언급했다. 다소 강박적으로 보이는 이런 행동을 보였던 이유가 뭘까? 그 실마리를 찾으려면 약 60년 전에 저자가 겪었던 체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선 회고록의 제목은 나의 인생이다. 저자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라는 인물이며, 20세기 독일 최고의 문학평론가였다. 좀 더 단서를 추가하자면, 그는 폴란드에서 출생한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나치 점령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바르샤바 게토에서 있었고,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살아남았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마르셀이 80세가 다 되도록 하루에 두 번 면도를 하게 된 이유는 바로 게토에서의 체험과 관련이 있었다. 나치에 의해 바르샤바 게토에서 수용자로 생활하던 어느 날 나치는 유대인 이주를 명령한다. 이 때 이주명령은 유대 사회에서 추방, 곧 가스실에서의 죽음을 의미했다. 이주대상자에 선정되는 사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나치 협력 기관에 고용되지 않은 경우, 그리고 특히 옷차림이 지저분하고 추레한 사람, 거기다 면도까지 하지 않은 유대인은 곧장 가스실로 가는 줄에 가서 섰다’(231). 특히 저자처럼 머리가 검었던 이는 수염이 자라 금방 지저분해져 보일까봐 하루에 두 번 면도를 하게 되었다 것이었다. 그러니까 게토에서 면도를 잘 하는 것은 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습관이었던 것이다. 미미한 사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특히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이 에피소드를 통해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대학시절 수강했던 화학수업 시간이 생각난다. 강의를 맡았던 한 노교수는 어느 날 자신이 겪은 한국전쟁에 관한 개인적인 체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전쟁 중에 가족 상당수가 북한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 때 상당히 흥분하셨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전쟁이 끝난 지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그런 기억을 하나의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오셨던 것 같다. 전쟁의 상흔을 가졌던 사람의 모습을 처음 접했던 기억이 난다. 저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도 이런 맥락에서 이 경험을 분기점으로 하여 다른 인물이 된 것만 같다. 특히 마르셀은 연로하신 두 부모가 가스실로 가는 기차를 탈 때까지 부모를 배웅해야 했다. 어느 날 저자는 이 기차를 탈 뻔했던 아내를 구출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극한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형선고를 받고 가스실로 떠나는 열차를 바로 앞에서 본 사람은 그 상흔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240)고 말이다.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


저자는 게토에서 언제나 함께 하기로 약속하며 결혼했던 아내와 가스실로 향하게 될 열차로 가는 도중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후 게토 지역을 탈출하고, 어느 폴란드 식자공 부부의 집에 숨어 나치의 폴란드 점령기를 보내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저자는 참혹한 게토에서의 삶에도 사랑은 있었다고 증언한다. 다만 사랑하는 연인들을 매일 같이 매순간 짓누른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내일도 살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 속에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했던 이들의 원체험은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생존자들에게 평생 트라우마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저자 마르셀은 전쟁을 겪고 살아남았지만 한 가지 의문을 끊임없이 되묻는다. “왜 하필 우리가 살아남았을까?”(280) ‘형은 왜 죽어야 했으며, 자신은 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말이다. 물론 이건 우연이긴 했지만 이후 70년 간 살면서 이 질문을 계속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런 경험 자체가 없는 나에게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를 일종의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으로 이해한다. 마르셀은 이 느낌을 이렇게도 표현하고 있다. “동포가 죽어갈 때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은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272) 이러한 감정은 어떤 사고로 가족과 지인을 잃었을 때, 특히 현장에서 같은 경험을 한 생존자에게도 볼 수 있는 감정으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가족이나 지인, 그리고 옆에 있던 사람들을 구할 수 없었다는 무기력감과 더불어 겪게 되는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나치 시대에 수용소에서 생존했던 또 다른 작가 프리모 레비의 증언에서도 생존자로서 수용소에서 죽어간 동포에 대한 부채의식을 읽은 기억이 있다.



휴대용 조국이 된 문학


괴테를 비롯한 대문호를 배출하고, 칸트와 헤겔과 같은 대철학자를 배출한 독일이 20세기에 유대인 절멸이라는 잔혹한 인간성의 극단을 낳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종종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20세기를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새겨진 집단적 트라우마로부터 저자를 구원했던 건 무엇보다 문학, 특히 독일 문학이었다. 나치 병사들이 유대인들에게 모욕과 굴욕을 안기고 수모를 주었을 때 저자는 문학을 통해 견디고 스스로를 돌볼 힘을 유지했던 것 같다. 특히 아내가 된 토지아와 문학을 이야기하며 기쁨을 느끼고, 문학을 알았던 이유로 게토에서 번역 일을 하며 버틸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게토에서 탈출하여 폴란드 부부 집에서 숨어있을 때에도 문학은 유용했다. 마르셀은 매일 밤 주인을 도와 일을 하면서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처럼 자신이 읽은 문학을 이용하여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자신의 민족을 핍박한, 그것도 절멸시키려 했던 국가의 언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이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을 사랑하고 알리는 역할을 했던 저자의 입장이었다. 저자에게 이런 상황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한 재일동포 작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국어로 익히고 야만의 시대를 겪고 살아남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전후 일본 문학을 예찬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데 평생을 바친 결과 일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면 마르셀의 경우와 비교하여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인의 정서로 바라보았을 때 이런 상황은 사실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저자가 폴란드에서 태어났음에도, 마르셀에게 독일어는 모국어나 다름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10대가 되기 전에 이미 독일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어로 독서를 시작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명 평론가로서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와 교류한 경험을 기록하는데, 그 중에서 20세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인 예후디 메뉴인과의 인연을 기록한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1940년대 바르샤바 게토 시절, 아내 토지아와 함께 이웃집에 초대되었는데, 음반을 통해 메뉴인의 연주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당장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시기에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처음 듣는 메뉴인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였다고 증언한다. 저자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 음악을 들었던 아내와 이웃들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저자는 바르샤바에서 메뉴인의 연주를 직접 보았고, 1960년 초에는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메뉴인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1978년 가을, 중국 난징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메뉴인을 만나 나눈 이야기가 특히 흥미롭다. 메뉴인은 마르셀에게 이렇게 언급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유대인이군요. (...) 우리가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면서 독일 음악을 연주하고 독일 문학을 전파하는 것, 그건 정말 좋은 일이죠.”(476) 고국과 멀리 떨어진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다 서로 말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두 사람을 상상해 본다. 독일어가 모국어인 유대인 예술가 혹은 평론가의 심정이란 이런 것일까.


저자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 반복해서 언급한 것은 문학에 대한 사랑이었다. 폴란드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후 저자는 곧바로 아내와 폴란드 장교로 입대했다. 이후 정보장교 및 영사관 업무로 베를린과 영국을 다녀오고 귀국했지만, 폴란드 공산당 노선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출판사에 배치되어 독일문학 담당 편집자로 일하며, 독일 작가들과도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는 이후에 마르셀이 연구여행을 가장하여 독일로 망명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생존을 위해 하루아침에 문학평론가로서 본격적으로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저자가 기록한 이런 에피소드를 따라가 보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삶의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는 내가 가는 곳에는 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독일문학이 있었다”(274)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인상도 저자의 탁월한 글쓰기 솜씨에 힘입은바 크겠지만 말이다. 마르셀에게 문학은 그의 삶을 이끌어준 신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문학, 그것도 독일 문학이 내 휴대용 조국”(335)이라고 했다. 조국 폴란드를 떠나 독일로 망명한 사건도 그에겐 독일 문학과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을 말해주는 것 같다. 20세기 초에 태어나 방랑하던 유대인들, 특히 작가나 예술가들에게 문학 또는 예술은 정말로 이들의 휴대용 조국이었다는 견해에 공감할 수 있었다.


문학비평가라는 자리는 태생적으로 작가들과 가까워지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작가의 모든 작품이 늘 좋은 것도 아니며, 비평가의 열렬한 찬사와 호평에도 불구하고 평을 듣는 작가들은 으레 비평가가 비판한 것을 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평론가로서 그가 많은 작가들과 경험했던 우정과 반목을 기록한다. 저자는 비평가와 작가와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평론가가 작가의 최근작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471) 그러니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이나 지크프리트 렌츠와 같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경우도 있지만, 페터 한트케처럼 저자를 증오한 나머지 심지어 마르셀이 죽기를 바랄정도였던 관계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무엇보다 우선했던 것은 자신의 삶에 기쁨을 주는 존재로서의 문학, 곧 문학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에 대해 마르셀은 이렇게 답했다. “아무리 되풀이해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 그것은 바로 문학에 대한 사랑 없이는 비평도 없다는 말이다.”(393) 저자에게 문학은 세계 변화를 목표로 한거창한 기획으로서의 문학이 아니었다. 대신 문학이 자신에게 주는 기쁨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길 원했던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아내와의 대화였다. 저자는 아내의 80세 생일날 자신의 자서전을 마무리하는 말을 생각했다며, 조용히 시집을 읽던 아내에게 머뭇거리다 알려준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죽음의 고비를 함께 넘고 60년을 지켜보면서 배우자를 바라보는 느낌이란 어떤 것일까 상상해보았다. 두 사람은 가스실로 떠나는 열차로 가는 행렬에서 극적으로 함께 탈출했고, 극도의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를 함께 겪었다. 게다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부모들을 배웅해야 했다. 또 수많은 지인들이 가스실에서 사망했던 반면, 자신들은 왜 살아남게 되었는지를 평생 물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외도 경험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는데, 아내를 힘들게 했던 이런 경험도 결국 두 사람을 헤어지게 하지는 못했다. 이들은 참혹한 시기를 함께하면서도 절대로 헤어지지 않기로 약속했고,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도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마르셀이 마지막에 사용한 문구는 꿈이야, 현실일 리가 없어, 우리 둘이 함께 있다니.”(497)였다. 이 소박한 문구처럼, 저자는 게토에서 탈출할 때에 나이든 배우자가 생일날 편안히 시집을 읽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말 그대로 두 사람은 꿈같은 삶을 살아왔다고 서로 느꼈을 법하다. 마지막 장면까지도 마르셀의 자서전은 감동적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이 책에는 동료 독일 작가들의 언행과 역사가 논쟁을 통해 전후 독일 지식인 사회에 지배적이었던 독일인들의 견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해국의 지식인들이 갖기 쉬운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비롯하여, 피해자의 관점에 공감하지 못하고 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지 못했던 독일인들의 시선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개인의 내밀하고 자세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20세기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었던 가장 참혹한 역사를 겪은 인물의 생생한 역사적 증언이기도 하다. 나는 저자가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에 맞서 이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가 과거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사회에 살고 있다면, 바로 이런 인물들의 삶과 용기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58년 10월 말, 알고이 지방의 그로스홀츠로이테에서 ‘47그룹‘총회가 열렸다."(11) - P11

"야만과 잔혹함이 우연이나 자의와 한패가 될 때 의미와 논리를 따지는 질문은 현실을 모르는 한가한 생각이라는 것을 그때만 해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169) - P169

"게토에서의 사랑을 매일 같이 매순간 짓누른 것은 우리가 내일도 살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곳에서의 사랑은 불안하고, 재빠르고, 초조하고, 성급했다. 그건 굶주림과 발진티푸스의 시대, 끔찍한 공포와 처절한 굴욕의 시대에 나누는 사랑이었다."(196) - P196

"당시 ‘옷차림이 지저분하고 추레한 사람, 거기다 면도까지 하지 않은 유대인은 곧장 가스실로 가는 줄에 가서 섰다. 나처럼 머리가 검은 사람은 당시 하루에 두번 면도를 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매일 두 번 씩 수염을 깎는다."(231) - P231

"부모님을 연세 때문에라도 - 어머니는 58세, 아버지는 62세 였다 - ‘생명번호‘를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 그 때가 부모님을 뵙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234) - P234

"사형선고를 받고 가스실로 떠나는 열차를 바로 앞에서 본 사람은 그 상흔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240) - P240

"굶주림보다 무서운 건 죽음의 공포였고, 죽음의 공포보다 무서운 건 끝날 줄 모르는 굴욕이었다."(254) - P254

"그 때 나는 정확히 몰랐지만 예감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동포가 죽어갈 때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은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272) - P272

"내가 가는 곳에는 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독일문학이 있었다."(274) - P274

"죽음의 공포는 수년 동안 우리의 일상사였다. 그런데 전쟁의 끝이 다가올수록 해방된 우리를 더 무겁게 짓누르는 의문이 있었다. 아주 단순한 의문이었다. 왜? 왜 하필 우리가 살아남았을까?"(280) - P280

"문학이 있어야 비평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작가들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을 과소평가하거나 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308) - P308

"훌륭한 평론가란 언제나 명료함을 위해 글을 단순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자신이 전달하는 내용을 알기 쉽고 투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위태로울 만큼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392) - P392

"내 경우야말로 취미와 일, 열정과 직업이 완전히 일치한 사례였다."(442) - P442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평론가가 작가의 최근작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471) - P471

"나는 세계 변화를 목표로 하는 문학에는 전혀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런 문학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480) - P480

"꿈이야, 현실일 리가 없어.
우리 둘이 함께 있다니."(496)
- 아내의 80세 생일날 떠올린 문구 - P4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