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공원의 하루 -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23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23
조미자 그림, 강주경 글 / 마루벌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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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공원의 하루>는 투명수채화가 돋보이는 그림책이다. 화가의 고향, 춘천에 있는 어느 공원의 하루가 공간적, 시간적 배경이다. 이 공원이 새벽 안개를 벗는 시점에서 밤이 되어 다시 또다른 새벽을 기다리는 시점까지, 공원은 여러 색깔의 투명 수채 옷을 입고 있다. 주인공은 나무의자이다. 그 옆에 가로등 하나, 또 다른 쪽 옆에는 쓰레기통. 그리고 주위는 울창한 나무숲이다.

이 그림책을 먼저 그림부터 보면 하루동안의 색깔이 시간의 추이에 따라 섬세하고 아름답게 입혀져있다. 우리는 하루동안 주위의 색깔을 얼마나 주의깊게 들여다보고 느끼는지... 화가의 투명한 마음이 느껴져 참 기분 좋은 그림이다. 물빛, 연두빛, 초록, 파란빛, 다시 녹색에서 주황빛으로, 날이 어두워지면서 짙은 갈색에서 짙은 잉크색까지. 밤이 되어 사방이 흑갈색인데 연극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노란 가로등빛이 나무의자를 비추어주는 장면은 따스하고 온화한 느낌으로 인상적이다.

그림 못지않게, 잔잔한 어조로 들려주는 글은 커다란 여백을 두고 적혀있다. 특이한 것은 글자들, 특히 의성어와 의태어들이 적절히 동작을 하며 몸짓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글자의 크기와 색깔 그리고 글자의 배열까지, 전체적으로 차분한 인상의 그림책을 생동감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마치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노는 모습을 보여주듯이, 나무가 한껏 파란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듯이, 여우비의 빗방울이 공원에 생기를 주고 비를 실컷 마신 나무의자도 '새싹이 돋을' 것처럼 그렇게.

하루에도 여러번 다른 색의 옷을 갈아입는 공원은 어쩌면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반복의 일상 속에 숨어있는, 경이로운 소리들이 다채롭게 어우러지는 곳이다. 새벽의 푸른 빛을 뚫고 공원의 하루는 '작은 소리들' 속에 시작된다. 나무들이 투두둑 잎을 떨고 일어나는 소리, 사람들 소리, 강아지 발자국 소리, 바람소리, 초록 나뭇잎을 따라 까르르 웃는 아이들 웃음소리, 후두둑 빗소리, 비가 그치고 똑똑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툭툭툭 나뭇잎이 그림자에 떨어지는 소리, 밤이 되어 가만히 들리는 풀벌레 소리, 부엉이가 들려주는 자장가 소리... 소리는 끝이 없을 것 같다.

이 모든 소리를 듣고 있는 건 한 곳에 변함없이 앉아있는 나무의자이다. 나무의자는 아이들도, 젊은 언니와 오빠도, 신문지를 덮고 자는 아저씨도 그리고 하루종일 뛰놀던 강아지도 언제든 품어준다. 공원에 가면 늘 그 자리에 있어서 편안한, 아픈 다리를 쉬어 갈 수도 있는 평범한 나무의자이다. 나무의자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타인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주고, 자신과는 다른 색깔에 자연스럽게 물들 줄도 아는 넉넉함을 지니고 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며 땅도 하늘도 나무도 해님에게 물들 때, 나무의자도 공원을 찾은 언니 오빠와 함께 물든다. '좋아하면 서로 물들어 가요.'라고 수줍은 듯 속삭인다.

나무의자는 밤이 되어 혼자가 되어도 심심하지 않다. '나무는, 땅은, 하늘은 혼자가 되기도 해요. 혼자되는 게 꼭 심심한 것은 아니에요.' 가만가만 들려주는 글이, 어둠 속 나무의자를 비추는 노란 가로등 불빛마냥 환한 인상으로 마음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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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란도트 미래그림책 26
윈슬로우 펠스 그림, 마리아나 매이어 글, 이선오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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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유명한 오페라 '투란도트'가 그림책으로 재현되었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성공적으로 공연되었지만 가 보지 못한 나는, 기묘한 분위기의 투란도트 공주와 그녀를 닮은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표지를 보는 순간 바로 이끌렸다. 속표지에는 호랑이와 용의 동양적 문양이 가지런히 그려져 있다. 극적인 이 이야기는 옛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를 줄기로 하고 있다. 세가지 수수께끼와 사랑, 그리고 얼음 심장의 아름다운 여인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투란도트>의 매력은 '동굴에서 잠자고 있던 용과 먹이를 노려 보고 있던 호랑이까지도' 귀를 쫑긋 기울일 정도로 빼어난 '투란도트 공주의 노랫소리' 같았다. 무엇에 홀린 듯 가슴을 멍하게, 머리를 텅 비게 하는 노랫소리 같은 것 말이다.

달의 신이 내린 저주로 싸늘한 얼음 심장을 가지게 된 투란도트는 그 차갑고 위엄있는 아름다움은 자신도 어쩌지 못한다. 그녀에게 사랑을 확인시키고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어려운 관문에 도전하는 뭇 청년들은 과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공주에게 갔던 것일까? 권력에, 재물에, 명예에 이끌려 사랑을 빙자했던 건 아니었을까? 진정한 사랑이 없는 이 나라(중국의 베이징으로 소개됨)는 더욱더 얼음 같이 차갑고 날카로운 곳으로 변한다. 투란도트는 가짜 사랑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청년들의 머리로 성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사람들은 점점 집단 광기에 전염되는 듯하다. 그래서 공주의 세가지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한 청년이 처형당하는 광경에 날이 갈수록 열광하게 된다.

얼음 심장을 가진 공주를 차라리 불쌍한 존재로 보고, 사랑으로 끓는 뜨거운 피로 희망을 가지고 공주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이방의 청년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칼라프는 투란도트의 세가지 수수께끼를 차례로 맞히고, 투란도트는 이방 청년의 이름을 맞혀 공주가 정한 법대로 결혼식을 올리며 '서로 사랑하고 지켜주며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을 맹세'한다. 이제 이 나라는 오직 사랑만이 법이 될 거라 약속한다. 사랑이란 이름의 땅 위에 살게 된 백성들은 풍요와 평화를 누리며 산다는 이야기이다.

<투란도트>의 글은 초등 중학년까지 적합해 보인다. 극적인 전개에 따라 극본을 쓰고 연극을 해 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그림이 글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그림책의 성격에 따라, <투란도트>의 색감은 처음과 끝이 다르다. 싸늘한 얼음빛은 갈수록 따스한 주황빛으로 바뀐다. 두꺼운 눈으로 뒤덮힌 나라,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의 공주, 은회색 호랑이, 온 마을에 어른거리는 처형당한 사람들의 섬뜩한 얼굴들. 그러나 칼리프가 공주 앞에서 수수께끼를 맞히는 장면에서부터 색감이 따스해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세번째 수수께끼의 정답, '투란도트 당신'을 맞히는 장면에서는 은회색의 호랑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을 크게 벌려 포효하고 공주의 얼음심장은 절정에 달하는 듯하다.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이다. 호랑이는 연한 갈색을 띠고 있고 표정은 유순하다. 첫장면 도입부의 동그라미에 그려져 있던 얼음 나라는 이제, 주황색 배경에 풍요롭게 열린 복숭아 열매와 사랑을 나누는 두 마리의 새로 바뀌어 있다. 한편의 극적인 이야기와 그림으로 상상력의 나래를 한껏 펼쳐보며 오페라의 무대와 인물, 음악을 그려볼 수 있으니, 그림책의 장점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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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초충도 그림으로 엮은 풀.벌레 이야기
신사임당 원화, 김해원 글 / 이미지프레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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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획이 돋보이는 산뜻한 몸단장을 하고 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라 하니 벌써 설레는데 게다가 풀벌레 이야기라니, 얼른 책 속의 이야기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하게 한다. 신사임당은 주변의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도 애정을 가지고 세밀한 관찰로 섬세하게 화폭에 담아냈다. 그것으로 만들어진 열 폭 병풍에 있는 그림들을 자유자재로 엮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야기는 봄 날 바스락바스락거리며 잠을 깨는 노랑나비 한 마리에서 시작한다. 노랑나비는 아직도 단잠을 자고 있는 큰 줄 나비 친구를 깨우기위해 친구들을 찾아나선다. 곤충 친구들은 하나씩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면 도와주겠다고 한다. 사소한 것 같지만 자신들에겐 중대한 부탁을 서로 들어주는 모습도 정답다. 결국 방아깨비는 개구리가 자기를 괴롭히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개구리는 노래를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입이 큰 개구리는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를 따라 모든 벌레들의 노래잔치가 벌어진다.

노래 소리에 달콤한 잠을 깬 큰 줄 나비 한 마리!드디어 친구를 깨웠다. 서로를 다치지 않게 보듬는 마음으로 지내는 벌레들의 모습이 신사임당의 그림 못지않게 신선하고 은근하다. 정지된 그림 속에서 이렇듯 발랄한 이야기를 솎아내어 움직이는 한 편의 영상을 그려냈다. 부록으로 들어있는 CD를 보며 이야기를 들으면 이야기는 나비의 날개를 달고 나풀나풀 날아오른다. 봄날 햇살마냥 나른하면서 은은한 이야기가 살아서 움직이는 초충도 속의 벌레들처럼 살아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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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 Dear 그림책
숀 탠 글 그림, 엄혜숙 옮김 / 사계절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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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정엄마께서 작은 아이에게 준 누런 봉투에는 내가 학창시절 모아 두었던 예쁜 엽서들과 코팅하여 모아둔 아기자기한 책갈피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때는 그런 것들을 보석과도 같이 귀하게 애지중지 모으며 뿌듯해 했던 기억이 이제는 안개 속마냥 아련하다. 물질의 풍요가 나에게 준 것과 나에게서 앗아간 것이 되살아나며 나의 일손을 잠시 멈추게 하였다. 다시, 내 아이가 그것들을 못 버리게 하며 소중한 보물 다루듯 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이 바로 내가 잃어버린 것들 중 하나가 아닌가 씁쓸하였다.

아이들 심리의 어두운 측면을 잘 비춰 준 <빨간 나무>의 '희망'이 준 신선한 충격에서 벗어나기 얼마 전 <잃어버린 것>을 만났다. '너무 바쁜 까닭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주는 이야기'라는 부제가 아주 작은 글씨로 책표지에 씌어 있는 것을 보면 작가의 의도를 조금은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진부한 소재를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방식은 아주 독특하며 낯설다. 책표지에는 무채색의 어느 규격화된 미래 도시의 거리에 기이한 모양의 물체, 바로 '그것'이 있어야할 곳이 아닌 곳에 있다. '돌아갈 수 없다'는 표지판을 독자로 하여금 그냥 놓쳐버릴 수 없는 곳에 세워두었다. 앞만 보고 달려야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속표지에는, 내가 모았던 엽서나 책갈피들처럼, 하찮은 그러나 특별한 병뚜껑들이 줄을 서 있다. 그날도 주인공은 바닷가에서 병뚜껑을 수집하다 버려진 그것을 발견하고 주워서 온다. 작가는 잃어버린 것을 크게 두 가지의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의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경험과 인식의 폭으로 각자의 잃어버린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의미의 잃어버린 것으로는 동심을 떠올릴 수 있다. 시간에 쫓기며 바쁘게 살아가는 어른이라는 존재는 순수하고 소박한 기쁨의 가치를 외면하는 존재이다. 사소한 것에서 즐거움을 건져올리는 진정한 즐거움을, '그것'은 먹이로 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그것'에게 주는 먹이는, 트리가 그려져 있는 상자에서 꺼내는 별, 공모양 장난감, 병뚜껑 같은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동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런 것들은 사물에의 진심어린 애정과 호기심을 반영하는 일련의 상징이다. 주인공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버려진'그것'을 발견하는 기회가 줄어든다. '보고도 그냥 지나쳤거나 이젠 다른 일들로 너무 바쁜 탓'일게다.

사회적인 의미의 잃어버린 것으로, 기계문명 혹은 디지털 시대가 빼앗아간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 버려진 '그것'은 기계화된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듯, 작은 슬픔의 소리를 내고 있다. 빠르고 정확한 기계 대신 더디지만 느긋하게 손이 하는 즐거움을, '그것'은 그리워하고 있다. 워드프로세서에게 밀려난 수동타지기를 비롯하여, 벽시계, 연필, 노젓는 배, 책, 아코디언 그리고 컴퓨터 게임에 밀려난 비누방울 불기와 비석치기 놀이 같은 것들이 '그것'을 충분히 행복하게 만든다. 사람들의 표정도 옷도 건물도 온통 무채색을 하고 있는 이 거리에서 '버려진 것'은 썩 어울리지 않으며, '왠지 이상하고, 슬프고, 버림받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마지막 장면의 양동이와 막대걸레는 기계가 앗아간, 손이 하는 소박한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빨간 나무>에서 처럼 <잃어버린 것>에서도 작가는 역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버려진 것'이 아직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애써 찾아야하지만 '버려진 것'이 행복해 할 수 있는 장소는 분명 있었다. 그런 데가 있으리라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런 곳에 말이다. 그곳을 찾아 빨간 초인종을 누르는 것은 우리들의 자유이며 취향이다. 한눈 팔지 않고 빠르게 달리며 사는 우리들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 등잔밑이 어두운 꼴은 되지 말자. 공기놀이 같이 하자고 하는 큰아이에게 바쁘다며 핑계를 댄 것이 미안해진다. 작은아이에게는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나란히 앉아 함께 읽자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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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푸른 나의 아버지 - 햇볕은 쨍쨍 3
황선미 지음, 김병하 그림 / 두산동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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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미 작가의 작품들을 만날 때면 느끼는 것이 있다. 소설 혹은 동화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있음직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지면 위의 아름다운 건축물. 우리는 그곳을 한발한발 들어가며, 애둘러가며, 한 귀퉁이에 앉아 가슴을 치기도 하며 조용히 '나'의 이야기에 젖어 든다. 내안으로 침잠하여 마알간 얼굴로 새로이 떠오르는 '나'를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그런 힘이다. 특히 이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로 동화의 소재를 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동화의 원제인 '내 푸른 자전거'도 작가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썼다고 들었다. 어려운 시절, 꿈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꿈을 버리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던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줄곧 나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이제는 고희를 넘긴지도 두 해가 된 늙으신 아버지. 옆길을 모르고 고지식하고 성실하게만 살아오신 아버지. 열 아홉에 피난내려와 의지가지없는 곳에서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의 힘든 세월을 갉아먹고 단발머리 여학생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한 때는 사교적이지도, 융통성이 있지도 못한 아버지를 답답하게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의 단단한 어깨가 어느 날 슬퍼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늘 나를 믿고 힘든 상황에서도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셨다. 하시고 싶은 말씀도 꼭꼭 마음 속에 두시고 그저 바라보시기만 하다가, 속 깊은 곳에서 달군 회초리로 일침을 놓으신다. 눈치도 못 챌 정도로 짧게.

주인공 찬우의 아버지는 찬우에게 있어 자전거 바퀴와도 같다. 나를 태우고 팽팽 달려가는 자전거의 두 바퀴. 나는 그 바퀴에 의지하며 몸을 싣고 세상을 달린다. 바퀴는 닳고 닳지만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아버지란 이름은 묵직하면서도 슬프다. 나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내가 굴려 갚아야 하는 빚이다. 내가 갉아 먹고 자란 세월만큼 나의 아버지는 주름이 깊이 패인 얼굴을 하고 계신다. 하지만 아버지의 정신은 상록수의 곧은 잎처럼 푸르다. 아버지의 힘은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은근하고 거대하다. 오늘도 열심히 나의 자전거 페달을 밟아야겠다. 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나의 인생이라는 빛나는 자전거를 말이다. 그 아래에선 언제나 든든히 아버지가 받쳐주고 계신다. 아버지, 목이 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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