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소멸 - 국민총행복을 위한 지역재생의 길
박진도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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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인구의 감소는 지금과 같은 사회경제구조에서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는 한 소멸하지 않는다. 그럼 누가 농촌의 주인이 될 것인가. 떠날 사람은 떠나고 농촌에서 자기 삶을 구현하고 싶은 사람들이 남거나 새로 들어와서 살아갈 것이다... 대도시 생활과는 다른 문화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도시의 삶이 나날이 각박해지는 현실을 보면 이러한 사람들은 늘어날 것이다. _ 박진도, <강요된 소멸>, p43

박진도의 <강요된 소멸>은 농촌 문제를 다룬 책이지만, 농촌(또는 지방)이 점차 죽어간다는 '지방소멸론'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지방소멸론에 따르면 도시로 인구가 몰리기 때문에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고 결국 아무도 시골에 살지 않게 된다. 이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농촌은 도시를 보조하기 위한 주변부로서 살려야 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을 거부한다. 도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농촌은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인구소멸 운운하는 사람들은 노동력이 감소해 경제성장이 둔화할 것을 과도하게 염려하는 성장주의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고령화로 인한 노인 인구에 대한 부양 부담이 복지 비용 증가로 이어져 성장에 저해가 될 것을 염려한다.... 인구감소를 경제성장의 관점이 아니라,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인구가 줄면 사람의 가치가 귀해진다. 먹고살기위한 치열한 경쟁도 약해질 것이다. _ 박진도, <강요된 소멸>, p86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출산 고령화의 문제로 농촌의 생활 서비스 수준은 낮아지고, 일자리는 사라졌으며, 농촌으로 혐오시설 이전, 쓰레기 문제 등은 악순환이 되어 살고 싶어하는 이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가고 싶은 곳, 살고 싶어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제안한다. 구체적으로 주민자치, 충실한 사회서비스, 농업공익기여지불과 농산어촌 주민수당 등의 정책제안이 본문을 통해 제시된다. 농촌을 살리기 위한 세부 정책까지는 아니더라도, GDP와 생산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농촌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생긴다면 그 자체로 작은 성과가 아닐까 여겨진다...

그동안 우리 농정을 지배해 온 기본 이념은 '생산주의 농정'이다. 생산주의 농정의 원조는 이른바 녹색혁명으로 대표되는 증산농정이다. 녹색혁명은 농약과 비료, 종자, 에너지 등 외부 투입재를 많이 사용하여, 단위면적당 또는 일인당 농업생산성으로 높여 농산물의 생산비를 낮추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p193)... 생산주의 농정에서는 농업/농촌의 다원적 기능을 무시하고 오로지 값싼 농산물의 공급만을 강요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우리 농민과 농촌 주민의 삶은 악화되고, 국민은 불행하다. _ 박진도, <강요된 소멸>,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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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은 진보 정당이 가장 빛났던 시기가 2004년 민주노동당 첫 원내 진출이라고 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2017년대선 때부터 (노회찬 의원 사망 뒤 여영국 정의당 후보가 경남 창원성산에서 당선되는) 2019년 보궐선거까지다. 과거 민주노동당보다 노동 기반은 약해졌지만, 통합진보당 실패 이후 어렵게 출발한정의당이 새로운 기반 위에 진보 정당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초기부터 23년간 당 기획을맡은 한 관계자의 말이다. "그렇다면 진보 정당의 위기는 언제였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위기 역시 동일한 시기였다.  - P15

정의당 내에는 크게 ‘노동자 계급이독자 정당을 유지해야 한다‘는 급진적 사회운동 노선과, ‘국민의힘 계열 정당의 낙선을 위해 민주진보 진영이 연합해야 한다‘는 민주대연합 노선이 긴장하며 공존해왔다. 이 중에서 후자는 이번에 민주당위성정당에 참여하거나, 정의당에 남아있으면서도 지역구에 불출마했다. 전자의 흐름이 녹색당과 연합한 지금의 정의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민들의 선택을받지 못하면서 정당 이전의 사회운동 세력으로 되돌아간 셈이 됐다. - P16

재건축·재개발 활성화를 비롯한 부동산 부양 정책은 민생토론회에서 윤석열대통령이 반복해서 꺼낸 화두였다. 총선직전인 4월8일에는 ‘도시 주택 공급 점검회의‘를 열어 민생토론회에서 언급한 정책을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선거에서 부동산 표심을 자극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들 정책 역시 ‘법 개정이 필수다.  - P21

한 입시 전문가는 "지금 의대는 사실상사교육의 뇌관이다. 킬러 문항보다 훨씬 큰 이슈인데 정부가 의대 증원을 사교육정책의 시각에서 보질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사교육 시장은 의대 지원자 또는 메디컬 (의대·치대 ·한의대약대·수의대) 지원자 위주로 개편된지 오래다. 메디컬은 예전 ‘SKY‘가 누리던 최상위권 대학의 자리를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사교육 수요자 간에 일종의 양극화를 낳았다.  - P24

이렇게 세계정세가 불안하거나 그럴조짐이 보이면 글로벌 자금은 미국 달러화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불투명한 상황으로부터 ‘나‘의 자산을 그나마 가장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패권국가 미국 달러 기반의 금융상품을 사는 것이다. 이로 인해 달러 가치가 치솟으면 너무나당연히 원화 가치는 떨어지는데, 원화의하락 폭을 더 크게 만드는 요인이 있다. 한국은 석유 등 원자재 가격 상승에 대단히 취약한 국가다.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너무 높다. - P27

태양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줄어든 것은 분명하다. 이는 김정은 위원장의 통치 스타일이 비현실적이고 신비스러운 수령 우상화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 P29

과연 그럴까. 최근 우리 사회를 달궜던 대파로 눈을 돌려보자. 대파 산지인 해남군 농민회장 이무진씨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파 값 875원 논란 이후지금 밭에서 대파가 썩어가고 있어요. 왜냐? 정부가 대파 값을 잡겠다고 수입량을 엄청나게 늘리니까 유통인들이 안 사가려는 거예요. 이러면 농민들이 대파 농사를 포기하게 돼요. 그 결과 점점 수입량이 늘겠죠. 결국 대파 농사 기반이 사라지게 될 겁니다." - P35

농경이 신석기시대와 함께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석기는 구석기와 완전히 다르다. 구석기가 그냥 땅에 떨어져있던 돌이라면, 신석기는 용도에 맞게 변형된 돌이다. 신석기를 만들려면 우선 자연을 목적에 맞게 변형시켜 사용한다는개념이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농경도 이런 개념의 산물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이 만든 인공물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대개 죽어 있는) 인공물과의 공존도 넓은 의미의 공생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공물이 인간에게도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 P37

중동의 평화를 위한 해법이 있을까?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지 않고 중동 평화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려면 국제사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 1993년 오슬로협정 때처럼 공존의 묘를 찾았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누군가 총대를 메고 나설 만한 정치세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보면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왜 더 약자에게 고통을 줄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안타깝다. 물론 팔레스타인도 책임이 있겠지만, 평화는 힘 있는 자가 만드는 것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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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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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딸이여, 그대 이[齒] 울타리를 빠져나온 그 말은 도대체 뭔가요? 아니, 지금 이 안에, 화롯가에 있는 남편을 두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 말하다니! 당신의 기백은 언제나 믿으려 들지를 않아요. _ 이준석, <오뒷세이아>, 제23권 p349/410


 내겐 견뎌내는 기백이 있어요. 파도 속에서, 전쟁 속에서 나는 이미 숱하게 많은 몹쓸 것들을 겪어왔으니, 그 일도 그런 고생들을 따라 일어나야 하지요. 하지만 배[腹]라는 놈은, 수많은 재앙을 인간들에게 선사하는 그 저주받은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도저히 덮어둘 수가 없지요. _ 이준석, <오뒷세이아>제17권 283-287, p266/410 


  '이[齒]의 울타리를 빠져나온 말'과 '기백'. 최근 출간된 <오뒷세이아> 번역본에서 눈에 띄는 단어들이다. 추천의 말에 새 번역의 예시로 설명된 '이[齒]의 울타리를 빠져나온 말'과 작품 전체에 반복되는 '기백'이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 것은 단순한 번역의 생소함과 반복때문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책을 읽고 난 후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오뒷세우스와 구혼자들의 대결은 가정과 왕권의 회복이라는 단순한 문제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이것은 양립과 타협이 불가능한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가치의 충돌이며, 다른 한쪽이 소멸될 때까지는 끝날 수 없다. 이로써 우리는 오뒷세우스가 구혼자들의 타협안이나 대안을 거절한 채, 몰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 p401/410


 역자는 <오뒷세이아>를 통해 가부장제, 국가권력의 귀환, 계몽적 이성이 아닌 양립할 수 없는 가치관들의 충돌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과 같은 곳에서 암브로시아를 마시는 삶 대신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뒷세우스 임을 자각하며 인간으로의 각성을 통해 황금시대가 아닌 청동시대를 선택한 오뒷세우스의 모습에 주목한다. 


 인간이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영웅은 자신의 행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림으로써 현존을 이어가게 되며, 그의 명성은 가객들의 노래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 잊어버리는 것은 인간의 두 번째 죽음이자 완전한 죽음이며, 이러한 인간 현존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던 이들이 바로 호메로스의 인간들이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p385/410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불멸의 삶을 선택한다. 전쟁을 피해서 신과 함께 불멸의 삶을 살기보다 명예를 선택하며 다른 모습의 영생(永生)을 누리지만, <오뒷세이아>에서 그는 생전의 선택을 후회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영생의 삶을 유혹하는 여신 칼륍소를 뿌리치고 떠난 저승으로의 여행에서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선택이 현명치 못했음을 알 법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을 고치지 않는다. 뒤이어 닥치는 고난. 그는 이를 '기백'으로 헤쳐나간다.


 '죽음을 두고 상심하지 마오, 아킬레우스.'

 제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제게 즉시 대답하며 말하더군요. '죽음에 대해 날 위로하려 하진 말아요, 눈부신 오뒷세우스여. 쇠잔해진 망자들 모두에게 왕 노릇 하느니 차라리 재산도 별로 없고 가진 것도 많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땅돼기라도 부쳐먹고 살고 싶다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제11권 485-491, p166/410


 딱하기도 하지, 내 새끼. 모든 인간 중에 가장 심한 운명에 매인 녀석아. 이건 제우스의 따님 페르세포네께서 너를 속이시는 게 아니란다. 다만, 죽게 마련인 인간이 목숨을 잃게 되면 마땅히 그렇게 되는 법이지. 일단 목숨이 뽀얀 뼈를 떠나게 되면, 힘줄도 살과 뼈를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거세게 타오르는 불의 기운이 이것들을 제압해버리고 만단다. 그러면 영혼은 마치 꿈처럼 이리저리 날아가게 되는 거야. 그건 그렇고, 너는 빛을 향해 최대한 빨리 몸부림치거라. _ 이준석, <오뒷세이아> 제11권 216-223, p171/410 


 이[齒] 울타리를 빠져나온 말. 그것은 오뒷세우스의 여행 그 자체가 아닐까.

 발화(發話) 되기 전 머리 속에 자리한 수많은 생각들과 가슴에 머무는 무수한 감정들. 이들은 형상화되기 전 형체 없는 영혼과도 같은 수많은 가능태(可能態)다. 그것이  이 울타리를 빠져나오며 언어로 형상화 되는 순간. 언어는 사회적 책임을 부여받고 발화자는 이를 행해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말한 사람으로서 명예가 달린 문제이며, 명예는 필멸의 인간이 불멸의 존재로 잊혀지지 않을 까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뒷세우스의 귀환은 상상력의 실현, 추상의 세계에서 현실화를 이루는 과정 그 자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때문에 구혼자들은 멸망당해야 한다. 


 호메로스의 민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신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 민회에서 구혼자들은 이 소통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이로써 이들은 이타카라는 하나의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구혼자들의 전횡 아래에서 이타카인들은 마치 퀴클롭스들과 같이 상호 연대 없이 개체화되고 고립되어 간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p395/410 


 혼돈과 잔치. 매일 매일이 다르지 않는 황금시대의 삶은 '추상의 구체화'라는 사회적 관계의 소통을 근원적으로 부정한다. 필멸의 인간이라는 한계를 망각하고, 필멸의 존재가 영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부정하는 그들의 삶은 단죄받아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처단이 바로 문명(文明)으로의 확실한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일리아스>에서의 수많은 신들은 사라졌다. 대신, <오뒷세이야>에는 귀환을 방해하는 포세이돈과 귀환을 돕는 아테네. 방관하는 제우스와 경계를 오가는 헤르메스만이 등장할 뿐이다. 트로이아의 멸망은 신들의 시대의 종말이며, 이러한 멸망을 통해 얻어진 최후의 승자는 아테네가 상징하는 가치관이다. 아테네를 실현하기 위한 추상으로부터 구체, 현실로의 여행.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 끝은 해피엔딩은 아닌 듯하다. 마치 <은하철도 999>에서 기계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한 철이의 마지막 모습이 묘한 여운을 남기듯.


 여보, 우리가 모든 투쟁의 끝에 다다른 건 결코 아니에요.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혹독한 노역이 있을 것이고, 나는 또 그 모든 것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내가 전우들과 나 자산의 귀향을 찾아내러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던 바로 그날,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이 내게 예언한 대로지요. _ 이준석, <오뒷세이아>, p355/410


 <오뒷세이아>는 무한의 평안함 대신 유한의 고통에 대해 말한다. 이번 독서에서 이 주제는 '추상의 구체화'로 내게 다가왔다. 다음에 이 작품에 깔린 수많은 결들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아마도 그건 그때 가봐야 알 듯 싶다...

희랍인들은 인간 위로 신이 있고 아래로 짐승이 있어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금기로 여겼다. 키르케의 섬에서는 이 모두가 어지러이 섞인다... (<오뒷세이아>에는) 대신 자신이 불가피하게 맞게 될 소멸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훗날 그는 구혼자들에게 보복하고 마침내 페넬로페를 만나게 된다. 20년간 기다려왔던 가장 벅찬 순간이다. 그러나 아내는 그들이 잃어버린 젊음을 말하고, 남편은 테이레시아스가 알려준 바 그대로 그에게 남은 노역과 죽음을 말한다. 어떤 해석가 말대로, 가장 격렬한 싸움을 통해 얻은 승리 뒤에 곧바로 찾아오는 변화와 죽음에 대한 이 깊은 시선, 예외 없이 한계가 드리워진 모든 인간 운명에 대한 이 도저한 시선은 진정 호메로스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타케)은 지금 오뒷세우스와는 정반대의 욕망을 가진, 신들처럼 살고 싶은 자들에게 장악되어 가고 있다. 그는 반드시 지금 돌아가야만 한다. 이제 그는 철 따라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아버지의 과수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가 떠나는 칼륍소의 정원은 봄에 피는 제비꽃과 가을에 피는 셀러리가 동시에 만발한 무시간의 영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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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29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상적이네요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어요

겨울호랑이 2024-04-29 14: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 K사상의 세계화를 위하여
백낙청 외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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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말하는 개벽은 물론 후천개벽인데, 이는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린 '선천개벽' 같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일어나는 근본적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대변혁을 '후천개벽'으로 규정하고 추진한 것은 유독 한반도에서 시작된 현상이요 사건이다. _ 백낙청 외,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p6


 <개벽사상과 종교공부>는 근대성(modernity)이 가져온 여러 폐해들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을 종교(宗敎)에서 찾는다.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동학과 이를 계승한 천도교, 원불교의 사상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저자들은 치열한 토론을 통해 찾아간다. 서구에서 '자본-과학-종교'가 융합되어 제국주의라는 형태로 주변을 침탈했던 시기에, 이들에 대항하는 민족종교에서 근대성을 극복할 사상적 기반을 찾는 과정을 통해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거나 왜곡되었던 천도교, 원불교, 증산교 등의 다른 면이 소개된다.  


 제국주의의 본질은 자본주의다, 그래서 물질개벽의 시대라는 건 자본주의 시대라는 진단까지 나아가셨지요.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으로 가야 한다면, 정신수양도 해야 하고 사리연구도 하고 또 작업취사로 정의로운 행동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마음공부, 다시 말해 삼학공부가 필요하다고 하신 거고요. _ 백낙청 외,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p175


 <개벽사상과 종교공부>에서 새롭게 느껴졌던 부분은 기독교를 외래종교가 아닌 유학(儒學)을 비롯한 한국사상의 바탕 위에 새롭게 이해되는 '한국적 기독교'를 개벽사상의 틀 안에 담았다는 점이다. 사실, 유교도 불교(佛敎)도 외래 종교지만, 한국의 전통 신앙과 결합하면서 새롭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해석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국주의에 저항한 한국의 민족종교와 제국주의의 종교가 아닌 한국적 기독교의 사상이 제국주의의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는가. 책의 결론 중 하나는 개인 각자의 공부(수양)가 필요하다는 것이지만, 공부의 방향성이 석학들의 토론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에서 오늘날 의미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이제는 그 패션(passion)이라는 단어를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난이라는 말 대신 열정이란 뜻으로 말이지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고 바랐던 그분의 희망과 열정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드러난 것이지, 십자가의 죽음이 대속적인 죽음을 목적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과 희망,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려고 한 예수님의 삶의 뜻이 표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_ 백낙청 외,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p370


 신학(信學)은 언어철학의 문제인 동시에 지극히 초월적이고 영적인 일이기도 하고, 가장 평범한 일상과 정치, 교육, 문화의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동서고금에 신학(神學)도 있었고, 성학(聖學)과 이학(理學)도 있었지만, 신학(信學)은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신(信)이라는 언어를 통해서 종교와 학문이 같이 연결되며, 형이상학과 윤리, 정신과 몸,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초월과 일상 등 지금까지 나뉘어 논의되던 영역들을 같이 연결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믿음을 위한 통합학'(Intergral Studies for Faith)을 말하며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_ 백낙청 외,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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