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된 일일까? 가면도 각도가 조금 다르면 표현하는 감정도 달라진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턱의 각도와 시선의 변화만 보고도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은밀하게 읽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그랬던 게 아닐까? 그렇다, 웃는 얼굴만 해도 복잡하다. 고통과 초조, 체념과 연민, 안도와 타협 등 여러 가지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35쪽
애정이 따뜻한 햇살이라면, 증오는 이글이글 타는 숯 같은 거라고 할까. 위험하지만 매력적이기도 하지. 부젓가락으로 찔러 가만히 바라보거나 뒤집거나 하고 있으면 조금씩 다른 것으로 변해가는 것. 자신의 어딘가가 지글지글 타들어가면서 변하는 걸 알 수 있어. 그것이 그냥 꺼져가는 숯이 될지, 마음을 부추기는 에너지가 될지의 경계선은 위험한, 종이 한 장 무게에 있어. 가스 버너처럼 아무렇게나 증오를 불태우는 것뿐이라면 증오의 백미는 알 수가 없지.-74쪽
현실은 때로 이유 없는 장난을 친다. 세상에는 ‘어떻게 이런 일이’하는 의문이 드는 희한한 사건이 큰 사건이 아니라도 세계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유도 의미도 없는, 설명도 되지 않는 이상한 일들이. 세상은 그로테스크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그 상황에서의 작은 사건들로.-113~114쪽
이상한 건 나 자신은 좋았다고 생각했을 때는 반드시 떨어지는 거야. 어려웠구나, 제대로 못했구나 생각했을 때일수록 점수가 좋지.-119쪽
나는 최근 의미도 없이 띈 적이 있었나. 뛰는 것을 즐긴 적이 있었던가. 그 소녀들처럼 뛰는 것 자체에 기쁨을 느낀 적이 있었을까 ― 그보다도 나는 정말로 달리기는 한 걸까, 마지못해 내달려왔을 뿐이지 않을까. 어딘가에서 뛰어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걸었어. 그랬더니 몸이 차츰 뜨거워지는 거야. 그때까지 축 처져 있던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지고 따뜻해지는 거야. 괜히 적개심 같은 것이 울컥울컥 솟아나면서 사람의 마음은 정말 이상해.
갑자기 뛰기 시작한 거야. 마치 누군가가 등을 밀기라도 하듯이. … 나는 자신의 의지로 달리는 거야. 이 속도감을 온몸으로 음미하면서 뛰는 거야 하고.-228~229쪽
맹스피드로 움직이는 차는 보이지 않잖아? 옆을 스쳐 지나면 바람이 쌩쌩 불어 놀라거나 하잖아. 그러니까 선생님이 달리고 있는 동안은 저건 뭐지, 혹은 대체 뭐 하는 거지, 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고 같이 일을 하다 보면 자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조차 모를 때도 있었어. 하지만 운전수가 없어지고 눈앞에 놓여 있는 차를 보니까 이렇게 훌륭한 차였구나, 저렇게 엄청난 속도로 저렇게 먼 곳까지 가려고 했구나,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지.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여러 가지 행동을 하는 법이지.-230~231쪽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의 마음이란 참 이상한 거지.-240쪽
사람들은 봄으로써 소비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보임으로써 소비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는 언제 어느 때 뒤바꿔도 이상하지 않다. 밖에서 감상하는 눈과 안에서 감상당하는 눈을 가진 현대인은 그 두 가지 눈으로 항상 분열된 상태가 되고 있는 것이다.-245~246쪽
연극은 흡혈귀랑 비슷해요. ― 연극은 자꾸 새로운 배우와 연출가의 피를 빨아먹으며 끈질기게 오래 살아남는걸.-369~370쪽
즐겁게 보셨습니까? 당신은 우리 연극의 관객이었습니다. 아니오, 당신은 언제나 세상이라는 극장 안에서 고독하게 하나의 객석을 차지하는 관객입니다. 뭔가를 감상할 때 사람들은 한없이 고독합니다. 당신은 스스로 어떤 관객이 될지를 결정해야만 하고 박수를 칠지 자리를 박차고 돌아갈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동시에 당신은 배우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감상함으로써 감상을 당하고 당신 자신의 모습을, 눈앞의 배우들 안에서 뚫어지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극장을 나가 이번에는 밖에서 자신을 연기해야만 합니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은 뒤집기이고 당신도 나도 세상이라는 극장 안에서는 늘 아주 작은 부분에서 역전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413~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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