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궁가 - 어린이 판소리 그림책
이육남 그림, 이현순 글, 김동원 감수 / 초방책방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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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가에 이어 이 판소리 그림책은 또 다른 느낌으로 와 닿았다. 6학년 아이의 창이라 그런지 심청가를 한 아이보다 음성에 힘이 있다. 아니리 부분의 대사도 어찌나 재미있게 뽑던지. 그저 절로 웃음이 난다. 그런데 심청가에서 보다는 어려운 말이 많이 나와 뒷편에 수록한 뜻풀이를 꼭 참고하면 좋겠다. CD의 재생시간은 심청가와 마찬가지로 꼭 20분이었다. 그리 오래지도 짧지도 않은 것이 아이들과 함께 듣기에 마춤이다.

<수궁가>의 또 다른 재미는 그림보기에 있다. 동물 민화 풍의 그림이 연결되어 그려져있는 병풍을 보는 것 같다. 동물들은 하나같이 그 특징이 잘 그려져있고 인상도 풍부하다. 용왕은 정말 용으로 휘감겨있는 듯 그린 것도 특이하다. 맘껏 상상해 볼 수 있는 배경이라, 아이들과 함께 이 판소리의 공간적 배경을 그림이나 조형으로 표현해 보아도 좋겠다. 물 밖과 물 속의 다른 모습은 물론이고, 각자의 상상에 맡겨 기상천외한 진풍경들이 표현되어도 괜찮겠다.

<수궁가>는 역시 토끼가 주인공이다. 간사하다하는 토끼는 얼마나 임기응변에 강하며, 배짱도 있고 밉지 않은 허풍도 있는지. 가만 들여다보면 씩 웃음이 나는 인물이다. 동물의 왕이라 생각하는 사자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힘 없고 작지만 말 잘 하는 토끼가 왕이 되니, 이 역시도 통쾌하다. 영리한 꾀로 용왕을 속이고 자신을 죽을 곳으로 꾀어 간 자라를 조롱하고 달아나는 토끼를 보는 것이 유쾌하다. '창'으로 들으면 기분이 고조되어 흥이 더욱 살아난다.

이 그림책은 연령을 구분할 필요가 없이 함께 듣고 보면 좋겠다. 각자의 마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듣기에 부족함 없이 배려되어 있다. 해설과 창 부분의 글을 색깔을 달리 하여 적어 둔 것도 그렇고, 뒷 부분 풀이에 진양조, 중몰이 같은 가락을 구분해 둔 것도 그렇고, 창과 아니리를 구분할 수 있게 '아니리'라고 적어둔 것도 그렇다. 가객이 하는 대사 부분인 아니리가 썩 맛깔스럽고 상기된 마음을 잠시 가다듬어가는 막간도 되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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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마들린느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7
루드비히 베멀먼즈 글 그림, 이선아 옮김 / 시공주니어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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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린느는 귀엽고 앙증맞은 여자아이다. 쥐나 호랑이를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씩씩한 아이이기도 하다. 항상 변함없는 표정과 자태로 온화하고 근엄한 기숙학교 수녀선생님을 놀라겐 한 첫번째 아이이기도 하다. 날마다 같은 날을 보내는 그런 마들린느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다른 아이들에게도 수녀선생님에게도 어떤 일이 생기는지, 그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 보고나면 허물없는 웃음이 배시시 나온다.

아이들은 샛노란 색이 참 잘 어울린다. 노란색의 밝음, 귀여움, 순수함, 가벼움, 희망, 자기만족, 이기심 같은 이미지들이 아이와 잘 어울려서 그런가 보다. 마들린느를 포함한 열두 여자아이들은 샛노란 색으로 채색되어있다. 수녀선생님의 검은색 수녀복이 아이들의 색과 대비되어 있다. 이 색들의 경계에는 화사한 붉은 빛을 띤 꽃송이가 소담스럽게 꽂혀있는 꽃병 하나가 있다. 꽃병을 전환점으로 열두 아이들의 표정과 동작이 바뀌어있다. 그걸 발견하고는 어찌나 웃기던지, 막 웃음이 나왔다. 꽃병 이전의 그림에 '두 줄 나란히'란 제목을 붙인다면, 그 이후의 그림에는 '맹장수술 해 줘'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

고풍스러워보이는 프랑스의 어느 기숙 학교에 다니는 열두 아이들은 수녀선생님이 잘 가르쳐놓은 대로, 양치질을 할 때도, 학교 밖을 걸어다닐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두 줄 나란히' 한다. 엄격한 규율과 질서가 몸에 배인 것 같고 아이들은 누구하나 그걸 흐트리는 아이가 없다. 표정도 하나같이, 만족스러운지, 밝다. 그래도 아이들의 감정까지 딱딱한 규율 속에 갇혀있는 것 같진 않아 다행이다. 기쁜 걸 알고, 슬픈 걸 알고, 불쌍한 것도 느끼는, 맑은 물을 닮은 아이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수녀선생님을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마들린느가 맹장염으로 배가 아파 울고 있고, 한밤의 소동이 벌어진다. 마들린느는 수술을 받고 꽃이 있는 병실에 입원하여 있다. 열흘이 지나 선생님은 열한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꽃을 사 들고 병실을 찾는다. 방 가득 있는 장난감이나 인형 따위보다 아이들에게 더 놀랍고 인상깊었던 건, 마들린느가 당당하게 옷을 걷어 보여주는 맹장수술 자국이다.

그 날 학교에 돌아온 아이들은 여느 때와 다르다. 양치질을 할 때도 '두 줄 나란히'가 아니고 표정도 '하기 싫어 죽겠다'이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전에는 양팔을 가지런히 내리고 반듯이 눕던 아이들이 팔을 머리 쪽으로 돌려 활개치듯 누워 있다. 표정도 아직 자기 싫다는 듯 시큰둥하다. 그러더니 한밤중 떼울음이란! 무슨 일이 또 생겼나, 놀라서 뛰어 온 수녀선생님에게 다 같이 맹장수술해 달라며 울고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꼬마 아가씨들을 부드럽게 달래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조용히 잦아드는 수녀선생님의 얼굴과 그 뒤로 빛나는 별들. 글자크기도 점점 숨을 죽이고 있다. 수녀님이 놀라 뛰어가는 동작은 쌔앵~하고 바람소리가 들릴 듯하고, 아이들이 우는 모습은 그냥 그대로 귀엽다.

<씩씩한 마들린느>의 그림과 글은 무게있고 따뜻하면서 유머러스하다. 노랑과 검정 외에 바깥 세상의 색은 다양하고 깊이있게 표현하고 있다. 노랑과 검정의 색으로 표현된 그림은 윤곽선 처리도 아이의 그것처럼 단순하고 덧칠이 없다.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그림 아래에 한 두 줄 정도로 리듬감있게 실어 놓은 글은 노랫말처럼 반복되는 어구가 있어 더욱 경쾌하게 읽힌다. 글보다 그림이 더 많은 걸 자세히 보여주는 그림책이라서 그림을 아이가 볼 수 있게 크게 펴서 보여주며 글은 엄마가 리듬을 살려 재미있게 읽어주면 좋겠다.

아이들은 어른이 줄 그어놓은 선에 딱 맞추어지질 않는다. 만약 그런 아이가 있다고 자랑하고 싶다면 그 아이가 참고 있을 스트레스를 먼저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줄 알면서 '두 줄 나란히'를 툭 하면 잔소리같이 늘어놓는 엄마다. 아이의 순수함과 어른의 자상함이 미덕으로 마음에 남는 그림책은 그래서, 흐려진 내 마음의 창을 말갛게 닦아주는 소중한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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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가 - 어린이 판소리 그림책
최은미 그림, 이현순 글, 김동원 감수, 이슬기 어린이 소리녹음 / 초방책방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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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가>는 초방책방에서 어린이 판소리 그림책으로 나온 첫번째 판이다. 이것을 구입하고 나니, <수궁가>가 뒤를 이었다. 이것도 장바구니에 담아 두고 리뷰를 쓴다. 아이들과 <재미있는 우리 고전 1>을 읽으면서 아이들에게 판소리의 맛과 멋을 어떻게 느끼게 해 줄까 고민하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어찌나 기쁘던지. 앞의 리뷰어가 쓴 마이리뷰도 그런 내 마음을 부추기는 데 한 몫하였다.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은 아이 어른 모두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판소리로 들었을 때 그 정서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애절함과 반가움, 절망과 희망이 고수의 추임새를 따라 마음의 파도를 타고 넘는다. 구절구절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꾼의 창은 듣는 이를 울리기도 웃기기도 한다. 우리 안에 있던 신명이 스물스물 살아난다. 그래서 판소리는 듣는 이와 하는 이가 하나 되어, 무대란 따로 없는 듯하다.

이 그림책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우리 것의 멋을 한껏 풍기는 수수함이 있다. 그림은 그림이되 탈놀이를 하고 있는 두 등장인물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온다. 심청이와 심학규이다. 탈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탈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어깨를 덩실거리는 동작이 시선을 잡아끈다. 배경이나 다른 등장인물은 과감히 생략하여 효녀 심청이와 불쌍한 아버지 사이의 애닯은 이야기로 몰입하게 한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옛이야기를 파헤쳐 비판하고 다시 쓰는 작업은 여기선 하지 않는 게 백번 옳다.

판소리 CD는 맨 뒤에 들어있다. 재생시간은 20분 정도였다. 서울의 모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창을 하고 김동원님이 고수겸 해설자 역할을 하고 있다. 역시 CD가 들어있는 멋진 그림책 <사물놀이>에서 멋진 글을 보여주었던 김동원님이, 여기서는 또박또박하니 구수한 음성으로 해설까지 하고 있어 쉽고 재미있게 들린다.

창을 하는 아이의 솜씨도 여간내기가 아니다. 또래친구인 여학생이 창을 했으니 더 관심이 가는 눈치다. 판소리 고유의 맛을 없애지 않으려고 옛말을 그대로 썼는데, 내용을 이해하는데 그리 크게 걸림이 되지는 않는다. 뒤에 부록으로 실려있는 말풀이를 보면 도움이 된다. 내용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것 보다 우리 음악 판소리의 멋을 가락과 장단으로 느낄 수 있으면 더 좋겠다.

해설 부분과 창 부분을 그림책 상에 글자의 색을 달리하여 놓아서 아니리와 창을 구분해 볼 수도 있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재구성한 전통 판소리 그림책이란 점에서 기획도 정성도 모두 돋보이는 책이다. 참 흐뭇하다. 창을 하는 아이의 카랑한 듯 걸쭉한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아니 가슴에서 왱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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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서의 왕의 하루 전통문화 즐기기 1
청동말굽 지음, 박동국 그림, 한영우 감수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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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는 작년 여름(3학년) 서울로 문화재 답사를 갔다. 그 곳에 살고 있는 숙모에게 동행을 부탁하고 부산에서 혼자 먼 길을 보냈다. 아이가 간 곳은 서대문 형무소, 수원 화성, 창경궁, 종묘를 비롯한 몇 곳과 경복궁이었다. 아이는 거을린 얼굴로 알차게 익은 모습을 하고 돌아와 나를 기쁘게 하였다. 그 중 화성과 경복궁을 제일 맘에 들어하며 사진을 붙이고 글을 써서 스크랩북을 만들었다. 나도 가보지 못한 곳이라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함께 들떠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느 날, <경복궁에서의 왕의 하루>라는 '전통문화 둘러보며 즐기기' 시리즈가 나온 걸 보고 무척 반가웠다. 경복궁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지은 궁궐인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오랜동안 빈 터로 남아 있다가 고종 1865년 흥선 대원군에 의해 백성의 피와 땀으로 재건되었다. 오늘날 우리 것에 대한 자존심과 긍지를 생각하면 역시 역사적 평가는 세월이 흐른 뒤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 점점 더 우리 것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우리 것에 대한 재평가와 재해석도 갖가지 눈높이에 맞춰 나오고 있어 좋은 일이다. 특히 서양 것에 더 친숙한 아이들에게 우리 것은 단지 우리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복궁에서의 왕의 하루>를 조심스레 펼쳤다. 마치 궁궐에 들어갈 때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가다듬듯 했다. 먼저, 근정전을 가운데로 두고 멀리서 조망한 그림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책장을 넘기면 강녕전(왕의 침전) 주위로 어슴프레 날이 밝아지는 그림이 맑은 기운을 불어 준다. 계속 이어지는 그림은 고증을 거쳐 세밀하고 풍부한 색감으로 그려놓았다. 기와, 잡상, 매회틀(왕이 대변을 보는 통), 왕의 여러가지 의관, 자경전의 아름다운 굴뚝 문양과 꽃담의 문양들까지 퍽 섬세하고 곱다. 자경전 꽃담을 배경으로 아이가 찍어 왔던 사진 옆에 아이가 적어 놓은 글귀는, '무늬가 도드라져 보이지만 만져보면 평면이다' 였다. 대비마마의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문양들이라고 한다.

이 책은 책을 보는 사람이 왕이 되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어 더 즐겁다. 연령에 상관없이 가감하며 보면 더 좋겠다. 아이들이 가장 쉽게 접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임금은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임금을 따라가보면 하루가 바쁘다는 걸 알 수 있다. 효를 몸소 실천하는 백성의 아버지로서, 아침 일찍 대비전 문안 인사를 마치면 편전에 나가 나랏일을 돌보고 경연을 하고 아침 수라 후 조회를 한다. 낮것을 드시고 낮 경연을 하고 오후 세 시가 되면 왕은 당상관이 적어 승정원을 통해 왕에게 올리는 군사암호를 허락하여 날마다 다른 암호를 정해준다. 이것은 다시 병조에 전해져 궁궐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전해진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임금은 짬을 내어 가족들과의 시간을 가진다. 주로 투호를 하고, 격구를 좋아하는 왕들이 많았다고 한다. 경회루 그림이 사진 못지않게 선선하다.

저녁 경연은 해가 지기 전 사정전에서 한다. 경연 후 강녕전에서 저녁 수라를 마치고 나면 자경전에 들러 대비께 저녁 문안을 드린다. 책 한 귀퉁이에 얌전히 있는, 우리 옛 건물에서 찾기 쉬운 전통 문양인 단청의 빛깔이 참 곱고 단아하다. 사진인지 그림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을 정도다. 밤 늦은 시각 임금이 교태전에 들어 잠자리에 들면 '경복궁 안의 모든 것들도 잠이 든'다. '교태'는 부부가 만나 아이를 잘낳기를 바란다는 뜻이라 한다. 궁궐에서는, 쇠와 불을 먹는 상상의 동물인 불가사리나 불귀신을 잡는 드니, 불을 막는 힘이 있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목조건물이라 그럴 것이다. 제일 뒷 장에는 근정전을 좀더 가까이서 보고 크게 그려놓았다. 근정전 앞의 품계석에 앉아 있던 아이의 사진이 생각난다. 아이는 근정전 앞 마당은 사방이 담으로 둘러쳐져 있어 소리가 퍼지지 않고 잘 들리게 해 놓았다고 덧붙인다.

눈을 지그시 감고 다시 그려 보면 궁궐에 깃든 조상의 슬기와 멋이 내게 스미는 것 같다. 간명하면서 친절한 설명과 살아있는 그림이 상상의 맛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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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윌리 웅진 세계그림책 25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미란 옮김 / 웅진주니어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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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작은 딸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한다. 일주일에 한번 미술 선생님 오시는 날을 학수고대하며, 미술 시간이면 선생님과 종알종알 얘기를 주고받으며 자기만의 그림을 그린다. 어찌보면 그림보다 거기에 담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더 좋아하는 눈치다. 살짝 궁금해하며 한마디 던지면 술술술 그 그림에 담긴 자기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그걸 들으며서, 아이가 오늘도 유치원에서 친구한테 스트레스를 좀 받았구나, 무얼 갖고 싶구나, 무엇에 기쁨을 느끼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귀중한 정보(?)를 건진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그런 것들을 파악하는데는 모자라지 않는 시간이다. 그래서 난 아이의 그림을 좋아한다. 우리 아이는 색을 참 다양하게 쓰는 편이다. 모양오리기도 좋아해서 오려 붙이고 꾸미고, 하여튼 방안이 늘 작업실이다. 엄마는 하루에도 몇번씩 귀찮아 죽을 지경인데 아이는 마냥 바쁘다. 창작에 여념이 없으니 참, 좋은 엄마 노릇하기 어렵다.

<미술관에 간 윌리>는 앤서니 브라운이라는 이름만으로 꽤 기대하며 덥석 고른 그림책이다. 기대만큼 썩 섬세하고 다양한 색감과 구석구석 숨은 그림 찾기의 재미가 그만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약간 공주병(?) 증세가 있어 그런지 못생긴 원숭이만 나온다고 한 번 보더니 보지 않으려한다. 저처럼 스케치북을 부욱 찢어 그린 그림인데도 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토끼였으면 좀 다르지 않았을까, 위안하며 일단은 보류다. 그리곤 다시 한장한장 들여다보다 원숭이 가면놀이를 한 윌리를 발견했다.

가면은 자신을 한꺼풀 숨길 수 있는 도구이다. 그런 만큼 어떠한 제약에도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신의 숨은 욕구를 한껏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윌리는 원숭이 -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 - 가면을 쓰고 소위 명화들을 옆에 두고 자신의 스케치북에 하나씩 재창조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엔 아이다운 자신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쁜 여자친구 밀리를 사이에 두고 벌렁코친구와 삼각관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른들이 명화라고 감상하기를 강요한 그림들을 아이다운 눈으로 비틀어 놓았다. 남자아이다운 욕망을 걸러내지않고 풀어놓았다. 엉큼하게도 그림 속에는 하나같이 그림붓, 바나나, 빵, 스케치연필, 그림물감 같은 그림도구와 간식들이 버젓이 들어있다. 그리고 두가지의 다른 형태로 볼 수 있는 그림속 그림도 있어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끝이 없다.

그런데 심오한 주제를 아이들의 손을 빌어 말하는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이 단순히 여기서 끝나진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의 그림에 있는, 윌리를 그리는 원숭이의 얼굴이 어쩌면 윌리와 그렇게 닮아 있는지.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원숭이 귀부인이 잡고있는 개목걸이줄에 묶여 네발로 기고 있는 건 다소 섬뜩하다. 바벨탑의 벽에 그려져있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표정들, 그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두 팔을 벌려 가슴을 젖히고 웃음짓고 있는 원숭이, 미추의 기준을 완전히 엎어버리는 듯한 '신비한 미소'('모나리자'의 윌리판 패러디) 앞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삭막한 벽돌담 위에 싱그러운 나무가 있는 풍경을 그려 전망좋은 방으로 바꾸는 '경치 나쁜 방', 뭉크의 그림 속 인물처럼 절망하며 절규하는 윌리가 있고 뒤로는 현대문명의 필요악이랄 수 있는 텔레비전이 있는 '나쁜 꿈'은 밀리와 악당 벌렁코의 결혼식 청첩장을 받은 악몽으로 위장하고 있다. 떠오르는 태양을 찾아가는 눈먼 오리온은 '양파가 있는 풍경'에서 윌리 대신 몇 킬로미터나 쫓아가 양파를 대신 잡아준다. 양파는 윌리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일지도 모른다. '영웅'에서 윌리는 자신의 욕망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벌렁코를 찌르는 창은 붓으로 바뀌어있어 윌리가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지않는다. 윌리의 말처럼 '꿈꾸는 것은 자유잖아, 그렇지?'

이제 원숭이 가면은 벗어서 책상위에 두고 알록달록한 조끼도 벗어 걸상에 걸쳐놓고 뿌옇게 흐려진 물통과 팔레트를 그대로 두고 윌리는 스케치북을 들고 나간다. 미술관에라도 가서 자신의 그림을 명화 옆에 떡하니 붙여놓으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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