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태평양 세계)는 바다 때문에 고립된 게 아니라 바다를 통해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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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날 김대기 비서실장이 남긴다른 발언은 이상민 장관 유임의 진짜 이유를 추측하게 한다. 김 비서실장은 이날실무적인 이유를 언급하며 "지금 사람을바꾸고 하는 것도 중요할 수도 있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또 청문회 열고, 뭐 하면 두 달이 또 흘러가고,
행정 공백이 또 생기고"라고 말했다. 청문회 같은 임명 절차의 부담, 내각 공백을다시 맞닥뜨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내비친 것이다. - P13

참사 이전까지 윤석열 정부의 가장 큰 약점은 인사였다. 국정에 드라이브를 걸어야 하는 시점마다 인사 난맥이 이어졌고,
제대로 된 정책 어젠다를 부각시키기도 어려웠다. 더욱이 이상민 장관은 집권 초경찰 내부 반발을 무마하면서까지 행안부 산하 경찰국을 신설한 윤석열 정부의핵심 인사다. 윤석열 대통령이 선뜻 ‘장관문책‘을 꺼내들기 어려운 이유다. - P14

30% 지지층을 단단하게 엮어주는 것은 북한이다. KBS-한국리서치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을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 중 39.8%가
‘대북 강경 대응‘을 평가의 이유로 꼽았다. 이태원 참사 이후에도 미사일 발사를계속하고 있는 북한의 위협과 대북관계불안이 대형 참사에도 불구하고 강성 보수층을 결집시키고 있다는 의미다. 이상민 장관이 ‘버티는‘ 원동력이 대통령이라면, 대통령이 고위층 문책을 계속 회피할수 있는 원동력은 대북 강경 모드를 통한보수층의 결집이다. - P15

경찰은 알고 있었다. 핼러윈 기간 이태원거리에 수많은 인파가 별도의 주최자 없이 몰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고든 사건이든 돌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주고받았다. 예년과 비교한 상황 분석과 대응방향, 세부계획을 담아 종합대책을 만들었다. 참사4시간 전부터는 ‘압사‘를 암시한 112 신고가 빗발쳤다. 그러나 참사 이전에도, 직후에도 현장에 경찰은 부족했고 대응은 부실했다. - P18

그를 쫓는 것은 시간이다. 화물차 기사 스스로 예측하고 재단할 수 없는 ‘화물‘의 타임라인이다. 화주와 주선업체의사정, 도로 상황과 상·하차 대기시간, 물동량의 많고 적음과 물류 경기의 오르내림을, 화물차 바퀴를 굴려 맞춰야 한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김씨가 바꿀 수 있는건 차량 주행속도뿐이다. 때로는 잠자는시간, 먹는 시간, 쉬는 시간을 포기한다.
화물 차량의 과속, 기사들의 과로와 졸음운전이 바로 이런 구조에서 발생한다. - P31

‘이거 벌려고 이 고생을 하나‘ 싶어 일을 조금 쉬거나 줄일라치면 바로 생계가위태로워진다. "나가는 돈은 똑같은데,
들어오는 돈은 쉬는 만큼 탁탁 깎이기 때문"이다. 트럭 할부금이 한 달에 314만원씩 나간다. 할부가 두 달 밀리면 바로 신용불량자가 된다. 여기에 지입료, 보험료,
유류비, 수리비, 통행료 등 한 달 매출의70% 이상이 꼬박꼬박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물가가 오르면서 지출액은 함께 늘어나는데 화주가 책정하는 운임료는 제자리걸음이다. 주선업체가 가져가는 수수료는 정확히 얼마인지도 알 수 없다. - P33

이로써 이른바 ‘흥국생명 사태‘는 일단 진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길이험난하다. 개별 금융기업으로선 지극히합리적이고 합법적인 의사결정이 국가차원의 외화 조달 상황을 삽시간에 극도로 악화시킬 수 있을 만큼 국내외 금융환경이 취약하다는 점이 이번 사태로 입증되었다. 지금처럼 불안정한 금융시장에서는 ‘내가 실제로 지급력을 갖고 있다‘보다 ‘내가 지급력을 가진 것으로 남에게 보이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신뢰보다는 불신이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수단으로 선호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 P43

우선 이번 선거의 최대 이슈 가운데하나인 임신중지권(낙태권) 문제로 친공화당 주에서 여성유권자들의 이탈이 많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공화당의 대승 기류는 올해 6월 연방대법원이 지난 50년간 유지돼온 임신중지권인정 판결을 번복하면서 여성들, 특히 전통적으로 친공화당 성향이던 백인 여성유권자들의 이탈을 불러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 P54

중간선거 결과로 인해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각종 국정 과제가 차질을 빚게 생겼다. 바이든이취임 후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기후위기관련 입법에도 제동이 걸릴 게 확실하다.
특히 공화당은 인플레이션의 주원인으로 바이든 행정부의 방대한 재정지출을 지목한 만큼 대대적 삭감을 밀어붙일 전망이다. 이를 위해 공화당은 내년 초 한도에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연방정부의 부채한도 상한액 문제를 바이든 행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절호의 카드로 본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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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모테트가 보여주는 빛나는 자유, 자신의 창조주를 찬양하며 보여주는 우아한 기쁨, 그리고 죽음을 명상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그의 완벽한 확신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우리의 운명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응답이다.

이 바흐 성악곡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면 그가 루터교 종말신학의 본질을 표현하며 이룩한 특별한 성취를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영겁에 대한 아이디어다. 이 음악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호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음악이 만들어내는 확신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전통적인 종교나 정치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물론 멘델스존이 1829년 「마태 수난곡」을 리바이벌할 때처럼, 지금보다 이른 시기 바흐 음악에 대한 반응도 지금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것은 바흐 서재를 채우고 있던 17세기 루터 신학자들이 구상한 ‘영원한 미래’라는 중심 교리다.

지금까지 보아왔듯 바흐는 음악과 언어를 함께 사용하며 기념비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이는 음악이나 언어를 따로따로 다루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음악이 때때로 글이나 말로 표현된 언어를 능가하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한 음악의 힘은 의식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서 사람들의 편견과 유해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우리는 원죄와 구원, 악이나 회개에 대한 깨우침을 위해 여전히 그의 칸타타와 모테트에 의지할 수 있다. 이는 ‘존재의 수수께끼를 푸는 유일한 해결책을 기독교에서 찾고’ ‘모든 인류 안에 있는
화산 분화구를 열었던’* 도스토옙스키 같은 19세기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사실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세상의 모든 추잡함과 공포보다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금언에 더 집중하게 된다.

바흐는 여기서 가사, 혹은 그 이면의 의미들을 투명하게 표현하고자 많은 공을 들인다. 이러한 시도는 여러 유리한 시점에 그 자신이 고안한 고도로 개성적인 양식으로 청중에게 들려온다. 그는 동시대 오페라 레치타티보에서 들을 수 있는 기계적인 재잘거림을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중요하게 고조된 순간에 아리오소를 노래하고, 언어의 이미지를 피웠다 지울 수 있을 만큼 유연하게 음악적 표현을 전개한다.

글렌 굴드가 말했듯 ‘그 어떤 작곡가보다도 바흐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위법의 전제조건은 선율적 정체성을 선험적으로 구상하는 능력으로, 이 정체성은 일부 전적으로 새롭지만 완전히 조화로운 윤곽을 가지고 있어서,
순서를 뒤바꾸거나 도치시키거나, 역행하거나, 혹은 리듬적으로 변형이 되었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오리지널 주제와 함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바흐를 신학자로만 보고 이 대부분의 칸타타들을 신학적인 의미로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앞서 보았듯이 신학은 주로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반면, 바흐가 표현한 자연스러운
양식과 음악적 전개는 고유의 논리를 가진다.

아놀드 토인비는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죽음이 가하는 고통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뉜다. 그리고 고통을 분담하는 과정에서 생존자는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 바흐는 선량한 루터 신자답게 양쪽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즉 죽은 자는 축복의 잠에 빠지고 그 유족들은 끝없는 죽음의 결실 속에 영적인 평안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의 전략은 죽음에 대한 진실을 날것 그대로 알리는 렘브란트의 〈검은 웃음의 광풍 속에〉*보다도 공감이 간다.

음악과 언어의 관계는 늘 한결같지만은 않은데, 그 이유는 칸타타처럼 시인이나 작사가와 공동 작업을 하면서 절충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 모테트들은 코랄?(우리가 아는 한) 남의 간섭 없이 작곡가 본인이 직접 선택하고 수정한?과 결합한 압축된 경구 위주의 성경 문장에 의지한다. 덕분에 그는 화성을 만족스러울 만큼 통일성 있게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통일성은 다양한 텍스트와 다소 한쪽으로 치우친 형식을 사용한 교회 칸타타에서는 성취하기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이 지닌 비전의 범위 안에서, 바흐는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우주적 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고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하던 시점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사회 통합이 와해되고 종교라는 낡은 산물이 빠르게 붕괴되던 때였다.

침울한 참회의 장면 위로 막은 내려오자마자 다시 올라간다. 우리는 천상에서 천사들이 양치기들 앞에 내려오는 장면을 그린 새로운 예술 작품을 기대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작품이 헨델의 「메시아」다. ‘주께 영광’에서 한 무리의 천사들은 저 멀리에서 내려와 메시지를 전달한 뒤 하늘로 다시 날아간다. 그 모습은 순진무구하고 극적이며 고도로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바흐의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서 바흐의 천사 합창단은 대위법에 완전히 통달한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와 반대로,
세속 춤곡으로 이루어진 「글로리아」를 외치며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루터 달력은 단식일에 못지않게 많은 축제일을 가지고 있으며, 바흐는 절기와 기독교 달력에 포함된 이교도 축제를 위한 칸타타를 여러 차례 작곡한 바 있다. 하지만 그중에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 즉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기념일을 위한 곡도 있었는데, 세례요한축일(6월 24일-옮긴이)이 그날이다. 이날은 카니발 스타일로 기념하는데 ‘그 방종함은 완전히 이교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거의 전(前)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16)* 이 마지막 마디에서 바흐가 만들어내는 대위법적 묘미?그로 인해 우리에게 선사하는 기쁨?는 어마어마하다. 그 마법 중 일부는, 한 마디에 있는 12개의 16분음표를 나눈 교차 리듬 패턴과 당김음을 포함한 다양한 연주 방식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 바흐는 헨델처럼 상습적인 모방꾼은 아니었다.
헨델이야말로 자신의 상상력을 점화하기 위해서 다른 작곡가의 아이디어를 부싯돌로 사용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18세기 문학 및 음악 관습상 표절은 널리 허용되긴 했지만, 헨델과 달리 바흐는 다이아몬드를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의 거친 조약돌을 가져다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바흐의 방식은 늘 고전적이었다. 우선 모델이 될 만한 작품들을 공부하고, 그들을 베낀 뒤, 거기에 서문이나 주석을 추가해서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다양한 테크닉과 스타일에 정통한 어휘를 일거에 습득했다. 이는
모든 것을 최대한 포괄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과정이었다.

헤르더는 인간의 창조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이 개인의 삶의 비전을 표현하는 데 이른다는 중요한 생각을 깨달았다. 이는 공감적 통찰에 의해서만 이해가 가능한데, 타인의 염원과 관심에 ‘스스로 감정을 이입하는’ 능력이다. 그는 바흐 성악곡들이 지닌 가장 고결한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단순히 대상이나 예술품으로써가 아니라 한 개인의 비전으로서,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과 소통하는 귀중한 형식으로서 말이다. 바흐가 남긴 유산이 그 이전 그리고 이후의 작곡가들의 그것과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우월한 가문과 혈통을 타고났음에도, 바흐의 압도적인 인상은 자기 안으로만 몰입하고, 부모를 잃은 후 처음에는 학업에, 그 다음에는 음악에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지극히 사적인 개인이다. 그의 삶에 끊임없이 존재했던 죽음?부모, 형제, 그의 첫 번째 아내, 그 이후 여러 자식들?은 감정적인 은둔 내지 경계심으로 이어졌다. 이는 지극한 애정은 상실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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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1-22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후덜덜...... ^^;;;

겨울호랑이 2022-11-22 20:06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며, 바흐의 음악은 정말 깊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골드문트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
 

「마태 수난곡」은 특히 그러하다. 「요한 수난곡」에 대한 기억이나 기대를 가지고 이 작품에 접근하다가는 길을 잃거나 당황하기 십상이며 심지어 그 작품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기분까지 느껴진다. 듣는 입장에서 우선 관심을 끄는 점은 이야기의 진행이다. 사건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던 이야기에는 확장된 묵상 악장들이 끼어들며 훼방을 놓는다. 그렇게 이야기의 전달과 응답이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쌍둥이 시간대가 번갈아 등장한다

바흐의 스트럭처를 풀어내는 실마리 중 하나가 바로 그처럼 변화하는 속도감이 주는 효과다. 그 효과는 「요한 수난곡」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장중하고 신중하다. 이런 음악을 제대로 해석하는지 여부는 연주 중 극적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속도감에 부응하는 ?또는 되풀이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요한 수난곡」에서 즐길 수 있었던 생생한 장면 묘사와 거침없는 극적 추진력이 감소되는 대신 이 「마태 수난곡」에서는 정교하게 의인화된 다양한 ‘음성들’ 드라마 자체(바흐가 주로 대화를 통해서만 진행시키는)에 개입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아리아도 부르는 우화적인 요소들과, 생산적인 긴장 상태에서 연속적이면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 모든 시간
변화를 유지하는 방식을 즐길 수 있다. 이 같은 통일된 페이스는 「마태 수난곡」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다.

앞서 작곡한 수난곡에서 작품에 신빙성과 날카로운 통렬함을 선사했던 것은 요한이라는 특정한 목격자의 설명이었다. 여기에 불규칙하게 등장하던 아리아와 코랄은 이러한 긴장감을 더욱 돋우었다. 이러한 효과가 마태오의 버전에서는 더 많은 출연진과 ‘한 인간의 슬픔’으로 대변되는 예수의 인간적인 파토스가 추가되며 나타난다.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보는 원초적 소재를
가지고 만든 끝없는 투쟁과 도전, 배신과 용서, 사랑과 희생, 동정과 연민의 휴먼 드라마로서, 이보다 더 훌륭할 수는 없다. 바흐의 음악은 때때로 이야기의 뼈와 피에 거의 물리적으로 직접 관여하면서 마태오의 이야기와 상상 속의 관망자들의 충격적인 반응 양쪽 모두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전율하고, 냉담해지고, 눈물을 흘리고, 심장이 박동하고, 거의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 되는 것이다.’

강렬한 휴먼 드라마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처럼 설득력 있고 애틋한 방식으로 표현한 도덕적 딜레마라는 점에서, 바흐의 두 편의 수난곡에 필적하는 작품은 내가 연구하거나 지휘해본 당대 오페라 세리아 중에는 단 하나도 없다.

음악과 언어의 관계는 언어와 생각과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하다. 언어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전달 과정에서 감수성이 떨어질 수 있다. 반면 음악은 연주를 통해 생각과 감수성을 완전히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다. 이 같은 표현 방식을 일상적 교류에 사용하는 것은 그리 적절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음악으로 표현된 생각들은 언어로 표현된 그것보다 훨씬 분명하고 충만하게 전달된다.

시에 대해 음악은 물감을 한 겹 더 덧칠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즉,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들의 물리적 실재를 더 두껍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소리다. 음악은 메타포에 상응한다. 음악은 말의 흐름과 암송된 시의 흐름에 제동을 걸고, 서로 다르게 구성된 리듬과 템포 속에 시를 배치한다. 작곡가 자신이 읽어내려가는 언어에 청중이 함께 참여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바흐는 경계를 허무는 사람이었다. 용인되던 취향의 범위, 더 많은
형식적·표현적 어휘를 수용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고 신에게 기도하고 이웃을 교화시킬 수 있는 음악의 범위를 더 확장시키고자 했고, 이전에 자신이 무엇을 성취했든 늘 그 이상을 원했다.

언어 그 자체를 표현하는 언어를 흔히 ‘메타언어’라고 한다. 바흐의 음악 중 사실상 가사에 순응하는 소위 ‘타협’의 영역과, 가사에 직접적으로 상충하는 ‘충돌’의 영역 사이에는, 유사한 맥락에서 발터 베냐민이 언급한 ‘소리와 대본의 이분법’과 비슷한 중간 지대가 존재한다. 이 중간 지대에서는 가사를 동등한 입장에서 논하고, 확장하고, 사색할 수 있으며, 그에 동의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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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계몽에 관한 논문들 세미나리움 총서 23
칼 포퍼 지음, 송대현 외 옮김 / 영림카디널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파르메니데스가 현대 물리학과 수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적어도 세 가지 항구적인 성취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그는 논증과 관련하여 연역적 방법의 발명가였고, 간접적이기는 했지만 현재 가설 연역적 방법이라고 부르는 방법의 발명가였다. (2) 변하지 않는 것 혹은 불변하는 것은 자기-설명적이라고 간주된다는 것을, 그리고 설명하는 데에 이것이 출발점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강조한 것은 옳았다. (3) 파르메니데스 이론은 이른바 물질의 연속성 이론의, 그리고 이것과 함께 우주론적인 자연학 학파의 시초였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223


 칼 포퍼 (Karl Riamund Popper, 1902 ~ 1994)는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The World of Parmenides>를 통해 자신의 과학철학의 얼개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E 546 ~ 501)적이며, 스스로가 파르메니데스주의자임을 고백한다. 더 나아가 모든 과학철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주의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파르메니데스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포퍼는 파르메니데스의 시(詩)에서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발견하고 있다. 


 모든 것은 두 세계, 실재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보이는 파르메니데스적 대립에 의해서 완전히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1) 실재 세계는 물론 참다운 세계인 반면, 현상의 세계는 완전히 거짓이다. 이것은 무이며, 아무것도 아니고, 기껏 해봐야 그림자 연극일 뿐이기 때문이다. (2) 실재 세계에 속하는 그 어떤 것도 나타남의 세계에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설명은, 이 세계는 완전히 거짓이고 완전히 환상인 까닭에, 현상의 세계와 관련된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158


 파르메니데스의 두 길의 근저에 있는 하나의 이론은 전통적인 관점이다. 오직 신들만이 알고 있고, 우리 죽을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단지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의견의 오류가능성에 관한 이론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놀라운 것은 실재에 관한 신적인 지식이 합리적이고, 그러므로 진리에 충실한 반면, 현상에 관한 인간적 의견은 신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완전히 잘못되게 우리를 인도하는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184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실재의 세계와 허상의 세계로 나뉜다. 실재의 세계는 불멸과 신 그리고 참된 세계인 반면, 가상의 세계는 필멸과 인간 그리고 감각의 세계다. 유한한 인간은 절대진리의 세계를 결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기껏해야 최대한 그것에 가깝게 수렴할 뿐이지만, 결코 진리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은 필멸, 유한의 한계성으로 인간은 결코 이를 넘어설 수 없다. 포퍼는 이러한 파르메니데스-플라톤적인 구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구도 위에서 포퍼는 비로소 자신의 과학철학에 대한 접근 방법 '추측과 논박'에 대해 언급한다. 감각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은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기껏해야 추측을 통해 가설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현재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은 모두 가설이며, 언제라도 논파되어 폐기될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에서 포퍼는 열린 가능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새롭게 제기된 이론들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검증가능성'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진리를 알고 발견하려는 시도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개선을 위해 열려 있다는 것과 우리의 지식이나 학설이 추측이라는 것, 우리의 지식이나 학설이 결정적이고 확살한 진리보다는 오히려 추측이나 가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비판과 비판적인 논의가 진리에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을 그러한 전통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p61)...  관찰과 실험은 과학의 발전에서는 비판적인 논증의 역할만을 할 뿐이다. 그리고 관찰과 실험은 다른 것, 즉 비관찰적인 논증과 더불어 이러한 역할을 행한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62


 우리가 새로운 가설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가설은 그 이전 가설들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그것들이 해결했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2) 새로운 가설은 더 오래된 이론에서 따라 나오지 않는 예측들의 연역을 허용해야 한다. 오히려 옛날 이론과 모순된 예측들, 다시 말해서 결정적인 실험들을 허용해야 한다... 요점 (1)은 필연적인 요구 사항이며 보수적인 요구 사항이다. 그것은 퇴행을 막는다. 요점 (2)는 선택적이며 바람직하다. 그것은 혁신적이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369

 

 <파르메니데스의 세계>에서는 감각적인 현실세계의 한계를 인정하고, 감각의 세계에서는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한 '추측과 논박', 그리고 이를 위한 '검증가능성'이라는 포퍼의 과학철학의 큰 바탕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바로 '반(反) 파르메니데스'적인 사상가들이 있는데, 이데아 세계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합리주의자 포퍼는 이 책에서 대표적으로 3명의 사상가를 비판하고 있다. 바로,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E 544 ~ 4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 ~ 322) 그리고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 ~ 1996)가 그들이다.


 요약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하는 동안 사물들의 자기-동일성이라는 역설을 사물들에 대한 이론에 의해 해결한다. 그 이론은 사물들을 종종 가시적인 과정들의 현상들을 오해하거나 오역한 것으로 설명한다. 과정들 특히 세계 과정들은 자기-동일적인 변화들인데, 그 변화들은 따라서 동시에 반대되면서 동일한 대립자들을 포함하고 있다(p363)...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대립자들을 헤라클레이토스보다 더 정확히 그리고 의식적으로 다루고 있다. 더구나 그는 즉각 이런 대립자들은 적어도 동일하지 않다는 자신의 고유한 근거로 헤라클레이토스를 논박하고 있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365


 포퍼에 의하면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 - 자기 안의 대립자와 동일성 - 은 파르메니데스의 이론보다 더 세계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논박당하는 이론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쿤에 대한 비판점은 조금 결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인(귀납적인) 방법을 통해 검증가능성이라는 기본을 해친 파르메니데스적 전통을 끊으려 한 서양과학사의 암(癌)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고, 토머스 쿤에 대한 비판은 이의 연장선상에 있다. 검증가능성에 의한 새로운 가설의 대두가 정상과학에서의 연속적인 발전을 의미한다면, 쿤은 이러한 연속성 대신 불연속성을 강조하며 검증가능성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포퍼의 눈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로 비췄으리라.


 플라톤은 분명히 그가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진리가 아닌 기껏해야 '진리 비슷한 것(truthlike)'뿐이라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기껏해야 진리와 비슷한 것이다. 이 말은 통상 '개연적인'으로 번역된다... 플라톤이 사용한 말은 실제로 '닮음'이다. 그리고 그는 때때로 '진리와 닮음'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오면 그 관계가 결정적으로 단절된다. 그는 그가 안다고 믿었는데, 그 자신이 인식, 즉 증명가능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플라톤에게 과학적 가설이었던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지식, 증명 가능한 지식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래로 지금까지 여전히 서양의 대다수 인식론자들에게 남아있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25


  (파르메니데스의 우주론안의) 포괄적인 탐구 계획의 기능은 어떤 면에선 토머스 쿤(Thomas Kuhn)이 부당하게 '패러다임들'이라 말했던 지배적인 과학 이론들에 귀속시켰던 기능과 매우 유사하다. 하나의 연구 프로그램은 그것이 지배적인 것이 되면 과학적 연구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연구 프로그램들은 쿤의 지배적인 이론들이 행해지는 방식으로 과학의 부분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성격상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이며 방법론적이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285


 이처럼 칼 포퍼의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주된 주제로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의 적통임을 주장하는 포퍼 자신의 과학관과 현대 과학이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사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요구하는 책이다. 처음에 접하기에는 다로 어려운 감이 있지만, 논문 안의 주제가 동일 주제를 반복하여 다루기에 끝까지 읽다보면 개념들이 친숙해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포퍼의 다른 책 <추측과 논박>,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나아간다면 큰 무리없이 포퍼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나 우리의 추측을 그 결론들을 조사함으로써 검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검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가정을 결코 확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가정은 직관적으로 우리 마음에 들거나 안 들거나 할 것이다. 직관은 중요하기는 하나 (이 방법 안에서는) 결코 결정적이지 않다. 내 의견으로는 추측이나 가정의 벙법과는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두 번째 방법이 본질의 직관적 파악 방법이다. 여기서 '직관'(이성 : nous, 지적인 직관)은 틀릴 수 없는 통찰을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진리를 보장한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거나 파악하는 것은 본질 자체이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405


 다만, 포퍼의 과학철학을 접하면서 양자역학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 등은 현대 주류 과학이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보다 탄탄한 물리이론을 학습한 후 자신의 입장을 정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하면 좋겠지만, 일반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또한 감각세계의 유한성에 다름아닐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이론의 확률적 성격을 우리의 무지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먼저 인과성의 몰락에 대한 원인적 설명을 했는데,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며 관찰자들인 웅리가 물리적 대상들을 측정하는 동안에 우리가 물리적 대상들에 개입한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에 의해서 그 대상들의 실제 상태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가 그것들을 교란시키고 있다. 이것은 만약 어떤 간섭하는 물리학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세계는 당연히 파르메니데스적인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파동다발의 감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적인 길의 붕괴에 따라서 인과성의 몰락에 실제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바로 우리와 우리의 무지,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잘못된 의견들임을 함축하고 있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345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를 제외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사상가들은 모두 지식, 실제적 지식, 확실한 진리(saphes, aletheia, episteme)와 의견(doxa)를 날카롭게 구분했다. 확실한 진리는 신적인 것이며 신들에게도 잘 알 수 있는 것이고, 의견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크세노파스가 개선될 수 있는 추측으로 해석한 것이다. - P23

변화에 대한 일반적인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이다. 과연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와 제논(Zeno)에 의해 거의 논리적인 문제로 바뀐다.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사물은 그것의 동일성을 상실하지 않고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동일한 것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그것의 동일성을 상실한다면, 변한 것은 더 이상 그 사물이 아니다. - P44

진리는 객관적이다. 내가 말한 것의 진리나 거짓됨은 사실들에만 의존한다. 게다가 이 시행들은 객관적 질리와 주관적인 확실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어떤 실마리를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크세노파네스는 내가 가장 완전한 진리를 말했다 하더라도, 내가 확실하게 이것을 알 수는 없으며 나는 단지 그것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다‘는 말의 가설적 의미에서 진리를 알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진리에 도달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오류 불가능한 진리의 기준은 없다. - P105

인간은 언어의 도움으로 행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사태를 기술하는 것이다. 인간 언어는 현실적이거나 가능적인 상황과, 그리고 현실적이거나 가능적인 사실을 기술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단순한 사실에 관한 가장 단순한 언어적 기술조차도 이를 단순히 이해한다는 것은 가장 고차원적인 질서의 성취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상력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상상력은 자극을 받는다. 이것이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 만들기로 이끈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비판적인 검토가 과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와 다른 경우 이것은 전형적으로 상상력이 풍부하고 설명력이 있는 이야기나 신화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 P199

간단히 말해 현상의 세계를 기만으로 설명하거나 문자 그대로 그 세계를 기만으로 해명함으로써, 현상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를 화해시키려는 시도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단언하건데, 이것은 증거가 박약하다는 징후이다. 어떤 변론이 요청됨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기만의 세계에는 보이는 것 이상이 있음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 P265

나의 생각에는 과학철학자가 말해야 할 것은 그러한 어떤 변명도 파르메니데스적인 프로그램으로부터의 일탈을 위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데모크리토스학파의 이론의 몰락과 함께 파르메니데스적인 프로그램이 합리적인 과학에 했던 막대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 프로그램은 너무 협소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나는 이것이 현대 물리학의 최근의 발전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합리주의의 틀을 넓히기 위해 애써야 한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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