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도(于山島) 독도의 옛 명칭은 우산도다. 1454(단종 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조에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의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00년에 반포한 '대한제국 칙령 41호'에는 관할 구역을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석도(石島)"라고 하였다. '죽도'는 울릉도 동북쪽 가까이에 붙어 있는 죽도이고, '석도'는 우산도로서 순우리말로 '독섬', '돌섬' 등으로 부르던 독도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_최선운, 민병준, <해설 대동여지도>, p180


 정병준(鄭秉峻, 1965 ~ )의  <독도 1947>은 독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주장이 1951년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평화조약,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를 전후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독자들은 본문을 통해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역사'에 근거한 반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국제법'에 근거한 주장이라는 사실과 이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입장도 함께 알 수 있다. <독도 1947>에서는 조약 초안 작성 단계에서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움직임은 패전국이었던 일본에 대한 배상책임을 보다 명확히 하려는 미국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1947년 1월 30일 로버트 피어리가 제출한 제1장 영토조항을 다룬 초안(Draft), 비망록, 지도 가운데 초안이 남아 있다. 비망록과 지도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문서의 제목은 "초안(Draft)"으로 되어 있다. 피어리가 만든 매우 간단한 2쪽짜리 문서는 이후 1947~1949년 국무부 대일평화 조약 초안 영토 조항의 원천이자 핵심이 되었다. 피어리는 대일평화조약의 영토조항 초안을 처음 작성할 때부터 제주도, 거문도, 울등도와 함께 독도(리앙쿠르암)를 "한국 근해의 모든 작은 섬들"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또한 피어리의 영토조항 초안은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독도(리앙쿠르암)를 한국령으로 표시한 미국측 초안으로 이어졌다. 특히 피어리가 일본통이며,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독도가 한국령으로 명확히 규정된 것은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389


 그렇지만, 1949년 일본에 '매료된' 미국인 시볼드가 등장하면서, 조약의 내용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변경된다. '반공주의'와 '친일'을 가장 우선시한 시볼드에게 공산주의자인 재일한국인들'이 전후 일본의 불안요소라는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1878 ~ 1967)의 주장은 매우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미국 내에서 받아들여지게 되고, 더 나아가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에 초청받지 못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독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이 시점에 발생했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일본에서 미 국무부의 대표이자 주일정치고문이었던 시볼드(William J. Sebald)는 초안에 대한 검토의견서에 독도가 1905년 일본령이 된 이후 단 한 차례도 한국의 이의제기를 받지 않아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폈다... 미 국무부는 현지공관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해서 1949년 12월 조약 초안을 수정했다. 여기에는 한일 주재 두 대사의 의견이 반영되어 한국의 대일평화협상 참가, 독도는 일본령이라는 조항이 새로 추가되었으나 조약 초안에는 전반적으로 시볼드의 친일적 견해가 대폭 반영되었다. 미 국무부가 독도를 일본령으로 잘못 표기한 이 초안의 존재는 이후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일본 영유권,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확인되었다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_ 정병준, <독도 1947>, p375


 시볼드의 권고 이후 국무부의 조약 초안 중 영토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사항 두 가지가 사라졌다. 첫째 일본의 영토를 명백히 특정하는, 경계선을 긋는 표시방법, 둘째 일본의 영토범위를 명확히 보여주는 첨부지도가 그것이었다. 이는 일본 외무성이 가장 바라 마지않던 바였다._ 정병준, <독도 1947>, p467


 사실, 한국의 조약 참가 반대 국가는 미국이 아닌 영국과 일본이었다. 일찍이 러시아를 상대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에서 우정을 나눈 두 국가는 단결하여 한국의 조약 참여를 반대했고, 이들의 반대에 한국의 참여를 주장하던 미국도 결국은 이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이로써 구한말 이후 거의 50여년 이상 일본의 침탈에 시달리던 최대 피해자는 조약 당사국이 되지 못하면서, 강화조약의 한계를 드러냈다.


 회의에서 한국의 (대일)조약 참가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원래 (극동위원회) 11개국 이외 다른 국가들의 견해가 요청될 시점에 만약 한국 정부가 존재한다면, 한국정부의 대표가 한국측 견해가 피력할 기회를 부여받게 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만약 의견수렴을 하는 그 시점에 한국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국대표단에 자문역 한 명 혹은 여러 명을 참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47년 8~9월은 한국에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파국으로 치닫는 마지막 순간이었으며, 언제 한국정부가 수립될지 가늠할 수 없는 시점이었다... 영국은 대일평화조약에 한국이 참가하는 것을 최후까지 극렬하게 반대한 국가였다._ 정병준, <독도 1947>, p394


 이와 함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한 해 전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수립과 함께 한국전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을 커졌으며, 이로 인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에 대한 배상책임이 아닌,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전진기지로서 일본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약으로 성격이 바뀐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일본의 지정학적/전략적 위상을 제고시켰다... 덜레스의 개인적 신념과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는 새로운 조약 초안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1947년 이래 미 국무부가 준비해왔던 대일징벌적 조약 초안과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조약 초안이었다. 덜레스의 요구는 첫째 간단한 초안일 것, 둘째 평화조약에 초점을 둘 것 등 두 가지였다. 국무부가 준비한 상세하고 복잡하며, 일본의 전쟁책임과 배상, 조약 발효 후 감시체제 등을 강조한 이전의 조약 초안들은 책상 위에서 치워졌다._ 정병준, <독도 1947>, p503


 포츠담 선언의 정신은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을 구체적으로 특정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1947년 이후 작성된 미 국무부의 대일평화조약 초안들에는 모두 일본령을 구체적으로 특정하고, 이를 표현하는 부속지도를 첨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1951년 4월 영국 외무성의 조약 초안과 부속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되는 방식이었으며, 기본적으로 포츠담 선언의 대일영토규정에 따랐던 것이었다. 그런데 1949년 11월 주일미정치고문 대리 시볼드가 일본의 심리적 불이익을 이유로 내세운 이래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을 특정하는 데 대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반대가 제시되었다. 그 배경은 미소냉전의 격화였으며, 결정적 계기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중공군의 참전이었다. 이러한 과정의 중간 결과물이 바로 1951년 3월 조약 초안이었다. 이는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과 일본령에서 배제될 섬들에 대해 구체적인 특정을 회피한 조약 초안이라고 할 수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521


 결국, 미국 국무부 친일파 관료의 등장과 한국전쟁 등의 외부 요인으로 샌프란시스코 회담에서 한국은 초청받지 못했고, 강화조약 역시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여기에 더해 이승만 정부의 적절치 못한 대응 역시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즉, 이승만 정부는 '대마도 對馬島'의 한국 귀속을 주장하면서 '대마도-파랑도-독도'등 3개섬에 대한 영유권을 함께 주장한 것이다. 한국이 말한 3개 섬 중 대마도에 대한 주장은 실효 지배 중인 영토에 대한 정치적인 주장으로, 파랑도에 대한 주장은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섬에 대한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국제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독도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 이들은 대마도, 파랑도에 대한 주장과 마찬가지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주장 역시 근거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부분은 외교적으로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한국정부가 가장 절박하게 생각했던 문제는 귀속재산 처리였으며, 영토문제에 있어서 대마도를 기각한 대신 새로 독도, 파랑도를 요구했던 것이다. 즉, 독도문제는 대마도 요구가 기각된 다음에 제기되었으며, 요구될 때에는 파랑도와 함께 제시되었던 것이다.(p750)... 한국정부는 정치적 주장이었던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이후 영토문제를 중시하지 않ㄴ았다는 인상이 강했다. 파랑도를 주장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부 스스로 명확한 확증근거를 갖지 못한 지역을 한번 주장해보자는 정도의 결의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763


 이처럼, <독도 1947>에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전후한 외교문서 분석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주장과 국제 사회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한 국가에 있어 중요한 영토 문제가 협상 당시의 국제 정세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과 함께 국력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독도 문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1947년 독도 조사대의 귀환 이후 울릉도/독도 조사활동의 결과는 다양한 방법으로 공개되었다. 이를 통해 독도는 재발견되었고, 대중적 관심의 표적이 되었으며, 독도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관심과 인식이 제고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사대에 참석했던 학자들에 의해 이후 한국의 독도 인식/정책과 관련한 주요 학설과 논리, 증거/관련 자료의 발굴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_ 정병준, <독도 1947>, p142 


 저자는 글을 1947년부터 시작한다. 이는 비록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이후에도 독도와 관련한 첨예한 대립이 있어왔지만, 우리가 독도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1947년 독도 조사대의 탐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 였을까. 1947년 독도 조사 이후 국토의 막내 독도에 대한 관심이 대중적으로 퍼져 나간 것이 국제법의 한계를 이겨내고, 우리 국토를 지켜낸 힘이라는 것을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독도 1947>로 지으면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독도문제가 한일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한미/미일 관계에서도 폭발성을 지닌 문제임이 확인되자 미 국무부는 이 문제에서 자국의 위치를 결정자에서 중립자로 조정하기 시작했다. 덜레스가 애써 미국의 입장을 중립적 위치로 강조했음에도 미 행정부 내에서 한국을 비난하고 일본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_ 정병준, <독도 1947>, p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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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게 된 어지러운 상황이 시작되면서부터 세계 여러 나라로 떠돌아야 했다. 나는 그 자취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동남아 일대, 그 지역들은 자그만치 지구의 절반에 이르렀다. 우리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서 그 지역들이 전부 <아리랑>의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북쪽땅은 가보지 못한 채 제1부 3권을 책으로 묶게 되는 아쉬움을 안고 있다. - 작가의 말- 中 


 

<아리랑>은 일제 강점시기 한반도, 만주, 중국, 연해주, 하와이, 중앙아시아, 북해도를 살아갔던 우리 민족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45년 해방시기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식민통치를 고발한 <아리랑>. 한 세대를 넘는 시간과 넓은 지역을 다뤄야 하기에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이 대표성을 갖는다. 할아버지 송수익이 의병, 독립군 투쟁을 했다면, 아들 송가원은 동북항일연군에서, 손자 송준혁은 일본 유학생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통해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리랑> 등장인물의 전형성 속에서 독자들은 항일투쟁의 역사를 보다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대일(對日)투쟁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점이 <아리랑>의 가장 큰 장점이고, 매력이라 생각된다.


 반면, 작품 전개 도중 작가의 부연 설명 외에도 부가적인 설명이 많다는 점은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부가적인 설명은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도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방식의 내용전달은 독자들에게 보다 상세한 역사 지식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등장인물 사이 대화가 어느새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내용으로 바뀌는 것은 몰입감을 떨어뜨리고, 독자들은 인물들이 개인의 삶을 살기보다는 공인(公人)의 모습만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아 딱딱하게 느낄 여지가 있다. 이런 면에서 <아리랑>은 '아 我 - 비아 非我의 투쟁'이라는 인식하에 서술된 시대 재현에 충실한 역사 소설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아리랑>을 읽으면서 리뷰를 어떤 식으로 정리할지 고민을 했다. 그리고, 작품의 성격에 맞는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다른 세대를 사는 수많은 인물들의 행동은  그 자체이기에 인물보다는 그 시대를 중심으로 정리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리고, 각 시대를 정리한 역사 책과 함께 페이퍼 형태로 정리한다면, 역사적 사실은 뼈대가 되고, <아리랑>은 살이 되어 그 시대를 보다 온전하게 보여주지 않을까. 그래서, <아리랑> 내용 정리의 개략적인 얼개를 적어본다.


 1. 1864년 ~ 1910년 한일 병합 조약까지


 

 이 시대를 다룬 역사책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 )의 <러일전쟁>과 정교(鄭喬, 1856 ~ 1925)의 <대한계년사>가 있는데, <러일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상황을, <대한계년사>는 구한말의 상황을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아리랑> 앞부분과 연계해서 읽으면 좋을 듯하다.



2. 1910년 ~ 1920년대


 

이 시대의 주요 사건은 단연 1919년 3.1운동이다. 일전에 리뷰로도 정리한 책이지만, <3.1운동 100년>으로 1920년대 상황을 정리하고, 이와 함께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한 박은식(朴殷植, 1859 ~ 1925)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한국통사>도 함께 정리하도록 하자. 


3. 1930년대


 <아리랑>에서는 1931년 만주사변이 우리 사회에 가져온 충격에 대해 설명한다. 작품은 3.1운동의 여파로 1920년대까지 치열하게 전개되던 독립군 투쟁이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의 수립으로 큰 타격을 받았음이 서술된다. 그 결과 무력 투쟁의 중심지는 연해주 일대로 옮겨가게 되고, 국내적으로는 친일파로 전향하는 지식인이 증가하게 하게 된다. 이 시기는 박경순의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와 함께 프라센지트 두아라 (Prasenjit Duara)의 <주권과 순수성 Sovereignty and Authenticity: Manchukuo and the East Asian Modern>, 애드거 스노우(Edgar Snow, 1905 ~ 1972)의 <중국의 붉은 별 Red Star Over China>로 정리할 계획이다.


4. 1940년대


 일제의 패망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는 민족의 암흑기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주요 사건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이기에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 1946 ~ )의 <제2차 세계대전 The second world war>과 호사카 마사야스 (保阪正康)의 <쇼와 육군>과 존 톨랜드 (John Toland)의 <일본 제국 패망사 The Rising Sun > 등을 1940년대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변절한 어두운 상황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을 참조하면 좋을 듯하다.


 이 외에 하와이 이민과 중앙아시아 이주과 관련된 책들은 좀 더 찾아봐야할 듯하다. 아무래도 <아리랑>이 12권에 이르는 대하소설이어서인지,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도 많은 준비가 필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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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5-27 1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아리랑과 태백산맥 시리즈는 한 권의 평론집으로 읽고 어떤 내용인지 알게 되었죠.
누가 알려 달라고 해서 그 책을 추천했는데 절판되었다는 걸 들은 기억이 나네요. 그 책이라도 들춰봐야겠어요.

겨울호랑이 2021-05-27 18:07   좋아요 2 | URL
아, 평론집이 있었군요.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마음 먹고 읽는 것이 쉽지 않은데, 한 권의 책으로 전체적인 흐름을 잡고 주제를 알 수 있다면 그 역시 의미있는 독서라 여겨집니다. 혹시 페크님께서 찾으시면 제목을 알려주시겠어요? 제게도 유용한 책이라 생각됩니다 ^^:)

페크pek0501 2021-05-27 23:15   좋아요 1 | URL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황광수 작, <땅과 사람의 역사>라는 책입니다.
알라딘엔 정보가 없어 네이버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찾았어요.
(중견작가 조정래의 소설세계를 감동적 장면 위주로 새롭게 엮은 저서.<태백산맥>,<아리랑> 등을 중심으로 작품의 주요 부분과 빼어난 장면들을 재수록했다.)

이 책을 읽고 전체 줄거리뿐만 아니라 인용문도 있어서 소설 분위기도 느껴졌었어요.
꽤 유익했던 독서로 기억합니다. 아쉽게도 절판이네요. 책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고 저자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해서 검색했답니다. 우리집에선 이 책이 어디 있는지 찾으려면 시간 좀 걸릴 듯합니다. ㅋ

한 번 중고서점에 알아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괜찮은 책이었어요.

겨울호랑이 2021-05-28 04:44   좋아요 0 | URL
페크님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말씀을 들으니 꼭 읽고 싶어지네요^^:)
 


 독일연방은 "자기 본래의 목적이나 정치적 본질로 볼 때에 실질적인 국가연합이다.... 하지만 자신의 내적, 외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특정한.... 관계 속에서 전체와 상황 속에 개입되었고, 이 상황 속에서 하나의 연방국가가 되었다." 즉 연방국가와 국가연합은 서로에게 수단과 목적의 관계이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36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18번째 주제는 동맹(Bund)다. 본문에서는 '동맹'이 역사 안에서 '연맹(Bundnis)', '연방주의(Foderalismus)', '연방국가(Bundesstaat)'라는 변주로 나타났는가를 다룬다.  


 이 시기의 역사를 거칠게나마 '동맹'을 중심으로 요약해 보자.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800~1806)이라는 이름뿐인 제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 크고 작은 영주들의 '동맹'이었다는 사실과 30년 전쟁을 마무리하는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 1648)의 결과 독일 영주들의 자치권이 강화되었고, 프로이센이 등장하였으며, '라인 동맹'을 통해서 독일 서부가 프랑스의 위성국으로 전락했고, 이후 '관세 동맹'으로 독일 제2제국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것이 큰 흐름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서 '동맹'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변화되었다.


 같은 신분 계급 내에서 형성된 동맹 관계가 점차적으로 계급 간 동맹으로 확대되는 시기가 중세 이전의 '동맹'의 의미였다면, 종교 개혁과 30년 전쟁은 '종교'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이 보다 강화되었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에 의한 라인동맹의 결성(1806), 프로이센 중심의 관세동맹(1834) 체결, 소(小)독일주의를 기초로 한 독일제국의 성립의 긴박한 역사 흐름 속에서 '동맹'이라는 의미는 다르게 받아들여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바라봤을 때, 우리는 다른 개념어들과는 달리 '동맹 bund'이라는 단어는 독일의 역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가 독일어 'bund'에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과 연계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계획했던 동맹 제도들이 마련되지 않았고, 따라서 조약에서 약속한 것보다 라인동맹국들의 통치권이 더 강력하게 유지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나폴레옹이 라인동맹을 이용해서 제멋대로 규정을 위반했기 때문에 체제의 법과 현실 사이에는 구舊 제국에서 관습법을 통해 통제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모순이 발생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28


 결정적인 사실은 이제(라인동맹 성립 이후)부터는 공동의 상위 권력이 소멸되고(강대국의 보호를 받는 동맹 foedus clientelare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독일은 더 이상 국가들의 국가 Staatenstaat가 아니라 국가들의 동맹(국가연합) Staatenbund라는 사실이었다... "라인동맹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영토를 갖고 있지 않고, 동맹 제후들만 통치 지역을 보유하고 있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29


  강한 이웃을 두고 싶어하지 않았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duc de Richelieu et de Fronsac, 1585~1642) 이래의 프랑스 외교정책에 좌우되며 끝없이 분열을 거듭하던 독일 제후국들. 나폴레옹에 의해 '라인연방' 강제 가입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지 불과 30년 뒤에 관세동맹으로부터 시작되어 성취한 독일 통일은 분단 체제에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만, 독일 통일이 프로이센의 군사력에 의존한 바가 컸다는 사실은 우리가 걸러서 받아들여야겠지만, 관세동맹이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평화 통일 이전에 자유로운 경제 교류가 선행되어야한다는 좋은 교훈을 안겨준다. 이에 대해서는 독일 역사와 관련된 <30년 전쟁> <강철왕국 프로이센> <몽유병자들>의 리뷰로 넘기기로 하고, '동맹'의 개념어에 대한 페이퍼는 이만 줄이자...


 프로이센의 주도권에 거는 희망(그리고 우려)은 더 큰 경제 단위가 형성되고서야 비로소 실용적인 기반을 획득했다. 1833년에 북독일과 남독일이 관세동맹 Zollverein을 통합하면서 스스로를 "총연맹 Gesamtverein"이라고 칭했다... 새로운 관세동맹은 구성 국가들의 연방제적 평등을 엄격하게 지켰는데 - 결정은 만장일치로만 내려졌고, 그 기간은 8년으로 연장 기간이 12년으로만 제한되었다 - 그 뒤에는 프로이센의 사실상 패권이 독일연방에서 메테르니히 Metternich의 패권보다 더 효율적으로 숨겨져 있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40


 관세동맹은 이제 그야말로 실제로 통일 사상의 고향이 되었고, 그 가운데에서 이 사상은 점점 큰 힘으로 발전할 것이다. 정치 산업 국가로서 최적의 통일을 이루라는 경제적 요청이 프로이센의 지휘 아래에서 충족되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이정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언제부터 독일에서 통일에 대한 요구와 인식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는가? 공동체적 국가 이익이 독일의 상당 부분을 하나로 묶고 이렇게 결합된 국가에서 개별 정치를 행하는 가능성을 배제시켰을 때부터, 관세동맹이 시작되고 발전할 때부터였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41


새로운 정당성으로서 국가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토대가 1815년에 형성된 독일연방에 침투해 1848년에는 국가연합을 잠정적으로 폭파시켰고, 1867/71년에는 최종적으로 (협의의) 연방국가로 전환시켰다. 모든 기준에 공통된 사항은 연방이 점점 더 국가화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연방국가 Bundes-Staat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프로이센이 패권을 잡는 "군주제 연방국가 monarchischer Bundesstaat"가 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이원주의가 해체되는 방법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단 한번뿐이었던(그래서 독일어로도 한 가지 용어로만 불리는) 국가회 Nationalisierung와 산업화 Industrialisierung의 구조적인 문제를 보여준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동맹>,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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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11 16: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분트, 분데스리가...

겨울호랑이 2021-05-11 16:12   좋아요 3 | URL
^^:) 그레이스님께서 말씀하신 단어의 어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왕망은 또 고구려(高句驪) 병사를 발동하여 흉노를 공격하려는데, 고구려에서 가려고 하지 아니 하니 군(郡, 요서군)에서 억지로 압박하자 모두 도망하여 요새를 나가고 이어서 법을 범하면서 침구(侵寇)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尹)인 전담(田譚)이 이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주군(州郡)에서는 그 허물을 고구려후(高句驪候) 추(騶)에게 돌렸는데, 엄무(嚴尤)가 상주하였다. "맥인(貊人)이 범법하는 것은 추(騶)를 좇은 것이 아니어서 바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마땅히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또 그들을 안위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그들에게 큰 죄가 두텁게 덮어씌운다면 아마 그들은 끝내 배반할까 걱정이고, 부여(夫餘)족속들에게는 반드시 화합함이 있을 것입니다.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夫餘)와 예맥(濊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우환입니다." 왕망이 안위하지 아니하자 예맥(濊貊)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엄우(嚴尤)에게 조서를 내려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고, 오자 머리를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驪)라고 이름을 고쳤다._사마광, <자치통감 37> 中


 아침마다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치통감 資治通鑑>를 읽는다. 전국시대로부터 오대십국 시대를 편년체로 서술한 <자치통감>. 겨우 왕망(王莽, BC45~AD23)의 신(新)나라 부분을 읽고 있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는 전체 294권 중에서 37권에 해당한다.)  중국의 역사를 읽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주변국과의 관계도 역사의 일부분이기에 우리나라 역사도 다루어진다. 그리고, 당연히 그 부분을 더 주의 깊게 읽게 된다. 마침 오늘은 왕망이 부하장수를 시켜 흉노(匈奴) 원정을 거부하는 고구려를 침략하는 부분이 서술된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왕이 죽음을 당했다는 부분에 눈이 멎는다. 고구려왕 중 외적에게 죽임을 당한 왕이 고국원왕 외에 또 있었을까. 동천왕 시기 아버지 미천왕의 시체가 중국쪽으로 끌려갔다는 기록은 있었지만, 그런 기억은 언뜻 나지 않아 같은 시기를 다룬 <삼국사기>도 함께 펼쳐본다. 기록에<자치통감>에서 죽임을 당한 고구려 왕은 추(騶)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발음에 따라 '추모(鄒牟)'로 불리는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 BC 58~BC 19)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삼국사기 三國史記>를 따라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BC38~AD18)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여겨진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시기가 아니라, 죽음을 당한 인물의 기록이 충돌한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유리왕 31년(서기12) 한(漢)나라의 왕망(王莾)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그래서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주군(州郡)에서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무(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에 명해서 위로하여 안심시켜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따라 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흉노(匈奴)를 아직 누르지 못한 터에 부여(夫餘)와 예맥(濊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 왕망이 기뻐하고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驪侯)라고 고쳐 부르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 37년(서기18) 겨울 10월에 왕이 두곡의 별궁에서 죽었다. 왕을 두곡의 동쪽 들판에서 장사지내고 왕호를 유리명왕이라고 하였다._김부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p323


  전반적인 상황은 비슷하지만, <자치통감>에서 고구려에서 죽임을 당한 이는 왕으로 , <삼국사기>에서는 부하장수로 기록되어 있어 이들의 기록이 서로 충돌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기록을 참고해야 하겠지만, 우리 고대사의 경우 많은 기록이 중국 쪽 자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중국쪽의 기록이 정설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기록의 양이 워낙 차이가 나니 이러한 현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그 기록의 객관성이다.  중국의 기록들이 모두 객관적으로 남아있다면 별 문제는 없겠지만, 중국의 기록 역시 공자(孔子, BC551~BC479)의 <춘추 春秋>이래 중국/유교 중심의 포폄(褒貶)사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자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자료의 많은 부분을 중국의 <자치통감>에 의존한 <삼국사기>에서도 이 부분의 기록은 다르게 나타난 것을 보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라 여겨진다.


 두 개의 내용을 보면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몇 군데 글자를 바꾸거나 추가했을 뿐이다.... 이것들을 검토하여 보건대 의도적으로 고쳤다고 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필사과정에서 당시에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로 적은 것이거나,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자치통감>과 <삼국사기>가 그 이후 내려오면서 착간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부분도 <신,구당서>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필법(筆法)에 대한 철저한 고려를 하지 않은 것 같고, <자치통감>에서 필법이 엄정하여 글자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신주하게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따라서 김수식은 <자치통감>을 자료로 본 것이고, 필법은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만큼 역사학 이론에서 아직은 <자치통감>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_권중달, <자치통감전> 中


 한 예(例)지만, 우리나라 고대사의 경전인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삼국사기>와 다른 중국 사서들 간의 서로 충돌하는 파편의 기억들은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역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를 넘어서 지역적으로 떨어진 ,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시간의 흐름을 오늘날 세계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바라봐야 하는 관점이라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 이와 같은 물음을 안고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역사>을 시작한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하면서 '역사'는 이미 경험된 것과 아직도 경험되고 있는 모든 것을 규율하는 개념 ein regulativer Begriff이 되었다. 그 이후로 이 개념은 단순항 이야기나 역사학의 영역을 훨씬 초월한다.(p12)... '즉자와 대자로서의 역사 Geschichte an und fur sich' 개념 속에는 예전부터 수많은 의미의 결이 유입되었다. 근대적 역사 개념은 모든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예전의 의미 영역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자기 안에서 결합하였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p13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하면서 ‘역사‘는 이미 경험된 것과 아직도 경험되고 있는 모든 것을 규율하는 개념 ein regulativer Begriff이 되었다. 그 이후로 이 개념은 단순항 이야기나 역사학의 영역을 훨씬 초월한다.(p12)... ‘즉자와 대자로서의 역사 Geschichte an und fur sich‘ 개념 속에는 예전부터 수많은 의미의 결이 유입되었다. 근대적 역사 개념은 모든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예전의 의미 영역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자기 안에서 결합하였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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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1-06-10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아있는 사기에 불신만 가졌었는데, 당대의 중국 역사관을 함께 보는 것도 방법이 되겠네요. 양적으로 방대하나... 객관성이 문제. 그 역시 공감합니다.
짧게 짧게 올려주신 덕에 재밌게 읽고 갑니다:-)

겨울호랑이 2021-06-11 07:03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역사‘는 과거의 사건 중에서 일부에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 학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객관적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면에서 역사가의 방대한 해석보다는 짧은 사실의 나열이 후대 역사가들에게는 오히려 도움되는 면이 있을 듯 합니다. 갱지님, 감사합니다 ^^:)
 


19세기 이후에 정치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왼쪽"으로 확장됨으로써 한때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입장이 점차 중앙으로 밀려나 혁신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또한, 자유주의가 그 비판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세계관이나 정치적 목표와 동일시됨으로써 하나의 계급 이데올로기로 축소되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4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의 7 번째 주제는 '자유주의 Liberalismus'다. 자유주의의 의미 변천은 다른 개념어들의 역사와는 조금 다르게 흘러왔다. 처음부터 분명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진보', '개혁', '해방' 등의 단어와는 달리 '자유'라는 단어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상태이며, 단어가 주는 여유롭고 긍정적인 이미지는 이 단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도록 막아왔다.다만, 그 안에 정치용어로서의 싹은 분명히 자라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자유주의'는 급격한 의미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 분화에 결정적 역할은 한 이들이 바로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다.


  '리버랄리태드', 즉 탁월하며 신중하고, 편견이 없으며 관대한 사람의 태도를 의미할 뿐 아니라 종교적, 세계관적, 도덕적 규범 체계와 가치 체계에 대한 개방성과 관용, 자유로운 관계를 의미하기도 하는 '리버랄리태트'는 계속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소통적 덕성이었다. 이 덕성은 일정한 교육 수준과 물질적 조건을 전제로 삼는다. 그것은 독립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버랄리태트는 또한 당파성의 반대말로서 언제나 정치적 자유주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였다. 그러나 반계몽주의적이고 반혁명론적인 생각과 주장의 맥락 속에서는 이 덕성의 효과들이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31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눈 자유주의를 부르주아 계급과 연계하면서,  '자유주의'는 급속하게 정치 사상 용어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정리하자면,  마르크스 이전의 '자유'가 유한의 육체에 대한 무한한 정신 상태로 구속받지 않은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졌다면, 마르크스 이후의 '자유'는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가진 자들의 여유'로 의미가 세속화되었다.


 1840년대 중반에 마르크스 Marx와 엥겔스 Engels는 정치적 자유주의, 곧 "리버럴한 운동"을 전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에 귀속시켰다. 그들이 특히 영국과 프랑스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리버럴한 부르주아'라는 개념은 어떤 정치적 지향을 대변하는 자들의 계급적 상태를 표현했으며, 사회적 이해관계와 정치적 입장의 결합을 이데올로기 비판적으로 밝히려는 것이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91


 1852년판 <마이어 백과사전> 속의 자유주의에 대한 글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드러난다. "고대인의 리버럴한 정신"은 "자유로운 사람 그 자체의 표식"이었다. 이와는 다르게 "현대의 자유주의"는 "오늘날의 국가 생활 속에서 억압받는 자유롭지 못한 시민에 의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제약받지 않는 그들의 지배자에 대해" 수행된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08


 이러한 의미 분화 속에서 '자유주의'는 좌,우 양 극단과 결합된다. 어떻게 보면, 서로 대척점에 위치한 두 사상과 자유주의가 결합되었다는 사실이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자유주의 안에 담고 있는 두 핵심요소가 다른 방향으로 자란 결과물임을 우리는 본문을 읽으며 확인할 수 있다.


 "우파"리버럴, 곧 민족적 리버럴들이 19세기의 마지막 30여 년 동안에 보수주의 세력들과 가까워진 반면에, 20세기 초에 일부 "좌파" 리버럴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정치적 협력이라는 생각에 자신들을 개방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24


 자유주의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면 자유주의가 "뻔하고 단순하게 두 개의 분명하면서도 단순한 원칙들, 첫째로 정신의 세속화, 즉 정신의 비종교성과 천박함을 북돋는 것, 둘째로 정당한 소유자의 손에서 부당한 소유자의 손으로 재산을 이동시키는 것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62


 우리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에서 그려낸 역사 속에서 '자유주의' 안에 담겨진 모순된 의미가 큰 충돌없이 사용되어왔으나,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해 계급용어로 정의되면서 뜻이 갈라지고,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사용되면서 오늘날에는 다른 단어 못지 않은 강력한 정치용어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부터 정치적 자유주의는 그것이 세속화와 사회적 원자화의 부수적 현상이며, 물질주의와 상업 정신의 정치적 표현이고, 민주주의와 대중의 전제적 지배로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직면해 있었다. 그리하여 모순적인 현상이 나타났는데, '리버랄'이라는 말이 한편으로는 종종 비성찰적으로, 비정치적으로, 특정 정당과 무관하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행동 양식과 목표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결단력 없고, 소속감 없으며, 경솔하고 이기적인 정치적 태도를 비방하는 표현으로서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이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3 


 오늘날의 정치사상 중 '자유주의'사상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사상이 '자유지선주의 Libertarianism'다. 대표적인 자유지선주의 사상가 머리 로스바드 (Murray N. Rothbard, 1926~1995)의 <자유지선주의선언 For a New Liberty: The Libertarian Manifesto>은 자유지선주의의 관점에서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책이다. 현대 자유주의의 흐름에 대해서는 이 책의 리뷰를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하고, 이번 페이퍼에서는 자유지선주의 강령의 개략적인 성격을 소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갈무리하자...  

 

 자유지선주의 강령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과 함께 가장 좋았던 시절의 미국을 실현하겠다고 제안한다. 자유지선주의자들은 이제 다행히도 한물간 지난 시대 유럽의 군주정 전통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자보다도 더욱 공고하게 미국을 건국한 위대한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 전통은 우리에게 개인의 자유에 대한 미국의 전통과 평화로운 외교정책, 최소 정부와 자유시장 경제를 물려줬다. 우리는 보수주의자들보다도 더 진정으로 전통적이고 더 뿌리 깊게 미국적이지만,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급진주의자보다도 더욱 급진적이다._머리 N.로스바드, <새로운 자유를 찾아서 : 자유지선주의선언>, p510


19세기 이후에 정치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왼쪽"으로 확장됨으로써 한때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입장이 점차 중앙으로 밀려나 혁신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또한, 자유주의가 그 비판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세계관이나 정치적 목표와 동일시됨으로써 하나의 계급 이데올로기로 축소되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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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4-28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점이 좋은 거 같습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핵심을 다르게 보는 것 같습니다. ㅎㅎ
제가 이 책을 읽을 때 자유 개념이 바뀐 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아니라 ‘소유’에 대한 자유를 인정한 시기라고 보았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4-28 22:25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저는 미처 생각치 못했는데,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말씀하신 지점을 다시 짚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4-28 21:34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제가 잘 못 읽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미쳐 몰랐던 말씀이라서 드린 얘기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1-04-28 21:59   좋아요 0 | URL
역사의 흐름을 규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관점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중요한 것임에도 놓치는 부분이 없지 않음을 느낍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는게 제 자신의 한계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관점에서 말씀해 주시는 부분은 큰 도움이 됩니다. 제 생각 안에 갖혀 있는 것은 마치 아침에 면도할 때 한 방향으로만 깎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다른 방향에서 면도를 하면 훨씬 깔끔해진다는 면에서 감사드립니다.(물론, 7중날 면도기를 사면 제일 좋겠지만, 제 지식은 그 정도가 되지 못하네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