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경험설의 입각지에서 본다면 우리들은 순수경험의 범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의미라거나 판단을 낳는 것도 다름 아닌 현재의 의식을 과거의 의식에 결합함으로써일어나는 일이다. 즉 그것은 커다란 의식계통 속에서 하나로 통합시키는 통일의 작용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의미라거나 판단이라는 것은 현재의식과 그것 아닌 다른 것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곧 의식계통 속에 현재의식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P24

참된 종교적 깨달음이란 사유에 기초한 추상적 지식이 아니며 단순한 맹목적 감정도 아니다. 그것은 지식 및 의지의 근저에 가로놓인 심원한 통일을 스스로 얻는 것이며 지적직관의 일종이고 깊은 생명의 포착이다. 따라서 어떤 논리의 칼날도 그것에대항할 수 없으며 어떤 욕구도 그것을 움직일 수 없는, 모든 진리 및 만족의 근본이되는 것이다. - P63

참으로 하나이자 여럿인 실재는 쉼 없이 스스로 운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고요히 정지된 상태란 다른 것과 대립하지 않는 독존적 상태, 곧 여럿을 배척한 하나의 상태이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실재는 성립될 수 없다. 혹시 통일에 의해 어떤 하나의 상태가 성립됐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곧바로 반대의 다른 상태가 성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의 통일이 수립되면 곧바로 그것을 파괴하는 불통일이 성립한다. 참된 실재는 그와 같이 무한의 대립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 P101

선이란 다름 아닌 이상의 실현이고 요구의 만족이라고 할 때, 그런 요구와 이상이라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또 선이란 어떤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일까. 의지는 의식의 가장 깊은 통일작용이고 다름 아닌 자기 그 자체의 활동이기에 의지의원인이 되는 본래의 요구 혹은 이상이란 요컨대 자기 그 자체의 성질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기의 힘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다. - P210

의식이 분화발전은 통일의 다른 면이며 그 역시 의식성립의  요건이다. 의식이 분화/발전하는 것은 오히려 한층  더 큰 통일을 구하는 것이다. 통일은 실로 의식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적 요구는 그런 의미에서 의식통일의 요구이며 겸하여우주와의 합일의 요구이다. 그렇게 종교적 요구는 사람 마음의 가장 깊고 가장 큰 요구이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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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연구 b판고전 17
니시다 기타로 지음, 윤인로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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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이란 한마디로 말해 인격의 실현이다. 이를 내부에서 보면 진지한 요구의 만족 곧 의식통일이고 그 극한은 자기와 타자가 서로의 경계를 잊고 주체와 객체가 함께 가라앉는 곳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외부로 드러나는 사실로서 보면 작은 것은 개인성의 발전에서 나아가 인류 일반의 통일적 발달에 이르러 그 정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_ 니시다 기타로, <선의 연구> , p237

니시다 기타로 (西田幾多郞, 1870 ~ 1945)는 <선의 연구 善の硏究>에서 인격의 실현으로서 ‘선‘을 말한다. 기타로는 본문을 통해 직접 경험인 ‘순수경험‘으로 부터 시작된 주관과 객관, 수동과 능동, 의지와 지식의 통일을 강조한다. 다만, 기타로가 말한 이러한 통일의 중심은 외부인 물(物)이 아닌 내면에 있다는 점에 다른 사상들과 구별된다.

진리는 통일에 있는 것이되 그 통일이란 추상적 개념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 아닌바, 진리의 통일은 그와 같은 직접적 사실에 있는 것이다. 완전한 진리는 개인적이고 현실적이다. 모든 진리의 표준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의 순수경험의 상태에 있으며 진리를 안다는 것은 그런 상태에 일치한다는 것이다. _ 니시다 기타로, <선의 연구> , p52

우리는 결코 단순의 의지의 결정이나 해결 같은 내면적 통일의 상태에만 머무는 것은 아닌데, 의지의 결정은 말할 것도 없이 실행이 뒤따르는 것이고 무언가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상 또한 반드시 실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되는, 곧 순수경험의 통일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순수경험의 사실이란 우리들 사상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것이다. _ 니시다 기타로, <선의 연구> , p36

니시다 기타로의 <선의 연구>에서 우리는 칸트, 헤겔, 마르크스, 흄, 버클리, 아우구스티누스, 베르그송 등 여러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을 함께 만나게 된다. 그들의 용어와 사상을 동양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했다는 점이 사상가로서 그가 남긴 업적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본문의 아래 구절은 <중용中庸> 24장 지성지도(至誠之道)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런 면에서 그는 사상가로서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만, 탈아입구( 脫亞入歐)를 강조하던 근대일본지식인의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그에게 내면은 서양사상이겠지만. 여기까지만 보면, 기타로는 시대를 앞선 통섭(通涉, consilience)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의 사상이 정치철학으로 확장시키면서 발생한다.

우리들 인격 전체의 요구는 우리들이 아직 사려/분별하지 않는 직접경험의 상태에서만 자각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 인격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발현해 나오며 서서히 마음 전체를 포용하는 일종의 내면적 요구의 목소리이다. 지극한 성실至誠은 선행에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주요 조건이다. _ 니시다 기타로, <선의 연구> , p223

기타로의 선(善), 인격의 실현은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말한 실천이성의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에 머무르지 않는다. 통합 이전에 발생하는 격렬한 대립과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실체는 변증법적으로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게 되는데 마치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정신현상학 精神現象學, Phanomenologie des Geistes>에서처럼 개인의식은 가족, 국가, 세계로 확산된다.

나는 개인의 선이란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다른 모든 선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된 위인이란 그 사업이 위대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강대한 개인성을 발휘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개인주의와 공동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나는 그 둘이 일치하는 것이라고 본다. 한 사회 속에 있는 개인이 제각기 충분히 활동하고 그 천품을 발휘할 때야말로 비로소 사회가 진보하는 것이다. _ 니시다 기타로, <선의 연구> , p229

마치 칸트의 인식론을 동양적으로 해석하고, 개인의 통합된 의식을 세계정신으로 확대시키는 헤겔의 틀을 도입한 느낌을 주는 기타로의 철학. 얼핏 보면,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 않지만 그가 속한 교토학파(京都學派)가 훗날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1910년대 쓰여진 <선의 연구> 안의 결론 부분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들의 사회적 의식의 발달은 가족과 같은 작은 단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정신적/물질적 생활은 모두 각각의 우리들의 사회적 단체에서 발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가족에 뒤이어 우리들의 의식활동 전체를 통일하는 것이자 한 인격의 발현으로도 간주해야 하는 것은 국가이다... 우리들 개인은 오히려 한 사회의 세포로서 발달해왔던 것이다. 국가의 본체는 우리들 정신의 근저인 공동적 의식의 발현이다. 우리는 국가에서 인격의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국가는 통일된 하나의 인격이고 국가의 제도/법률은 그러한 공동의식의 의지의 발현이다. _ 니시다 기타로, <선의 연구> , p235

신은 우주의 근본이고 겸하여 우리의 근본이어야 한다. 우리들이 신에게 돌아가는 것은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신은 만물의 목적이기에 곧 인간의 목적이어야 하는 것으로, 인간은 제각기 신에게서 자신의 참된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다(p254)... 신과 인간의 본성을 동일하게 하고 인간이 신에게서 그 뿌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 사상인 바, 그것에 기초함으로써만 비로소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_ 니시다 기타로, <선의 연구> , p255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군국주의의 기원을 <선의 연구>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어쩌면 과도한 해석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반성없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선‘은 제국주의 침략자로서의 순수경험이고, 이를 통한 역사해석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기에, 그들의 사상적 기반인 기타로의 내적 주관주의에 대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경험은 직접 경험과 동일하다. 자기의 의식 상태를 직접 바로 그 아래에서 즉각적으로 경험했던 때, 아직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닌 지식과 그 대상은 완전히 합일하고 있다. 그것이 경험의 가장 순연한 상태이다. _ 니시다 기타로, <선의 연구>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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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주역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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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易은 변화이며, 변화는 우주생명의 창진 創進 Creative Advanced이며, 우주생명의 창진이란 우주를 구성하는 기 氣의 끊임없는 순환을 의미한다. 역은 곧 우주이다. ˝우 宇˝는 사방상하 四方上下, 곧 공간을 의미하고 ˝주 宙˝는 왕고래금 往古來今, 곧 시간을 의미한다. 우주는 시공연속체 Space-time contunuum를 의미한다. 이러한 시공연속체를 동방의 고대인들은 ˝역˝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별도의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역이라는 생성의 변화 속에 얽혀있는 방편이다. 역은 변화이며, 시공이며, 우주이다. 그러므로 우주 속의 어떠한 존재도 시공을 벗어나는 것은 없다. 우주, 그 전체는 역 易 속에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_ 도올 김용옥, <도올주역강해>, p21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불과 몇 달 사이에 빠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요즘 <도올주역강해>는 시선이 머물게 되는 책이다. 그것은 우리 주변 상황이 빠르게 바뀌기 때문만은 아니라, 적어도 국내 정치와 관련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무리들이 동양철학을 참칭(僭稱)하여 벌이는 꼴사나운 짓거리 때문이리라. 그들의 옛 것에 대한 그릇된 이해의 정도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현재 자신의 위치가 불변(不變)할 것으로 보고 벌이는 행태를 보건대 우주의 틀 안에서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기본적인 이해도 갖추지 못한 자들임은 누구의 말처럼 ‘전혀 오해의 소지가 없이 명확하게 이해했다‘.

극심한 혼란의 시기에 이러한 상황도 변화의 과정이라는 <역경 易經>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리라 생각한다. 마침 저자직강의 강의도 시작되어 사이트를 공유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강의 URL : https://www.youtube.com/watch?v=26jbCuItMdw 도올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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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의 철학
한스-게오르크 묄러 지음, 김경희 옮김 / 이학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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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영원성과 세속적 시간성의 구분은 다른 구분과 병행한다. 영원성은 "영원한 지리"와 함께 한다. 영원한 진리는 무상하지 않다. 영원한 진리와 비교해서 세속적이고 시간적인 모든 것은 잠재적으로 "오류"이다. 영원성/시간성의 구분은 진리/오류의 구분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로부터 진리로 이르는 길은 시간성으로부터 영원성으로, 다시 말해 "시작"으로서의 하느님에게로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p167)... <노자>의 지속되는 시간은 시간 속에 통합되어 있는 데 반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성한 시작은 시간 너머에 있다. <노자>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는 영속성과 영원성의 차이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원성은 시간-초월적인 데 반해 도가의 영속성은 시간-내재적이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168/275

한스-게오르크 묄러 (Hans-Georg Moeller, 1964 ~ )의 <도덕경의 철학>이 다른 <도덕경 道德經> 안내서와 다른 점은 독자를 동양사상을 잘 알지 못하는 서양인을 염두에 두고 풀어간다는 점일 것이다. 도(道) 안에서 통합되는 음양(陰陽)과 영속(永續)의 시간 개념은 이원론(二元論, dualism)과 절대적인 신(神)의 시간개념인 '영원(永遠)'에 익숙한 서양인들에게 분명 낯선 개념일 것이다. 이런 차이를 비교해서 설명하는 저자의 서술은 서양사상에 익숙한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한편, 동서양 철학을 개략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책이 가진 장점으로 느껴진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고대 중국철학은 참인 것과 단지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또는 거짓인 것)을 구별하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서양의 그리스철학자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중국철학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보다는 질서(治)와 혼란(亂)을 구별하는 데 관심이 컸으며, 특히 혼란이 아닌 질서를 세우는 방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_ 한스-게오르크 뮐러, <도덕경의 철학> , p9/275

저자는 <도덕경>에서 서양철학이 풀지 못한 과제의 해법을 찾는다. 전면에 나서서 인류를 구원하는 영웅(英雄 hero)의 모습이 아닌, 스스로를 낮추고 감추면서 모든 것을 감싸는 성인(聖人)의 모습. 스스로 낮추면서 높은 것을 얻어내고, 비우면서 채워가는 성인의 모습은 음(陰)에서 양(陽)이 생성됨을 일깨워준다.

<노자>에서 내가 철학적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측면은 이 텍스트가 인간적 행위주체성 human agency에 도전한다는 점이다. 주체성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근대 서양철학의 전통은 자아 ego와 그 자아의 힘들에 너무 집중해왔다. 이런 전통에서 <노자>의 입장은 다소 거북스러운 것으로 감지될지도 모른다. <노자>의 격률인 "행위하지 않음(無爲)"은 인간 사회를 포함해서 세계 전체를 개별적 활동들에 기초하고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그러하게(自然)" 또는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에 기초하고 있는 하나의 매커니즘으로 보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생산적 autopoietic" 대안이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12/275

골짜기의 효력은 생명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바로 이 효과, 즉 무궁무진한 유용성이라는 효과는 다양한 이미지와 구조 덕분에 확보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 이미지들과 구조들이 단순히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입증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것들은 동일한 교훈의 반복이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30/275


동일한 구조가 우주 전반에 적용된다. 하나는 텅비어 있고 없는 것이지만, 둘을 발생하게 한다. 하나(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없음)와 둘(있음, 음/양의 구분)이 합쳐져서 셋이 된다. 셋은 이처럼 하나와 둘의 통합이 "낳는" 것이다. 다수의 세계, 즉 만 가지 사물의 세계를 열어놓는 것은 바로 이 셋이다. 이 "적분의" 수학은 여기서 그려 보이고 잇는 것이 사실상 선형적 인과관계나 생성의 "역사적" 과정, 즉 통시적 발전이 아니라, 모든 요소가 결합하여 하나의 공시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다수는 순서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서로 함께 간다... 도의 하나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도는 내적인 통일성인 동시에 외적인 통일성이다. 한편으로 하나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것의 중심에 있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65/275

묄러는 <도덕경>에서 성(聖)과 속(俗)이 통합된 정치철학을 설명한다. 군주가 도(道)에 따라 물 흐르 듯 치세(治世)를 했을 때, 그는 '덕(德)'을 획득할 수 있다. 스스로 낮은 곳에 처함으로 군주는 권위를 획득할 것이며, 권위는 그의 자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얻어지는 '덕'이 '강(强)하게 만든다는 것'이 <도덕경>전체 맥락에서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고, 덕을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행해지는 도(道)의 모습이 바람직할 것인가 하는 부분은 더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미두도록 하자. 다만, <도덕경의 철학>에서 이처럼 도(道)와 덕(德)의 관계를 보다 명쾌하게 설명되기에, 노자(老子, Bc571 ?~ ?)의 사상에서 제국주의의 위험함을 지적한 다른 글들을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이 책이 갖는 장점 중 하나라 여겨진다.

도를 따름으로써 성인-군주는 이원성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뚜렷이 구분되는 측면들과 계기들은 서로를 해치려고 싸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호 주고받음을 통해 협력한다. 이것은 유익한(그리고 리드미컬한) 효력의 교환으로 이어진다. 이 효력(德)은 군주에 의해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에서 펼쳐지고 공동체에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점점 커지는 "위신(德)"의 형태로 "그에게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조차도 그가 주었던 것을 얻는 것이다. 도와 그것의 효력인 덕은 가장 넓은 차원에서는 세상 전체에 "작용하고" 있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70/275

도덕은 위험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쉽게 사회적 병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지나친 오만함과 개인적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집단적 차원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고도로 "도덕적인" 사회는 타자들을 자기들보다 도덕성이 떨어지고 가치가 떨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적(敵)일지도 모른다고 보기가 쉽다. 도덕적 언어와 도덕적 자기 찬사가 전쟁과 분쟁의 시대에 특별히 인기가 높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157/275


묄러의 <도덕경의 철학>은 <도덕경>의 81장 전체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대신, <도덕경>이 쓰여진 당대의 언어와 사상을 낯선 현대의 서양인들에게 보다 쉽게 풀이한 책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방식은 노자 사상이 낯설지 않은 우리에게도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서양인들이 현대문명의 문제점을 노자를 통해 해결하려는 의도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좋은 입문서적이라 여겨진다.

<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터넷의 소위 하이퍼텍스트 hypertext 같은 비전통적이고 비선형적인 텍스트들에 견주는 것이 더 용이할 수도 있다(p17)... 그 역사의 초창기에, 특히 기원전 5세기나 4세기에 <노자>는 한 권의 책으로 기능했다기보다는 일종의 고대의 하이퍼텍스트로, 또는 구성과 해체, 확대와 축소의 지속적 과정 속에 놓여 있었던 텍스트적 게슈탈트 gestalt로 기능했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19/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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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2-03-16 17: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찌보면 인문학적 소향은 있되 동양 철학은 부족한 독자분이나, 도덕경을 읽었더라도 서양인이 설명하는 동양 철학적 개념으로 접하고 싶으신 분께 도움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6 17:39   좋아요 2 | URL
캐모마일님 말씀처럼 <도덕경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접한 <도덕경> 입문서와는 조금은 다른 관점을 보여줘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캐모마일 2022-03-16 17:42   좋아요 1 | URL
서양철학적 기반 위에서 도덕경을 설명하는 내용이 신선하네요. 뭔가 도덕경 해석,과 함께 도덕경으로 동서양 철학을 비교하고 통섭해보는 책 같아서 흥미롭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6 17:45   좋아요 1 | URL
캐모마일님께서 말씀하신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흥미롭게 읽힐 책이라 여겨집니다. 즐거운 독서 되세요! ^^:)

곰곰생각하는발 2022-03-16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독특하네요. 동양철학을 서양인의 관점에서 독해한 책이군요. 저도 이상하게 서양철학보다 동양철학이 어럽습니다. 동양철학이 보다 고차원적인 것 같기도 하고... 서양철학은 혼자서 계보학 따지고 들며 공부하면 대충 알겠는데 동양철학은 혼자서는 잘 이해를 못하겠더군요..

겨울호랑이 2022-03-16 18:22   좋아요 0 | URL
^^:) 곰곰발님 뿐 아니라 저 역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은 번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번역에 사용된 언어 자체가 일본학자들에 의해 변용된 단어가 대부분이라 동양철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도덕경>의 큰 흐름을 잡을 때에도 유용한 책으로 느껴졌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3-16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신선한 📖 책입니다.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2-03-16 19: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좋은 독서 되세요! ^^:)

라파엘 2022-03-16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석학적 전통 때문인지, 확실히 독일 출신 학자들이 서양인임에도 동양 경전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좋은 편이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2-03-16 21:03   좋아요 1 | URL
^^:) 라파엘님 말씀을 듣고 보니 학문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전통 사회를 연구하는 것은 거기에서 어떤 회귀의 길을 찾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 회귀는 탈주를 위해 매개되어야 할 회귀일 뿐 문자 그대로의 돌아감을 뜻하지는 않는다. 시간은 앞으로 흐르며 어떤 의미에서도 문자 그대로의 돌아감은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모든 탈주는 회귀에 의해 매개됨으로써만 그 적실한 방향과 속도를 얻을 수 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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