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를 읽고 클레어 키건의 최근작, 작년 북커상 쇼트리스트에 올랐던 Small Things Like These를 읽었다. 맡겨진 소녀와는 다른듯, 비슷한 이야기. 역시나 사람들 사이의 보살핌과 연대를 고민한다. 

만40살을 앞둔 석탄, 목재상 빌리 퍼롱은 딸 다섯을 두고 성실 근면하게 일하며 산다. 겨울이 다가오면 그의 일은 더 바쁘다. 매일 매일 챗바퀴 돌듯 사는 와중에 문득 가슴 한켠이 허전하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좀 생각도 하고 그러면 어떨까 하는 어쩌면 복에 겨운 고민이 움틀거린다. 실은 그가 특별한 성장과정을 거쳤기 때문인데, 거짓말처럼 만우절날 아비 없이 태어나 이만큼 가족을 이룬 것만 해도 감사할 처지인 것이다. 만일 그때 16살에 임신한 자신의 어머니 사라를 주인집 마님이 (다른 마을 주민들 처럼) 몰라라하고 내쫓았더라면 어쩔 뻔 했나. 

날은 추워지고 나무는 헐벗고 집집마다 석탄을 주문하고 마을 위 수녀원과 그 부속 세탁소에서도 주문이 들어온다. 성탄절이 다가올수록 어려운 이웃들이 눈에 밟히는 빌리. 경기가 안좋아 문을 닫는 공장이나 일터가 늘어가고 술로 도피하는 이들도 많다. 자신의 커가는 딸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세상의 고난을 빗겨가며 성장하기를 바란다. 생활력이 강하고 다부진 부인은 그런 그를 보며 '자신의 과오 탓으로 고생하는 이들'까지 생각하기엔 자신의 가족 보살피기가 더 바쁘다고 말한다. 남편의 무른 성정이 못마땅하지만 그의 성실함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성탄절 사흘 전 새벽, 수녀원 부속 세탁소에 간 빌리는 벌 받는 중인 게 분명한, 그 추운 날 헛간에 있는 소녀를 본다. 그녀는 아이를 빼앗겼다고 벌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수녀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영 마음에 걸리는 그 소녀의 이야기는 성탄절 이브 미사 내내 빌리를 괴롭힌다. 그리고 평생 갖고 싶었던 성탄절 선물인 아빠 그리고 직소 퍼즐을 생각한다. 누가 내 아버지일까. 누가 내 진정한 크리스쳔 이웃인가.

소설은 성탄절을 배경으로 아버지 없이 태어난 소외된 모자 가정과 그들을 냉대하거나 보살피는 공동체/개인들을 보여준다. 마리아는 나이 많은 요셉의 선의가 없었더라면 제대로 출산이나 할 수 있었을까. 예수가 태어남을 축하하는 성탄절에 말없이 노동에 착취당하며 아이 마저 빼앗긴 많은 미혼모들이 실제로 20세기 후반까지 아일랜드에 있었다.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희생당한 여성과 아이들(죽거나 해외로 입양보냄)이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아일랜드 정부는 2013년에야 총리Enday Kenny가 정식으로 이 악행에 대해서 공식 사과했다. 이 소설에 Enda라는 아이 이름이 나오기도 한다. 2022년 작고한 퍼트리샤 버크 브로건은 수습수녀로 접하게된 이 세탁소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한 착한 남자의 성탄절 이야기로 보이는 이 소설은 자모원 세탁소의 가혹한 상황에 집중하면 사회 고발 소설로도 읽힌다. 소설의 결말에 다가갈수록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빌리는 성탄절 이브,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일 그 사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거리를 헤매고 크리스 마스 트리와 아이싱 까지 완벽한 케익을 만든 가족에게 돌아가는 길에 결단을 내린다. 

소설 중에 몇 번이나 언급되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처럼 이 책은 성탄절의 새로운 클래식이 된 것 같다. 성탄절의 사랑을 베풀겠다고? 위선을 벗고 진짜 그들이 필요한 게 뭔지 생각하고 행동해봐! 우리 빌리처럼. 성탄절에 멋진 표지의 번역서가 나오기를 바란다. (빌리네 딸들처럼 편지도 써볼까?)


페이퍼백이지만 앞 뒤 표지 겉날개를 크게 디자인하고 접힌 안쪽에 그림이 더 있다. 아름다운 시골 마을 표지 만큼 멋진데 앙상한 나뭇가지에 앉은 외로운 새 한 마리 씩. 이 책의 전체 분위기를 알려주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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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3-05-23 0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_@;; 원서까지 이미 읽으시다니요@_@;;; 클레어 키건의 이름을 기억하겠다 하셨는데 바로 행동으로 옮기셨군요. 존경합니다^^

유부만두 2023-05-23 07:57   좋아요 1 | URL
짧은 소설이라 바로 행동!! 했습니다. 이 소설은 ‘맡겨진 소녀‘보다 더 묵직했어요.

Jeremy 2023-05-28 15: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나서 Claire Keegan 한테 관심 생겨서
여러 잡지에 기재된 단편도 찾아보고
<Foster> 과 <Antarctica> 까지 읽었는데
<Small Things Like These>에 대한 페이퍼 알라딘에서
읽게되니 반갑네요.

유부만두 2023-05-30 08:14   좋아요 1 | URL
작년부터 키건의 소설이 좋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표지 때문에 앨리 스미스 사계가 생각났어요. 그만큼 어려울까봐 미뤄두었다가 Foster의 번역본을 읽고 너무 좋아서, 그리고 책이 얇아서 용기를 냈지요. 역시 읽기를 잘했어요. ^^
성탄절 모티브가 과하게 반복된다 싶다가도 인물들의 섬세한 속내 묘사가 맘에 듭니다. 단편집도 주문해 두었고요.

psyche 2023-06-18 0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맡겨진 소녀 읽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도 읽어봐야겠다.

유부만두 2023-07-01 09:49   좋아요 0 | URL
얇은 책에 여러 겹의 이야기가 담겨있어요. 겨울에 읽으시면 (웨이팅이 길다니까... ㅎㅎ) 더 어울릴 책이에요.
 



알라딘: 북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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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5-20 1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소식 감사합니다 😄

건수하 2023-05-20 14: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후원자명 고민 중입니다. ‘여전히미쳐있는’ 수하 이런 걸로? ^^

독서괭 2023-05-20 14:56   좋아요 3 | URL
너무 기니까 여미쳐독서괭 고민중임다

책읽는나무 2023-05-20 21:30   좋아요 2 | URL
ㅋㅋㅋ
여미쳐ㅇㅇㅇ 괜찮네요^^
여미친ㅇㅇㅇ도 괜찮을 듯요ㅋㅋㅋ

유부만두 2023-05-21 07:44   좋아요 1 | URL
여전히 미친 독자들이 많아요! ㅎㅎㅎ

책읽는나무 2023-05-21 08:26   좋아요 1 | URL
ㅋㅋㅋ
고민 고민하다가 여미쳐 책나무로 펀딩했어요^^
작가들의 이름만 봐도 이 책은 펀딩 안할 수가 없네요.
고급정보 감사합니다. 만두님^^

독서괭 2023-05-20 14: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후속편은 얇네요 600쪽 정도라니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05-21 07:44   좋아요 1 | URL
그러네요. 근데 목차로 보니 다루는 작가들이 어마어마해요.
 


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인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 P28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 P69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구나."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보이니?" 아저씨가 말한다.
"네." 내가 말한다. "저기 보여요." - P75

처음에는 어려운 단어 때문에 쩔쩔맸지만 킨셀라 아저씨가 단어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내가 짐작해서 맞추거나 비슷하게 밎출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나는 짐작으로 맞출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그런 식으로 계속 읽어나갔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출발하는 것이 느껴지고, 전에는 갈 수 없었던 곳들까지 자유롭게 가게 되었다가, 나중엔 정말 쉬워진 것처럼.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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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5-18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짧은(?) 책인 줄 몰랐어요!

유부만두 2023-05-18 12:16   좋아요 1 | URL
근데 문장을 다듬고 골라서 쓴 느낌이라 가볍지 않아요. 아직 맘이 먹먹해요.
 

http://bookple.aladin.co.kr/~r/feed/1508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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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는고대 로마편인데, 읽다보니 로마인들과 피츠제럴드의 공통된 졸부 감성, 친구들만 읽는 책의 의미(예전엔 모르는 독자가 생긴다는 건 부정적 의미였다), 책 써서는 돈 못 번다는 고금의 진리, 채링크로스 84번지와 서점 이야기 더해서 돈키호테 속에 숨긴 마르크스와 금서 이야기로 흘러간다. 정신 없이 읽다보면 다시 로마. 영원의 책 맞다. 


고대 로마의 부는 노예 무역이 받쳐주었다. 노예는 돈으로 바뀌었고 여러 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로마에서 읽기는 낭독이었다. 독자의 몸과 목소리를 저자의 생각/글에 내어주는 행위라 주로 노예가 맡은 일이었다. 이 책에선 '비역'이라는 표현까지 썼는데,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도 노예가 필사한 책을 노예가 낭독하게 시켜서 듣고, 노예가 서가 정리를 잘 해낸 걸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 노예가 책을 훔치려다 걸려 도망갔다고 모냥 빠지게 타지방 총독으로 나가있는 친구에게 노예 잡아달라는 청탁 편지까지 썼다. 이렇게 로마의 노예가 글을 알고 읽을 필요가 있던 것과 반대로 미국의 노예들은 글을 알면 처음엔 손가락, 그다음엔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시대와 장소를 건너 뛰며 저자는 익숙하거나 낯선 인류사의 많은 책들과 영화를 언급한다. 그리고 나는 검색+장바구니로 호응한다. 


금서 이야기엔 루슈디, 오비디우스 이야기도 나오는데 (엇그제 루슈디가 The Freedom to Publish award at the British Awards를 받았다. 피습으로 한 눈을 잃은 그는 안경의 한 쪽이 검은데 그는 쿨하게 땡큐! 라고 줌 영상으로 수상 소감을 말했다.) 소아성애가 만연했던 로마에서 오비디우스는 35세 이상의 여인에 대한 호감과 진짜 사랑의 기술을 써내서, 권력자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눈 밖에 났으니 귀양길에 올라야 했다. 불타오르는 책과 그 책들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화산이 터지는데 책 두루마리 챙기려는 사람 있었고요, 그 숯더미를 첨단기술로 투사, 읽어내는 사람도 있다고요. 그리고 책에서 지워지고 배척당한 여성들도 있다. 웅변의 시대에 침묵을 강요당한 여성에 대한 고민도 이 책에서는 다룬다. 유피테르에게 혀를 뽑힌 님프 타키타를 숭배하는 유행이 있었다는데 이러한 혀 코르셋 문화가 의미하는 건 노골적이다. 저자는 한계가 없이 펼쳐지는 파피루스 갈대 속 그 모든 목소리와 이야기를 상기시키려 애쓴다. 그 진심이 느껴진다. 스페인어 하나 배우고 갑니다. junco 훈코 갈대.  


책의 서문엔 고대의 책 사냥꾼들이 책을 사냥하러, 빼앗으러 말을 달린다. 그들은 책을 읽거나 그 내용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값나가는 갈대 두루마리를 최대한 모아들여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쌓는다. 수미쌍관으로 이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들은 1930년대 미국의 여성 기마 사서들이다. 

https://blog.aladin.co.kr/yubumandoo/11458500

오지에 사는 국민들의 교육을 위해 매주 말을 타고 사서들이 무거운 책을 대출해준다. 이들은 책의 내용, 그 안에 담긴 영원의 이야기, 그 아름다움을 최대한 나누려는 사람들이다. 


"같은 이야기를 공유할 때우리는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다." 저자의 말이면서 또 내 말이라고 막 우기면서 나 이제 저자 바예호 선생이랑 아는사이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도 이제 낯선 사람 아닐겁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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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5-18 0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 할 말이 많아지지 않습니까!

유부만두 2023-05-18 10:19   좋아요 2 | URL
그렇지요!!! 가슴이 웅장해지고 말입니다!

깐도리 2023-05-1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