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식민지가 대영제국에서 독립하려는 합당하고 정당한 이유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 독립선언문의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서 제퍼슨은 정부가 너무 가혹한 정책으로 일관할 때 인간은 정부의 형태를 바꿀 권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모든 정부의 정통성은 '국민의 동의'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동의를 얻지 못한 정부는 통치권이 없다는 것이 논지의 기본이었다.(p96)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미국사 The story of America> 中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 ~ 2010)의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A young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는 미국 역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책이다. '독립선언'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역사책이 위와 같은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한다면, <살아있는 미국역사>에서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떨까.

 

 식민지들이 성장할수록 지배계급은 통제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을 찾게 되었다. 최고의 부유층(富裕層)과 극빈층(極貧層)이 존재하는 사이에 백인 중산층(中産層)이 발전했다... 상층계급은 중산층의 충성을 얻는 데 성공했는데, 여기에는 분명 중산층에게 대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p51)... 1760년대와 1770년대의 지배계급은 최적의 방법을 찾아냈다. 다름 아닌 자유와 평등에 관한 말이었다.(p52) <하워드 진 : 살아있는 미국역사> 中


 1776년 무렵 북아메리카에 있는 영국 식민지들의 일부 중요 인사들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나라를 세운 후 합중국(United States)이라 칭한다면 대영제국을 위해 식민지를 관리해온 사람들에게서 토지와 재산, 정치 권력을 빼앗을 수 있었다... 이러한 시각으로 미국 혁명을 바라볼 경우 매우 천재적이고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Foundiing Fathers)은 200년 이상 잘 운영되고 있던 국가 통제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p53) <하워드 진 : 살아있는 미국역사> 中

 

 [사진] DECLARATION OF INDEPENDENCE (출처 : https://www.history.com/topics/american-revolution/declaration-of-independence)


 <살아있는 미국 역사>는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 대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책은 <미국민중사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어린 학생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저술한 책이기에,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다루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역사를 저술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은 정복이나 살인과 같은 끔찍한 일들을 진보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 대부분이 역사를 정부, 정복자, 지배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역사는 정부 또는 국가에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 하는 것이 된다. 그런 역사 속의 배우들은 왕, 대통령, 장군들이다. 그렇다면 노동자, 농부, 유색인종, 여성, 아이들은 대체 어떤 존재들이란 말인가? 그들 역시 역사를 만들고 있는데도 말이다.(p24) <하워드 진 : 살아있는 미국역사> 中


 <살아 있는 미국 역사> 속에서는 미국의 인종, 계급, 성, 연령 문제가 종합적으로 제기된다. 아메리카 원주민문제, 아프리카 노예 문제, 유럽으로부터의 이주민 문제등을 안고 시작한 미국은 출발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이어온 해결되지 않은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의 그물망은 흑인들을 아메리카의 노예제로 옭아매었다. 이 그물망은 굶주린 정착민들의 절망적인 위기감, 고향을 잃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무기력함, 노예무역 상인들과 담배 재배자들에게 보장된 이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을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는 법과 관습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식민지 지배자들은 백인들과 흑인들이 평등하게 함께 단결하지 못하게 차단하기 위해 가난한 백인들에게 신분상의 작은 이익과 혜택을 주었던 것이다.(p40) <하워드 진 : 살아있는 미국역사> 中


 영국에서 건너온 법률과 사고방식은 여성들에게 또 다른 족쇄가 되었다. 여성이 결혼할 경우 남편이 그녀의 주인이 되는 것이 당시의 법률이었다. 아내에 대한 권리가 남편에게 있었다. 죽이거나 평생 낫지 않을 상처를 입히지 않는 한 남편은 아내에게 체벌을 가할 수도 있었으며, 아내의 재산과 소유물 또한 남편의 소유가 되었다. 아내의 재산이 곧 남편의 재산이기도 했다.(p81) <하워드 진 : 살아있는 미국역사> 中


 1979년 미국에는 아파도 병원에 가거나 약을 살 수 없는 아이들이 100만 명이나 되었다. 그 아이들이 건강검진을 받았다는 증거 자료가 없었다. 17세 이하 1,800만 명의 아이들은 치과에 가본 적도 없었다... 매리언 라이트 에덜먼(Marian Wright Edelman)은 의회에서 아동 건강 프로그램 예산을 8,800만 달러 감축함으로써 아동 보호를 위한 안전망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했다.(p263) <하워드 진 : 살아있는 미국역사> 中


 <살아있는 미국 역사>에서는 미국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식의 문제를 해결했는가 또한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 속에서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피지배계급을 지배하는 전형적인 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남부의 대농장주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흑인 노예들과 가난한 백인들이 베이컨의 반란 같은 대규모 봉기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인종차별은 흑인들과 백인들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버지니아의 노예제를 연구한 역사가 에드먼드 모건은 <미국의 노예 제도, 미국의 자유>에서 인종차별이란 흑백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은 백인 지배자들이 흑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조장했다는 것이다.(p51) <하워드 진 : 살아있는 미국역사> 中


  <살아있는 미국 역사>는 처음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출발한 신생국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억압받는 이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하는데, 하워드 진의 글을 통해 저자의 역사관을 자세히 살펴보자.


 필자는 역사가 우리로 하여금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숨겨진 단면들, 사람들이 권력층에 저항하거나 함께 단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순간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과거의 역사 가운데 전쟁의 장면보다 선의와 용기의 장면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미국 역사에 대한 필자의 접근 방법이다.(p25) <하워드 진 : 살아있는 미국역사> 中


 이러한 저자의 글속에서 조셉 캠벨(Joseph Cambell, 1904 ~ 1987)의 영웅(英雄)에 대한 정의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살아있는 미국 역사>를 바라볼 때, 하워드 진이 바라보는 '민중'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오직 탄생(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p29)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中


 민중(people)이라는 이름의 영웅(hero)들이 시련과 고난을 겪으며 끊임없이 재생되고 부활하는 과정을 미국 250여년의 역사 속에서 그려낸 책. 그 책이 <미국민중사>이고,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 역사>는  이를 위한 도입부(Intro)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다... 


PS. <살아있는 미국역사>를 읽으면서 이 음악이 계속 연상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미국 민중사>를 잘 나타내는  OST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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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 2018-07-11 23: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기존의 미국 역사서들이 주로 국가와 지배층을 기본 단위로 하여 역사를 바라보았다면, 《살아있는 미국역사》에서는 계층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역사의 주체라는 관점을 취했네요. 그런 시각으로 보면, 과연 미국사는 그 시작점부터 모든 개인이 자유를 위해 투쟁한 역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더욱 듭니다. 겨울호랑이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7-12 00:13   좋아요 2 | URL
비록 미국의 역사가 짧지만,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 부럽습니다.^^:) 베텔게우스님의 말씀을 통해 저 역시 다른 관점에서 미국사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07-12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2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2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2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2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2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8-07-15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조만간 미국 민중사 읽어볼 생각입니다.

겨울호랑이 2018-07-15 11:1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좋은 독서 시간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투퀴티데스(Thoukydides, BC 460 ? ~ BC 400 ?)는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Ho Polemos ton Peloponnesion Kai Athenaion>를 통해 BC431 ~ BC404 사이에 발생한 펠로폰네소스(스파르테)인과 아테나이인들 사이의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전쟁은 '헬라스(그리스)인들뿐아니라 일부 비(非)헬라스인들에게도, 아니 전 인류에게 일대 사변'(제1권 1.2)이었다. 이후 아테나이에서는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 ~ BC 429)로 대표되는 50년간의 황금기가 막내리게 되었고,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에 의존한 패권(覇權)을 잠시 누리다가 이후 테바이에게 헬라스의 패권을 넘기는 등 두 강대국 모두 몰락의 길을 걷게 었다. 헬라스 전체로도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of Macedon, BC 356 ~ BC 323)와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기에 이 전쟁은 헬라스인들에게는 진정으로 파멸적인 전쟁이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30여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서 '투퀴티데스(투키디데스) 함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투퀴티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기에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예일대 교수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The Peloponnesian War>와 크세노폰(Xenophon, BC 430 ~ 354)의 <그리스 역사 Hellenica>를 통해 전쟁 전체를 조망해 보자.



[지도] 펠로폰네소스 전쟁( 출처 : http://m.blog.daum.net/picodrim/9873968)


 1. 펠로폰네소스 전쟁


 가. 전쟁의 배경 


 투퀴티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 페르시아 전쟁(BC 499 ~ BC 450) 이후 해군력을 바탕으로 크게 성장한 아테나이 제국(델로스 동맹)에 대한 스파르테의 견제로 인해 발생했다고 기술한다. 그리고, 케이건 교수는 이와 관련한 공포, 명예, 이익이 현대 국제관계를 설명하는 기본동기라는 점에서 이 전쟁이 현대에도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두 도시 사이의 대립은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델로스 동맹이 성장하여 아테네가 성공적으로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 점차 제국적인 야심을 드러내면서 시작되었다.(p34)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다. (1권 23,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아테나이의 국력이 누가 보아도 절정에 이르고 아테나이인들이 자신들의 동맹국들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하자, 라케다이몬인들은 마침내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이번에는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되 가능하면 아테나이의 세력을 말살하기로 작정했다. (1권 118,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투키티데스의 이 세 가지 설명 방식은 모두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동기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정당화한다. 공포, 명예, 이익이 바로 그것이다.(p71)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이러한 배경하에서 일어난 전쟁에 임하는 두 나라가 해군(海軍) 중심의 아테나이와 육군(陸軍) 중심의 스파르테였기에 이들은 서로 다른 전략으로 전쟁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결정적인 타격을 안겨줄 수 없었기에 이 전쟁은 장기전(長期戰)으로 돌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전쟁 양상은 로마와 카르타고 간 발생한 포에니 전쟁(Bella Punica)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몸젠의 로마사>에서 다루도록 하자.)


나.  아테나이의 전략 : 페리클레스 전략


 아테나이의 장점은 해군력과 스파르테를 압도하는 경제력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대한 스파르테에 압박을 가한다면, 아테나이가 승리할 수 있다고 페리클레스는 판단했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을 때 상황은 아테나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지만, 여기에서 벗어났을 때 아테나이는 패배에 몰리게 되었다.


아테네의 핵심자원은 도시를 지키는 성벽, 바다를 장악한 함대, 해군을 부양할 돈을 공급하는 제국이었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남겨둔 채로 거둔 승리의 가치는 제한적이었으므로 스파르타는 공격에 나서야 했다. (p83)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페리클레스는 전쟁이 터지고 2년 6개월을 더 살았고, 전쟁에 관한 그의 선견지명은 그가 죽은 뒤 더욱 널리 인정받았다. 왜냐하면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인들이 은인자중하며 함대를 증강하고, 전쟁동안에는 제국을 확장하려 하지 않고, 도시를 위험에 빠뜨릴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나이인들은 모든 점에서 정반대로 했으며, 분명 전쟁과 무관한 다른 업무에서도 개인적인 이익이나 야망에 이끌린 나머지 아테나이에게도 그 동맹국들에도 해로운 정책을 추구했다. (2권 65,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페리클레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테네에서 계속 유지되었던 그 전략은 비록 어느 정도의 제한된 공격적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방어적이었다. (p77)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다. 스파르테 전략 


 반면, 헬라스 최고의 육군을 보유했던 스파르테는 이를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 결과 제1차 펠리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테의 군대는 조기에 아테나이를 포위하였으나, 아테나이인들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 뒤에 숨으면서 장기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핵심은 펠로폰네소스인과 보이오티아인으로 구성된 그 찬란한 중무장 보병이었다. 이것은 아테네의 중무장 보병 팔랑크스보다 두세 배 더 컸고, 세계 최고의 군대라고 널리 인정되었다.(p85)... 플루타르코스는 기원전 431년에 아티카를 침공한 스파르타 군대가 6만 명이었다고 한다.(<페리클레스>33,4) 그 숫자는 너무 크지만, 분명히 스파르타의 군대는 아테네의 전투 중장 보병보다 2:1 또는 3:1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p87)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라. 시칠리아 원정 : 아테나이 파멸의 시작


 전쟁이 계속되면서 스파르테 군대에 의해 포위된 아테나이는 좁은 지역에 밀집하면서 발생한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에 의해 인구가 격감하게 되고, 도시 밖 경제활동이 제약됨에 따라 주변 제국에 대한 세금을 올릴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포위의 결과 발생한 아테나이 내/외부의 불만이 고조됨에 따라 아테나이는 전황(戰況)을 변화시킬 필요가 생겼으며, 이 결과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참담한 실패로 끝난 원정의 결과 아테나이는 파멸에 이를 정도의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시칠리아의 곡물이 펠로폰네소스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겠다는 욕망은 상황의 변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사태였다. 스파르타인의 아티카 유린의 기간과 강도는 어느 정도 침공군의 식량 공급에 달려 있었다. 시칠리아의 수확물을 상실하면 미래의 침공은 단축될 것이다... 그러나 시칠리아를 복속시키려는 시도는 전시에 제국을 확장하지 말라는 페리클레스의 충고를 명백하게 어기는 것이었다.(p154)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이 사건(시켈리아 원정)은 이번 전쟁 전체를 통틀어, 아니 내가 보기에는 기록에 남은 헬라스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이긴 자들에게는 가장 빛나는 승리였지만 패한 자들에게는 비할 데 없는 재앙이었다. 아테나이인들은 모든 전선에서 완패했고, 그들의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은 보병이며 함대며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 많던 자들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온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상이 시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7권 87, 5 ~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마. 페르시아의 등장


 시켈리아 원정의 파멸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는 서서히 힘을 다시 키워가면서 스파르테는 전쟁의 승리를 자신할 수 없게 되었다. 아테나이 해군의 힘을 꺾기 위해 스파르테는 지날날 살라미스 해전(Salamis batle, BC 480)에서 자신들을 적대했던 페르시아의 힘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의 해군을 봉쇄할 힘을 얻게 되었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아테나이의 붕괴를 위해서는 내부로부터의 붕괴가 필요했다.


밀레토스를 차지했다는 소식에 티사페르네스는 급히 그곳으로 가서 스파르타인과 대왕의 동맹을 맺었다. 이 일방적인 문서는 다리우스에게 그나 그의 조상들이 보유했던 모든 영토와 도시들을 반환했고, 페르시아인과 스파르타인은 이 지역들에서 아테네에 대한 세금 지급을 중지시키기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페르시아인에게 살라미스 이전에 그들이 소유했던 모든 그리스 영토를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반대로 페르시아인이 스파르타인에게 제공할 지원에 대해서는 재정적이건 그 어떤 것이건 명문화된 것이 없었다. (p399)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특히 현재 상황에 비판적인 리카스는 칼키데우스가 맺은 협정도, 테리메네스가 맺은 협정도 잘못되었다면서, 대왕이 자신과 자신의 선조가 전에 지배한 모든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모든 섬들과 텟살리아 지방과 로크리스 지방은 물론이고 보이오티아 지방에 이르는 모든 헬라스 땅이 다시 노예가 되고, 라케다이몬인들은 헬라스인들에게 자유 대신 페르시아의 지배를 안겨주었음을 의미하게 되리라고 했다. (8권 43, 3)<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왜 스파르타의 지도자들은 또 하나의 불리한 조약을 체결했던 것일까? 그것은 스파르타의 협상 위치가 너무나 불리했기 때문이다. 부활하는 아테네인 앞에서 페르시아의 돈과 지원을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원했던 것은 바로 스파르타인이었기 때문이다.(p412)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바. 아테나이의 몰락


 아테나이의 몰락은 내부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정에서 체제의 수호를 원한 자들과 과두정을 원한 이들의 대립은 아테나이의 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으며, 이로 인해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으며 전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투퀴티데스의 저서에는 전쟁의 후반부를 다루지 않았기에, 이 부분은 크세노폰(Xenophon, BC 430 ~ 354)의 <그리스 역사 Hellenica>를 참고해본다.


아테네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함대의 힘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층 계급들과 그들의 민주파 지도자들과의 협력에 의지해야 가능했다.(p448)... 극단주의자들은 민주정의 복원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적군을 끌어들이고, 배들과 성벽을 포기하고, 오직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아테네에 관련된 모든 조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8,91.3)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라케다이몬인은 헬라스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공헌한 헬레네스의 도시를 파괴하는 데 찬성하지 않고, 대신 장벽을 허물고, 페이라이에우스에는 12척을 제외한 모든 배를 포기하고, 추방된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라케다이몬과 같은 친구와 적을 가지며, 뭍이거나 바다거나 어디든지 라케다이몬인들과 동행하는 조건으로 강화했다... 이미 굶주림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 다수가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고 강화하기로 했다. <그리스 역사 2권(p51)


 이와 같은 양상으로 전개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리자는 누구였을까. 헬라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스파르테, 그 뒤를 이었던 테바이 모두 두 번 다시 페리클레스 시대 만큼 헬라스를 번영하게 만드는데 실패했다. 그런 면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전쟁 당사자 모두를 파멸로 이끈 전쟁이라 할 것이다.  이제, 투퀴티데스 함정에 대해 이야기 할 차례다.


기사출처 : http://www.hankookilbo.com/v/2538a200b1e94befaa0d19e9bccec112/


 아테나이의 번영에 대한 스파르테에 대한 시기, 질시로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두 강대국 모두에게 독(毒)이 되어 모두를 쓰러뜨렸다.  최근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질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이 세계 석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투퀴티데스 함정'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이상의 투퀴티데스 함정과 킨들버거 함정을 종합해 보면, 다음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미국이 경제적 선두의 위치에서 내려와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 경제는 경제적 선두를 필요하지만, 중국은 아직 경제적 선두를 받을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킨들버거 함정) 세계 경제 공공재로서의 경제적 선두가 없다는 현실 자체도 위협적이지만, 만약 미국이 최근의 중국의 눈부신 성장에 시기와 질투를 느껴 이를 견제하려 한다면 파멸적인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 (투퀴디데스 함정)


 세계 석학들은 미국의 고립주의와 중국의 부상(浮上)에 대해 '킨들버거 함정'과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말을 통해 경고하고 있다. 최근 중국과 미국의 움직임을 보면 군사적 충돌보다는 관세 전쟁을 통한 경제면에서의 충돌이 더 우려되기도 하지만,  어느 면에서의 충돌이든 세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미국의 보다 현명한 선택과 대응이 요구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이번 페이퍼의 주제와 관련하여 맹자(孟子, BC372 ~ BC289)의 한구절이 떠르게 되는데, <맹자>의 해당 구절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孟子曰 以力假仁者覇  覇必有大國 맹자왈 이력가인자패 패필유대국

以德行仁者王 王不待大 이덕행인자왕 왕불대대

湯以七十理 文王二百里 탕이칠십리 문왕이백리

以力服人者 非心服也 力不贍也 이력복인자 비심복야 역불섬야

以德服人者 中心悅而誠服也 이덕복인자 중심열이성복야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실제로 힘에 의지하면서도 겉으로는 인仁의 명분을 빌어 정벌을 일삼는 자는 패자 覇者이다. 패자는 반드시 강대한 국가를 소유해야한다. 자기 내면의 덕에 의지하면서 인정 仁政을 행하는 자는 왕자 王者이다. 왕자는 반드시 대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탕임금은 사방 70리의 나라를 기초로 하여 혁명을 성공시켰고, 문왕은 사방 100리의 나라를 기초로 하여 혁명을 성공시켰다. 힘으로써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복종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항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복종하는 것이다. 내면적 도덕의 힘으로써 사람을 복종케 하는 것은 마음속 한가운데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이 우러나와 진정으로 복종하는 것이다.(p246) <孟子 맹자 公孫丑 공손추  上 상 2a-3> <맹자 사람의 길 上>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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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1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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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1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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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트베르펜에서 이 모든 요소들이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을 잉태했다. 예술, 보험, 투자, 천재성, 권력의 거창한 허세, 세상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가능성 등등... 그러나 이들이 비롯된 그 빛을 우리는 함부로 ˝암흑기(dark age)˝라고 불렀다. 이들이 비롯된 핵심 요소를 우리는 ˝세상 끝 변두리(The edge of the world)˝라고 불렀다... 이제 마땅히 그들의 몫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p256)

「북유럽 세계사」1, 2권은 북유럽 역사에게 생소한 우리에게 바이킹, 한자동맹, 도시 등의 단편 주제를 통해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현대 생활의 많은 제도가 북유럽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부분이 이 책의 한계라 여겨진다. 예를 들어 책에서는 독일 북부에서 개발된 은광으로 인해 도시가 발달했으며, 도시를 기반으로 한자동맹을 비롯한 상인세력이 성장하고, 주식회사 제도가 만들어졌음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북유럽 외부의 영향은 극히 제한적인 반면, 북유럽이 주변에 끼친 영향은 과장된 부분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북유럽에서 은광이 개발된 것은 가진 것이 없던 이들이 외부와 교역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사실, 이들이 자본을 축적한 것은 우수한 문화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대구나 청어 등의 수산물 수출을 통해서였다는 사실, 무엇보다 이들이 대항해시대를 통해 정착된 주식회사 제도가 사실은 동방무역이 이슬람에 의해 막히게 되어 선택한 고육지책의 결과였음을 이 책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유럽이외 지역이 유럽에 미친 영향은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남유럽을 제외한 몽골인들은 주정뱅이 야만인으로 그려지고 있으며(제2권), 이슬람과 아프리카는 언급되지도 않고 있다. 일방적으로 세계가 북유럽에 의해 혜택받았다는 내용으로 전개된 이 책은 비유럽인들이 내용적으로 공감하고 읽기 어렵다. 마치 지난 해 개봉했던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를 보는 느낌이랄까.

다만, 읽는 이가 이러한 세계사를 보는 관점의 한계를 인식하고, 북유럽의 역사가 세계와 어떤 면에서 관계를 맺어왔는가를 가벼운 마음으로 확인하는 목적의 교양역사서로는 시간이 될 때 읽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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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 17: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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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 18: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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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랑 2018-03-11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만적인 주정뱅이 혼자서 세계를 쥐락펴락 할수는 없었을텐데...
본인이 뛰어나거나, 참모진이 뛰어나고, 수많은 병사들이 우수했기에 가능한 역사일텐데 편협한 작가네요. 아니면, 진짜 세계사 공부를 다시 해야 될 저자네요.
성공하지 못한 십자군 원정에 약올라 유럽이외 세계사는 그냥 무시하는 걸까요?

겨울호랑이 님 말씀대로 ‘비유럽인‘ 1인으로써 다른 작가의 글을 읽는게 낫겠어요.

겨울호랑이 2018-03-11 19:01   좋아요 3 | URL
책에서 몽골인들의 장점으로 뛰어난 참모제도, 기마 능력, 신무기 등을 간략하게 언급합니다만, 전체적으로 ‘술에 절어 비틀거리는 야만인‘수준입니다.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를 그린 정도의 왜곡을 하고 있어서, 서구인들의 역사인식 수준을 알게 됩니다...

2018-03-11 2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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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06: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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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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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1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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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1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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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14: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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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1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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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2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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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4-04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이네요. 서평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겨울호랑이 2018-04-04 10:48   좋아요 0 | URL
^^:) 북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NamGiKim님께서 쉽게 읽으실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석유는 경제발전의 동력이 되는 에너지원이다. 석유 가격은 공급과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데, 공급 측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포함한 나라들이 있고, 수요 측에는 미국을 필두로 일본과 유럽연합, 중국이 있다. 특히 OPEC와 미국이 석유 시장의 판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OPEC는 안정적인 석유 수입을 위해서 배럴당 22 ~ 28 달러에서 가격을 맞추려 하고 있고, 미국은 좀 더 확실한 공급원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이것이 석유를 둘러싼 현재의 정치 지형이다.(p87)'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사진] 중동에 집중된 석유(출처 :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A century of war, Anglo-American oil politics>은 미국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하나의 축(軸)으로서의 '석유'를 바라보고 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과거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화의 가치는 '금(Gold)'에 의해 유지되는 반면, 미국 달러의 가치는 '석유(Petroleum)'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힘은 군사력과 기축 통화로서의 달러의 힘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현대 문명의 거의 모든 생산품에 들어가는 원재료인 석유에 대한 통제까지 이루어지면서 미국의 세계 지배는 더욱 공고히 된다는 것으로 이들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결합이 된다.


 1. 미국 지배권의 두 축 : 군사력과 달러


 '자유, 평화, 민주주의라는 미사여구를 벗겨내고 나면 미국의 세기는 다른 나라들에 군림하는 미국의 분명한 지배권(헤게모니)에 기초하고 있다. 그 지배권은 2개의 축에 의지했다. 한 축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로 어떠한 강대국 연합 세력도 도전할 수 없는 우위를 지키고 있는 미국 군사력의 독보적인 역할이었다.... 미국 힘의 다른 한 축은 세계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독보적인 역할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독특한 역할을 확립하기 위해 1944년 브래턴우즈 체제를 수립했다. 달러는 그것을 보증하는 데 단 한 덩어리의 금이 없게 된 후에도 오랫동안 준비통화의 역할을 했다.(p15)... 군사 지배와 통화 지배가 결합된 힘 덕분에 미국은 종이 증서인 달러를 끝없이 찍어내어 그것을 공학적으로 잘 디자인 된 자동차, 기계류, 섬유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제품과 교환하기 위해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에게 뿌리는 부러워할 만한 사치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온 세계가 종속되어 있는 달러 채무라는 체제를 만들어내며 더욱 많은 달러화 부채로 수입품들을 사들였다. 이러한 특별한 지배 덕분에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 되었고, 끝없는 무역 불균형을 유지했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달러화를 팽창시켰으며,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적/공적 부채를 증대시켰다. (p16)'


2. 달러와 석유의 결합


 '1971년 브래턴우즈 금본위제가 종식된 이후 달러화는 더 이상 금으로 뒷받침되지 않았다. 대신 달러화는 아브람스 탱크, F-16 전투기와 미국 핵무기 따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전후 미 산업경제 기반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미 달러화를 지탱한 두 번째 요인은 1973 ~ 1975년 사이에 약 400퍼센트에 이르는 유가 폭등이었다.... OPEC 오일 판매를 다른 어떤 통화도 배제한 채 오로지 달러화로만 결제하도록 보장한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비밀 군사정치협정은 미국의 세기의 수명을 1990년대 초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연장시키는 기반이 되었다.(p373)'


[사진] 다변화된 석유시장(출처 :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또한, 책에서는 군사력, 기축통화, 원자재 시장의 지배력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이전 세계의 공장으로서 기능하던 미국이 전략적인 목적으로 일본과 남한의 경제적 부흥을 지원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한강의 기적'은 미국의 의도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된다. 


 '1971년 이후 미국은 한때 성공적이었던 자국의 산업경제를 차근차근 공동화해버렸다.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힘에 대한 아시아쪽 대항세력으로서 일차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국이었던 일본의, 그 뒤엔 남한의 부상을 허용했다. 그것은 무슨 우호 정신의 발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전적인 "세력균형" 지정학의 미국판일 뿐이었다.(p372)'


 그렇지만,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일본 경제와 한국 경제는 이후 미국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방해로 지적된 이후 제거 목표가 된다. 이후 1997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호랑이 경제권 국가들은 석유달러 통화질서 속에서 외환위기를 겪게 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며, 이들의 자리를 2001년 이후 WTO에 가입한 중국이 대신하게 된다.


 '전후 시기에 일본식 모델은 일본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전후 시기에 일본식 모델은 한국,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기타 동아시아 경제권에서 육성되었다. 1980년대에 이렇게 급속히 성장한 경제권은 호랑이 국가들이라 불렸다.(p311)... 1990년대에 미 정부가 요구하던 달러화 자유시장 체제를 세계로 퍼뜨리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소련의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보다도 자급자족적인 아시아의 호랑이 경제권이었다.(p312)... 일단 자본 통제가 완화되고 해외 투자가 자유롭게 들어오고 나가도록 허용되자 한국과 다른 호랑이 경제권들은 해외 달러의 갑작스러운 유입에 휩쓸리게 되었다.... "펀드들은 태국, 인도네시아,한국을 쉽사리 강탈한 후, 떨고 있는 그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에 넘겨주었는데, 이는 그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폐해진 국가에서 채무 불이행 차관에 집착할 서방 은행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p313)'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속에서는 20세기 이후 영국의 '파운드화-석유의 패권'으로부터 미국의 '달러-석유' 패권이 어떻게 유지되어왔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들의 패권에 도전한 결과 러시아는 1905년 러일전쟁의 패전을 겪었으며,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프랑스의 드골은 정권을 잃게 되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석유(石油)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석유가 결코 축복받은 재화가 아님을 알게 된다. 만일, 우리 나라 주변에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었다면 남북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쿠웨이트처럼 매장량이 많은 지역별로 독립 국가로 쪼개졌을 것이고, 우리나라의 수많은 종교가 공존(共存)하지 못하고 분열되지 않았을까. 우리 나라에서 수탈할 자원이 없었기에 경제적으로 원조받을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가난을 극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소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그렇지만, 지난 100여년의 시간동안 영국-미국의 패권의 기본은 한결 같았다.


 '100년 전 파머스턴경이 대영제국을 두고, "우리에게는 어떠한 친구도 없다. 오로지 이해관계만 있을 따름이다"라고 썼듯이 말이다.(p372)'


 이처럼 미국은 대외 관계에 있어서 철저하게 이해관계를 따지는데 반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나라 일각에서 미국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 연상된다.


 '켓살코아틀(Quetzalcoatl)은 아스테카 사회에서 삶을 부여해주는 최고의 신이었고, 이와는 반대로 우이칠로포슈틀리(Huitzilopochtli)는 전쟁의 창시자이자 죽음의 신이었다. 켓살코아틀은 다른 영웅들처럼 추방당했고, 방랑자였지만, 그는 사라지면서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영웅이었다.(p131)... 때는 왔다. 세 아카틀, 즉 제1의 사탕수수 해(Uno Cana)가 가까워올 무렵, 아스테카의 세계는 갖가지 징조로 가득 찼다... 테스코코의 왕은 금발에 턱수염을 기른 신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이 이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었다.... 해안에서 전령이 도착해서 금은을 두른 복장을 하고 네 다리를 가진 짐승 위에 올라탄 남자들을 태운 떠다니는 집이 동쪽에서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을 때 목테수마의 고뇌는 편해졌다. 이들은 백인들로서 얼굴에는 턱수염을 길렀고, 그들 중 몇몇은 금발이었으며 벽안의 눈을 가졌다. 목테수마는 한숨을 돌렸다. 이제 고뇌의 시간은 사라졌다. 신들은 다시 귀환했고 예언은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 Monroy Pizarro Altamirano, 1484 ~ 1547)는 자신을 신으로 생각해본 적이 결코 없었다.(p134)'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일부이긴 하지만)우리에게도 아스텍 인들처럼 막연히 백인에 대한 환상이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아즈테크를 멸망시킨 코르테스처럼, 아마 미국인들 자신도 자기들이 산타클로스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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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1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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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2-15 16: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로필 사진 속의 연의는 좋아하는 책을 들고 있는 건가요.
겨울호랑이님, 기분 좋은 금요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7-12-15 18:12   좋아요 2 | URL
^^: 아 저 사진은 인증샷입니다. 옷은 고모에게, 책은 할머니에게 받아서 인증샸을 찍었지요.ㅋㅋ 서니데이님 밤에 눈이 온다하니 늦은 시간 외출하신다면 눈조심하시며,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회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왕왕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회사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그렇겠지만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중요한 부분에서 발생했을 때, 그 타격은 상당히 크게 느껴지게 됩니다. 오늘 회사에서 그런 타격을 받아 다소 씁쓸했습니다.^^: 가끔 이런 큰 타격을 입었을 때 저는 

'칸나에 전투'를 떠올리곤 합니다...


 칸나이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BC 216에 이탈리아 중부 아프리아 지방의 칸나이 평원에서 로마군과 카르타고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완벽한 포위 작전으로 로마군을 전멸시켜 현대에도 포위섬멸전의 교본으로 남아 각국 사관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출처 : 위키백과]


[사진] 칸나이 전투 당시 패주하는 로마기병과 로마보병 (출처 : 위키백과)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가 당한 패배는 꽤 뼈아픈 것이었습니다. 몸젠(Christian Matthias Theodor Mommsen, 1817 ~ 1903)은 그의 저서 <몸젠의 로마사>에서 당시로마가 입었던 피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군대가 적에게 이토록 적은 손실만 입힌 채, 전쟁에서 이처럼 완벽하게 전멸한 사례는 칸나이의 로마군이 유일할 것이다. 한니발은 6,000명이 채 못 되는 병력을 잃었지만, 그 가운데 2/3은 로마 군단의 첫 공격이 집중되었던 켈트족이었다. 반면 전선에 배치된 로마군 7만 6,000명에서, 집정관 루키우스 파울루스와 대리 집정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장교들의 2/3, 원로원 의원 80명을 포함한 시신 7만구가 전장을 덮었다. 집정관 마르쿠스 바로만 재빨리 판단해 베누시아로 말을 모아 목숨을 부지했다. 방어군 일부와 전선에 있던 병사 일부를 포함하여 겨우 몇 천 명이 카누시움으로 탈출했다. 실로 이 해에 로마의 종말이 결정되기라도 한 것처럼, 갈리아로 파견된 군단마저 칸나이 전투가 끝나기 직전에 켈트족의 매복 공격을 당하여, 다음해 집정관으로 지명된 사령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와 함께 궤멸되었다.(p187)... 그것이 꽃다운 병사들과 장교들, 전투력을 갖춘 전체 이탈리아 병사의 1/7이 쓰러진 칸나이 전투의 결과였다.(p194)' <몸젠의 로마사> 3권 : 이탈리아 통일에서 카르타고 복속까지


 그리고, 이러한 뼈아픈 패배를 겪은 로마인들을 뭉치게 만든 이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 BC 275 ~ BC 203)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Ploutarchos, BC 50? ~ BC 120 ?)는 그의 영웅전에서 파비우스가 킨나이 전투 이후 국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칸나이 전투)가 있기 전까지는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파비우스 막시무스)에게 있으며, 로마를 구할 수 있는 것은 파비우스의 지략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위험이 닥쳐왔을 때에는 지나친 조심성과 겁내는 표정이었으나, 한결같이 좌절과 슬픔에 빠져 있는 지금은 태평한 모습과 온화한 음성으로 사석에서나 공적인 위령제에서 대중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한편, 원로원을 소집할 것을 권고하고, 국정을 책임진 사람에게는 새로운 용기를 심어줌으로써 오직 그만이 나라의 기둥이며 국가의 운명을 짊어질 이라는 믿음을 주었다.(p190)'<플루타크 영웅전> 1권 파비우스 막시무스


 금의 저와 차이가 있다면, 문제를 당면한 제가 파비우스 역할까지 해야한다는 점이겠군요. 파비우스의 모습을 보면서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을 바로 보는 용기를 얻곤 합니다. 언젠가, 같은 상황에서 마음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르더군요.


 "호랑아, 넌 파비우스 같은 위인이 아니야. 너가 할 수 있을까?


 당시에 애써 생각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답이 바로 튀어나왔습니다.


 "응, 난 파비우스 같은 위인이 아니야. 하지만, 내가 겪고 있는 문제 역시 칸나이 전투의 패배만큼 아프진 않아."


 이번 회사에서의 일도 다소 실망스럽긴 합니다만,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받은 충격이 어지간히 크지 않고는 당시 로마인들의 충격보다 크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라 생각됩니다. 


 로마는 칸나이 전투를 계기로 당시 로마군의 약점인 기병 양성등 군제도(軍制度)를 정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 자마전투(BC 202)에서 한니발에게 복수하고, 이후 세계제국으로 도약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실망스러운 결과가 더 나은 삶으로 이끈다는 다소 진부한(?) 위로를 스스로에게 해봅니다. 날이 많이 추워졌네요. 이웃분들 모두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저는 금요일에 다소 피곤했으니, 누구보다도 편하게 쉬어야겠습니다. ㅋ



PS.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으로 읽으셔야 찾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제가 가진 책은 1985년에 배재서관에서 나온 <플루타크 영웅전>인데 읽기에 썩 좋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1990년에 큰 호랑이가 되라고 선물해 주신 책이라 지금도 이 책으로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대체 언제 크려는지...) 예전 페이퍼에 올렸던 사진이지만, 다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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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7 2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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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7 2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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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7 2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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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8 0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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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28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사에서 어려움이 있으셨던 모양인데, 잘 이겨낼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매우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계시네요. 주말 편히 쉬고 재충전하여 화이팅 하시기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17-10-28 12:15   좋아요 1 | URL
sprenown님 감사합니다. 가을 날이 좋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별이랑 2017-10-28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좋은 일은 또 다른 역사를 상기하며, 글을 읽고 삭여가는 겨울호랑이 님.
등뒤에 든든한 가족분들이 계셔서 다 잘 될거예요.
그나저나, 역시나 멋진 아버님 이시네요. 건강하시길....

겨울호랑이 2017-10-28 18:21   좋아요 1 | URL
^^: 감사합니다. 별이랑님. ^^: 삶이 생각대로만 되어간다면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가 또 알겠습니까. 더 좋은 일이 생길지..ㅋ 별이랑님 말씀처럼 좋은 일을 기대해 봅니다. 아버지 건강까지 염려해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별이랑님과 가족분들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2017-10-31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31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5 1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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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5 15: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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