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디에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어찌 《파르메니데스》를 무시했겠습니까? 실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우리가 《파르메니데스》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탐구를 한 적이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 견해를 항상 고수했다고 전해집니다. 한번 올바르게 형성되면 불변할 게 확실한 개념들을 소크라테스를 통해 알게 되자, 그는 그러한 개념들을 감각적인 것에 연관시켜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즉 개념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다른 존재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숭고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엄청난 영향입니다. 존재란 없고, 영원한 생성은 영원한 비존재 안에 있습니다.

이데아를 인정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을 야기합니다. 그 반대는 철학에 더욱 곤란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아직 젊을 때 흔히 무용하다고 여겨지고 요설로 일컬어지는 변증술을 익힐 것을 권합니다.

이 변증술적 방법은 훈련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데아론이 회의주의로 와해되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참된 생각을 우연히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물론 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참입니다. 정견을 이성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개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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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실 이전과 관련해 지금까지 확인된 예산 이용·전용은 총 427억4300만원으로 집계됐다. 새로 집행됐거나 집행될 예정인 돈이 ‘이사비 496억원에 이른다. 대부분 예산전용으로 쓰였다. ‘예산전용‘은 정책사업 내 단위사업 간 예산 이동, ‘예산 이용‘은 정책사업 간 예산 이동을 말한다. 국가재정법에 따르면 예산을기관 간 ‘이용하려면 국회 승인을 받아야한다. 반면 ‘예산 전용‘은 기관장의 승인만 얻으면 된다.  - P13

국민의힘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국민의 힘은 자유를 ‘반공‘으로 여기는 전통 지지층과  ‘개인‘으로 이해하는 새 지지층이 섞여 있다. 체제경쟁이 끝난 때 태어난 2030 이 후자이고, 이준석이 대표  주자다.  결과적으로 국민의힘은 그 방향으로 가야 살아남는다고 본다. - P19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고 7차 핵실험이 이뤄질 수도있다는 전망이 커지면서, 북한에 대한 강경 발언 외에는 언급하기가 껄끄럽다는의미다. 이준석 전 대표가 정진석 비상대책위원회를 상대로 낸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이 기각·각하된 것도 이런 분위기를만드는 데 한몫을 했다.
대신 정부·여당은 색깔론을 꺼내드는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북한 이슈는 다시금 보수세력의 고전적 무기로 등장했다. - P19

실제 작업은 2인1조 구조로 흘러가지않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한국노총 윤홍식 SPL노조위원장은 <시사IN>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2인1조 규정은 없었다"
라고 말했다. 작업량이나 작업 형식에 따라 교반, 재료 준비 등 업무 배정을 했을뿐 2명이 1개의 교반기를 담당하는 형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작업반장 B씨가 교반기에서 이탈한 것은 우연 또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상시적인 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계설비에서부터 이미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했다는 점도 지적됐다.  - P23

일본은행은 ‘금융완화‘와 ‘엔 가치 안정‘ 사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작정일까? 금리 차이가 벌어지는 가운데 글로벌 자금이 엔에서 달러로 갈아타는 것은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일본은행이 엔 가치를 지키려면 시장과 싸워야한다. 지난 9월22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
엔 가치가 1달러당 145엔을 넘어서는 순간 일본은행이, 외환보유고에서 꺼낸 달러를 팔아 엔을 사는 외환시장 개입을 감행했다.  - P26

일본은 ‘디플레이션 탈출‘이라는 절박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강국 교수는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표시한다.
"인플레가 임금상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일본 경제의 ‘축소균형‘을 깨기 위해 총대를 메야 한다.
그러나 노조와 시민사회가 임금상승을관철시킬 만큼 강하진 않다. 정치권의 리더십도 약하다. ‘물가가 올랐으니 임금도높아져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확산되어 나가길 기대할 뿐이다." - P27

최근 성장하는 10대 금융 서비스들은이 규제의 틈새에서 방법을 찾았다. 대부분 가상계좌, 선불충전 방식을 활용한다.
정식 계좌가 아니어서 예금자보호법의대상이 아니고 이자도 붙지 않는다. 일별·월별 사용 한도도 작다. 하지만 일상용도로 사용하기에는 성인의 계좌카드와 별다를 바가 없다. 스마트폰 앱으로 이용내역과 잔액을 확인하고, 지문 인식이나 비밀번호 입력 하나로 송금을 하며, 간편결제를 등록해 각종 ‘페이‘로 인터넷 쇼핑이 가능하다. - P32

새로운 금융 세대가 출현했다. 돼지저금통을 안고 은행을 방문하던 ‘첫 금융기억‘은 옛말이다. 이제 자라나는 세대는SNS 메시지를 보내듯, 클릭 몇 번으로 계좌 속 숫자가 오르내리는 경험을 통해 돈의 세계를 배우고 있다. 과거 세대에게 없던 새로운 금융 이해도와 상상력이 이들에게 주어질 순 있을 것이다. 반면 안전한금융 생활에 필수적인 신중함·인내심 같은 미덕은 경험해볼 기회가 줄어들었다.
핀테크 시장은 10대와 점점 더 접점이 늘어날 전망이다.  - P33

매출 분배 방식 탓이다. 엄밀히 말해전액관리제는 ‘월급제‘와는 다르다. 기사가 손님 몇을 태우든 노동시간에 따라 정액을 주는 방식이 아니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은 전액관리제에 대해, ‘미터기에 기록된 운송수입금 전액을 근무 종료당일 회사에 수납할 것‘ ‘일정 금액을 정하여 납부하지 않을 것‘만 규정한다. 수입금 전액 납부와 사납금 폐지까지만 전액관리제의 영역이다. 매출을 어떤 식으로분배할지, 즉 임금을 어떻게 줄지는 따로정하지 않는다. ‘매출액-사납금기사 소득‘이란 오래된 공식이 사라지자 현장에서는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 - P35

그렇다면 육아가 조부모의 건강에 미므크치는 영향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와 그렇지은 조부모의 건강을 비교하면 될까요?
답은 "아니요" 입니다. 왜냐하면 건강한노인이 손주를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픈 노인은 아무래도 애초에 손주를 돌보기가 어렵겠죠. 즉 우리는 ‘육아→건강‘
채널을 알고 싶지만, 그 반대로 ‘건강육아‘ 채널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 P38

"평생을 우리 죄인 줄 알고 살았지. 여기에 내 발로 들어왔으니 내 탓이라고만생각했던 거야. 빠져나갈 수가 없었던 건데, 주위에서도 손가락질 많이 했잖아요.
앞에서도 아니고 뒤에서 수군수군. 사실우리가 낸 방 한칸짜리 월세들로 먹고살았으면서. 그래도 이제는 국가 잘못도 있었다고 인정을 했으니까, 옛날처럼 막 대하지는 않겠죠. ‘그래 봤자 양순이‘라고말할 사람은 할 테지만." - P43

원고 122명을 대리하는 변호인 23명이 소장을 작성하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다. 소장에 적힌 대한민국 정부의 혐의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국가가 기지촌을조성하고 관리·운영한 점. 둘째, 성매매업소 단속을 면제해주고 불법행위를 방치한 점, 셋째,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성병을 관리한 점, 넷째,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조장한 점. - P44

당연하다. ‘K-wave‘의 K는 한국을 의미하는 게 아니니까. 마치 재외교포가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한국인은 아닌것과 비슷하다. 한류는 글로벌한 팬덤이한국 문화를 가져다가 수용하고, 이해하고, 재해석해낸 문화다. - P49

대한민국과 기업들이 바뀌려면 사람을, 생명과 안전을 무엇보다 중시하도록 제도와 인식 변화가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이미 그런 법안은 발의되어 있다. 생명안전기본법에는 안전할 권리와 안전사고 피해자의 권리가 명시되어 있다. 안전권을보장할 주체로서 국가뿐만 아니라 기업의 책무도 규정되어 있다. - P51

팬데믹 3년 차에 접어든 2022년, 한국의초과 사망자가 대폭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사망통계를분석한 결과 예년에 비해 약 4만명이 더많이 숨졌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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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02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사인 구독하는데 정작 글은 여기서 봅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2-11-02 21:29   좋아요 0 | URL
^^:)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저도 벼락치기로 다음호가 배송되기 직전에 겨우 읽고 있답니다 ㅜㅜ
 

독일로 들어온 자금의 일부는 그리스나 스페인의 부유한 기업체들의 자금이기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독일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다시 자국으로 회수해 온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환율 차이로 인한 손실이나 독일 수출업체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자국 통화가치 상승 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일단은 대부분이 통일된 유로화로 거래되었고 또 유럽중앙은행 보증으로 대규모 거래에 대해서는 복잡한 절차 없이 지급결제를 진행할 수 있는 제도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 채무를 전면적으로 재조정하려는 시도가 있으면 유럽중앙은행은 그리스 국채를 적격담보물로 인정해주지 않을 예정이었다. 유로존 채권시장에는 다시 불안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리스와 아일랜드 같은 작은 국가들에서 문제가 시작되었다가 이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같은 규모가 큰 국가들을 포함한 남부 유럽 전체의 위기로 번져가고 있었다. 2007년에 유로존 채권 투자자들은 그리스 국채를 독일 국채 분트와 같은 등급으로 취급했지만 2011년 9월에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대한 CDS 스프레드는 혁명으로 홍역을 앓는 이집트보다도 더 높았다.

만일 유럽에서 자금이 빠져나간다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금융위기가 시작된 이후에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가 악화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달러화 매각 공황상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투자자들은 세계 통화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 있는 미국 재무부 채권 쪽으로 몰려들었다.

오랜 세월 지속되어온 중국의 미국 채권 보유 시대는 끝이 났다. 그렇지만 중국의 보유 규모는 1조 2000억 달러에서 1조 3000억 달러 사이로 안정세를 보였다.

중국의 비판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만 놀라웠던 건 그 비판이 미국 국내에 미친 영향이었다. 8월 5일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미국의 신용등급 평가기관들 중에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가 미국의 등급을 AAA에서 AA+로 끌어내렸다.

미국 정치제도의 약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스탠더드앤드푸어스는 신용등급 평가기관들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보여준 셈이었다. 평가기관들이 수천억 달러 규모의 서브프라임 MBS에 내린 AAA등급은 2008년 금융위기를 발생시킨 요인 중 하나였다. 유로존 위기의 속도를 좌우한 것도 이들의 연속적인 등급 조정이었다. 그런데 이제 미국 예산안에 대해서조차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채권을 매입하겠다는 유럽중앙은행의 의지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시장에서는 많은 은행들과 중개인들이 그저 유럽연합에 안정을 위한 노력만을 호소하지 않았고 수십억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해 승부를 걸었다. 안정화를 가로막고 민주주의와 시장 사이의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건 미래의 유로존 통치와 관련한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유럽중앙은행 사이의 갈등이었다. 문제는 정치와 경제가 이렇게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과 프랑스 측에서는 IMF가 발행하는 특별인출권을 활용해 기금의 상한선을 끌어올리고 그런 다음 차입을 통해 규모를 확장하는 임시방편을 제안했던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그 속셈은 뻔히 들여다보였다. 분데스방크는 직접 관련이 없는 IMF를 이용해 EFSF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이 계획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까지 가세했지만 독일의 고집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메르켈 총리는 만일 이탈리아가 IMF의 지시에 따르는 것에 동의한다면 독일로 돌아가 유로존 지원을 위한 기금의 규모를 늘리는 문제에 대해 의회의 공식 승인을 받아보겠다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메르켈 총리는 특별인출권을 통한 기금의 규모 확대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영국과 유럽연합의 관계가 서로 엇갈리고 있었다. 최소한 영국 보수파들의 입장에서 유럽연합 잔류에 대한 결정이 곧 내려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유로존에서 갈등이 불거진 건 앞서 소개한 2011년 12월 초 유럽연합 본부에서 언급된 두 가지 계획안에 공통적인 부분이 거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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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 크기는 유전적으로 결정될 뿐 아니라 환경에 따라 전 생애에 걸쳐 변화한다. 해마는 스테로이드나 암페타민 복용이나 운동으로 커지기도 하고 우울증, 불안장애, PTSD, 조현병, 치매, 특정 약물의 복용, 노화로 인해 작아지기도 한다.

인간 행동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mechanistic view(예를 들어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는 관점)은 회복적 정의로 우리를 이끈다. 사형이나 장기 징역형 같은 엄중한 징벌에 의존하는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와는 달리 재범률 감소라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회복적 정의는 희생자의 회복과 요구에 초점을 맞춘다. 최근 연구는 순수한 악에 대한 믿음이 집단 간 공격성 증가 및 친사회성 감소와 상관관계가 있고, 순수한 선에 대한 믿음이 집단 간 공격성 감소 및 친사회성 증가와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였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연구는 순수한 악과 자연적 악의 개념을 구분하지 않았다

공감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공감은 우리가 예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잠재적 징표가 아니다. 우리는 성서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같은 촌철살인의 경구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경구들이 원래 일가친척과 특정한 내집단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 후 이는 계속해서 타인, 외집단으로 확장되며 부족주의의 토대를 형성했다.

그는 공감이 내집단에서는 화합을 부르지만, 집단 간에는 적대감을 조성한다고 설명한다. 공감은 편향적이며 같은 민족처럼 마음에 맞거나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공감은 우리를 소수의 개인과 연결할 수 있지만, 다수로 이뤄진 집단으로 확장되지 않는 한정적인 정서다.

원칙적으로 선한 행동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반대로 악한 행동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의식적 존재의 뇌에 미치는 신경학적 결과에 기초해 행동이 가진 선과 악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악이라고 부르는 일이란 단지 선을 포함하는 척도의 극단을 식별하는 것이다. 과거 신학에 묶여 있던 도덕이 인본주의와 여러 운동으로 세속화된 것처럼 악의 개념도 신학과 종교의 틀을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

MBTI를 무시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체액을 측정하는 방법보다 믿을 만하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검사는 시간과 관련해 일관성이 없다. 한 연구에 따르면 첫 검사를 하고 5주 후에 실시한 검사에서 동일한 유형으로 판정받은 피험자는 절반 이하였다.

분명 열여섯 가지 성격 유형은 단순하고 명쾌한 그림을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상황, 나이, 파트너나 동료, 성숙도, 직업의 요구나 사회적 요구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자아에 대한 내적 인식과 상황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행동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내적 자아에 집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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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극장 2 -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 하이데거 극장 2
고명섭 지음 / 한길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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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형이상학에서는 결국 존재자가 존재의 척도이자 목표이고 실현이 된다. 존재자가 존재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자를 전제하고서 이 존재자의 공통 성격으로 존재를 도출하거나, 아니면 그 존재자 전체의 근거이자 원인으로 최고 존재자를 찾거나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가 존재에 대해 우월하다는 것에 입각해 존재자 정체를 사유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 시대 이래로 니체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모든 사유는 형이상학적 사유다." 이것이 이 강의를 해나가는 하이데거의 근본 원칙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95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 1>의 주제가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 ~ 1976) 의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이라면, <하이데거 극장 2>의 주제는 <니체 Nietzsche>다. 영원회귀를 통한 생성으로부터 어떤 고정된 상태로의 수렴, 권력의지라는 무한동력을 통한 변화로부터 정지상태로의 회귀는 예술과 진리에 대한 의지 양 방향으로 나타나고 이들은 서로 대립한다. 초감성적이며 보편적인 세계와 감성적이며 개별적인 세계. 니체에게 진리와 예술, 진(眞)과 미(美)는 대립한다.


 무한한 생성, 무한히 반복되는 권력의지로서 세계 곧 존재자 전체는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 흐름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상, 동일한 상태도 단 한 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반복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다. 세계 곧 존재자 전체가 권력의지이므로, 다시 말해 무한한 생성으로서 힘들의 바다이므로 그 무한한 생성은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무한한 생성은 최종 결과만 보면 결국 동일한 것이 영원히 회귀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동일한 것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무한한 생성은 무한한 생성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는 어떤 '고정된 상태'에 귀착하게 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52


 니체에게 플라톤-기독교적 진리는 가상이고, 예술은 생 자체를 긍정하는 참된 진리다. 그렇지만, 니체에게 진리는 그 자체로 오류이기 때문에 생의 욕구를 통한 새로운 지평에서 참된 세게와 가상 세계 모두 소멸되고 남는 것은 무(無)가 된다. 니체의 인식은 여기에서 머무르게 되고, 하이데거는 이 지점에서 니체를 '최후의 형이상학자'로 비판한다.


  니체에게 '진리를 향한 의지'는 플라톤과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세계', 초감성적인 것을 향한 의지다.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에서는 그 초감성적인 세계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그래서 그 '참된 세계'를 향한 의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세계에 대한 부정이 된다. 그러나 예술은 바로 이 세계, 이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세계, 늘 바뀌고 변하는 이 현실의 세계를 고향으로 삼는다. 니체에게는 바로 이 세계가 본래적이며 유일하게 참된 세계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64


 참된 세계가 제거됨과 동시에 참된 세계를 척도로 하는 가상 세계도 제거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세계는 '가상 세계'가 아니라 그냥 '세계'다. 그러므로 세계 곧 존재자 전체와 대립하는 것은 '참된 세계'가 아니라 '무'일 뿐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가상 세계와 참된 세계의 대립은 '세계'와 '무'의 대립으로 환원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극한의 지점에서 니체가 '호모이오시스 곧 일치로서 정초된 진리'의 최후의 형이상학적 변화 앞에 선다고 말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19


 어떤 이유로 하이데거는 니체를 '최초의 근대인' 페트라르카가 아닌 '최후의 중세인' 단테와 같은 위치에 놓았을까. 하이데거는 니체의 '무'에 '없음'과 함께 '없음'이라는 존재, '무존재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플라톤 이후 니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논의는 존재자를 존재로 정의하는 순간, 또다른 존재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잡힐 듯 빠져나가는 존재의 의미. 니체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비판지점이다. 프로이트의 구도로는 형이상학에서 정의하는 것은 의식으로 드러나는 부분이지, 무의식으로 감춰져 있는 영역을 넘어설 수 없고, 이것이 근대 형이상학의 한계가 된다. 마치,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에 만리장성 넘어 침입해왔다가 유유히 사라진 유목민족처럼, 라인강 건너 슈바르츠발트의 검은 숲속에서 로마 제국의 변경을 위협한 게르만 민족처럼 존재자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고대 중국과 로마 제국의 오랜 고민이었던 것처럼, 형이상학의 오랜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하이데거는 무라는 것이 존재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무가 곧바로 '아무것도 없음' 곧 '단적인 무'를 뜻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의 무에는 '존재'도 들어있다. 다시 말해 무는 '존재'가 현성하는 방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여기에 니체의 형이상학이 '완성된' 니힐리즘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40


 그렇다면, 존재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실존 - 자기를 앞질러 있음-을 통해 새롭게 정의할 수 없는 은폐된 존재의 비밀, 알레테이아가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한다. 실수의 범위 내에서 정의할 수 없는 식에 대해 복소수의 범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숨겨진 허수의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이처럼 알레테이아는 실존적 상황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그 전모가 나타난다.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의 비은폐성 안으로 존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런 비은폐성이야말로 존재 자체다."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의 에포케(epoche)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에포케는 '억제/자제'라는 뜻과 함께 '시대/시기'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이 말을 존재가 자신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그 '역사적 국면'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존재의 에포케는 은닉된 방식으로 형이상학의 국면 국면을 형성한다. 그 형이상학의 마지막 국면이 바로 니힐리즘이 극한에 이르는 시기다. 이 마지막 시기에 주체성의 형이상학은 완성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95


 <하이데거 극장 2>에는 이외에도 하이데거이 후반시기의 삶이 그려진다. 나치와 관련된 이야기 등 여러 흥미있는 이야기들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기로 하고, 후반기 주저 <니체>의 큰 흐름을 대강 살피는 리뷰는 이상으로 갈무리하자...


 하이데거는 '존재 사유'를 이야기한다. '존재 사유'는 존재자만을 사유하는 형이상학에 대립한다. 존재 사유를 통해 인간은 무곤궁성의 곤궁을 '존재 자체가 밖에 머물러 있음'의 운명으로 경험할 수 잇다. 존재 사유는 존재자만을 뒤쫓는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립해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존재 사유는 이 형이상학적 사유를 지팡이로 삼아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존재의 진리가 환히 열리는 그 열린 터에 설 때 모든 존재자는 그 자신을 향해 해방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400



메모들에서 니체 자신이 논구한 가장 중요한 사상이 ‘권력의지‘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다. 하이데거는 이 두 가지 사상이 ‘존재자 전체의 존재‘를 부르는 두 가지 이름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권력의자가 존재자 전체의 존재 성격이라면 영원회귀는 존재자 전체의 존재 방식이라고 해석한다. 존재자 전체를 니체는 ‘세계‘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존재자 전체 곧 세계의 본질이 권력의지이며, 그 세계의 존재 방식이 영원회귀라는 것이다. - P246

이 세계 전체, 다시 말해 우주 만물을 포함하는 존재자 전체는 힘들의 바다다. 그 바다는 크기가 한정돼 있고 시간은 무한히 흐른다. 그 바다 안에서 힘들이 바닷물처럼 출렁거리고 요동치고 흘러 다닌다. 그런데 그렇게 끝없는 흐름과 요동은 그것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과거에 있었던 동일한 상태에 언젠가는 이르게 된다. 그것이 아무리 많은 시간과 세월이 걸린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번은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근본 발상이다. - P252

본질로서 진리는 하나뿐이다. 하나뿐이라는 것은 이 본질로서 진리가 모든 참된 것들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진리는 개별적인 참된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된 것들의 보편적인 본질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보편적 본질로서 진리는 모든 참된 것들에 적용되기 때문에 ‘진리는 불변하며 영원한 것‘이라는 명제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정말로 진리의 본질은 불변하며 영원한가? 하이데거는 본질을 개별적인 것들에 두루 일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사실로부터 ‘본질은 변할 수 없다‘는 명제가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본질이 변한다고 해서 그 본질이 두루 타당하다는 사태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P276

알레테이아 곧 그리스적 의미의 진리는 ‘비은폐성‘ 곧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다.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 곧 진리다. 그러므로 인식이란 그렇게 드러난 존재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가 이미 드러나 있고,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의 본질은 알레테이아이고, 그 알레테이아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식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원적인 진리 개념 곧 ‘비은폐성으로서 알레테이아‘는 곧 망각됐고, 플라톤 이래로 점차로 인식이 진리를 규정하는 척도가 돼 근대에 들어와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것이 되고 말았다. - P308

니체의 ‘가치 사상‘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니체에게 모든 것의 근원은 권력의지다. 그러므로 가치도 권력의지가 설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권력의지는 가치를 설정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원근법적 전망‘ 곧 ‘관점‘(Perspektive)에 있다. 권력의지는 자신을 유지하고 고양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정립한다. 다시 말해 권력의지는 자기 유지와 자기 고양이라는 두 시점에 따라 전망하고 내다보면서 가치를 정립한다... 이 차기와 관련된 것 가운데 하나가 ‘도덕‘이다. 니체에게 도덕은 초감성적인 세계를 척도로 정립하는 가치 평가의 체계, 존재자의 생존 조건과 관련된 가치 평가의 체계를 의미한다. 이 도덕에서 초감성적인 것을 정립하는 모든 형이상학이 발원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 P352

니힐리즘을 본질적으로 사유하려면 형이상학을 떠나 역사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다시 말해 니힐리즘을 존재 역사의 시야에서 사유해야 한다. 존재 자체가 역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니힐리즘이라는 형태로 탈은폐한 것이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니힐리즘의 본질은 인간의 사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사태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존재 자체의 사태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니힐리즘은 인간 본질의 사태이자 그 본질이 나타난 것으로서 인간의 사태가 된다. 이것이 니힐리즘의 존재사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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