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인단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6월
구판절판


"정치가가 잘못하고 있으면, 그 세계의 정의는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말."
64. "괴짜에는 두 종류가 있어. 멀리하고 싶은 타입과 호기심 때문에 잠시 상대하고 싶은 타입."
141. 아무리 잊은 척해도 고통이나 공포의 기억이란 것은 사라지지 않는 법인가 보다.-53쪽

공격은 최대의 방어라는 원리는 멋대로 타국을 침공하는 군사대국의 주장으로도 들리고, 공격은 잘 하지만 투수진이 붕괴한 야구팀은 우승할 수 없는 법이라 거의 신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효과적일 때도 있는 것이다.
171.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난 그 시점에서 이미 서점을 습격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억지로 설득당한 기억도 없고, 거부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아니, 솔직히 자백하자.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무의미하고 바보스럽고 법률에도 위배되는 짓이지만 아무도 하지 않을 일을 한다는 흥분이 있었던 것이다.
172. 밤의 어두움은 사람의 감각을 이상하게 만든다. 이모가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밤은 인간을 잔혹하게도 만들고, 정직하게도 만들고, 센티멘털하게도 만들어. 결국 경솔하게 만드는 거야.’-157.쪽

"비상식적인 상대에게는 거기에 알맞게 대응하긴 해야 해요. 이상하게 마음 쓰고 사양하다 보면 상대가 기고만장해지니까요."
185. "화는 분노로 바뀌고, 이윽고 보복으로 발전하는 법이죠."
"화르륵."
"그건 분노의 불꽃."-184.쪽

나는 완전히 주인공인 것처럼 살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의 인생 속에서는 단역에 불과하다.
224. 억지로라도 웃으면 아무리 우울한 상황에서도 좋은 호르몬이 분비되어서 그만큼 오래 산다고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일리가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226. 집오리와 들오리라. 나쁘지 않은 표현이군, 하고 생각했다. 흡사한 동물로도 여겨지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르다. 그런 관계다.
232. 지금의 나를 가로로 썰어 본다면 분노와 공포가 반씩 흘러나올 게 틀림없다.
244. "복권을 책에 끼워뒀을 거라고 의심했는지도 몰라. 시간이 없어서 전부 가져간 거고."
말해보면서도 신빙성이 점점 사라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나는 어물거리다가 "자포자기로 한 번 말해봤습니다." 라고 대답했다.-220.쪽

현재 8
범인은 현장에 돌아온다. 바로 그 말이 정답이었다.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는 틀림없이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통계도, 과학도 아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힘 같은 것이 있는 게 틀림없다.
278. 산 넘어 산. 바로 그 말이 정답이었다.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는 틀림없이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통계도, 과학도 아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힘 같은 것이 있는 게 틀림없다.
358. 지친 나는 확인해야 할 것은 태산만큼 많은데도 다음에 만났을 때 물어보면 되지,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이란 행동해야 할 때일수록 내키지 않아 하는 생물인지도 모르겠다.-268.쪽

애완동물 살해범. 기분 나쁜 단어다. 증오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였다. 그들이 품고 있는 잔혹함과 거만함이 ‘애완동물 살해범’이라고 이름 붙인 순간 무척 표피적이고 죄가 가벼운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고 돈을 갈취하는 행위를 ‘삥’이라고 부르면 경박한 장난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약간 시간이 지나 진정되자 이번에는 다른 감정이 내 마음속에서 끓어올랐다.
공포로 충만한 마음속 깊숙이에서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분노였다.
367. 사람이란 신중하게 일을 진행해야 할 때일수록 성급한 행동을 하는 생물인지도 모르겠다.
- 고토미.-364~365쪽

"뒷문으로 도망치게 하면 불행이 기다리고 있어. 비극은 뒷문에서 일어난다고."
419. "이 세상은 원래 얼토당토않지. 안 그래?"
421. "내가 처음 시나를 봤을 때 딜런을 불렀잖아. 나는 그 딜런의 목소리를 좋아했어. 상냥하고 엄격한 데다 무책임하지만 따스해. 전에 가와사키가 말했었어."
"그게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그가 말했어."
"너는 이야기 도중에 끼게 된 것뿐이야. 사과할 필요 없어."
그 기묘한 격려에 약간 납득했다. 나는 내가 주인공이고 지금 이렇게 생활하는 ‘현재’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걸 깨달았다. 가와사키들이 체험한 ‘2년 전’이 진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주역은 내가 아니라 그들 세 명이다.-390.쪽

"온 세상의 동물이나 인간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잖아. 환생하는 기나긴 인생 속에서 우연히 만났는걸. 사이좋게 지내야지."
430~432
"밥 딜런."
라디오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그의 대표곡인 이었다.
"맞아."
가와사키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그 라디오카세트를 코인로커 안에 밀어넣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건 뭔가 특별한 의식일까? 나는 의아했다.
"하느님을 가두는 거야."
"하느님의 목소리를 로커에 집어넣고, 그렇게 하느님을 가둔다는 거야?"
"반복 설정을 해놓았으니까 계속 울릴 거야."
"이런 짓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신을 가두면 나쁜 짓을 해도 들키지 않는다고 말했어."
"근데 이렇게 한다고 정말로 하느님을 가둔 건 아니야."
"의식이란 게 원래 그런 거지."
"의식이구나?"
"부탄 사람은 대용품으로 속이는 게 특기거든."
나는 그의 개운한 얼굴을 보는 동안 사소한 의문이나 하잘 것 없는 상식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우리는 신을 가둔 거야."
이것은 나와 가와사키의 코인로커라고 생각했다.
바보스럽다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내안의 내가 있었지만 나는 그 녀석을 눈치 채지 못한 척했다.
- 우리는 좌우로 나뉘어 걸어갔다. 마치 끝없이 절대로 교차하지 않을 직선 위를 둘이 나아가는 것 같았다.-425.쪽

‘부탄 사람이건 어느 나라 사람이건 넌 내 소중한 이웃사촌이야.’라는 말만은 전하고 싶었다. ‘언젠가 부탄을 안내해 줘.’라고도.
440. 눈앞의 교차로를 귀여운 시바견이 가로지르는 것이 보였다. 까만 시바 견이었다. 털의 결은 좋았지만 목걸이를 하지 않아서 떠돌이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코가 오른쪽으로 비뚤어진, 특징이 또렷한 개였다.
시바 견은 멈춰서 나를 뚫어지게 보며 ‘돌아가니?’하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속으로 ‘돌아올 거야.’라고 대답하면서 그 옆을 지나쳤다.-4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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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절판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경우가 많다.
29. 나는 인간의 죽음에는 흥미가 없지만, 인간이 다 죽어서 음악이 없어져버리는 것만큼은 괴롭다.
30. 내 동료들은 일하는 사이사이 짬이 나면 음반 매장에서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다. 한눈팔지 않고 귀에 헤드폰을 댄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손님이 있다면, 아마 나 아니면 내 동료일 것이다.
32. 재즈든 록이든 클래식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음악은 최고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해진다. 아마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신이라고 해서 재킷에 해골 그림이 그려진 헤비메탈만 듣는 것은 결코 아니다.-25.쪽

나는 인간의 죽음에 관심이 없다. 일이라는 이유로 관여하고 있을 뿐, 담당하고 있는 상대의 인생이 어떠한 형태로 마침표를 찍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저 프로듀서의 직감이 옳다면 그리고 또한 만에 하나 그녀가 뛰어난 가수로 성공한다면, 더구나 내가 언젠가 음반 매장의 청취 코너에서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또 그 나름대로 유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이냐 뒤냐. 그것으로 정할 참이었다. ‘가’로 할 것인가 ‘보류’로 할 것인가. 그녀는 내일 죽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수명까지 살 것인가. 어느 쪽이든 나에게는 대단한 차이가 없으니 동전 던지기 점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전을 본다. 앞이었다. 어라, 하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앞이 나올 경우 ‘가’로 할 작정이었던가 ‘보류’로 할 작정이었던가 잊어버리고 말았다. 비는 한층 더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빗발에 들볶이는 듯한 심정으로 ‘뭐, 괜찮겠지.’하고 결정했다.
‘괜찮겠지. 보류로."-51~52쪽

인간에 대한 동정이나 외경의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만큼은 사랑한다.
99.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브라운 슈거> 혹은 <록스 오프>의 인트로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무사태평하면서도 의연한 로큰롤의 울림에 맞춰 후지타는 나타나리라. 어리석은 강직함을 발산하며 찾아온다. 그리고 죽지 않는다.
"후지타 형님이 질 리가 없어."
"약한 자를 도와 강한 자를 꺾는다."
라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뇌는 것을 나는 잠자코 듣고 있다.-73.쪽

지면은 마치 도자기와 같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바람이 불었는지 자작나무 가지에서 팔랑팔랑 눈이 흩날리며 지면으로 떨어져 녹는다. 그 설경이 서로 속삭이는 듯한 소리와 움직임을 나는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군."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한다. 음악을 듣는 시간은 부족했지만 이 광경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157쪽

"이런 대사가 있었어요. ‘실수와 거짓말 사이에 큰 차이는 없어. 5시에 온다고 하고서 오지 않는 것은 트릭이야. 미묘한 거짓말이란 거의 실수에 가까워.’ 라는."-179쪽

"저 놈만 없다면 내 인생이 편해질 텐데, 같은 계산요. 금전적인 면, 정신적인 면에서 이해손실을 계산하는 거죠."
"인간은 곧잘 계산 착오를 해."
240 "자주 생각하는 거지만,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이 가진 고통스러운 일 중 하나는 환멸이 아닐까요."
"의지하던 사람이 사실은 겁쟁이였다든가, 믿고 있던 영웅이 실은 담합에 능통한 교활한 사람이었다든가, 같은 편이 적이었다든가…."-235쪽

"여긴 말이야 강의 상류, 출발 지점이잖아. 그게 이 폭포야. 여기는 화려하고 사람도 많잖아. 그건 말이야 우리가 태어날 때와 닮지 않았어? 우리도 태어날 때는 이랬겠지? 야단법석에다 사람들의 주목도 받지. 다들 축하해주고. 하지만 그게 차츰 지나면 지금 보았던 것처럼 넘실넘실 소박하게 흘러가게 될 뿐이야. 뭔가 닮지 않았어?"
"하류도 나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해."-288쪽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어. 관 뚜껑이 덮이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말 모르니까."
330 "예를 들면 말이에요, 태양이 하늘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특별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태양은 중요하잖아요. 죽는 것도 똑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요. 특별하지는 않지만 주위 사람들로서는 슬프고 중요한 일이라고."-307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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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쉬 스토리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구판절판


"다 큰 어른이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겠지만, 반대 운동을 하는 주부들 틈에 끼어 있으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잖아. 나무는 숲에 숨기고 장승처럼 서 있는 남자는 장승처럼 서 있는 주부들 사이에 숨기라는 거지."-38쪽

곤란한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적당히 다른 것으로 위장하는 수법은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것이 성에 대한 것이거나 죽음에 대한 것, 공공연히 밝히기 힘들 것일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은폐할 가능성이 높다. -75쪽

제물이 된 자들의 흔적이 동굴 안쪽에 남아 있는 것이다. 목숨이 붙은 채로 갇혀버린 자들의 흔적, 가령 벽을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라든가 피로 쓴 저주의 말, 혹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한이나 증오의 덩어리 같은 것이 체류하는 묵중한 공기가 동굴 안쪽에 분명하게 존재할 것이다. 벽에 찬 습기나 부서진 돌멩이의 틈새기마다 숱한 영혼들의 음울한 집념들이 서려 있을지도 모른다.-124~125쪽

"공범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의심받을 염려가 없는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해.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공범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는 거지. 그런데 공범이라고 의심받지 않을 가장 적합한 인간은 누굴까."
- "공동체를 이끌어가려면 권위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통치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고 두려움의 대상도 되면서, 사람들을 견인해 나가야만 해. 그 대신 개개인의 공포나 불안, 불만을 받아줄 사람도 필요하지. 엄격하면 굴욕이, 만만하면 경멸이 생겨나지. 제대로 거느리려면 그 양쪽의 균형이 필요해."-127~128쪽

정보라는 건 진실의 정도나 증거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요에 반응하는 거야.-130쪽

"큰 문제가 있다. 사악한 것이 번창하고 올바른 것은 짓밟힌다는 흔해빠진 사실이다. 악은 응징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언젠가는 파멸한다는 일반적인 경우의 일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선한 자가 승리를 얻었다는 예는 최근 듣기 힘들지 않은가."
158
"아버지 말씀이, 중요한 것은 직업이나 직함이 아니라 준비라는 거예요."
"준비?"
"강한 육체와 흔들림 없는 마음. 그것들을 익히는 준비야말로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요."-157쪽

"내 고독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맹렬함 앞에 고래마저도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152
"내 용기가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젊음으로 햇빛을 반사하는 수면을 한층 빛나게 할 것이다."
177
"내 좌절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비통과 우스꽝스러움에 강에도 바다에도 살 곳이 없어질 것이다."-139쪽

이 단어는 좋아하고 저 단어는 싫어하는 경향이 저한테는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로서는 좋아하는 단어를 계속해서 선택해왔던 지난 6년의 작업이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강한 단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 단어를 선택하고 싶습니다.-310쪽

포테이토칩이라는 소설이 있으면 귀엽고 멋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컴퓨터 앞에서 포테이토칩이라고 10번 정도 입력해 봤는데 ‘역시 좋아!’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315쪽

"지금 갈 테니까." 이마무라는 머리카락을 세차게 쥐어뜯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여자의 깔보는 말투에 짜증을 느끼면서도, ‘정말로 죽으면 안 되는데’ 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린을 타고 갈 테니까!"하고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기린을 타고 갈 테니까 장소 말해"하며.-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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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구판절판


우리는 건물이 우리를 과거와 연결시켜주기를 바랄 수도 있고 미래의 상징 역할을 해주기를 바랄 수도 있다.
우리는 건물이 마음을 다독여주기를 바랄 수도 있고 흥분시켜주기를 바랄 수도 있으며, 조화의 느낌을 풍기기를 바랄 수도 있고 절제의 느낌을 풍기기를 바랄 수도 있다.-66쪽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내심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했으면서, 왜 자신의 작품을 주로 기술적인 맥락에서 정당화했을까?
그들의 신중함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 기준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비판에서 면제된 스타일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고딕이나 티롤 건축의 추종자들이 모더니즘 주택의 외양에 목소리를 높여 이의를 제기할 경우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면, 반드시 고압적이고 오만하다는 비난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민주정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학에서도 최종 심판관은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비난자를 막고 동요자를 설득할 수 있는 과학적 용어의 매력이 돋보이게 되었다.-71쪽

디자인된 물건은 모두 자신이 지지하는 심리적 또는 도덕적인 태도에 대한 인상을 심어준다.
본질적으로 디자인과 건축 작품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 내부나 주변에서 가장 어울리는 생활이다. 이 작품들은 그 거주자들에게 장려하고 또 유지하려 하는 어떤 분위기에 관해 말한다.-77쪽

아름답다는 느낌은 좋은 생활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물질적으로 표현되었을 때 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건물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것이 어떤 개인적이고 신비한 시각적 선호에 거슬렸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올바른 존재감각과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80쪽

건물이나 사물이 물질적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에도 관심을 가진다면, 한곳에 모인 돌, 쇠, 콘크리트, 나무, 유리의 배치가 자신을 표현하는―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의미심장하고 감동적인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묘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할 필요가 있다.
하얀 벽 안에 20세기의 추상 조각들을 모아 놓은 미술관에서 우리는 3차원적인 덩어리들이 의미를 얻고 또 전달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얻는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의 설비와 주택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지 모른다.-82쪽

때로는 거대한 귀마개나 뒤집힌 잔디 깎는 기계를 연상시키는 물체를 두고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웃음을 터뜨리기는 쉽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해몽이 꿈보다 좋다고 비난하는 대신, 추상 조각가들이 온갖 종류의 비구상적인 대상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에 한 번쯤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뭇조각과 줄, 석고와 금속 장치를 이용해 우리에게 커다란 관념들, 예를 들어 지혜나 친절, 젊음이나 노쇠와 관련된 관념들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언어로 또는 인간이나 동물을 모방한 형상으로 전달하는 것만큼이나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조각가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재능이다. 실제로 위대한 추상 조각가들은 독특한 분열된 언어로 우리 삶의 중요한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뒤집어 말하면 이 조각가들 덕분에 우리는 평소와는 달리 건물이나 가구를 포함한 모든 사물의 소통 능력에 강렬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미술관에 가서 영감을 얻고 나면 샐러드 사발은 샐러드 사발에 불과하다는 이전의 산문적인 믿음이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 이제는 샐러드 사발에도 희미하기는 하지만, 완전성, 여성성, 무한성 등 의미 있는 연상들이 머문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책상, 기둥, 아파트 건물 같은 실용적인 물체를 볼 때도 우리 삶의 중요한 주제에 관한 추상적인 표현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85쪽

활자로 찍은 글자처럼 작은 것에서도 풍부하게 발전한 개성을 탐지할 수 있으며, 그 삶과 백일몽에 관하여 어려움 없이 단편소설 하나라도 써낼 수 있다. 헬베티카 활자 ‘f'의 곧은 등과 빈틈없는 꼿꼿한 태도는 정확하고, 깔끔하고, 낙관적인 주인공을 암시한다. 반면 폴리필루스 활자는 그 숙인 머리와 부드러운 이목구비 때문에 졸린 듯한 느낌, 수줍은 모습으로 시름에 잠긴 듯한 느낌을 준다.-89쪽

진정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란 우리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투사를 견딜 만한 내적 자산을 갖춘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런 작품은 좋은 특질을 단지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현한다. 따라서 시간적이고 지리적인 기원을 넘어 살아남고, 최초의 관객이 사라지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위대한 작품은 우리의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속 좁은 인상의 밀물과 썰물 위에 우뚝 서서 자신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
108쪽.
건축이나 디자인 작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번영에 핵심적인 가치를 표현한다는 사실, 우리의 개인적 이상이 물질적 매체로 변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102쪽

우리가 환경에 민감한 이유는 인간 심리의 곤혹스러운 특징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 내부에 수많은 자아를 품는 방식 말이다. 그 모든 자아가 똑같이 ‘나’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불협화음 때문에 어떤 분위기에 들어가면 스스로 나의 진정한 자아라고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불평하기도 한다.-110쪽

우리 주위의 재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품고 있는 최고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성실과 활력이 지배하는 정신 상태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속으로 해방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깊은 의미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방 전체와 마찬가지로 그림 한 장도 우리 자신에게서 사라졌던 의미 있는 부분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125쪽

애초에 우리가 예술을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거의 언제나 불균형의 위험, 우리의 극단들을 조절하지 못할 위험, 삶의 커다란 위험물들―권태와 흥분, 이성과 상상, 단순과 복잡, 안전과 위험, 내핍과 사치―사이의 중용을 놓칠 위험에 빠져 있다는 표시다. -166쪽

취향 뒤에 놓인 심리적 기제를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꿀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그냥 무시해 버리는 태도는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이 결여되어 있기에 저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하고 물어야 한다. 그들의 선택에 열광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들의 박탈감은 이해할 수 있다. -175쪽

취향의 충돌은 여러 힘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파편화하고 고갈시키는 세계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 우리가 균형을 잡지 못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도 취향의 스펙트럼에서 계속 새로운 부분, 새로운 스타일로 이끌린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이 현재 우리 내부의 그림자 속에 놓여 있는 것을 집중된 형식으로 구현할 때 그것을 아름답다고 선언하게 된다. -178쪽

순진하게 민속적이고 이국적인 느낌을 갈망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라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차이가 건축적 수준에서 적절하게 표현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바람일 뿐이다. 나는 내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것, 과거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전등스위치, 그 연장선상에서 건물 전체를 원했다.-236쪽

<겐지 이야기>의 가장 훌륭한 번역이 개별 단어에는 광범한 자유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다. 꼼꼼하게 단어만 그대로 옮겨 놓는다고 해서 원래의 의도에 충실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65
설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안다고 믿었던 것을 씻어내고, 끈질기게 우리의 조건반사 뒤에 감추어진 기제를 쪼개보고, 불을 끄거나 수도를 트는 것 같은 일상적인 행동의 신비와 아연할 정도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242쪽

우리는 건물이 우리 뜻에 따라 지어진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 한다. 불도저나 크레인의 방향을 안내하는 미리 결정된 각본은 없다. 잃어버린 수많은 기회를 아쉬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더 나은 쪽으로 환경을 조성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믿음을 버려야 할 이유는 없다.-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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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소한 일상 - 다자이 오사무 산문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시공사 / 2007년 3월
품절


W라는 이름도 기억 못하고 그야말로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얼굴조차 잊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로 건망증이 심하다. 하지만, W군이 창문에서 불쑥 내민 둥근 얼굴은 컴컴한 무대 한가운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W군도 내향적인 사람이어서 나처럼 바깥에서 노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때 꼭 한번 나는 W군을 보았고, 그것이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천연색 사진으로 찍어둔 것처럼, 영상이 흐려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 있었다. 나는 얼굴을 엽서에 그려보았다. 마음의 영상대로 그릴 수 있어서 기뻤다. 분명히 주근깨가 있었다. 주근깨를 점점이 뿌려서 그렸다. 귀여운 얼굴이다.-16~17쪽

뭐니뭐니해도 정말 친한 사람과 집에서 느긋하게 마시는 것보다 큰 즐거움은 없는 것이다. 마침 술이 집에 있을 때 훌쩍 친한 사람이 찾아와 주면 정말 기쁘다. 멀리서 친구가 오니 아니 즐거우랴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20쪽

술이 깨면 후회도 심하다. 땅바닥을 구르면서 와, 하고 크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 부끄럽고 후회가 되어 글자 그래도 뒹군다. 그럼 술을 관두면 될 텐데, 친구의 얼굴을 보면 역시 이상하게 흥분되어 겁에 질려 떠는 듯한 전율을 전신에 느꼈고,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이다. 성가신 일이다. -21쪽

모처럼 이런 시골 구석까지 와 주었는데 내가 아무것도 대접하지 못해서, 모두 일종의 쓸쓸함이나 환멸을 안고 돌아간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금방 걱정이 먹구름처럼 전신에 퍼져, 이불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W군이 우리 집 현관에 술 한됫병을 몰래 놓고 간 것을 그날 아침 처음 발견하고, W군의 호의가 견딜 수 없이 마음에 사무쳐서 그 주변을 맨발로 뛰어다니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23~24쪽

왜 안 쓰나? 사실은 몸의 상태가 조금 안 좋아서, 라고 궁지에 몰려서 눈을 내리깔고 애처롭게 고백하곤 하지만, 담배를 하루에 오십 개비 이상 태우고, 술은 마셨다 하면 보통 한 되 이상 쉽게 마시며, 그리고 나서 오차즈케를 세 공기나 쑤셔 넣는 그런 병자가 어디 있어. 요컨대 게으른 것이다. 언제까지고 이래서는 나는 도저히 가망 없는 인간이다.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은 나로서도 괴롭지만, 더는 자신을 응석받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괴로움이니 고매라느니 순결이니 순수이니, 그런 말은 이제 듣고 싶지 않다. 쓰라고, 만담이든, 콩트든 상관없다. 쓰지 않는 것은 예외 없이 나태해서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맹신이다. 사람은 자기 이상의 일도 할 수 없고, 자기 이하의 일도 할 수 없다. 일하지 않는 자에게는 권리가 없다. 인간 실격,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심각한 얼굴로 책상머리에 앉지만, 막상 아무것도 안한다. 턱을 괴고 멍하니 있다. 별반 심오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게으름뱅이의 공상만큼 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는 것은 없다. 나쁜 말은 천 리를 간다고 하지만, 게으름뱅이 공상도 졸졸 한없이 흘러 내달린다.-27~28쪽

가끔은 제대로 된 소설을 써라. 자네, 요즘 겨우 세상에서 평판도 좋아졌는데 또 이런 트럼프라니, 곤란하잖아. 세상 사람들이 자네가 아직 병이 안 나은 게 아닌가, 의심할지 몰라.
내 좋은 친구들은 그렇게 말하며 염려해 줄지 모르지만, 이제 걱정해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아직 노인이 아니다. 요즘 그걸 깨달았다. 알고 보니 모두 이제부터다. 미숙하다. 문장 하나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쓰고 있다. 아직 자기 생각으로 꽉 차 있다. 화내고 슬퍼하고, 웃고 몸부림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형편이다. 역시 서른한 살은 서른한 살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깨달은 것이다.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이것을 고마운 발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전쟁과 평화」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난 아직 쓸 수 없다. 그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절대로 쓸 수 없다. 마음만은 다다랐어도 그것을 계속 유지할 역량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슬프지 않다. 나는 문학을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37~38쪽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꼴사나워서 낯 뜨거워 견딜 수가 없다. 그래도 이 이야기는 내 좋은 친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꼭 써 두고 싶은 것이다. 순수를 추구하다가 질식하기보다는, 나는 탁해도 크고 싶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별것 아니다. 지기 싫은 것이다.
이 작품이 건강한지 건강하지 않은지, 그것은 독자가 결정해 주리라 생각하지만, 이 작품은 결코 엉터리가 아니다. 엉터리는커녕 나는 필사적이다. 이런 소설을 지금 발표하는 것은 나한테 불이익이 될 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모험을 해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여러모로 헤맬 것이다. 괴로워하는 것이다. 파도는 거칠다. 그 점은 자만하지 않는다. 충분히 조심할 정도로 조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39쪽

대개의 경우, 나는 그저 쓴웃음으로 맞아질 따름이다. 많은 사람에게 나는 어쩐지 껄끄러운 그저 시건방진 존재였다. 하지만 나는 모두를 두려워하고, 그리고 모두를 조금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즐겁게 하고, 자신을 갖게 하고 크게 웃게 하고 싶어서, 그것만을 염원하였다. 나는 도둑놈 흉내를 냈다. 거지 흉내조차 내 보였다.

44
나는 달한테 편지를 받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포였다. 가만히 있지 못해 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고 창을 열어젖혀 달을 보았다. 달은 낯선 타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말을 걸려다가 나는 화들짝 놀라 숨을 죽였다. 달은 그래도 모른 척 하고 있다. 냉혹하고 엄격하여, 처음부터 인간 따윈 문제 삼지도 않는다. 차원이 다르다. 나는 흉측하게 우뚝 서서 쓴웃음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니고, 그런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신음했다. 그대로 작은 여치가 되고 싶었다.-41~42 쪽

이렇게 힘든 꼴을 당하는 것도 결국 평소의 나태함 때문이다. 이래서는 정말 안 되겠다. 각오만은 대단하지만 지금처럼 게을러서는 제대로 된 소설가는 될 수 없다.

61
꽃 피지 않는 수레국화
시생멸법(是生滅法), 성자필쇠(盛者必衰).
차라리 둔갑해서 나타날까 봐.

67
나는 나로서 잊지 못할 일만을 단편적으로 쓰려고 한다.-54쪽

되돌아보면 저로서는 확실하게 이러이러한 동기로 문학을 지향했다는 것을 모르겠고, 거의 무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저는 어느새 문학이란 들판을 걷고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정신을 차리자 그야말로 갈 길도 천 리요, 돌아갈 길도 천 리 라고나 할까. 꼼짝없이 문학이라는 들판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깨닫고 무척 놀랬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116
저의 세상 사람에 대한 감정은 역시 수줍습니다. 키를 두 치 정도 낮춰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실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점에도 제 문학의 근거가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112쪽

나는 집에서 늘 농담만 한다. 그야말로 마음에 고민과 번뇌가 많기 때문에 겉으로는 쾌락을 가장하지 않을 수 없다고나 할까. 아니, 집에서뿐만 아니라, 나는 남을 대할 때에도, 아무리 마음이 괴롭고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거의 필사적으로,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손님과 헤어지고 나면 나는 피로에 휘청거리고 돈 문제, 도덕 문제, 자살을 생각한다.
남을 대할 때만이 아니다. 소설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슬플 때 도리어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나 스스로는 가장 괜찮은 봉사라고 생각하지만, 남들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다자이란 작가도 요즘은 경박해, 재미만으로 독자를 낚는다, 극히 안이하다고, 나를 경멸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 나쁜 일인가? 점잔 빼고 좀처럼 웃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인가?-132쪽

자기의 작품이 좋은지 나쁜지는 자기가 가장 잘 안다. 천에 하나라도 스스로 좋다고 인정한 작품이 있다면, 그보다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각자 자기 마음에 잘 물어볼지어다.
- 소소한 행복에 관해.

183~184
어떤 한 남자의 정진에 대하여.
나는 혈안이 되어 진실만을 좇았습니다. 나는 지금 진실에 따라 붙었습니다. 나는 진실을 앞질렀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달리고 있습니다. 진실은 지금 내 등 뒤에서 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스갯소리도 못 됩니다.-170쪽

아무것도 없다. 잃어버릴 아무것도 없다. 진정한 출발은 여기로부터? 쓴웃음.
웃음. 이것은 강하다. 문화의 궁극적 불꽃이다. 이지도 사색도 수학도 일체의 교양의 극치는, 필경 포복절도하는 큰 웃음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아, 교양은, 교양이라니, 역시 그런 것에 얽매여 있으니까 포복절도감이다.
231~232
내게는 아직 이렇다 자랑할 수 있는 작품이 없어서 큰 소리는 못 치지만, 그것은 조금 묘한 창작법이다. 말을 꺼내려다 더듬거리게 되니 말해서는 안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괴상한 방법이다. 하긴, 전부터 무의식적으로 해 온 것을, 요즘 어른이 되어 겨우 알아챈 것뿐인지도 모른다. 말을 하면 너무 당연한 얘기라 뭐야, 아무것도 아니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200쪽

남의 일을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보다는 자신의 꼬락서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나는 이 기회에 좀 더 깊게 자신을 조사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절호의 기회다.
… 느슨함을 경멸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의외로 안이하게 살고 있다. 타인의 안이함을 조소하면서, 자신의 안이함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자기변명은 패배의 징조이다. 아니, 이미 패배의 모습이다.-233~234쪽

누구나 처음에는 본보기를 좇아 연습을 쌓지만, 창작자란 자가 언제까지나 본보기에서 못 벗어나는 것은 실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 풍차가 역시 풍차 이외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대로 풍차를 묘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은 풍차가 풍차로 보이지만, 악마처럼 묘사하지 않으면 예술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뻔한 궁리를 이리저리 하여 낭만적임을 자처하는 멍청한 작가도 있습니다. … 그저 진실하고 우직하게 인상의 정확을 기하는 일 한 가지만 노력해보세요. 강력한 하나의 주관을 지니고 나아가라!
245
표현하고 싶은 현실을 기를 쓰고 쫓아가고 있었다. 그 정색하고 기를 쓰는 점이 신선했다.-242~243쪽

스스로 한 일은 그렇게 확언하지 않으면, 혁명이고 뭐고 실현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하고도 다른 일이 하고 싶어서 인간은 이래야 한다, 라는 등 말하는 동안은 인간 내면으로부터의 혁명이 언제까지고 안 되는 것입니다.
288~289
원래 작가와 평자와 독자의 관계는, 예를 들면 정삼각형의 각 정점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와 같은 위치에 각각 밖을 향해 앉아 있어서는 말이 되지 않지만, 각각 안으로 마주앉아서, 작가는 말하고 독자는 듣고 평자는 혹은 작가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혹은 미심쩍은 것을 확인하고, 혹은 독자를 대신해서 중지를 요청한다. 요즈음 바보 교수들이 묘하게 뻔뻔하게 나와서, 예를 들면 직선상에 두 점을 놓고 작자와 독자라고 한다면, 교수는 그 동일선상의, 게다가 두 점의 중간에 끼어들어 갑자기 ‘히히히’이다. 이야기 도중의 작가도 독자도 정말이지 당황스럽고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262쪽

예전에 그랬으니까, 지금도 똑같은 운명을 따를 자가 있다는 식의 건방진 독단은 말아 달라.
299
용서한다 안 한다는 그런 엄청난 권리를 자기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다. 도대체 자기 자신은 어떤데? 남을 심판할 분수도 아닐 텐데 말이다.-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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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09 00:28   좋아요 0 | URL
속았......습니다. (뚱-)
저는 문님의 '소소한 일상' 인줄 알았단 말입니다. (흥)
그나저나, '그 불쌍하기 그지없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언제 들려주실겁니까? (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