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녀 마음속에 끼어들 기회만을 노렸는데, 그것도 그녀 마음에 드는 방법을 통하려고 애썼다. 가령 꽃집이나 보석상 진열장에서 마음에 드는 작은 관목이나 보석을 보면, 그는 곧바로 그것을 오데트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그가 느끼는 기쁨을 그녀도 느낄 것이고, 그러면 그에 대한 그녀의 애정도 더 커질 것이라고 상상하며 그녀가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으므로 자기가 그녀 곁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순간을 더 이상 늦추지 않으려고, 즉시 그 선물을 라페루즈 거리로 보냈다.

자주 돈에 쪼들리는 그녀는 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으면 스완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 그는 그것이 기뻤다. 오데트에게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그가 그녀에 대해 품고 있는 커다란 사랑이나 단지 커다란 영향력에 대한 생각,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기뻤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녀에게 선물 세례를 하고 필요한 것을 도와줌으로써, 그녀 마음에 들기 위해 기진맥진 노력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의 인격이나 지성과는 무관한 이점에 기댈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사랑에 빠져 사랑으로만 산다는 이 쾌락이, 때로는 이 쾌락의 현실성이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비물질적 감각을 즐기는 스완이 지불하는 대가가 그 쾌락의 가치를 더해 주었다.

그의 생각은 잠시 어둠 속을 더듬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알을 닦고 손으로 눈을 비비며 전혀 다른 생각 앞에서 빛을 되찾았다. 즉 다음 달에는 5000프랑 대신 6000프랑이나 7000프랑을 보내 오데트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안겨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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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은 원자력 연구가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잠재적 이용가치가 높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산을 편성하고 연구를 적극 장려했죠. 그런 점에서 보면 태생적으로 원전과 핵무기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데, 1980, 90년대 들어 원전이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저렴한 에너지라는 이유로 점점 원전과 핵무기가 서로 다른 체제라고 여기게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분리가 일어난 것 같아요.

제가 주목했던 것은 그 당시가 일본 자민당의 장기집권 이후 민주당이 집권한 시기라는 점입니다. 사고 이후 토오꾜오전력이 사실을 은폐하고 또 그것을 일본 민주당정권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일본이 민주화되었다고 여겨지던 그 시점에, 민주주의가 국민의 안전과 보호에 실패했지요.

차이는 핵산업·핵무기를 대하는 정치경제적인 맥락에서 온다고 봅니다. 단순히 환경문제로 접근하거나 시민들의 요구 또는 사고로 인한 피해만으로 산업이 없어질 만큼 핵산업은 취약하지 않습니다. 이 강고한 카르텔을 무너뜨리려면 정치의 영역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일본의 정재계가 핵융합 등과 같이 선진국에서 이미 폐기한 핵개발 시설에 반세기 넘게 집착해오고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상황이 현재의 문제와 모두 연결되어 있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떤가요? 불확실성과 위험성에 대한 인식 자체를 부인하고 ‘괴담’이라고 억압합니다. 지난 7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시찰단이 일본을 다녀와 보고서를 냈는데요(「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계획에 대한 검토보고서」,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2023.7.7), 그런데 한국 스스로 실시한 위험평가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토오꾜오전력 보고서가 잘되었다는 내용뿐이에요.

저는 결국 지금 진행되는 오염수 방류는 앞으로 있을 여러 절차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지금보다 농도가 더 높은 고준위 폐기물을 끄집어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액체·기체 핵폐기물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정치적인 타협이나 제도적인 체계가 아닌 과학으로 주장을 하면 다른 모든 의견을 무시할 수 있다는 듯 무기로서 과학을 가져온 거거든요. 하지만 과학은 그 자체로 반박과 반증에 열려 있는 민주주의적인 지식 생산과 소통의 체계입니다. 문제가 너무 정치적일 때 오히려 논쟁에 과학을 끌고 오는데, 저는 이 사태가 그걸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재난에 더욱 큰 관심을 갖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취약성 때문인데, 정부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재난이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따라서 재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자연스럽게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이어지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중시하는데, 이것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끊겨버리는 것은 아닐지 심히 걱정됩니다.

오염수 사건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연대를 통해 우리가 같이 풀어야 되는 문제입니다. 설령 오염수 방류국가가 일본이 아니라 미국, 중국이나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여도 같은 식으로 반대해야 된다는 거죠. 본질은 달라진 게 없으니까요.

에너지, 특히 전력 문제는 기본적으로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입니다. 심지어 재생에너지조차도 일정 규모가 되어야 효율이 높아지고 그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자본이 투입될 수밖에 없어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영역에 제한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기후정치나 녹색정치의 영역이 중요한 겁니다.

후꾸시마 원전사고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된 이야기 하나는 결국 토오꾜오의 전력을 위해 지방이 희생된 것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수도권의 공장들을 돌리기 위해,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지역공동체가 희생된 것이죠.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는 단순히 수산물이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은가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민주주의의 문제, 에너지 전환의 문제, 그리고 거기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나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까지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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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의 전제는 다신주의 종교(예를 들어 헤르메스주의 문학이나 『칼데아의 신탁』에서 나타나는 종교들)와 철학(특히 플라톤주의)의 공통된 과제들, 즉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보장하고 이어서 신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과제였다.

이 세계에는 신성한 영적 실재의 파편들, 즉 지혜가 스스로의 열정으로 인해 신성한 세계에서 잠시 벗어났을 때 ‘밖으로 흘러나온’ 파편들이 감금 상태로 남아 있다. 이러한 파편들은 이어서 하류의 신과 그의 시종들이 창조한 인간의 일부 안에 침적된다. 이들이 바로 영지주의자들이다. 구원 과정은 이들이 자신 안에 내재하는 신성함에 대한 앎을 깨어나게 하고 이를 통해 신의 지체로 복원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레네오에게 물질세계란 신이 원했고 그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힘으로 함께 실현하게 될 선한 창조의 일부를 의미했다. 그런 식으로 이레네오는 구약을 통한 계시와 예수를 통한 계시를 유기적으로 조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정체를 구약을 통해 예수로 이어지는 역동적인 역사 및 인류와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된 운명의 영광스러운 완성과 일치시켰다.

그리스도교의 공인과 급격한 성장은 사실상 세속 문화와 철학의 주요 기관들에 대한 탄압 정치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리스 전통 철학에서 그노시스는, 단순한 지각aisthesis이나 견해doxa와는 다르다는 차원에서, ‘존재에 대한 진정한 앎’을 의미했다. 하지만 2세기에 들어와서 그노시스는 점차적으로 인간의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지능력으로는 취득하기 힘든 초월적인 차원의 지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영지주의 문헌들은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성격이 아닌 신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특징이 이들의 이론에서 하나의 체계적인 신학을 발견하기 힘들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영지주의는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를 선과 악이라는 자율적이고 강렬하며 서로 상반되는 원리들이 전투를 벌이는 일종의 무대로 간주한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악과 어두움은 신성한 힘이 발산되는 곳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했고 신성한 힘의 기원은 하나, 즉 그 자체로 충만한 빛이자 선이었다. 세상이 악한 것은 오로지 신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지주의자에게 근원악은 사고에 의해 발생한 것도, 신의 적도 아니었다. 악은 오히려 신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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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리가 사랑에서 특히 주관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에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이 사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이에 이르게 되면 가장 육체적인 사랑은 그 바탕에 욕망이 없어도 생겨날 수 있다.

오데트 드 크레시의 이미지가 그의 모든 몽상을 흡수해서는, 그 몽상이 그녀의 추억과 더 이상 분리되지만 않는다면 그때 그녀의 육체적인 결함이나 그녀 육체가 다른 여인보다 스완의 취향에 더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육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육체이므로 이제부터는 오로지 그 육체만이 그에게 기쁨과 고뇌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완이 어떤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음악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인상은 오로지 유일하게 음악적이고 영역이 좁은, 다른 어떤 인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었다.

대중이란 서서히 동화된 진부한 예술 작품으로부터 길어 올린 것만이 매력과 우아함과 자연의 형태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독창적인 예술가란 바로 이런 진부함을 벗어 버리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언어에서라면 그런 논리적 관계의 왜곡이 금방 광기를 드러내겠지만, 순수한 음악 작품이란 어떤 논리적인 관계도 그 속에 두지 않기 때문에, 소나타에서 인지되는 광기란 실제로 관찰되는 암캐의 광기나 말의 광기만큼 스완에게는 뭔가 신비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까지 미학적인 방식으로 아름답다고 여겨 오던 것을 한 살아 있는 여인에게 적용해 육체적인 장점으로 변형했고, 그리하여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존재와 결합된 것을 보고는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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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에 따르면 밀랍이 자신이 모든 속성을 갖게 되는 까닭은 그것이 밀랍이라는 본질을 지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현미경 또는 초현미경 수준에서 물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배열되어 다른 방식이 아닌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런 과정이 기본적으로 기계론적이라고 생각한다. - P108

데카르트는 세계의 모든 자연 현상은 바로 현상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실재하는 사물이며 사건이지만 이들이 세계의 기본 실재는 아니며오직 기본 실재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을만들어내는, 배후에 놓인 기본 실재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오직 물체의 연속이라는것이다.  - P115

도덕과 종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듯하며,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완벽하게 선한 사람이 무신론자인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데카르트에게 이런 구별은 모두 인위적인 것이며 따라서 부적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과학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신의 계속되는 창조 활동을 인식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일이다.  - P222

데카르트가 행하려던 바, 곧 인간의 사고가 객관적 진리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려는 어떤 시도도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이런 작업을 위해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도구는 오직 인간의 사고 자체뿐이기 때문이다(p244)... 그리고 바로 이것이 데카르트가 회의주의를 반박하면서 신에게 호소한 이유이기도 하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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