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마리아 신부의 생각 -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바이블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지음, 박정훈 옮김, 정태인 감수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협동조합(KPIA)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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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하층 계급과 노동계급, 한마디로 민중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잘 알고 있다. 이런 감정은 자유라고 불리는 특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런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상황에서도 이들의 열망은 안타깝게도 실현될 수 없다. 지식에 불가결의 정보와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민중, 자기 권리를 인식하고 있는 민중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자유를 행사할 줄 모른 채 언제나 미성년자처럼 살아간다면 자유를 보유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따라서 민중은 늘 교육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문맹과 무지의 길을 따라가면 오직 노예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우리가 아는 형태가 아닌 새로운 형태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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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3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3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9-23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민중은 늘 교육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가장 아깝지 않은 투자가 교육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9-23 13:43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동시에 아무리 해도 부족한, 끝없는 투자가 교육투자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농협 계통조직, 집권여당, 정부가 농정을 둘러싸고 맺은 삼위일체적 결탁구조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장기간에 걸쳐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저번에 농가조합원을 독점적으로 조직한 계통농협은 국정선거 등에서 자민당을 지지함으로써 안정적인 정권재생산에 기여했다. 집권당은 그 대가로 쌀값을 위시한 주요 농산물의 가격인상이나 각종 농업 보조금 배분 등을 통해 계통농협을 경유하여 농업/농촌부문으로 물질적 이익을 유도했다. 농정 당국도 여기에 공조하여 농업 관련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각종 인허가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영향력을 확대했다.(p12)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 中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에서 저자 이향철은 '농헙 계통 조직 - 정부(농림수산성) - 자민당'의 철의 트라이앵글 구조를 통해 서로에게 이익을 주었는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일본 농촌사회와 정치권의 결탁은 인클로우저(Enclosure)를 통한 농업의 피폐화를 통한 도시화/산업화를 이룬 유럽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기져왔고, 일본 농촌은 급속한 붕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 농촌사회가 보여준 양상이 유럽과 달랐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마을에서 인클로우저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이용해서 겨우 먹고 살던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를 파괴하였다... 인클로우저는 재산소유자들과 법률가들의 의회가 제정한 재산에 관한 공정한 규칙과 법에 따라 행해진 계급적 강탈행위에 다름아닌 것이었다.(p301)... 실로, 인클로우저는 농업적 생산수단에 대한 인간의 관습적인 관례들을 파괴한 수백년에 걸친 긴 과정의 정점이었다. 그것은 그 앞 시대를 보거나 혹은 뒤의 시대와 비교하더라도 잉글랜드 농민사회에 있는 전통적인 요소들의 파괴를 뜻하기 때문에 엄청난 사회적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p303) <영국노동계급의 형성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上> 中

 

17세기 말에서 시작되어 18세기까지 진행된 토지 통합은 중세 말의 통합과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도 농촌 인구의 감소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가지 원인은 공통적이었다해도 사회적 양상은 매우 달랐다. 중세의 에피소드는 토지로의 황급한 후퇴를 동반했다. 근대의 에피소드는 토지로의 황급한 후퇴를 동반했다. 근대의 에피소드는 도시 귀족들의 행복한 상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들의 정복은 확고한 것이었다.(p397) <랑그도크의 농민들 Les Paysans de Languedoc 2> 中


  그것은 일본 농촌사회가 정치세력과 협상을 할만큼 협상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전후 지주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농촌조직은 세계 공황 직후에는 보다 조직화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후에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농회를 매개로 지주의 지역적 연합체인 '지주회'를 만들고, 그 지도하에 전통사회의 주민통제조적인 오인조(五人組)의 계보를 잇는 농가소조합(農家小組合)을 마을마다 조직하여 연대책임 아래 품종개량, 시비(施肥)/재배관리, 포장 개선 등을 상호 감시하에 추진하게 했다..(p36)... 세계공황이 일본농촌을 휩쓸고 지나간 뒤 농촌사회를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산업조합-농가소조합은 당시 '파시즘'으로 불렸던 농촌사회경제의 통제/재편을 위한 말단기관으로 자리매김되었다.(p87)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 中


 1947년 농업협동조합법의 제정으로 새로이 출범한 일본농업협동조합은 조직과 사업에서 세계 협동조합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00%에 가까운 농가조직률, 조합원의 생산활동 및 경제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에 관련된 사업의 종합적인 경영, 시정촌(市町村) - 현 - 전국 단계로 쌓아올린 정연한 피라미드형 계통조직, 그리고 체제 내 압력단체로서의 정치력 등과 같은 특징이 그러하다.(p88)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 中


 일찍이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 1854 ~ 1938)는 <농촌문제 Die Agrarfrage>에서 농촌에서 협동조합이 성장하기 어려움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협동조합(농협 農協)은 아래에서부터가 아닌 위로부터 만들어졌고, 결과로 정치협상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러한 협상력의 차이가 결과적으로 일본 농촌 사회를 오랫동안 유지시켜주는 힘의 원천이 된다.


 농민보다 협동조합적 조직의 전제조건이 약하게 발달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농민의 노동 및 생활 조건이 그를 고립시키고 좁은 지평에 한정하며, 협동조합적 자치가 요구하는 여가를 앗아간다.  무지와 아울러 정치적 부자유가 농민 복지의 사악한 침해 요인으로 나타난다. 농민이 협동조합을 결속하기 위해 움직이기에는, 가부장 체제의 전통이 아직 불식되지 않고 '권좌와 제단'의 버팀목이 아직 건재한 곳만큼 어려운 곳은 없다. <농촌문제> 中


 그리고, 이렇게 조직화된 조직은 미군정기와 연합국 지배가 끝날 때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 같은 시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일본의 공업화는 일본 농업의 생산성 증대에 기여했다. 농업에 필요한 비료와 농약을 공급받았던 농촌은 급속한 붕괴를 피하는 대신 도시지역에 주식인 쌀을 반대급부로 제공하는데, 이렇게 벼(쌀)농사로의 특화된 농촌의 모습 역시 유럽의 농촌 발전과는 사뭇 달랐다.


 1960년대 일본농업은 중화학공업화에 힘입어 화학비료와 농약을 집중적으로 투입하고 농업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등 명실 공히 '근대화'의 단계에 들어섰다.... 이 시기에 고도성장에 의한 생활수준 개선으로 쌀 소비량이 증가했지만 공급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고 다른 농산물 생산에 비해 쌀 생산이 유리했던 탓도 있어 전국적으로 벼농사로의 특화와 집약화가 이루어졌다.(p242)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 中

 

 운송이 저렴해지고 무역정책적 장애가 폐지되면서 이미 16세기에서도 관찰될 수 있었던 유럽 내부의 지역적 분화가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농업적 분업으로 확장되었다... 유럽 대륙의 북서쪽 귀퉁이는 이제 '세계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이 '도시권역'의 주위에 집약적 농업지(가공 및 원예농업지)와 인전한 동부 유럽의 농업 권역이, 끝으로 더욱 조방적으로 경영되는 해외 농업지대의 띠가 둘러쳐지게 되었다. 마지막 두 지대 사이에 유럽의 주변적 농업지역이 놓여있었다... 집약적 농업지대는 공업중심지에 축산물과 원예작물을 공급했고, 조방적 농업지대는 공업지역에 대해서 곡물, 농업에서 산출되는 공업원료, 그리고 스텝농업의 생산물을 공급하게 되었다.(p564) <농업위기와 농업경기 Eine Geschichte der Land und Emahrungswirtschaft Mitteleuropas seit dem hohen Mittelalter> 中


 발달된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 농촌 지역의 업종분화가 이루어진 유럽과는 달리 일본 농촌은 벼농사로의 집중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작물의 집중화는 규모의 경제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도시의 수요를 충족함과 동시에 정치권의 제도적 뒷받침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당시 집권세력인 일본 자민당(自民黨)은 이러한 필요와 자신의 요구를 잘 알고 있었다. 


 1958년 농민조합은 전국조직인 전일본농민조합연합회(全日農)을 결성하고 농협 계통조직이 주도하는 농정운동으로부터 이탈했다. 이를 전후해 자민당은 미가심의회 자문안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고 추곡수매가 결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나아가 농협 계통조직을 통해 각종 농업보조금을 배분함으로써 농업/농촌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입지를 굳혔다.(p270)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 中


 농업인구의 급격한 감소가 전통적인 보수 지지기반을 급격히 붕괴시킬 것이라는 보수층의 일반적인 우려와는 달리, 농가 수가 그다지 감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들어 농협 계통조직은 "농가조합원의 강력한 집표력"을 바탕으로 집권보수당에 추곡수매가로 대표되는 농업보호/농협육성정책을 요구했다. 자민당도 여기에 호응하여 농산물 가격 지지를 통해 농가소득을 보장하고 각종 공공정책을 통해 농촌지역 선거구에 물질적 이익을 유도했다. 농협 계통조직과 집권자민당 사이에 이른바 이익교환관계가 형성된 것이다.(p283)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 中 


 1960년대와 70년대의 농촌과 자민당의 밀월관계는 추곡수매권을 통한 농촌이익 보장과 농촌 유권자의 지지를 맞교환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다. 일본이 내각제국가임과 자민당이 55년 독재정당임을 고려한다면, 저자가 말한 철의 트라이앵글의 주체는 농촌과 자민당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 이들의 이러한 밀월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1980년대에 일본농정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단순히 통상마찰과 농산물 무역자유화 요구와 같은 외압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도성장 파탄에 의한 일본 자본주의의 성격 변화, 도농/농공 간 인구대이동에 따른 농촌의 정치적 위상 저하, 농업이익의 분열 등 농업보호의 존립기반이 붕괴되었다는 사회구조적 문제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자민당은 각종 이익유도정책의 대상을 기존의 농업/농촌 부문에서 공업/도시 부문으로 돌려 도시지역의 전문직/관리직/판매직 등 이른바 '신중간 대중계층'을 적극적으로 파고들면서 포괄정당(catch-all pay)으로 면모를 일신해갔다.(p308)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 中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농협 계통조직과 집권보수당 모두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온 유력한 수단을 동시에 상실했다. 그에 따라 자민당은 추곡수매가 인상이나 각종 공공정책을 통해 농업/농촌 부문에 물질적 이익을 유도하기 어렵게 되었다. 농협 계통기관 역시 농가구성원의 정치적 의사를 결집하여 집권보수당을 지원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익유도 내지 이익교환정치의 지속 여부가 불투명해진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하나로 결집시켜주던 추곡수매가 인상운동이 쌀 생산 과잉 및 재고 누적으로 기능부전에 빠졌기 때문이었다.(p324)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 中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대외적으로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체제 아래에서 농업시장 개방에 관한 압력을 거세게 받고 있었으며, 집권 자민당은 과거와 같이 농촌을 지켜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여기에, 소선거구제로의 제도 개편은 농촌 유권자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면서, 결국 농촌 유권자들과 자민당의 유대는 끝나게 된다. 이러한 정치연결의 파탄은 1993년 처음으로 자민당 정권이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렇지만, 몇 차례 다른 정당에게 정권을 넘겨줬지만, 대부분의 기간을 거대지배정당의 자리를 놓지 않은 자민당은 이미 전국정당으로 변신을 한 상태다. 최근 미국과 무역협상에서 옥수수를 대량으로 수입해서 일본 농촌의 부담을 늘리는 일본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자민당의 농촌 우위는 옛날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도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본인들의 정치의식을 고려한다면......



 농가조합원의 이해 대립에 따른 자민당 농림의원의 이해 대립 및 분열, 선거구제 개편에 따른 자민당의 농협 의존도 감소, 그리고 정치원의 정책 주도에 따른 관료기구(농림수산성)의 발언권 약화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기존의 농업정치구조를 와해시키는 데 일조했다... 농헙 계통 조직 - 농림수산성 - 자민당의 농정 트라이앵글 구조가 급격한 사회변동에도 불구하고 장기에 걸쳐 유지되고 작동되어 온 것은 중선거구제라는 일본 특유의 선거구제에 힘입은 바가 컸다.. 중선거구제 하에서는 어떤 정당이든 집권당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선 각 선거구에 평균 2명 이상의 후보자를 옹립하여 의원정수의 과반수 당선자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p389)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 中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은 이처럼 농촌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일본 농촌과 일본 보수정당인 자민당의 긴밀한 관계와 결별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 안에서 일본인의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급격한 변화를 싫어하고 카이젠(改善)을 추구하는 일본사회의 특징이 그것이다. 농촌 사회의 급격한 붕괴 대신 지속 유지를 택한 일본의 모습은 전면적인 개편 대신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그들의 산업 역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우리 경제발전사는 보다 극적인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BPR의 특징을 잘 담고 있다 여겨진다.  개인적으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본과의 경제전쟁 안에서 은 '카이젠 VS BPR'의 경영이론간 대리전 성격도 발견하게 된다.

 

 일본에서 가이젠은 문화의 일부로 정착된 아주 오래된 개념이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이 용어는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 또는 향상을 의미한다. 경영의 관점에서 가이젠이란 일종의 철학에 가깝다. 가이젠 사고방식에 따르면, 기업은 지속적인 개선 과정을 통해 효율성을 증대하고자 노력해야 한다.(p304) <경영의 책> 中


 가이젠과 전혀 다른 접근법으로 '업무 프로세스 재설계(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 : BPR)'이 있다. BPR은 자주 있지는 않지만 상당한 거액이 소요되는 투자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생산성 제고, 단가 감소, 제품 품질 개선 등의 측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 실시된다. BPR을 택한 기업의 목표는 수시로 조금씩 개선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매 5년 정도마다 전사적 생산 프로세스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하여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이다.(p308) <경영의 책> 中


 잠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는데,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에서 짚고 있는 문제는 우리문제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우리 역시 일본의 농협과 같은 조직(이름마저 같은)을 가지고 있다. 일본 농협의 문제. 이것은 우리나라 농업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일본 농촌 문제는 남의 문제로 치부할 성격의 사안이 아니다.


 "농업이 망하면 농협이 흥한다."는 냉소적 표현이 상징하듯이, 농촌협동조합은 1980년대까지 농업단체직원 연금제도 실현, 쌀값 인상 및 식량관리제도 유지, 비료수습 안정 및 식물방역법, 세금감면, 농업보조금 확충, 농산물시장개방저지 등 오로지 계통조직과 사업을 방어하는 과제에만 집중한 데서도 그대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농협 계통조직의 존재형태는 농가경제가 영세 규모의 소상품 생산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가운데 그대로 독과점기업이 지배하는 고도로 발달된 시장기구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의 반영이었다.(p253) <일본 보수정치의 농촌사회적 기원> 中


 다른 한편으로 우리 보수 정치의 역사는 일본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온듯한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며 이상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근현대시기에 일본은 우리보다 산업화면에서 분명 앞서왔고, 현재도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강국(强國)임은 분명하다. 비록, 일본이 앞으로도 강국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서간 일본의 모습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여기에는 전제가 따라붙는다. 우리에게 일본의 존재는 전위와 전초에 한정되어야 한다. 앞에 경계부대가 후속 주력부대에게 교훈을 주듯, 일본은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이어야 하지, 우리의 형님국가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주력은 우리 자신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군(軍)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 보존이며 결국 군의 안전일 것이다. 따라서 군은 특별한 어려움 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하며 특별한 어려움 없이 하나의 통일체로 통합하여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전위와 전초는 전술과 전략의 실이 섞여 짜여진 방책의 범주에 속한다. 한편으로 전위와 전초는 전투를 구체화하고 전술적 계획의 실현을 보장하며 주력부대로부터 다소 먼 거리에 배치되어 있다.(p240)... 이 추진부대의 임무는 적을 관측하고 적 접근을 지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추진부대의 전방에서 적이 전체 전투력을 조기에 전개하도록 강요해야 하고 동시에 공격 계획을 보다 분명하게 노출시키도록 강요해야 할 것이다.(p241) <전쟁론 Vom Kriege>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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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률을 전공한 사람들은 직업상 일정한 질서의 습관, 형식을 좋아하는 취향 및 조리정연한 사고를 좋아하는 일종의 본능적 성향을 얻는다. 이런 자세는 당연하게 그들을 대중의 혁명정신과 무사려한 감정에 적대적으로 만든다. 자신들의 전공에서 얻는 법률가들의 특별한 지식 때문에 그들에게는 사회에서 특권적 지위가 부여된다. 그리고 그들은 지식의 측면에서 일종의 특권집단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그들의 특권의식은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법률가들의 성격에는 귀족들의 습관과 취향의 일부가 보일 것이다.(p353) <미국의 민주주의 1> 中


 토크빌(Alexis Charles Henri Clerel, 1805 ~ 1859)는 <미국의 민주주의 1 De la democratie en Amerique>에서 법률가들이 전문지식을 활용하여 특권집단을 형성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일반 대중과 다르다는 엘리트 의식은 오늘날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셈이다. 


 이러한 엘리트들이 구성하는 권력기관인 사법부(司法府)의 현재 문제점은 검찰의 권력집중 해소와 사법부의 독립성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검찰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한홍구 교수의 <사법부>를 참고해 보자.


  군사독재 시절 "권력의 시녀"였던 검찰은 민주화 이후에는 시녀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로 등장했다. 민주화로 안기부와 군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청와대의 군력은 임기라는 덫에 걸려 힘이 약해진 반면, 검찰은 '삼성'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는 막강한 권력으로 부상했다.... 과거 안기부가 기세등등하던 시절에 아무리 검찰이 보기 흉하게 찌그러졌었다 해도 이렇게까지 썩은 것은 아니었다. 외부의 견제와 감시가 일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민주화로 큰 권한을 누리게 된 뒤 검찰은 자정기능을 수립하지 못했고, 민주정권은 검찰개혁에도 문민통제에도 모두 실패했다.(p398) <사법부> 中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듯 검찰 권력의 과도한 집중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수사권 조정 문제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설치가 필수적이라 여겨진다. 이미 200여년 전 미국에서 보완되고 있는 고위공직자에 대한 견제가 우리에게 없는 것은 아쉽게 느껴진다.


 아메리카와 같은 자유 국가에서 모든 시민은 일반법원에 관리를 고발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판사들은 공직자들을 유죄판결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말할 필요도 없다. 행정부의 관리들이 법률을 어길 경우 그들을 처벌하도록 사법부에 부여된 권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예외적인 특권으로 간주할 수 없다.(p167) <미국의 민주주의 1> 中


 여기에 더해 행정부에 의한 사법부 지배가 이루어져 온것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라 생각된다. 때문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하루라도 빨리 사법부의 개혁을 바라는 것은 우리 대다수의 열망일 것이다.


 합중국의 대법원은 그 나라의 유일한 법원이다. 국가권력에서 나온 법률과 조약에 따라 발생하는 모든 사건, 해사에 관한 모든 사건, 그리고 전반적으로 국제법에 관한 모든 사항에 대해서 대법원은 권한을 미친다.(p216)... 제한된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은 잘못을 저질러도 국가에 엄청난 위난을 일으키지 않는다. 의회는 잘못 판단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연방정부를 파멸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법원이 신중하지 못하거나 나쁜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합중국은 무정부상태나 내란에 휩쓸려 들어갈 것이다... 연방국가들에서는 특히 사법권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을 살핀 바 있다... 그러나 어느 권력이 강화될 필요가 있으면 있을수록 그 권력은 더욱 광범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권력의 남용으로 일어날 위험성은 그 권력의 독립성과 힘 때문에 더욱 높아진다.(p217) <미국의 민주주의 1> 中


 사법부에 대한 "중정(중앙정보부)-안기부"의 부당한 압력과 개입 문제를 조사하면서 조금 당혹스러웠던 부분은 중정- 안기부가 그 험한 시절에도 시국 사건과 관련해 현직 법관을 잡아가거나 고문을 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차라리 중정-안기부가 법관들을 잡아다 협박하고 고문해서 사법부가 저 지경이 되었다는 덜 슬펐을 것이다.(p21)... 사법부의 불행했던 과거는 결코 외압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p382) <사법부> 中


 2019년 9월 9일. 조국 후보자가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임명까지 과정이 험난했었고, 한동안 거센 임명 후폭풍이 예상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 과제인 사법부 개혁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잘 풀어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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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9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9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9-09-09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력의 시녀가 권력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이번 조국 관련 사태를 보면서 조국 그 자체 보다는 검찰이 자신의 입맛에 따라 자신의 상관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검찰 권력의 심각함을 느낍니다.

겨울호랑이 2019-09-09 22:40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우향님 말씀처럼 권력에서 중요한 것은 계급이 아니라 실권임을 이번 검찰 쿠데타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과거 5.16과 12.12 당시 쿠데타의 주역들이 사단장(소장)임을 생각하면 일선 담당자들의 역할이 중요함을 느낍니다. 진정한 변화가 뿌리내리려면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요...

북다이제스터 2019-09-10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법학을 전공한 사람은 질서의 습관이 있다는 토크빌 말에 공감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무질서가 필요한데 말이죠. ^^

겨울호랑이 2019-09-10 06:09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토크빌은 법률가들이 일의 특성상 일관성을 중시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듯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법률가들은 정권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요‘가 되니 문제라 여겨집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오늘날까지도 반복 인용되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1919년 출간)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좌절된 평화라는 개념을 통해 독일의 입장을 지지했다... 알자스 지방을 프랑스에 돌려주는 문제에 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고수해 프랑스 대표단을 충격에 빠뜨렸다. 클레망소 총리의 오른팔인 프랑스 외교관 앙드레 카르디외를 기준에서 보면, 협상에 임하는 케인스의 생각은 패전국의 입장에 가까웠다.(p1)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 中


 일반적으로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은 실패한 국제 조약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패전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승전국의 요구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다는 것이 조약의 대강 내용인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2019년 8월호는 베르사유 조약 100주년에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 ~ 1946)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의 내용을 통해 베르사유 조약을 재평가한다. 베르사유 조약은 과연 기념할 수 없는 조약일까?


 케인스는 프로이센식의 군사적 계급주의, 제국주의적 야망에 취한 지식인 계급, 그리고 산업계가 이끄는 독일 경제에 매혹됐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케인스는 독일에 관대한 평화조약을 지지했다. 그는 유럽에 다시금 번영을 가져다줄 강국은 독일이 유일하다고 봤던 것이다. 반면 프랑스가 고수한 입장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의 강력한 반(反) 프랑스적 정서에 기인한 것이었다. 영국은 1918년 1차 대전에서 승리를 거뒀음에도, 평화협정 시 독일을 상대로 '가혹한' 배상을 요구하는 데 반대했다. 이는 가혹한 평화협정이 이뤄질 경우 프랑스가 최강국이 될 것을 우려한 데 따른 것이었다.(p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 中


[사진] 케인즈 (출처 : https://fee.org/articles/three-times-keynes-was-not-a-keynesia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알랭 가리구, 장퐁 기샤르 명예교수는 베르사유 조약에 부정적인 케인즈의 입장은 공정하지 않다. 반(反) 프랑스주의, 반(反) 유대주의 성향을 가진 케인스가 전후 대륙의 강자로 프랑스가 떠오를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 저자들의 해석이다. 이들에 따르면 케인즈는 개인의 질투와 편견에 사로잡혀 유럽정치를 그르친 어리석은 인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케인즈는 동의할 것인가. 케인즈는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반론은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통해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밖에 없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평화 예산은 기존 정책의 대폭적인 수정 없이는 균형을 맞출 길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이 나라들의 입장은 거의 절망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이 나라들은 국가 파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적국으로부터 받을 거액의 배상금에 대한 기대에 의해서만 숨겨질 수 있을 뿐이었다.(p146)... 클레망소의 목표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독일을 무력화시키고 파괴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배상에 대해서는 언제나 약간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가 독일을 예전처럼 무역 활동을 거대하게 벌일 수 있는 상태로 남겨놓을 뜻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p147)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프랑스 정책의 솔직한 목적, 즉 독일 인구를 제한하고 독일 경제 체계를 악화시키는 것이 윌슨 대통령을 위해 자유와 국제적 평등이라는 장엄한 언어로 포장되었다.(p65)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독일을 한 세대 동안 예속의 지위로 전락시키거나, 수백 만 명의 인간에게 모욕을 안기거나, 독일이라는 국가 전체의 행복을 몽땅 박탈하는 정책은 혐오스럽기도 하고 가증스럽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정책을 정의의 이름으로 설교한다. 인류 역사의 중대한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국가들의 뒤엉킨 운명의 전개 속에서, 정의는 절대로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p206)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케인즈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서 배상금을 통해 재정위기를 넘기려는 의도와 함께 독일경제를 무너뜨리려는 프랑스의 의도를 고발한다. 실제로 프랑스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Deutsch-Franzosischer Krieg)의 상처 - 잃어버린 알사스-로렌( Alsace-Lorrain) 지방, 막대한 배상금 약 50억 프랑 - 를 잊지않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프랑스에게 반세기만에 찾아온 통쾌한 복수의 순간을 의미했고, 실제로 프랑스는 전후 배상금의 50%에 해당하는 청구권이 주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케인즈의 이러한 지적은 일리가 있다.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 것이 배상 문제였다. 배상의 원칙은 독일이 윌슨 14개 항목을 수락함으로써 성립되었고 전쟁의 책임이 독일에 있다는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파리 회의에서는 구체적인 배상금의 확정에 관해서는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p626)... 1920년 7월 스파spa 회의에서 배상금을 받는 비율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즉 프랑스 52%, 영국 22%, 이탈리아 10%, 벨기에 8%, 그리스/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가 합해서 6.5% , 그리고 일본/포르투갈이 각각 0.75%였다....  1921년 4월 파리 회의에서 독일이 지불해야 할 배상금 총액을 1,320억 금 마르크로 결정하였다. 또 이 회의에서는 매년 20억 금 마르크의 지불과 독일 수출액의 26%를 징수키로 결정하였다.(p641) <세계외교사> 中


 그렇지만, <디플로마티크>에서는 베르사유 체제가 패전국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편다. 전후 세계대공황은 미국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며, 독일은 1939년 배상금 지불 중지 이전 재무장을 할 수 있었기에 베르사유 조약이 제2차 세계대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무리하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베르사유 체제와 무관하게 독일은 이미 다음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베르사유 조약이 케인즈의 뜻대로 실행됐다면 나치즘의 급부상을 피할 수 있었을까? 조약 협정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결국 배상금 지불을 중단했으며 이전의 경제적 번영을 되찾았다.(p5)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 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다분히 프랑스의 입장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바라본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戰場)이 되고 전체 프랑스 청년의 1/3이 부상 또는 사망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 입장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는 사실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분명 패전국에게 가혹한 면이 있다. 때문에, 베르사유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가져온 주요 원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국 독일에 대해 관대한 조치를 주장한 케인즈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 대해서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워지는데, 이는 우리가 패전국에 대한 관대한 조치가 반드시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교훈을 일본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독일을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서부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 채택되고 거기에 미국의 재정적 지원이 더해진다면, 하늘은 유럽인 모두를 도울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서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교묘하게 중부 유럽을 빈곤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잡는다면, 감히 예견하건대, 머지않아 복수전이 펼쳐질 것이다.(p246)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영국과 미국을 대변하고자 집필된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 거부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조약이 조인된 후에도 케인스는 자신이 반대했던 조항들이 실행되는 것이 끝없이 압력을 가했다.(p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 中


 케인즈의 주장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일본에 대한 조치는 매우 관대했다. 여기에 독일과는 달리 분단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점령국이었던 한국과 베트남에서 일어난 전쟁특수를 통해 경제부흥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일본은 진정한 <평화의 경제적 결과>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보여줄 사명이 있는 국가다.


 독일과는 달리 일본에 대한 전쟁은 주로 미국이 단독으로 담당하였고 따라서 전후 미국이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하게 되어 일본은 분단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1945년 4월 루스벨트 사망 이후에는 일본에게 어느 정도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고 이것이 9월 6일 '항복 후에 있어서 미국의 초기 대(對)일정책'이란 선언에 구현되었다. 이 선언은 비무장화, 비군사화, 민주적 개혁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민주적 개혁의 기본 방향으로 정치적 자유의 회복, 전범의 처벌, 재벌 해체 등을 정하였다.(p854) <세계외교사> 中


 미국 국내에서는 강화조약을 엄격히 할 것인지 아니면 관대히 할 것인지 끊임없는 논의가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엄격이나 관대냐 하는 데 있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낡고 위험한 침략적 성격의 틀을 타파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데 꼭 알맞은 엄격함을 구사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어떤 수단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해당 국민의 성격 및 해당 나라의 전통적 사회질서에 따라 정해진다.(p387)... 프로이센적 강권주의가 일반인의 가정생활 및 일상적인 시민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독일에는 거기에 알맞은 강화 조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독일과는 다른 조건이 요구된다. 그것이 현명한 평화 정책이다.(p388).... 일본이 평화국가로 출발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참된 장점은 어떤 행동 방침에 대해 '실패로 끝났다'고 인정한 뒤부터는 다른 방향을 향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인은 양자택일적 윤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p389) <국화와 칼> 中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 ~ 1948)는 책에서 일본인들은 실패를 받아들인 후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성향이 있음을 말하면서 전후 일본에서 평화 정책을 펼것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일본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면을 보여왔다. 베네딕트가 말한 양자택일적 윤리는 이러한 점에서는 맞지만, 1,400회의 수요 집회가 있는 동안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반성없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 케인즈가 말한 관용(寬容)이 평화를 보장하는가에 대해 우리는 분명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소서! 노동과 생업의 결실을 강탈해가는 강도를 증오하듯이, 영혼에 가해지는 폭압을 증오하게 해주소서. 전쟁이라는 재앙은 피할 수 없다고 해도, 평화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서로 미워하지 않고 서로 괴롭히지 않게 해주소서. 그리고 시암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 우리에게 이 삶을 주신 당신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이 찰나 같은 삶을 살게 해주소서.(p165) <관용론> 中


 일찌기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 1694 ~ 1778)는<관용론 Traite Sur La Tolerance>에서 관용을 통해 전쟁 없는 세상과 평화로운 세상을 기도했지만, 아직 그런 세상은 되지 않은 듯하다. 2019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이자, 광복절(光復節)을 맞아 일본이 저승에 있는 케인즈와 베네딕트를 더는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사진] 1,400회 수요집회(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14/20190814016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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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14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랑스로서는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전한
뒤, 절치부심해서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
는데 패전국에게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
었을 겁니다. 프로이센이 그전에 자신들에게
받아간 엄청난 전쟁 배상금과 영토할양이라
는 치욕을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케인즈와의 영국이 추구한 합리적 사고가
프랑스에게는 먹히지 않았다는 점이 더 큰
전쟁의 도래를 초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후 일본에서는 총독 맥아더의 천황제
용인과 명확한 전쟁 책임의 소재를 명시하
지 않은 것이 작금의 역사 분쟁의 단초가
되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19-08-14 22:35   좋아요 0 | URL
베르사유 조약 자체가 패전국에게 가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승전국에게도 전후 안정적인 재정상황을 보장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체제였다 생각합니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가 출현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베르사유 체제 자체보다는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는 식민지(시장)의 보유여부가 중요했기에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세계대전의 불씨 또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의 연장에서 일본의 천황제가 남아있다는 자체가 제국주의의 유산이기에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전후 청산이 되지 않은 하나의 상징이라 여겨집니다. 가라타니 고진 등 일본의 여러 학자들도 레삭 매냐님과 같은 의견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9-08-15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5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9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9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년 8월 2일 일본에서 한국을 백색 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함으로서, 사실상 양국은 경제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반발로 시작된 경제갈등의 기원이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1947년  이래로 미국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한국에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p448)...  케네디의 취임 이전 혹은 1961년 군사쿠데타 이전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진정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미국정부는 국교정상화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로스토우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일본이 동북아시아 지역경제의 축이 되도록 압박하는 애치슨의 전략을 사실상 되살려놓았다.(p450)... 박정희와 김종필을 위해 일정 몫의 정치자금을 분담하는 문제에서도 일본인들은 쩨쩨하게 굴지는 않았다. 미국 CIA의 정보에 따르면 1961년에서 1965년까지 일본회사들이 한국 집권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는데, 6개 기업들이 6,6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를 기부했다. 그럼에도 정상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배상을 원하고, 일본인들은 '배상'이라고 불리지 않는 조건이라면 한 보따리의 원조와 차관을 내놓을 용의가 있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대표들은 미해결로 남아 있는 모든 쟁점들에 대한 합의안을 발의했고, 대한민국 국회는 1965년 8월 14일 협정을 비준했다. 이 협정은 한국 경제에 경이로운 일을 해냈으나, 이 타결이 차후 일본에 대한 청구의 가능성을 없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p451)... 국교정상화로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1965년 달러로 3억 달러의 무상 원조와 2억 달러의 차관을 받았으며, 일본의 민간기업들이 3억 달러를 더 투자했다. 결국 박정희는 1960년대 초에 미국으로부터 거절당한 강철공장을 건설하는데 이 돈과 일본의 최신기술을 사용했는데, 그는 이 공장을 자신의 고향에서 별로 멀지 않은 포항에다 세웠다.(p452)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中


 지난 2016년 체결된 한-일 정보보호협정(GSOMIA)가 미국의 이해를 위해 한-미-일 동맹의 수단으로 체결되었듯이, 그 이전의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역시 미국의 이해를 위한 방편이었다. 그 결과 일본은 '배상'이 아닌 '독립축하금' 명목의 과거 문제 해결을, 한국은 유/무상 원조와 차관을 통해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에게 양날의 검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1960년대 압축성장기에 공산주의 소련의 콤비나트(Kombinat)를 모방한  산업기지 조성과정에사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환경 오염 문제, 지역불균형 발전의 문제 등이 대표적인 문제점이라 하겠다. 박정희 고향 지역인 경상도에 조성한 신흥공단들로 인해 식수원으로 활용되는 낙동강에 인근 공단의 폐수가 유입되는 공해 문제와 전라도 등 비경상도 지역의 불균형발전 문제가 이 시기부터 불거지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기술종속 문제 역시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기계공업 낙후의 보다 중요한 원인은 기계공업의 개발 주체인 대기업이 기초 기계공업 개발에 의욕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기업은 내부적으로 조립가공업에 집중함으로써 장기투자가 필요한 기계공업을 외면하고 있었다. 또한 기계공업은 종합도면 위에서 부품생산을 분업화하고 그 단위마다 전문화를 통한 기술개발 효과, 규모의 경제를 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은 도급업체에 중요한 결정권을 주어 매이는 것을 싫어해 비합리적인 한국형 도급구조를 만듦으로써 기계공업의 발전구조를 원천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결국 세계 일류제품을 만들면서도 핵심부품은 미국, 일본에 의존하는 기술구조가 지속되었고, 이는 부가가치율의 하락과 해외 요인에 의한 공업구조의 불안정이라는 한국공업의 약점으로 지속되었다.(p425) <새로운 한국경제발전사> 中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 내재된 정치적 문제와 일본의존의 제조업 구조라는 경제적 문제가 얽힌 이 번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국가간 경제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모양새다. 당초 삼성전자, SK 하이닉스를 겨냥했던 수출규제가 한국수출품목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일본 상품/서비스 불매 운동도 한층 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오늘 있었던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 모두발언과 이를 보도하는 언론 보도를 접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을 분석한 <사생활의 역사 Histoire de la vie privee>의 내용을 떠올리게 된다. <사생활의 역사>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4년의 시간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 '민족주의(民族主義, ethnism'를 지목한다.


 양 진영에서 모두 짧게 끝나고 만 1917년 소요와 달리 병사들은 어떻게 4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마지막 가설은 모든 병사들이 민족주의 윤리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인데, 당시의 민족주의는 알자스와 로렌의 상실로 한층 더 격화되어 있었다. '독일놈'은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이며 우리 두 지방을 빼앗아간 약탈자이며 침략자이다. 그리고 정의와 법은 프랑스 편이다. 진짜 '애국교'라고 할 만한 것이 생겨났다.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일반 학교에서도 이러한 종교를 주입했으며 수도회 소속 학교들에서도 가르쳤다. 민족주의는 우파와 좌파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였다. 오로지 극소수 좌파만이 이러한 가치에 이의를 제기했다. 1914년 국제 협력 제체의 완전한 붕괴는 바로 이러한 민족주의로 설명된다.(p287) <사생활의 역사> 中


 이번 사태의 시작은 과거 불완전하게 봉합된 국가 간 협약의 문제가 표출에서, 이에 불만을 품은 '국가'가 '글로벌 대자본'의 국제 공급망에 대한 제재가 이어졌고, '민족주의' 감정의 분출과 함께 수출규제 확대-보복으로 갈등이 확산되고 있는 모양새다. 이제는 갈등이 고조되어,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고 여겨지는 지금 에릭 홉스봄(Eric John Ernst Hobsbawm, 1917 ~ 2012)이 <제국의 시대 The Age of Empire 1875 ~ 1914>에서 규명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본질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경제적 세계는 19세기 중반에 그랬던 것처럼 유일한 항성인 영국을 둘러싸고 회전하는 태양계가 더 이상 아니었다. 영국의 상대적인 침체는 점차 분명해졌다. 이제 경쟁적인 다수의 산업경제국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경제적 경쟁은 국가들의 정치적인, 심지어 군사적인 행위와 맞물려 요동쳤다. 대공황기에 보호주의가 부활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초래한 최초의 결과물이었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지원은 외국과의 경쟁에서 보호받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일국적인 산업경제들이 상호 경쟁하는 세계의 일부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것이었다.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는 국제적인 힘과 그 범주를 충족시켜주는 기반 바로 그것이었다. '강력한 경제'를 동시에 갖지 않는 '강대국'은 이제 인정될 수 없었다.(p550) <제국의 시대> 中


  '저출산-고령화'와 빈부격차의 확대 등으로 인한 구조적인 경제침체 아래에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도약 등의 현상황 역시 본질은 같지 않을까. 여기에, 미국의 한-일 갈등 중재 시 호르무즈 해협 파병 요청을 대가로 요청했다는 사실도 함께 놓고 본다면 홉스봄의 제1차 세계대전 분석이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만약, 그렇다면 '민족주의'의 이름 하에 수없이 죽어간 일반병사들은 누구를 위해 싸운 것일까? 이러한 물음과 함께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 본다.


관련기사 :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903190.html


 경제적 그리고 정치-군사적 힘에 대한 정체성을 대단히 위험하게 몰아갔던 것은 세계시장과 원료를 둘러싼 국가들의 경쟁뿐 아니라, 경제적/전략적 이익이 흔히 중첩되고 있었던 중동과 근동 같은 지역의 통제를 둘러싼 것이기도 했다. 1914년 훨씬 이전에, 중동의 석유를 둘러싼 외교는 이미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p551) <제국의 시대> 中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다. 1998년 지금은 사라진 을지포커스렌즈(Ulchi-Focus Lens) 훈련에 군단사령부에 소속되어 작전에 참가했었다. 당시 지휘부에 속했기 때문에 지하벙커에서 상황조치를 하면서 훈련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령부는 지하벙커에 있어 한여름에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전쟁을 치룰 수 있었다. 일선부대에서 행군을 하면서 기동훈련과 사령부에서 경험한 훈련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야전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을테지만, 사령부에서는 상황판의 숫자로 표시되는 전쟁의 양상은 충격이었다. 차가운 전쟁. 그것이 사령부에서 내가 경험한 모의전쟁이었다. 그리고, 이번 경제 전쟁에서 사회 지도층이 겪는 전쟁 양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들은 생산차질이 빚어지면, 생산물량을 줄이거나 감원을 하면서 생산라인을 바꾸며 글로벌 기업으로 생존하겠지만, 하청을 받아 사업을 운영하는 중소기업은 도산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소속된 가계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소비자로서 불매운동을 하는 차원이 아닌, 가계가 생계위협에 노출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 가족들에게 '우리는 일본을 이길 수 있다'라는 구호가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일이 지금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났을 때에도 우리는 막연하게 '일본을 이겨야한다'는 구호와 지금 이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


 베르됭에서 프랑스인들이 보여준 믿기 힘들 정도의 저항은 범상한 참모부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 병사들, 특히 '1914년의 용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명예였다. 신념의 윤리와 인격의 윤리가 프랑스 병사들에게 전쟁의 운명은 그들의 용기에 달려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p283) <사생활의 역사> 中


 이번 한-일 경제갈등의 뿌리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없음으로부터 출발했기에 한국인으로서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에 대한 분노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한-일 경제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분노 이전에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부는 일본에 대한 보복카드를 뽑아들기 이전에 민간 피해 최소화에 대한 대책을 조속히 국민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이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하며 들뜬 마음으로 자원했다가, 실상이 기관총, 철조망, 독가스로 인한 학살의 현장임을 깨닫고 멘붕에 빠졌듯이, 이번 한-일 경제전쟁이 마찬가지 양상으로 빠지지 않고, 진정한 해방/독립의 원년이 되길 희망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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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03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또다른 전범국가 독일과 다른 방식의
역사 왜곡이 이번 사태의 근원이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는 나라의 비극이
라고 해야 할까요.

겨울호랑이 2019-08-03 10:45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자신들 행동에 대한 반성보다 책임 떠넘기기식의 태도로 인해 과거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전후 천황제의 존속이 전후 처리에 큰 문제임을을 지적하는데, 이또한 역사 인식의 문제와 직간접의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2019-08-03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3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03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일로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 모두에게 ‘국뽕’ 맞는 계기가 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03 15:51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비록 이번 일이 경제 문제 외에 역사 문제도 연관되어 있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시적인 감정에 휩쓸려 일본 관광, 일본 맥주 불매 운동을 하기보다는 우리 주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일본어, 일본에 종속된 산업 구조, 식민 사관에 의해 왜곡된 역사 인식 등 우리 생활 전반을 돌아볼 때라 여겨집니다.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03 18:53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국수주의가 아닌 칸트의 세계 시민주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03 18:55   좋아요 0 | URL
네 또한 가라타니 고진과도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oren 2019-08-03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나라 사이에 켜켜이 쌓인 앙금을 최대한으로 가라앉히고 조금씩이나마 미래지향적으로 공존, 번영하는 길이 불행한 과거사를 극복하는 길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아베 정권에 와서 한국 때리기가 나날이 극심해 지고, 우리 정부에서도 뾰족한 대책도 없이 줄곧 맞장을 뜨는 식으로 대응한 게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게 아닌가 싶어 몹시 속이 상합니다. 가증스런 일본놈들을 죽도록 두들겨 패고 꺾어 이기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에겐들 없겠습니까만, 죽창가니, 의병 운동이니, 단호한 대응이니, 국민들의 저력을 믿는다는 식의 공허한 구호만을 내세워서 이 난국이 타개될까 심히 우려됩니다. 국민들은 가뜩이나 어려워지는 경제 상황 때문에 앞이 캄캄하다고 하루하루 가슴을 졸이는데, 위정자들은 마치 국민 총동원령이라도 내리듯이 살벌한 ‘일전 불사‘만 외치고 있으니 그저 딱할 노릇입니다.

이번에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일 텐데, 그 판결을 둘러싼 해법만이라도 양국이 좀 더 일찍 서로 머리를 맞대고 풀어봤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큽니다. 이제는 갈등의 골이 깊어져 ‘배상 문제 해결‘이 이뤄지더라도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원상복구되기 어렵다는 전망까지 나오는 판국이니, 양국의 통치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사태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이며, 무엇을 더 얻기 위해 ‘궁극적인 문제 해결‘은 한 켠으로 밀어놓은 채 끊임없이 싸움판만 키운단 말인가요.
* * *
˝진실로 옳구나! 이러한 말들이여. 법령이란 다스림의 도구일 뿐 백성의 맑고 탁함을 다스리는 근원은 아니다. …… 간사함과 거짓은 싹이 움트듯 일어나 극도에 이르러 …… 백성의 혼란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관리들은 불을 그대로 둔 채 끓는 물만 식히려는 것처럼 정치를 조급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하고 준엄하며 혹독한 사람이 아니고야 어떻게 그 임무를 즐겁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 사마천, 『사기 열전_2』, <혹리酷吏 열전> 중에서

겨울호랑이 2019-08-03 16:15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경제 도발과 이에 상응하는 대응이 이어질 경우 일반가계의 피해가 염려됩니다. 예를들어 세븐일레븐 편의점주의 경우 불매운동으로 매출에 타격을 받으면서도, 일본 제품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입게 된 수천만원의 피해에 대해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경제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정치권에서는 총선에서 표를 얻을 것이고, 국내 글로벌 기업은 시장다변화와 구조조정의 기회를 얻게 되겠지만, 민간 가계에게 돌아가는 실리는 없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03 20:15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국가주의에 놀아나면 안 됩니다. 어설픈 애국주의에 결국 피해는 개인만 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