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년 전  콜린 히긴스 원작의  <19 그리고 80>을 무척 재미나게 읽었다. 끊임없이 자살소동을 벌이는 19세 소년  해럴드가  80세의 할머니 모드를 만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배운다는 이야기였다. 박정자가 여든 살의 모드 할머니로 분했던 동명의 연극도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장기공연에 들어가고 원작이나 연극의 인기는 한마디로 난리도 아니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말이지 해럴드, 두려워하지 말고 인간적이 되는 거란다.(모드가 해럴드에게)

어제 오후 우리 가족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러 광화문의 한 극장을 찾았다. 상영 시간이 거의 두 시간이고 한글 자막이라 일곱 살짜리가 진득하니 앉아 볼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도 되었지만 그 염려는 쓸데없는 것이었음이 곧 밝혀졌다. 아이는 가끔 제 아빠가 조는지 안 조는지를 옆눈으로 감시했을 뿐 무서운 기세로 영화에 집중했던 것이다. 영화가 워낙 흥미진진해야 말이지.



몸통에 비해 빈약하기 짝이 없는 네 다리로 걸어다니는 고철덩어리 하울의 성.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쉭쉭=3=3=3 하얀 연기를 내뿜는데 그 광경이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것처럼 역동적이다.

 모자가게의 심드렁한 18세 소녀 소피


동료 재봉사들은 들떠서 퇴근을 하는데 아랑곳없이 완강한 등짝을 보이며 하던 일에만 열중한다. 바깥세상은 전운이 감돌고 하수상하거나 말거나.


그녀의 얼굴은 왜그리 메마르고 덤덤할까? 잠깐의 외출.

하울과 관련된 황야의 마녀의 오해로 하루아침에 90세 노파가 되어버린 소피


자신의 변한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소피.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머무를 수는 없다고 판단 조그만 보따리를 꾸려 집을 떠나는데 그 침착함과 단호함이 놀랍기 그지없다.


마법사들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 지팡이로나 쓸까 하여 주웠더니 무대가리 허수아비였다. 그는 여행의 끝까지 소피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준다.


하울과 모종의 계약관계라는 불 마법사 캘시퍼도 어느 날 갑자기 하울의 성에 잠입한  소피 할머니 앞에선 깨겡.


에잇, 이 먼지구덩이...소매를 걷어붙이고 청소부터 시작하는 소피. 왜 부지런한 여성은 남의 집에 가서도 청소부터 해야 하는지? 난 우리 집도 잘 안 치우는데......


"아아, 아름답지 못하면 사는 의의가 없어!" 여성들을 매료시키고 자신의 마음은 주지 않는 천하의 바람둥이 하울. 머리 염색이 잘못됐다고 우는 소리를 하고 있는 중.

미야자키 하야오는 '움직이는 성'과 '하루아침에 90세 노파가 된 소녀' 라는 두 가지 점에 착안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나이 듦'에 대한 독백이 심심찮게 나온다. "나이가 들어 좋은 것은 세상에 놀랄만한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나이들어 좋은 건 더이상 잃을 게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래서야 앞에서 소개한 모드 할머니와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하울을 사랑하게 되고 갖가지 모험을 통해 용기를 얻으면서 소피의 얼굴이 소녀가 되었다가 다시 불안에 잠기면 할머니 얼굴로 변하고 하는 장면은 무척 의미심장하고 흥미로웠다.

소피가 자신에게 마법을 걸어 노파로 만든 황야의 마녀(그것도 자신보다 더한 할머니가 돼버린)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보살피는 대목도 인상적. 다음 두 컷의 사진은 황야의 마녀의 변신 전과 후.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오르라고 하면 나도 당장 오르겠다. 아흔의 소피가 신나게 한 일을 아무렴 나라고 못하겠는가? 하울과의 사랑, 그런 건 솔직히 관심없다. 노란색, 빨간색, 연두색, 파란색 색깔의 자물쇠가 있어 그 색깔의  대문을 열면 다를 세상이 펼쳐지던 그 신기한 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온몸으로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소피처럼 나의 나이를 새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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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12-2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아침에 할머니가 되어버린 자신을 참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소피.....!

'나이 듦'에 대한 독백도... 인상적인...!

깍두기 2004-12-2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클수마스날 식구들과 이 영화를 보았어요. 그러나 이미 늙어버린 깍두기는 이 영화가 무작정 재밌지만은 않아서 슬펐다우. 이제 나는 상상력을 맘껏 즐길 수 없는 것인가....아, 나도 페이퍼를 써야겠다.

바람구두 2004-12-27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당신은 못해요... 청소라니.. 푸핫.

sooninara 2004-12-2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봐야겠다고 찜해두었다는..

로드무비 2004-12-2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 빨리도 보셨군요.^^

깍두기님, 누구 앞에서 늙어버렸다는 둥 그래서 슬펐다는 둥.

떽이야요.

바람구두님, 전 청소는 할 생각이 없는데요.

그냥 움직이는 성을 타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다는 말이었어라.^^;;

수니나라님, 애들 데리고 가서 꼭 보세요. 무지 좋아할 겁니다.^^

마태우스 2004-12-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애니메이션에 대한 제 오래된 편견이 깨질까요... 라이언킹, 미녀와야수를 보고 재확인한 그 편견들이 말이죠.

Laika 2004-12-27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 울 언니네 집에 놀러가서 매일 청소만 해주고 오는데..

이거 보고 싶다고 노래 부르며, 아직까지 못보고 있어요...

urblue 2004-12-27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청소 같은 거 안 하는 로드무비님이 좋아요!!

저도 이번 주말에 광화문 모 극장에서 이거 봅니다. ㅎㅎ

로드무비 2004-12-27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소피가 하울의 성 청소해주는 것 빼고는

모두 마음에 들었어요. 애니메이션에 대한 마태우스님의 그 오래 된 편견

깨트릴 수 있을 거예요.

라이카님, 요리에 앞치마에 청소에...라이카님 언니가 정말 부러워요.

우리집에도 하루 놀러오실래요?^^

블루님, 요리 잘하면 됐지 어떻게 청소까지 잘할 수 있겠어요.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ㅎㅎ

이번 주말 데이트 기대됩니다.^^

날개 2004-12-27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보고싶어 죽겠네... 로드무비님이 더 불을 당기시누만요..

2004-12-27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주 2004-12-27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행...아직 놀랄 일이 많은 걸 보니 내가 아직 젊었단 증거..고맙습니다. 로드무비님 한 살 더 먹는 판에 나의 젊음을 증명해 주시다니요!

플레져 2004-12-2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아요. 스틸컷만 봐도 이렇게 좋으니...

마지막에 좀 우스웠죠? 개구리 왕자가 생각나서...흐흐...


브리즈 2004-12-28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은 한때, 정확히는 10여 년 전 제 수집 1호 품목이었죠. <나우시카> <라퓨타> <홍돈> <추억은 방울방물> 등등.. 그때만 해도 하야오의 영화를 영화관에 앉아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었는데 말이죠.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오랜만에 하야오에 대한 관심을 다시 갖게 한 애니입니다. 이번엔 극장에서 보고 싶네요. :)

니르바나 2004-12-28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에 무서운 인사를 건넨 친구가 캘시퍼군요.

그야말로 환타스틱한 영화네요.

로드무비님의 페이퍼가 아니었다면 감상하지 못하고 넘어 갈 뻔 했습니다.


2004-12-28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면 딱 로드무비님 만큼의 감상이 나올 것 같군요..저도 애니를 즐겨 보지 않았는데, 원령공주와 센과 치히로..고양이의 보은 등을 보면서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지요..한 장면 장면에 깔린 복선과 아이들에겐 의미심장할-실은 우리들에게도-대사 같은 것들이 인생을 생각하게 해서 좋아요..그 익숙함과 적당히 단순한 선들도..

로드무비 2004-12-28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무엇보다 이 영화는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더군요.

모자가게 작업실, 움직이는 성 내부, 특히 하울의 방......

풀과 꽃으로 둘러싸인 전경 등.^^

니르바나님, 캘시퍼가 무지 귀엽게 나와요.

소피가 요리를 하도록 기꺼이 허락도 해주고요.

브리즈님, 전 그의 영화들을 많이 챙겨보진 못했는데

'추억은 방울방울'이 특히 보고 싶군요.

플레져님, 그 대목 정말 웃겼어요. 어이가 좀 없기도 하고.^^

박찬미님, 님도 저처럼 젊음의 증거가 필요하시군요.

아유 반가워라!^^

....님, 기대됩니다. 받는 대로 제깍 님의 방에 달려갈게요.^^

날개님, 애들 방학 했죠?

빨랑 가서 보세요. 만화책만 들입다 사지 마시고...헤헤.^^

2004-12-2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저 소피의 뒷모습이 있는 컷이 마음에 들어옵니다..구석구석이 재밌네요..매생이 먹고 소감 올려 주셔여..맛있으면 위치도 가르쳐 주시구요..^^

poptrash 2004-12-28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크리스마스에 극장에서 봤더랬지요. 18시에 연극 라이어를 보고 22시에 역도산을 보고 00시 30분에 다른 극장으로 옮겨서 하울을 보는 좀 강행군이어서 -_-; 그럼에도 재밌었답니다.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
팀 버튼 지음, 윤태영 옮김 / 새터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부두 소녀...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서면 그녀의 가슴에 꽂힌 핀들에 찔리게 된다. 결국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사랑받을 수 없다는 얘기. 영화 '가위손'이 생각난다.


침대가 된 소녀...땅버들 가지를 무심코 꺾던 날 피부가 순면으로 변하더니 멋진 매트리스와 스프링이 생겨나면서 침대가 되어버린 소녀.


로봇 소년. 의사가 스미스 씨에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의 유전자는 정상이 아닙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전기믹서입니다." 스미스 씨는 아내와 주방기구와의 성적인 만남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애니메이션 '크리스마스 악몽'의 원작자, 그리고 영화 '가위손'과 '슬리피 할로우', '빅 피쉬의 감독 팀 버튼이 직접 그리고 썼다는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을 읽었다. 제일 첫장은 마른 가지 소년과 성냥 소녀의 사랑 이야기다. 그리고 이어서  로봇 소년,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노려보는 소녀, 자기가 예수님도 아니면서 더구나 손목도 아니고 눈에 못이 박힌 소년, 톰슨 집안의 네 쌍둥이에게 '대합'이라고 놀림을 받는 굴 소년......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도 없이 사람들로부터 경원당하는 이상한 모습의 아이들만 잔뜩(23개의 짧은 에피소드) 나온다. 그런데 그의 엉뚱한 상상 속 인물들이 슬프다기보다 유쾌하다. 하나같이 일그러진 초상들인데 가만 보고 있으면 위로가 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위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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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2-2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팀 버튼의 유년기와 관련지어진 건 아닐까요. 꽤 우울한 소년기를 보냈다더군요. 그렇지만 팀 버튼표 상상력두 그 우울한 소년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구 말이죠. 어쨌든..

비발~* 2004-12-26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위로 - 나보다 이상한 아해들이 많구나... 정도로?^^

하얀마녀 2004-12-26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을 읽고 떠오른 생각을 글로 적는건 가능해도 느낌은 매우 어렵던데, 어떻게 그렇게 느낌을 잘 표현하셨나요. 전 팀 버튼이라면 <크리스마스 악몽>과 <화성침공>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군요.

2004-12-27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빅 피쉬가 가장 팀버튼 답지 않다고들 하지만 전 빅피쉬 보고 팀 버튼을 사랑하게 되었어요..영혼을 달래주는 영화 빅 피쉬..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 역시 보지 않고도 제목만으로도 확 당기는 무언가가 있네요...

2004-12-27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40일백 2004-12-27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팀버튼! 솔직히 저에게는 난해합니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하면서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는 하는데

그 새로움이 선뜻 가슴속에 전해오지는 않습니다

팀버튼이 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새로움과 기발함으로 천재라는 이름을 얻을 수는 있지만

거장이 되고 명장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할 듯 합니다



그림만으로도 저를 질리게 하는군요.....

즐거운 년말 보내세요. ^.^


로드무비 2004-12-2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우울한 소년기' 라는 말만 들어도 저릿저릿합니다.팀 버튼 같은 독자적인

세계를 가질 수만 있다면 100번이라도 우울한 소년기를 보낼 용의가 있습니다.^^

비발~*님, 물론 그런 의미도 있고요.

이상한 아해들의 슬픈 개성이 이상하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면이 있더라고요.^^

하얀마녀님, 저는 글을 논리적으로 잘 쓰지 못하는 대신 느낌은 좀 확실하게

오는 편이라고 할까. 아무튼 팀 버튼이 무지 좋아요.^^

참나님, 영혼을 달래준다는 표현 멋지군요.

맞아요. 팀 버튼에겐 그런 면이 분명 있어요.^^

아구찜님, 팀 버튼은 새로움을 보여준다거나 무슨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는 게 아닐까요?

거기다 오래 전 최악의 감독 에드우드를 떠억하니 영화로 만든 걸로 보아

거장이니 명장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보입니다.

아무튼 오랜만에 님을 뵈니 무척 반갑습니다.

아구찜님도 즐거운 연말 되시길......^^

....님, 제가 님께 하고픈 말을 그대로 해주시는군요.

내내 좋은 글 부탁합니다. 그리고 좋은 일만 있으시길......^^


2004-12-27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28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영화를 볼 사람들은 주의하실 것! 명백한 스포일러성 글이므로...)

병석이는 영화감독이 꿈인데 결혼식장에서 비디오를 찍는 아르바이트를 종종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신부나 신부의 부모가 우는 모습만 집중적으로 담아와 일을 준 선배로부터 구박을 받는다. 그래서 또 하는 일이 고깃집 숯불 피우는 일,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운전자에게 포르노테이프나 성인용품 을 파는 삐끼 일.

재경이는 한 사설대출업자의 코딱지만한 사무실에 취직했다가 하루만에 짤린다. 우울하게 생겨서 부담스럽다고. 어른들이란 인간은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 면전에서 그런 소리를 예사로 한다. 자긴 뭐 그리 발랄하게 생겼다고......그리하여 다시 찾은 일자리는 피라미드형 한 인터넷 쇼핑몰의 세일즈. 실적을 위해 카드를 그었다가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데......

돈이 없어 그런지 둘의 데이트 하는 모습도 삭막하기 그지없다. 어찌 된 인간들이 카페나  분식집, 싸구려 백반집 테이블에 한번 앉아보지도 못한다. 어느 날 재경이 집에 아무도 없다며 병석을  데려가 개다리소반에 차려내온 밥상이 최고로 호화스러운 식사였다.

배우들은 기존의 연기자가 아니고 노동석 감독이 아는 사람 중에서 골랐다고 한다. 이 둘을 보고 있으면 답답해서 속이 터진다.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이 한대 때리라고 뺨을 들이대도 때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끝내 끌어안고 우는 병석,  마침내 카드깡을 하기로 결심하고 낯선 사내의 뒤를 따라 뒷골목의 미로를 따라다니는 핏기 없는 얼굴의 재경.

카드빚을 갚기 위해 내일이면 타인의 손에 넘기기로 한 카메라. 병석은 아쉬워서 재경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오늘 뭐 했어? 뭐했냐구?"

카메라를 이리저리 피하던 재경의 눈에서 눈물이 솟는다. "카메라 치우면 이야기 해줄게."

놀랍게도 카메라가 꺼지면서 그대로 페이드 아웃이다. 재경은 카드깡 업자를 따라다닌 하루를 고백했을까?

 '청춘영화라고 해놓고 이거 뭐 이래? 뽀뽀 장면 한 번 없고......' 나는 짐짓 투덜거리며 극장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그 둘은 함께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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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2-22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병석의 목소리가 인상적이더라구요. 영화보고 나와서도 내내 '웃어봐' 라는 병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로드무비 2004-12-2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전 그 사채업자의 느끼한 목소리와 태도가 무척 인상적입디다.

그런데 그 사람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병석과 재경 커플 답답한 구석은 있지만 예쁘죠?^^

잉크냄새 2004-12-2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지리멸렬한 " 이라는 단어가 " 청춘 " 이라는 단어와 어울릴수도 있군요.

도저히 어울릴것 같지 않은 두 단어의 배열에 영화의 묘미가 있는건가요?^^

urblue 2004-12-22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 사채업자, 어디선가 봤다 싶었어요. 어디서 봤을까...

로드무비 2004-12-2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님도 청춘이시죠?

<지리멸렬>이라는 제목의 우리나라 단편영화 참 재밌게 봤는데...

이 영화도 그 못지않았어요.

그리고 멀리 갈 것 없이 제 청춘도 지리멸렬했다고 기억합니다만.^^

로드무비 2004-12-2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호옥시 그 사람 영화평론가 정성일 씨 아니에요?

urblue 2004-12-2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 정성일씨는 좀 더 우울하게 생겼어요. 목소리는 더 느릿느릿하구.

니르바나 2004-12-22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없이 여배우들 얼굴만 들여다 보는 저와는 비교되게,
로드무비님은 영화의 귀재이십니다.

님의 글을 진작 만났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로드무비 2004-12-2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히히 그건 그렇죠?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니르바나님,님은 너무 겸손하게 말씀하셔서 사람을 안절부절못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페이소스가 느껴져요. 님의 한 마디 한 마디엔......^^

파란여우 2004-12-2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명 : 김성호-회상


플레져 2004-12-22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횡재다! 회상 들으면서 댓글 쓰네요 ^^

사채업자, 정말 인상적이죠? 겔포스 먹는 거며, 영어 공부하라는 핀잔...

함께 영화 본 친구들과도 그 사채업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지요...ㅎㅎ

님, 대단하셔요. 어제 혹한을 뚫고 대학로에 입성하셨군요.

영화평도, 님의 발걸음에도 추천이어요! ^^

로드무비 2004-12-2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파,파란여우님, 저,저,정말 고마워유.^^

플레져님, 아유 뭐 어제 날씨가 혹한이라구.

목도리 두르고 시내에 나가니 기분이 좋더라고요.

정신이 번쩍 드는 게.^^;;

추,추,추천 고맙습니다. 플레져니임.^^

2004-12-22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23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절반쯤 남겨둔 김형경의 책을 읽었다. 2년 전인가?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다가 지겨워서 그만뒀었는데 어쩌자고 이 책을 또 산 것일까?

1990년인가 91년도에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주최하는 독서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독서란 오로지 혼자 하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골방형 인간인 내가 그 무렵엔 어쩌자고 안 쑤시고 다닌 데가 없다.  '영화공간 1895'에서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물어>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일본영화들과  <카이로의 붉은 장미>니 <시민 케인> 등을 관람했고 , 또 xxx직장청년연합에 가입해 1년 남짓  자발적으로 모임과 각종 시위에 참여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의외이다.

늦가을 어느 날 그 독서모임에서  대성리로 1박 2일의 엠티를 갔다. 늦은밤, 김남주 시인께서 우리를 격려해 주기 위해 오셨다. 발제니 토의니 준비해간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자 당연히 술이 몇 차례 돌고 몇 사람이 먼저 뻗었다. 나도 그 중 1인이었다. 엄청나게 큰 방에서 남녀 가릴 것 없이 널부러져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내 귀에 들어왔다.

"선생님, 피곤하고 바쁘실 텐데 이 오합지졸을 위해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신 것 감사드려요."

"오합지졸이라니! 나는 젊은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요."

하마터면 나는 벌떡 일어나 내 또래 모 중학교의 국어선생이라는 그녀의 뺨을 한 대 갈길 뻔했다.(아직까지 내 인생에 누군가의 뺨을 갈겨본 일은 한 번도 없다.) 존경하는 시인에 대한 고마움이 사무쳐 인사를 차린답시고  한 말이라고 백번 양보해 보아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오합지졸과 계속 섞이고 싶지  않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형경의 <사람 풍경>을 읽고 나자 12,3년 전 새벽의 그 불쾌한 느낌이 떠올랐다. 그녀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 정신과 의사와 오랜 기간 상담을 하고, 스스로 명리학을 공부하고, 가진 거라고는 집 하나뿐인데 그 집을 팔아 세계각국을 떠돌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왔다 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다. 방랑벽이 있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던 예술가들은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고, 다른 사람에게 유난히 친절하고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서라고?(그녀는 어느 독자의 이런 반발까지 예상했는지 어떤 사람이나 사안에 발끈하는 그 심리의 기저란 이런 것이다, 하고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구석을 마련해 두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솔직해지기로 했으며 그토록 구박하고 돌보지 않았던 자신의 몸과 여성성을 한껏 돌보고 즐기기로 했다니 축하할 일이다. 모쪼록 그녀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잘 가꾸어가길 바란다.

그런데도 내게는 이 작가의 목소리가 12, 3년 전 새벽에 사람들을 싸잡아 오합지졸로 매도하던 그 목소리와  겹쳐져 약간의 불쾌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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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2-22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책 읽느라 바쁘셨군요.. 아님 다른 일이라도?

비록 님께는 불쾌한 기억을 불러 일으킨 책이었지만, 저는 님의 글을 볼 수 있어 좋군요..^^* 하지만 저도 저런 류의 책은 읽고 싶지 않아요....

로드무비 2004-12-2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친정부모님이 며칠 와계셔서요. 오늘 아침 내려가셨어요.

잘 지내셨죠?

마음 가는 대로 책을 읽는 것이 그 중 좋더군요. 날개님처럼......^^




반딧불,, 2004-12-2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요.

저는 그 말이 그렇게 받아들여지지는 않거든요.

그냥 명망있는 시인 앞에서 조금 낮춘 겸양의 말은 아니었을까요??

스스로에게도 참 박한 편인 분인지라...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닌지...

일부러 기분 나쁘게 하신 것은 아닌 듯 한데...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실은 전 그 퍼주는 것이 존재증명이라는 말에 조금은 동감하거든요.

백프로까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인 듯 합니다.

로드무비 2004-12-2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반딧불님이 그 여성 아니세요?ㅎㅎ

제가 자기애가 좀 강한 인간이어서요.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그리고 파고들어보면 사랑을 퍼주기만 하고 뭘 나눠주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심리의 뿌리가 일정부분 그런 것이라 해도 그렇게 단정지어버리면 안되죠.

그건 그 사람들을 모욕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뭐든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에서 끝냈으면 좋았을 거라는 거죠.^^

내가없는 이 안 2004-12-22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 작가의 소설들은 대체로 로드무비님한테 대우를 잘 못 받을 것 같아요. 맞죠? ^^

로드무비님, 올해 잘 보내시구요, 내년에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

반딧불,, 2004-12-2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말씀에는 동감합니다.

사실 저도 조금 나눠주지 못해서 안달하는 인간형이거든요ㅠㅠㅠ



가끔 그러거든요. 아...이건 병이다.

알라딘만큼 잘 나눠주시는 곳은 없었던 듯 해요.

그래서 얼마나 좋았는데요. 저같은 이들이 또 있구나 싶어서요.



그리고, 언젠가 들은 말을 생각한답니다.

세상에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답니다.

스스로에 대해 단점만을 말하는 인간, 장점만을 말하는 인간.

저는 분명 전자에 속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글을 보니 상당한 자기애를 표현하고 있더군요. 가만 있어야 할 때 가만있지 못하는 병도 같이 있지요.



그리고, 김형경...음..버겁긴 하지만, 예전에 참 좋아했었는데..요새는 안읽히네요.

허긴 최근에 책을 읽었어야 말이지요ㅠㅠㅠ

니르바나 2004-12-22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글 속에서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가져야 할 예의를 읽었습니다.

불쾌한 감정이 남아 있으면서도 편견없이 책을 대하시는 자세에서

저는 또 한 공부하였습니다.


반딧불,, 2004-12-2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쓰다보니 이것

김형경 소설에 나왔던 글인가...아닌가...



여하튼 그녀의 글은 마음이 무겁기만 하지요.

읽고 나서 개운한 적이 없었던 듯 해요.



밝은 음악 한 곡 들었음 좋겠네요.

나른하게 늘어집니다.

kleinsusun 2004-12-22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람 풍경>을 샀는데, 첫 몇장을 출근길에 읽다가 잘 안 읽혀서 접어두고 다른 책을 읽고 있어요. 로드무비님의 글을 읽으니 밀려 있는 수많은 책들 중 <사람 풍경>의 순위가 더 뒤로 밀려날 것 같아요.ㅋㅋ

kleinsusun 2004-12-22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 나눠주지 못해서...누군가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들 있쟎아요.

항상 누구나에게 너무도 잘해 주다 보니까 고맙다는 말도 못듣는....

" 재는 원래 저래." 하며 감사 보다 오히려 좀 무시를 받는....

제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이 생각나서 가슴 아파요.

자신의 "존재증명"만을 위해서는 아닐텐데...

그 사람도 참 많이 상처 받거든요.

더 아이러니한건 때론 그 사람의 over가 주위 사람을 숨막히게도 한다는 거죠.

쓰다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헉

로드무비 2004-12-22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님은 어떠세요? 김형경 씨 책들이......

전 꽤 재미나게 읽는 작가였는데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부터

뭔가 지루해지기 시작했어요.

저한테 대우를 잘 못 받을 것 같은...이라는 표현에 약간 찔끔하게 되네요.

이안님도 올해 잘 마무리하시고 내년에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반딧불님, 우리 이런 얘기 하면 밤샐 것 같으니까 언제 따로

속닥속닥하게 해볼까요? 본격적으로다가......^^

니르바나님, 그렇게 어마하게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편견, 안 가지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게 잘 안되어요.

이미 제 말하는 뽄새 보면 알고 계시겠지만......^^;;;

저야말로 님에게서 뭘 좀 배워얄 것 같아요.

수선님, 김형경 씨 억울하겠네요.

저 때문에 좋은 독자의 독서 순서에서 밀려서......^^
그리고 수선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사람은 꼭 주변에 한 명씩 있어요.
남에게 뭘 줘놓고 좋은 소리도 못 듣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정신차리고 사람들을 냉정하게 대해보세요.
그게 또 얼마나 섭섭하다고요.
하여간 인간의 심리는 알 수가 없어요.^^

로드무비 2004-12-2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우린 꼭 한번 만나야 혀요.^^

icaru 2004-12-22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사람 풍경>을 읽었는데... 나름대로...좋았었거든요~ ^.^
리뷰를 올릴 즈음부터 알라딘 서재 리뷰며 페이퍼며...곳곳에서 저 작품에 대한 사려깊은 혹은 호평을 하는 관련글들이 제 눈에...보이기 시작하는 바람에... 쉽게...리뷰를 못 쓰겠다는 말입지요 ㅠ.ㅜ 저의 오죽잖은 글이 다른 것들과 쩜 비교가 될듯해서용 ㅠ.ㅡ ... 뭐 오죽잖은 글이면 좀 어떤가...있는그대로 느낀 그대로 쓰면되지..그냥...(근데 그걸 못해요 ㅠ.ㅜ)

플레져 2004-12-22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씨의 초기작들을 좋아해요. 사랑을 선택하는... 에서부터 작가의 힘든 삶과의 투쟁, 기록이 낱낱이 소설에 스며들면서 그녀의 소설은 좀 다른 색깔이 나기 시작했어요. 사람 풍경, 사놓고 앞에만 조금 읽었어요. 그녀가 소설가와 의사의 경계에 들어서려는 것 아닌가 하여 가슴이 아프네요. 하지만, 전...끝까지 김형경씨만은 좋아할거예요. 왜냐면... 언젠가 그녀가 제게 한 말이 있거든요. 저만 기억할테지만...^^

로드무비 2004-12-22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 제가 좀 삐딱한가봐요.

누가 뭘 단정짓듯이 얘기하면 재미가 없어요.

저도 사실 꽤 재밌게 읽었으면서 말이에요.

전 마냐님의 밑줄긋기와 리뷰를 읽었는데 제가 밑줄을 긋는 부분은

또 다른 곳이더라고요. 그러니 감상도 뭐 제각각이겠죠.

전 복순이 언니님의 이 책 리뷰가 궁금한데요?^^

플레져님, 언젠가 그녀가 님께 한 말이 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책을 읽고 약간의 불쾌감이 남았달 뿐 김형경 씨를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플레져님도 꽤 의리파이시구만요.^^


내가없는 이 안 2004-12-23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 씨가 대우를 잘 못 받을 것 같단 말은 제 얘기가 반쯤 들어 있는 건데요. 뭐.

전 그 작가 소설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뭐 딱히 싫다고 말할 것까진 없지만 읽을 때마다 편치 않아서 내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 이 책은 서점 가서 몇 번을 들춰보면서 읽어보기로 했어요. 작가가 집 팔아서 떠난 여행이라니 왠지 더 마음이 안 좋아지기도 하구요...

마냐 2004-12-2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리뷰야 그렇다쳐도, 밑줄긋는 부분도 그리 제각각이라니, 조금 놀랍습니다. 하지만, 님이 전해주신 에피소드는 정말 속뒤집는 내용이군요. 나중에 리뷰도 올려주세요. 기둘리겠슴다. ^^;;
 

금방 눈이라도 뿌릴 듯 하늘이 잔뜩 찌푸렸다. 마태우스님의 페이퍼를 보니 한 해가 저물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허전하고 섭섭하다. 항상 뭔가 정리를 해야 할 텐데...생각하는데 정리할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집안 대청소. 우리집 창들이 투명해지고 반짝반짝 빛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뜬금없는 이름들이 생각난다. 전경연. 초등학교 고학년 때 친구. 어느 날 무슨 일로 버스를 함께 탔을 때 내 차비를 내어준 친구이다. 나는 친구의 차비를 대신 내준다는 건 상상도 못해봤다. 그런데 그녀는 뽐내는 기색도 없고 너무 태연한 것이 아닌가. 나는 뒤통수가 후끈거렸다. 하긴 그때 친구의 차비까지 낼 형편도 아니었지만......

또 한 명은 중학교 때 친구 박정숙. 이 친구랑도 어느 날 무슨 일로인지 버스에 함께 올랐는데 내 우산을 달라고 하더니 주름을 한 개씩 정리, 얌전하게 착착 접어 단추까지 끼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요술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교복 치마단이 터지면 옷핀 같은 걸로 대충 꿰어 며칠을 입다가 엄마에게 들켜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는 아이였다. 그녀의 단정한 매무시, 찰랑찰랑한 밤색 단발, 깨끗한 덧니...그 모든 것이 너무 신비로웠다. 나는 그녀에게 이성에게 대한 듯 경외감까지 품게 되었다.

그 친구 둘보다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으니 학교를 졸업하고 하릴없이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몇 년째 시립도서관에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도 한나절을 열람실에서 책을 읽고 또  몇 권 빌려서  버스에 올랐는데 버스가 갑자기 흔들린다 했더니 내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나를 확 껴안는 것이 아닌가. 열린 창문 사이로 가로수 가지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고  아줌마는 그 순간 자신의 아이 보호하듯 몸을 던져 나를 감싸안았던 것이다.

나는 버스 옆자리에 앉은 생판 모르는 처녀를 몸을 던져 보호해준 그 아줌마를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남을 돕겠다는 의지나 노력이 개입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머리까지 나빠서 학창 시절 친구들의 이름을 열 명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인데 이상하게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그 두 친구의 이름과 얼굴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아줌마의 얼굴도......오십대 초반의 수수한 아줌마였다.

그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준 사람들이었다. 본인들은 몰랐겠지만 각각 다른 무엇을 내게 최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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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2-15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주머니 참 대단하시군요.. 누군가의 기억속에 그렇게 오래도록 남을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님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식으로 기억되고 있지 않을까요?

연말이라 로드무비님의 글이 더더욱 감상적으로 느껴집니다..^^*

깍두기 2004-12-15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과 글의 조화가 압권이오...

진/우맘 2004-12-15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문구는 뭘로 넣을까요?

로드무비 2004-12-1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저도 이런 날은 감상적이 된다구요.

저한테 잘해준 사람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네요.^^

깍두기님, 그렇죠?

님도 안목이 높으십니다.^^

진/우맘님, 제깍 가서 메모 남겼습니다.^^

urblue 2004-12-15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길가다보면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 있잖아요.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다던지, 아파 보인다던지 등등...저만치서부터 보기 시작하면 엄청 신경쓰이는데, 막상 그 사람 앞을 지나치면서도 무슨 일이냐고 묻지를 못하겠더라구요.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 돌려 흘끔거리기만 합니다.

님을 보호해준 그 아주머니, 훌륭한 분이시네요.

로드무비 2004-12-15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저는 가까이 가서 일단 물어는 봅니다.^^;;

그 아줌마 생각하면 조금 덜 외로워요.^^

2004-12-15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4-12-1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주머니가 제 엄마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대신 저에게 지금이라도 고마움을 표시하심이...=3=3=3=3

파란여우 2004-12-15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님! 어제 퇴근해서 님이 보내주신 책을 잘 받았습니다. 사진은 한 이틀있다가 한 번에 올릴께요...400쪽에 달하는 허걱하는 책이지만 대충 펼쳐보니 만족합니다. 고맙습니다....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님을 알게 된 2004년은 행복한 한 해였습니다. 잘 읽을께요^^

로드무비 2004-12-15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파란여우님도 그러면 고향이 부산?

이거이거 반갑습니더!

그라고 책 잘 갔다니 다행입니더.

고마움을 표시하라는 부분은 모른척.('')(..)=3=3=3

oldhand 2004-12-15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까운 사이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에 강렬한 한 방을 남기고 멀어진 사람들이 간혹 있는 것 같아요. 연말에 어울리는 아주 따뜻한 글입니다. ^^

하얀마녀 2004-12-15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줌마 너무 멋지신데요? 거의 로드무비님 수준이에요.

기다림으로 2004-12-15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에 꼭 가로수 가지가 차창을 뚫고 들어왔을 때 앞에 앉은 누군가를 안아주고 말아야지..라는 가능성 없는 다짐을 가슴깊게 새기게 만드는 글입니다.

누군가의 기억속에 남을 수 있는 삶을 살았다면, 그게 그저 한 줄의 이야기일 뿐이라도, 그렇다면..정말 행복 하겠군요.

아마, 내일 친구를 만나러 전철을 탔을 때 누군가 제 옆을 지나친다면 혹은 창 밖으로 마른 나뭇가지를 본다면, 로드 무비님이 생각나지 않을까요? 아주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을 것 같아요. 아마도.


파란여우 2004-12-15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님! 제 고향은 조오기 '인천'입지요....울엄니 고향도 인천짠물...그냥 웃자고 한 소린데 어캔데요? 아잉, 죄송하게 됐심더, 내사 마 아무 뜻없이 한 소리라요. 괘념치 마소!!^^

2004-12-1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4-12-15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 말씀에 한 표. 정말 강렬한 한 방을 안겨주신 아주머니네요. 내 나이 50에 그럴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추천도 한 방!!!

잉크냄새 2004-12-1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일상에서 건져올리는 가슴 훈훈한 이야기........

로드무비 2004-12-16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작은별이 코트 단추 빨리 달아주세요.

비즈 작품에만 매진하시면 답니까?^^

잉크냄새님, 소소, 훈훈...예쁜 단어네요.^^

조선인님, 님은 너끈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십니다. 추천 한 방 고맙.^^

속삭이신 님, 아침에 해장은 하셨어요?^^

파란여우님, 저도 웃자고 한 소리였어요.

저의 유머 감각에 문제가 있군요.^^;;;

기다림으로님, 페이퍼를 하나 쓰셨군요. 제 페이퍼 밑에......

서재 사진이 너무 애잔합니다.^^

하얀마녀님, 저도 노력할게요. 불끈!=3

올드핸드님, 안 그래도 연말이라 생각난 거예요.

오랜만에 님을 만나니 무지 반갑습네다.^^

숨은아이 2004-12-1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림으로님 말씀에 동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