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장과 (문화 엘리트들이 장악하고 있는) 문화정치는 서로 부딪치면서도 공생하는 관계라는 것이 드러났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문화시장의 과제는 시장에 나타나는 모든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 욕구는 대체로 과거의 소비, 경제적 능력, 교육, 이용할 수 있는 여가시간, 접근성, 사회적 계층화 같은 많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한 것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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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가 말하였다. "대저 혼란스러움을 구원하고 폭력을 제거하는 것을 의병(義兵)이라 이르며, 무리가 많은 것을 믿고 힘 센 것에 의지하는 것을 교병(驕兵)이라 말합니다. 의로운 자에게는 대적할 자가 없으며 교만한 자는 먼저 망합니다.(10/59) - P10

대저 패왕(覇王)의 뜻을 가진 자는 진실로 장차 사사로운 원한을 풀어버려서 은덕으로 사해를 밝히게 될 것이니 이것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세 번째입니다. 바라건대 장군은 의심하지 마십시오!(10/59)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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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의 14번째 주제는 보수, 보수주의다. 개념사 사전을 통해 흔하게 인식되어온 보수의 이미지 - 안정, 온건, 조화 - 대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혁명‘에 대한 ‘반혁명‘의 이데올로기를 발견한다. 급진적인 반동으로서의 보수주의.

선뜻 낯선 개념들의 조합으로 생각되지만, 주식투자 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만약, 첫 해에 -50%수익을 거뒀다면, 두번 째 해에는 원금을 찾기 위해서는 50%가 아닌 100%수익을 거둬야한다. 그런 면에서 1848년 혁명을 경험한 독일 기득권들의 보수주의가 더 큰 반동으로 움직였던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또한, 오늘날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운동 중에 극단적인 흐름이 나타나는 것도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보수주의란 개인 혹은 집단으로 드러나는 의식적인 정치적 입장 표명으로 - 일반화시켜 표현하자면 - 자신들의 소유나 삶과 관련된 일반적 국면들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의 변화를 통해 위협받고 있다고 보았으며, 역사적 지속성의 유지, 법의 엄수, 문화의 지속 등을 곧 이런 위기에 대한 방어와 동일시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적 사고와 행태는,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사회적 변화에 직면한 상황에서는 자신들의 반동적 목표를 설정할 때 전적으로 급진적 노선을 취할 수 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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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神器)는 지극히 중요하니 그 일은 보좌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여러 현명한 사람들이 왕의 법도를 맑게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니, 진실로 한 사람이 혼자서 세울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마음과 배 그리고 팔, 다리가 실제로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하며, 한 가지 물건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이지러지게 됩니다.(17/81) - P17

"지금 장군의 장수와 군졸들 가운데 와해될 것이라는 마음을 품지 않은 사람들이 없는데도, 오히려 서로 지킬 수 있었던 까닭은 이곳에 살고 있는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을 돌아보고 사랑해주려는 것이었고, 장군을 믿고 주인으로 여기는 이유뿐입니다."(13/81)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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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리랑 3 (개정판) 아리랑 (개정판) 3
조정래 지음 / 해냄출판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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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사와 일곱 개의 궁에 속해 있는 농도 전부를 궁장토(宮庄土)라고 불렀다. 그러나 궁장토가 전부 궁중의 땅이거나 왕실의 재산이 아니라는 것은 농사를 짓지 않는 포수나 백정도 다 아는 일이었다. 궁장토 중에서 궁중의 토지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 궁중의 토지를 유토(有土)라고 해서 논 없는 농사꾼들에게 소작을 내주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 개인들이 농토이면서 각 궁에 속해 세금만 내는 논밭은 무토(無土)라고 불렀다. 그 무토는 사유지이니까 얼마든지 사고팔고 하는 거래도 자유로이 할 수 있었다. 다만 궁토로서 그저 세금만 꼬박꼬박 잘 내면 그만이었다._조정래, <아리랑 3>, p98/260

통감부에서는 그 역둔토에 속한 개인들의 농토도 모두 국유지로 둔갑시켜 버렸던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억지 춘향이를 만든 농토의 7할 이상을 통감부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겨준 것이엇다. 소유권이 동척으로 넘어간 것이고, 동척은 조선에서 제일가는 땅부자가 되어버린 것었다.(p98)... 합방이라는 것이 되기도 전인 그해 4월이었다. 대물림해 온 사유지가 주인도 모르게 국유지로 둔갑한 날벼락은 혼자만 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 피해자는 수두룩했다._조정래, <아리랑 3>, p107/260

<아리랑 3>에서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 1910 ~ 1918) 초기의 혼란한 모습과 수탈의 초기 모습이 잘 그려진다. 중앙정부의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지방의 규약인 향약(鄕約)에 기반한 관습법들이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고, 새롭게 성문법이 강요되면서 빚어지는 혼란 속에서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소작농은 유랑민으로 내몰리면서 민중들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간다.

옛날부터 여기 김제 만경 사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들녘이 넓어 논들이 많으니까 사또한테도 생기는 게 많아 자리가 좋기로 명이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여기 사또로 오자면 누구나 뒷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됐지요. 뒷손을 쓰고 여기 사또로 온 것까지는 좋은데, 그 사또들이 또 거짓말처럼 산골이나 오지로 쫓겨가게 됩니다. 그 연고인즉, 자기네가 뒷손 쓴 돈이 아까워 급하게 본전을 빼려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다 보니 시달리다 못한 백선들이 들고 일어나는 거지요._조정래, <아리랑 3>, p126/260

그렇지만, 사실 민중들의 삶이 어려웠던 것은 일제의 수탈 때문은 아니었다. 특산물
과 같은 이권(利權)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부정한 청탁이 따르고, 본전을 챙기려는 이들의 마음은 조선시대 지배층도 마찬가지였다. 감귤의 산지 제주도에서 탐관오리들의 등쌀이 못이긴 이들이 감귤이 열리지 않도록 밤중에 뜨거운 물을 버렸다는 이야기나 어느 지방이나 전승되어 온 소년 장수 설화 등은 식민시대 이전의 민중이 삶도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음을 잘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의병을 일으켜 지키려고 했던 나라는 무엇이었을까.

이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500년 왕조 조선(朝鮮)이 아닌 자신과 함께 어울어져 살아갔던 이웃들의 삶이 아니었을까. 몸은 고되더라도, 열심히 살면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지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긴 이들이 양반들과 함께 일제에 맞선 것이었으리라. 이와는 반대로, 지방의 유림들 중 상당수는 복벽운동(復壁運動)으로 왕조의 부활을 목표로 했으니, 이미 구한말 의병운동 때부터 분열의 씨앗은 이미 심어져 있었던 듯하다...

"나라 뺏긴 것이야 우리 잘못이 머시가 있어. 우리야 골병들게 땅 파서 오만 세금이란 세금 우로 바치고 아래로 뜯김서 산 죄뿐인디. 다 양반이란 놈덜이 우리헌티 알궈가고 뜯어간 세금으로 배꼽이 요강꼭지가 되게 배때지 불리고, 100리고 200리고 땅 늘쿼감스로 세금이라고넌 땡전 한 닢 안내고 사는 것도 모지래서 나라꺼정 팔아묵은 것 아니여. 근디 시상이 이리 뒤집어졌어도 양반이란 것덜언 땅얼 한 치도 안 뺏기고 지화자 얼씨구나 태평세월로 잘만 살아가덜 않냔 말이여. 어찌보면 왜놈덜보담 더 못된 종자덜이 양반이여, 양반.(p107)... 돈 있고 권세 있는 것덜이 어디 조선사람이간디. 맘이야 벌써 다 왜놈 되야부러 우리 겉은 가난허고 못난 인종덜이나 조선사람으로 남았제."_조정래, <아리랑 3>, p204/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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