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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후퇴- 불신과 공포, 분노와 적개심에 사로잡힌 시대의 길찾기
지그문트 바우만.슬라보예 지젝.아르준 아파두라이 외 지음, 박지영 외 옮김 / 살림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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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하는 페미니즘- 여성주의 상상력, 반란과 반전의 역사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임옥희 옮김 / 돌베개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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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원식 옮김 / 그린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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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낸시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과 논쟁들
낸시 프레이저 외 지음, 케빈 올슨 엮음, 문현아.박건.이현재 옮김 / 그린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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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념 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하는 집단을 고려하게 되는 경우 우리는 착취당하는 계급의 특징과 경멸받는 섹슈얼리티의 특징이 조합되어 있는 혼종 양식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집단이 '이가적 bivalent'이다. 이 집단이 집단적으로 차별화되는 원인은 사회의 정치 - 경제 구조와 문화 평가 구조 양자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불이익을 당하는 집단은 정치경제와 문화에 동시적으로 그 원인이 되는 부정의에 시달리는 것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 p42


 낸시 프레이저 (Nancy Fraser, 1947 ~ )의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Adding Insult to Injury: Nancy Fraser Debates Her Critics>는 그의 정의론과 이에 대한 비판자들의 논박이 실린 책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비판자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아무래도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간의 치열한 논쟁이 이 책을 펼쳐든 큰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논쟁을 이번 페이퍼에서 다뤄보려 한다. 


 먼저 낸시 프레이저는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에서 '젠더'와 ' 인종'을 혼종 양식인 '이가적 집단'이라고 규정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정치 - 경제' 구조와 '문화 평가' 구조에 모두 위치한 젠더는 이들 구조에서 다른 위상을 갖지면서 모순이 발생한다. 즉, 전자에서는 '재분배' 후자에서는 '인정'이라는 서로 다른 개선책을 요구하면서, 일종의 모순이 혼종집단에서 발생하면서 문제가 생겨난다.


 요약하자면 젠더는 이가적 집단 양식이다. 젠더는 재분배의 범위 안에 속해 있는 정치경제의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젠더는 동시에 인정의 범위 안에 속해 있는 문화 평가의 측면도 포함한다. 물론 이 두 측면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측면은 서로를 변증법적으로 강화하는 방식으로 얽혀 있다... 그 결과 문화적인 종속과 경제적인 종속의 악순환이 생겨난다. 따라서 젠더 부정의를 개선하는 것은 정치경제와 문화 모두를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젠더의 이가성은 딜레마의 원천이다. 여성이 적어도 두 가지 종류의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부정의에 시달리고 있는 한, 여성들은 적어도 재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개선책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두 개선책은 서로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양자를 동시에 추구하기는 쉽지 않다.... 이와 유사한 딜레마가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투쟁에서도 발생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 p44


 프레이저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두 가지 방안인 긍정적 개선안과 변혁적 개선안 중 변혁적 개선안의 손을 들어준다. '재분배 - 인정'의 문제에 있어 현 체제를 인정하면서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집단 간 갈등을 양산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무리없는 변혁적 재분배가 사회적으로 더 낫다는 것이다.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 1883 ~ 1950)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에서 말한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 속에서 2010년대 초반 사회이슈였던 '선별 급식'과 '무상 급식' 문제를 연상케 된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구도와 해결안을 '젠더', '인종'에서 나아가 '경제정의'문제로 확장시킨다.


 따라서 두 가지 접근 방식은 집단 분화에 대한 서로 다른 논리를 발생시킨다. 긍정적 개선책이 뜻하지 않게 계급 분화 촉진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변혁적 개선책은 분화를 흐릿하게 만든다. 이와 더불어 두 가지 접근 방식은 서로 다른 인정 역학을 발생시킨다. 긍정적 재분배는 박탈이라는 손상에 무시라는 모욕을 덧붙이면서 불이익을 당하는 자들에게 낙인을 찍을 수 있지만, 이와 반대로 변혁적 재분배는 몇 가지 형식의 무시를 개선하도록 도우면서 연대를 촉진시킬 수 있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 p56


 기존의 틀을 깨버리자는 프레이저의 주장은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 <젠더 허물기>에서 보여주듯 양성에 의한 기존 구조를 벗어나자는 그의 주장과도 통할 듯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버틀러는 프레이저가 문제의 틀을 정치 -경제와 문화 구조로 이원화(二元化) 시키고, 젠더 문제를 문화 구조로 밀어넣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마치 라캉(Jacques Lacan, 1902 ~ 1981) 의 '미끄러짐'에서 기표(signifier)가 기의(signified)에 채 닿지 못하듯, 버틀러가 바라본 프레이저의 틀은 젠더가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왜곡시키는 문제점을 갖는다. 


 그녀(낸시 프레이저)는 분리를 재생산하는데, 특정 억압들을 정치경제의 부분에 위치시키고 다른 억압들은 전적으로 문화적인 영역에 귀속시킨다. 정치경제와 문화 사이에 걸쳐 있는 스펙트럼을 가정하면서 그녀는 이러한 정치 스펙트럼의 문화적 극단에 레즈비언과 게이 투쟁을 위치시킨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동성애 혐오는 정치경제적 뿌리를 갖지 않는데 그 이유는 동성애자는 노동 분업에서 구별되는 지위를 점하지 않고, 전 계급 구조에 걸쳐 있으며, 착취당하는 계급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규제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변혁하는 운동이 왜 정치경제가 기능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가? _ 주디스 버틀러,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단지 문화적인>, p80


 

이로부터 버틀러의 비판이 시작된다. 맑스주의에 기반한 프레이저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섹슈얼리티'의 다른 기능 - 단순히 문화의 산물이 아닌 사회적 재생산에서 갖는  기능 - 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음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버틀러는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유물론과 교환관계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 주의와 선을 긋는다. 본문에서 하부구조를 강조한 유물론과 교환단계에서 잉여가치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마르크스( Karl Marx, 1818 ~ 1883)의 통찰을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을 공부한 버틀러는 통렬하게 비판한다. 문제의 이원론적 인식과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버틀러의 비판을 프레이저는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젠더'와 '섹슈얼리티' 모두가 '물적 생활'의 일부가 되는 이유는 이것들이 성적 노동 분업에 복무하는 방식 때문만이 아니라, 규범적 젠더가 규범적 가족의 재생산에도 복무하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여기서의 요점은 프레이저와 반대된다. 즉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장을 변혁 시키기 위한 투쟁이 정치경제의 핵심이 되는데, 그 이유는 이 투쟁들이 무급 착취 노동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사회적 재생산과 재화의 재생산 양자를 포함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영역 자체를 확장시키지 않고서는 이 투쟁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p83)... 이렇게 섹슈얼리티가 생산이나 재분배 내에 근본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데, 왜 최근의 맑스주의 혹은 네오맑스주의 논의에서는 섹슈얼리티가 '문화'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걸까? _ 주디스 버틀러,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단지 문화적인>, p86


 레비-스트로스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전용했는데, 모스에 따르면 증여는 유물론의 한계를 보여준다. 모스에게 경제는 다양한 문화적 형식을 전제하는 교환의 한 부분일 뿐이며, 경제적인 영역과 문화적인 영역의 관계는 여태껏 그래 왔듯이 명백히 구분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p88)... 레비-스트로스는 교환관계가 문화적인 동시에 경제적이라는 점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그는 교환 관계가 그 구분을 부적절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점도 드러냈다. _ 주디스 버틀러,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단지 문화적인>, p89


 프레이저는 친절하게도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를 통해 자신과 버틀러의 관점이 어떻게 차이나는가를 보여준다. 먼저 자신이 '젠더' 문제를 구분해서 파악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자신 역시 젠더 문제를 어느 한 구조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  '분배'와 '인정' 모두가 똑같이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버틀러를 베버(Max Weber, 1864 ~ 1920)에 빗대며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나의 틀에서 핵심적인 것은 분배의 부정의와 인정 부정의 사이의 규범적 구분이다. 나는 인정을 '단지 문화적인' 것이라고 폄하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 나의 핵심은 도덕적으로 옹호할 만한 사회 질서라면 반드시 근절시켜야 하는 두 개의 똑같이 주요하고 심각하며 실질적인 종류의 손해 harm가 있는데, 이를 개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p94)... 나의 관점에서 볼 때, 무시당한다는 것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온전한 파트너 full partner로서의 지위를 거부당하는 것이고, 사회 생활에 동료로 참여하는 것에서 배제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관점에서 무시는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제도화된 사회적 관계이다... 무시는 잘못된 분배에 수단되든 아니든 근본적인 부정의가 된다. 그리고 이 점이 정치적 결과와 연관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95


  내 입장에서 무시 부정의는 분배 부정의만큼이나 매우 심각한 것이며 무시 부정의는 분배 부정의로 환원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문화적 손해가 경제적 손해의 상부구조적 반영이라고 주장하기는커녕, 나는 두 가지 종류의 손해가 모두 근본적이며 개념적으로 환원 불가능하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나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애 중심적 무시가 '단지' 문화적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요약하면 버틀러는 사실 신분과 계급이라는 유사-베버적인 이원론을 정통 맑스주의의 경제 일원론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96


 프레이저는 이들(재분배-인정)의 문제는 두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지만, 결국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의 해법으로 해결 가능함을 지적한다. 문화 평가 구조에서의 인정관계를 바꿈으로써 정치 - 경제 구조에서의 잘못된 배분 문제를 해결하자는 프레이저의 주장은 문제 해결방안의 선후(先後)관계이지, 관계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성애 중심주의의 어떤 형식이 게이와 레즈비언에게 경제적 손해를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하나의 가능성은 맑스주의자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파악하는 것처럼 이러한 경제적 손해를 사회 경제 구조의 직접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버틀러가 승인한 듯이 보이는 이런 해석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이 겪는 경제적 취약함은 생산관계에 결박되어 있아. 이의 개선은 이런 관계의 변혁을 요구한다. .. 또 다른 가능성은 내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이성애 중심주의가 초래하는 경제적 손해를 더 근본적인 무시 무정의의 간접적인 (잘못된) 분배 결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이성애 중심주의의 뿌리는 '인정 관계'이다. 즉 이성애를 규범적인 것으로,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긋으로 구성하는 제도화된 해석 및 평가 패턴이 바로 그것이며, 그럼으로써 게이와 레즈비언은 참여 동등을 거부당한다. 인정관계를 바꿔라, 그러면 잘못된 분배는 사라질 것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0


 

 이와 함께 프레이저는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버틀러의 주장에 대해 역공에 나선다. 섹슈얼리티에 의해 발생한 경제적 문제를 모두 자본주의 문제로 귀속시키는 것은 지나치게 환원주의(還元主義, reductionism)적이라는 것이다. 여러 현상으로 나타난 문제는 하나의 원인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며, 이들간에 관계를 맺으며 확대재생산 되기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해체주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2 ~ 2004)의 해체주의를 연상시키는 해결안에 이어, 프레이저는 젠더의 수행성이 언어를 통해 이뤄진다는 버틀러의 주장을 '관념적인 생각'으로 비판한다. 이와 같은 프레이저의 글을 읽다보면 헤겔 사후 헤겔 우파의 관념론적인 목소리를 비판하는 헤겔 좌파의 모습을 스치듯 느끼게 된다.


 기능주의적 주장을 펼침으로써 버틀러는 내 생각에 1970년대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지녔던 최악의 측면 중 하나를 부활시켰다. 즉 서로를 완벽하게 강화하는 맞물려 있는 억압 구조들의 일원론적 '체계'로 자본주의 사회를 과잉 전체화 overtotalized 바로 그 시각이다. 이 관점에서는 '간격'이 포착되지 않는다... 기능주의를 무엇으로 대체하면 좋을지에 대한 질문은 나의 재분배/인정 틀에 대한 세번째 주장과 관련된다. 이 주장은 해체주의적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5


 역사화를 통해서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격이 사회 구조적으로 분화되고 역사적으로 특화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또한 반기능주의적 계기, 즉 대항 체계적 행위자성 agency과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위치 지을 수 있게 된다. 이것들은 언어의 추상적인 초역사적 특성 안에서, 즉 '재의미화'나 '수행성' 등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특정한 사회 관계의 실제적인 모순적 성격 속에서 나타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8


 

낸시 프레이저는 글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마무리하지만, 프레이저와 버틀러의 논쟁은 치열하고도 독자들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전체적으로 '정치- 경제 구조와 문화 비평의 구조'에서 시작된 이들의 논의 안에서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이원론(dualism)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 문제의 상호연관성을 인정하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 차이는 동일성 안에 수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마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의 시체 앞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듯 석학(碩學)들의 오가는 논리와 논리 속에 담긴 대가(大家)들의 사상을 찾는 것은 흥미도 감동도 없었던 도쿄 올림픽 시청보다 훨씬 즐거운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들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패배의 그림자가 어느 학자의 눈을 감겼는지는 독자들마다 다른 결론을 내리겠지만 ...


 오늘날 사회 정의는 결국 재분배와 인정 모두를 요구한다.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확신컨대 이 마지막 지점에 대해 버틀러와 나는 동의한다. 그녀가 사회 정의의 언어를 상기시키는 것을 꺼려하고, 우리가 이론적으로 불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정치의 최상의 요소들을 되살리고 그것을 '신사회운동들' 정치의 최상의 요소들과 통합시키고자 노력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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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모든 화폐경제 사회에는 상대적으로 독자적이지만 상호 의존적인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하며, 따라서 화폐경제는 저 신화에나 나오는 물물교환의 ‘실물‘ 경제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 두 측면 사이의 적대적인 상호의존이야말로 자본주의에 역동성을 불어넣는 주요한 원천이다. 기술혁신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것이 사회적 역동성으로 이어지려면 반드시 알 수 없는 미래를 두고 투기를 벌이는 이들에 의해 자금이 공급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
- P417

화폐는 사회적 기술 가운데에서도 가장 강력한 기술이지만, 이를 생산하고 통제하는 것은 특정한 화폐적 이해 집단들이며 또한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화폐시장이 그 가장 중요한 부채(국가 부채)의 신용도를 판단할 때, 중앙은행가들 및 그 전문가 위원회가 공표하는 말들이 가장 중요한 신호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화폐시장이 내리는 신용도의 판단으로 장기 국채의 이자율이 확립되며, 이 장기 국채 이자율을 기준으로 삼아서 자본주의의 나머지 모든 영역들이 의지하게 되는 온갖 종류의 이자율들이 결정된다. 요컨대 나는 정통 경제학 이론이 이 두측면들 사이의 현실적 관계를 거꾸로 역전시켜 버린 것이라고 본다.  - P419

다른 말로 하지면, 노동가치론 그리고 전통 경제학의 ‘실물 ‘ 이론  대신 나는 베버의 사회학에서 감지해 낸 사회적 가치론(social theory of value)을 흙속에서 꺼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임시적인 형태로나마 여기에 내놓는 것이다.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이 책 이후에 이루어져야 할 매우 절박한 과제이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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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을 하나 이상 낳아만 준다면 김훈장은 날로 퇴락해가는 집만 남아 있는 김진사댁의 대도 이어줄 생각이었다. 생각이라기보다 간절한 희망이었다. 마음을 놓아서였던지 며느리를 본 후 김훈장은 며칠을 앓았고 앓고 난 뒤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더욱더 희어졌다. _ 박경리, <토지 4> , p21/672


  <토지 4>의 처음은 러일전쟁(日露戰爭, Russo-Japanese War 1904 ~ 1905)이라는 상황을 바라보는 김훈장과 조준구의 입장 차이를 보여준다. 유학(儒學)을 따르며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위해 노력하는 김훈장과 어른 없는 최참판댁 자산을 노리는데 여념이 없는 조준구. 이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당대 지배층들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이들 중 김훈장을 살펴보자. <토지인물사전>에 '봉건제적 질서에 충실한 보수주의자'로 설명된 김훈장. 가문의 후사를 이어야한다는 그의 강박관념은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신유학(新儒學) - 성리학(性理學)'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해,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 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에서 '신유학' 이데올로기는 한국 사회가 부계 중심 사회로 개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장자(長子) 중심의 승계는 얼핏 유럽 중세의 봉건제도와 연계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유럽에서는 차남(次男) 이하 다른 자녀들은 성직자, 기사 등 다른 직업으로 진출한 데 반해 조선 시대의 엘리트 층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같은 듯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資本主義'와 관련한 다른 페이퍼에서 다루도록 하고 일단 넘기자.  


 장자는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아버지와 아버지 쪽 조상과 연결되었다. 다시 말해서 장자만이 선조들의 유일한 후사로서 후손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권리와 의무를 받는 '정체 正體'를 가졌던 것이다. 장자는 형제자매 집단을 대표하면서 세대를 잇는 이상적인 고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장자가 법적, 의례적, 경제적으로 우위에 놓이도록 만들었다. 이 같은 장자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난 것은 17세기이다. 이것은 이상사회에 대한 주자의 개념을 기초로 한 부계친 사고의 절정을 나타낸 것이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 , p241


 <토지 4>에서 김훈장은 가문을 잇는다는 가문의 책무를 완수한 후 자신의 시선을 비로소 나라로 돌린다. 이러한 그의 행동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안에서 김훈장은 어느정도 가문의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 그는 지배 엘리트 층으로서 문제를 자각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 오롯이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붉은 마음(丹心) 때문일까. 김훈장의 처지를 생각하면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라나 한 집안이 망하고 흥하는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인화가 없고 신의가 없고 예절을 잃으면 그것으로써 마지막이야. 지금 나라 꼴이 어떠한가? 동가숙서가식하는 천기보다 못한 지조 잃은 인사들이 황공하게도 임금을 볼모로 삼아서 오늘은 아라사요 내일은 왜국이요, 해서 자신의 영달에만 급급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느냐.(p22)... 가통을 이어야 한다는 골수에 박힌 사상은 이 나라의 꽃이요 정기요 하며 의병의 항쟁을 흐느끼듯 칭송해 마지않던 감정을 누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p25)... 가통을 잇는다는 집념과 정열의 성취를 본 지금, 이제 그 정열과 집념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아니 갈 곳이 없다기보다 차디찬 재로 변해버린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31/672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다른 책  <조상의 눈 아래에서 Under the Ancestors' Eyes: Kinship, Status, and Locality in Premodern Korea>에서 향촌의 양반인 향반(鄕班)이 지방에서 영향력 유지를 위해 종법(種法)에 기초한 네트워크가 구성되었음을 말한다. 중앙의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사회권력으로서 향약(鄕約)에 근거한 김훈장의 힘은 바로 지방민들의 지지와 존경으로부터 나왔기에 '평사리의 존경받는 어른'으로 남기 위해서 그는 움직여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유의 친족 이데올로기는 신분의 위계와 신분의 배타성을 찬미하면서 운명의 붉은 실처럼 신라 초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를 관통했다.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이 이데올로기는 출생과 출계를 기반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를 창출했고, 엘리트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엄청난 내구력을 부여했다.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727

 

  한편으로는 중앙으로부터 갈수록 소외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능하지만 결코 간섭을 멈추지 않는 국가의 압력에 시달리면서 엘리트 신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향촌의 양반(향반 鄕班)'은 점차 '지역주의 전략'에 기대어 본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향촌 지배권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구사한 가장 효과적인 장기 전략은 종족제도의 체계화와 강화였고, 이 제도는 17세기에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473


  <토지>저자 박경리(朴景利, 1926 ~ 2008)는 당대 서민들의 생각이 동학(東學) 사상에 잘 드러난다고 본다. 동학농민혁명에 드러난 민의(民意)는 동학교도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로부터 대표성을, 표영삼(1925 ~ 2008)의 <동학>에 나타난 일본상려관에게 보낸 글을 통해 도덕성과 반외세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자는 무위하고 후자는 종양(腫瘍)으로써 왕실 붕괴, 국가 파탄의 촉진제가 될 것이지만 수구 사상에서는 정예한 근위병(近衛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 두 줄기를 타고 뻗어난 들판, 그 들판을 메운 서민들은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이들은 모두 수구파다. 수만 동학이 개혁을 부르짖고 일어섰으나 시초부터 그들은 인륜 도덕을 강렬하게 내포한 집단이었으며 그들의 기치는 위국진충(爲國盡忠)이며 소파왜양(掃破倭洋)이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75/522


 일본 상려관은 펴보아라... 천도란 지극히 공평하여 다만 착한 사람은 음덕이 있게 하고 악한 사람은 벌이 있게 했다. 너희들은 비록 변경에 살고 있으나 받은 성품은 하나의 이치임을 또한 알지 못하는가... 아직도 욕심 많은 마음으로 다른 나라에 자리잡고 앉아 공격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며 살육을 근본으로 삼으니 진실로 어떤 마음이며 필경 어찌 하자는 것인가... 우리 스승님의 덕은 넓고도 가없어 너희들에게도 구제의 길을 베풀 수 있으니 너희들은 내 말을 듣을 것인가 안 들을 것인가. 우리를 해칠 것인가 아니 해칠 것인가... 스승님은 이미 훈계하였으니 평안하고 위태로움은 너희들이 자취하는 것인 바 죽도록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우리는 다시 말하지 않으리니 서둘러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계사 3월 초2일 자시 조선국 삼사원우초 _ 표영삼, <동학 2>, p276 


 인내천(人乃天)에 기반한 반외세(反外勢)를 주창한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삼대조(三代祖)가 미관밀직에 있었으며, 등과를 못한 향반으로 살아가야 했던 김훈장은 마을에 연고가 없는 경화사족(京華士族)인 조준구와는 달리 앞장서 움직여야할 이유가 있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의 지지 기반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이유가 김훈장을 의병장으로 떠밀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 1598) 당시의 양반 출산 의병장들의 동기도 이같은 요인이 부분적으로는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어느 덧 김훈장은 마을 사람들 이야기 속에서 의병장으로 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차츰 전설적인 인물로 변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 자신의 자존심의 소이였다. 왕시, 김훈장을 두고 화심리에 사는 장암 선생 수제자로서 학식이 깊다고 믿었으며 자랑으로 생각했던 그 심리와 흡사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마을 사람의 공통 심리였다. 꼭히 믿는 것도 아니면서 즐거움을 위해 믿어보는 것이다. 희망이 적은 그들의 감정적 사치였을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245/522


  작가는 작품 안에서 지배층의 두 움직임 수구(守舊)와 개화(開化) 모두를 비판한다. 김훈장으로 대표되는 전자의 움직임은 물론, 조선 후기의 변혁 움직임 역시 제대로 된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무너지고 말았음을 작가의 목소리로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작품 안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한 인물을 지적한다. 반계 유형원.


 중국의 정신문화, 그 속에서도 유교를, 유교 중에서도 철학과 인륜 도덕의 정주학(程朱學)을 숭상하였던 이조 오백 년 동안 그 이지적이며 귀족적인 사상을 골육으로 한 절도 높은 선비들과 왕실에 밀착된 명문 거족들은 기존의 정신적 가치를 옹호하며 또는 외향적 기득권을 주장하며 지금도 수구(守舊)를 고집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참으로 부수기 어려운 거대하고 준엄한 조선의 산맥 그 자체는 아니었는지. _ 박경리, <토지 4> , p73/522


 하기는 햇볕 안 드는 뒷방에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을 시조로 하는 경세학파(經世學派)의 불우한 사류(士類)들과 현실적인 중인 계급의 일부가 있어 진실한 개화에의 꿈을 기르고 있었으나 이네들은 일본을 업고 재주를 부리는 정치적 무대도 능력도 없었으며 민주주의라는 낯선 장단에 춤을 추며 백성들을 모아보는 주변도 없었고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후 수구파들이 열어놓은 혈로(血路) 아라사에게도 줄이 닿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이네들은 조선의 토종이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76/522


 작품 안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은 유형원(柳馨遠, 1622 ~ 1673)이다. 조선 후기 반계의 경세사상(經世思想)이 갖는 한계점을 작가는 지나가듯  말했지만, 제임스 버나드 팔레 (James Bernard Palais, 1934 ~ 2006)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 유형원과 조선 후기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Yu Hyongwon and the Late Choson Dynasty>에 의하면 그 영향력은 스치듯 지나갈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국(中國)을 중심으로 한 중화(中華)사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청일전쟁 후 방향성을 잃었지만, 도덕성에 근거한 윤리사상은 조선 후기 변화되는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진지하게 모색했다는 점을 말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토지>에 드러난 박경리 작가의 비판은 다소 매섭게도 느껴진다.

 

 유교적 경세사상은 정책에 직접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도덕성을 강조한 그 논리는 국가가 인간의 약점, 부패, 부도덕으로 악화되었을 때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유교의 기준에 따른 도덕적 질서를 창출하려는 궁극적인 목표는 유지됐다. 농업의 우위와 상업 및 이익 동기의 비도덕적 결과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중요하게 간주됐지만, 유교적 관원과 학자들은 경제적 활동의 어떤 이점을 인식했다.... 경세사상의 중심은 중국 고전에 서술된 중국 고대의 제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현실적 경세론의 실천에서 주요한 지혜의 원천은 중국의 역사와 제도를 서술한 방대한 방대한 문헌이었으며 조선의 안전을 유지한 주요한 버팀목은 1894년 청일전쟁까지 청이 제공한 보호였다. _ 제임스 B. 팔레,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 유형원과 조선후기 2> , p589


 이와 함께 <토지 4>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배경은 러일전쟁이다. 청일전쟁 후 대만과 요동반도를 점령하려던 일본의 계획이 삼국간섭(三國干涉 Tripartite Intervention)이 무산되면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대화 속에서 설명된다. 1885년 영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거한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에서 드러나듯, 극동지역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영국-일본 동맹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일부였으며, 삼국간섭이 전쟁의 한 동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당시 일본이 러시아보다 한 수 아래의 전력으로 여겨졌던 만큼 전쟁 이전 여러 타협안이 오고 갔음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 )의 <러일전쟁 : 기원과 개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내어주기로 한 청나라 얼빠진 위정자들은 차치하고 늑대같이 한반도도 먹고 싶고 만주 땅도 먹고 싶고, 그도 유유자적하게 노리고 있던 아라사가 어찌 되었겠소? 그러니까 아라사는 기고만장했던 일본에게 찬물을 끼얹었던 게요. 당사자인 청나라도 아닌 아라사가 독일과 불란서라는 나라에 충동이질하여 협박을 했단 말씀이오. 아무리 일본이 전승국이라고는 하나 대국 아라사와 불란서 독일의 삼국을 상대하여 이길 재간이 있었겠소? 문명이 앞서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그네들을 말이오. 게다가 영국하고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부지리나 얻을까 싶어 관망하는 상태였으니 일본으로서는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때부터 일본은 아라사에 대해서 보복의 칼을 갈았던 게지요. _ 박경리, <토지 4> , p60/672


 일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라사는 숙적이요 영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 각처에 저희들 식민지가 있는 만큼 아라사가 한반도로 만주로 하여 바다 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미련한 곰 같은 아라사가 그런다고 밀려나겠소? 한술 더 떴지요. 그러니까 지난 오월 우리 땅 용암포(龍岩浦)를 점거하는 사태까지 몰고 왔으니 일본이 콩 튀듯 할 수 밖에요. 이러니 일본과 아라사는 전쟁으로 판가름을 할 수." _ 박경리, <토지 4> , p66/672


 러시아의 만주 지배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상호 인정하자는 타협안이 대한제국의 중립화 정책과 부딪히면서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 직전의 치열한 외교전의 상황 속에서 개항 이후 여러 외교 문서에 등장했던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조항이 얼마나 무의미한 조항이었는가를 우리는 <러일전쟁>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또한, '청일전쟁', '러일전쟁' 두 전쟁 직전에 맺은 조선과의 협약을 통해 조선의 물자, 식량 등을 마음껏 징발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그네들의 모습 속에서 '근대화 近代化'라는 껍질가 실상은 과거 무사도(武士道)가 군국주의(軍國主義)로 변신한 '제국주의 帝國主義'에 다름 아님을 실감한다.


 

 청일전쟁은 열강을 자극했다. 야심가인 신 외무장관 무라비요프도 황제의 뜻을 존중해, 러시아 해군이 원하지도 않는 부동항 뤼순, 다롄의 획득이라는 모험을 적극 시도했다.(p1195)... 일본은 러시아의 랴오둥(遼東)반도 조차(租借)에 대해서도 당초에는 신중한 태도였다... 그러나 일본도 러시아의 만주 전면점령에 이르러서는 일본에게 조선을 전면적으로 양도하라는 만한교환론을 정면으로 제기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한다면 한국은 일본의 것이라고 명확하게 주장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한국 황제는 한국이 중립국이 되기를 희망하는 노선을 처음으로 내세우며, 일본 정부에 교섭하자고 요청했다. 1901년 1월 일본정부의 가토 외상은 주청 공사 고무라의 의견을 듣고,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무라의 의견은 이미 단순한 만한교환론이 아니었고, 한국의 확보가 러시아의 만주 지배를 견제하는 거점이 될 것이라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을 둘러싼 러일의 주장은 완전히 어긋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러일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_ 와다 하루키, <러일전쟁 2>, p1196 


 <토지 3>에서는 초반부의 주요 인물들이 한번에 퇴장하면서 작품의 전개가 빨라졌다면, 이번 주부터 들어간 <토지 4>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으로 급격하게 국운(國運)이 기운다. 급류처럼 빨라진 쇠망의 역사 속에서 이와 함께 읽을 좋은 책들이 많지만, '독서 챌린지 페이퍼'라는 글의 성격 상 짧게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페이퍼에서 잠시 언급한 <한국의 유교화 과정>, <조상의 눈 아래에서>,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러일전쟁>은 별도의 리뷰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번 주 <토지 4>는 개인적으로 유교 사상에 투철한 김훈장을 통해 조선 후기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와 충효(忠孝), 반계 유형원을 통해 후기 개화 사상의 한계와 러일 전쟁의 배경 등을 정리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조준구를 통해 친일(親日)이라는 부분도 다뤄볼 수 있겠지만, 이는 후반부의 인물인 배설자와 함께 종합적으로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져 다음으로 넘긴다.  어쨌든 독서 챌린지의 끝은 지금 당장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으니까...


 Ps. 개인적으로 <토지>  후반부의 인물인 친일파 배설자의 모습에서 실존인물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 1909)의 양녀 배정자(裵貞子, 1870 ~ 1952) 그림자가 어른거림을 느낀다. 이름의 유사성, 친일 행적 등이 이러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듯한데, 배정자와 다른 배설자의 비참한 최후에서 친일파에 대한 작가의 감정을 읽는다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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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 2021-08-21 14: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두 책에서 언급된 도이힐러의 주장에 다소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에서 그의 주장은 장자 중심 상속과 부계 사회 구현이 성리학 이념 안에 본래 포함되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저는 언급된 <조상의 눈 아래에서> 인용문과 같이, 당시 조선 사회가 직면한 현실적 조건 하에서, 기득권층이 권력 유지를 목적으로 신분 질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에서 그러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1-08-22 08:16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저 역시 베텔게우스님 말씀처럼 도이힐러의 논조에 다소간 차이를 느꼈습니다. 조금은 다르긴 합니다만... 저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에서는 여말선초에 새로운 정치이념인 성리학 도입이 부계 중심의 구조로 개편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는 반면, <조상의 눈 아래에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관계와의 역사적 대립에서 결국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저자의 결론에서 논조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차이는 전자가 여말선초, 후자는 신라~조선을 분석 대상으로 하는 ‘단기‘와 ‘장기‘라는 분석 시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베텔게우스님께서 말씀하신 부분과 관련해서는 두 측면에서 생각해봐야 할 듯 합니다. ‘이기론(理氣論)‘에 따라 중국을 모든 사물의 근원인 ‘이‘로 보고 전통문화의 측면이 강한 조선을 ‘기‘로 해석하여 부계 전통에 강한 중국을 단순히 따라가려 했는지, 아니면 이러한 목적이 아닌 기존 ‘불교‘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위한 ‘성리학‘ 도입에서 오는 여파 때문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직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지 못해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베텔게우스님 덕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유의 친족 이데올로기는 신분의 위계와 신분의  배타성을 찬미하면서 운명의 붉은 실처럼 신라  초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를 관통했다.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이 이데올로기는 출생과 출계를 기반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를 창출했고, 엘리트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엄청난  내구력을 부여했다.  - P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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