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연(黃台淵)의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 Confucian Philosophy and the Origin of the Western Enlightenment>은 서구 근대의 출발점을 르네상스( Renaissance)와 종교개혁(Reformation)이전의 공자(孔子, BC 551 ~BC 479)의 유가(儒家)철학에서 찾는다.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유럽 세계보다 이미 먼저 근대화를 이룩한 중국 문물이 유럽으로 전해지면서(西遷) 비로소 유럽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책의 주된 요지다.


 이 책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으로 개시되는 서양 근대문명의 유교적 기원에 대한 탐색과 규명은 서구 계몽주의, '근대유럽', 그리고 보편사적 근대가 공자철학과 극동의 정치문화에서 유래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베버주의적 근대이론의 오류를 극명해 '새로운' 근대이론을 수립하는 출발점이다._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상) >, p13


  그렇지만, 아편전쟁(鴉片戰爭, 1839 ~ 1842)로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중국의 근현대사를 생각해 볼 때,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선뜻 동의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일례로 자본주의를 생각해보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 ~ 1920)나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와 같은 사상가들은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꽃피울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자유로운 시장경제와 프로테스탄티즘과 같은 자본주의 정신을 들고 있는 반면,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는 이러한 사상과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달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대해 저자는 '미발달'이 아닌 '다른 안의 선택'이라는 관점으로 비판한다.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는.

 

중국에서 대공업자본주의가 불가능하게 된 이유는 일단 매뉴팩처 생산의 경제적 한계와 질곡을 혁신기술로, 즉 정교한 역학적 자동화기계로 분쇄, 돌파하는 또 한 번의 기술혁명을 일으키지 - '못한' 것이 아니라 -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한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다른 길은 다름 아니라 '자호 字號(브랜드) 상인 주도의 광역 네트워크 자본주의'였다. 공장제는 기술혁신에 기초한 노동절약적 생산방식인 반면, '자호상인 주도의 광역 네트워크'는 경영혁신에 기초한 자본절약적 생산, 분배방식이다. 이 다른 선택의 원인은 중국인들의 완전한 사회해방, 인구폭발과 노동력과잉, 중국 상품에 대한 유럽의 수요의 소멸로 인한 중국시장의 축소 등이었다._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상) >, p531


 저자는 결코 동양이 서양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선 선진 문명이었고, 서구 문명은 '동방의 빛'을 통해 무미몽매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책 전편을 통해 서술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기존 서구 중심의 근대관이 아닌 새로운 근대관을 제기한다.


 '송대 이래의 중국적 근대성의 서천 西遷'이라는 가설이 옳을 것으로 입증되려면 중국에서의 '근대의 발단'이라는 사실이 비교역사학적으로 증명되고 이론적으로 논증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사적(보편사적) 의미를 갖는 - 한국/중국/일본의 역사학에서 보통 '근세'라고 불리고 서양에서 '초기근대(the early midemity)'라고 불리는 - 보편사적 의미의 '초기근대'가 진정 중국에서 최초로 개시되었는가? 앞서 여러 번 시사했듯이, 제국주의시대 일본이 동양사학자 나이토고난(內藤湖南)은 1920년대에 이미 이 물음에 대해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해놓은 바있다. 그는 중국이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시기, 특히 송대(960~1279)에 일어난 심원한 변혁을 "근세의 발단"으로 규정했다. 이것이 그의 이른바 '송대 이후 근세설 宋代以後近世說'이다._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상) >, p473


 일단 유의해야 하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송대에 인류역사상 최초로 발단한 '근세'가 공자철학 및 송대의 순수한 유교정치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송대 근세를 개창한 북송 대개혁가 왕안석의 신법과 개혁정책에 대한 '정학 正學'운동 주도세력의 정치사상적 영향은 "심대했기" 때문이다._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상) >, p473


 구체적으로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에서는 중국의 정치철학이 유럽으로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점을 송(宋)대 이후로 바라본다. 저자는 특히 당대의 정치가 왕안석(王安石, 1021 ~ 1086)의 개혁을 나라 전체의 구조를 변화시킬 정도의 혁명으로 평가하고, 이 개혁안 안에서 '보편적 근대성'을 발견한다. 이는 나이토고난과 같은 관점이지만, 저자는 이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간다.


 나이토고난이 중국의 근대화 노력이 송대 이후 쇠퇴했다고 평가하는 반면, 황태연 교수는 청대에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오랜 기간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었음을 강조한다. 또한, 중국문화의 전파가 세계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극동지역이 강한 영향을 받았기에, 오랜 기간 극동 아시아 전체가 유럽보다 여러 면에서 앞서 있었음을 강조한다.


 나이토고난의 송대이후근세론을 수용하되 그의 원/명/청대 노쇠설을 버리고 청대까지 중국이 계속적 발전론으로 수정해야 한다. 이 수정된 역사관에 따라 중국의 역사시대 구분을 세계적 차원에서 재조명하면,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근세'는 '근대'와 구분되어 '초기근대(early modernity)'로 재再정의된다. 그러면 '근세'는 '근대의 전기 前期'로 이해되는 반면, '근대'는 '높은 근대(high modernity)'로 바꿔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중국의 명/청대와 17~19세기 조선을 '근세'(즉, 낮은 근대)의 '마지막 단계'(최후단계) 또는 '성숙단계'로 규정한다._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상) >, p524

 

 극동아시아의 근대화와 관련한 저자의 관점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들에서 우리는 곧 나라를 빼앗길 껍데기뿐인 제국이 아닌 일본 다음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역동적인 '대한제국 大韓帝國'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또다른 관점의 구한말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정리하도록 하자.

 

이상의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과연 서구 근대 정신인 계몽(啓瞢)의 빛(light)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답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빛의 기원은 서구 문명 내부인 그리스 로마 문명이 아닌 외부에서 왔으며, 그 뿌리는 공자를 비롯한 유가 철학이라는 것이 책의 요지다. 이러한 주장이 낯선 것이 사실이지만, 근대 철학자인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 ~ 1716)나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 ~ 1754)가 중국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고려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동양철학과 서구 근대 사상을 비교하며 음미한다면, 이러한 노력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저자는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에서 개략적으로 전개한 논지를 보다 세부적으로 <근대 영국의 공자숭배와 모럴리스트들>, <근대 프랑스의 공자열광과 계몽철학>, <근대 독일과 스위스의 유교적 계몽주의>에서 펼치는데, 아직 여기까지는 선뜻 손이 미치질 못하고 있다. 최대 1,000 페이지에 달하는 책들이어서 적지 않은 페이지의 부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이 모두 긴밀한 관련이 있기에 큰 흐름을 잡고 세부 차이점을 위주로 정리하면 불가능한 작업은 아닐 듯하여 추후 계획으로 추가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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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6-13 23: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000페이지...흡
여기에 댓글 달 실력은 안되고...
애들 말로
그냥 짱입니다!^^

겨울호랑이 2021-06-13 23:29   좋아요 3 | URL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이 다른 책들의 서론 격에 해당하는데,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큰 주제는 여기에서 거의 언급된 것 같아요. 다소 반복되는 느낌도 있지만,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역사적 반박‘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각합니다. 책에 정말 많은 사상가들의 주장이 정리되어 있는데, 따라가기에도 벅차네요. 독자가 읽기도 힘든 책을 쓴 저자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나리자 2021-06-14 11: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철학과 역사물의 향연!! 멋지십니다~
정말 쨩이세요!!

겨울호랑이 2021-06-14 11:22   좋아요 3 | URL
황태연 교수의 책들을 관통하는 주제가 ‘근대의 기원‘이고, 각 권들은 세부적인 논증과 역사속에서의 실재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해됩니다. 독자들이 본문에 언급된 사상가와 역사적 사실을 다 알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니만큼, 전체적인 흐름을 잡고 비교해 읽는다면,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독서를 자기 주도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볼 때 황태연 교수를 비롯한 석학들의 내공은 정말 엄청남을 느낍니다.^^:)

Redman 2024-04-26 0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명의 수용과 전파 과정에서 수용자는 자신의 맥락과 관심사에 따라 타 문명권의 정보를 편의적으로 재구성하죠. 서양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중국 철학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관심사와 기존 사상적 전통에 따라 재구성한 중국을 받아들인 거겠죠.

계몽 사상가들이 청이나 중국 사례를 인용하고 찬양한 건 맞으나, 그건 성서의 역사성을 부인하거나 유럽 절대주의 군주와 가톨릭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리고 비단 중국만이 아니라 타히티, 하와이, 북미의 휴런족 같은 멀리 떨어진 나라나 민족에 대한 여행기가 18세기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이들에 관한 언급은 유럽의 지배적 관념을 상대화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선택지를 제공했습니다. 중국, 공맹만 더 특별한 게 아니라, 중국은 유럽 사상가들에게 그저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합니다. 읽어보지 않았지만 볼프나 라이프니츠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겠죠.

애초에 자연법 전통, 기독교 전통, 공화주의 전통 등등 복잡한 사상의 지형과 전통, 패러다임이 더 영향을 미쳤다면 미쳤지, 단순히 중국철학을 읽었다고, 공자를 언급한다고 그 모든 사상가가 중국철학의 신봉자이며 근대는 동양에서 왔다고 하는 황태연의 주장은 지나친 단순화이자 편향적 독법의 소산이며 지난 반 세기 동안 축적된 탁월한 연구 성과들을 무효화해버리는 주장 같네요. 말하자면, 한국에서 샌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할리우드 영화가 천만영화로 등극했다고 21세기 한국문명의 기원은 미국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논리 같습니다.

<국부론> 검색하다가, 그동안 궁금했던 황태연의 주장을 겨울호랑이님의 글을 읽고 드디어 접했네요. 저자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만 읽었어도 저런 주장은 안 할텐데

겨울호랑이 2024-04-26 06:02   좋아요 0 | URL
유럽의 계몽사상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대안 중 하나라는 Redman님 말씀에 충분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주역>이 라이프니츠에게 가져다 준 영향 등을 생각해본다면 저로서는 영향력에 대해 단정적으로 결론짓기도 어렵네요. 제가 아직 잘 몰라서겠지요... 글을 읽으며 서구 계몽사상에 미친 중국과 다른 문명들의 영향력에 대해 보다 깊이 알 수 있다면 문명의 우위에 대해 자리매김하기보다 오래전부터 문명 간의 교류가 물자 뿐 아니라 사상면에서도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유한 전통이라는 틀이 아닌 교류와 수용을 통한 발전이라는 흐름의 관점에서 문명사를 바라봐야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병원 대기실에 꽂힌 「미중전쟁」을 꺼내들었다. 책이 나온 시점이 2017년 12월이니, 다음해 4월 판문점 회담 등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급격한 국제 정세 변화를 겪은 후 2021년에 이 책을 보니 선뜻 ‘미-중 군사충돌‘이 현실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중국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 거요.˝

2권 띠지에 적힌 자극적인 문구를 보면서, 세계 최대 농산물 수출국인 미국의 농산품 수입국이 중국이라는 사실과 세계 최대 소비국인 미국에 세계 공장인 중국의 생산품이 대량 수출되는 현실이 대비된다. ‘중국 때리기‘를 통해 인기를 올릴 수 있지만, 중국이 정작 죽어 버리거나 매입한 미국채를 대량 환매할 경우 미국 역시 큰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칸트의 ‘영원한 평화‘의 전제 조건 중 하나가 ‘자유로운 교역‘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미-중 전쟁‘이 아닌 ‘미-중 경쟁‘이 더 적절한 소재가 아니었을까. 또는, 문정인 교수의 지적처럼 동아시아에서의 국지전을 했으면 다소 흥미는 떨어지지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다만, 이러한 평가는 2021년에 내리는 사후적인 평가이기에 2017년에 책을 쓴 작가에게 이러한 통찰을 요구하는 것은 스스로도 무리가 있다 여겨진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미중전쟁」은 한반도에 배치된 전략무기체계 등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읽는다면 나름 즐겁게 즐길 수 있는 무협지와 같은 작품으로 다가온다.

ps.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지만, 작계 5027, 작계5015 등 군사 전략과 무기 제원을 고려한 접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장비의 개별 성능과 실제 운용은 분명 다른 문제지만, 아쉽게도 이런 부분까지 깊이있게 들어가지는 못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군대 경험이 많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경험한 20여년 전 군사령부 지휘통제훈련(워게임)에 비추어 본다면, 기상조건 등 전장의 돌발 변수가 승패에 미치는 영향은 현대전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미중전쟁>에는 이러한 요소가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않는다. 여러 요건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지휘관의 의지와 성능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진행은 개연성이 부족하게 느껴져 아쉽다...이 부분은 작가의 초기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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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2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12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1-06-13 0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글을 쓰는 데 필요해서 전쟁에 관한 책을 찾고 있어요. 검색해 보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6-13 10:01   좋아요 1 | URL
제 글이 페크님께 도움이 될 지 잘 모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종이달 2021-12-31 1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12-31 13:14   좋아요 1 | URL
종이달님 감사합니다^^:)
 

 

 1970년 1월 26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선 유진산이 유진오의 뒤를 이어 새 당수로 뽑혔다. 그러나 그것이 곳 1971년 대선후보의 보장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40대 기수들'의 도전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에 김영삼은 42세, 김대중은 44세, 이철승은 47세였다._강준만, <한국 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p95/350


 제1야당 국민의힘 당대표에 30대 이준석 대표가 선출되었다는 뉴스가 화제다. 헌정 사상 30대 당대표는 처음이라며 모든 뉴스를 블랙홀처럼 흡수해버리는 바람에, 대통령이 G7 회담에 초청되어 출국했다는 뉴스나 미 FDA에서 얀센 백신의 유효기간을 1.5개월 연장했다는 뉴스는 구석에서도 찾기 힘들었던 하루였다. 이른바 '이준석 현상'을 보면서 과거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다시 보는 듯한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지는데, 이러한 감정이 나만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 53세였던 박정희는 이른바 '40대 기수들'의 도전에 대해 '어린애들과의 싸움'이라며 폄하하면서, 타협적인 유진산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를 원했다... 유진산도 박정희처럼 '40대 기수들'을 '정치적 미성년자',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는 표현을 쓰면서 경멸감을 내비쳤지만, '40대 기수들'의 바람은 결코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다. '40대 기수들'의 유진산 비판은 큰 호응을 얻어 유진산은 전당대회를 2주일 앞둔 9월 21일 후보 경쟁에 나서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박정희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중앙정보부의 무능을 질타했고, "내가 김영삼이 같은 애송이와 어떻게 싸우라는 말이냐"라고 호통을 쳤다._강준만, <한국 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p96/350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970년대 당시 유행했던 '40대 기수론'이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언론에서 열을 올리며 보도하 듯  30대 당대표의 선출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준석과 그가 속한 정당을 지지하지 않지만, 이로 인한 파장이 정치계에 긍정적인 영향이 미쳤으면 하는 마음이다. 새로 대표가 된 그가 그동안 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해 온 국민의 힘에게 자마전투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 235 ~ BC183)처럼 승리를 안겨다 줄지, 황산대첩의 왜장(倭將) 아지발도(阿只拔都, 1365~1380)처럼 패배를 안겨다 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과거 '40대 기수론'에 대항했던 박정희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 '30대 당대표'인 이준석이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키즈라는 연관성은 이런 기시감을 더하게 하는 요인이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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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6-11 19:2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혹시 신문에 투고 해보시죠.
시론으로...!

겨울호랑이 2021-06-11 21:2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 그렇지만, 아마도 제 부족한 글을 받아줄 곳은 제 서재와 저희 집 <가족신문>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레이스 2021-06-11 19:38   좋아요 4 | URL
충분히 훌륭하십니다.
강준만 반갑네요
인물과 사상 열심히 챙겨 읽었었는데..^^
이 책 자료가 많죠.
저는 책으로 갖고 있어요.^^

겨울호랑이 2021-06-11 19:43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저 역시 역사의 큰 흐름을 잡는데 좋은 책들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양이 만만치 않아서 도서관 대출과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그레이스님께서는 소장하고 계시다니 많이 부럽습니다.^^:)

붕붕툐툐 2021-06-11 21:19   좋아요 2 | URL
가족신문~ㅋㅋㅋㅋ 저도 그레이스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6-11 21:2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윤씨부인은 끊임없이 매질을 하던 형리를 잃었다. 생전의 최치수는 아들이 아니었으며 가혹한 형리였던 것이다. 그것을 윤씨부인은 원했다. 원했으며 또 그렇게 되게 만든 사람이 윤씨부인이다. 그 사실을 지금 윤씨부인은 공포 없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엾은 형리, 세월을 물어뜯으며 물어뜯으며 지겨워서 못 견디어 하다가 그 세월에 눌리어 가버린 사람, 최치수는 윤씨부인을 치죄(治罪)하기 위해 쌓아올린 제단에 바쳐진 한 마리의 여윈 암소는 아니었는지._박경리, <토지 2>, p368/408


 박경리(朴景利, 1926 ~ 2008)의 <토지 2>에서는 최참판 가문의 당주 최치수가 귀녀와 김평산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이런 상황에 처한 어머니 윤씨부인의 복잡한 심경이 묘사된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 그렇지만, <토지>에서 윤씨부인이 아들 최치수의 죽음에서 느끼는 감정은 여느 어머니의 슬픔과는 다르다. 불공을 드리던 중 김개주에게 겁탈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사건 이후 윤씨부인에게 아들 최치수는 예전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산에서 돌아오던 날 어머님 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달려온 치수를 뿌리친 그때부터 윤씨부인은 죽은 남편의 아내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남편의 아들인 치수의 어미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의식의 심층에는 부정(不淨)의 여인이며 아내와 어미의 자격을 잃은 육체적인 낙인이 빚은 절망 이외의 것이 또 있었다. 핏덩어리를 낳아서 팽개치고 온 뼈저린 모성의 절망이었다._박경리, <토지 2>, p368/408


 자신이 낳은 아들이라는 사실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윤씨부인의 두 절망이 자신의 정신 층위를 갈라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후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를 라캉(Jacques Lacan, 1901 ~ 1981)의 상징계-상상계-실재계와 연관시켜 설명해보면 어떨까.


 라캉은 정신의 세 층위로서 'Imaginaire', 'Symbolique', 'Reel'을 말한다. 우선, 'Imaginaire'는 이미지적인 것, 영상적인 것(Image!), 영상계라 볼 수도 있고, 이미지를 통해 상상하니 상상적인 것, 상상계라고 볼 수도 있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 7장에서 심적 장치를 설명하면서 제1차 과정은 지각된 것을 영상으로 바꾸는 것이고, 제2차 과정은 이 영상을 언어(단어)로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제1, 2차 과정의 경계는 연상 작용이 일어나는 곳으로서 '영상-단어'의 짝이 문제시되는 곳이다. 두 번째로 'Symbolique'는 상징적인 것(Symbol~)으로 구성되는 상징 체계이다. 마지막 'Reel'은 뭐라고 딱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징 체계에 가두어지지 않는 어떤 것인데, 실재적인 것, 실재계로 불린다. 라캉은 실재적인 것 안에서 상징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접합과 교차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셋의 어울림이 바로 정신 작용인데, 이 삼위체는 정신분석 기술을 세우는 체계이자, 정신분석 기술 개념을 생산해 대는 장치이다._ 강응섭, <자크 라캉의 세미나 읽기>, p26/240


 소설에는 나오지 않은 사실이니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원치 않은 일을 당하기 전 윤씨 부인의 현실은 자신이 가고자하는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리고 사회규범과도 어그러지지 않은 삶이 아니었을까. 윤씨 부인의 삶에서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는 크게 충돌하지 않고 '대지주 가문의 안방 마님'으로서 자신을 지탱해 주었을 것이다. 삼위일체가 되어 분열되지 않은 자아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상태. 이것이 사건 전의 윤씨 부인의 세계가 아니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 '상징계'와 '실재계'와 건널 수 없는 틈을 만들었고, 이로 인해 그의 모든 것이 바뀌었던 것은 아닐까.

 

 라캉에게 인간존재의 현실을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 등 얽혀 있는 세 차원으로 구성된다. 이 세 영역은 체스 게임에서 간명하게 예증된다. 체스를 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은 체스의 상징적 차원이다. 상징적 차원은 상상적 차원과 명확히 대비된다. 상상적 차원에서 각각의 말들은 특유의 형태를 가지며 서로 다른 이름(왕, 왕비, 기사)으로 개별화된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다. 경기자의 지능이나 경기자를 당황하게 하고 갑자기 게임을 중단시키는 예기치 못한 침범 같은 것이다. 대타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 상징적 질서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우리의 발화 행위는 복잡한 규칙의 네트워크와 서로 다른 전제들의 수락과 의존으로 이루어진다._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p20/160


 라캉의 타자가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하며 자기 너머에 있는 절대적 타자라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태어나고, 해석하거나 이해해야 하는 환경이라면, 윤씨 부인의 타자는 '정결(貞潔)'이라는 사회적 규범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윤씨부인의 감정과 태도는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며,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라캉의 유명한 말을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을까. 적어도 윤씨부인이 느꼈던 두 절망 중 하나는 사회적 규범 문제로 무리없이 잡을 수 있지만, '모성(母性)' 문제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책들을 통해 내용을 정리하는 것으로 넘기고, 다시 <토지 2>로 돌아가자. 


 <어머니의 탄생 : 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1999)에서, 허디는 가능한 모성적 본능들을 탐사했다. 그는 모든 포유류 암컷에 타고난 모성적 반응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미가 자신이 낳는 모든 자식을 자동으로 양육하지도, 모든 자식에게 똑같은 정도로 헌신하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인간에게 초기의 모성적 헌신은 다양한 요인, 특히 사회의 뒷받침에 대한 인식에 달렸다._ 버니지아 헤이슨 외, <포유류의 번식 - 암컷 관점> , p14/286


이처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실재계의 '아들' 최치수를 잃은 슬픔보다 '치죄자' 최치수를 잃은 감정을 더 크게 느꼈을 윤씨부인의 내면에서 타자와 자신을 분리시킬 여지는 없어보인다. 이의 연속선상에서 최치수 죽음 후 더 냉혹해지는 윤씨부인의 태도는 '상징계의 타자'를 잃은 분노때문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토지>를 읽던 중 유독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 한 대목에서 들었던 여러 생각들을 나열한 페이퍼는 이만 줄이도록 하자...


 그것은 회환 때문이었다. 공포 없이 생각할 수 없는 치죄자(治罪者)로서의 최치수, 그는 아들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도현의 고초를 겪는 망모의 구원을 위해 석가에게 법을 물었던 목련존자(目連尊者)일 수 없는, 심판장의 형리로 그 어미 스스로가 만들었던 것이다. 목련존자의 악모 이상의 악모임을 윤씨부인은 깨달은 것이다._박경리, <토지 2>, p368/409 


 날이 갈수록 윤씨부인에게서 뿜어나오는 독기는 치열해졌으며 삼엄하고 공포에 찬 공기는 충만하여 하인들은 주술에 걸린 것처럼 빠져나갈 구멍조차 찾을 수 없이 마치 제가끔 자신이 치수를 죽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던 것이다._박경리, <토지 2>, p37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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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6-11 14: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윤씨부인의 심정을 저렇게 라캉의 이론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네요. 저는 철학은 철학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읽고는 연결을 못시켜서 항상 따로 놉니다. ㅎㅎ 토지의 인물 성격 묘사는 정말 압권이었어요. 아 사람이 정말 단순한 존재가 아니구나, 얼마나 다양한 인간이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하는지, 한 인물이 얼마나 다양한 면들을 보여줄 수 있는지 그 깊고깊은 곳이 토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언제든 제가 읽은 최고의 소설은 변하지 않고 <토지>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1-06-11 14:58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토지>는 잔잔하게 그려낸 인물들의 심리와 갈등이 적절하게 잘 드러난 작품이라 여겨지네요.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아리랑>의 배경이 넓다면, <토지>의 인물은 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붕붕툐툐 2021-06-11 17:52   좋아요 2 | URL
저도요!! 최고의 소설은 <토지>!!

붕붕툐툐 2021-06-11 1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시금 토지를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라캉과 연결해 읽기 인상적이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6-11 19:1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뒤늦게 <토지>를 읽는데, 참 대단한 작품이라 여겨집니다.^^:)

조그만 메모수첩 2021-06-11 2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도 이 대목에서 분노가 일어요. 피해자였을 뿐이었던 윤씨부인은 왜 자신을 죄인이라는 굴레에 얽매었어야 했을까. 당대 윤리가 지금과 다름을 감안한다 해도 여전히 이해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지요. 자신에 대한 분노와 절망은 치죄자를 두어 자신을 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토지> 세계관에서 가장 사패에 가까운 최치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히려 힘들었다는 점에서 자기 구원이란, 해방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한편 이런 냉정함을 서희가 물려받았기에 서희는 자기 자신을 지켜내고.. 아 토지 다시 읽고 싶네요 ㅠㅠ 리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6-11 23:27   좋아요 2 | URL
조그만메모수첩님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윤씨부인의 치죄자는 아들 최치수가 아닌 오히려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완벽한 아내, 어머니로서 존재해왔던 윤씨부인이 변을 당한 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최치수를 볼 때마다 느꼈기에 아들을 멀리했고, 그 결과 한창 성장기에 엄마의 사랑을 못 받은 최치수는 점차 차갑게 변해가고, 그런 아들을 볼 때마다 윤씨부인은 더 죄책감을 느끼는... 그런 악순환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봤을 때 최치수 역시 피해자이며, 마치 불효자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후회하듯, 윤씨부인은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풀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가도 생각해 봅니다.(이 경우에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바뀐 듯 합니다.. 물론 제 생각입니다만, 저는 윤씨부인도 피해자이지만, 이로 인해 이유도 모르고 어머니의 벽을 느낀 최치수가 어쩌면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와 함께 우리 모두가 사회와 관계를 맺고 살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산다고 했을 때, 우리의 상상계는 주변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만은 없을 듯 합니다. 그런 면에서, 현재 우리의 상상계와 윤씨부인의 상산계는 아마도 다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관계는 오늘날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이 그에게는 최선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한 인물의 작은 사건 하나로 여러 관점에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조그만메모수첩님 좋은 의견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산도(于山島) 독도의 옛 명칭은 우산도다. 1454(단종 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조에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의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00년에 반포한 '대한제국 칙령 41호'에는 관할 구역을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석도(石島)"라고 하였다. '죽도'는 울릉도 동북쪽 가까이에 붙어 있는 죽도이고, '석도'는 우산도로서 순우리말로 '독섬', '돌섬' 등으로 부르던 독도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_최선운, 민병준, <해설 대동여지도>, p180


 정병준(鄭秉峻, 1965 ~ )의  <독도 1947>은 독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주장이 1951년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평화조약,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를 전후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독자들은 본문을 통해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역사'에 근거한 반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국제법'에 근거한 주장이라는 사실과 이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입장도 함께 알 수 있다. <독도 1947>에서는 조약 초안 작성 단계에서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움직임은 패전국이었던 일본에 대한 배상책임을 보다 명확히 하려는 미국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1947년 1월 30일 로버트 피어리가 제출한 제1장 영토조항을 다룬 초안(Draft), 비망록, 지도 가운데 초안이 남아 있다. 비망록과 지도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문서의 제목은 "초안(Draft)"으로 되어 있다. 피어리가 만든 매우 간단한 2쪽짜리 문서는 이후 1947~1949년 국무부 대일평화 조약 초안 영토 조항의 원천이자 핵심이 되었다. 피어리는 대일평화조약의 영토조항 초안을 처음 작성할 때부터 제주도, 거문도, 울등도와 함께 독도(리앙쿠르암)를 "한국 근해의 모든 작은 섬들"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또한 피어리의 영토조항 초안은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독도(리앙쿠르암)를 한국령으로 표시한 미국측 초안으로 이어졌다. 특히 피어리가 일본통이며,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독도가 한국령으로 명확히 규정된 것은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389


 그렇지만, 1949년 일본에 '매료된' 미국인 시볼드가 등장하면서, 조약의 내용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변경된다. '반공주의'와 '친일'을 가장 우선시한 시볼드에게 공산주의자인 재일한국인들'이 전후 일본의 불안요소라는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1878 ~ 1967)의 주장은 매우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미국 내에서 받아들여지게 되고, 더 나아가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에 초청받지 못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독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이 시점에 발생했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일본에서 미 국무부의 대표이자 주일정치고문이었던 시볼드(William J. Sebald)는 초안에 대한 검토의견서에 독도가 1905년 일본령이 된 이후 단 한 차례도 한국의 이의제기를 받지 않아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폈다... 미 국무부는 현지공관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해서 1949년 12월 조약 초안을 수정했다. 여기에는 한일 주재 두 대사의 의견이 반영되어 한국의 대일평화협상 참가, 독도는 일본령이라는 조항이 새로 추가되었으나 조약 초안에는 전반적으로 시볼드의 친일적 견해가 대폭 반영되었다. 미 국무부가 독도를 일본령으로 잘못 표기한 이 초안의 존재는 이후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일본 영유권,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확인되었다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_ 정병준, <독도 1947>, p375


 시볼드의 권고 이후 국무부의 조약 초안 중 영토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사항 두 가지가 사라졌다. 첫째 일본의 영토를 명백히 특정하는, 경계선을 긋는 표시방법, 둘째 일본의 영토범위를 명확히 보여주는 첨부지도가 그것이었다. 이는 일본 외무성이 가장 바라 마지않던 바였다._ 정병준, <독도 1947>, p467


 사실, 한국의 조약 참가 반대 국가는 미국이 아닌 영국과 일본이었다. 일찍이 러시아를 상대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에서 우정을 나눈 두 국가는 단결하여 한국의 조약 참여를 반대했고, 이들의 반대에 한국의 참여를 주장하던 미국도 결국은 이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이로써 구한말 이후 거의 50여년 이상 일본의 침탈에 시달리던 최대 피해자는 조약 당사국이 되지 못하면서, 강화조약의 한계를 드러냈다.


 회의에서 한국의 (대일)조약 참가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원래 (극동위원회) 11개국 이외 다른 국가들의 견해가 요청될 시점에 만약 한국 정부가 존재한다면, 한국정부의 대표가 한국측 견해가 피력할 기회를 부여받게 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만약 의견수렴을 하는 그 시점에 한국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국대표단에 자문역 한 명 혹은 여러 명을 참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47년 8~9월은 한국에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파국으로 치닫는 마지막 순간이었으며, 언제 한국정부가 수립될지 가늠할 수 없는 시점이었다... 영국은 대일평화조약에 한국이 참가하는 것을 최후까지 극렬하게 반대한 국가였다._ 정병준, <독도 1947>, p394


 이와 함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한 해 전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수립과 함께 한국전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을 커졌으며, 이로 인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에 대한 배상책임이 아닌,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전진기지로서 일본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약으로 성격이 바뀐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일본의 지정학적/전략적 위상을 제고시켰다... 덜레스의 개인적 신념과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는 새로운 조약 초안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1947년 이래 미 국무부가 준비해왔던 대일징벌적 조약 초안과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조약 초안이었다. 덜레스의 요구는 첫째 간단한 초안일 것, 둘째 평화조약에 초점을 둘 것 등 두 가지였다. 국무부가 준비한 상세하고 복잡하며, 일본의 전쟁책임과 배상, 조약 발효 후 감시체제 등을 강조한 이전의 조약 초안들은 책상 위에서 치워졌다._ 정병준, <독도 1947>, p503


 포츠담 선언의 정신은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을 구체적으로 특정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1947년 이후 작성된 미 국무부의 대일평화조약 초안들에는 모두 일본령을 구체적으로 특정하고, 이를 표현하는 부속지도를 첨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1951년 4월 영국 외무성의 조약 초안과 부속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되는 방식이었으며, 기본적으로 포츠담 선언의 대일영토규정에 따랐던 것이었다. 그런데 1949년 11월 주일미정치고문 대리 시볼드가 일본의 심리적 불이익을 이유로 내세운 이래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을 특정하는 데 대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반대가 제시되었다. 그 배경은 미소냉전의 격화였으며, 결정적 계기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중공군의 참전이었다. 이러한 과정의 중간 결과물이 바로 1951년 3월 조약 초안이었다. 이는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과 일본령에서 배제될 섬들에 대해 구체적인 특정을 회피한 조약 초안이라고 할 수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521


 결국, 미국 국무부 친일파 관료의 등장과 한국전쟁 등의 외부 요인으로 샌프란시스코 회담에서 한국은 초청받지 못했고, 강화조약 역시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여기에 더해 이승만 정부의 적절치 못한 대응 역시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즉, 이승만 정부는 '대마도 對馬島'의 한국 귀속을 주장하면서 '대마도-파랑도-독도'등 3개섬에 대한 영유권을 함께 주장한 것이다. 한국이 말한 3개 섬 중 대마도에 대한 주장은 실효 지배 중인 영토에 대한 정치적인 주장으로, 파랑도에 대한 주장은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섬에 대한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국제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독도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 이들은 대마도, 파랑도에 대한 주장과 마찬가지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주장 역시 근거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부분은 외교적으로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한국정부가 가장 절박하게 생각했던 문제는 귀속재산 처리였으며, 영토문제에 있어서 대마도를 기각한 대신 새로 독도, 파랑도를 요구했던 것이다. 즉, 독도문제는 대마도 요구가 기각된 다음에 제기되었으며, 요구될 때에는 파랑도와 함께 제시되었던 것이다.(p750)... 한국정부는 정치적 주장이었던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이후 영토문제를 중시하지 않ㄴ았다는 인상이 강했다. 파랑도를 주장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부 스스로 명확한 확증근거를 갖지 못한 지역을 한번 주장해보자는 정도의 결의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763


 이처럼, <독도 1947>에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전후한 외교문서 분석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주장과 국제 사회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한 국가에 있어 중요한 영토 문제가 협상 당시의 국제 정세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과 함께 국력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독도 문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1947년 독도 조사대의 귀환 이후 울릉도/독도 조사활동의 결과는 다양한 방법으로 공개되었다. 이를 통해 독도는 재발견되었고, 대중적 관심의 표적이 되었으며, 독도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관심과 인식이 제고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사대에 참석했던 학자들에 의해 이후 한국의 독도 인식/정책과 관련한 주요 학설과 논리, 증거/관련 자료의 발굴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_ 정병준, <독도 1947>, p142 


 저자는 글을 1947년부터 시작한다. 이는 비록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이후에도 독도와 관련한 첨예한 대립이 있어왔지만, 우리가 독도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1947년 독도 조사대의 탐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 였을까. 1947년 독도 조사 이후 국토의 막내 독도에 대한 관심이 대중적으로 퍼져 나간 것이 국제법의 한계를 이겨내고, 우리 국토를 지켜낸 힘이라는 것을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독도 1947>로 지으면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독도문제가 한일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한미/미일 관계에서도 폭발성을 지닌 문제임이 확인되자 미 국무부는 이 문제에서 자국의 위치를 결정자에서 중립자로 조정하기 시작했다. 덜레스가 애써 미국의 입장을 중립적 위치로 강조했음에도 미 행정부 내에서 한국을 비난하고 일본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_ 정병준, <독도 1947>, p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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