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클래식 수업 3 - 바흐, 세상을 품은 예술의 수도사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3
민은기 지음, 강한 그림 / 사회평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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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법... 어려울 거라는 예감이 드는 이름이에요. 지금은 ‘엄격한 작곡 기법이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음과 음이 어울리려면 그 간격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정리한 법칙이에요. 어렵다기보다는 따져야 할 게 많다고 할까요? 대위법에 따라 선율을 만든다는 건 마치 1 더하기 1의 답을 구하는 것처럼 분명한 문제입니다. 맞는 답이 있고 틀린 답이 있죠. _ 민은기,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3 : 바흐, 세상을 품은 예술의 수도사>, p241

바흐를 주제로 한 <난처한 클래식 3>을 본 것은 바흐의 음악에서 표현되는 대위법과 평균율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대위법을 주제로 한 강의나 전문서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배경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기에 찾아든 교양서적이 <난처한 클래식 3 : 바흐>. 본문에서는 바흐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각 시대를 구분하고,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을 소개하며, QR코드를 통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예전에 읽었던 롤랑 마뉘엘의 <음악의 기쁨>을 더 시각적, 청각적 도구를 활용해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느낌을 받는다.

<난처한 클래식 3 : 바흐>에서 내가 궁금한 부분에 대한 설명은 일반인이 음악감상에 지장이 없을 정도에서 살짝 들어간 정도라 아쉽게도 느껴지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해가 된다. 대위법과 관련한 전문서적을 펼쳐보고 바로 덮은 경험이 있기에, 일반독자들이 클래식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난이도 조절을 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 아쉬운 부분은 다른 책에서 찾아 봐야겠지만.

점차 음악가들 사이에서 그냥 한 옥타브를 똑같이 열두 부분으로 쪼개어 음을 정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이게 바로 평균율이에요. 평균율의 요점은 다른 음정들의 순수성은 포기하고 ˝옥타브의 순수성만 완벽하게 지키자˝는 겁니다. 도는 1, 한 옥타브 높은 도는 1/2로 놓고 그 사이에 있는 음들은 정확하게 똑같은 비율로 높아지게 만들면 조를 옮길 때 문제가 없으니까요. _ 민은기,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3 : 바흐, 세상을 품은 예술의 수도사>, p352

<난처한 클래식 3>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아래 구절이다. 책, 음악, 미술 그 어떤 것이든 우리가 알고 싶고 느끼고 싶은 그 무엇이 있다면, 그리고 그 무엇을 ‘실체‘라 했을 때, 나는 그 실체를 알기보다는 그 실체를 잘 나타내려는 노력과 노력의 결과물인 지식을 쫓아다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이다. 바흐 음악 자체보다 ‘대위법‘과 ‘평균율‘이라는 수학적 질서에 대한 궁금증도 중요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바흐 음악에 대한 사랑이 있었을까 하는.

사실 우리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비발디의 <봄>에서 어떤 부분이 새소리를 묘사했다는 지식 같은 게 아닙니다. 당연히 그런 지식이 음악에 흥미를 갖게 하고 핵심에 빠르게 다가가도록 도움을 줄 수 있지요. 하지만 <봄>이라는 곡의 근본적인 가치가 새소리를 잘 묘사하는 데에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새소리를 듣고 싶으면 새소리를 들으면 되고, 시를 감상하고 싶으면 시를 읽으면 되겠죠. 물론 음악으로 시나 새소리를 모방하는 걸 듣는 재미가 없다는 이야긴 아니에요. 저는 이 곡이 시 없이도 사람들에게 환희와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만큼 사랑받고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 건 바로 음악의 그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_ 민은기,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3 : 바흐, 세상을 품은 예술의 수도사>, p241

<난처한 클래식> 시리즈를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제시된 문장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기존의 순정률의 틀에서 벗어나 평균율의 지평선을 연 바흐지만(참, 지평선이 아니라 지평이었지) 하프시코드의 틀에서 벗어나 피아노의 세계를 열지 못했던 한계를 보면서 우리가 갖는 인간적인 한계를 다시 느끼게 된다.

프리드리히 2세는 바흐와도 친분이 있었던 악기 제작자 질버만이 만든 피아노 포르테를 몇 대 소장하고 있었는데요, 먼 길을 온 바흐에게 그 피아노포르테의 소리가 괜찮은지 한번 쳐보라고 했대요. 이때 바흐가 피아노포르테를 쳐보고 ˝이 정도 음량으로는 하프시코드랑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없습니다˝라고 얘기하죠. 피아노의 역사에서 꼭 등장하는 에피소드입니다. _ 민은기,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3 : 바흐, 세상을 품은 예술의 수도사>,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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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14 09: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기타 치던 친구가
피아노 전공한 친구에게
대위법 배웠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음악하는 이들도 공부를 해
야 하는구나 싶었답니다.

겨울호랑이 2022-10-15 14:40   좋아요 4 | URL
서양학문의 어느 분야이든 조금만 깊이 들어가다 보면 수학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참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지금도 그렇지만) 수학, 영어 비중이 그렇게 높았구나 싶습니다.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했고, 전공을 깊이 있게 파기 위해서는 수학을 안 할 수 없는.... 그런 면에서 유럽 문명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영어, 수학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 고전의세계 리커버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지음, 김소영 옮김 / 책세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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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순수 학문은 사상이 또한 못지않게 사태 자체인 한에서 사상을 지니고 있으며, 사태 그 자체가 또한 못지않게 순수 사상인 한에서 사태 자체를 포함한다. 학문으로서의 진리는 스스로를 전개하는 순수한 자기 의식이며, 자기라는 형태를 지닌다. 따라서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 das an und fur sich Seiende은 의식된 개념이지만 [사실은] 개념 그 자체가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헴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34/174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Wissenxchaft der Logik-Einleitung>을 통해서 우리는 헤겔의 논리학에 대한 인식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헤겔은 서문을 통해서 논리학이 단순히 질료가 결여된 형식이 아니라, 질료와 형식을 다함께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이 객관적인 사유가 순수 학문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순수 학문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며 현실적이고 참된 인식을 위한 진료가 결여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순수 학문의 내용은 오로지 절대적으로 참된 것, 또, 여전히 질료라는 용어를 사용하길 원한다면 참된 질료인 것이다... 따라서 논리학은 순수 이성의 체계, 순수 사상의 왕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왕국은 아무런 외피도 걸치지 않은 채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다. 이 때문에 우리는, 논리학의 내용이 자연과 유한한 정신을 창조하기에 앞서 자신의 영원한 본질 속에 있는 것으로서의 신의 서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_ 게오르크 빌헴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34/174

분명 논리학은 우선 우리가 알고 있고 통찰하는 어떤 것으로써 습득되지만, 아쉽게도 처음에는 그 폭과 깊이, 폭넓은 의미가 빠져 있다. 다른 학문들을 더 깊이 알게 된 후에야 비로소 논리[학]적인 것은 주관의 정신에게서 단지 추상적 보편자가 아니라 특수자들의 풍부함을 포괄하고 있는 보편자로 고양된다. _ 게오르크 빌헴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44/174

질료와 형식을 다함께 갖는 즉자대자(Anundfuersich)로서의 논리학은 처음에는 분명 작은 밀알과도 같이 단순한 추상적인 형식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즉자대자로서 자신에 내재한 부정성으로 인해 변증법적으로, 경험으로 부터 얻어지는 특수성을 아우르는 보편성으로의 고양이 이루어지는 전개과정이 논리학에서 펼쳐질 것이다. 개념 자체에 내재한 모순율에 의해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기 부정은 즉자 Ansich- 대자 Fuersich -즉자대자 Anundfuersich 라는 운동을 일으키고 추상적인 보편적 형식으로부터 경험이 제공하는 특수성있는 질료가 담긴 보다 높은 상태로의 고양이 <논리학>에서 펼쳐질 것으로 생각된다.

헤겔의 <소 小논리학>과 <대 大 논리학>을 읽으려면 아직 바깥 해자를 더 메워야겠지만, 한걸음씩 나가보자...

개념이 스스로를 계속 이끌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은 앞서 언급된 개념 자체에 내재된 부정성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변증법적 계기를 구성한다. _ 게오르크 빌헴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42/174

철학의 욕구는 다음과 같이 더 자세하게 규정될 수 있다. 즉 정신은 느끼고 직관할 때에는 감각적인 것을, 상상할 때에는 상 Bilder을, 무엇인가를 원할 때에는 목적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또한 자신의 현존재와 대상이 갖는 위와 같은 형식들과 대립해 있거나 단순히 구별되어 있으면서, 자신의 최고의 내면성인 사유를 만족시키고 또 그 사유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이른다. 왜냐하면 정신의 원리, 곧 정신의 순수한 자아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는 가운데 사유가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일이 생긴다. _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빌헬름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68/174

사유가 지닌 이 맨 처음의 추상적인 보편성을 고려한다면, 철학은 경험에 힘입어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정확하고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경험과학은 보편적인 규정과 유, 법칙 등을 발견하기에, 현상의 개별성들을 지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사고함으로써 철학의 소재를 제공해왔다. 경험과학들은 위에서 말한 특수자로서의 내용이 철학에 받아들여질 수 있게끔 미리 준비해둔다. _ 게오르크 빌헴름 프리드리히 헤겔, <논리학 서론, 철학백과 서론> , p7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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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어떤 동물도 현존하는 다른 동물에서 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대신 현존 동물들은 지질학적 역사의 (원리적으로는 식별 가능한) 특정 순간에 살았던 공통조상을 갖는다.

추세선이 보여주는 경향은 명확하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종교는 쇠퇴하고 비종교인의 수가 늘고 있다. 침묵의 세대Silent Generation(1928~1945년 출생)는 11퍼센트,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 출생)는 17퍼센트, X 세대(1965~1980년 출생)는 23퍼센트, 전기 밀레니얼 세대(1981~1989년 출생)는 34퍼센트, 후기 밀레니얼 세대(1990~1996년 출생)는 36퍼센트로 감소 폭은 깊고도 넓다.

하느님이 글을 통해 인간에게 직접 뜻을 전했다는 믿음이 약해지는 현상은 개인과 사회의 책임을 중시하게 된 분위기를 반영하는 또 하나의 지표다. 더 나은 세상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도덕을 실천하는 일은 기도와 간청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는 하늘의 천국이 아닌 지구 위에서 천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 기독교에 열정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종교가 허황되다는 확신을 가져서가 아니다. 단지 종교가 그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교에 무관심해졌을 뿐이다." 이런 현상을 일컫는 단어가 바로 ‘무관심apathy’과 ‘유신론theism’을 합성한 ‘유신론에 대한 무관심apatheism’이다.

장기적 추세는 역시 종교와 멀어지고 세속화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 이런 추세가 계속되어 지금껏 삶의 의미를 제시하던 전통적인 토대가 완전히 사라지면, 우리는 앞으로 그것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한동안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유사역사학은 처음부터 결론을 정해놓은 닫힌 논리 구조 속에 있다. ‘우리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오래되어야 하고, 공간적으로 거대해야 한다. 세계인들이 우러러볼 정도로 위대한 역사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역사는 식민사학이요, 매국사학이 된다.’ 이렇게 유사역사학은 건조하게 사실 관계를 따져야 할 역사 연구에 이데올로기적 당위와 윤리성을 뿌려 섞어버린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연구가 불가능하다.
학문의 목적은 객관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지, 쇼비니즘적 욕망과 환상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라는 공산주의 국가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에 대한 강한 충성심이 담보되어야 하는데, 이 강한 충성심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위대한 국가가 있어야 그에 대한 강한 충성심이 따라오는 것이다. 유사역사를 만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교육에 있다. 세계사적 흐름에 따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가족사를 보듯이 한국사를 살피면서 아프게 느껴지는 역사적 순간들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축적하게 된다.

뜻밖에도 이렇게 한국사를 위조하고 비하하려는 근본적인 원인은 일제강점기의 식민사학에 그 뿌리가 있다. 일제의 식민사관은 식민지 조선을 열등하고 무능한 존재로 격하시켰다. 우승열패의 세계에서 조선은 열등했기 때문에 우등한 일제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해방 후에도 조선은 열등한 나라라는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열등하지 않았다면 식민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단순명쾌한 논리가 있었다. 조선은 무려 500년을 존속한 나라임에도 말기의 혼란과 무능을 전 조선에 뒤집어 씌워도 무방했다. 이런 시각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60~70년대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였다

박정희에게 한국사는 "남에게 밀리고 거기에 기대어 살아온 역사"이고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악의 창고 같은 우리의 역사는 차라리 불살라버려야 옳은 것"이었다. 박정희의 역사관은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었다. 타율성론, 당파론, 만선사관(지리적 결정론)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외피는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역사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고 새로운 해석에 의해서 과거의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게끔 변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유사역사가들은 대수롭지 않은 변화라고 빈정거리거나 무시한다.

역사가들은 이런 복잡성을 이해하고 있다. 그 덕분에 역사가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쉽게 단정하지 못하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애매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 반면에 유사역사가들은 딱 잘라서 단정적으로 이야기한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단 한 가지 증거만 가져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진화의 증거가 되는 화석 하나만 가져와라."라고 말하고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는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증거 하나만 대보라."라고 말한다. 이들은 이런 방법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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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병은 환자가 사망한 후 부검으로만 확진할 수 있다. 임상적으로 알츠하이머병을 진단받은 환자 상당수는 실제로는 다양한 원인에 의해 치매에 걸린다. 아직은 초기에 진단할 수 있는 신뢰도 높은 진단법이 없으며, 일단 진단이 내려져도 질병의 진행을 막을 방법이 없다.

우리는 알츠하이머병을 확실하게 예방할 수는 없지만,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할 수는 있다. 또 알츠하이머병의 진행을 완벽히 늦추거나 멈출 수는 없지만, 증상을 잘 조절해서 삶의 질을 최대한 높일 수는 있다.

인류학은 그 초창기부터 피부색이나 키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인류가 각자 다른 환경에서의 선택압에 적응한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인류학자들은 인간에게 나타나는 방대한 다양성이 사실은 아주 작은 유전자 변이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인간은 다르기보다는 서로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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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10-12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 무엇보다 알츠하이머가 무섭더라구요ㅜㅜ 혹시 이번호에 (적어주신 내용 이외의) 예방과 관련한 내용도 다루고 있나요?

겨울호랑이 2022-10-12 22:59   좋아요 1 | URL
아쉽게도 제가 읽은 <스켑틱> 본문에서는 알츠하이머를 치료할 수 있다는 유사의학에 대한 비판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건강한 생활 습관이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다소 원론적인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네요... 다른 호에서 관련 내용이 있으면 주의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

등대지기 2022-10-12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른 의미로 보기는 해야겠네요
호랑이님 덕분에 계간지 월간지 이것저것 꾸준히 챙겨보게 되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2-10-12 23:06   좋아요 0 | URL
^^:) 제가 읽고 있는 권에서는 전체 주제를 ‘사이비‘로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과학이 추구하는 진실과 이를 위한 열린 마음이 통하지 않는 편협한 세계에 대한 경고가 의학부터 역사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등대지기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
 

1990년대에 금융위기를 학습한 한국의 경우 2008년 국가 재무 상태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무역수지는 흑자 진행 중이었다. 또한 유럽과는 달리 한국의 은행들은 미국발 서브프라임 사태와 크게 엮여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결정적으로 1990년대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금융시스템은 국제화되어 있었고 여기에 수출 주도형 국가로서의 재정적 필요와 특히 대금을 회수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자본재의 거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런 두 세계의 갈등은 훗날 NATO 회원 가입을 희망하던 또 다른 동구권 국가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대대적 공격, 그리고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서 러시아의 개입에 대한 과도한 추측 등을 통해 최고조에 이르렀다.

러시아와 한국은 여러 신흥시장국가 중에서 2008년의 금융위기로 가장 고통을 겪었다. 수출 강국이라는 사실 이외에 두 국가는 유럽, 그리고 미국과 금융 측면에서 깊게 연대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이 사실은 두 국가가 겪은 어려움을 설명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러시아와 한국은 단지 수출에서만 어려움을 겪은 것이 아니라 아예 자국 금융권에 대한 자금조달이 "갑자기 중단되는" 경험을 했다.

세계 교역의 흐름을 이끄는 것은 각 국가경제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여러 다국적기업이 협력해서 만들어내는 훨씬 더 광범위한 개념인 이른바 "가치사슬(value chain)"이다.

1944년 체결된 브레턴우즈 합의에 따르면 전 세계 화폐시스템을 떠받치고 있는 달러화는 금과 일정한 교환 비율을 유지해야 했지만 합의는 합의일 뿐이었다. 디플레이션의 우려 속에 더는 이 합의를 지켜나갈 수 없게 된 미국은 결국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나서서 브레턴우즈 체제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역사적 순간이었다.

"서로 맞물리는 구조"에만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거시금융 경제학은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모호하거나 완곡한 표현들을 모두 다 바꿔버렸다. 예컨대 국가경제력의 총계는 금융시스템 안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활동을 보여주는 기업의 대차대조표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민간의 신용창조(private credit creation)" 시의 절대 다수는 견고하게 엮인 일부 거대 기업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들이 바로 신현송이 이야기하는 "서로 맞물리는 구조" 안의 핵심 구성 요소이며 전 세계적으로 보자면 20~30여 개의 은행이 여기에 해당한다. 각 국가의 주요 은행들까지 포함한다면 이런 거대 금융기관이나 업체의 수는 전 세계적으로 대략 100여 개에 이를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소수의 사업체나 기업이 지배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럼에도 금융위기 동안 그리고 그 이후, 위기의 실체와 정부정책의 우선순위가 의미하는 바가 다시 한번 낱낱이 드러났다. 대서양 양안 국가들의 민주 정치는 결국 그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으며 그것이야말로 금융위기를 통해 알려진 참을 수 없이 불쾌한 진실의 실체다.

사람들의 소망과는 달리 세계 경제는 독일식으로 말해 "미텔슈탄트(mittelstand)" 즉 중소기업들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과 몇 천 곳에 불과한 거대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역시 극소수의 자산관리자들이 운용하면서 서로 영향을 미치는 주식보유량이 결정한다.

민주주의의 합리성을 포기하면서 좌파에 대항한다는 냉혹한 견제 전술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지만 우파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고 그런 사실은 영국의 브렉시트와 폴란드, 그리고 헝가리의 사례가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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