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일을 논의하는 데는 마땅히 옛 법전의 바른 말에 의거하여야 하는데, 어찌 단지 전례만을 따를 수 있겠소?"(p21/152) - P21


대승정은 어두움을 틈타 성을 넘어 홀로 진격하니, 원최가 이상한 사람이 있음을 눈치 채고 몸으로 원찬을 호위하였으나 대승정이 곧바로 전진하여 그를 찍었다. 원찬이 원최에게 말하였다.
"나는 충신 됨을 잃지 않았고, 너는 효자 됨을 잃지 않았구나!"
드디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죽었다. 백성들이 그들을 애도하며 노래하였다.
"가련하다 석두성아, 차라리 원찬을 위해 죽을지언정 저연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p65/162) - P65

무릇 인군(人君)이 남쪽을 향하여 앉아 있게 되면 아홉 겹 속에 깊숙이 떨어져 있게 되고,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받들게 되니 뜻으로 보아 경사(卿士)들과는 막혀 있게 되어 폐달(陛?)에서의 임무는 마땅히 유사가 갖고 있게 된다.(p72/152) - P72

기뻐함과 온회함을 엿보고, 슬픔과 즐거움을 살피는데 이르러서는 행동으로 주군의 마음에 적합하게 하고 행동거지는 뜻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인주(人主)는 그들의 신분이 미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여 권력에서는 중요한 지위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p73/152)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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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앞서 양전자를 발견했던 앤더슨 Carl David Anderson, 1905 ~ 1991이 우주선의 안개상자 사진 안에서 미묘한 입자의 궤적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즉 그 입자는 분명히 전자가 아닌데다가 양자보다 가볍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 입자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새로운 입자(즉 중간자)라고 생각했다. _ 유카와 히데키,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 p113 


 유카와 히데키(湯川 秀樹, 1907 ~ 1981)의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은 여러 면에서 베르너 하이젠 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 ~ 1976)의 <부분과 전체>를 떠올리게 하는 에세이다. 물리학을 전공으로 하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공이야기를 쉽게 풀어 설명하면서 함께 인생에 대해 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제 우리는 핵분열이라는 뜻밖의 과정이 충분히 가능한 것임을 인식했다. 아주 무거운 원자핵의 경우는 외부로부터의 작은 자극만 주어지면 저절로 분열이 일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원자핵에 중성자를 쏘면 당연히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전에는 왜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_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 p100/284


 과학자들이 물리학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점외에 이들이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의 국민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공통점을 갖지만, 책을 읽으면서 받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과학(科學)에 국적은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적이 있기 때문일까. 하이젠베르크나 히데키가 각국을 대표할 수는 없겠지만, 책에 담긴 그들의 생각과 두 나라의 다른 전후(戰後) 처리 방식이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난 가을 힘들게 군복무를 하면서 보니까 주변에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히틀러의 이른바 평화 정책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나면, 독일 국민들이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히틀러와 그의 신봉자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될 거예요. _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 p101/284


 처음에도 말했듯이 중간자 이론은 오늘날 정체 상태에 빠져 있다. 이 난관을 벗어나게 되면 하나의 큰 해결점에 도달할 것이다. 사은 四恩의 첫째는 천황 폐하, 그리고 부모님의 은혜, 스승과 벗의 은혜, 중생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지 사은 四恩을 잃지 않고 연구에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_ 유카와 히데키,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 p116


 다른 한 편으로, <부분과 전체>는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이론을 도출하고 인정받기 위해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 ~ 1955),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 ~ 1962)와의 진솔한 토론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것에 비해 히데키의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은 기초를 모르는 신입생에게 강의하는 노(老)교수의 기초 강의록 같은 면을 보인다는 점에서 조금은 다른 느낌을 받는다.


 물질로부터 정신으로의 길, 이것이 현재 자연 과학이 추적하고 있는 길이다. 이것은 실로 먼 길이다. 언제쯤에나 완전히 통하게 될지 모른다. 물질의 측면에서는 물질과 화학이, 정신의 측면에서는 심리학이 그리고 그 가운데 생물학과 생리학이 각각의 길을 개척했다. 그러나 그 중간에는 아직도 미지의 광대한 황야가 있다. 우리들은 더 많은 실증적인 사실을 축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밑을 관통하는 법칙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_ 유카와 히데키,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 p83


 개인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에서 법칙에 대한 히데키의 문장에 시선이 머무른다. '더 많은 실증적인 사실을 통한 객관적인 법칙의 발견'이라는 히데키의 문장 속에서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 ~ 1814)의 이성(理性)을 떠올리게 된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을 사물과 일치시키기 위한 이성의 사용. 이성을 활용한 과학의 탐구라는 점에서 하이젠베르크와 히데키는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히데키의 이성은 자기 이익(또는 자기 집단 이익)을 위한 '도구적 이성'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Force의 어두운 측면과도 같은 이성의 서로 다른 면을 가져간 것이 하이젠베르크와 히데키의 사고 차이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객관적 진리란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사물 자체와 일치하는 것을 뜻하다... 인간의 인식능력으로 사물 자체가 우리의 표상을 통해 실현되거나 우리의 표상이 사물 자체를 통해 실현되거나 할 수 있지만, 두 경우가 서로 긴밀히 얽혀 있어서 명확히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 전리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이성과 상충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표상은 결코 사물 자체와 일치할 수 없다._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계몽이란 무엇인가> <유럽 군주들에게 사상의 자유를 회복할 것을 촉구함> - P156

 

 국가에 봉사하는 '관직'의 의무에 합당하게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 일컫고, 반면 그런 관직의 의무에서 벗어나 단지 '식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개진하는 것을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 일컫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성의 '사적' 사용은 도구적 이성을 가리킨다. 그런 경우 공동체의 구성원은 '단지 수동적 태도만 취하게 하는 기계적 장치'의 일부로 기능하며, 이성 사용의 보편타당성 여부를 따져서는 안 되고 국가의 명령과 관직의 의무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반면 이성의 '공적' 사용에서는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전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_임마누엘 칸트 외, <계몽이란 무엇인가> , 해제, p254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부분과 전체>를 읽기 전 간략하게 훑어보기 좋은 두 권의 책 소개를 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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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9-15 17: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지만 어려울 것 같은 ㅠㅠ 울집 아이가 좋아하는 주제네요. 사줘야겠어요. ㅎㅎ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9-15 19:05   좋아요 3 | URL
아이가 과학을 좋아하나 봐요. 어려운 공식보다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전개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미니님 아이와 함께 좋은 시간 되세요!^^:)
 

물질로부터 정신으로의 길, 이것이 현재 자연과학이 추적하고 있는 길이다. 이것은 실로 먼 길이다. 언제쯤에나 완전히 통하게될지 모른다. 물질의 측면에서는 물리학과 화학이, 정신의 측면에서는 심리학이 그리고 그 가운데 생물학과 생리학이 각각의 길을 개척했다. 그러나 그 중간에는 아직도 미지의 광대한 황야가 있다. 우리들은 더 많은 실증적인 사실을 축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밑을 관통하는 법칙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은 객관적인 (따라서 또 상대적이고 개념적이지 않을 수 없는) 지식이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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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화적 해결책이 나온데에는 끊임없는 싸움에 지친 탓이 컸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양측 진영은 민중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지도부 엘리트들은 그들의 무절제한 폭발력을 두려워했다. 또한 아무리 신앙심이 깊다 하더라도, 장점이라고는 학살에 동원할 수 있는 머릿수가 많다는 것뿐인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재산과 부를 나누어줄 생각은 없었다. 결국 위그노와 가톨릭 양측의 과격함과 폭력은 왕권강화에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국왕만이 진영과 상관없이 모든 백성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p99/906)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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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약(沈約)이 평론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이 법률을 수립하고 제도를 후세에 전하면서 반드시 돌아가신 왕들의 말씀이라고 하는 까닭은 대개 남긴 교훈과 남아있는 풍습이 다음 세대에 충분히 미치게 하려는 것이다."(p21/99) - P21

"무릇 귀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위험의 두려움이 있고, 비천한 사람에게는 구덩이에 묻히는 근심이 있고, 화를 피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무심하게 운명에 맡기는 것만 못하니, 존망(存亡)의 요체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같은 이치일 뿐이다."(p32/99)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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