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생 요리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다가... 옛날 생각이 났다. 응답하라 1995.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여름, 남편과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새댁은 할 줄 아는 음식이 거의 없었다. 시댁에서 잠깐 살면서 익힌건 기본 밥하기와 국끓이기 뿐이라 미국 생활 첫 두어 달은 불고기는 못먹고 (얇게 썬 소고기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도, 불고기 양념법도 몰랐다) 스테이크만 호기롭게 구웠다. 지금도 신물나는 A1소스. 아, 네이버도 없던 손도끼 시대여.

그런 나에게 이 책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 (초판1994)은 구원이었다. 기초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저자 장선용 선생님의 미국식 계량법과 현지 재료로 할 수 있는 요리(아니, 밥 차리기) 방법은 사진은 없었지만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게 도와주었다. 1년 안에 김치까지 담그게 (맛있게 라는 형용사 빼고) 되었다. 물론 불고기도 만들었고. 미국 베이컨 두께의 고기라도 `버쳐`에게 썰어달라 따로 주문하기가 정말 어려웠...( 눈물 좀 닦고요...)심지어 팥을 삶아 설탕을 넣고 팥소를 만들어 찐빵도 쪄냈는데 (옙, 반죽도 했죠, 으쓱) 양조절을 못해서 사흘간 아홉끼를 찐빵만 먹은 적도 있다.

어젯밤 백선생이 쉬운 방법으로 요리 초보 남연예인들을 가르치는 걸 보니, 난 이제 주부 (구... 팔... 삼단?)면서도 그 초보들 심정이 아주 잘 이해되었다. 얼마나 신기하고 기쁜지 그 맘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 이제 라면만 먹지 않아도 돼!!) 어느 평론가는 백선생의 조리법엔 설탕이 너무 많다고 타박하는데, 예전 어머니들, 우리 친정 엄마. 이미 할머니가 된 우리 엄마나 책의 저자 장선용 선생님(..제2의 엄..마..라고 부르고 싶...)의 조리법에서 설탕과 꿀의 양은 흘러 넘친다;;; 초보인 내 입맛에도 너무 달아 요리법에서 많이 덜어낸 기억이.. 흔적이 남았다. 양념으로 얼룩진 요리책....20년 넘은 이 책을 비닐로 싸두고 간간이 꺼내면서 젊던 내 새댁 시절을 추억 한다. 아.. 센티해지는 기분... 우리 여보 오빠야한테 전화해야겠다...오늘 저녁엔 잡채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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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7-2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앙- 이 글은 한 편의 근사한 에세이네요. ` 사흘간 아홉끼를 찐빵만 먹은 적` 에서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묻어나는...
책 굉장히 낡았네요. 정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어요. 이건 너무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할 것 같아요. 게다가 단순히 보기만 한 건 아니신것 같아요. 메모해서 더 크게 활용하신 듯요.

유부만두 2015-07-29 19:28   좋아요 0 | URL
네. 요리책에 가감 표시도하고 다른 요리법도 적어두고 그랬어요.
가끔 열어보면 옛날 생각이 나요....
찐빵 얘긴 20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해요. 이웃에게 나눠 주고도 남아서 먹다 지쳤죠. 요리에 자신이 생긴 다음엔 유학생들을 불러모아 밥도 막 해먹였어요... ^^;;;;
 

강사님 말씀 중 거슬리는 부분...

1. 남학생 어머님들, 아들 공부만 시키지 마시고 운동 시키세요. 어느 초등학교는 교감 선생님 한 분 말고는 다 여선생님이라고 합니다. 성역할 교육이 힘들어요. 수학 영어 학원만 보내지 마시고 태권도 축구도 가르치세요. 성역할 가르치셔야해요.

2. 전 월급이 박해도 저희 회사에 자긍심이 있어요. 회식때 후배가 묻더라구요. 제가 만일 C사에 간다면 어떨거 같냐고. 그래서 말해줬죠. 내가 C사로 간다해도 바뀔건 없다. 아마 술 먹는 내 옆에 너 대신 이쁜 언니가 앉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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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5-07-29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런 용감하신 분이! 사석의 농담도 아니고...

유부만두 2015-07-29 08:39   좋아요 0 | URL
뭐라고 주최측에 이야기를 해야할까... 생각하다가 소심하게 여기에 적었어요....

자유도비 2015-07-29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친 놈이네요. 주최가 어디에요? 제가 홈페이지 올려 건의하고 싶네요.

유부만두 2015-07-29 12:54   좋아요 0 | URL
하아..... 제가 그러려다 참았어요... ㅜ ㅜ
 

핸드폰 북플로 깨작깨작 올리다가 컴퓨터로 쓰니 아주 시원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더 멋진 포스팅이라고는 차마....)

 

지난주에 에디트 피아프 영화 <라 비 앙 로즈>를 보았는데 첫장면이 1918년 파리의 슬럼가, 벨빌이다. 1915년생 에디뜨가 서너 살 무렵, 가수인 엄마는 아이를 내버려둔다.

 

 

그런데 바로 이 슬럼가 Belleville, 이름 대로라면 '아름다운 마을'은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꼬마 모모가 사는 동네다.

 

 

모모는 창녀의 아이들을 키워주는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산다. 기구한 운명의 유태인 할머니 로자 아줌마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갈곳 없는 아이들은 창녀촌에서 자라났다. 어린 에디뜨는 엄마에게 버림받고 (방임되고) 아빠가 데려가더니 브루곤느 지방의 친할머니 (네, 그쪽 직업을 가지신 분)에게 맡겨졌다. 영양실조로 눈이 멀기 까지 했다니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서 꼬마가 살았을지 상상이 된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사진 왼쪽의 머리 긴 여인 티틴느가 엄마 못지 않게 (아니, 진짜 엄마 처럼) 에디트를 아껴주었다. 그리고 오른쪽의 여인은 친할머니.

그런데...어쩐지 저 친할머니가 자기 앞의 생의 영화 속, 로자 아줌마 역을 맡을 시몬느 시뇨레와 너무 닮았다. 하지만 시몬느 시뇨레는 1985년에 사망해서 2007년 영화에 나올리가 없....그래서 다시 검색을 했더니, 아, 이 여인은 바로 시몬느 시뇨레의 친딸 캐서린 알레그레뜨였다.

 

 

 

초로의 나이가 된 에디뜨, 해변에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여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장면. 기자가 젊은 여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에디뜨는 말한다. "Aimez" (사랑하세요). 더 어린 소녀들에게도 역시 같은 말, "사랑하세요".

이 말은 우리의 모모가 로자 아줌마를 보내고나서, 사람은 사랑해야한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생각나게 했다.

 

 

 

표지의 이 꼬마는 로맹 가리, 였을까. 새벽의 약속, 을 읽다보면 자꾸만 시몬느 시뇨레를 닮은 그의 엄마가 떠오르는데 (학습효과), 그 엄마가 애지중지 키운 이 꼬마의 밝은 미소는 이미 '사랑'을 아는 표정이다.

 

사랑해야 한다..... 지나온 세월이 후회스럽지 않다고 노래하는 에디뜨, 그리고 그녀의 장밋빛 인생에서도, 모모 앞에 놓인 그 아이의 인생에도 사랑만큼 중요한 것 없다. 내 인생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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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7-27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역시 피씨로 쓰는 게 좋아요. 할 말을 다다다다닥 막 할 수 있어요. 북플로는 잘 안하게 되죠. 피씨에 길들여진 세대인가.. ㅎㅎㅎㅎㅎ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알고, 또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랑을 받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에디뜨의 말이 진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유부만두님.

새벽의 약속을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정말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유부만두 2015-07-27 18:47   좋아요 0 | URL
그쵸. 사랑을 받아야 주는 법도 배우게 되겠죠. 에디뜨의 인생도 모모의 인생도 그리 수월해보이지 않지만 그들 모두 사랑을 주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프레이야 2015-07-29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너무나 맘에 드는 페이퍼에요. 젠 체 하지않고 편안하게 곁에서 조근조근 이야기 하시는 것 같아요. 라비앙로즈,는 봤는데 자기앞의생,도 영화가 있었는지 몰랐어요. 사랑,에 대해 잠시 생각해봅니다. 굿나잇해요

유부만두 2015-07-29 08: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프레이야님. 다정한 댓글 감사합니다. ^^
제가 사진 넣은 페이퍼를 (거의) 처음 썼어요;;; 저도 자기앞의 생은 영화 존재만 알고 보진 못했어요. 얼마전에 프랑스 tv5에서 영화로 또 만들었다는데 예고편만 봤고요... 시몬느 시뇨레랑 딸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고요...사랑... 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비오는 수요일을 시작합니다. 멋진 하루 보내세요, 프레이야님.
 

436/962.

2부의 끝부분을 읽고 있다. 주인공 Theo가 LV로 온 이후 (하하, 스포일러 작렬입니다) 부쩍 이 아이에 대한 내 믿음과 애정이 식었다. 치밀한 묘사와 각종 상품 이름이 책의 20퍼센트를 넘는 이 두꺼운 책....이지만 커다란 사건은 개연성 없이 툭툭 벌어진다. 그 사건들이 또 어느정도 판에 박힌...그러니까 두꺼운 문학을 읽는 대신 미드 몇십부작 (시즌 두어개)을 보는 기분이다. 문장은 쑥쑥 읽힌다. 전에 읽었던 이시구로의 Never Let Me Go에 비하면 이 책은, 특히 대화문이 (절반 가까이는 음...과 욕....그리고 되풀이 되는 문장) 수월하다. 하우에버. 책의 중심까지 왔는데 생각보단 표지의 황금방울새의 비중이 아직은 크지 않고, 지금껏 다른 얘기 막 하다가, 앗, 이 그림, 하고 좀 끼워넣고, 그러다 다른 얘기 상표 이름을 늘어놓는 모양새.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퓰리쳐상 수상작이 더 나았을까.... 완독률 98.5%에 발목이 (표지 그림의 작은 새처럼) 묶여버렸어. 기대보다 유치하고, 인물들도 매력적이지 않다. 빨리 후루룩 읽어 치워야지. 훨씬 아름다운 책들이 많은데 내가 왜 이 책에 묶여있어야만 하는지.... ㅠ ㅠ 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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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400.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존 버닝햄)

애들은 싸우기 마련, 고양이는 뛰고, 강아지는 고양이를 쫒고, 닭은 푸드덕 거리고, 돼지는 더럽히고, 소는 쿵쿵대고, 다 그러기 마련. 그러다 배는 뒤집어지고 홀딱 젖어서 강가까지 헤엄치고. 따스한 햇볕에 말린다음 티타임을 가지고. 그리고 집으로 각각 돌아가면서, 내일 또 만나~

어른인 나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데! 아이들은 두 말하면 잔소리!.... 아, 그래도 나는 아이들한테, 게임 그만해 공부해.... 잔소리를 하는..... 아름다운 여름 방학...

 

255/400. 행복한 우리 가족 (한성옥)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이런 모습, 이런 '행복한' 가족의 모습은 너무나 흔하(리라 믿지만) 지만, 겉으로는 아닌척 하고 살고있다. 작은 실수, 작은 무시, 그리고 작은....결례들. 어른들의 이런 모습을 아이들은 배우고 보고 따라하겠지. 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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