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녘 백합의 뼈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5월
절판


사람들은 같은 장소에 머물 수 없다. 각자의 세월에 이끌려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101쪽.쪽

악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선 따위, 어차피 악의 윗물 중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악을 돋보이게 하는, 말하자면 손수건 테두리의 자수 같은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는 왜 늘 선이 그렇게 약하고 무르고 덧없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거대한 악의 침대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악의 침대는 늘 새로운 피가 필요하고, 그 피를 타고난 자는 어느 시대에나 반드시 존재한다. 악의 존속은 인간의 필연이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강하게 운명 지어지는 것이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그런 맥락으로 이어지는 흐름 위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와타루는 다르다. 와타루는 윗물의 행복한 한 방울. 그는 밝은 빛 속으로 걸어갈 수 있다.-157쪽.쪽

협박이란 건 상대가 뭔가 가치 있는 걸 갖고 있을 때 성립하는 거지.
-190쪽.쪽

"한 가지 더 충고해 줄까. 아직은 비밀을 떠벌이지 않는 게 좋아. 그 열쇠, 소중히 간직해 둬. 그 가벼운 입과 자기 결점을 떠벌이는 악취미는, 분명 당신의 수명을 단축시킬 거야. 옛날부터 비밀을 빨리 폭로한 등장인물은 그 즉시 사라지는 법이니."-191쪽.쪽

"이런 악마적인 연구는 언제라도 막대한 이익을 낳는 거야. 군부의 오점과 과거의 망령은 정부나 관료에 대한 방어 장치도 되지. 방어 장치는 아무리 많이 모아도 지나치지 않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아무리 쓰레기처럼 보이는 방어 장치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297쪽.쪽

자각하지 못하는 악은 무엇인가. 그녀의 바탕에는 내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깊고 넓은 악의 늪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늪은 나 같은 사람도 삼켜버리는 게 아닐까.
-300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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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구판절판


문제는 실제적인 자료를 말 그대로 잊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완결성이나 행복의 느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우리 내부의 어떤 특정한 부분을 잊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많은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모두가 똑같이 ‘나’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17쪽.우리가 그림에서 반기는 것은 제재라기보다는 분위기다. 색과 형태를 통하여 전달되는…
우리는 비망록으로써, 닻으로서 그림을 환영하는 것이다.

-16쪽.쪽

성심성의껏 소외를 시켜놓은 환경에 나 자신의 소외를 풍덩 빠뜨리는 것은 실로 위안이 되었다.-23쪽.쪽

열차야,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다오!
배야, 나를 여기서 몰래 빼내다오!
나를 멀리, 멀리 데려가다오!
이곳의 진흙은 우리 눈물로 만들어졌구나!

_
보들레르.-28쪽.쪽

화면들에 쉬지 않고 나타나는 안내문, 가끔 커서의 초조한 박동을 수반하기도 하는 안내문은 일견 단단하게 굳어버린 듯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손쉽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32~33쪽.쪽

눈은 자신이 보는 것을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일치시키려 한다. 익숙한 책을 새로운 언어로 판독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는 동안 내내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35~36쪽.쪽

자신에게 진실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자아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핵심적 기준이라고 한다면, 나는 유혹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 윤리 시험에서 낙제하고 말았다.
유혹은 나를 둘로 갈라놓았다. 진짜 [알코올]자아와 가짜 [물]자아로.
48쪽.침묵은 어느 쪽으로도 빠져나갈 도리가 없는 고발장이었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하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고,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하면 구제불능일 정도로 따분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임이 분명해지기 때문이었다.
-47쪽.쪽

나는 두 가지 종류의 거짓말의 차이에 주목하게 되었다. 피하기 위한 거짓말과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 유혹 과정의 거짓말은 다른 영역의 거짓말과 매우 다른 면이 있었다.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에는 괴상한 가정이 수반된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개인적[따라서 다른 사람과 다른]특징을 비워버려야만 상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의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 불가능한 갈등 관계에 있다고[따라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판단하는 태도다.-60~61쪽.쪽

키스는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다. 두 살갗이 접촉하게 되면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가, 암호화된 말의 교환은 끝이 나고 드디어 이면의 의미들을 인정하게 될 터였다.-65쪽.쪽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결실과
가장 위대한 기쁨을 수확하는 비결은, 위태롭게 사는 것이다!
너의 도시들을 베수비오 산기슭에다 세우라!

_
니체.-70쪽.쪽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 없이 식사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_
에피쿠로스.-96쪽.쪽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_
프루스트.-122쪽.쪽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이들을 훨씬 더 잘 묘사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는 것이다.-126쪽.쪽

우리의 정신은 새로 조율된 레이더처럼 의식을 떠다니는 대상들을 포착한다. 마치 조용한 방에 라디오를 가져다놓는 것과 같다.-128쪽.쪽

우리는 만화를 보면서 낄낄거리다가 어느새 만화의 권위 비판이 적절하다고 인정하게 된다.-135쪽.쪽

만화도 비극과 마찬가지로 가장 딱하게 느껴지는 인간 조건에서부터 출발한다.-139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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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전략 - Reading & Writing
정희모.이재성 지음 / 들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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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밸리가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의 ‘친구’로 남아있게 된 까닭은 오로지 그의 뛰어난 글쓰기 능력 때문이다. 박복한 그에게 신이 내려준 유일한 선물은 글을 쓰는 재주였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프란체스코 베트리에게 보낸 편지는 오늘날까지도 뛰어난 미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정략론』과 『군주론』을 저술한 마키아밸리는 당대에는 널리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피렌체의 정치가 로렌초 데 메디치보다 더 알려진 유명인이 되었다. 정치가로서 그의 삶은 고단했다. 그러나 뛰어난 문장가로서 그의 삶은 영원하다.-(19쪽)쪽

글쓰기 책에도 미덕은 있다. 노력 없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은 예술적 영감의 신 뮤즈가 여러분의 책상에 너울너울 날아들어 타자기나 컴퓨터에 마법의 가루를 뿌려주는 일은 결코 없다고 단언했다. 뮤즈가 찾아오면 오히려 뮤즈가 살 집을 지어주어야 하는 게 우리의 일이며, 거기에 들어가는 노동은 순전히 우리의 몫이라고 했다. -(20쪽)쪽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문장력이 없으면 표현해낼 수가 없다.
한 편의 좋은 글은 세계를 분석해내는 지적인 힘, 현상과 지식을 조직해내는 구성력, 생각과 사고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장력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옛말에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삼다(三多)’가 필요하다고 했다.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 바로 그것인데,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많이 읽는 것은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많이 쓰는 것은 문장력을 기르는 훈련이 된다. 또 많이 생각하는 것은 구성력을 연마하는 데 보탬이 된다. 누구나 흔히 아는 이야기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28쪽)쪽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있다. ‘유(有)지(智)무(無)지(智)교(校)삼(三)천(千)리(里))’란 옛글을 상기해보라. 지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를 거리로 따지면 삼천리나 된다는 의미이다.-(35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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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실로의 여행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품절


그의 정신은 다른 어딘가에서, 그에게 늘 붙어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허구들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으니까.
그는 읽는 법을 잊어버렸지만 아직까지 사물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 이름을 말할 수 있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로 사물들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능력은 상실했지만 아직까지 읽는 법은 알고 있을 수도 있다.-(7쪽)~(8쪽)쪽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야기를 다 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지나가는 시간의 기록, 눈에 보이는 증거일 뿐이다.-(10쪽)쪽

좋은 일하고 나쁜 일이 모두,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예요. 우리는 고통 받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 합당한 이유가 있고, 그것에 대해 불평을 하는 사람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거죠.-(43쪽)쪽

지금은 불안정한 시기이고 나는 이런저런 견해들이 잘못된 사람에게 던진 단 한 마디 말로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한 사람의 인격이 비난을 받게 되면 그가 하는 일들 하나하나가 다 부당하고 의심스럽고 이중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을. 내 경우에는 문제가 된 그 흠이 악의에서가 아니라 고통에서, 교활함에서가 아니라 혼란스러움에서 생겨났다. … 몹시 안 좋은 밤과 맞닥뜨릴 때마다 내 생각은 나를 저버리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서 곧 나는 나 자신의 숨결에 숨이 막히곤 했다.-(79쪽)쪽

나에게는 중요합니다. 내 모든 삶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 꿈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95쪽). 나에게는 그 꿈이 유일한 기횝니다. 그건 내 잃어버린 한 부분 같은 거고 그래서 그걸 찾아내기 전까지 나는 절대로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없는 거지요.-(93쪽)쪽

곤란한 일은 누구에게나 닥쳐오고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세상과 화평을 맺는 법이니까.-(82쪽)쪽

우리는 지금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고 모든 게 다 보이는 것과 같지는 않으니 말이오.
(152쪽)다른 것은 몰라도 자기의 미래를 예상하는 데서는 비관적이지 않은 그는 끊임없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에 다시 한 번 더 체념하고 만다.-(149쪽)쪽

그는 자기의 내면에서 어떤 목소리, 그 자신의 목소리는 아닌, 적어도 그가 기억하기로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를 듣지만, 그럼에도 그 목소리는 권위 있고 확신에 차 있어서 그것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인정한다.-155쪽~쪽

일단 세상 속으로 던져지고 나면 우리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고 우리가 죽은 뒤에까지도 우리의 이야기들이 계속 이야기될 것이기 때문이다.-(222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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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이명랑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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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0505)

허리춤에 칼을 꽂은 조련사들이 쓰레빠를 끌고 다니듯 여기저기로 코끼리들을 끌고 다녔다. 코끼리들의 배설물 위로 또 다른 배설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이국의 언어와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어진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한 사내에게 붙박여 있었다.
… 최소한 자신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만은 ‘몰락’이라고 해도 될 만큼 초라하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테니까.-(13쪽)쪽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지. 이해 못 하는 걸 무서워하는 인간과 이해 못 하는 걸 찾고 만들려 하는 인간."-(23쪽)쪽

일 달러를 벌려다가 뭔지도 모르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소녀들, 그 소녀들의 몸과 그 소녀들의 연인과 그 연인의 아비와 어미와, 헐벗었으나 수천 년 동안 힘들게 지켜온 그네들만의 삶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리는 일 달러에 대해 다른 사람 아닌 타이 한이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진은 그 순간만큼은 타이 한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약기운이 아니라 부당함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26쪽)쪽

마약에 취하거나 돈에 집착하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결국은 모두, 더 불행해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뿐이다.-(33쪽)쪽

그러나 들썩이는 어깨와 토해내듯 ‘한국’이라는 말을 뱉어놓고는 그 말이 불러일으킨 파문에 휩싸여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흐느껴 우는 목소리만으로도 어진은 알 수 있었다. 타이 한이라는 사람이 이 말을 얼마나 오래 참아왔는지를. 겉으로는 모든 것에 초연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 타이 한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었다. 마약을 하거나 뚜쟁이 노릇을 하면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도 실은 실패와 후회로 얼룩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흘러간 것들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떠나간 시간을 저토록 아파할 수 있다면 아직 싸우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36쪽)쪽

냄새는 묘사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냄새는 정직해서 은유와 상징으로 포장할 수도 없다. 냄새는 그저 발가벗는다.
(…) 너는 동굴 같아. 네 속으로 들어가면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까매져. 분명하던 것들의 윤곽이 흐려지고 어둠만 남는 거야. 그러면 이렇게 가만히 어둠 속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사라져버리는 거야.-(42쪽)쪽

노트를 하나 마련해봐. 거기다 다 써버려. 쓰다보면 기억이 날걸? 네가 네 속에 숨겨놨던 것들이 너를 찢고 나올 거야. 다 받아 적어. 그리고 묻어버려.-(59쪽)쪽

그 순간에 내가 느낀 그 아득함이 실제의 물리적 거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감이라는 사실에 나는 더 당황하고 있었다.-(69쪽)쪽

테이프를 되돌려 감듯, 지나온 삶을 되돌려 감을 수 있는 사람이란 그 인생에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한 사람, 그는 리와인드 버튼을 한 번 더 누를 시간마저 갖지 못했다. 설령 이제 누군가가 그를 기억해내어 그를 대신해 리와인드 버튼을 눌러준다 해도 끝까지 돌다간 그의 테이프는 절대로 되감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은 …… 죽었으니까.
(…) 죽음 앞에서는 어떤 말도 변명일 뿐이다. 참회를 하고 눈물을 흘려도 여기, 살아 숨 쉬는 자의 참회와 눈물은 트로피를 거머쥔 승리자의 한때의 도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지금 내 뱃속에서 나를 쥐어뜯고 있는 저 정체 모를 통증……나쁜 짓을 한 것도, 내가 원한 것도,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불쑥불쑥 나를 찾아와 들쑤셔대는 저 통증……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익숙하면서도 매번 낯설기만 한 저 통증을 향해 나는 주먹질을 했다. 내 몸이 아파야 한다면 차라리 내 주먹으로 내가 내 몸에 멍을 만들리라.-(84~85쪽)쪽

모든 것이 0과 1로 단순화되는 디지털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한 주변인의 이야기란, 죽은 자에게 목덜미를 잡혀 자신의 삶으로 죽음을 대신해야 했던 영식이 아저씨의 이십 년 세월 앞에서는 가짜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1975년 4월 28일에 신체검사를 받았다는 한 남자의 생이 이쪽 원에서 저쪽 원으로 건너가고 있는 테이프를 매만지며 가짜와 진짜, 이쪽과 저쪽, 그 사이에서 소설의 자리는 어디인가.-(92~93쪽)쪽

"그대로 놔둬. 방이 환해지는 거, 뭔가가 이 방으로 들어오는 거 모두 귀찮아졌어."
(106) 방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은 그렇게 한바탕 소리를 지르다 나가버린다.-(103쪽)쪽

빛을 가로막고 있는 블라인드를 본다. 이제 저 블라인드를 걷어올리는 일은 없을 거야. 상상 속의 고래가 늘 훌쩍 뛰어넘어가버리곤 했던 그 문턱을 본다. 방문은 닫혀 있다. 문은 꼭 잠겨 있다.
… 내 등에 그가 꼭꼭 눌러 새겨준 그 검은 글자들이 아프게 아로새기고 있는 무늬가 무엇인지 안다. 그는 지금도 날카로운 조각칼을 들고 어디선가 무늬를 새기고 있을지도 모른다.-(120쪽)쪽

우리의 열아홉은 아직 포장의 리본을 풀지 않은 선물상자 같은 것이었지. 발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그 선물상자 속에는 ‘내일’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무엇이 들어있었어.

(…)아직 포장의 리본을 풀지 않았을 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니야, 아니야, 부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으로 시작되는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어제 연필로 휘갈겨 쓴 영어 단어 위에 오늘치의 영어 단어를 붉은색 볼펜으로 휘갈겨 써 어제의 시간을 지워버리듯 선물상자 바닥에 몇 번이고 다시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 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누군가 내 앞으로 부친, 발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그 선물상자를 앞에 놓고 나는 그 속에 들어있을 알맹이를 상상하며 상자 바닥에 밑그림을 그려 넣곤 했지.-(199~200쪽)쪽

나는 뒤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이제 막 사진액자의 네모난 틀 안에 붙박여버린 어떤 풍경을 지켜보았지. 인생을 둘러싼 모든 것들…… 화살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상처들마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그 풍경은 내게는 너무나 낯설어서 나는 질끈 두 눈을 감아버렸단다.-(218쪽)쪽

밑동에서 조금 올라가다 제 몸을 기꺼이 반으로 나누어 땅을 향해 휘어 있는 저 나무라면 그 뿌리로 전설 하나쯤은 움켜쥐고 있을 법도 하지 않니?
너와 내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져버리게 된 곳, 그곳은 어디였을까?-(223~224쪽)쪽

길 양편으로 갈라져 서 있는 낡은 집들이 안개 속에서 길을 연다. 나는 그 길 위로 올라가 희뿌연 안개 너머에서 아른거리는 그 무엇을 쫓는다. 그것은 손짓하는 듯도 하고, 따라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는 듯도 하다.
(…)공원은 쇠와 장구와 북과 징이 만나 얽히고 풀리고 맺히고 꿈틀거리는 소리로 깨어나고 있었다. 저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저리로 달려가서 이 지랄 같은 열기가 내 몸에서 다 빠져나갈 때까지 진저리치고, 뛰고, 날아올랐으면……-(254쪽)쪽

검은 땅에서 날아올라 하늘에 길을 내는 새, 강으로 흘러들어가 강 너머의 들판과 맞닿고, 돌을 뚫고 들어가 땅속에 더 너른 길을 예비하는 길…… 손끝으로 더듬거리며 찾아낸 길, 책을 뒤져 찾아낸 길들이란 저 살기등등한 바다 앞에서는 전부 무효였다.-(284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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