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책 읽는 시간 -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니나 상코비치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표지가 무지 매력적이다.

품격있는 그린 톤에 스탠드 불빛이 매력적이다.

근데... 저 의자에 앉아서 책읽기엔 좀 불편하지 않을까?

그리고... 왼손잡이라면 몰라도... 전등은 책의 왼쪽에서 비추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디자이너는... 책벌레가 아닌 모양이다. ㅋ

책벌레였다면... 책상 위에 쌓아 둔 책들을 적어도 책등 정도는 보여주는 위트를 발휘했을 터인데...

 

이 책의 지은이는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 방법으로 독서를 택한다.

어려서부터 독서에 길이 들어있긴 했지만,

살면서 책을 손에서 놓아버리기 쉽다.

 

한국 사회는 초등학교에서 독서 지도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만,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독서는 여가 활동으로 자리잡는 일조차 드물다.

공부는 조선시대 과거처럼 정형화된 또하나의 작업인 셈이고,

독서를 통한 이해, 분석, 비판, 종합의 과정을 평가하지 않으므로, 독서는 가치를 상실하고 표류한다.

 

'책은 삶 속으로 들어가는 도피처이다... 표지에 적힌 이 말은 이 책을 대표하지 못하는 구절이다.

그 구절은 35쪽에 가서야 변명처럼 덧붙는 말이 나온다. 아쉽다.

"말은 살아있고 문학은 도피가 된다.

그것은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삶 속으로 들어가는 도피이다."라고 평론가 시릴 코널리가 말했단다.

책은 삶 속으로 들어가는 도피...라는 말만 잘라놓고 보면, 부정적인 반면,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삶 속으로 들어가는 도피...라고 나열하면,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속표지에 적힌 카프카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구절이나,

'책은 정원이고 과수원이며, 저장고, 파티, 여행을 함께하는 동료이며, 카운슬러, 여러 명의 카운슬러가 되어준다.'를 요약해서 적어줬더라면 더 나을 뻔 했다.

 

이 책의 제목도 좋지만, 원 제목도 멋지다.

톨스토이와 퍼플 체어...

퍼플은 레드-바이올렛... 붉은 기가 도는 보랏빛을 일컫는 말이다.

톨스토이를 읽는 시간, 그리고 퍼플 체어는 소파까지는 아니더라도... 붉은 보랏빛이 도는 쿠션이 놓인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번뇌하던 지은이는 이렇게 독서의 변을 남긴다.

"나는 왜 살아갈 자격이 있는가?"라는 무자비한 물음에 대하여,

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책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의 독서 도중에서 만나는 책들이 무지 반가운 것들도 있었는데,

특히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에 얽힌 이야기 같은 것들...

 

칼럼 매캔은 어렸을 때 죽어가는 할아버지를 방문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 있는 동안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나가 햄버거를 사주었는데,

역시 아일랜드 인이던 웨이트리스는 어린 소년이 런던에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뺨을 어루만지고는 아이스크림 선디를 사 주었다.

그는 그 웨이트리스를 평생 기억했다.

그녀가 보인 친절함과 동정심의 순간 같은 것들이 바로 매캔으로 하여금

저 위대한 소설을 쓰도록 이끈 우연들의 연쇄관계였다.

그런 순간들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계속 유지되어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해준다.

그것은 세상이 친절하고 용서하는 곳일 수 있다는 믿음을 다시 피어나게 한다.

그런 순간들이 아름다움이다.

 

이런 글을 읽고 나니깐,

이 책이 더욱 사랑스러워지게 된다.

Let the great earth spin.이란 제목이 '위대한 지구를 돌려라'라고 어색하게 번역된 거만 빼면...

책의 뒤편에서(84) '이 괴상한 세계는 계속 굴러간다'는 시구절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저 책의 제목으로 비슷하지 싶다.

 

폴 오스터의 '어둠 속의 남자'에 나온다는 한 구절...

이 책은 완벽하고 진실한 심장에서부터의 소통이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낡은 보랏빛 의자에 기댔다.(83)

 

이런 구절을 읽노라면... 낡은 보랏빛 의자가 없는 표지가 더 아쉽다.

나도 아내가 갓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을 때,

처형을 잃는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그런데... 그때는 어려서... 세상을 몰라서...

아내에게 전적으로 애도의 기간을 주어야 한단 것을 몰랐다.

더 힘든 상황으로 밀어 넣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지난 그 시간이 미안하다.

이 작가는 그런 점에서 행운아다.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에서 작가의 독서가 의미를 깊게 한다.

 

엄마, 난 평소에 너무 빡빡한 일정에다 통제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왔지만

이 한 해 동안에는 그런 생활로부터 2만 마일 아랫쪽에 떨어져 있어요.

언니 덕분이에요.

난 물 밑에 있고, 내가 읽는 책의 저자들과 헤엄치고 있고,

그들의 말을 산소처럼 빨아들이고 있는데, 언니도 거기 있어요.

책 속의 삶들이 내게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있어요.

새 생명 말이에요.

그래서 언니를 어떻게 하면 살아있게 할지 배우도록 도와줘요.(113)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삶이 갑자기 강렬해졌다.

 

페르 페테트손의 <시베리아로>는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데,

주인공의 말이 기억할 만 하다.

 

나는 스물셋인데, 내게 있는 것은 나머지뿐이다.(121)

 

오빠를 잃은 여자 아이의 그 말이,

저자는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는 거다.

독서는 그런 것이다. 자신의 삶과 독자의 삶이 교감하는 것.

그 교감 속에서 영혼의 키가 한 뼘은 자라는 그런 것.

 

작가나 페테르손이나...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읽는다면,

눈물을 흘리면서 공감하지 않으려나?

 

모란이 지고 나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에즈라 파운드 역시 상실을 이야기한다.

 

남는다. 그 외는 하잘것없다.

그대가 사랑하는 것이 그대로부터 탈취되지 않을 것이다.(122)

 

남는 자는 하잘것없이 느껴질 수 있으나,

좌절하고 포기하지만은 않는다.

 

슬프지만 찬란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사랑하는 것이 탈취되지 않을 것임을 믿고,

내가 남는 것은 나머지 뿐일지라도,

임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않는 자세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난 사랑에 빠졌어요.

굉장한 책과 사랑에 빠졌어요.

이런 사람이 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데,

얘, 이 책 읽어봐~

하는 친구가 한 명 이상 있다는 것만도 행운이다.

 

365일 빠지지 않고 애도의 하나로 책을 읽는 사람.

없는 시간을 쪼개고 나눠 책을 읽고 리뷰를 쓴다.

 

책만으로 살 순 없다.

그러나, 책은 삶을 더욱 풍요롭게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어찌 절망으로 생을 끝내는 걸까?

 

이렇게 죽어간 언니를 애도하기에 성공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거다.

 

무더위에 지쳐갈 때면, 그는 추리소설을 읽는다.

 

추리소설을 읽고 싶은 허기를 자꾸만 느끼는 것도 바로 그런 질서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물론 좋은 추리물에서 지혜의 불꽃도 발견하지만,

내가 정말 찾는 것은 해결이니 말이다.

나는 우주의 질서 이상의 것을 원한다.

가끔은 의미가 거의 없는 세계에서,

추리물은 삶의 변형과 전환을 수용하고,

그것들을 결국은 의미가 있는 플롯으로 진행할 수 있다.

어떤 의문이 해결된다.

거기서 얻는 만족감은 엄청나다.(243)

 

추리물을 좋아하는 이는 많지만,

이렇게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를 적실하게 표현한 사람은 드물다.

문제의 속시원한 해결, 거기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짙은 페이소스...

마치 입맛에 꼭 맞는 짙은 담배를 만나 깊이 들이마쉰 뒤의 만족감이랄까... 그런 것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암튼, 여름철엔 추리소설 같은 장르 소설의 계절이다.

 

그는 살인사건을 해결했지만,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그리하여 셀프는 건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려면 자신이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그 결말이 부당하다고 불만을 품고 괴로워할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 더 적절한 결말은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할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일임을 깨달았다."

 

<셀프의 살해>라는 슐링크의 소설에서 짚어낸 한 대목이다.

작가의 독서체험 기록은 상당히 깊은 사색을 묻어나게 한다.

그걸 읽는 것만으로도 올 여름, 무더위에 지치지만은 않고 힘을 내려고 파이팅을 외치는 맘을 먹게 도와줄 것이다.

 

우리는 경이감 속에서 살고,

열정과 염려의 순환 속에서 타오른다.(시인 캐럴린 키저,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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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5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5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5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6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6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6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07-0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정원이고 과수원이며, 저장고, 파티, 여행을 함께하는 동료이며, 카운슬러, 여러 명의 카운슬러가 되어준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중 카운슬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합니다. 책을 읽지 않는 친구가
책을 읽는 저보다 더 똑똑한 경우를 많이 경험해서 말이죠. ㅋ

글샘 2012-07-08 19:57   좋아요 0 | URL
똑똑하지만, 카운슬러가 되어주지 못하는 친구 많잖아요. ㅋ
들어주지 않고, 말하는 친구...
수용하지 못하고 반사하는 친구...
잘라리아들 사이에서 외로울 때... 뭐, 술병이 옆에 친구해주는 거보다 낫잖아요. ㅎㅎㅎ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 세계명작을 고쳐 읽고 다시 쓰는 즐거움
이현우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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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에게 책 좀 읽으란 이야기는 누구나 한다.

부모도 하고 선생님도 하고 선배들도 한다. 그러나...

뭘 읽으란 말씀?

청소년 소설 같은 것들은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청소년 소설은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듯 하고...

 

학생들이 읽기 좋은 책들을 소개하는 좋은 책으로 <독서평설>이란 책이 있다.

고딩, 중딩, 초딩용으로 발행되는데, 월간이며 매달 읽기 좋은 꼭지들로 가득하다.

지난 몇 년 간 독서 평설을 받아 보면, 제일 먼저 찾아 읽는 꼭지가 <이현우의 갑론을박>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나오기를 오래 전부터 기다렸던 셈인데...

2010년인가는 로쟈 님이 '미리 읽는 가상 리뷰' 대회를 하셔서 응모했던 적도 있다. ㅋ

 

이 책의 좋은 점...

세계 문학을 읽는 것은, 그 시대의 문화 풍토 뿐 아니라 그 시대의 정신과 만나는 일이다.

허나 많은 사람들은 한 편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 역사적 배경, 그 외 소소한 문화사에 이르기까지 상식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로 작품을 대하기 때문에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세계 문학을 읽을 때 도우미가 필요한데, 일부 도우미는 너무 앞서 가서 평범한 독자를 기죽이기 쉽다.

 

한국에는 이런 작업들이 많지 않아서, 외국 작가들의 책을 참고하려고 들면, 더 알지 못할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로 독자의 기를 죽이기 일쑤다.

이 책에선 한국 독자들이 많이 읽는 책을 중심으로 설명해 주기 때문에, 고등학생 이상 일반인들이 이 책을 참고하여 세계 문학을 읽어나가는 데 도움을 얻기 쉬울 것 같다.

 

2부의 <세계문학>에 대한 보론은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이니까 건너 뛰고 싶은 사람은 부담없이 건너 뛰어도 좋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유명한 건 다 알지만, 그의 작품을 희곡으로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자주 짖궂게 내는 퀴즈로, 셰익스피어의 소설 4가지를 대는 아이에게 빵 사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신나게 햄릿, 오델로, 로미오와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맥베스... 이러고 들이민다. 답은... 모두 희곡인데... ^^

애들은 날 잡아먹을 듯 사기꾼 취급하지만, 의외로 이거 오래 기억하는 애들이 많더구만.

좋은 교육방법이다. ^^

 

셰익스피어를 제국주의 시대와 연결지어야 하는 것도 당연한데 드물게 보이는 시선이다.

괴테의 파우스트 역시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연결지어 설명하여 재미있다.

 

사랑은 골목길에서 갑자기 살인자가 튀어나오듯이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번개처럼, 단도처럼...

 

이런 문장을 만나는 일도 이 책을 읽는 재미다.

 

작품에 대한 설명과 함께, 다양한 철학적, 역사적, 신학적 저작들과 엮어 읽기를 시도하는데,

붉은 띠지로 표시한 <겹쳐 읽기>는 심화 독서의 한 방법으로 활용할 만 하다.

 

이탈로 칼비노의 이야기 : 고전은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는 책이라고 한다. 너무도 유명하기에 '지금 ~를 읽고 있어'는 쪽팔린다고... ㅋ

 

로쟈는 전조등을 환하게 밝혀주는 역할을 하지만, 시선을 고정하여 골몰하여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 전조등만 보고 전방을 주시하지 않는 일은 독서를 하지 않는 일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애도에 대한 관점을 읽어둘 만한 부분.

 

누가 죽었다고 해서 좋아하던 것까지 그만둘 순 없지 않니?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보다 천 배나 좋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지.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어떤 대의를 위해 고결하게 죽기를 원한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

 

카뮈의 이방인이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불행의 문에 대한 비유는 신선하다.

 

진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리스도 곁에 남겠다고 했다.

아마 카뮈는 진리 대신에 지중해를 택할 것이다.

그리스도도 지중해도 없는 로쟈는 귀엽게 탄식한다.

 

나의 삶은 내가 바라는 바에 적합하지 않구나~ ㅋ

 

이 책에서 읽고 싶은 책을 하나 주웠다.

 

<백야에서 삶을 찾다>, 오종우, 예술행동, 2011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안나 카레니나, 닥터 지바고에 대한 자세히 읽기가 편안하고 친절하단다.

 

<수정했으면 하는...>

 

317. 알렉산드르 블로크... 이후에선 블록으로 표기되어 있다. 통일성을 기했으면...

318. 시 속에 '논보라'... 눈보라의 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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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1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3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2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2-07-03 08:30   좋아요 0 | URL
ㅋ~ 땡큐~
 
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 - 세계 문학 주인공들과의 특별한 만남
정여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어제 애도예찬을 읽으면서 다양한 소설을 통해 죽음에 접근하는 이야기들이 여운이 남아 집어든 책.

뜻밖의 수확이랄까?

우연히 집어든 책 치곤 어제의 독서에 이어지는 맛이 감칠맛을 더했는데,

분석은 유사하면서, 방향은 조금 다른, 그래서 더 읽는 맛이 더했던 것 같다.

 

이 책의 커리큘럼을 따라서 독서 클럽을 만들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데미안 vs 호밀밭의 파수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vs 위험한 관계...

물론 책을 읽어와야 하고, 시간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이 많을 듯 싶다.

 

<소통에 대한 간절한 희구> 이런 것은 인간의 영원한 과제다.

<사랑>도 이 소통에 대한 치열한 한 방법에 불과하 수 있다.

넓게 본다면, <소통에 대한 간절한 희구와 좌절의 스토리>가 이 책의 테마를 포괄할 수도 있겠다.

 

내 말을 들어줄단 한 사람의 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맘을 속속들이 알아줄 독심술의 귀재는 없을까?

내 마음을 읽더라도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을 그저 내 마음의 무늬와 빛깔을 가만히 바라봐주는 사람은 없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왜 사랑이 필요하고, 오해가 생기며,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순애보(따라 죽는 사랑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그것은 모든 인간의 희망 사항이면서도, 하느님도 이뤄주기 힘든 요구사항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목숨을 걸고 붙잡아야 할 노릇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그럴 때 쓰는 말일 게다.

 

싱클레어(데미안)와 홀든(호밀밭의 파수꾼)의 힘겨운 방황이 끝난 후 그들이 얻은 것은

인생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아니라 더 많이 더 처절하게 방황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 눈부신 자유의 속살이 가장 사랑하는 것과 이별하는 고통이었음을 깨달은 그들은,

가장 사랑하는 존재, 가장 그리운 존재가 내 곁을 영원히 떠난다 해도,

우리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속에서, 이미 떠나간 그 사람의 그리운 모습을 발견한다.

저 멀리 내가 꿈꾸던 그 어딘가에서 삶을 견딜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이순간, 이 공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39)

 

사랑에 대한 매력적 소설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고 싶게 한다.

 

첫사랑의 매력은 사랑의 성공이나 결과가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과정 하나하나에 매혹된다는 것,

사랑이 선사하는 아주 사소하고 디테일한 매혹의 매순간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

첫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에 철저히 미숙하기 때문에 고수들보다 오히려 더 예민하게 사랑의 진풍경을 낱낱이 느끼는 것.

 

그래서 사랑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랑은 '독자적'인 것이고, '개별적'인 것이어서 <일반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대상보다

사랑 그 자체를 더욱 사랑하나.

그 순간 파괴되는 것은 <단지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의 내면>이다

 

이런 사랑은 집착이 되고, 현실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기 쉽다.

 

천국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지옥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랑을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지옥 속으로 함께 들어갈 유일한 동반자를 찾는 일.

 

그런 집착에 대한 이야기가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오페라의 유령이다.

이야기들은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애석하게도 슬픈 결말을 맺는다.

 

사랑에 빠지기 전,

사람들은 한번도 자신의 날개를 제대로 펼쳐본 적이 없는 새들처럼 '자신의 전부'를 알 기회가 없다.

막상 사랑에 빠지면, 숨을 곳이 없어진다.

어떤 에티켓과 매너로 치장을 해도, 아무리 냉철한 척 포커페이스를 연출하려 해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결국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다.

그 숨길 수 없음이 우리를 끝내 해방시킨다.

오만과 편견, 자존심과 자격지심은 사랑에 빠지기 전에나 누릴 수 있는 감정의 사치.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자존심을 챙길 여유도, 자격지심을 돌볼 계제도..

오만을 가꾸고 편견을 관리할 시간도 당연히 없다.

사랑은 내게있는지도 몰랐던 내 날개의 빛깔을 내 스스로 발견하게 만드는,

천변 만화한 빛깔로 매 순간 반짝이는 내 안의 날개를

세상 밖으로 한껏 펼치게 만드는,

오직 '나와 너'사이에서만 유효한 해방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와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아가씨들의 모습에 대한 변명이다.

소설 속 아가씨들보다, 정여울의 변명이 더 아름답다. 멋진 글이다.

 

<적과 흑>과 <춘희>의 안타까운 사랑을 보면서 '경이'와 '연민'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사랑은 한쪽의 경이 또는 다른 한쪽의 연민으로 시작된다.

어떻게 저토록 아름다운 사람, 저토록 대단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것이 '경이'의 본질이고,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어떻게 저토록 고통스러울 수 있을까 하는 슬픔이 '연민'의 본질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사랑의 테두리 안에서는 경이와 연민이 동급의 감정이다.

그의 사소한 눈길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그의 하찮은 우울조차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된다.

그에 대한 경이가 커질수록 연민 또한 더욱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 책에서 이렇게 사랑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한 구절들만 훑더래도 세계 문학이 추구했던 삶의 증명들, 그 철학적 함의에 대한 논의들이 충분할 것 같다.

 

<동물농장>과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규칙이 사람을 만드는 끔찍한 역설과,

인간보다 훨씬 나은, 인간 중심주의를 위협하는 우월한 존재들에 대한 경탄을 읽어낸다.

인간은 생태계의 다른 모든 존재들과 똑같은...

생태계란 그물을 구성하는 '단 하나의 그물코'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

 

반어와 역설로 가득한 <멋진 신세계>의 야만인 존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의 가치.

 

야만인 존은

눈물없는 세계, 비극 없는 세계, 저항 없는 세계를 신뢰하지 않는다.

눈물이 없는 세계는 곧 슬픔을 통제하는 사회이며 과잉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이다.

그 감정의 과잉 혹은 잉여야말로 이야기의 원천이며 저항의 원천이고 나아가 예술의 원천이 된다.

 

세계는 갈수록 합리적 이성을 휘두르는 폭력주의자, 군산복합체 사회구성의 폭력에 길들어간다.

세계는 감정을 통제하고, 과잉을 제재한다. 빅 브라더의 시대가 이미 도래한 모양이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의 무대책 자유론... 숨 쉬고 싶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존재의 이유를 이렇게 외치는 사람도 필요하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주인공 아셴바흐의 행보도 읽어둘 만 하다.

 

영감을 떠올리기 위한 도구로서의 여행이 아니라,

쉼 그 자체를 위한 쉼이었다.

무언가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비우기 위한 여행.

그는 지칠 대로 지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계산없는 휴식임을 깨달았다.

 

이 책에서 눈에 띈 곳만 골라 추려 봤지만,

더 멋진 구절들도 많을 것이다.

 

소설들을 차근차근 읽고,

이 글들을 다시 읽을 수 있는 휴식을 가지다면,

정말 멋진 세계문학 기행이 될 수 있겠다.

 

이런 멋진 책을 권해준 멋진 친구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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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2-06-19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좋은데요. 시립도서관에 비치해달라고 신청해야겠어요.

어제 나의 삼촌 부르스리 1권을 대출받았어요.
지금 다른걸 읽고 있는 중이라서 목요일에 하루 월차 냈는데 그때 확~ 다 읽어 버릴려구요.
너무 기대가 되요. ㅎㅎㅎ

글샘 2012-06-19 09:35   좋아요 0 | URL
네. 애도예찬이랑 이 책이랑 참 좋더군요. ^^

나의 삼촌 부르스리 1권으로 월차가 메워질까요? ㅎㅎㅎ
여행이라도 가시지~

아무개 2012-06-19 10:27   좋아요 0 | URL
전 지하철 타고 책 읽는거 엄청 좋아하거든요.특히 여름 평일엔 시원하고 조용하고 아주 좋아요.
그래서 브르스 리를 가지고
여기 제가 사는곳 1호선 끝에서 전철타고 저쪽 끝 인천까지 갔다가
월미도 쫌 울쩍한 맘으로 봐주시고,
차이나 타운에가서 짜장면 먹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

왕복 5시간정도 걸리니까 쉬엄쉬엄 읽어도 1권은 다 읽을수 있을꺼 같아요~

글샘 2012-06-19 13:17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여행일 수도 있겠는데... 브루스리와 함께하기엔 너무 공공장소인데요. ㅋ
혼자서 좀 정신나간 듯이 웃을 수 있을텐데...
 
내 인생의 책 읽기 나남신서 75
공선옥 외 지음,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엮음 / 나남출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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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년에 책을 300권 가량 읽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화성인 보듯 한다.

학교에서 그렇게 일도 많은데, 또 툭하면 술마시는 거 다 아는데,

무슨 시간에 300권을 읽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건데...

 

이 책에는 시인, 소설가 등의 어린 시절에 어떤 계기로 독서가 자기에게 다가왔는지,

그리고 그 독서는 시인, 소설가가 되는 데 어떤 힘이 되고 자양분으로 사람을 길렀는지,

청소년 내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적은 책이다.

 

대부분 가난으로 시작해서, 창작 시절의 신고와 고통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책은 친구였고, 선배였으며, 인생의 등대이며 이정표였고 나침반인 동시에 삶의 지도였다고 이야기 한다.

 

틈틈이 들어있는 시 같은 작품도 좋다.

 

내 손에 시 있다...는 함민복 시인의 말에...

정말 시가 있다. ^^ 이제 나도 시인이라고 해야겠다. ㅎㅎㅎ

 

 

공선옥이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으며, 눈물흘리는 소주 이야길 하는데,

나도 소주를 마시며,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끌고... 눈길로

깊은 산골로 가고프단 생각을 몇 번이고 하게 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부분)

 

 

판소리 하는 사람들이 '저 사람 소리엔 그늘이 없어' 란 말을 한단다.

 

인생의 그늘, 즉 쓰고 맵고 어렵고 힘든 인생살이가 녹아 있는 소리가 아니란 뜻.

소리에도 그 속에 인생의 고난과 시련과 좌절과 아픔이 녹아있는 소리가 참된 소리고, 참된 인생인 거...

그래서 정호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서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했다는 거.

 

몽구스 크루의 정여랑은, 최승자의 시를 기대어 살았단 이야길 한다.

신산함... 이 그대로 읽힌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

 

정여량이 이 시를 읊는 마음에 나는 그대로 젖어든다.

내가 그랬던 거 같아서... 내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아서...

 

 

다나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에서는 삶과 독서에 대한 생각이 잘 드러난다.

 

인간은 살아있기때문에 집을 짓는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쓴다.

인간은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기에 모여서 산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자리도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독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어떤 명쾌한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삶과 인간 사이에 촘촘한 그물망 하나를 은밀히 공모하여 옭아놓을 뿐이다.

그 작고 은밀한 얼개들은 삶의 비극적인 부조리를 드러내면서도

살아간다는 것의 역설적인 행복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만큼이나 불가사의하다.

 

나는 왜 읽는가?

 

하도 삶이 허접하여...

좀 읽으면 허접함이 좀 가려질까 하여 읽는다.

 

그래서 읽으면서 좀 나아졌나?

 

읽으면 좋은 점은,

나랑 비슷하게 허접한 사람들이 옆에 많다는 걸 발견한다는 것이고,

다만, 그래서 위안을 받을 뿐이다.

나아지진 않는다.

인간은, 원래 허접한 존재임을 배우는 거랄까.

 

그런데 왜 읽나?

 

안 읽는 인간들은, 허접한 줄도 모르는 거 같아서,

혐오스런 인간이 되진 않기 위해서... 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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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2-04-20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일년에 많이 읽어야 60권정도 밖에 안되서 책 읽는 인간입니다라고 할것도 못되지만, 그래도 가끔 도대체 왜 책 읽는 일에 왜 이렇게 집착을 할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곤 하는데 글샘이랑 좀 비슷한 결론이에요. 좀 더 나은인간이 되려고...지금 허접하니까 더 허접해 지지 않으려고 그래서 읽는다라는... ..
그런데 글샘 원래 사람들 손금이 다 비슷한건가요?
저도 글샘 따라 해봤는데 잔손금 약간을 빼고는 똑.같.네요
일년에 시 한편도 안 읽는 저도'시인'되는 건가요 ㅎㅎㅎㅎ

글샘 2012-04-20 10:34   좋아요 0 | URL
일년에 한 권도 제대로 안 읽는 인간도 많을걸요, 뭘~
비슷한 결론이세요? ^^

손금이 거의 비슷하죠. 시인처럼... ㅎㅎㅎ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봄은 우리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네.

행복을 찾아 길을 떠난, '파랑새' 이야기는 세상에 너무도 흔하다.

그렇지만, 늘 파랑새의 귀결점은 '우리집'이었다.

우리집의 핵심은 '나'다.

 

왜 읽는가?

저자는 카프카의 한 구절로 답을 대신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카프카)

 

만약 나더러 독서 경험을 나누는 독서회를 꾸리라면 어떤 책을 꼽을까?

나라면, 조르바, 안나 카레니나, 미셸 트루니외, 광장, 법정, 손철주와 오주석 정도가 떠오른다.

시인 김선우나 장영희, 성석제 정도도 이야기할 것이 많을 것 같고.

 

이 책에선 이철수로 시작해서 최인훈, 이오덕, 김훈, 보통, 고은, 김화영, 카뮈, 쿤데라, 한형조까지 자신의 독서 세계를 일람하여 보여준다.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에서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는 기필 期必을 거두십시오.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오만과 아만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구절로 독자의 독서 습관에서 '근기'를 중시하여야 하지, '양이나 질'에 매몰되면 안 되는 것을 보여준다.

책을 몇 권이나 읽느냐,

어떤 책을 읽는다고 남들에게 보여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삶 자체가 다 그렇다.

 

이철수 판화야

워낙 명문이 많지만,

 

땅콩을 거두었다

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떨어진 놈!

 

심장을 콱, 움켜쥐는 말이다.

탐진치 삼독에 얽매이는,

줄기를 놓지 않는 나를 꾸짖는 소리 같다.

 

핑크 마티니의 <초원의 빛>을 들으면서,

삶의 속도를 생각한다는데...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자연에 대한 관조는 역시 탁월하다.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더이상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다.

 

무위는 존재의 뼈대이다.

나무의 늙음은 낡음이나 쇠퇴가 아니라 완성이다.

 

결핍이 결핍되어 있는 시대.

이런 말들을 얻는 일은 소중하다.

 

삶에서 만나는 사랑에 대하여,

보통의 이야기 한 도막.

 

우리 모두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해서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사랑을 하게 되면, 나보다 상대가 중요해진다.

어떤 상대를 사랑하느냐에 따라, 사랑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인데,

비트겐슈타인도 인용하고, 저 뒤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등장하는 이야기다.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린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훌륭한 사람과의 대화는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한 것이다.

 

감각적 경험의 획기적 기억을 보통은 키스를 예를 들어 이야기한다.

 

키스는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다.

두 살갗이 접촉하게 되면,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가,

암호화된 말의 교환은 끝이 나고 드디어 이면의 의미들을 인정하게 될 터였다.

 

물길의 소리

                                 - 강은교 -

그는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렇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물이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항거하는 소리, 물이 바삐 바삐 은빛 달을 앉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물이 소나무의 뿌리를 매만지는 소리……
물이 햇살을 핥는 소리, 핥아대며 반짝이는 소리,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강은교의 시를 읽노라면, 키스보다 더 진한 감각적 경험이 서로 얽혀드는 몸의 시를 읽게 된다.

허리를 쓰다듬는,

뿌리를 매만지는,

햇살을 핥는, 핥아대며 반짝이는, 

몸을 비비는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육감적 언어들이 얼마나 펄떡거리며 살아있는지...

 

작가는 책을 읽으면서 온몸이 촉수인 사람이 되려고 한단다. 

알랭 드 보통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책을 읽고 나면 촉수가 더 예민해 지는 것 같다고 한다.

충분히 공감이 간다.

책을 읽을 때는 다양한 사고들이 서로 호환되고 지식이 쉽게 흡수되는 경향성이 

물매가 빠른 바닥처럼 속도감이 나니 말이다.

 

인생의 봄날이 있다. 

그 봄날에 만난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 모두를 담고 있는 한 사람이다.  (291)

 

나는 지금 '한 사람'을, '세상 모두를 담고 있는 한 사람'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 봄날인가?

 

이 책을 읽고 나면,

밀란 쿤데라를, 안나 카레니나를, 한형조를, 카뮈와 김화영과 장 그르니에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인생의 봄날,

세상 모두를 담고 있는 한 사람과 함께 읽고 싶은 '책'들과 조우하고 싶은 이라면, 기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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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2-03-2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읽으셨군요. 보물 같은 책이죠. 섬은 사놓고 아직 들추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아직 겨울안에 꽁꽁 갇혀있는 느낌이지만, 이제 곧 봄이 시작되겠지요.
해운대에서 누리마루까지 이어지는 동백꽃 가득한 산책길이 그립네요.

글샘 2012-03-25 20:07   좋아요 0 | URL
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책들이 참 좋더군요.
저랑 취향이 좀 비슷한 듯. ^^

장 그르니에의 '섬'은 아무때나 읽히는 책이 아니에요. ^^
도서관에서 1년 중 기분이 제일 나쁘고, 착 가라앉아서 사표를 쓰고 싶은 날,
그런 날 읽으면, 장 그르니에란 남자가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말을 걸어 올 겁니다.

화창한 날, 그 남자는 말 안 걸거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