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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먹으려고 살상하는 건 내가 뭐라고 못하죠.
근데 말이야, 내가 밥 주니까 고맙다고 선물을 하는 거라면 그럼 됐어. 진짜로.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놀이터 모래밭에 쪼그리고 앉은 서래, 녹색 플라스틱 양동이로 구덩이를 판다. 자동차 뒤에 숨어 지켜보는 해준 꽤 깊이 판 구덩이에 까마귀를 조심스레 넣고 다시 양동이로 모래를 밀어 메운다. 고양이가 나타나 서래 다리에 몸을 비빈다. 서래가 중국어로 무어라 말하자 스마트폰으로 녹음하는 해준, 까마귀 있던자리에 떨어진 깃털 하나를 본다. 녹음이 제대로 안 될까 봐 전화 든 손을 살짝 내민다. 몸을 가려 주는 자동차 옆으로 슬금슬금 팔만 뻗어 나온다, 붐마이크처럼.

서래
산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해준
(끄덕이며)마침내…………. 저보다 한국어 잘하시네요.
황망하신 중에 죄송합니다만 혹시 패턴 아십니까?!

해준
이포에는 강력 사건이 안 일어나.
원자력 발전소라는 워낙 강력한 위험이 있어서 그런가.

하주
엄만 원전 완전 안전하댔는데.
아빠도 외워, 엄마원전 완전안전.

해준
엄마한텐 서울이나 부산이 훨씬 위험하지

해준
사진 태우고, 내가 녹음한 파일 다 지우고…… 그것도 참 쉬웠겠네요?
좋아하는 ‘느낌만 좀 내면 내가 알아서 다 도와주니까?

서래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해준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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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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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봤다. 사랑이야기지만 마음아프고 슬픈 결말의 영화는 영화 안에 담긴 여러 의미로 여러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영화 감상의 꽃이라 할 미장센(Mise-en-Scene)을 이해하기에는 많은 영화를 보지 않아 한계가 있었음에도 영화가 던져주는 메세지는 울림이 있었다.

[경고] 이하 글에는 영화와 관련된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관람에 방해받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어주세요...

언어를 통한 의식적인 소통의 한계

형사 장해준(박해일)은 기도수의 살인범으로 송서래(탕웨이)를 의심한다. 서래가 내뱉는 ‘마침내‘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에게 해준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이 말을 알고 사용한 것일까? 스스로 한국어가 서툴다고 소개하는 그녀의 말처럼 우연한 단어의 선택이었을까. 서툰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의식적인 소통은 피의자와 형사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스치듯이 느껴지는 감정은 무의식적인 것이다.

점차 상대를 이성으로 느끼는 해준과 이를 알게 된 서래. 잠복근무를 통해 상대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형사의 눈은 어느새 이성을 훔쳐보는 관음증 환자의 눈으로 변해간다. 이들의 감정은 무의식적인 것이지만, 출발은 의식적인 것이었다. 남편과는 달리 품위있는 형사 해준의 배려에 마음에 연 서래. 의식세계에서 이들의 교감은 언어의 장벽으로 제한되기에, 스마트폰의 번역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커져가는 감정을 느낀다. 그렇지만, 서래의 마음을 받아들여 욕망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해준의 ‘의식세계‘ 붕괴를 의미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선 해준과 서래.

불면증에 고통스러워 하는 해준은 잠을 잘 때 입으로만 호흡한다는 진단을 받는다. 평소에는 코로 호흡하는 것이 문제없다는 해준. 무의식적인 호흡은 그에게 평안함을 주지만, 잠을 자기위한 의식적인 호흡은 부자연스러운 고통을 안겨준다. 그런 그에게 무의식으로의 미끄러짐은 자연스러운 생명의 길일지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무의식의 세계는 욕망의 세계다. 작품 속의 시체의 눈은 욕망의 결과들이다. 서래를 소유하고 자 한 첫째 남편, 서래를 이용해 돈을 벌려던 둘째 남편. 무의식 아래 자리한 욕망의 결과 그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작품 중에서 해준은 끊임없이 안약을 넣는다. 안약을 넣기 전 마치 벌레가 기어다니는 시체의 눈과도 같았던 해준의 눈은 안약을 통해 다시 맑아지고, 해준은 멍한 무의식의 상태에서 의식의 세계로 돌아온다. 이런 면에서 해준의 안약을 넣는 행위는 죽지 않으려는 의식의 본능일까. 무의식으로의 미끄러짐은 생명과 사랑을 얻는 것일까. 아니면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죽음의 충동일까. 마치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을 위협하는 지진과도 같은.

해준의 아내 정안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한다.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을 지키는 존재인 아내 정안은 후반부에 떠나고 해준은 이후 무의식의 세계로, 서래에게로 미끄러져간다. 아내인 정안은 원자력 발전소의 안정 뿐 아니라 해준을 무의식의 세계로 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천왕같은 존재였을까.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

모순적인 상황에 놓인 것은 서래도 마찬가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서래는 산을 싫어하지만, 산에서 남편과 헤어지려는 자신의 욕망을 이뤘고, 바다(물)을 좋아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사랑을 얻지 못했고 헤어질 결심을 해야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산을 배경으로 한 전반과 바다를 배경으로 한 후반은 여러모로 대칭된다. 높음과 넓음, 서래를 의심하는 해준의 부하 오수완(고경표)과 서래를 감싸는 여연수(김신영). 이러한 대칭적 세계구도에서 시공간(時空間)을 넘어선 사건(event)은 말그대로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en)이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면...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어요. <헤어질 결심> 中

‘마침내‘와 ‘나는 붕괴되었어요‘. 서래의 ‘마침내‘와 해준의 ‘나는 붕괴되었어요‘는 서로를 향해 나아가면서 서래에 의해 완성된다. 해준의 붕괴를 막기 위해 그녀가 처음에 까마귀를 묻어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묻는다. 쌓아올린 모래벽은 거센 파도에 붕괴되면서 자신 또한 붕괴되고, 자신의 선택으로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해준에게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헤어질 결심>에서 모래사장을 찾아가는 서래의 모습과 그를 쫓는 해준의 모습에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 ~ 1998) 감독의 <카게무샤>의 를 떠올린 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다케다 신겐과 카게무샤 간의 숨박꼭질처럼 보이는 해준과 서래의 엇갈림.

[사진] 영화 <카게무샤> 中 (출처 : https://www.filmedinether.com/features/kagemusha-40-year-anniversary-kurosawa/)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전을 3일만에 세우겠다는 예수의 말처럼, 필멸의 인생 대신 불멸의 영광을 찾겠노라는 아킬레우스의 선택처럼 서래는 해준에게 불멸의 미제사건이 되는 선택을 한다. 이러한 장엄미(美)가 참된(眞)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선택을 오래 전 <인어공주>에서 본 듯한 기억이 난다.

사실, 어제 본 영화라 다소 두서없이 정리된 감이 많고, 놓친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칠게나마 글을 쓰는 것은 눈 앞의 거대한 향유고래가 사라지기 전 부족하더라도 스케치를 남기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어질 결심> 각본은 아직 채 읽지 못했지만, 의식세계의 문자가 하나의 작살이 되어 내 무의식의 이미지를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헤어질 결심>을 다시 만날 약속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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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8-03 19: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중적 의미를 지닌 각종 장치들 덕분에 추리하고 되새김질하는 맛이 있었던것같아요. 겨울호랑이님 ‘의식세계의 문자가 작살이되어...‘마지막 표현 근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08-03 20:02   좋아요 3 | URL
정말 오랫만에 좋은 영화를 봤습니다. 미미님 감사합니다 ^^:)

나와같다면 2022-08-03 20: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헤어질 결심 리뷰 기다렸어요. 다시 한 번 감동에 빠집니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폰은 버려요
깊은 바다에 던져서
아무도 못 찾게

겨울호랑이 2022-08-03 20:18   좋아요 4 | URL
에고... 나와같다면님 읽어주신 것도 감사한데, 기다리셨다니요... 감사합니다. ^^:) 나와같다면님께서 인용한 글을 보니 갑자기 영화 <shape of water>가 생각나네요... 물론 폰과 직접 관련은 없습니다만... 깊은 물과 사랑의 이미지와는 어쩐지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참 여운이 오래 가네요...

얄라알라 2022-08-03 21: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께서는 아카데미아에서 프로페셔널한 글쓰기에 달인이시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리뷰 넘 멋져요. 안약 넣는 행위를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영화를 만약 다시 본다면 겨울호랑이님께서 말씀해주신 부분 화악 들어올 것 같아요. Shape of Water도 연관이 되나보네요^^ 아. 멋진 글이었어요. 영화도 넘 좋지만요

겨울호랑이 2022-08-03 21:17   좋아요 4 | URL
당연하게도 제 리뷰가 마음에 드셨다면, 그것은 좋은 영화의 리뷰이기 때문이고, 제 감상이나 해석에 무리가 있었다면 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다행히 얄라얄라님께서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

단발머리 2022-08-03 22: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숨겨진 의미 해석해 주신 부분도 인상깊었고요, 특히 마지막에 올려주신 사진이 <헤어질 결심>의 일렁이는 파도를 기억나게 해서 참 각별한 느낌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22-08-03 22:15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다만, 단발머리님께서도 느끼셨겠지만, <헤어질 결심>은 보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해석하는 길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 글은 수많은 길 중의 하나라 여겨집니다. 그 길이 이웃분들에게도 <헤어지는 결심>으로 가는 하나의 길로 이해될 수 있었다면, 두서없는 제 리뷰가 작은 의미를 가질 수 있어 다행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최신의 혁신 기술과 그런 기술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매료된다. 그러나 가벼워진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 스티칭, 디지털 모핑 등 ‘제작 후 기술‘로는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전체 그림을 만들어 내는 감독의 선택이다. - 마틴 스코세이지 -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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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에 관한 역설 - 세계의 고전 사상 7-002 (구) 문지 스펙트럼 2
드니 디드로 지음, 주미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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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드로가 보기에 위대한 배우란 무엇보다 자기 감정에서 벗어나 ‘감각의 지속적인 관찰자‘가 되고, 역사나 상상력으로부터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이상적인 모델을 만들어 그것을 제대로 모방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천재적인 자연의 모방자들은 ˝아름다운 상상력과 위대한 판단력과 섬세한 촉각과 매우 확실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가장 덜 감정적인 사람들˝이라고 못박는다.(p138) - 옮긴이 해설-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 1713 ~ 1784)는 <배우에 관한 역설 Paradoxe sur le comedien>에서 위대한 배우를 감정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잘 모방하는 이로 정의한다. 디드로의 정의에 따르면 배우는 작품의 캐릭터(character)를 해석하고, 이의 이데아(idea)를 만들어 이성(reason)적으로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무당(巫堂, shaman)과 여러 면에서 대조된다. 무당이 저승과 이승의 중개자, 신과의 교섭자로서 자신을 비우고 신(神)을 자신의 몸에 태우는 반면, 배우는 자신의 주관을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분석하고 관찰한다. 무당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저승과 이승, 신과 인간을 매개한다면, 디드로의 배우는 의식의 영역에서 캐릭터와 관객을 중개한다는 점에서 이들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감성적인 배우는 자신의 역할 속에서 어떤 소외의 순간들을 한두 번은 겪을 겁니다. 그 순간들이 아름다울수록 더 강력하게, 나머지 순간들과 불협화음을 이루지요.(p113)... 감성적인 것과 지각한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는 영혼에 속하는 일이고, 다른 것은 판단에 속하는 일이거든요...어떤 위대한 역할의 모든 범위를 포용하는 것, 거기서 명암과 부드러움과 허약함을 조정하는 것, 고요한 곳과 격발된 곳에서 똑같이 보이고, 세부 속에서 다양하고, 전체 속에서 하나되고 조화롭고, 시인의 재담과 변덕들을 구원하는 데까지 갈 만한 낭독으로 지지되는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는 것은 차가운 머리와 깊은 판단력과 섬세한 취향과 각고의 연구와 오랜 경험과 보기 드문 기억력의 작업인 것입니다.(p117)

감정을 느끼지 않는 조정자로서의 배우. 디드로가 말한 이러하 덕목을 갖춘 배우가 정말 위대한 배우일까. 계몽시대에 인간의 이성(理性)에 대한 절대 믿음 속에 태어난 이러한 예술관이 오늘날에도 유효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된다. <배우에 관한 역설>에서는 감정과 이성을 분리해서 어느 하나만을 취하는 것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길 때는 그들이 격분했을 때가 아니라 그 격분을 잘 연기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여러 감정들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 어떤 때는 화내는 체하고, 어떤 때는 두려운 체하며, 동정하는 척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여러 감정들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 입니다.(p131)

그렇지만, 이들을 서로 분리할 수 있을까. 냉철한 이성으로 작품 전체를 내려다보고, 뜨거운 감성으로 순간을 연기해서 관객들을 몰입시켤 수 있어야 진정 위대한 배우라 불릴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우에 관한 역설>에 나타난 이성의 강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이성의 시대인 계몽시대(Age of Enlightenment) 지식인들의 예술관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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