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지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길상은 생각에 빠져서 자신이 달구지를 타고 있다는 것을, 읍에 심부름 가고 있는 길이라는 것을 거의 잊었다. 꾸불꾸불 밀려오는 물굽이가 바닷가의 방죽을 치고 또 치는 것처럼 잇닿아 밀려오는 공상은 그에게 다시없이 감미로운 것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수많은 생각들은 마치 만화경같이 찬란하고 다양했다. 갖가지 빛깔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소리가 들려오고 과거에서 미래까지 추억과 꿈은 마음대로 끝도 시작도 없이 그의 생각 속 넓은 공간을 비상하는 것이다. 추억의 창문에서는 어느 길모퉁이에서 들었던 소슬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장님이 불고 가던 피리 소리가 들려왔고 범패(梵唄)소리, 새벽 산사에 울리던 장엄한 인경 소리가 들려왔고 강물을 건너오는 뱃사공의 노랫소리, 추억의 창문에서 명주 수건으로 감싼 월선아지매의 얼굴이 보였다. 월선아지매의 모습은 별당아씨의 뒷모습으로 변해갔고 산을 바라보던 슬픈 그 구천이의 옆얼굴이 나타났다. (p114/518) _ 박경리, <토지 3>


 어느새 토지 독서챌린지에서 <토지 3>를 읽고 있다. 아버지 치수의 죽음과 조준구 일가의 등장으로 긴장감이 서서히 생기는 도중에 달구지를 타고 가는 길상의 상상에 눈이 멎는다. 수많은 생각들이 이어지면서 만들어 내는 시각(視覺), 청각(聽覺)의 이미지. 절에서 자란 길상의 과거와 현재 최참판 댁 몰락의 전조인 별당아씨와 구천의 도피까지 현재에 이르는 이미지들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쪽으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Du cote de chez Swann>의 유명한 마들렌 과자를 먹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그 추억이 왜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아내는 일은 훨씬 후로 미루어야 했다.)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 점심 식사 전에 나를 보내던 광장이며, 심부름 하러 가던 거리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지나가곤 하던 오솔길들이 떠올랐다. 일본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펴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면서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_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p54/226


 마들렌 과자의 미각(味覺)이 불러온 수많은 추억과 이미지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는  이 장면을 '기호'로 받아들인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기호'안에 숨겨진 의미(진리)를 찾는 과정으로 인식하는데, 미래를 향한 '찾기'의 과정에서 이러한 기호들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이 장면들은 아름다운 몽환적 이미지의 표현이 아닌 작품 전체에 대한 과제 부여의 성격이 강하다.


 세번 째 세계는 인상 혹은 감각적 성질 qualites sensibles의 세계이다. 어떤 감각적 성질은 우리에게 야릇한 기쁨을 주는 동시에 일종의 <명령>을 전해 준다. 이런 식으로 체험된 성질은 더 이상 그 성질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대상의 속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가 해독하려고 시도해야만 하는 <완전히 다른> 대상의 기호로 나타난다.(p34)... 우리는 이 성질, 이 감각적 인상을 마치 물 속에 넣으면 열려져서 갇혀 있던 형태가 드러나는 일본 종이처럼 펼쳐 낸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 우선 특별한 기쁨이 찾아오고, 그 결과 이 기호들은 그 직접적인 효과로 인해 이전 상태[기쁨을 주기 이전의 사물들'과 구별된다. 다른 한편 이 기호의 의미를 찾기 위한 사유 작업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느껴진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숨겨진 대상을 건네주면서 기호의 의미가 나타난다 (마들렌이 콩브레를, 종탑들이 소녀들을, 포석들이 베니스를 건네 주는 식으로 말이다.) _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p36


 그렇지만, 이에 대한 온전한 해석은 작품 끝에 <되찾은 시간> 전까지 미뤄진다. 그 전까지 독자들은 마들렌 과자로부터 시작된 기호들의 의미를 '사교계', '사랑의 그룹', '기호의 세계' 라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이라는 다른 시간선들의 교차에서 끊임없는 미로를 헤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여행의 끝은 '되찾은 시간'에서 비로소 풀려나간다.

 


 마들렌 과자의 도취 상태가 마지막의 현시를 미리 암시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것은 추억의 문을 열어준다는 장점, 그리고 콩브레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되찾은 시간>의 첫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되찾은 시간>을 모르고 이 작품을 읽어가는 독자의 눈에는, 콩브레 이야기로 옮겨가는  것은, 인위적으로 수사학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가장 단순한 서술적 관례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번째 독서에 이르러 내용을 보다 잘 알게 되면, 서재에서의 사색이 마침내 깨닫게 된 소명을 검증하는 시기의 되찾은 시간을 열어주는 것처럼, 마들렌 과자의 도취 상태는 유년기의 되찾은 시간을 열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의 이러한 균형은 작품 구성을 주도하는 원칙임이 드러난다. _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2>, p284 


 해석자는 마들렌이나 종탑의 경우에서 자신의 이해가 미치지 못했었던 것에 대해 "찾기"의 끝 부분에 와서 비로소 이해한다. 즉 물질적 의미는 그것이 구현하는 관념적 본질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_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p37


 이렇게만 놓고 본다면, <토지 3>의 길상의 생각 장면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 사실, 별 관련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논의를 진행시켰으니 조금 더 나가보자.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길상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과거 절에 있었던 시기를 생각하면서 부처님도 자신을 공포로부터 구원하지 못했음을 두려워하며 달구지 위에서 잠을 깨어난다.

 

 이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영상을 내버려두고 길상의 생각은 별안간 달음박질쳐서 엉뚱한 곳으로 간다. 어느 한낮에 꾼 꿈으로 날아갔다. 다시 뛰어서 우뚝 멈춘 곳은 숲 속이며 개울가였다. 쭈그리고 앉아서 물맴이가 도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무서워졌다.... 길상은 자신이 달구지 위에 있음을 깨달았다.(p115/518) _ 박경리, <토지 3>


 그리고,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길상은 평사리가 아닌 간도에서 자신의 생각 속에서 스쳐갔던 인물 김환(구천)을 다시 만난다. 그 전에 자신이 알지 못했던 구천 출생의 비밀과 서희와의 관계가 이 만남을 통해 밝혀지게 되고, 이를 통해 과거 구천에 대한 경외(敬畏)감이 재생되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진리 찾기'와 '되찾은 시간'이 완성되었다고 본다면 무리가 있을까. 구천은 달구지 위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통해 '별당아씨 - 구천'의 관계라는 '기호'를 무의식 중에 부여받았다면, 객줏집에서 만남을 통해 '되찾은 시간' 속에서 출생의 비밀이라는 진리와 '기호'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십 년 세월만 무서운가? 이 무서운 인연들. 목구멍으로 술이 타고 내려가는데, 뜨거운 빼주가 넘어가는데 머릿속이 차츰 맑아온다. 선명하게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지난 일들이 새롭게 눈앞을 지나가고 있다. 소년 길상이는 구천이를 두려워했다. 쥐어박히며 탱화 그리기를 가르치는 혜관보다 남몰래 손짓하여 데려가서는 글을 가르쳐주던, 말이 적고 엄격해 보이던 사람.(p447)...  "별당아씨가 어떤 여자던고? 어떤 여자였던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었던, 현세와 하늘에 순명할 수 없었던 사람, 땅을 끊을 수 없었던 초나라의 굴원(屈原)은, 그 굴원은 돌을 안고 멱라(汨羅)에 빠졌건만, 그 기나긴 방류(放流)도 끝이 났건만 어찌 나는 살아 있는가." 한 사나이가 어둠 속에서 통곡하고 있었다.(p360/518)... 꿈도 멀어져갔다. 빛깔과 빛깔이 난무했다. 우관스님이 거기 서 있는 듯했으나 그 모습도 사라졌다. 길상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객줏집 안방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_ 박경리, <토지 8>, p457/656 


 구천과의 만남을 통해 '기호'의 의미로부터 해방된 길상의 모습은 이후 길서상회를 정리하고 간도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서희와의 이별 장면에서 잘 표현된다.  구천과의 만남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별당아씨 - 구천'의 사랑을 인정하는 길상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서희. 서희는 남편 길상과 함께 돌아가려 하지만, 길상은 이런 서희 곁을 떠나고 만다. 마치, <갇힌 여인>의 알베르틴이 화자의 곁을 떠나듯. 상처입은 아름다운 나비 서희의 여행은 그래서 <토지>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보복을 하기 위해서...... 별당의 그 여자를 유인해 갔다 그 말씀이시오?" 목에 잠겨 몸부림치듯 서희는 말을 밀어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소." 서희는 절을 향해 갈 때마다 그 일을 생각한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길상은 떠났고,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으며 용정촌에는 풍문이 돌았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모시옷의 최서희,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상처입은 나비같이, 그래도 그는 아름다웠다._ 박경리, <토지 8>, p618/656


 사실 갇힌 사람은 알베르틴이 아니라, 자신의 질투와 의혹에 갇힌 화자이다. "질투는 상상력의 실패이며(......) 질투를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은 사랑의 아픔에 맞서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라는 크리스테바의 말처럼, 어쩌면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싶은 그 미친 듯한 욕망인 질투를 통해, 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관계되는 지극히 내밀한 몸짓과 시선이라 할지라도 끝도 한계도 없는 탐색 작업을 통해 그 미세한 내면의 사건을 이야기로 재구성하려는 고통스러운 여행을 감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_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p279/336 작품 해설 中


ps. 스스로 생각해도 논리 전개가 상당히 무리하고 관련없는 두 작품을 끌어다가 페이퍼를 작성한 듯 하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재미로라도 두 대작(大作)과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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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8-07 1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토지>와 <일.시.찾>의 콜라보라닛~ 생각도 못한 조합에 그저 입이 쩍벌어집니다.
아니 내가 떠올랐음 그런거죠~ 논리 따윈 필요 없습니다.(논리가 부족하단 말은 절대 아님~ㅋ)
토지문화재단에서 겨울호랑이님이 챌린지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할 듯하네요~👍

겨울호랑이 2021-08-07 13:1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덕분에 좋은 프로그램 알게 되었고, 쏟아지는 과제(?)를 하다보니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어 좋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바람돌이 2021-08-08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지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리고 들뢰즈까지...
우와 대단한 연결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08 06:55   좋아요 0 | URL
사실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에서두 작품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연결이 기발했다면 공은 들뢰즈 몫이고, 무리했다면 제 부족함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간단히 말하려고 그저 ‘죽음’이라고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들만큼 많은 죽음이 있다. 전속력으로 모든 방향에서 달려오는 죽음, 이런저런 사람을 향해 운명이 보낸 능동적인 죽음,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볼 수 있는 감각이 없다.(p7/339) - P7

알베르틴과의 삶은 내가 질투를 느끼지 않을 때는 권태로웠고, 질투를 느낄 때는 고통스러웠다.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 해도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발베크에서 캉브르메르 부인의 방문이 있은 후 그렇게도 행복했던 저녁에 내게 영감을 주었던 그런 현명한 정신에서, 나는 우리의 관계를 계속해 봐야 별 소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와 헤어지기를 소망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가 그녀에 대해 간직할 추억은, 피아노 페달에 의해 연장되는 일종의 진동과도 같은 이별의 순간이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감미로운 이별의 순간을 택하고, 그 순간이 내 마음속에서 오래 진동할 수 있기를 열망했다.(p253/339) - P253

사건이란 사건이 일어난 순간보다 훨씬 거대해서, 그 순간 속에 완전히 담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사건은 물론 우리가 간직하는 기억을 통해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 시간에도 그 자리를 요구한다. 물론 사람들은 그때 우리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하겠지만, 추억 속에서도 사건은 변경되지 않던가?(p262/339)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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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8-06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P7 - 내년 또는 내일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죠. 가능한 일인데 말이죠.

P253 - 마음속에서 오래 진동하는 이별, 이란 표현이 참 좋네요.

P262 - 살면서 과거의 사건이 마음속에서 많이 변경되는 걸 경험하죠. 특히 제가 특별한 어떤 경험을 했을 때 그 사건에 대한 시각이 달라짐을 느낍니다. 옳았던 게 틀린 게 되고, 틀렸다고 여긴 게 옳았음을 경험하기도 하죠.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다, 입니다.

문장을 잘 뽑으신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06 15:45   좋아요 0 | URL
모든 종교의 기원은 ‘죽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누군가 말했던 생각납니다. 죽음이 주는 불안과 공포가 결국은 언제 올지 모르는 시간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죽음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도 연관됨은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 속의 사건의 의미를 찾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들 문장이 독립적인 듯 유기적으로 잘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의 문장들 하나하나가 나름의 의미를 지니면서 전체적으로 얼마나 잘 조화되는지 책을 읽을 때마다 느낍니다. 페크님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1-08-06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겨울호랑이님!
자치통감도 매일 읽으시고 이 책도 매일 읽으시고...
어려운 책은 다 읽으시면서 다른 책도 만만치않고, 도대체 이 내공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

겨울호랑이 2021-08-06 16:49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한 번에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조금씩 정리해 둔 것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읽긴 하지만 아직 놓치고 있는 부분이 많아 채워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
 

"무릇 열매가 아직 익지 않았거나 스스로 떨어지는 것을 줍는 것은 불과 열흘 차이인데, 그러나 어렵고 쉬운 것과 그리고 맛이 있고 없는 차이가 아주 많습니다."(p25/103) - P25

"비유하건대 기르는 매는 굶주리면 사람에 의지하지만, 매양 폭풍이 일어날 때면 항상 하늘을 능멸할 만한 뜻을 품고 있으니, 바로 의당 그를 새장에 가두어야 하는데 어찌 풀어서 멋대로 내버려두어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맡겨두십니까!"(p26/103) - P26

참군인 태원(太原, 산서성 태원시) 사람 조겸(趙謙)이 모용농에게 말하였다. "석월의 갑옷과 무기는 비록 정예하나 사람들의 마음이 두려워하고 있으니, 쉽게 격파됩니다. 의당히 급히 그를 공격하여야 합니다."
모용농이 말하였다. "저들의 갑옷은 바깥에 있고, 우리들의 갑옷은 마음속에 있으니, 낮에 싸우면 병사들이 그 겉모양만을 보고 그들을 두려워할 것이므로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을 공격하여 반드시 이길 수 있게 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p37/103)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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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8-06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읽는 듯합니다. 특히 세 번째가요.

겨울호랑이 2021-08-06 15:48   좋아요 0 | URL
자치통감은 비록 기전체로 씌여지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끊어짐없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 여겨집니다. 저자 사마천이 강조하고 싶어 하는 부분은 사기열전처럼 보다 자세히 서술하는데, 여기에 사마천이 생각하는 역사의 교훈이 실려 있음을 발견합니다.^^:)
 
젠더 허물기 우리 시대의 고전 22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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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겔 철학의 전통은 욕망을 인정과 연결하면서, 욕망은 언제나 인정을 향한 욕망이고 우리 모두가 사회적으로 존속 가능한 존재로 구성되는 것은 오로지 인정받는 경험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은 매력적이며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놓치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인간으로 인정을 받는 관점은 사회적으로 표명된 것이고, 변화할 수도 있다. 또 어떤 때는 한 개인에게 '인간됨 humanness'을 부여한 바로 그 관점이 다른 개인에게서는 똑같은 지위를 얻을 가능성을 박탈하기도 한다. 인간과 덜된 인간 less-than-human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말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1


  <젠더 허물기 Undoing Gender>에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 ~ 1677)의 '욕망'과 뒤를 이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욕망 - 인정' 도식으로부터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논의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젠더란 무엇인가' 부터 시작해보자.

 

 이미 전작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에서 이야기 되었듯, 버틀러에게 '젠더는 수행적'이다. 반복적이며 의례적인 행위를 뜻하는 수행성이 젠더의 특징이라면, 젠더의 원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고, 젠더 안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아야 할 것이다.  얽힌 관계 속에서 우리는 '원인-결과' 또는 '최초의 관념'을 구분해서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치 스피노자의 용어처럼 '자신이 원인이 되는 존재 causa sui'처럼 우리는 '젠더'를 인식한다. 스피노자가 말한 'causa sui'는 신(神)의 속성이다. 


 젠더가 수행적이라면 그것은 젠더의 실제 자체가 그 수행의 결과로 생산되었다는 말이다. 무엇이 실제적인지 아닌지, 무엇이 인식 가능한지 인식 불가능한지를 지배하는 규범이 있지만, 수행성이 인용 행위를 시작하는 순간 그 규범은 의문시되고 반복된다. 우리는 분명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인용하는 것이지만, 이런 규범은 인용을 통해 상당히 탈영토화될 수 있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343


 만약, '젠더'가 규범이라면 규범으로서 '젠더'는 중세 '신' 중심의 문화가 중세인을 만들었듯 권위를 갖고 사람들을 만들고, 스스로도 변화될 것이다. A -> A' -> A'' -> A'''... 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피드백(feedback) 속에서 점점 사람들에게 '젠더'는 어떤 인식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없었던 어떤 인식의 '경계'이 만들어진다.


 규범성이 이중성을 가진다는 점에 대해 숙고해보자. 규범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인도하는 목적과 열망을, 우리가 서로에게 행하거나 말하게 되어 있는 수칙을, 또 우리가 지향하게 되어 있고 우리 행동에 방향성을 주는 일상적 전제를 지칭한다. 다른 한편 규범성은 규범화 과정을, 특정한 규범과 사상과 이상이 체현된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상적 '남자'와 '여자'라는 강제적 기준을 제공하는 방식을 지칭하기도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325


 젠더가 어떤 규범이라면, 그것은 개인들이 다가가고자 하는 어떤 모델 같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젠더는 주체가 인식될 수 있는 장을 생산하는 사회 권력의 형식이고 젠더 이분법이 제도화되는 장치이다. 젠더에 지배되는 실천들과 무관해 보이는 규범으로서 젠더의 이상성 ideality은, 바로 그런 실천들이 다시 제도화한 결과물이다. 이 말은 실천과 그 아래서 실천이 작동 중인 이상화의 관계는 우연적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이상화 자체도 어쩌면 잠정적인 것으로 탈이상화나 권위 박탈을 겪으면서 문제와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83


  규범은 바로 그 규범의 결과로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조건 설정을 통해 현실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규범에 가능한 최대치의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규범은 그것이 적용된 장 외부에 있지 않다. 마슈레에 따르면 규범은 그 적용의 장 생산에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적용의 장을 생산하면서 스스로를 생산하기도 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89


 인식들은 '경계'를 만든다.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분짓는 경계가 생겼다는 것은 기존의 이분법적 구조에 포함되지 못한 이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버틀러는 <젠더 허물기>에서 남녀의 이분법 구조 안에서 '누가 누구를 억압하는 구조' 이전에 '억압의 대상으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경계 바깥의 존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며, '여성'의 문제가 아닌 '성소수자'의 문제가 본격화된다.


 이런 경계들은 불편해져서 때로 서로 마찰을 빚는 접촉면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경계들은 오래 머물 수 있는 딱히 어떤 장소도 아니고, 누군가 차지하기로 택할 만한 주체의 위치도 아니다. 이곳은 무심코 자신이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비-장소 nonplace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75


 만일 욕망이 바라는 게 인정을 받는 것이라면, 젠더도 욕망으로 인해 작동되는 한 인정을 받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인정 도식이 인정을 함으로써 그 사람을 '허물거나 undo' 아니면 인정을 거두어서 그 사람을 '허무는' 도식이라면, 인정은 인간을 차별적으로 생산하는 권력의 장이 된다. 이는 욕망이 사회적 규범에 개입되어 있는 만큼 권력의 문제와 결부되고, 또 누가 인정받을 만한 인간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지의 자격을 정하는 문제와도 결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2


 억압받는다는 것은 당신이 이미 특정 부류의 주체로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주인 주체에 대해 가시적 타자, 억압된 타자로서, 어떤 가능하거나 잠재적인 주체로서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억압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인식부터 가능해야 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54


 버틀러에게 허물어져야 할 '젠더'가 이분법적 구조라면, 이를 대신해서 새롭게 '젠더'를 존재 be시키기 위한 행위 doing 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평적 관점을 갖는 '문화 번역 cultural translation'의 행위다. 기존의 관념의 틀에서 경계 너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면, 비평적 활동을 통해 '경계'를 살피고, '문화 번역'을 통해 경계 양 편을 모두 '수행적'으로 변화시키며 결국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버틀러가 제기한 '(기존)젠더 허물기'의 해법이다. 동시에 새로운 인식의 탄생이기도 하다.


 내가 행위 doing 없이는 존재 be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내 행위의 조건은 부분적으로 내 존재의 조건이기도 하다. 나의 행위가 내게 행해진 행위에 달려 있다면, 아니 그보다도 규범이 내게 작동한 방식에 달려 있다면 내가 '나'로서 지속될 가능성은 내게 행해진 것과 밀접히 관련될 수 있는 나의 존재 my being에 달려있다... 지금의 '나'는 규범에 의해 구성되는 동시에 규범에 의존하기도 하고, 또 규범에 비판적이어서 규범에 변화를 주는 관계로 살려고 애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3


 우리가 문화 번역 cultural translation의 과정을 따른다면, 존재론의 기본 범주, 즉 인간이 되는 것, 어떤 젠더가 되는 것, 성적으로 인식 가능해지는 것의 기본 범주를 재표명하고 재의미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화 번역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범주를 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이는 다시 말해 가능한 에피스테메 episteme의 경계선, 즉 알 수 없는 것과 아직 모르는 것의 경계를 마주할 때 이 범주들이 어떻게 왜 부서져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지를 살피는 과정이다... 문화 번역은 경계가 분명하고 뚜렷하며 통일된 두 언어 사이의 번역이 아니다. 그보다 번역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양쪽 언어 각각을 변화시킬 것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67


 비평적 관점이 없다면 정치학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작동 영역이 시작되는 힘의 관계의 미지성에, 또한 탈정치화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비평성 critiality이란, 이미 경계가 정해전 영역에 있을 만한 딱히 어떤 위치도, 어떤 장소나 자리도 아니다. 비평적 활동의 하나는 경계 설정 행위 자체를 꼼꼼히 살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실험이나 에포케 epoche 혹은 어떤 의지 행위를 통해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토대 자체의 열개 dehiscence와 파열을 겪어야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74


 동전에는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이쪽이나 저쪽 편에서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염두에 두는 비평적 실천을 개발하려 한다. 합법화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즉, 인식 가능성과 인정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89


 전반적으로, <젠더 허물기>는 <젠더 트러블>에서 제기했던 문제에 대해 한 걸음 더 들어간 느낌을 준다. <젠더 트러블>이 '젠더'라는 범주에 대해 버틀러의 생각을 밝히고 새로운 개념을 정립했다면, <젠더 허물기>는 <젠더 트러블>의 '젠더'를 스스로 무너뜨렸다고 해야할까. 거칠게 요약해서 '젠더는 만들어진다' 는 수행성을 전편에서 강조했다면 '만들어진 젠더는 경계를 고려치 않는다'는 새로운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강조되는 수행성이 연극적 수행성이라면, <젠더 허물기>에서의 수행성은 언어적 수행성이 상대적으로 강조된다. 이와 같은 여러 형태의 수행성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우리가 사회를 바꾸는 선순환(善循環) 속에서 사회는 조금씩 달라진다는 말을 저자는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이라는 범주는 자기 안에 인종 간 권력 격차 작용을 자신의 역사성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범주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인간'은 결코 파악될 수가 없다. 인간 범주가 시간 속에 만들어지며 또 광범위한 소수자들을 배제해야만 작동된다는 말은, 그런 범주에서 배제된 자들이 그 범주에 대해, 그 범주에서 말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 범주에 대한 새로운 표명이 시작할 것임을 의미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29


 이러한 토대 위에서 <젠더 허물기>은 여러 주제들을 다룬다. 성전환 문제, 게이 결혼 문제, 근친애 문제, 타자의 문제 등등. 얼핏 보면 각각 별개의 문제로 보이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경계를 넘어서는 가로지르기'의 주제로 수렴될 수 있을 듯하다. 어느 주제에서는 경계가 이분법구조, 국가, 상징계로 모습을 다르게 하여 나타나지만, 이들이 갖는 문제는 수행성을 통해 극복해야 할 과제라는 점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을 듯하다. <젠더 허물기> 안의 현실 주제에 대한 버틀러의 생각을 아는 즐거움은 각자의 몫으로 넘기기로 하고, 이번 리뷰에서는 <젠더 허물기>의 전체적인 얼개를 살피는 정도로 마무리한다...

라캉은 이폴리트의 공식을 재해석하면서 다의성을 만들기 위해 소유격을 이용한다. 즉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사실 욕망하는 욕망이 욕망되는 욕망과 다른지는 분명치 않다. 그들은 최소한 동어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게 의미하는 바는 스스로를 배가시킨다는 것이다. 욕망은 자신의 쇄신을 모색하지만 자신을 쇄신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복제해야 하고, 그에 따라 과거와는 다른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욕망은 단일한 욕망으로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형상을 취하면서 자신에게 타자가 된다. 욕망이 또한 원하는 것은 대타자의 욕망이고, 여기서 대타자는 욕망의 주체로 생각된다. - P221

이 논쟁(게이 결혼)은 문화란 무엇이고 누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의 주체들이 어떻게 재생산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도 집중한다. 이 논쟁은 문화란 무엇이고 누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의 주체들이 어떻게 재생산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도 집중한다. 이 논쟁은 또한 국가의 위상에 관심이 있으며, 특히 성적 결합의 형식을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국가 권력에 관심이 있다. - P179

여성의 구조적 지배를 다른 모든 젠더 분석이 나아가야 할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틀은, 젠더가 특정 집합의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정치적인 문제로 등장하는 여러 방식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페미니즘 자체의 존속 가능성도 위험에 빠뜨린다... 페미니즘이 항상 여성에 대한 성적/비성적 폭력에 대항해왔다는 점은 다른 운동들과 연합할 기반으로 작용해야 한다. 몸에 대한 공포증적 phobic 폭력은 반-동성애공포증, 반-인종차별, 페미니즘, 트랜스 및 인터섹스 행동주의와 연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 P22

말하기가 행하기의 한 형식이라면 그리고 행해진 부분이 자기라면 대화는 뭔가를 함꼐 행하는 양식이고 다른 것이 되어가는 양식이다. 이런 교환 과정 중에 뭔가가 성취되겠지만 그게 다 완성될 때까지는 무엇이 혹은 누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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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표지(王彪之)가 말하였다.
"무릇 천하의 중요한 일을 맡게 된 사람은 마땅히 나라를 보호하고 집안을 편안하게 하며, 다스리는 일은 환히 빛내야 하는데 마침내 궁실과 가옥을 수리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p33/122) - P33

"무릇 공이 있음에도 상을 내리지 않고 죄가 있음에도 주살하지 않으면 비록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라도 다스릴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인 경우에야! "(p50/122) - P50

《서경(書經)》에서 말하였습니다. ‘위엄(威嚴)이 아끼는 것을 누르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지만 아끼는 것이 위엄을 누르면 반드시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또 《시경(詩經)》에서 말하였습니다. ‘속이거나 교활한 사람을 제멋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삼가 망극하게 하며, 노략질하고 포학한 사람을 막아야 하는데, 그에게 간특한 짓을 못하게 하라.’ 지금 부견이 이러한 말들을 어겼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p51/122)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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