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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평점 :
영화가 이 철학 교수를 캐스팅했을까? 아니면 이 철학 교수가 영화를 캐스팅했을까?
암튼 캐스팅은 제대로 한 것 같다.
우선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 같은 영화를 소재로 삼았다.
나는 그중 안 본 것도 많지만, 슈렉, 매트릭스 등을 철학의 소재로 삼은 것은 잘 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화를 못봤을 사람을 위해, 또는 나처럼 졸면서 비디오로 봐서 줄거리가 가물가물한 관객을 위해,
줄거리를 쌈빡하게 정리해 준 것도 선생님다운 일이었다.
그리고는 철학적인 분석을 곁들였는데, 이것도 제법 읽을 만 하다.
물론 철학적인 구도가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면은 <철학>이란 놈이 원래 밥맛이라서 그런 것이고.
철학이란 따지는 학문인데, 따지는 넘 치고 밥맛 아닌 놈 없다.
그런데도, 책을 읽어나갈수록 마음에 드는 것은,
제법 어려운 낱말들을 참 쉽게 설명한다는 거다.
<숭고>가 절망, 불쾌, 고통,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들을 통과해서 도달하게 되는 안도감, 쾌적함, 쾌감, 기쁨의 정서를 뜻한다고 하는 설명은 내가 본 어떤 비평가들의 설명보다 쉬웠다. 그 예로 슈렉을 든 것도 탁월하다.
요즘 워낙 학력 인플레가 심해서 어떨지는 몰라도, 고등학교 윤리를 배웠을 정도 수준이라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에피스테메, 아뷔투스 같은 생소한 낱말들이 나오지만 독자를 위해 충분히 설명을 깔고 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그리고 나서 또, 덤으로 얻게 되는 세상 읽기는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보너스>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왕주란 작가에게 이렇게 칭찬을 늘어놓고는 있지만, 내심 한켠에선 그에게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서양, 중국의 철학 뿐만 아니라, 한국어의 구사에도 소질을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
그는 포스트 모던한 시대의 <유목민적 지식의 조합>에 분명 성공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서양 철학자들의 <명제> 말고, 주역 같은 동양 철학이나 한국 철학에 따른 분석도 맛보여주었으면 금상첨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
13쪽의 범부필부는 아무래도 요상스런 낱말같다. 필부필부는 들어 봤어도...
27쪽의 파란곡절도 희한한 말이다.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을 짬뽕하셨나? 아니면 '파란 우여'님한테 홀렸나?ㅋㅋㅋ (86쪽의 배게는 베개의 오타라고 귀엽게 봐 준다손 치고,)
95쪽의 순간der Augenblick은 눈 Augen 을 한번 감았다 뜨는 blicken 그 사이에 흐르는 아주 짧은 시간을 뜻하는 독일어라고 하는데... 아니, 한자로 瞬間을 찾아 보시면, '눈 깜박일 순, 사이 간'이라고 친절하게 나와 있을 텐데... 그러면 눈 깜박일 사이라는 설명이 더 쉬울텐데... 굳이 독일어까지 들이대시면... 아니되옵니다.
그가 쓰는 한자 성어는 어딘지 어색한 것이 많다. 전선에서 죽음과 삶의 백척간두에 놓인 전사들(312쪽.)...에서 백척간두란 풍전등화와도 같이 위태롭다는 뜻의 한자 성어인데, 여기서는 '기로'나 '갈림길'이 어울린다. 죽음의 백척간두는 말이 좀 되지만, 삶의 백척간두란... 헐~이기 때문이다.
참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필자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아쉬워서 푸념하는 말이다.
그가 디 아더스에서 한 말...
중동... 에 대해 헷갈린 후,,, 이런 사실을 알게 되고서, 처음 떠올린 것은 소박한 분노, 즉 꺾인 자존심에 대한 반감이었다. 하지만 방향이나 명칭 등은 차라리 사소한 것이다. 나중에 여기에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이 엮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곧 역사, 사회, 지리 등 텍스트를 채우고 있는 내용들조차 깡그리 힘있는 유럽 중심의 시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여기에 철학을 더 덧붙이고 싶다.ㅠㅠ 이 책이 철학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워낙 정신적인 비중이 크기도 하고...)
우리에게 명백히 서쪽인 방향을 동쪽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처럼 역사, 종교에 대한 지식들도 우리와 상관없이 그들이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논리틀들을 그대로 옮겨와서 배우고 가르치고 시험에 출제하고 답을 쓰며 따라해야 했으니 말이다.(이 책에 등장한 서양 중심의 철학자들은 그들의 개념으로 논지를 전개함이 더 적절했으리라고 애써 위안하자. -.-;;; 그저 따라해야 했던 것은 아니라고...)
이 관행은 바뀔 수 없는 것인가. 이제 우리 관점에서 방향도 정하고, 시각도 정해서 우리의 체취와 지문이 묻어나는 내용들을 우리의 언어로 우리 식으로 말해 볼 수는 없을까?(84쪽)
그분이 쓰신 그대로.... 그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분이 다음 번엔 꼭 그렇게 하시길 간절히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