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시대 전체를 이끈 시간적 지향의 근본은 ‘효율성’이다. 즉 천연자원의 착취와 소비와 폐기를 최적화하고, 그렇게 해서 자연 자체가 고갈돼도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점점 더 빨리 증진한다는 임무다. 우리 개인의 시간적 지향과 우리 사회의 시간적 박동이 효율성이라는 원칙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지구의 지배적인 종으로 그리고 지금은 자연계의 파멸로 이끌었다.

거버넌스의 본질과 우리가 스스로를 사회적 유기체로 보는 방식에 대해 신선한 사고가 부상하고 있다. 회복력 시대에 거버넌스는 천연자원에 대한 주권에서 지역 생태계에 대한 책임으로 전환된다. 생태 지역 거버넌스는 대륙권과 수권과 대기권을 포함하는 19킬로미터의 지구 생물권, 즉 생명이 펼쳐지는 지구의 권역에 적응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지는 지역 공동체와 함께 훨씬 더 확산될 것이다.

효율성이 일시적 가치라면 회복력은 특정한 조건이다. 효율성을 높이면 종종 회복력이 약화되는 것이 사실인데, 이를 해소할 수단이 되는 시간적 가치는 효율성이 아니라 적응성이다.

효율성의 핵심은 마찰, 즉 경제활동의 속도와 최적화를 늦출 수 있는 중복과 반복을 제거하는 데 있다. 하지만 회복력의 핵심은 적어도 본질적으로는 중복성과 다양성이다.

효율성이 그렇게 현대성의 시간적 동력이 되었다. 효율성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의 이용을 재정립했다. 그 이용에는 효율성이 시간을 절약하고, 축적하고, 구매하고, 연장하며 이렇게 연장된 시간을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에까지 임대한다는 전제가 함축적으로 담겼다.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하면서 인류는 지구의 거대한 권역은 물론이고 화학과 물리학, 생물학을 구성하는 지구의 여타 작용까지 인클로저의 대상으로 삼고 부분적으로 사유화하고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 종은 그렇게 지구에 존재한 그 짧은 기간에 유례없는 효율성이 주도하는 쾌락주의적 열정으로 모든 것을 사로잡고 약탈하고 소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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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생명과 안전을 돌보는 일을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지점에 와 있다. 거시적인 시야로 참사 이후 떠오른 과제 및 질문을 차분히 추리고 벼려보는 동시에 이웃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에 공명하여 서로의 마음을 돌보는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실상 연속적인 현상이라 말할 근거도 여기서 재차 확인된다. 둘 다 ‘전체’의 쇠락을 불가피하다고 보되 다만 그것을 향수 어린 비애감으로 돌아보느냐 아니면 긴 억압에서의 해방으로 경축하느냐 사이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총체성 개념이 결국은 자본주의를 빈틈없이 완결된 전체로 물신화하지 않느냐는 우려에 관해서는, "맑스에게 자본주의의 ‘총체성’은 위기를 불가결한 계기로서 포함하고 (…) 여기에 깔린 전제는 전체란 결코 진짜 전체가 아니라는 것, 전체에 대한 모든 개념은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라 강조한 지젝의 설명이 적실하다.

이행은 예시와 다르게 지금-여기에서 출발하여 심연 같은 간극을 한걸음씩 채워야 하고, 이 과정이 참된 이행이기 위해서는 또한 ‘전체’를 시야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다가갈 ‘도래하기 어려운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만큼이나 다양하게 제출되어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소설에 이르러 돌봄활동 속 젠더 역학이 뚜렷이 폭로되었다. 동시에 돌봄이 여성이나 주변인의 일로 간주된 채 급격히 시장화하고 공공 시스템이 부재하는 오늘날의 상황도 조밀하게 드러났다.인물, 계층, 세대 간 갈등이나 시장 안의 수요자와 제공자 사이의 갈등이 전경화하는 가운데, 돌봄을 둘러싼 ‘가부장×자본’의 문제가 일상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음도 환기시켰다. 그런데 이런 폭로는 돌봄이 시장의 교환체계 속에 고착해 있다는 착시를 만들거나 고된 노동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돌봄활동의 특수성과 정동을 망각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돌봄 혹은 소외된 노동은 시민권을 얻는 동시에 여전히 폄훼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갇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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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의 치세에 이어진 상대적 관용은 편의주의의 결과만이 아니었다. 페르디난트는 종교적 사안에서 중용이 가능하다고 확신했고,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간의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최상의 해법이 서로 경쟁하는 종파 간의 타협이라고 믿은 에라스뮈스와 비슷했다.

1560년대부터 스페인령 신대륙은 대서양적 현상일 뿐 아니라 태평양적 현상이기도 했다. 볼리비아에서 채굴된 은은 이제 (동쪽이 아니라) 아카풀코를 거쳐 서쪽으로, 그러니까 1571년에 스페인이 건설한 필리핀의 마닐라 항구로 운반되어 그곳에서 비단이나 도자기와 교환되었다.

스페인의 신대륙과 구대륙은 서로 달랐다. 전자는 마드리드에서 일률적으로 운영하는 식민 사업의 대상이었고, 후자는 복합 군주국이었다. 다시 말해 스페인의 구대륙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단일 통치자 아래에 모여 있지만, 각 부분은 여전히 개별적인 특권과 제도, 대표단을 보유하는 여러 땅들과 왕국들의 집합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한 통치자는 그런 입술 때문에 "포첸포이들Fotzenpoidl"(대략 "멍청이 얼굴"로 번역할 수 있다)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근친결혼은 정신병, 뇌전증, 사산, 유아 질병의 원인이었다. 1527년과 1661년 사이에 스페인 왕위 혈통으로 태어난 34명의 어린이 가운데 10명이 1세가 되기 전에, 또 17명이 10세가 되기 전에 사망함으로써 유아사망률 80퍼센트를 기록했다(80퍼센트는 당시의 평균 유아 사망률보다 4배 높은 수치였다).

거의 똑같은 이 2점의 그림에서 티치아노는 중앙 유럽계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톨릭 신앙에 취한 서로 다른 접근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자는 평화와 타협이라는 선물을 들고 오는 반면, 후자는 이제 막 레판토에서 승리를 거둔 호전적인 스페인의 칼을 가지고 온다.15

종교적 관용은 일부분 철학적 선택이었다. 그것은 헤르메스주의, 그리고 모든 현상을 단일한 관념의 표현으로 보는 믿음과 조화를 이루었다. 또한 양극단 사이의 "중도"를 지향하는 인문주의적 모색, 그리고 극단적 행위를 삼가고 절제하도록 가르치면서 16세기 후반에 점점 인기를 끈 신新스토아 철학의 지적 태도와도 어울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해외 영토에서는 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했고, 왕의 친림을 가장하는 표현이 물리적 상태를 대체했다. 그곳에서는 이상화된 국왕의 허상을 통해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주권의 내재성과 위엄에 호소하는 도상학적 표현을 통해서 실재와 상상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그런 이미지들은 보이지 않는 왕을 상징했을 뿐만 아니라 대상과 제재를 조형적 요소로 대체했다. 또한 왕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국왕다움이라는 개념에 호소함으로써 왕의 부재를 감추기도 했다.

바로크는 폭군들을 위한 호화로운 배경막으로 전락할 운명이 아니었다. 바로크는 통속적이다. 그러나 통속적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에서 그렇고,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 바로크의 목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크는 르네상스 매너리즘의 과장되고 부자연스러운 양식으로부터 발전했다. 그러나 바로크가 본격적인 추진력을 얻은 계기는 예술이 종교에 복무해야 하고, "천국을 슬쩍 보여줄" 만큼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고 선언한 16세기 중엽의 트리엔트 공의회였다.

바로크는 암호로 말한다. 그러나 감추고 숨기기 위해서 쓰이는 연금술사들의 상징적 언어와 달리 바로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호를 사용한다. 바로크의 핵심은 풍유이고, 풍유는 흔히 상징(인간 조건의 양상이나 태도나 행동이 농축된 그림 문자나 주제)의 형태를 띤다. 하지만 바로크 예술에서 주제는 흔히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는 운문과 결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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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2첩 병풍에는 화성유수가 통솔하는 세 종류의 행사가 한 화면에 동시에 그려졌다. 특정한 날에 실제로 치러진 행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화성유수의 권한과 위용을 가시적으로 잘 표출할 수 있는 주요 임무를 한 화면에 임의적으로 배치하여 구성한 것이다.

관할 지역을 배경으로 그려진 지방관의 행렬은 지방관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해당 지역의 읍격과 도시의 위상을 과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주문자나 화가 모두 행렬도의 오랜 전통에 익숙하지만 화려한 의장이 주는 압도적인 시각적 효과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읍성도 병풍은 초기에는 관아에 설치될 용도로 읍성의 전모를 인물 묘사 없이 그리기 시작했으며 〈화성전도〉가 연폭 읍성도 병풍의 유행에 촉매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용이든 감상이든 읍성도 병풍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점차 관찰사나 수령의 행렬이 첨가되었다.

이렇듯 19세기에는 읍성도 병풍이 반드시 관찰사의 업무 수행을 돕는 자료적 기능에 머물지 않고 감상물로 개인적으로 수장되었다. 그렇다면 관찰사의 위용이 시각화된 그림들이 반드시 관찰사 한 사람을 위해 제작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정할 수 있는 사실이나 행사를 그린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그 외에 관찰사나 수령의 이미지가 포함된 읍성도 병풍은 이상적인 관로官路의 한 과정으로 인식되어 대형 화면이 주는 장식 효과와 함께 개인적인 소장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듯하다.

이처럼 지방 수령으로 재임할 때 이룩한 특정한 공적이 아닌, 부임 그 자체를 기념화의 주제로 삼은 것은 18세기 후반 이후 사가기록화에 나타나는 새로운 특징이다. 배경을 무시하고 오로지 행렬만을 보여주는 반차도 형식을 채택한 것도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조선시대 관료라면 공적인 회사繪事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반차도의 전통에 익숙했을 테니 수령의 권위를 과시하는 데는 화려한 기치와 인물들이 행진하는 부임 행렬이 제일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세기에 정약용이 『목민심서 』에서도 말했듯이 지방관들이 부임 후 실무를 시작하면서 우선으로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화공을 불러 지도[四境圖]를 작성하는 일이었다.19 소속 군현의 지형과 실정을 정확히 반영한 지도를 정당正堂의 벽에 걸어두고 행정에 참조하라는 것이다. 관할 구역의 상세한 지리적·인문적 정보를 담고 있는 대형 읍성도 병풍은 이와 같은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산수 표현에서 특정한 수지법이나 준법이라고 부를 만한 표현의 구사 없이 자유롭게 붓질을 가하는 것도 중앙 화단의 교육과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화사의 특징이다. 원근에 관한 의식이나 공간의 깊이에 대한 관심이 없어 화면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한편 19세기 경화사족들은 기행 탐승을 즐겼고 이를 기념한 기행사경도의 제작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풍조가 있었으며, 동시에 집안에 소장된 가전의 기행사경화첩이나 화병畵屛을 돌려보고 다시 제작함으로써 문벌의식을 표출하는 한 방법으로 삼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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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적은 수의 감염자로 시작한 전염병은 지수함수를 따르며 급격히 확산되다가 K값으로 점진적으로 접근하면서 결국 확산이 멈추게 된다. 전체 인구가 1000만 명이고, 최종적으로 전염병에 걸린 전체 환자 수가 1000명이라면, SI 모형의 K는 1000만 명이 아닌 1000명으로 보는 것이 맞다. 즉, 전체 인구의 부분집합인 K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을 상정하고, 전염병의 확산은 이 집단 안에서 시작해 이 집단의 모든 사람을 전염시키고 멈추게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기상 변화와 같이 초기 조건이 불확실하고 동역학의 비선형성 효과가 큰 문제에서는 미래 예측에 소위 ‘앙상블 예측’의 방법을 이용한다고 한다. 초기 조건의 불확실성을 허용한 여러 다양한 모형을 동시에 이용하고 이들 다양한 예측을 모아 평균적인 예측과 함께 예측 불확실성의 정도도 제시하는 방법이다.

과학의 가치는 확실성에 있지 않다. 확실한 것만 이야기하는 과학보다는, 틀릴 수 있어도 과정과 결과를 함께 공개해 사람들을 의심케 하는 과학이 더 가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행동면역계는 사회적 낙인 및 편견과 관련된다.30-32 감염이 된 사람에 대한 혐오는 물론이고, 기형이 있는 사람, 피부에 모반이 있는 사람에게도 편견이 발생한다.33 뚱뚱한 개체에 대한 혐오도 마찬가지다.34, 35 감염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인지적으로 이해해도, 혐오의 감정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는다.

백신 거부와 같은 반지성주의, 외국인 혐오, 장애인에 대한 편견, 사회문화적 가치를 둘러싼 갈등 등은 마치 다른 원인을 가진 사회적 현상으로 보이지만, 하나의 진화적 기원에서 유래한다. 미생물과의 치열한 군비경쟁을 통해 공고하게 진화한 행동면역계가 현대 사회의 새로운 생태적 환경에서 큰 소리를 내며 파열하고 있다.

면역계는 아마 초기 진핵생물이 진화하면서 같이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미생물이 침입하는 것을 인식하는 패턴 인식 수용체가 나타났다. 패턴 인식 수용체는 원시적인 면역계로 무척추동물이 번성하던 선캄브리아 시대부터 나타났지만, 점점 다양한 병원체가 나타나면서 한계에 부딪혔다. 별로 유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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