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
고은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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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14, 교보 제 북로그에 올렸던 것입니다.
쭉 올리고 나서, 새로운 리뷰 쓸 예정입니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더욱이 북글마저 미루고 미루다가, 재차 읽고 고심한 후에 시도하고 있으니. 다만, 작가 스스로가 "연애소설"이라고 밝힌 바와는 대비된, 소설 곳곳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기 때문에 굉장한 경험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젊은 소설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철학에 가까운 작가의 사랑에 관한 생각이 담겨 있어, 이제껏 보아온 여타의 다른 사랑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것이 이 소설에 주목한 지극히 일반적(?) 이유라고 보면 되겠다. 특히, 그러한 생각들의 꼬리를 따라가 내 생각과 결부시키면서 즐거움을 더해 갔다. 여러모로 값진 시간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겠지.
작가는 소설가 신유진과 벤처캐피탈리스트 김서인의 사랑이야기를 주축으로 해서, 현 사회에서는 그들의 사랑이 순수함으로만 비칠 수는 없음을 내세워 대중의 기호에 맞게 상업성으로 포장해야만 하는 "상업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의식을 바탕에 깔아 놓았으며, 사랑에도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랑이란 결국 상대의 한 부분을 발췌하고 과장해서 거두절미 몰두해버리는 것, 전후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보고 싶은 쪽만을 바라보는 것, 더욱이 심각한 자기중심적 환각 상태일 뿐이라고 말하며, 두렵고도 달콤한 한순간의 현기증에서 깨어났을 때 비로소 사랑의 실체와 맞닥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닌지 묻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순한 구성에서 벗어나 12편의 일기와 24통의 편지를 따라가야만 완성되는 퍼즐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나'의 삶을 재구성하는 플롯을 택했다. 신유진의 흔적을 좇아 조각조각 흩어진 퍼즐을 맞추다 보면, 독특한 구성의 묘미를 느낄 수 있으며, 더불어 그것을 토대로 소설이 지닌 마법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한시도 멍한 채로 있을 수 없게 만든다. 무턱대고 재미로만 읽을 수 없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극히 감정 소모에 불과한 사랑일지라도 신유진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으며, 쭉 뻗은 직선, 그 한곳을 바라보며 온몸을 내던질 수 있었다. 언제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녀가 부럽기도 했다. 열정을 쏟을 수 있는 한 가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지루함이 반복되는 일상을 거뜬히 이겨낼 충분한 여유를 몸 안 가득 간직한 것일 테니.
나는 본래 축축한 것, 눅눅한 것, 뜨거운 것, 끓어 넘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무엇에도 완전히 몰두하지 못하고,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실용적인 목적만을 추구했다. 그러한 나였기 때문에 그들의 진실한 사랑이 더욱더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유진과 서인은 사랑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에 대한 태도를 고민했고 세상의 질서와 사랑이 빚어내는 극심한 갈등 속에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자신을 처참히 무너뜨릴 수 있는 불구덩이 속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거침없는 사랑 앞에서 나는 이제껏 건조하게 살았던 삶을 반성한다. 그리고 그 동안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가볍게 만나오던 남자 친구를 정리하기에 이른다. 그를 정리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남자와 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자세를 뿌리부터 바꾸어내겠다는 나의 의지를 담은 선택이자, 이미 새로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굳건한 결의를 다지고 호기심을 집어넣은 채로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결국,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상대를 찾아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거듭 확인하면서.’
[현기증]은 사랑에 관한 아포리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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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짐승의 연애
이응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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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보 제 북로그에 올렸던 것입니다.
쭉 올리고 나서, 새로운 리뷰 쓸 예정입니다.

 

"무정한 짐승의 연애"
“서정은 장르가 아니잖아요. 문체에 가려서 제가 지어낸 스토리와 메시지가 주목받지 못한다면 저는 실패한 겁니다. 서정성이란 그림(소설)을 그릴 때 사용하는 크레파스일 뿐입니다.”
-작가의 말.
“문장이 궁극에 달해도 별로 기이할 것이 없다. 다만 알맞음에 그칠 뿐이다”- ‘채근담’의 한 구절.
아홉 편의 소설 모두 ‘짐승’을 화두로 삼았다. “20세기는 인간이 짐승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웠다. 종족을 살육하는 끔찍한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이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 21세기에 지난 세기의 짐승스러움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다.”
표제 소설을 비롯하여, ‘초식동물의 음악’ ‘짐승의 편지’ 등 9편의 단편이 실린 이번 소설집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동물적 속성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결국에는 그 속성의 잔악함으로 인해 빚어지는 어두운 현실을 사랑의 윤리로 끌어안는 글쓰기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동물적 속성에서 비롯된 원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는 수사의 과잉보다 적합한 문장을 찾아 쓰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표지처럼 회색 이미지가 강한 소설이라고 개인적인 의견을 낸다. 한때 어두운 분위기를 열정적으로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찾아서 읽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책읽기에 몰입해 들어갔다.
단편 ‘해시계를 상속받다’는 그의 문제의식이 모아진 작품이다. 북파 간첩이었던 아버지는 공작을 하던 중 인육을 먹었다. 아버지는 수도원에 들어가 묵언수행을 한다. 검사인 화자는 다른 사람의 죄를 벌하면서도, 부친을 벌할 수 없다. 부친은 20세기 짐승 같은 인간의 대표단수다. 인간은 자기 안의 짐승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면서도 스스로를 비판할 수 없다.
단편 ‘초식동물의 음악’에서 화자는 어두운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펜팔 친구인 호주 이민자 해수와 함께 추억을 나눠왔다. 성인이 되어 편지가 아니라 얼굴을 맞대게 된 두 사람은 우정을 이어간다. 화자는 이혼하고, 해수는 자살을 기도하는 등 아픔을 겪고 서로를 위로하면서도 두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 일찍 이상한 방법으로, 굉장히 어두운 얘기들을 나눴어. 그래서 그만 이렇게 돼버린 거야.” 작가가 보기에 어떤 이들은 짐승의 몸을 가졌지만 가련하고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다.
‘오로라를 보라’에서는 사자떼와 악어떼에 둘러싸여 소름 돋은 등판으로 죽어 가는 물소의 이미지가, ‘짐승의 편지’에는 푸른 초원을 황량한 사막으로 바꿔놓는 심판을 행하는 하얀 양떼의 이미지가 들어있다. ‘뚱뚱하고 날씬한 물고기 잔치’는 뚱뚱하고 날씬하고 똑똑하고 멍청하고 강하고 빌빌거리고 밝고 어둡고 괴롭고 기쁜, 이런저런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수족관에서 삶의 희망을 찾는다.
‘어느 날 불현듯 스스로가 금방 목구멍으로 넘어간 한 줌의 기억조차도 믿지 못해 자꾸자꾸 되새김질하는 소심한 초식동물로 여겨진다면. 왜 유순한 초식동물의 각을 뜨고 피를 뿌려, 교활하고 무정한 육식 동물의 죄를 씻어야 하는지 신(神)에게 따져 묻고 싶다면’이라는 가정은 자신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다. 초식동물은 물론 문학의 다른 이름이며, 작가가 묻는 것은 이 시대에 문학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주인공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짐승스러움"은 파괴 본능에까지 충실한 맹목성, 윤리가 발붙일 데 없는 무반성성, 근원을 알 수 없는 야성적인 연민 등인 것 같다.
희미한 빛을 내며 타오르는 촛불은 위태로운 자아를 표현한다. “세계는 캄캄한데 혼자 타오르고 있어 무참히 고독한 촛불. 곧 바닥에 고름처럼 눌어붙어 꺼져버릴 촛불.”(‘초식 동물의 음악’) “검은 태양을 향해 전진하는 나의 존재는, 골수부터 녹아들며 무의미해졌다. 오, 촛불 꺼지듯 확, 사라져버릴 수만 있다면.”(‘그녀는 죽지 않았어’)
소설 속의 나는 스스로가 ‘무정한 짐승’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무정한 짐승이고자 애쓰는 초식동물’일 뿐이다. 나의 잔인함으로 남에게 상처를 준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가 상처받곤 하는 존재일 뿐이다
안타까운 것이, 작품 어디에서도 구원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 목소리는 이따금 빨간색 이미지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추상은 역설적인 구원의 메시지임이 드러난다. 짐승을 화두로 삼은 아홉 편의 소설들을 휘돌고 있는 것은 죽음의 기운이다. 빈번하게 묘사된 ‘촛불’은 타오르는 생과 타서 사라지는 죽음을 동시에 표현한 것일지도.

“짐승스러움 자체를 얘기하고 싶었지, 인간적인 것과 비교해 열등한 짐승스러움을 말하려던 게 아니었다”
“‘21세기의 문학’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지나간 20세기 문학의 정신이 유효하다는 것, 의미 있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맞이한 21세기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럼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를 쓸 때 치유 받는다. 시 정신을 놓지 않는 한 처음의 진지한 마음, 뜨거운 열정을 잃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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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팬 죽이기 - 2004 제2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주희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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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의 1/4 - 2004 제2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수영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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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5일)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그런 대로 속도가 빨랐던 것 같다. 굉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

문장이 가지런하고 일정한 호흡이 있어 차분하게 읽혀진다. 거듭 수정한 티가 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문단이 바뀔 때, 혹은, 장면 전환에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이는 듯하다. 성실함이 엿보여 정감이 가는 작가다^-^

생의 고통을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는 주인공과 특이한 주변인물을 통해 형상화하여 안정된 구조로 이끌어간다. 아파트단지의 음식쓰레기 수거와 고양이 시체 치우기, 등등의 별의별 잡일을 하는 "남자"와 어머니가 안드로메다에서 와서 그리로 돌아갔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사슴벌레와 토끼를 소중히 여기는 "소년"과 오직 클래식만을 고집하는 "소장"과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과학학원의 "김 선생".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인 듯하면서도, 깊숙이 들어가면 또 그게 아니란 걸 쉬이 발견할 수 있다.

"룹알할리"의 강렬한 햇빛이 관절염을 낫게 해준다는 말을 전해들은 주인공은 언젠가 그곳으로 갈 수 있으리라 작은 희망을 품으며 고통을 견딘다.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후 충격으로 말을 하지 않는 "토끼 소년"은 "남자"의 도움을 받아 우주선을 만들고, 자신이 안드로메다에서 왔다는 것을 단번에 맞춘 "주인공"을 마법사라 여기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녀가 빗자루를 타고 자신을 하늘로 날려보낼 거라 짐작하고, 남자에게 빗자루를 우주선에 달아달라 부탁한다. 전체 뼈대가 되는 줄거리는 이렇다. 그 아래 주인공의 남자에게 향한 묘한 심리 변화와 토끼소년과의 에피소드, 김 선생과의 에피소드, 소장과의 사소한 마찰이 주류를 이룬다.

주인공은 습기를 말릴 수 있는 사막을 이상향으로 보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닿지 못하고 꿈을 꾸는 것으로 소설은 완결을 맞이한다. 그만큼 유토피아는 쉬이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에 있고, 현재는 처절한 몸부림의 연속이다. 더욱 서글픈 것은 막막한 현재를 묵묵히 견뎌내도 순간의 기쁨은 지속될 수 없고, "룹알할리" 사막에 대한 소망이 실은 헛된 꿈이고 도피의 상징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은 너무나 애처롭기만 하다.

제목이 상징하는 바는 아마 "룹알할리" 사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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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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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북글을 쓰려는 중이다. 나 말고도 많은 분들이 북글로 옮겨 적으셨기에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았었다고 할까. 왜_라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면, 읽었긴 했는데, 특별히 감동이 컸다거나, 이 기회에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섭렵해야겠다, 등등의 절대적 호감이 일지 않았기 때문일까. 뭐, 나름대로 이유야 있었겠지, 지금은 딱 이거다, 하고 한 마디로 일단락 지을 수 없는.
아무튼, 서두가 길었는데, 그냥 갑작스레 적고 싶어졌기에 머릿속을 깔끔히 정리하고 준비자세에 들어갔다고 적당히 해두자(=_=)
사실, 이 작품이 꾸준히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지만, 내게 흥미를 끌 이렇다 할 요소가 되지는 않았었다, 최초로 발견했을 때(;;). 조금 시간이 지나서도, 여전히 내 시선 안에 그 책은 자리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손에 고이 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냥, 무작정 읽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게 있는데, 솔직히!!! 문학사상사에서 의도적으로 바꾼 듯한,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원제가 더 낫다. 제목을 멋대로 바꿨는지 어땠는지 자세히는 알려하지 않아서 모른다만, 별로 봐줄 만한 행동은 아닌 듯하다(;;) 개인적으로 내용과 무관한 제목,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상징적인 것도 아닌 데다 범위가 너무 크지 않은가.

내용에 관해서 몇 가지 얘기할 게 있는데, 처음과 끝의 연결성은 좀 미흡한 듯하고, 한없이 감정적으로만 치달은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다른 작가와 구별될 수 있는 하루키만의 개성(내가 좋아하는 차별화의 신비롭고 독특한 분위기, 깔끔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 진기한 주제의식)은 이 작품에서 그리 찾아볼 수 없었던 것도 같고. 뒤의 해설에서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컸던 소설이라고, 떠들어댔지만, 나는 수양이 부족한 탓인지, 그리 큰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어디선가 존재할 것만 같은 인물이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평범함을 넘어서는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와타나베의 존재 자체가 소설에서 자리하는 위치가 확고하고, 그의 주관이 나와 비슷한 면이 있었는지, 이 책은 참으로 편하게 읽혀졌다. 1인칭 시점의 장점을 잘 부각시킨 소설이란 개인적 생각을 해본다.

오래 전에 읽었던 탓이라, 제대로 떠올리지를 못하겠다. 한번 더 읽는 기회를 가져야할 듯싶다.

아아, 너무 뒤죽박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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