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지음, 천경록 옮김 / 책갈피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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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기술은 사람들의 협동 형태를 바꾸었다. 예컨대, 쟁기를 사용하면서 성별 분업이 강화됐다. 쟁기를 사용하는 노동은 임신했거나 아이를 기르는 여성에게는 벅찬 중노동이었기 때문이다. 상설적인 관개 시설을 건축하고 보수하려면 수십 가구나 수백 가구의 협동이 필요했다. 이것은 직접 노동하는 사람과 노동을 감독하는 사람의 분업을 부추겼다. 먹을 것을 저장하게 되면서 저장한 음식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잉여가 생겨나자 처음으로 일부 사람들이 농사에서 해방돼 수공업, 전쟁 준비, 아니면 한 지역의 생산물을 다른 지역의 생산물과 교환하는 일 등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p48)... 잉여를 창출한 생산방식의 도입과 계급 분화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매우 비옥한 토양이 있는 지역들에서 출현한 최초의 농경 사회는 계급 분화를 수반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경 사회가 확대되면서 이들을 훨씬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하게 됐고, 그런 상황에서 생존하려면 사회 관계를 재편해야 했다. _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p56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의 <민중의 세계사 A People's Story of the World>는 지배계층 중심의 정치, 경제사라는 기존의 관점 대신 인류의 다수를 차지하지만 주인공은 되지 못했던 이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다소 생소한 관점에 선 저자는 책에서 신석기 혁명과 도시 혁명의 산물인 문명(文明)의 어두운 측면에 집중한다. 이 어두운 측면으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된다. 


 계급 분화, 상근 관료와 무장 집단에 기반을 둔 영구적 국가 기구의 확립, 여성의 종속 등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요소들 대부분은 여전히 출현하지 않았다. 그런 요소들은 고든 차일드가 '도시혁명'이라고 부른 변화, 즉 사람들의 생계방식에 일어난 두 번째 중대한 변화가 '신석기 혁명'에 바탕을 두고 일어난 다음에 출현했다. _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p45


 저자는 수렵 - 채집 문화에서 농경 문화로의 이행이 반드시 좋은 선택만은 아니었음을 말한다. 농경 사회로 인해 사회는 안정화될 수 있었지만, 잉여 산출물로 인해 빚어지는 부작용은 다른 종류의 불안을 가져왔고, 이는 강력한 권력 기관이 출현의 배경이 된다. 강력한 권력 기관은 소수의 지배계급과 다수의 피지배계급의 분화를 가져왔으며, 민중은 피지배계급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민중의 세계사>에서 고대와 중세에 걸쳐 민중들의 경제 기여에 비해 자신의 권익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빵과 서커스 제공에 만족해야 했던 고대 로마 시대는 그렇다 하더라도, 중세 후반에 나타난 농민들의 적극적인 반항이 사회 변혁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못한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


 제국은 안정을 찾았을지 모르지만 사회의 밑바탕에 있는 주요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지배 계급과 지배 계급의 문명은 도시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지만 경제는 압도적으로 농촌에 기반을 두었다. "경제에서 무역과 제조업은 매우 한정된 구실만 했다... 기본 산업은 농업이었고, 제국 주민의 압도 다수는 농민이었으며, 상층 계급의 부는 주로 지대에서 나왔다." 농업 생산에서 나온 수익은 무역과 공업의 20배에 달했다. _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p125


 (유럽 봉건 사회에서) 농민 봉기는 사회를 뒤흔들었지만 농민은 문맹인데다가 시골 곳곳에 흩어져서 각자의 촌락과 토지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현실적인 사회 재편 강령을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아직 경제가 충분하게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에서든 농촌에서든 혼란스럽게나마 그런 강령을 제시할 수 있는 계급은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 언젠가는 그런 계급으로 성장할 수 있는 씨앗은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망한 씨앗이었지만 사회 전체를 파괴하고 있던 위기를 끝낼 수 있는 계급은 아직 아니었다. _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p213


 그것은 변혁의 주체가 될 중핵(中核)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싸우는 방법을 이해하고 동료들에게 그 방법을 납득시킬 수 있는 충분한 '중핵 계층이 싹트기까지는 아직 수백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18세기 유럽에서 근대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부르주아 bourgeois'로 대표되는 계층의 역할이 컸던 반면, 그렇지 못한 경우 혁명이 실패했음도 우리는 찾을 수 있다. 


 20세기는 단지 공포의 세기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살펴봤듯이, 그것은 공포의 주범들에 맞서 노동 계급이 이끈 거대한 반란들이 아래로부터 분출해 나온 세기이기도 했다.(p775)... 거대한 사회 갈등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미리 알 수는 없다. 그 결말은 단지 한 계급의 객관적 발전 수준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거대해진 '보편적' 노동 계급 중에서 싸우는 방법을 이해하고 동료들에게도 그 방법을 납득시킬 수 있는 중핵이 얼마만큼 존재하느냐에도 달려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역사가 보여 주듯, 그런 반체제 세력들은 오직 체제의 모든 측면에 맞서 싸울 태세가 돼 있는 혁명적 조직이라는 결정체로 응고되어야만 진정으로 효과적일 수 있다. _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p784


  이러한 저자의 '중핵'의 역할에 대한 근거를 우리는 18세기 인도의 마라타족 반란과  19세기 중국의 태평천국운동을 통해 찾을 수 있다. 동양에서의 실패는 사회 불평등에 대한 반발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은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었고 동양의 두 제국은 유럽 제국주의의 제물로 전락하면서, 저자 주장의 논거가 된다.


 (마라타족의 반란)에서 농민들의 반감은 곧 반란군의 전투력이었다. 그러나 반란의 지도부는 보통 자민다르나 지방의 다른 착취 계급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잉여의 더 큰 부분을 무굴 제국의 지배 계급이 가져가는 것이 불만이었다... 상인과 장인은 반란에서 핵심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무굴 제국 지배자들의 사치품 시장에 의존했고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도시 계급들이 농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해 준 지역 시장들의 연결망이 없었다. 낡은 사회는 위기에 빠졌지만, '부르주아지'는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투쟁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결국 사회는 진보할 수 없었다. _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p303


 태평천국 운동의 지도부가 이상을 포기하는 과정은 과거에 중국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들의 패턴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었다. 광대한 지역에 흩어진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무지한 농민들은 운동의 지도부와 그 군대를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응집력이 강한 세력이 아니었다. 또한 태평천국 운동의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을 위한 풍요"라는 이상을 구현하기에는 물질적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이에 대한 손쉬운 대응은 전통적 지배 방식과 그에 수반되는 전통적 특권 사회로 되돌아가는 것뿐이었다. _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p465


 그렇다고 해도, 근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의 변화가 민중들을 역사의 주체로 바로 끌어올린 것은 아니었다. 유럽과 북미에서 민중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대표자들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억압받는 계층으로 존재하게 된다.  <민중의 세계사>에서 민중은 고대의 억압받는 노예에서, 중세의 억압받는 농민, 근대의 억압받는 노동자로.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에서는 3S로 억압받는 소비자의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저자는 비관하지 않는다.


 도시의 종교개혁은 독일 남부와 스위스의 도시들을 휩쓸었다. 이들은 여러 세대 동안 지방 의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심지어 일부 형식적인 민주적 구조가 갖추어진 곳에서도 그랬다. 많은 과두 지배자는 나름대로  교회에 불만이 있었고 지방 제후들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의 사회, 종교 질서와 수없이 많은 연계를 맺고 있기도 했다... 대체로 그들은 커다란 격변을 겪지 않고서도 자신들이 도시의 종교 생활을 더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고 교회 기금을 더 많이 사용할 수 있게 해 줄 점진적 변화를 추구했다. _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p251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부르주아 점령군이었기 때문에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이 하나 있었다. 토지를 몰수한 뒤 해방된 노예들에게 재분배함으로써 그들이 옛 주인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대다수 흑인들은 과거의 노예 수유주들 밑에서 소작농이 되거나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과거에는 억압받는 노예 계급이었다가 이제는 억압받는 농민, 노동자 계급이 된 것이다. _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p455


 저자 크리스 하먼은 책의 결론부에서 과거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롭게 거듭나려는 움직임을 강조한다. 저자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민중들의 각성과 움직임을 강조하면서 다행스럽게도 역사 속에서 중핵들이 끊임없이 확장되어 왔음을 밝힌다. 이러한 움직임이 역사 속에서 1215년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 의해 영국에서 왕권에 귀족들에게 넘어가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귀족 계급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의식은 확장되었고, 그 기반은 넓혀져 왔음을 <민중의 세계사>는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계속될 때 과거 신석기 혁명과 도시 혁명 이전의 평등 사회로 우리는 회귀(回歸)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사회 계급들은 결코 서로 완전히 분리돼 있지 않다. 상층 계급의 정서는 중간 계급의 정서에 영향을 주며, 중간 계급의 정서는 하층 계급의 정서에 영향을 준다.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유럽 지배 계급들의 의지는 수많은 방식으로 중간 계급과 노동 계급의 일부에게 전염됐다. _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p521


 21세기에 인류가 멸망하지 않으려면 어마어마한 규모로 확대된 오늘날의 노동 계급에게도 그런 결정체가 끊임없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필요는 오직 사람들이 그 과업에 몸소 뛰어들어야만 충족될 수 있다...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_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p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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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09-10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중의 세계사를 보다 간소화 한 책을 찾는다면 아마 ‘좌파세계사‘겠죠.

겨울호랑이 2020-09-10 19:42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역시 NamGiKim님 이시네요.

NamGiKim 2020-09-10 19:49   좋아요 1 | URL
그책도 분량은 많은 편이지만 중간중간 사진과 그림이 많이 있어 읽기 수월했죠.^^

겨울호랑이 2020-09-10 20:05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대중적으로 민중의 역사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좋은 「The Left」, 「미국 민중사」 , 「민중의 세계사」입문서로 생각됩니다^^:)
 

 나는 경제학부터 도시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의 글을 써왔다. 나의 글은 복합적응체계(Complex Adaptive System) 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는 세상을 다양한 사건들이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흘러가는 곳으로 보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어떤 사건의 원인과 개별 행위자 사이의 관계가 예측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복합적응체계의 예로는 생태계, 금융시장, 경제, 영어권, 도시, 기상 시스템, 관습법 체계, 그리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힌두교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_ 산지브 산얄,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 p32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는 인도를 중심으로 인근 동남아시아사, 아라비아 해 인근, , 오세아니아 대륙과 북동아프리카 해안을 중심의 세계사를 서술한다. 저자 산지브 산얄 (Sanjeev Sanyal)은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에서 인도양(印度洋, Indian Ocean) 문화권을 연속성 관점에서 구분하고, 주요한 기준은 힌두교의 영향과 모계사회 여부다. 이런 관점에서 인도양을 바라보기에, 자연스럽게 책의 중심은 인도와 동남아시아 사회가 주가 된다.  


 인도양 연안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몇 가지 연속성이 발견된다. 끊임없이 사람들의 이주부터 수백 년동안 구전된 전설에 이르기까지, 연속성의 사례는 다양하다... 연속성의 두 번째 주제는 모계사회다. 즉 인도양의 역사에서 모계 관습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먼저 "모계(matrilineal)"는 개념적으로 "모권(matriarchal, 가모장제)'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모권사회는 관습적으로 여성이 통치자/지도자의 지위에 오르는 사회를 말한다. 이와는 달리 모계사회란, 계보가 어머니를 거쳐 여성 조상들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p35)... 인도 서해안을 제외하면 모든 모계사회가 동남아시아에 몰려 있다는 사실에 일단 주목해보자... 왜 어떤 사회는 모계 시스템을 선택하고 다른 사회는 그렇지 않은지를 비교해보면 자못 흥미롭다. 인도 남서부 해안 지역의 사례를 보면, 이러한 관습은 아마도 원거리 해상 무역의 결과로 진화했던 것 같다._ 산지브 산얄,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 p32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에서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상호관계를 말하지만, 저자 자신이 인도인이어서 갖는 인도 중심주의라는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다. 책에서는 인도양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책 내용은 '인도를 갖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에 가깝다는 점에서 대국(大國)중심의 교양 역사서라 하겠다. 다만, 인도와 동남아시아사에 대한 역사책 자체가 드문 현실을 생각한다면 크게 흠이 될 정도는 아니라 여겨진다.   


 개인적으로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은 '모계사회'라는 기준을 갖는 저자의 문화권 분류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탐라국(耽羅國)으로 알려져 한반도 여러 나라와 교류를 한 것으로 알려진 제주도. 내륙 지방과는 언어, 문화 면에서 차이가 있는 제주도 지역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주체는 여자라는 점에서 모계 중심의 동남아 국가들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삼국유사 三國遺事>  속의 김 수로왕(首露王, 42 ~ 199)의 이야기 속의 부인 허황옥(許黃玉, 32 ~ 189) 이야기를 통해 동남아시아 문화권과의 연계성을 찾으려 한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갑자기 완하국(玩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했는데, 달이 차자 알을 낳았다.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었으니, 이름은 탈해(脫解)였다. 그가 바닷길을 따라 (가야에) 왔는데, 키가 석자에다 머리 둘레가 한 자나 되었다. 그가 흔연히 대궐로 가서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그렇다면, 술법으로써 겨뤄보는 것이 좋겠소." 왕이 "좋다"고 했다... 탈해가 마침내 엎드려 항복했다.(p209)... 건무 24년 무신(48) 7월 27일 , 왕이 왕후와 더불어 침전에 들자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蹂陁國)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인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올해 5월에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를 좇으며, 진수로써 외람되게도 왕을 모시고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_ 일연, <삼국유사>, p212 


 <삼국유사> 속에서는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후 이야기와 함께 석탈해(昔脫解, BC 19 ~ AD 80)이야기도 나온다. 석탈해가 가야(伽倻)를 빼앗으려 했으나, 수로왕과의 술법 대결에서 패배한 후 떠나갔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 속의 다른 전승과도 연결된다. 비록 두 이야기가 내용 상 충돌하는 면이 있으나, 그가 왜(倭)의 동북쪽 천리되는 곳(캄차캬 반도 ?)에서 왔다는 이야기 속에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이 가야에서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를 고대 '초원의 길' 세력과 '바다의 길' 세력 간의 충돌로 보면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인도양의 역사 속에서 아직도 수수께끼인 고대사를 상상해 보는 것도 역사를 공부하는 재미가 아닐까 한다.


 탈해잇금(脫解齒叱今)은 남해왕 때 가락국 바다 가운데 배를 타고 와서 닿았다. 그나라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함께 북 치고 시끌벅적하게 맞이해 머물게 하려 했지만 배가 나는 듯이 달려서 계름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배를 끌어내어 찾아가보았더니 어떤 배 위에 까치들이 모여 있었다. 배 안에 하나 궤가 있었는데 길이가 20자에다 너비는 13자쯤 되었다. 하늘을 향해 아뢴 뒤에 조금 있다 열어보니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었고, 일곱 가지의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레 동안 대접하자 그가 말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 _ 일연, <삼국유사>, p93


 과거에 대한 상상은 이 정도로 하고,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동남아시아 역사를 마저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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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10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도 점점 모계사회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자 자매들 중심으로 많이 모여요.
사어머니보단 장모님을 모시고 여행 가는 가족도 많고요. 우리 시댁도 그렇답니다.

겨울호랑이 2020-09-10 13:55   좋아요 1 | URL
친가보다 외가 친척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저도 그렇습니다. 이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자주 가다보니 더 깊은 유대감이 형성된 결과로 여겨집니다. 그런 면에서 페크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 생각됩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렇게 형성된 친밀감이 육아를 여성이 전담하는 사회분업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부계사회의 결과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마르크스와 예니가 우려했듯 빈곤을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1850년 11월 19일, 소호에 있는 비위생적이고 얼어붙은 누추한 집에서 둘째 아들 헨리 가이가 한 살도 채 안 된 나이에 폐렴으로 죽고 말았다. 이 부부가 처음으로 잃은 자식이다. 이후 그 거리에서 마르크스는 다른 아이들도 잃게 된다._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260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에 대한 여러 평전이 있지만, 그의 삶을 바라봄에 있어 공통적인 것은 평생 마르크스 부부를 따라다닌 지독한 가난과 자식들의 죽음이 아닐까 여겨진다. 독일, 프랑스, 영국을 떠돌며 지냈던 이들에게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 ~ 1895)란 친구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을까.


 마르크스가 걱정한 대로 물질적 형편은 얼마 안 가 힘들어졌다. 10월, 마르크스가 집세는 물론이고 아이들이 먹을 식량을 구할 돈도 곧 해산하게 될 아내의 병원비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상태였을 때 엥겔스가 나타났다. _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239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 궁핍을 자네에게 쏟아붓는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날마다 아내는 자식들과 함께 무덤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비롯되는 말할 수 없는 굴욕감 때문에 뭐라고 책망할 수도 없네." _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371


 평전에서 매해 출간되었던 그의 저술 다음 문단에는 거의 반복적으로 자녀들의 죽음 또는 손자/손녀들의 죽음과 그와 부인의 건강문제가 언급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부인이 돈을 얻기 위해 독일로 갔다는 이야기도 함께. 스스로 말하듯 '돈에 대해 책을 쓰지만, 돈을 벌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그를 괴롭힌 외적 불행을 안다면, 그가 <자본론>에서 소년/소녀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비참한 삶에 대해 많은 페이지를 할당했는지,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를 음울한 유령에 비유했는지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1863년 여름 내내 마르크스는 최악의 상태였다. 정다발증이 세균 감염으로 악회되어 죽을 뻔했고, 한 달 이상이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옹, 두통, 폐질환, 간질환 등이 점점 더 빈번하게 출현했다. 그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p382)... 1881년 11월, 예니의 병이 악화되었다. 간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마르크스 역시 너무 아파(늑막염이 겹친 복막염) 침대에 누워 지냈고, 아내 방으로 가기 위해 하루에 딱 한 번만 나왔다. 라파르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니가 심하게 앓고 있었으므로 그는 학문 작업을 정상적으로 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는 아내의 고통 때문에 끔찍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수학에 몰두하는 방법으로만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나는 파리에서 온 세 자식들과 두 사위, 그리고 마르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12월 2일 죽음을 맞는다. _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583

 

 영화 <친구>에서는 준석(유오성)이 상택(서태화)에게 자신이 일탈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이 처음 가출했을 때 주변에서 아무도 뭐라 말하지 않았다고. 만약, 그때 누군가 자신에게 뭐라 해서 잡아주었다면 지금처럼 비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크스와 독일 귀족 출신이었던 부인 예나가 자신들의 삶이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사회 평등에 관한 확고한 그들의 신념을 접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궁핍한 노동자들의 삶이 보다 살만한 것이었다면, 20 세기를 흔들었던 열렬한 지지를 얻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대 사상가의 삶 대신 조금은 평범한 월급쟁이의 삶이 마르크스에게 주어졌다면, 그가 자신의 펜을 누그러뜨려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컬럼리스트의 삶에 만족하며 살았을지도 모를일이다.


 마르크스는 다시 강도 높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집필작업이 드디어 끝을 맺었다. 이제 돈을 벌 수 있고, 일요일이면 아이들에게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에드가에게 쏟은 열정을 이제 세 살 된 엘레아노르에게 옮겼다. _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338


 마르크스의 가난과 질병, 극심한 불행 속에서 태어난 공산주의의 성전 <자본론>. 많은 이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악(惡)으로 바라보며 그의 사상에 반대하여 반공(反共)을 외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반공은 이데올로기 다툼이 아니라, 더는 마르크스와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마르크스의 삶을 알고난 후 <자본론>을 읽는다면, 이 책이 혁명서가 아니라 살고자 하는 처절한 외침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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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1935 ~ )는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A Companion to Marx's Capital >를 통해 맑스(Karl Marx, 1818 ~ 1883)의 <자본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conomie>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읽으며 <자본>의 세부 논의에 길을 잃던 독자들이 포기오하지 않도록 친절하게 손을 빌려주는 저자의 배려를 느낄 수 있다. 저자는 매 단원별로 다음과 같이 <자본>의 내용 요약을 반복하여 제시하기에, 강의가 끝날 때 즈음에는 마치 후크송(Hook Song)처럼 <자본>의 용어가 익숙해지게 만들어 준다.


 맑스는 상품이라는 단일 개념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두가지 성격을 지닌다. 교환가치의 배후에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으로 규정된 가치라는 단일 개념이 놓여 있다. 가치는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이중성을 품고 있는데, 이들 두 노동은 교환행위를 통해 합쳐지고 가치는 이 교환행위를 거치면서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의 이중성을 통해 표현된다. 여기에서 일반적 가치형태인 화폐상품이 등장하는데, 그러나 이 화폐상품은 가치가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의미를 은폐하고 상품의 물신성을 만들어낸다. 완벽하게 기능하는 시장에서 화폐가 서로 다른 두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것은 곧 가치척도와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이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의 화폐이고 이들 두 기능 사이의 등장은 얼핏 새로운 화폐관계에 의해 해소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W - G - W의 유통형태는 G - W - G' 이고 G'는 '처음 투하된 화폐액 + 일정 증가분'이 되면서 완벽한 시장에서의 등가교환과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요구되는 부등가물 간의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_ 데이비드 하비,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p207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가 다른 <자본> 해설서가 가지지 못한 장점은 큰 틀에서 <자본>을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맑스가 <자본>을 통해 고민한 대전제가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그래서, <자본>의 지향점을 처음부터 제시하여 독자들이 방향을 놓치지 않도록 나침반을 놓고 시작한다. 여기에 더해 무엇인지, 이전 경제학자들과 맑스의 사상과의 차이점과 영향관계등을 제시하면서 충분한 배경설명을 하기에 독자들은 <자본>이라는 숲에 들어가기 전 지도를 통해 전체 얼개를 잡을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은 <E.K. 헌트의 경제 사상사>와 마찬가지지만, 초보자 입장에서는 조금은 덜 비판적이고 따뜻하며, 상세한 설명이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에서 느껴진다.


 리카도는 가치의 개념을 노동시간이라고 주장했다. 맑스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우리는 곧바로 이런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맑스가 이에 직접 답하지는 않지만 이 물음은 <자본>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다. ... 이 물음은 근본적으로 '가치'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_ 데이비드 하비,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p49 


 맑스는 이제 우리가 화폐형태가 품고 있는 모순을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모순의 끊임없는 확대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변증법은 완결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그는 그것이 정확하게 어떻게 확대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_ 데이비드 하비,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p122


 이러한 저자의 전체 설명이 이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이에 대해서 살펴보자. 저자가 해설서에서 밝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본>에서 맑스는 변증법을 통해 만물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그 가운데 서로가 변해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인간, 자연, 노동에 있어서 모두 공통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도 마찬가지다. 화폐가 가지고 있는 가치척도와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이 하나의 화폐 안에 담겨있다는 맑스의 분석은 이에 대한 증거가 된다. 


 노동과정은 전적으로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물질대사"의 하나의 변증법적 계기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한 과정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_ 데이비드 하비,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p210


 그렇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두 주체인 화폐소유자와 노동자의 관계는 이와 다르다.  노동자는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노동력)을 가지고 있으나 혼자 힘으로 노동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다. 반면, 화폐소유자는 생산할 수 있으나 노동자를 소유할 수 없다. 단지 일정 기간 동안 노동력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화폐소유자는 더 오랜 기간(量)또는 더 높은 정도(質)로 노동력을 소유하고자 하며 이로 인해 잉여가치 문제가 발생됨을 맑스는 말한다.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문제, 더 많은 잉여가치 획득을 위한 불변자본의 투입 등의 논의가 이어지지만, 우리는 이미 자연법칙과 사회법칙에 맞지 않는 자본 내부의 모순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추가 논의는 계속되지만, 하비가 이미 보여준 전체 조망을 통해서 우리는 맑스의 결론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에서 하나로 수렴하지 못하는 두 인격(人格)이 공존해야 하는 모순되는 상황. 이러한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은 외부의 어떤 노력으로도 해소될 수 없기에 물 끓는 주전자처럼 넘치고 만다는 것이 <자본>의 이후 논증이 될 것이다...


 어떤 상품의 소비에서 가치를 뽑아내려면 우리의 화폐소유자는 운좋게도 유통영역의 내부에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 하나의 상품을 발견해야 한다. 즉 자신의 사용가치가 곧 가치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현실적 소비가 곧 노동의 대상화이자 가치창출이 되는 그런 상품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실제로 바로 그런 특수한 상품을 발견한다. 노동능력이 바로 그것이다.(M181) _ 데이비드 하비,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p186


 화폐소유자가 노동력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발견하기 위한 제2의 본질적인 조건은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기 노동을 대상화시킨 상품을 판매할 수 없고 그 대신 자신의 살아있는 육체 안에서만 존재하는 자신의 노동력 그 자체를 상품으로 팔기 위해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M183) _ 데이비드 하비,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p187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이 유일한 <자본> 해설서는 아니다. 다만, 여러 좋은 해설서 중에서 다른 장점을 가진 해설서임은 분명하다. <자본>이라는 큰 숲 안에 있는 여러 나무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한다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이 좋은 설명이 제공하는 입문서가 될 것이다. 반면, 지리학자인  하비의 책은 <자본>이라는 숲의 전체적인 크기와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 어느 경우에도, 저자 맑스의 책을 직접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좋은 것임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만약,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와 함께 읽을 때는 역자의 <자본 1- 1> < 자본 1 - 2>를 읽는 편이 호완성 측면에서 더 좋게 느껴지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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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했던 영웅이, 바다를 떠돌며 모험을 겪은 후 20년 만에 집에 돌아와, 자기 아내에게 구혼하면서 자기 집 재산을 먹어치우고 있는 횡포한 무리들을 처단하는 걸 주된 내용으로 한다. 이것이 <오뒷세이아>의 중심 주제 두 가지이다. 하지만 작품을 펼치면 독자들은, 대개는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인물과 마주치게 된다. 바로 오뒷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다....  <오뒷세우스> 첫 부분의 핵심은 텔레마코스라는 젊은이의 성장이다. 그는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아버지의 모험을 축소해서 겪고, 그것을 통해 어른이 된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오뒷세이아>의 세 주제이다.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43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 분노 사건을 그리면서 트로이아 전쟁 전체를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중심적인 주제는 '분노'이고, 부차적인 주제는 '전쟁'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분노' 주제는 '전쟁'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일단 '전쟁' 주제가 두드러지고, 뒤로 갈수록 '분노' 주제가 강해질 수밖에 없다._ 강대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읽기>, p45

 

 <오뒷세이아>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모험을 떠나 작은 시련을 겪고 어른으로 성장한 한 소년. 치열한 삶의 전장에서 돌아와 안식을 위한 귀환을 하는 노년. 이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일리아스>에서 그려진 청년 아킬레우스의 혈기 왕성함과 자신의 책임과 가정, 나라를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는 중년 헥토르의 모습을 맞춘다면,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풀었던 수수께끼의 답(答)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연어와도 같은 우리의 삶. 추상적인 인생(人生)이라는 주제는 <일리아스>에서 신(神)에 의해 무구(武具)에 새겨지면서 구체화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일상으로 실현된 운명을 볼 수 있다.

 

 라이오스가 통치할 때 큰 재앙이 테바이를 엄습했다. 헤라가 스핑크스(Sphinx)를 보냈기 때문이다. 스핑크스의 어머니는 에키드나이고 아버지는 튀폰이었는데 그녀는 여자 얼굴과 사자의 가슴과 발과 꼬리, 새의 날개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무사 여신들한테 수수께끼를 배운 뒤 피키온(phikion) 산에 앉아 테바이인들에게 그 수수께끼를 냈다. 그 수수께끼란, 목소리는 하나뿐이지만 처음에는 발이 네 개인데 그 다음에는 두 개가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세 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오이디푸스는 그것을 듣고 수수께끼를 풀었으니 그의 말인즉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린아이 때는 사지로 기니까 발이 네 개고 어른이 되면 두 발로 다니고 늘그막에는 그 밖에도 지팡이를 셋째 발로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_ 아폴로도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제3권 8, p210


 <일리아스>에서 헤파이스토스가 아킬레우스를 위해 만들었던 방패. 그 안에 구체적으로 새겨진 인생의 모습. 이는 우리의 삶이 인생에 형상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아킬레우스와 함께 전장(戰場)으로 가는 방패와 그 안에 새겨진 삶은 바로 삶이라는 전쟁터로 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런지. 이 시점이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를 잃고 나간 복수전이라는 점에서 이 무구에 새겨진 삶은 가치를 잃고 번민하는 인생의 좌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아킬레우스 사후에 이 방패를 갖게되는 오뒷세우스의 귀환과 함께 삶이라는 전쟁도 끝나는 것은 아닐까. 시인(詩人)이 실제 <오뒷세우스> <일리아스>를 통해 삶의 치열함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격랑에 시달리며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요즈음에는 이런 모습으로 다가온다. 언젠가 다시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를 읽는다면 분명 다른 의미를 주겠지만...





[사진] Shield of Achilles(출처 : 위키백과)


 거기에 그는 대지와 하늘과 바다와

 지칠 줄 모르는 태양과 만월(滿月)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장식하고 있는 온갖 별들을,

 플레이아데스와 휘아데스와 오리온의 힘과

 사람들이 짐수레라고도 부르는 큰곰을 만들었다.

 큰곰은 같은 자리를 돌며 오리온을 지켜보는데

 이 별만이 오케아노스의 목욕에 참가하지 않는다.

 거기에 그는 또 필멸의 인간들의 아름다운 두 도시를

 만들었다. 한 도시에서는 결혼식과 잔치들이 벌어졌는데

 사람들이 휘황한 횃불 아래 신부들을 방에서 인도하여

 도성 안으로 데려가고 있었고, 축혼가(祝婚歌)가 높이 울려 퍼졌다...


 거기에 그는 또 부드러운 묵정밭을 넣었는데

 세 번이나 갈아엎은 넓고 기름진 밭이었다.

 그 안에서 여러 농부들이 소를 몰고 이리저리 돌고 있었다.

 그들이 밭의 경계에 이르러 돌아서려고 할 때마다

 한 남자가 다가가 각자에게 달콤한 포도주가 든 잔을

 손에 쥐어주곤 했다....


 밭이랑을 따라 곡식이 줄지어 한 아름씩 땅에 쓰러지면

 묶는 자들이 그것을 새끼로 한 단씩 묶었다.

 세 명의 묶는 자들이 곁에 서 있었다. 한편 아이들은

 베는 자들의 뒤를 뒤따라가며 곡식을 주워 모아 한 아름씩 안고 와서

 그것을 묶는 자들에게 쉴 새 없이 건네주었다....


 포도밭으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포도 따는 자들은 수확기가 되면 이 길로 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처녀 총각들은 신이 나서

 엮은 바구니에 꿀맛 같은 과일을 담아 나르고 있었다... (이하 중략) _호메로스, <일리아스>, 제18권 483 ~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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