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발터 벤야민 선집 3
발터 벤야민 지음, 윤미애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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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나간 과거를 개인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통찰함으로써 감정을 다스리려 애쎴다. 이러한 통찰의 결과로 이 책의 회상 작업에서는 경험의 깊이가 아니라 연속적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개인사적 면모들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만약 시골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이라면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자연감정에 따르는 어떤 형식에 담아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대도시 유년시절의 이미지들은 아마 미래의 역사적 경험을 미리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서문 中, p35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유년시절 회상기.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독일어 번역을 했던 저자였기에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안에서 프루스트의 시간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유년기에 대한 회상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고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는 기억 주체의 의도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프루스트와 마찬가지로 벤야민은 회상에서 주체의 의식적 노력을 배제함으로써 의식과 회상을 분리시킨다. 즉 자아는 더 이상 회상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마치 카메라 렌즈에 의해 촬영되는 이미지 전부가 의식적 지각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해제 中, p12


 그렇지만 동시에 프루스트의 시간과 벤야민의 시간은 같지 않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화자라는 개인의 경험이라면,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의 화자는 집단적, 역사적 화자다. 프루스트의 화자는 예술가다. 아우라(Aura)를 지닌 자신만이 갖는 독특한 정형성을 갖는 경험이 마들렌의 과자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눈 앞에 의식적으로 드러난다. 


 벤야민에 의한 기억의 감광판에 어떤 이미지가 찍히는가의 여부는 거기에 필요한 '조명'에 달려 있다. 순간적으로 조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관습의 지배를 받는 일상적 자아를 벗어나는 순간이자 보다 깊은 곳에 위치한 심층적 자아가 충격을 받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때 체험 내용을 시간 속에서 배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해제 中, p13


 반면, 벤야민의 유년시절은 기술복제 시대에 해석된 시간이다. 일회적이고 지속적인 개인의 경험 대신 일시적이고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된 시간.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의 서로 다른 기억과 중첩된 기억의 사실성은 이미 벤야민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의 전통적 권위가 흔들리는 대신 그 안에서 발견하는 역사성이 발견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유리 창문에서 발견한 유물론적인 문구의 의미는 과거의 벤야민이 발견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어린 시절의 작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한 현재의 벤야민이 발견한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의미가 앞으로의 그의 미학(美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런 면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고전시기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예술작품이라면,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는 기술복제 시대 시대정신이 표현된 정치물이라고 해석해야 할까를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나중에 나는 티어가르텐의 새로운 구석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또 다른 곳들도 계속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게 이처럼 새로운 장소들을 알려준 것은 어느 소녀도, 어떤 다른 체험도, 어떤 책도 아니다. 30년 뒤 지리에 밝은 한 베를린의 농부가 오랫동안 함께 베를린을 떠났다 돌아온 나를 데리고 나섰다(p38)... 나는 유리창문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알아챘다. "노동은 시민의 명예이고, 축복은 수고의 대가이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p39


 유년시절 회상에서 "은폐가 필연적"이라고 한 벤야민 자신의 말처럼, 일견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회상 뒤에 집단적 역사에 대한 성찰이 은폐되어 있다. 비록 베를린 유년시절에 대한 벤야민의 글에는 집단적 삶에 영향을 미쳤던 역사적 사건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벤야민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개인적 경험과 집단적 경험이 마주치는 차원이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해제 中, p23



벤야민의 회상에서 순간들은 하나의 이미지 혹은 소리의 형태로 떠오른다. 이미지로 떠오르는 회상의 메커니즘은 종종 사진의 비유로 설명된다. 사진의 비유에서 보듯이 유년기 회상은 서사적 연속성을 구성하지 않는 불연속적 순간들의 단편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진다. - P11

유년에 대한 추억은 단지 잠자고 있을 뿐 아니라 자라는 아이처럼 성장한다. 망각된 유년시절은 그 유년의 체험과 연관성을 지닌 삶의 순간들을 끌어모으기 때문이다. 망각된 것은 지난 모든 삶의 무게로 무거워진다. 이처럼 벤야민의 기억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인 망각이 기억과 대립관계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잠재적 기억이라는 점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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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걷다보면 여학생들 평균 키가 170cm, 남학생들 평균 키가 180cm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이들 키가 많이 커졌음을 느낀다. 반면 환경과 공부 등의 원인으로 키가 작은 이들의 스트레스 또한 만만하지 않다. 특히 부모 입장에서는.

사람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가 다르기에 기다리다보면 크겠지 하면서도 친구들과 목 하나 차이나는 아이를 보면 살짝 걱정되기도 하나보다. 특히 아내는. 그래서 우연히 눈에 띈 책이 이 책이다.

˝성장 클리닉을 가기 전 이 책을 꼭 먼저 읽으세요. 성장 클리닉을 방문하기 전 아이와 먼저 대화를 해보세요. 내 아이를 잘 파악하는 것이 키성장의 시작입니다.˝

책에 있는 윗 글이 책의 모든 것을 잘 드러낸다. 책에는 부모들이 제기할만한 여러 문제점이 제시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 답과 함께 다소 원론적인 방법론을 알려준다. 근본적인 처방은 아무래도 클리닉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솔루션 제시보다는 성장 클리닉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서 또는 오리엔테이션 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의 쓰임새는 클리닉 이전 만족할만한 상담을 위한 배경 안내겠지만, 그럼에도 키 작은 아이를 둔 부모에게 희망을 준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일면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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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28 0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키작은 아내가 걱정을 많이 하던 그때가 떠오르네요. 작은딸이 초등학교 시절 항상 첫줄에 앉았지요. 나중에 알고보니 산만하다는 미술치료 선생의 말만 듣고 집중력 향상에 도움된다는 약을 처방받고 있었답니다. 이 약 때문인지 아이가 잘 먹질 못했어요. 미술치료 선생님과 면담을 가진 후, 별 도움되지 않겠다고 판단하고, 이 학원을 끊었지요. 약 처방도 당연히 필요없어 졌지요. 이후 아이가 식사를 잘 했습니다. 폭풍 성장했지요. 중학생 때 엄마보다 더 키가 컸어요. 어릴 적엔 자유롭게 놀고 상상하며 자라는 것이 정답인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24-01-28 13:15   좋아요 1 | URL
저와 아내 모두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아이 키가 평균 정도 되니 시기를 놓친 것은 아닌지 아내가 은근히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골고루 잘 먹고 잘 자고 잘 뛰어 놀면 알아서 크겠지 하는 생각이 나태한 것은 아닌가 싶은 반성 아닌 반성을 하는 듯 하구요. 호시우행님 말씀처럼 아이들마다 저마다 자신들만의 때가 있겠지요. 공연한 부모의 조바심이 걱정 아닌 걱정을 키우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호시우행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페크pek0501 2024-01-28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전자의 힘이 세긴 하지만 요즘 영양좋은 음식이 많고 경제적 사정이 나아져 아이들의 키가 커졌어요.
저희 어머니는 전쟁 전후로 못 먹어서 키가 크지 못했다고 하시더군요. 다행히 저는 키가 큰 편에 속해 학교 다닐 때 뒤에 앉곤 했지요. 한 번은 좀 앞쪽에 앉고 싶어서 키를 줄여 섰더니 중간쯤 앉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때는 선생님이 아이들을 키 순서대로 줄을 서게 하여 자리를 배정했어요. 그땐 키가 큰 게 싫더라고요. 이제 제 키는 보통 키가 되어 버렸어요. 워낙 키 큰 사람들이 많아져서 말이죠. 제 딸이 저보다 더 큽니다.ㅋㅋ

겨울호랑이 2024-01-28 13:22   좋아요 1 | URL
저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고등학생 아이들이라도 지나가면 평균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시대가 좋아져 그렇겠지요. 키에 대한 고민은 절대 수치가 아니라 상대 수치에서 오는 것 같아요. 평균보다 작으면 안 된다는...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안심하거나 걱정하기보다 아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하게 자라고 있는가에 대해 더 고민해야하는데 잠시 중요한 것을 놏쳤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에 신경쓰다보면 아이는 엄마보다 심지어는 아빠보다 커질 수도 있겠지요. ㅋ 페크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불확실한 증시부양 효과와 달리, ‘윤석열식 낙수효과 이론‘에 따른 세수 부족은 심화될 전망이다. 증권거래세 인하 유지와 금투세 폐지로 줄어들 세수는 연평균 약 3조4000억원으로 추산된다. 대주주 요건 완화로 인한 영향까지 감안한다면 세수 감소 규모는 더 늘어날 수밖에없다. 경기침체로 인해 세수 부족 문제를겪고 있는 정부 입장에서 결코 적지 않은 손실이다. - P15

 타이완 정치는 운신의 폭이 점점줄어들었다. 지은주 교수는 이번 선거의쟁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2024년의 쟁점도 반중 정서가 핵심으로 보인다. 다만2016년과 다른 건 중국의 태도 변화다. 2016년 중국이 타이완에 우호적이었다면 지금은 실제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위기감이 포함된 반중 정서가 지금 타이완사회에 자리하고 있다." - P27

"실제 유권자들에게 중국 문제는 생각보다크지 않다. 오히려 취업과 임금, 주거 같은 국내 이슈가 더 크다. 양안 갈등과 미.중 대립 구도로 바라보면 타이완 내부의고민과 갈등을 빠트리게 된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북한 이슈로만 한국의 정치를 해석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 P27

 "미국을 믿지 못하지만 중국은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곤경 앞에서 타이완의선택은 국익의 손상이 생길 수 있는 외교적 자율성을 포기하더라도 친미 노선을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안보 위기를 계기로 타이완의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념적 근본주의‘가 힘을 얻게 되었다. 경제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반중 정서를 활용하여 정권을 획득하는 전략만이 남았다."  - P31

시 주석이 집권한 지난 10년간 계속된 현상이다. 타이완을 향한 중국의 압박은 친중 성향의 국민당을 약화시키고 독립 성향인 민진당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2019년 홍콩에 대한 시주석의 무자비한 탄압 이후 통일을 지지하는 타이완인은 줄어들었고 친중 정치인은 설 자리를 잃었다. 결국 시진핑 주석주의 정책 실패를 확인한 선거였던 셈이다. - P32

김정은 위원장이 전쟁을 결심했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그의 결심과 무관하게군사적 긴장 고조로 언제든지 우발적 충돌은 일어날 수 있다. 김 위원장의 발언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불법무법의 북방한계선을 비롯한 그 어떤 경계선도 허용될 수 없으며 대한민국이 우리의 영토·영공·영해를 0.001㎜라도 침범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 도발로 간주 " 한다는 대목이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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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구들의 방법론적 결함을 밝히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으며, T와 공격성이 (매우 높거나 매우 낮은 수준을 제외하고) 거의 관계가 없다는 새로운 연구가 이제 막 대중에게 알려지고 있다. T는 남성의 번식이라는 성 호르몬의 한 가지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T는 배아, 근육, 여성 및 남성의 뇌, 적혈구 발달에도 필수적이다. 여러 생물학적, 환경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T는 다양한 생물학적 과정에 관여한다. - P14

"시간이 모든 상처를 치료한다"라는 말이 항상 옳은 건 아니다. 염증이 심한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한다. 치료를 위해서는 의사를 만나 전문적인 처치를 받아야 한다. 지속성 애도를 경험하는 유족들은 자신의 상황을 극도로 무감각하고 압도적이며 쇠약해진 상태라고 묘사할 때가 많다.  - P22

케이팝에는 전통이 없다. 케이팝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적BES응한 결과물이다. 안 그래도 좁은 한국 음악 시장에서 인터넷의 확산으로 불법 복제가 횡행하자 기획사들은 해외에서 판로를 열어야했고, 그 결과 지금의 아이돌과 케이팝의 원형이 생겨났다. 그건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기에 전통이 아니라 전 세계 음악에서 차용할수 있는 것을 차용하고 조합한 결과였다. 그렇기에 케이팝은 지독히 한국스럽지만 어디도 한국적이지 않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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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관의 역사 - 칸트.괴테.니체 게오르그 짐멜 선집 2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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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는 주체와 객체의 방정식을 객체의 측면에서 푸는 반면, 칸트는 주체의 측면에서 푼다. 비록 후자의 주체는 우연적이고 개인에 따라 분화된 주체가 아니라, 객관적 인식의 초개인적 담지자인 주체다. 과학적-방법론적으로 보면, 칸트는 당연히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사상가이다. 반면 괴테는 주관적이고 존재의 상(像)을 자신의 정열적인 개별성에 따라 형성하는 사상가이다. 그러나 세계관적으로 내용적 결과에 입각해 보면 칸트는 주관주의자이다. 그는 세계를 인간의 의식안으로 끌어들여 의식의 형식에 의해 형성되도록 한다. 이에 반해 괴테는 오직 자족적이고 객관적인 존재만을 인정하는 바, 이 존재의 내부에서는 주체와 그의 삶 또한 자연의 총체적 삶이 고동치는 맥박이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32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 1858~1918)은 <근대 세계관의 역사>에서 세 명의 사상을 통해 18~19세기 근대세계를 설명한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분화'(分化)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통일'(統一) 그리고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영원회귀'(ewig wiederkehren)와 '초인'(Ubermensch)이 근대 세계관을 지탱하는 세 개의 발이다.


 칸트에게서는 가치가 인간에서 나와 자연으로 가지만, 괴테에게서는 자연에서 나와 인간에게로 간다. 인간의 특별한 지위는 자연이 그것의 최상의 창조물인 인간으로 발전했고 상승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인간이 세계발전의 최종목표로 간주된다는 사실은 칸트에게서 인간을 그 외의 존재와 대립시키며 이보다 절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시킨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72


 짐멜에게 칸트와 괴테는 여러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이다. 칸트는 인간-자연의 구도에서 물자체인 자신과 현상적으로 인식하는 외부의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말한다면, 괴테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통해 인간의 이념이 드러남을 강조한다.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선 외부에서의 결합. 이것이 본문에서 강조되는 칸트와 괴테의 사상이자 차이점이다. 


  개인적으로 이들 분화와 통일이라는 관점의 차이를 칸트와 괴테의 분야와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분석적이며 과학적인 칸트 철학과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괴테의 문학. 자연을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과학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예술.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현신처럼 칸트와 괴테로 대표되는 다른 관점은 다른 한 편으로 시대가 자연을 바라보는 역사관, 시대관의 변천이기도 하다.


 18세기의 이상은 고립되고 본질적으로 동질인 개인을 요구했다. 개인은 합리적-보편적 법칙으로, 그리고 이해관계의 자연적인 조화로 결합되어 있었다. 반면 19세기를 특징짓는 이상은 노동분업에 의해 분화된 개인들을 고려했는데, 이들은 분업과 분화의 맞물림 위에 토대를 둔 사회조직들과 결합되었다. 분업과 분화의 두 원리는 근대경제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122


 이성(reason)의 강조가 계몽주의를, 분업이 산업혁명을 가져와 18세기 근대를 열었다면 19세기 근대의 통일적 세계관은 분업과 분화 그리고 이성의 결과물이다. '만인에 대한 민인의 투쟁'을 강요하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인 자연 앞에서 개인들은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다르지 않은 개인'이 강조되었다면,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제거된 이후 사회는 '서로 같지 않은 개인'이 강조되고, 이들의 유대와 연대가 강조된 것은 아니었을까. 


 다만, 여기에서 머무른다면 자연에 대한 이성적인 인간의 승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개인을 넘어선 필요가 생긴 바로 이 지점에서 짐멜은 니체의 세계관을 가져온다. 니체의 사상이 접목되어 '인류'와 '초인에 의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개인-사회'는 분화와 통일이라는 단순순환에서 벗어나 우상향의 진보적 세계관으로 정립될 수 있다.


  니체는 인류의 낮은 위치를 중요시하는 사회적 이상을 인류적 이상으로 대체시키려 한다... 니체는 우리 종족을 완성된, 따라서 불변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고 발전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초인이란 인간종족의 훨씬 더 높은 단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모든 시기는 발전능력이 있는 한 그 단계를 넘어서는 초인이 존재한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150


 이처럼 짐멜의 <근대 세계관의 역사>는 칸트와 괴테라는 다소 낯선 조합을 통해 개인-사회의 관계를 설명한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접근법이지만 철학과 문학의 대가들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뒷받침하려는 짐멜의 저작을 통해 근대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괴테에게) 미학적 심상의 파괴는 곧 진리의 파괴이다. 수학적 자연과학이 사물을 가능한 한 무특성의 요소들로 분해해 얻어지는 계산적 표상은, 괴테에게 미학적-직관적 가치가 결여되기 때문에 심각한 방자함이자 사로(邪路)일 수밖에 없다. 거꾸로 칸트에게 미학적 규준은 자연인식의 대상에 대한 방자함이자 사로가 될 것이다. - P54

의지와 당위가 대립하게 되고, 자연적 주관성과 객관적 도덕법칙이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통일성에 대한 요구가 일어난다... 칸트에게서는 객관적 도덕명령을 통해 주어지는데, 이 명령은 모든 특수한 이해관계를 초월하지만 주체의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괴테에게서는 도덕적-실천적 삶의 요소들의 직접적인 내적 통일성, 즉 모든 대립을 포괄하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통해 주어진다. - P55

칸트에게 인간의 행위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즉 ‘물자체‘에 속하는 내적인 측면이 하나요, 단지 현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측면이 다른 하나이다. 결국 인간은 화해되지 않은 두 세계에 머물게 된다. 이와 반대로, 괴테가 보기에, 가시적인 것에서 진행되면서 경험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순수한 행위는 인간의 이념을 드러낸다. 바로 이 이념과 더불어 우리의 존재는 세계의 요소나 역량이 된다. - P92

칸트는 전적으로 기존의 도덕을 공식화하려 한 반면, 니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도덕‘으로 멈추어 서 있는 기존의 도덕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려 한다. 칸트는 주어진 것을 인식하기를 원하는 이론가이며, 니체는 주어진 것을 실천적으로 개혁하기를 원하는 도덕의 사제이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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