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랑 공재랑 동네 한 바퀴 내가 처음 가본 그림 박물관 6
조은수 글, 문승연 꾸밈 / 길벗어린이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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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가 본 그림 박물관> 시리즈는 <봄날, 호랑나비를 보았니?>를 시작으로 기획이 무척 돋보였던 작품이라 좋아한다. 남의 것에 더 익숙해져있는 우리 아이들을 위하여 그네들의 눈높이에서 우리의 그림을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다.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은, 그 속에 담겨있을 풍부한 이야기들을 유쾌하고 밝은 상상력으로 끌어내어 재구성하는 식이다. 그림을 보며 아이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보게 하는 것도 좋다. 나름대로 그 때의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과거로의 여행, 신나는 간접경험이다.

<아재랑 공재랑 동네 한 바퀴>는 이 시리즈의 여섯 번째 그림책이다. 아재는 조선후기 화가 조영석의, 공재는 윤두서의 호에서 따왔다. 선비화가로 벼슬을 마다하고 시서화에 능하였고, 김홍도와 신윤복보다 풍속화를 앞서 그린 사람들이었다. 이 그림 박물관에 오면, 백성들이 살았던 모습을 그 당시의 그림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공재는 천자문을 잘못 읽어 서당에서 훈장님께 회초리를 맞는다. 서러워 눈물을 찍어내고 있는 공재를 달래주는 건 동무 아재의 솔깃한 말이다. '공재야, 오늘 사또 나으리 행차시래. 우리 구경 가자.' 이렇게 김홍도의 서당에서 시작한 그림 이야기는 사또의 행차를 보러 가는 길에서 만나는 갖가지 일상적인 풍경들로 꼬리에 꼬리를 문다. 무당춤, 기와지붕이기, 김매기와 새참 먹는 농부들, 동네 어르신네들을 위한 성대한 잔치, 춤추는 아이와 흥에 겨워 연주하는 악사들이 등장한다. 발은 나비처럼 가볍게 온동네를 누비고 다닌다.

'분내음 꽃내음 따라/ 어디만큼 왔나?/ 깊은 산 속 개울가에 왔지.' 창포물에 머리 감는 여인들, 강가에서 열리는 물고기 잔치, 대장간에서 노동의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 동네 우물가의 정겨운 풍경, 이를 잡는 노승, 쉬어가는 옹기장수, 아기 업은 행상부부, 생선장수 곱상한 여인네를 만나고...

'아직아직 멀었나?/ 드디어 다 왔지.' 사또 나으리 행렬이 '보인다, 보여!'

'어디어디? 조기조기.'

동네 한 바퀴 구경 한 번 잘 한 아재랑 공재랑... 공재는 천자문 외야 할 걱정에 발을 바삐 놀려 집으로 오니, 아버지는 자리를 짜고 어머니는 물레를 돌려 무명실 한 줄 뽑고 있다. 공재를 나무라시긴커녕, 바람소리 부엉이소리를 벗삼아 세식구가 모여 앉아 제 일 하고 있는 안방 구들목을, 초승달이 웃는 눈을 하고 엿보고 있다.

'우리가 지나온 산길이랑 들길이랑 냇물이랑 강물이랑 모두들 잘 있을까?' -35쪽

공재는 참 좋은 동무를 두었다. 아재 덕분에 낮의 설움은 어느새 다 잊었다.

이 그림책은 글을 쓴 조은수 작가의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의 저학년 편이라 해도 되겠다. 도란도란 정겨운 말투를 살려 마치 긴 이야기 시 한편을 읽는 것처럼 낭낭하게 들려주는 입말이 참 친근감 든다. 통통 튀는 우리말과 흉내말을 살려 운율을 맞추고 '~~을 지나서/어디만큼 왔나?/~~까지 왔지.'하는 후렴구로 각각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재미나다. 거기선 어떤 풍경을 볼 수 있을지 궁금증을 슬쩍 자아내는 방식이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풍속화들을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 박물관'에 있는 그림들은, 옷깃 하나에도 움직임이 살아있어 옛사람들이 살아나올 것만 같다. 무던한 한지 냄새가 풍기는 그림과 맛깔스런 된장국같은 글이 볼수록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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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어린이중앙 그림마을 13
제니퍼 이처스 그림, 샘 맥브래트니 글, 김서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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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작은 아이는 3년째 다니던 유치원을 그만다니게 되었어요. 열흘 후면 이사를 가야하기 때문이죠. 며칠 전 마지막 날, 선생님과 친구들이 예쁘게 꾸미고 쓴 편지들을 하트모양 한 묶음으로 가지고 와서는 보고 또 보고 하더군요. 오늘 아침엔 유난히 말이 없이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길래, 무슨 생각하니?, 물으니까 친구랑 유치원 놀이터에서 그네 타고 놀았던 생각해, 대답하더군요. 아이랑 맘에 맞아 잘 놀았던 남자친구가 있었거든요. 친구와 헤어져 다른 유치원 다니려니 섭섭한가 봐요. 아이에게 친구랑 놀았던 기억들이 한 장 한 장 그림책의 장면처럼 혹은 사진처럼 마음의 앨범에 남을 것 같아요.

<미안해>의 그림은 정말 사진 같아요. 소포트포커스 사진처럼 곱고 아름다워요. 기억처럼 아른아른하면서도 섬세하고 사실적이며 참 포근해요. 좋은 추억의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같아요. 달콤하게 살살 녹는 솜사탕 같기도 하고요. 전체적으로는 정적이면서 동적이에요. 아이들의 표정이 마치 옆에서 바라보듯 살아있어요. 아이들의 숨기지 못하는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비쳐요. 거울처럼 맑아서 그대로 다 보여요.

두 아이가 하는 놀이는 여느 아이들이랑 비슷해요. 학교놀이, 병원놀이, 엄마 아빠 놀이, 물장난, 날마다 만나서 놀아도 지겹지 않아요. 그러다 소리지르고 싸우기도 하지요. 이제 다시는 그 아이랑 놀지 않을 거야, 우리 아이도 잘 하는 말이에요. 그 친구가 제일 좋다고 할 땐 언제고, 토라져서 들어오며 눈물을 글썽이지요. 그래도 그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듯, 잘 놀지요. 사실은 같이 안 놀면 심심하니까 그런 말 한 걸 후회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자기가 안 놀아주면 친구가 섭섭해한다고 하더군요.

아이들은 미안해 라는 말을 잘 해요. 사랑해 라는 말이 1위라면 미안해는 2위쯤 될 것 같아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같아요. 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과 분위기를 읽어내는 능력이 있지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은 함께 놀면서 배워나가는 것이겠지요. '미안해' '나도 미안해'를 상상하는 마지막 장면의 그림은, 두 아이의 행복한 표정으로 마음이 온통 환해져요. 여자아이는 너무 귀엽고 남자아이는 겸연쩍은 듯 익살맞은 표정이에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아이의 마음처럼 여리고 보드랍고 거짓없답니다.

얘야, 네가 먼저 '미안해'라고 말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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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음악회 신나는 음악 그림책 2
안드레아 호이어 글 그림, 유혜자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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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데리고 음악공연을 자주 가는 편이다. 아직 오페라는 보지 못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합창단이나 뮤지컬, 관현악단 연주회는 기회가 있으면 간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게 하고 싶은 욕심도 있고 그런 것들로 아이들의 삶이 좀더 풍요롭고, 아름답고 안정된 정서의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11살, 6살 두 딸아이는 관현악단의 연주가 시작되면 평소에는 볼 기회가 적은 악기들을 뚫어져라 보며 연주자들의 손동작까지 살핀다. 큰아이는 제법 자신의 귀로 음악을 감상하며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도 한다.

얼마 전 갔었던 시립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에서 작은 아이는 하프의 모습에 매료된 듯했다. 콘트라베이스의 중후한 현의 소리도 얼마나 매력적인지. 플룻을 배우고 있는 큰아이는 금빛 플룻만으로 훌륭한 소리를 뽑아내는 한 플룻티스트의 협주곡이 끝나자 힘찬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난 눈을 감고 연주를 듣기를 좋아한다. 시각을 닫으면 청각이 한층 예민해진다. 내 주위로 조화로운 소리의 병풍이 둘러쳐짐을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피아노 배우기를 너무 즐거워하는 작은 아이는 앞으로 바이얼린을 하고 싶다고 틈만 나면 조른다. 이런 아이들에게 신나는 음악 그림책 시리즈 3권은 참 적절한 선물이다.

1권 <나와 오페라 극장> -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날, 아이는 할아버지를 따라 가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을 관람하고 무대 뒤의 구석구석을 돌며 한 편의 오페라가 무대에 올려지기까지 어떤 준비와 과정을 거치는지 상세하게 보게 된다. 마치 마술사의 손처럼 연출되는 무대배경과 의상, 무대감독과 무용수들이 연습에 열중하는 모습도 본다. 무대에 선 배우가 대사나 동작을 잊어버렸을 때, 작은 소리로 알려주는 일을 하는 '프롬프터'는 무대 위의 이상한 상자 속에 들어가 숨은 역할을 한다.

2권 <나와 음악회> - 관현악단의 첼리스트인 삼촌을 따라 아이는 관현악단의 멋진 연주를 듣고 115명의 단원들이 제 몸처럼 소중히 여기는 악기들을 만난다. 소리가 제일 정확한 오보에가 '도' 소리를 내면 다른 악기 연주자들이 그 음에 맞춰 소리를 조절한다는 것 같은 자상한 설명도 듣고, 타악기의 소리에서 나름대로 상상력을 불러내어보기도 한다. 한사람 한사람의 연습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웅장한 관현악단의 연주를 들으며 아이는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경험을 한다. 그렇게 고양된 감정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은은하게 비추는 그믐달과 총총이 박힌 별들 같다.

3권 <나와 음악학교>는 생일을 맞은 파울에게 멋진 생일선물을 하는 할머니의 편지로 시작한다. 늘 배우고 싶어했던 악기를 배울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진짜 멋진 할머니. 먼저 음악학교를 찾아간 파울은 자상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여러가지 종류의 악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듣는다. 리코더만 해도 그 종류가 다양하다. 커다란 베이스 리코더에서 아주 작은 클라이네 소프라니노 리코더까지. 실제로 바로크음악정기연주회에서 리코더 독주를 들은 적이 있다. 맑은 새소리가 비가 개이고 이슬을 머금은 나무 이파리들 사이로 새어나오는 듯 했다. 목가적인 편안한 느낌이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펼치는 정기공연까지 감상하고 집으로 돌아온 파울은 달콤한 잠에 빠진다. 많은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현악단 한 가운데서 연주를 하는 꿈을 꾸며 파울은 앞으로 어떤 악기를 배울지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일까?

세권 모두 아이에게 음악을 가까이하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도와주는 어른들이 있다. 아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어른의 마음이 내비친다. 주먹코에 주근깨 투성이 얼굴의 아이들과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어른들의 얼굴을 포함해 그림 전체가 자상하고 따뜻하다. 몇 차례 감상했던 국악 관현악단의 연주가 생각난다. 서양음악 못지 않게 그 아름다움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우리 악기의 애끓는 소리와 운치는 마음을 끌어당기는 색다른 힘이 있다. 서양음악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을 위해 우리 음악 그림책 시리즈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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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차 웅진 세계그림책 7
다이앤 딜론, 레오 딜론 그림,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글, 이상희 옮김 / 웅진주니어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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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서 글이 먼저인지, 그림이 먼저인지 혹은 글과 그림을 한 사람이 동시에 탄생시킨 것인지, 다른 사람이 작업한 것인지에 따라, 그림책이 던지는 의미의 해석이 달리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 기차>는 간결하고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의 글이 먼저이고, 52년 후 그것이 재해석되어 멋진 그림으로 탄생한 것이란 걸 이해해야 한다. 원제가 <Two Little Trains>라는 걸 알면, 딜론 부부의 그림이 다소 글과 맞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림 속 실제의 큰 기차도 작은 기차라고 표현하고 있다. 딜론 부부가 마거릿의 글이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단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려는 의도로, 진짜 작은 장난감 기차를 등장시켜 실제의 큰 기차와 대비를 이룬 것 같다. 그래서 이 그림책은 글과 그림을 분리하여 두 종류의 파노라마를 나름대로 따라가보는 재미가 있다.

마거릿이 말하는 두개의 작은 기차란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을 대표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비바람과 눈보라를 다 맞으면서도 '우리가 달려야 할 기다란 철길'을 '툴툴거리지도 않고, 끽끽거리지도 않고' 쉼없이 힘차게 달려가자고, 마거릿은 조금은 어려운 말을 아이들에게 던지고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가는 길은 고단한 길을 갈 만한 것으로 만드는 동반자의 길이다. 인생의 서쪽은 막다른 길, 죽음이 기다리는 곳이다. 고대 이집트인들도 서쪽은 죽은 자들의 땅이라 여겼다. 인생의 끝에서 열심히 달려온 기찻길을 뒤로하고 드넓은 저 세상의 바다를 보며 휴식을 취하는 작은 기차. 어느덧 작은 기차는 큰 기차가 되어있지만, 신의 눈에는 여전히 작은 기차가 아닐까? '날씬한 새 기차'와 '조그만 옛날 기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한 딜론 부부의 그림은 묵직한 주제에 걸맞는 톤을 취한다. 진지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이끄는 차분한 색조는 아이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아이들 책이면 무조건 밝아야 한다는 건, 아이들의 다양한 감성과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아이들은 충분히 철학적이고 도덕심도 강하다. 아이들의 잠재된 무의식은 그림을 직관으로 파악하는 능력에서 바로 증명된다. <작은 기차>의 그림은 아이가 잠 속에서 달리는 기차처럼 아련하고 몽롱하다. 특히 날씬하고 긴 현대식 기차가 달리고 있는 풍경들(도시의 고층건물, 나무, 터널, 흑인아저씨의 노래부르는 입이 담겨있는 달, 목판화같은 산들이 이루는 협곡)은 마치 그림자 같다. 풍경은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까지, 대륙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구아로를 비롯한 갖가지 선인장은 사막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한 생존과 개척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작은 기차>는 깊이있는 주제는 접어두고라도, 또 하나의 장점이 보인다. 아이들은 어느 곳에서든, 무엇으로든, 놀이를 만들어내고 즐긴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퐁퐁 솟는 샘물처럼 마르지않는 것 같다. 항상 눈동자를 굴리며 놀이감을 찾아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생기가 넘친다. 먹이를 찾고 나르는 개미들마냥 분주하다. 두개의 크고 작은 여행가방과 플랫폼을 보며, 어른과 함께 한 긴긴 기차여행에서 집에 돌아와, 선물로 받은 장난감 기차를 얼른 꺼내 자신이 거쳐온 여행길을 기억해내며 기차여행놀이를 하는 아이가 떠올랐다. 하루를 또 신명나게 놀며 보낸 아이는 이제 곤하게 달콤한 잠을 자고 있다. 더 놀지 못해 못내 아쉬워하며, 꿈 속에서 또한번 기차여행놀이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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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구니 - 3~8세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4
존 버닝햄 글.그림 / 보림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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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비가 제법 오는 날 아침, 우산 쓰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여섯 살 작은 아이에게 일부러 심부름을 시켜보았어요. 편의점에서 커피믹스 낱개로 한 봉지, 껌 두 통, 그리고 빌어온 비디오테잎 갖다주고 오기가 그날의 임무였지요. 2천원을 들고 본홍색 우산을 받고 슬리퍼를 신고 또각또각 걸어내려가는 뒷모습을 베란다 밖으로 내다보며, 아이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동안,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집에 들어오는 아이는 기대와는 전혀 달리 아무것도 손에 들고 오지 않더군요. 돈이 모자라 아무것도 못 샀다고요.

그래서 다시 단단히 일러 같은 길을 갔다오게 했지요. 그런데 역시 그대로 들어오며 높은 톤으로, 아무것도 못 샀다고 하더군요. 제가 먹고 싶은 것만이라도 사오면 되는데, 그냥 온 마음이 하도 순진하여 꼭 안아주었어요. 대신 아이는 우산 속에서 빗길을 밟으며 마음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물 고인 작은 웅덩이에 퐁당퐁당 발도 담그고, 비에 젖은 회색 나무도 쳐다보며, 우산 속 작은 집 지붕 위로 경쾌하게 떨어지는 빗소리도 즐겁게 들었겠죠. 들고 간 비닐봉지에 아무것도 넣어오지 못한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겠죠.

아이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도 나름의 상상력을 펼치는 타고난 재주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집은 구석구석이 아이의 특별한 공간이에요. 보기엔 어지럽고 정돈이 안 되어있지만, 함부로 허물 수가 없지요. 아이가 만든 소중한 상상의 공간이거든요. 그곳에서 아이는 생활 속의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풀어요. 사실 아이에게 상처를 제일 많이 주는 사람은 엄마랍니다. 유치원에서 가정에서, 친구 사이에 또는 어른에게서 받는 상처와 억압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하지요. 가끔은 거칠어보이는 말을 내뱉기도 하고 폭력을 쓰기도 하지요. 현실에서 늘 제지당하는 일들을 상상 속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아이들의 상상의 세계를 인정해주는 것이 건강한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지혜가 아닐까요?

모든 권위와 억압을 싫어한 존 버닝햄의 작품은, 아이들의 상상의 세계를 거침없이 대변해 줍니다. <장바구니>를 통해 작가는 수개념이나 일의 순서에 대한 논리적 사고 따위도 계산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존 버닝햄의 그림책은 아이의 본능적이고 순진한, 거칠지만 생명력있는, 거짓말도 그럴 듯하게 하는 풍부한 상상력을 인정하게 만들지요. 어른이 되면 이런 신나는 일을 하기엔 제약이 많지요. 이 그림책은 <지각대장>만큼이나 통쾌하게 한 방 먹이는 맛이 좋아요. 안경을 끼고 단정하게 양말을 신은, 모범생 같은 스티븐이 한 일이라(상상이라도) 더욱 신나지 않나요! 아이의 머리 속처럼 여백이 많으며 단순하고 거친 선으로 스케치한 작가 특유의 그림이 역시 개성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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