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키에 민주란 뭐 대단한 이상이 아니라, 한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정당성 (legitimacy)이 보다 더 많은 다수의 합의(consent)를 지향하는 모든 정치형태를 추상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민주(民主)보다는 민본(民本)이 보다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정직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_ 도올 김용옥, <도올심득 동경대전 1> , P43


서학이 조선민중의 샤마니즘적 파토스와 결합되면  매우 폭발적인 대중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것은 사상의 공동을 전염병처럼 메꾸어 나갔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성리학과 서학이 제시하는 내재와 초월의 모든 패러다임을 만족시키면서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려는 운동이 19세기 중엽에 조선에 잉태하게 된다. 그 이론적 표현이 기학이었고, 그 실천적 표현이 동학이었다. 동학에 이르러 조선역사에 내재해온 플레타르키아의 열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게 된다. 그것이 "개벽" 이었다._ 도올 김용옥, <도올심득 동경대전 1> , P140

 최근 출판된 「동경대전1」의 구판. 2004년에 초판이 출판된 후 17년이 지난 후에서야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을 읽기 전에 마침 <토지>를 읽으며 가볍게 동학농민혁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꺼내든 책이다.


  비록「동경대전 1, 2」편에 비해 얇은 책이고, 오래전 출판된 책이지만 이 책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그간의 저자의 학문 여정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난 시간 동안 혜강 최한기의 <기학 氣學>, 「맹자 孟子」, 「노자 老子」, 수운의 「동경대전 東經大全」을 대중에게 소개했다. 자칫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 저작들이 최종적으로 <동경대전>으로 향하는 과정이었음을 지난 2004년에 출판된 책에서 발견하게 된다.


 <노자>에서 말하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과 같이, 물을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은 민중. 이러한 민중의 의식 구조를 형성하는 기학(氣學)과 실천으로서의 동학(東學)이 하나가 되어 비로소 21세기 혁명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를 이룬다는 저자의 철학. 이것이 저자가 평생 강조한 정치철학으로서의 몸철학의 얼개가 아닐까. 이 얼개를 완성하고 대중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기까지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2004년에 출간된 얇은 책에서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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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만약 한 고조를 만난다면 마땅히 북면(北面)하고 섬기면서 한신(韓信)과 팽월(彭越)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지만, 만약에 광무제를 만난다면 마땅히 나란히 중원을 달릴 것이니,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을지 모를 것이오.(15/103) - P15

"대장부가 이를 수행하는데 마땅히 공명정대하여 마치 해와 달처럼 밝아야 할 것이지만 조맹덕(曹孟德)과 사마중달(司馬仲達)을 본받아 다른 사람의 고아와 과부를 속여서 여우처럼 눈짓을 하면서 천하를 빼앗지는 않아야 할 것이오."(15/103) - P15

"무릇 장수 된 사람은 업무를 처리할 때 신중하게 해야 하는데, 자기 자신을 살피고 적을 헤아리고 만 가지가 다 온전하지 않으면 움직여서는 안 되오."(32/103)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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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독립국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단지 오늘날 한 가닥 명맥만이 겨우 이어지거나 없어지는 사이를 맴돌고 있다. 무슨 연유든 실로 조선은 동양의 발칸반도와 같다.(10/214) - P10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점해 고종을 유폐하고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추대해 개화 정권을 출범시켰다. 남의 나라에서 이른바 불법적인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16/214) - P16

마지막으로 일본이 역사에서 이를 은폐하려고 시도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일본측 기록에는 왜곡된 기술이 많았고, 공식 보고에도 사실과 어긋나게 기록했으며, 신문 보도도 통제했다.(25/214)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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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어지러운데 고칠 수 없고 임금이 위태로운데 구제할 수 없으면서 각기 숨어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려고 한다면 어찌 신하라고 하겠소!"(18/102) - P18

"무릇 큰일을 일으키려면 당연히 천하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군사가 이기는 것은 화합하는데 있으니 의당 달라서는 안 됩니다."(21/102) - P21

오늘날의 일과 형편은 의로운 사람들이 뒤좇아 일어나는 일이 없으니 비유컨대 호랑이 등을 탄 형세인데 어찌 중간에서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공께서 만약 무리들의 생각과 달리 홀로 돌아가신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반드시 다치게 할 것이며, 무리의 마음이 다치고 일이 실패하면 의로운 깃발은 장차 돌아서 공을 지향할 것입니다."(32/102)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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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받드는 유교적 충성심이 깔려 있는 포고문은 바로 민씨 정권을 향한 전면적 선전포고였고 벼슬을 독점하고 특권을 누리는 양반 유림을 향한 질타였다.

황현의 기록은 고부 봉기와 의사 봉기를 묶어 이야기하고 있다. "동학과 난민이 결합했다"는 표현은 동학이라는 종교 주도의 봉기가 아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농민군의 성격을 잘 규명한 분석으로 눈길을 끈다

이렇게 집강소를 통한 자생적인 신분타파운동, 상하존비 곧 계급의식을 타파하고자 한 예절개선운동은 인권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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