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모든 칸트적 모순을 내포하지만, 사랑은 우리 인생을 중독되게 하는 첫 번째 모순이지요.(Love contains all Kant's antinomies, but it is the frist that posions our lives.) 정, 시작이 없다. 반, 시작이 있다. 반, 끝이 없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외침에 지쳐서, 나의 사랑은 끝난다. 그 외침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일 따름이다. 즉,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지요. 탄생과 죽음의 고통은 동시에 외치지요. 인생이란 신비주의자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은 신성한 이성적 소산물은 아니지요, 그것은 비이성적 쓰라림이지 단계적이고 질서정연한 하강도 아니지요. 그리고 폭포가 아니라, 여울이거나 소용돌이지요.  _ W.B. 예이츠, <환상록> , p44


 이 페이퍼의 시작은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 ~ 1939) 의 <환상록 A Vision>에 있는 '칸트적 모순 Kant's antinomies'과 관련된 서재 이웃분이신 북다이제스터님과의 문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제 작성한 답글을 고쳐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아 먼 댓글로 작성해 본다. 예이츠가 <환상록>에서 언급한 '칸트적 모순'은 무엇일까?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 >에서 순수이성비판  중 초월적 변증학에서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을 말한다. 우주론적 이념 체계 안에서 초월적 이념으로 순수 이성에 대해 정립(定立)과 반정립(反定立)이 넷째 이율배반에 이르기까지 펼쳐진다. 이 중에서 예이츠의 <환상록>과 관련해서는 첫째 상충이 내용상 관련있어 여기에 옮긴다.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 초월적 이념들의 첫째 상충

 

A426 B454 정립 : 세계는 시간상 시초를 가지고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한계에 둘러싸여 있다.


 증명 : 왜 그러한가. 세계가 시간상 아무런 시초도 갖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면 모든 주어진 시점에 이르기까지 영원이 경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에서 사물들의 연이어 잇따른 상태들의 무한 계열이 흐른 것이다. 그러나 계열의 무한성은 계열이 순차적으로 연이은 종합에 의해서 결코 완결될 수 없는 데에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히 흐른 세계 계열은 불가능하며, 그러니까 세계의 시초는 세계 현존의 필연적 조건이다. 이것이 우선 증명되었다.


 첫째 상충에서 칸트는 정립에서 시간과 공간적으로 세계가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시간이 '기준 시점으로부터 이어진다'는 특성에 기초해 증명한다. 이어지는 반정립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한계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시간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 옮기지는 않았지만 공간은 '무공간'과의 관계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 도출된다. 이로부터 '정, 시작이 없다. 반, 시작이 있다. 반, 끝이 없다.'는 예이츠의 말이 칸트의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 구조와 관련있음이 확인된다. 


A427 B455 반정립 : 세계는 시초나 공간상의 한계를 갖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무한하다.


증명 : 왜 그러한가. 세계가 시초를 갖는다고 가정해보라. 시초란 사물이 있지 않은 시간이 그에 선행한 현존이므로, 세계가 있지 않았던 시간, 다시 말해 빈 시간이 선행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릇 빈 시간에서는 어떠한 사물의 발생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간의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에 앞서 비존재의 조건에 우선해 현존을 구별하는 조건을 그 자체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_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2>, p641


 이러한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으로부터 칸트는 무엇을 끌어냈을까. 칸트는 넷째 이율배반까지 정립-반정립을 통해 우리의 이념이 초월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우리의 이념이 경험외적인 영역에서 사용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으로부터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수이성비판> 에서의 소결론이다. 


 A565 B593 우리가 우리의 이성개념들을 가지고서 순전히 감성세계에서의 조건들의 전체성과 이와 관련해 이성이 쓰일 수 있는 것만을 대상으로 삼는한, 우리의 이념들은 초월적이되, 그럼에도 우주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조건자를 전적으로 감성세계의 밖에, 그러니까 모든 가능한 경험 바깥에 있는 것에다 세우자마자, 이념들은 초월적인 것이 된다.(p748)...  A566 B594 우리는 우연적인 것을 다름아니라 경험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데, 여기서는 전혀 경험의 대상일 리가 없는 사물들이 화젯거리이므로, 그것들에 대한 지식을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으로부터, 즉 사물들 일반의 순수한 개념들로부터 도출해야만 할 것이다. _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2>, p750


 다시, 예이츠의 <환상록>으로 돌아오면 칸트의 구조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칸트의 첫번 째 이율배반에 따르면 '정(正)'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이, '반(反)'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이 이야기 되는데, <환상록>의 '정'과 '반'은 순서가 반대이며, 칸트에 따르면 '정'의 위치에 들어가야 할 '끝이 없다(공간적 한계)는 '반'에 위치에 놓인다. '끝이 있다'와 공간에 대한 '정'은 이 구조에서 보이지 않는다. '끝이 있다'를 부정하고, 논증을 '끝이 없다'로 마치는 이 구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 시작이 없다. 반, 시작이 있다. 반, 끝이 없다.


 이는 '끝이 있다'는 존재에 대한 강한 부정이 아닐까. '끝이 있다'를 생략하면서 논증을 끝내지만, 논증에서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언어적 표현)만으로 '끝이 있다'는 사실이 부정되지는 않기에, '칸트적 모순'이 담긴 외침과 함께 '나의 사랑'은 끝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절절한 영원함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사랑이 아닌 욕망이고, 이로부터 욕망이 무한하다는 결론이 <환상록>에서 내려진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외침에 지쳐서, 나의 사랑은 끝난다. 그 외침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일 따름이다. 즉,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로써 칸트적 모순으로부터 도출된 사랑의 유한성과 욕망의 무한성이 <환상록>에서 어떻게 증명되는가를 알 수 있지만, 이에 대해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은 분명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사랑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사랑이 아닌 욕망이 무한하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다는.


 배중률(排中律, Der Satz des ausgeschlossenen Dritten)은 모순을 제거하려고 하는 명제다. 그러나 배중률은 모순을 배제함으로써 모순을 범한다. 이 명제에 의하면 +A는 A거나 불연이면 반드시 -A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함으로써 배중률은 벌써 제3자 즉 +A도 아니요 또 그렇다고 -A도 아닌 A. 그리고 +A도 되고 또 -A도 되는 A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모순개념에 관한 학설에 의하면 예컨대 한 개념은 청(靑)이고 다른 한 개념은 비청(非靑)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다른 한 개념을 긍정적인 것, 예를 들면 황(黃)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다만 추상적, 부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 - 그러나 부정적인 것은 그 자체가 또한 긍정적인 것이다. 이 점은 벌써 한 타자에 대립하는 자는 이 타자의 타자라는 규정에서도 볼 수 있다. - 이른바 모순개념의 대립이란 것은 공허한 것이다. _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 p338


 모순을 배제함으로써 생겨나는 배중률의 문제점은 헤겔의 체계 내에서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통해 보다 나은 상태로 나갈 수 있는 있는 '정(正) - 반(反) - 합(合)'이라는 변증법적 구조를 통해 극복되지만, '정립-반정립'의 칸트 체계 내에서는 화합의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칸트 체계의 한계이자 모순 문제로 볼 수 있다.  결국, 예이츠가 말한 '칸트적 모순'은 한 문장을 통해 본다면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을, 한 문단을 놓고 본다면 배중율을 기초로 한 칸트 체계의 모순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을까. 이상이 어제 북다이제스터님과 문답을 통해 정리한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항상 좋은 지적 자극으로 독서를 함께 해주신 북다이제스터님께 감사드리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환상록>의 한 문단과 관련한 긴 페이퍼를 쓰고 보니, 원래 <환상록>을 인용한 토지 챌린지 페이퍼보다 더 길어진 면이 있지만 지적인 도전도 다른 의미에서 챌린지라고 나름 의미를 붙여본다. 다만, 토지 독서챌린지 담당자분께서 이 글들을 보신다면, '겨울호랑이는 독서챌린지를 하는게 아니라, 혼자 무한도전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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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8-28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ㅠ
역시 칸트는 넘 어려운 것 같습니다. ㅠㅠ
제 소양 부족으로 거의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ㅠ
언젠가 칸트를 이해할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긴 시간 내어 긴 답변 주신 겨울호랑이 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욕심이긴 하지만 두세 번에 걸쳐 반복해서 이해하도록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혹시 여름 휴가는 다녀 오셨어요?
전 좀 느즈막히 이제 떠나보려고 합니다. ㅎ
즐건 주말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1-08-28 19:08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저 역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추측할 따름입니다. 이번에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개인적으로 더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부족한 글을 다시 읽어주신다니 감사하면서도 바쁘신데 번거롭게 해드린 듯도 합니다. 코로나로 여름 휴가는 그냥 집에서 보냈습니다. 늦은 여름 휴가 여유있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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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나는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서, 내 생각은, 많지도 행복하지도 못했던 내 과거의 연인들을 거쳐, 가장 열정적이었던 소년 시절의 정신적 사랑에 미치자, 하염없는 절망감으로 빠져들었어요. 나는 항시 사랑은 불변이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으나, 내 연인들은 자신의 기름을 다 마시면 죽었지요 - 영원한 등불은 지금까지 없었어요. _ W.B. 예이츠, <환상록> , p44


 어김없이 주말마다 돌아오는 독서챌린지 미션. 이번 주 과제는 '4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포함한 감상평 남기기'다. 작품 안에서 많은 일이 평사리 안과 밖에서 일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인상 깊은 장면이라면 환이와 길상의 환상(幻想, illusion)를 꼽을 수 있겠다. 나름 '진달래'와 '길'이라는 주제어도 붙여본다.


 생시 단 한 번 어머님이라 불러본 일이 없는 여인의 무덤 앞에 엎드린 환이 눈에서는 눈물 한 방을 떨어지지 않았다. 무념무상, 그리움도 원망도 없이 끝없는 갈대숲을 헤치고 가는 여인의 모습이 떠오르다가 사라질 뿐이다. 여인은 윤씨부인 같기도 했고 별당아씨 같기도 했다. 갈대숲은 때때로 진달래 숲으로 변하기도 한다. 혼미(昏迷), 끝없는 갈대숲을, 진달래 숲을  더듬고 가는 혼미, 혼미는 혼미를 부르고 허무가 하나의 정열로써 고개를 든다. _ 박경리, <토지 4>, p400/672


 환이는 어머니 윤씨 부인의 묘 앞에서 환상에 빠진다. 갈대밭에서 사라져간 어머니.  같은 벼과에 속하는 식물이지만, 벼가 초가을날 벌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풍요로운 이미지라면, 갈대는 늦가을 겨울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쓸쓸한 이미지를 안겨준다. 벼와 갈대의 상반된 이미지 속에서 최치수와 김 환의 상반된 처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같은 형제지만, 풍요롭게 자란 이복형 최치수의 그림자로서 갈대처럼 스산하게 자란 환이의 삶을 암시하는 것일까. 어쨌든 쓸쓸한 느낌을 주는 갈대밭을 지나 어머니 윤씨 부인은 피안(彼岸)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그리고 나타나는 진달래꽃. 진달래꽃은 별당아씨다. 사랑하는 이에게 진달래꽃을 가득 안겨주고 싶은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 환이의 마음 속에서 가을날의 갈대는 봄날의 진달래로 바뀌어간다. 그렇지만, 김소월의 <진달래꽃>처럼, 환이의 진달래도 이별의 꽃이 되었다....


 '나 명년 봄까지 살 수 있을는지......' '......', '산에 진달래가 필 텐데 말예요.' '......'

 '그 꽃 따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당신께,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그 속을 자신이 걷고 있다는 환각 속에 환이는 쓰러졌다. 꿈 속에서 울었다. 꿈 속에서 가슴을 쳤다. 여자를 부르고 달려가고 울부짖고, 여자가 죽어 이별한 뒤 환이는 줄곧 꿈속에서만 울었다. _ 박경리, <토지 4>, p406/672


 덮어놓고 불쌍한 두리, 두리를 중얼거리며 죄악감에 가슴을 치고 싶다가도 어느덧 억제할 수 없는 흥분이 그것을 쫓아버리고 전신이 나른한 환각에 빠져든다. 야릇한 환각, 아찔아찔하게 손짓해오는 것, 버선목 위의 하얀 계집애 종아리다. 너울거리는 속곳 자락이다. 도드라진 젖가슴이다. 사지를 버둥거리는 얼굴이다. 두리 얼굴이다. 아니 봉순이 얼굴, 봉순이의 가는 허릿매다. _ 박경리, <토지 4>, p375/672


 환이의 환상이 어머니 무덤에서 시작되었다면, 길상의 환상은 두리의 불행에서 시작된다. 삼수에게 겁탈당한 두리의 아픔 속에서 길상은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해 온 봉순을 떠올린다. 남매처럼 자란 봉순이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길상의 의식이라면, 아씨 서희에 대한 숨겨진 마음이 길상의 무의식이 아니었을까. 길상의 환상 속에서 봉순은 여인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상의 의식세계에서 봉순은 여인이 아닌 여동생으로 억압되었다면, 서희 때문일 것이다. 정작 길상 본인은 차라리 절에 들어간다고 펄펄 뛰며 부인하지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길상의 이런 마음을 안 봉순은 다른 길을 선택하고 떠나간다. 이런 면에서 길상의 환상은 '길'이다. 그것도 엇갈린 길.


 모두 시름을 놓고 부산으로 갈 행구를 챙기는 것이었으나 길상은 혼자 우울했다. 과연 봉순이는 진주로 갔을 것인가. 갔다고 생각하며 잊으려 했으나 잠시였다. 가지 않았을 것을 길상은 확신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날 봉순이는 저녁때 무심하게 집을 나가 가마를 타고 구례 쪽을 향했고 그날 새벽녘에 길상과 월선에 의해 서희는 육로로 읍내 이부사댁에까지 이러렀다. 결국 길상은 마지막까지 봉순을 대하지 못했다. 여하튼 일은 무사히 끝이 났다. _ 박경리, <토지 4>, p503/522


 평생을 비단옷에 분단장하고 노래부르며 마음대로 사는 세상, 봉순이 마음은 그곳으로 끌려간다. _ 박경리, <토지 4>, p350/672


  환이와 길상의 환상의 주제는 모두 사랑(eros)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은 모두 엇갈린 갈림길에 놓여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이별. 남매와 같았던 길상과 봉순의 사랑은 다음 세대인 윤국과 양현에게서 재현되는 것을 보면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 ~ 1939)의 <환상록 A Vision>에서 나오듯 사랑은 소용돌이 치는 인생 속의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이데아(Idea)의 세계로 이끄는 이성(理性)으로서 에로스가 아닌 어둔 밤 속을 헤매는 고통 속에서 어렴풋이 발견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현실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사랑의 모습이 아닐런지를 <토지 4>속 두 인물의 '환상'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속의 그대>보다는 김윤아의 <길>이 더 어울리는 듯하여 이 음악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이것으로 이번 주 미션 끝. 


 사랑은 모든 칸트적 모순을 내포하지만, 사랑은 우리 인생을 중독되게 하는 첫 번째 모순이지요. 정, 시작이 없다. 반, 시작이 있다. 반, 끝이 없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외침에 지쳐서, 나의 사랑은 끝난다. 그 외침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일 따름이다. 즉,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지요. 탄생과 죽음의 고통은 동시에 외치지요. 인생이란 신비주의자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은 신성한 이성적 소산물은 아니지요, 그것은 비이성적 쓰라림이지 단계적이고 질서정연한 하강도 아니지요. 그리고 폭포가 아니라, 여울이거나 소용돌이지요.  _ W.B. 예이츠, <환상록> , p44


 이데아 혹은 형상을 향해 신적인 사랑 및 신심(pietas)이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떨어져 있고 다수로 분산되어 있을지라도, 그때에는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의 이데아와 하나가 되어, 온전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때엔 우리가 신을 사물들 안에서 으뜸으로 섬겼던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_ 마르실리오 피치노, <사랑에 관하여 - 플라톤의 <향연> 주해>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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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먼댓글] ‘칸트적 모순‘에 대하여
    from 연의에게 들려주는 책 이야기 2021-08-28 11:12 
    페이퍼의 시작 사랑은 모든 칸트적 모순을 내포하지만, 사랑은 우리 인생을 중독되게 하는 첫 번째 모순이지요.(Love contains all Kant's antinomies, but it is the frist that posions our lives.) 정, 시작이 없다. 반, 시작이 있다. 반, 끝이 없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외침에 지쳐서, 나의 사랑은 끝난다. 그 외침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일 따름이다. 즉, 욕망은
 
 
북다이제스터 2021-08-27 14: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칸트적 모순이 무엇인지 급 궁금해집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27 16:42   좋아요 2 | URL
제 생각에는 문맥상 칸트적 모순이 ‘논리적 대립‘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한편이 참 이면 다른 편은 거짓으로, 한 편이 거짓이면 다른 편이 참인 판단의 대립을 ‘칸트적 모순‘으로 표현한 듯 싶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8-27 15:42   좋아요 2 | URL
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말씀해주신 것은 일반적인 모든 모순에 해당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전 ‘칸트적’에 뭔가 특별한 모순이 있을 것 같아 기대했습니다.
어제 칸트 책 새로 주문했는데요, ‘칸트적 모순’이 무엇인지 알아보면서 읽는 것도 새로운 재미와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ㅎ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28 06:57   좋아요 2 | URL
저는 해당 부분을 문맥상 순수이성이 갖는 이율배반(또는 자기모순)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칸트적 모순‘이라는 표현만 별개로 본다면 다른 해석도 가능할 듯 싶어요... 예를 들어 ‘칸트적 모순‘의 문제를 초월적이념으로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 으로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같은 이성 내에 존재하는 다른 정의가 모순을 불러일으킨다면, <환상록>에 언급된 것처럼 ‘정-‘반‘의 구조에서 ‘합‘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차이만 확인하는 것이 아닌지. 이처럼 헤겔의 변증법 구조와 연관시킨다면 칸트 체계의 한계로 논의가 나갈 수도 있을 듯 합니다만. 제가 <환상록>에서 가져온 일부 인용문이 이것과 연관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논의에서 제외했습니다... 짧은 제 생각이라 그냥 듣고 넘기셔도 좋을 듯 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8-27 15:58   좋아요 2 | URL
제가 보기에는요, 예이츠가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듯 합니다. 그냥 “칸트적 모순”이라고 하면 모든 독자가 자신 뜻을 100퍼 알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모순된 사상이 많이 지적되는 철학자를 언급하면서, 특히 더요. ^^ 예이츠가 잘 못 한 것 같습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1-08-27 16:41   좋아요 1 | URL
아마도 예이츠가 독자들을 공부시킨 것은 아닐까요 ㅋㅋ 분명히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예이츠는 친절한 작가는 아닌듯 합니다만, 인용한 책 「환상록」자체가 엄청 모호해서 본문을 읽다보면 ‘칸트적 모순‘ 은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ㅋㅋ

2021-08-28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1-08-27 1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의 향연을 읽고 글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신선해 했었어요.

겨울호랑이 2021-08-27 19:14   좋아요 1 | URL
저도 제가 가지고 있던 ‘뜨거운 가슴의 사랑‘의 이미지 대신 ‘차가운 머리의 사랑‘을 「향연」을 통해 배운 것 같아요. 진정한 플라토닉 러브의 의미를요^^:)
 

모용아시가 또 여러 아들들에게 각각 화살 하나씩을 바치라고 명령하고, 하나의 화살을 잡아서 자기의 동생 모용모리연(慕容慕利延)에게 주고 그것을 꺾게 하였다. 모용모리연이 그것을 꺾었다. 또 19개의 화살을 잡아 가지고 꺾게 하자 모용모리연은 꺾을 수 없었다. 모용아시는 마침내 그들에게 타일렀다.
"너희들은 이를 알겠느냐? 외롭게 되면 꺾기 쉬우나 많으면 꺾기 어렵다. 너희들은 마땅히 함께 힘을 쓰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야 하며 그런 연후에 나라를 지키고 가정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p40/163) - P40

애초에, 하의 세조(世祖, 혁련발발)는 성격이 호방하고 사치하였으며 통만에 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열 길이고 토대의 두께가 30보였으며 윗부분의 넓이는 10보이고 궁궐의 담은 높이가 다섯 길이고 그 견고함이 칼이나 도끼를 벼릴 만하였다. 대(臺) 위에 있는 정자는 장대하였는데, 모두 무늬와 그림을 새기고 비단을 입혔으며 문채를 최고로 하였다. 위의 주군이 둘러보고서 좌우의 사람에게 말하였다.
"아주 작은 나라인데 백성을 부리는 것이 이와 같고도 망하지 않기를 바랐겠는가!"(p88/163) - P88

소하(蕭何)는 ‘천자는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으니 웅장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무겁게 할 방법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옛 사람은 말하기를 ‘덕망에 있지 험준한 것에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혁련굴개(赫連屈?)가 흙을 쪄서 성을 쌓았으나 짐이 그것을 없앴으니 어찌 성에 있겠는가? 지금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아서 바야흐로 백성의 힘을 필요로 하니 토목공사의 일은 짐이 아직 행하지 않을 것이다. 소하의 대답은 올바른 말이 아니다."(p93/163)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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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중화(重華)가 수종(受終)하고 네 명의 흉악한 사람을 귀양 보냈으며, 무왕은 은(殷)을 이기고 완고한 백성을 낙읍(洛邑, 하남성 낙양시)으로 옮겼다. 천하의 악이란 똑같은 것인데, 향론청의(鄕論淸議), 그것을 제외하다니 지나치다!"(p18/106) - P18

노자와 장자의 책이 크게 가리키는 것은 생사(生死)를 동일시하고 가거나 오거나 하는 것을 가볍게 여깁니다.(p58/106) - P58

만세 후에는 나라에는 성숙한 군주가 있고, 백성은 돌아갈 곳이 있으며, 간악한 사람은 바라기를 그치니, 재앙이 스스로 생길 것이 없습니다.(p35/106)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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