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프로그래머가 아니더라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다. 의사소통을 하고, 정보를 검색하고, 문화 생활을 하거나 창작 활동을 하는 데 굳이 코딩 능력이 요구되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그저 개발자들이 이미 목적에 맞게 코딩한 결과물인 프로그램이나 애플리케이션을 다룰 수 있으면 된다.

우리가 살아가고 감각하는 생물학적 세계는 바로 모니터나 스마트폰 액정에 띄워진 화면처럼 생물들이 지닌 갖가지 프로그램이 실행된 출력값의 세계, 즉 ‘표현형phenotype’의 세계다. 표현형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맡고, 느끼는 생명체의 모든 것이다. 표현형의 세계를 살아가는 생명체는 자신이 구동하는 프로그램의 코드를 이해하지 않고도 프로그램을 작동시킨다.

유전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전자형을 결정하는 유전체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유전체에 들어 있는 생명 프로그램의 눈부신 활약, 즉 ‘표현형’의 세계에 떠오른 생명 현상에 대한 온전하고 통합적인 설명을 해내는 것이다.

‘새로운 종은 어떻게 출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다윈의 대답을 요약하면 "자연에는 변이가 존재하고, 그 변이들 사이에 제한된 자원을 두고 경쟁이 일어나며, 환경에 더 잘 적응한 변이가 자연선택되고, 그러한 변이들이 누적된 결과 종의 점진적인 진화가 일어난다."라는 것이다. 이 대답에서 잘 드러나듯, 변이는 멘델의 유전학뿐만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에서도 필수불가결한 핵심 요소이다.

양성자는 양전하를 띠므로 전기적으로 서로 밀어낸다. 이들을 핵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전기력을 이겨낼 추가적인 힘이 필요한데, 이 힘이 핵력이다. 중성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라 전기력을 느끼지 못하므로, 핵력을 보강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지구상 모든 에너지의 근원은 별이다. 별이 내는 빛, 별이 만들어낸 무거운 원자들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전부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이거다. 별은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어내는가? 태양이라는 별의 부피는 지구의 120만 배에 달한다. 이렇게 거대한 태양의 에너지원은 원자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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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나를 가장 근본적으로 의문에 빠지게 하는가? 그것은 유한한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관계, 즉 죽음으로 향해 있고 죽음을 위한 존재임을 의식하는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죽어가면서 부재에 이르는 타인 앞에서의 나의 현전 presence이다. 죽어가면서 결정적으로 멀어져 가는 타인 가까이에 자신을 묶어두는 것, 타인의 죽음을 나와 관계하는 유일한 죽음으로 떠맡는 것, 그에 따라 나는 스스로를 내 자신 바깥에 놓는다. 거기에 공동체의 불가능성 가운데 나를 어떤 공통체로 열리게 만드는 유일한 분리가 있다. _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p23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 ~ 2003)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 La Communaute inavouable>에서는 타인(他人)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묻는다. 나 자신의 죽음이 아닌 다른 이의 죽음이 왜 나에게 의미를 갖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하기 위해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 ~ 1962)가 말한 '모든 존재의 기초'로서 결핍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 또한 결핍의 충족을 추구하지만, 영원한 배고픔과 갈증의 형벌을 받은 탄탈로스(Tantalus)처럼 자기 자신을 위한 결핍 충족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단지 자기 자신을 미래를 향해 기투(project)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가져올 뿐. 궁극적으로 이러한 가능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선 그 무엇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실존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블랑쇼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는 죽음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죽어가는 타인의' 손을 붙잡고 그와 함께 이어나가는 무언(無言)의 대화. 나는 그 대화를 다만 그가 죽어가는 것을 돕기 위해서만 이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를 근본적으로 상실로 이끌며 나눌 수 없는 그의 소유인 것처럼 보이는 사건으로 인한 고독을 나누기 위해, 나는 그 대화를 이어간다. _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p23


 타인의 죽음에 대한 공감과 나눔. 그것은 내 존재의 근원적 문제로서의 결핍을 충족할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공통의 운명을 가진 필멸(必滅)의 존재들이 갖는 관계속에서 공동체는 규정되어간다. 죽음을 싫어하는 공통된 감정 속에서 지금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통제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자유다. 


 각자의 것일 수 없는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사건(탄생, 죽음)이 만일 각 사람에게서 공통된 것이 아니라면, 공동체란 있을 수 없다. 그 사실이 공동체의 근거를 이룬다. 공동체는 너나들이로 말하기가 금지되어 있는 비대칭성 asymetrie의 관계만을 '너와 나에게서' 완강히 보존하려 한다... 공동체는 죽어간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우리는 홀로 죽지 않는다. 만일 죽어가는 자의 이웃이 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진정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하찮기는 하지만 역할을 나누기 위해서, 죽어가면서 현재 죽을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부딪힌 자를 내리막길에서 붙들기 위해서이다. 가장 부드러운 금지의 명령으로. 지금 maintenant 죽으면 안 돼. 죽기 위한 지금이 있을 수 없다는 것. _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p24


 156명의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한 10.29 참사.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분명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유한한 존재로서 죽음을 바라보는 안타까움.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공존하는 것을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출입금지 구역도 아닌 곳에 자유롭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방문한 이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다름아닌 평소 '자유민주주의'를 그토록 외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평소 그렇게 '자유'를 외치던 자들이 정작 '책임'에 대해서는 왜그렇게 침묵하는지. '자유-책임'은 동전의 양면임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이렇게 참사의 기억은 일부에서 왜곡되고, 논쟁거리로 소비되고 있다.

 

 세기를 거치며 새로이 덧붙여진 자산으로 점점 더 풍부해진 이 공생관계는 대혁명과 더불어 파경을 맞았다. 모든 것이 요동을 쳤다. 이제껏 사회적 결속의 원칙이요 민족적 일체성의 기초였던 교회의 맏딸이라는 준거관념은 두 충성의 대상 - 신도인가 시민인가 - 가운데서 선택을 강요받은 프랑스인들 사이에 깊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한 파열은 몇 달 사이에 이루어졌다(p197)... 교회의 맏딸 반대편에 또 하나의 프랑스가 들어서 있었으니, 이 프랑스는 대혁명을 자신의 세례 시점으로 잡고, 랭스의 종교에 혁명의 서사시를 대립시켰다. 그 사건의 파장은 막대했다. 그것은 거의 2백 년 가까이 민족의식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몰고 왔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5> , p198


 기억의 왜곡 문제는 오늘날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억의 장소 5 Les Lieux de Memoire>는 1572년 프랑스에서 가톨릭 신자들에 의한 대대적인 위그노(개신교 신도) 학살이 일어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elemy)이 분열된 프랑스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억되었는가를 알려준다. 


 대개 공식적 프랑스에 속하며, 따라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나라에서 권력의 보유가 허용한 모든 수단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던 절반의 프랑스는 프랑스의 종교적 과거에 관한 모든 전거를 공동의 기억에서 지워 버리는데 힘을 쏟았다... 반대기억을 풀어놓는 반대역사(contre-historie)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지자들은 종교에 관한 편집(偏執)에서 비롯된 박해 이외의 어떠한 사실도 좀처럼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종교사는 생바르텔르미 학살과 미구엘 세르베토나 라바르 기사의 처형 사건, 또는 낭트 칙령의 철회 등 확실히 종교적 소수파나 무신자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들만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들로 축소되었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5> , p199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하나의 분기점에서 자신의 입장에 따라 역사의 기억을 하나의 방향으로만 바라보기 위해 이를 소거(消去)하려는 움직임과 이에 대항해 하나만을 강조하고 다른 모든 것을 편집하는 반대의 흐름. 이러한 두 갈등은 오랜 분열 끝에 공동체에 닥친 공통의 위기 속에서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적 의미가 퇴색한 뒤 이루어진 화해가 갖는 한계 또한 <기억의 장소 5>에서는 분명하게 지적된다. 10.29 참사를 보면서 우리는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타인의 죽음이 현재의 우리에게 갖는 의미,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기본으로 이 참사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한 세기여에 걸쳐 점점 더 사이가 벌어진 끝에, 두 개의 프랑스는 1914년에 터진 전쟁과 함께 민족 공동체가 겪어야만 했던 시련을 계기로 서로 화해하기 시작했다. 두 갈래 기억들 사이의 화해는 '신성한 단결'(Union sacre)의 필연적 결과들 가운데 하나였다(p204)... 오늘날 이러한 관념에 의거하는 하나의 프랑스와 그것을 거부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프랑스 사이의 대립은 확실히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양쪽 모두의 기억상실일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맏딸이 지나온 종교적 과거가 잊혀져감에 따른 민족문화와 민족적 기억의 손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염려해야 할 이들이 바로 세속성 원칙에 가장 투철한 구성원들, 즉 근대 프랑스의 기초자들을 계승한 사람들이라는 점은 현 상황의 커다란 역설이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5> , p209


 다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10.29 참사에 대해 애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러한 참사의 원인과 재발방지에 대한 노력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방지하고자 만들어 낸 합의체로서 '국가권력'이라는 리바이어던을 인정한 것은 이를 통해 최소한의 안정을 보장받기 위함이 아닐까. 스스로의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면서까지 리바이어던이라는 용(龍)의 머리에 올라탔으면,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그의 의무가 아닐까. 되려 역린을 건드려서 용의 분노를 샀더라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반의지를 모두 담아낼 그릇이 못된다면, 스스로 그릇을 깨뜨리고 내려오는 것만이 모두를 위한 마지막 충정이라 생각된다...


 공통의 권력(common power)은 외적의 침입과 상호간의 권리침해를 방지하고, 또한 스스로의 노동과 대지의 열매로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여 쾌적한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권력을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의 의지를 다수결에 의해 하나의 의지로 결집하는 것, 즉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one Man) 혹은 '하나의 합의체'(one Assembly)에 양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 모두의 인격을 지니는 한 사람 혹은 합의체를 임명하여, 그가 공공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하든, 혹은 [백성에게] 어떤 행위를 하게 하든, 각자가 그 모든 행위의 본인이 되고, 또한 본인임을 인정함으로써, 개개인의 의지를 그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개개인의 다양한 판단들을 그의 단 하나의 판단에 위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달성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통일되었을 때 그것을 코먼웰스(Commomwealth)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바로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탄생한다. 코먼웰스의 정의(定義)는 다음과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상호 신의계약을 체결하여 세운 하나의 인격으로서, 그들 각자가 그 인격이 한 행위의 본인이 됨으러써, 그들의 평화와 공동방위를 위해 모든 사람의 힘과 수단을 그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_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1> , p232


 용(龍)이라는 동물(虫)은 유순해 길들이면 탈 수 있다. 그러나 턱밑에 직경 한 자쯤 되는 역린(逆鱗,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어, 설득하려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야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_ 한비자, <한비자> , p118/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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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08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2-09 04:52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
 

G20과 스탠더드앤드푸어스의 결론은 같았다. 유럽은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유럽은 국채시장과 은행 자본재구성과 관련된 기본적인 불안정성을 정면에서 다루지 않았고 2010년과 마찬가지로 다시 유럽 문제에 IMF를 끌어들였다. 그리스의 채무불이행 사태를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채무 재조정을 시작했다. 꼭 필요한 일이긴 했으나 그리스 채권자들에 대한 헤어컷 적용은 채권시장에 대한 압박의 수위만 높여주었을 따름이다.

재무부 장관들과 중앙은행 총재들의 회담에 대한 IMF 보고서 내용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세계 경제에 대한 "중대한 위험"은 세계적으로 심화된 "절약의 역설"이라는 것이었다. 전 세계의 가계와 기업과 정부가 한꺼번에 재정 적자를 줄이겠다고 나섰고 그 때문에 경기침체의 위험이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보고서의 내용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진다. "이러한 위험은 취약한 금융시스템, 높은 공공 부문 적자와 채무, 그리고 이미 낮아진 금리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고 이로 인해 특히 유로존 지역에서는 낙관주의나 비관주의가 낳은 결과물들이 계속해서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돌이켜보면 마리오 드라기가 "어떤 노력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을 때가 유로존 위기의 전환점이었다. 그의 발언 이후 시장은 급속도로 안정되었고 취약한 국가들이 발행한 국채 대부분은 시장금리가 정상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유로존 붕괴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깊은 호소력을 지닌 설명이었다

연준은 우선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기관 채권을 매달 400억 달러어치씩 매입하기로 약속했다.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연준이 "노동시장 전망에 실질적인 개선"을 확인할 때까지 매입을 계속한다는 점이었다. 또한 거기에 덧붙여 FOMC는 실업률이 6.5퍼센트 이하로 내려가고 연준의 물가상승률 전망이 2.5퍼센트 미만이 될 때까지 연방기금금리를 0퍼센트에 가깝게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2년 12월 12일 FOMC는 다시 매달 채권 매입 규모를 400억 달러에서 850억 달러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제3차 양적완화 조치는 이렇게 상황에 따라 변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무한 양적완화"라는 유명한 별칭이 붙기도 했다.

유로존 위기는 유럽 정부들이 막대한 규모의 정치적 자본을 투입함으로써 멈출 수 있었다. 즉, 그리스 채무 재조정, 재정 협약, 유럽 은행연합, ESM, 그리고 유럽중앙은행의 OMT 같은 새로운 조치들이 큰 역할을 했다. 유로존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예측한 사람들은 유럽 정부들이 할 수 있는 이런 투자 규모를 잘못 판단한 셈이다. 그리고 마리오 드라기가 강조하고 싶었던 내용도 바로 그런 것들이다.

미국은 새로운 형태의 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다시 한번 주장한다. 그리고 유럽은 1947년 이후 미국의 지도 아래 시작했던 유럽의 미국화를 다시 한번 추진한다.

국제 경제 정책에 관한 한, 2012년 11월의 오바마의 승리와 벤 버냉키의 제3차 양적완화, 마리오 드라기의 연설이 하나로 합쳐져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종결지었다고 볼 수 있다. 중도 진보진영의 위기관리 능력이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21세기와 다양성, 개방성, 전문가 위주의 실용주의가 이제 함께 나아갔다.

유럽에서는 결국 유로존이 살아남았고 마리오 드라기의 선택이 옳았다. 위기를 바탕으로 유럽통합의 과정은 더 중요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역시 거기에는 엄청난 경제적, 정치적 대가가 필요했다.

독일 재무부 장관 볼프강 쇼이블레는 아예 총선을 치르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고 늘 그렇듯 직설적으로 제안했다.8 그리스의 민주주의 절차를 잠시 연기함으로써 유권자들이 뭐라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전에 핵심 조치들을 취하도록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제안은 그리스 국민들의 분노만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미처 예상치 못했지만 어떤 징조가 되었던 것이 래리 서머스가 2013년 11월 IMF에서 했던 연설이다.8 연설의 주제는 경기회복과 엄청나게 실망스러운 회복 속도였다.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아마도 유럽을 불황에서 구해내고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며 자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2010년 이후 유럽의 경제사정은 오히려 더 나빠졌으며 미국은 역사상 가장 느린 회복세를 보였다.

돌이켜보면 2008년 이전에는 통화정책이 "지나치게 완화적"이라는 데 사람들이 다 동의했다. "엄청난 규모의 대출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가계를 꾸려나가면서 경험했던 것처럼 돈이 실제보다 더 많다고 믿었다. 너무 많은 돈을 빌리고 또 너무 쉽게 썼으며 그만큼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랬다면 미국 경제는 엄청난 호황이 이어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부동산 시장이 위험할 정도로 과열되었지만 2008년 무렵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수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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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아이테토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6
플라톤 지음, 정준영 옮김 / 이제이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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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d 그렇지만 말이야, 그것들과 관련해서 다른 것들은 제법 이해하고 있네만, 사소한 어떤 것에 대해서는 난관에 봉착해 있네. 자네를 비롯해 여기 있는 이들과 더불어 검토해 봐야 할 게 바로 그것이네. 그럼 내게 말해 보게. 배운다는 건 배우게 되는 것들에 관해 더 지혜롭게 되는 것 아닌가?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78


 이렇게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 ~ BC 399)의 사소한 어떤 것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테아이테토스 Theaetetus>는 시작된다. <테아이테토스>가 던지는 질문은 "앎(지식)이란 무엇인가"이다. 젊은 테아이테토스와 문답을 통해 진행되는 논의에서 처음 '앎=지각'이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외부 자극을 일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로부터 앎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최초의 논의다. 그렇지만, 이러한 명제는 곧바로 반박된다.


152c 뜨거운 것들이나 그런 모든 것들에서 나타남과 지각은 동일하네. 그것들은 각자가 지각하는 그대로 각자에게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일세. 그러므로 지각은 언제나, 있는 것에 대한 것이며, 앎인 한에서 틀리지 않는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92


 누군가에게 '큰 것'이 다른 이에게는 '작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을 때, 우리는 '큼'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무엇을 안다'에서 그 무엇이 상대적인 양태로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제기되며, 이 과정에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90/485 ~ BC 415/410)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가 함께 비판된다. 참된 앎이 지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오는가?


157a 그 자체가 그것 자체로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들은 서로 간의 교섭 속에서 생겨나 움직임을 통해 온갖 것들로 된다고 말일세.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작용을 가하는 쪽에 대해서도 작용을 받는 쪽에 대해서도 그것들을 따로따로 취해서 어떤 것으로 있다고 단정적으로 사유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01


 182b 그 어떤 지각에 관해서든, 이를테면 봄에 관해서나 들음에 관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대체 봄이나 들음 자체 속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을 보지 않음이라고 하기보다 봄이라고 불러서도 안 되며, 어떤 것을 지각 아님이라고 하기보다 다른 어떤 지각이라고 불러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나와 테아이테토스는 지각은 앎이라고 말했습니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56


 이제 참된 앎은 추론에서 온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된다. 그렇지만, 모든 추론이 '앎'인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테아이테토스에 의하면 오로지 참된 판단만이 우리가 대상을 제대로 알게끔 하는 것이며, 거짓된 판단은 '무지(無知)'에 다름아니다. 마치 새장 안에 새를 넣어 우리가 소유하듯이, 우리가 상기를 통해 영혼이 알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참된 판단에 의한 추론이다. 또한, 단순히 '이름'만 가질 수 있는 요소들과는 달리 '이름'과 함께 '서술'될 수 있는 복합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서술'만이 참된 앎을 표시할 수 있는 것이며, 서술 될 수 없는 것은 앎(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인식될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요소에 의해 서술 될 수 있는 특징이 있고,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된 것들은 참된 앎인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면서 <테아이테토스>는 아포리아(Aporia)로 막을 내린다. 이 아포리아는 무엇인가?


186c 몸을 통해 영혼에 이르는 모든 경험들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태어나자마자 자연적으로 지각하게 되어 있지만, 그런 경험들을 있음과 이로움의 측면에서 헤아린 결과는 그런 것이 누구에게 생기게 되더라도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애를 쓰고 교육을 받아야 가까스로 생기게 되지 않겠나? 앎은 경험들 속에 있지 않고, 그런 경험들과 관련된 추론 속에 있는 것일세. 추론 속에서는 있음과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나, 경험 속에는 그게 불가능한 것 같으니까.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65


199e 맞아요, 소크라테스 선생님. 우리가 새들을 '앎'으로만 놓았을 때 아마 그건 제대로 한 게 아닐 겁니다. '모름'들도 영혼 속에서 함께 여기저기 날아다닌다고 놓았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사냥하는 자는 어떤 때는 '앎'을 붙잡고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어떤 때는 모름을 붙잡기도 하는데, 거짓된 판단은 '모름'에 의해 하게 되는 것이고 참된 판단을 '앎'에 의해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어야 했습니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95


 202c 복합체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일 뿐만 아니라 서술될 수 있는 것들이면서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들이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설명 없이 참된 판단을 취할 때면, 그의 영혼은 그것에 관해 참된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이나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세. 설명을 주고받을 수 없는 자는 그것과 관련해서 앎이 없는 자이니까. 반면에 설명을 추가로 얻은 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앎에서 완벽하게 되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00


 그것은 지각으로부터의 개별적 인식이 추론에 의한 보편적 인식과 합치되는가를 검증했을 때 비로소 참된 앎의 과정이 완결된다는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참된 앎이란, 이데아(idea)와 같은 형상에 대한 인식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리적인 세계(가상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될 것인가? 그렇다면, 참된 앎이 아닌 것이 아니지 않은가?


 209c 내가 생각하기로, 테아이테토스의 이런 들창코의 상태가, 내가 목격한 다른 들창코의 상태와 차이가 나는 어떤 것을 새겨 주고서 기억상을 남겨 주기 전까지는, 테아이테토스가 내 안에서 판단의 대상으로 되지는 못할 것 같네. 그리고 자네의 모습을 이루는 다른 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7


 209d 이보게, 설명을 추가로 포착한다는 게 차이성을 판단하라는 게 아니라 인식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라면, 앎에 관한 설명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런 설명은 그것 참 즐거운 것이기도 할 걸세. 그러니 앎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차이성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이라는 답변이 제시될 것 같네. 우리가 앎을 찾을 때, 차이성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그런 것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을 앎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일세.  그러므로, 테아이테토스, 앎은 지각도, 참된 판단도, 참된 판단에 덧붙여진 설명도 아닐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8


 결국, <테아이테토스>에서의 논의는 참된 앎이 지각과 추론과 서술을 통해서 형상과 질료의 차이성을 밝히는 것이라는 결론과 이 결론 안의 순환구도 속에서 논의가 마무리된다. <테아이테토스>에서의 미진한 결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참된 앎'이 가리키는 바에 대한 존재론적 논의는 <파르메니데스>와 연결되며 서양 철학사에 인식론과 존재론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이들 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테아이테토스>를 정리한 이번 리뷰와 함께 이에 대한 답은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이,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답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 1976)의 답으로 정리한 페이퍼로 짝을 맞추려 한다.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에게는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 ~ BC 19)와 같은 스승이 있었다면, 러셀과 하이데거는 인식론과 존재론이라는 지옥을 안내할 스승이 되줄것인가. 개인적으로는 베아트리체와 같은 존재가 더 좋겠지만, 세상일은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니 불만은 없다...

177e 이름을 말하지 말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을 바라보게 해야 하니까요. 그 이름으로 무슨 대상을 가리키든 간에, 나라는 확실히 그 대상을 겨냥해서 입법을 하며, 모든 법을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것들로 제정합니다. 나라가 그 법을 자신에게 가능한 한 이로운 것들이라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한에서 말입니다. 나라가 다른 어떤 것을 주시하고서 입법을 할까요? 우리는 입법을 할 때, 나중의 시간에 법이 이로운 것들로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제정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장차‘라고 하면 제대로 말하는 것이 될 겁니다. - P146

189a 어떤 것을 만지는 자는 하나의 어떤 것을 만지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인 한에서는 있는 것을 만지는 것이지? 하나의 어떤 것을 판단하는 자는 있는 어떤 것을 판단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있지 않은 것을 판단하는 자는 어느 하나도 아닌 것을 판단하는 것이네. 어느 하나도 아닌 것을 판단하는 자는 아예 판단조차 하지 않는 것이네. 그러므로 있지 않은 것은 판단할 수는 없네. 있는 것들과 관련해서든 있지 않은 것 자체를 그것 자체로 해서든 말일세. 따라서 거짓된 판단을 하는 것은, 있지 않은 것들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짓된 판단이란 없네. - P171

205c 일차적인 것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이 합성되는데, 그런 일차적인 것들에 대해선 설명이 없으며, 그 까닭은 일차적인 것들 각각 그 자체가 그것 자체로 비복합적인 것이고, 또 그것과 관련해서 ‘있다‘라는 말이나 ‘이것‘이라는 말을 적용해 말하는 것조차, 그것과 이질적인 다른 것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옳을 수 없으며, 그래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일차적인 것들 각각은 설명이 없는 것으로, 그리고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된다고 한 것 말일세.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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