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유리창에서 밤낮없이 반짝이던 성탄 풍선장식을 조금 전 떼냈다. 1월 3일이 지나면 떼야겠다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열흘을 훌쩍 넘긴 것이다. 어젯밤에도 아이와 먼저 자러 들어가면서 남편에게 풍선장식을 떼달라고 말했다. 컴퓨터 카드 게임에 코를 박고 있던 남편은 "알았어, 알았다구."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조금전 일어나 서재에서 30분만 놀고 일을 하기로 굳은 결심을 하고 들어와 가장 최근 올라온 마태우스님과 수선님의 글을 읽으며 키득키득 웃다가 댓글을 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놓았다. 커피 한잔을 타가지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문득 눈에 띈 풍선 장식. 코드를 찾아 뽑고 의자를 놓고 올라가 못에 걸린 실을 빼니 간단하게 떨어졌다. "아니, 이 남자가 왜 이렇게 간단한 일을 안하는 거야!" 그것을 치우며 투덜거리다 보니 문득 깨달아지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로드무비, 니가 치우면 되잖아!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섬섬옥수 귀부인도 아니면서 나는 대부분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전부 남편에게 떠넘겼다. 생각해 보면 풍선장식 떼내는 정도의 간단한 일도 나는 미리 못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게을러서 또 두려워서 내가 엄두도 못 내고 미루었던  수많은 일들. 어쩌면 그 일들은 성탄장식을 떼내는 일처럼 간단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또 하나 깨달은 게 있다. 풍선 장식을 직접 떼내고 그 사실이 너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던 나는 그 오죽잖은 경험을 페이퍼로 하나 쓰려고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슬그머니 다시 기어들어왔다는 사실. 깨달음은 정말 도처에서 쓰리쿠션으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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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3 0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5-01-13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쥑이는 제목에다, 근사한 내용임다. 쫌 있음 득도하시겠네요..^^

깍두기 2005-01-13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로드무비님. 알고 보니 아침형 인간이시네요. 새벽 세시에 일어나 '일'을 하신다니....

urblue 2005-01-13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달음이 사방에서 밀려와도 너무 많이 깨닫지는 마세요. 마냐님 말씀처럼, 그러다 득도라도 하시면, 재미없다구요. =3=3

날개 2005-01-13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할 줄 알아도 남편 시킵니다.. 오늘 안하면 다음날 다시 시키고, 다음날도 안하면 그 다음날... 끈질기게 할 때까지 시킵니다..흐흐흐~

좀 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소굼 2005-01-13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 줄 아시면 그걸로 된겁니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할 줄 몰라 버벅대는 것보다야 낫지요

숨은아이 2005-01-1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아침이 아니라 새, 새벽인데요.

하얀마녀 2005-01-13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주님!

하얀마녀 2005-01-13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고보니 저도 책 주문하러 들어왔는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지... -_-a

진주 2005-01-13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안 시켜 버릇하면 남편이 나중엔 집안일에 무능해지더라는........

"도 닦으며 적당히 시키세!"

icaru 2005-01-13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의 도처에서 깨달음을 발굴해 내시는 님~ ...

낯선바람 2005-01-13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님 서재에선 늘 재밌는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2005-01-13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1-1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이 안되어 시장 가는 길에 잠시 PC방에 왔습니다.

메일 확인할 게 있어서요.

호호, 이 페이퍼 반응이 좋네요.

댓글 달아주신 분들요 고맙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요.^^

니르바나 2005-01-13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도 드디어 道의 세계로 드셨군요.

이런 걸 初見性이라고 하지요. ㅎㅎㅎ

파란여우 2005-01-13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리쿠션이라고 해서 당구야근가 했었죠...너무 단박에 대오각성하시는거 아녀요? 저도 함께 깨우칩시다!!^^

로드무비 2005-01-13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오랜만이에요.

저 도에 관심 많아요.

지금은 돈에 더 관심 많지만......^^

로드무비 2005-01-13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만세!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더군요.

자, 저와 함께 도의 세계로 떠나볼까요? 니르바나님 뒤를 따라......

니르바나 2005-01-13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 그럼 빠져볼까요. 道의 세계로... 로드무비님, 파란여우님.

잠간 격조했던 일은 로드무비님따라하기 중이어서 그랬습니다.

2005-01-13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룸 2005-01-13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이) 저 쓰리쿠션 성공해본적 있어요!!! ^ㅂ^)/ 왕년에 당구 250이었답니다!!(그걸 자랑이랑고 하냐구요~ 그래도 저희 과에서는 여자 1등이었다구요!!! ^^;;;;;;;;;)

로드무비 2005-01-14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한 말씀 한 말씀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런데 파란여우님은 대오각성 과(科)라는데요?

투풀니임, 전 당구장 딱 한번 가봤어요.

투풀님과 당구라 왠지 무척 어울립니다.

흑거미라는 프로당구 여성이 있는데 폼이 아주 멋지더라구요.

투풀님도 아마 그에 못지 않을 듯.ㅎㅎ

2005-01-14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1-14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좌린과 비니의 사진 가게 - 408일 세계 곳곳의 감성을 훔친
좌린과 비니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골목, 콘크리트로 대충 발라 지은 집, 빨래, 아이들...'두 아이' 인도 카냐쿠마리 2004  비니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좋겠다, 때려치울 직장이 있어서...) 408일 동안 세계 22개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부부가 있다. 30세 동갑의 주하아린, 빈진향 부부. 전세금을 빼내어 여행을 떠났다거나 직장을 때려치우고 여행을 갔다고 호들갑을 떠는 건 촌스럽고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한 부분은 이것이다. 그렇게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 젊은 부부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을 뽑아 홍대앞 희망시장에 내다놓고 한 장 두 장 팔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꿈꾸던 생활이 아닌가! 사진 기술이 없으니 사진을 팔아 생활하진 못하겠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한 구절씩 예쁜 종이에 지렁이 기어가는 내  글씨로 적어주고 1000원씩 받는 것이다. 뭐 그렇게......안 될까? 아무튼 나는 집이 너무 멀어 홍대앞 희망시장에 갈 형편이 못되었으므로  당장에 이 책을 주문했다.

홍대앞 희망시장이라면 3,4년 전 두세 번 가보았다. 한번은 거리의 화가가 주하의 얼굴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사진기를 손에 든  청년이 우리 부부에게 정중하게 부탁해왔다. 아이의 사진을 좀 찍고 싶다고. 우리는 입가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추고 그런 일은 하도 많이 겪어 자연스럽다는 듯이 그러라고 했다. 아이는 오만상을 찡그렸다. 지금이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겨우 서너 살 무렵. 청년에게 사진을 어디 실을 거냐고 했더니 '타나토스'라는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할 거라고 했다. 사흘 후인가 문득 생각이 나서 찾아들어가 봤다. 세상에, 내 딸의 얼굴이 거기에 터억하니 실려 있었다. 조금 덜 오만상을 찡그린 모습의 사진이......

그러니까 비니는 어쩌면 내딸의 사진을 찍어준 그때 그 청년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렇지만 컴맹에 가까운 나, 그 사진을 따로 보관해 두지도 못했다. 오오 아까워라. 그 사진을 간직해 뒀다면 알라딘 서재에서도 그렇고 두고두고 자랑질할 수 있었을 텐데...... 나라면 덜컥 사서 책상머리에 붙여놓았을 것 같은 사진 몇 장을 소개한다.


'술래잡기' 몰디브 굴히 섬 2004 비니


'고기 말리기' 인도 트라반드롬 2004 비니


책에는 없는 사진. 좌린과 비니의 블로그에서 퍼옴.


어느 여행지에서의 식사. 좌린과 비니 부부.

칠레 안데스 고원의  버려진 교회와 영극 런던의 해저문 거리의 적막과 아르헨티나 칼라파테의 무시무시한 가로수와 이집트 서쪽 강변 마을......젊은이들이 임시로 모여들어 좌판을 펼치는 희망시장에 당신들이 내다판 사진 한 장 한 장은 내 맘에 쏙 들었다. 자신이 찍은 사진에 너무 깊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지 않은 점이 또 마음에 들었다. 나도 언젠가 당신들의 좌판 옆에 꾀죄죄한 나의 좌판을 펼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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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0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누리 2005-01-1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진은 정말 아쉽네요.

책 사보고 싶어 졌어요.

깍두기 2005-01-10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반갑^^

빨래 널어논 사진이 맘에 들어요.

깍두기 2005-01-10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내 위에 있던 다른 분의 댓글이 그새 지워졌네요. 그분에 이어 저도 반갑다고 한건데...^^

로드무비 2005-01-10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멋진 계획인 게 팍팍 느껴져요.

그 꿈 꼭 이루시기를......

미누리님, 이 책은 사진만으로도 한푼 안 아까울 듯.^^

깍두기님, 저도 반가워요.^^

urblue 2005-01-10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안 하는 대신 책 읽고 일하고 하시나 봅니다?

리뷰로도 반갑긴 합니다만...

날개 2005-01-1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헤헤~ 좋아요, 좋아..(뭐가? ㅎㅎ 알아서 읽으시길..^^)

로드무비 2005-01-1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런데 왜 이 리뷰에 추천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나같으면 사진만 보고도 추천 무조건 눌렀을 텐데...모두 미워요. 흑흑.

릴케 현상 2005-01-1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청하시니^^

날개 2005-01-1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눌렀어요.. 로드무비님 보고 좋아하다가 깜박했어요..ㅎㅎ

kleinsusun 2005-01-10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렇게 솔직한 로드무비님이 좋아좋아. 추천했어용.ㅋㅋ

근데 이 부부 디따 부러버요. 여행하면서 얼마나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여행을 같이 하고 사진을 팔며 살아가는 삶의 방법에 동의하는 자기짝이 있다는건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하 일일까요? 아쿠...추워라.ㅋㅋ

책읽는나무 2005-01-10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 강제적으로 말씀 안하셔도 추천 알아서들 누르실텐데..ㅋㅋ

어떤책을 살까? 구경하는중에 필이 꽂히네요..^^

로드무비 2005-01-1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나무님. 그러게 말여요.

저도 모르게 분기탱천해서......ㅎㅎ

수선님, 전 님의 솔직발랄한 댓글이 마음에 들어요. 대부분.....

수선님의 비니 하루빨리 만나시길 빌게요.^^

날개님, 용서해 드릴게요.(도도하게.)^^

산책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날개님, 뭐가 그리 좋다는 건지 못 알아들었으니 좀 알려주시라요.^^

블루님, 헹. 오랜만에 보는데 좀 더 반가워해주면 안되는기요?^^

zwarin 2005-01-10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드무비님, 멋진 리뷰 감사드립니다. 반가운 마음에 몇 가지 알려드릴려구 댓글 씁니다.

우선 '사진기를 든 청년'은 저도 올해 홍대앞에서 알게 된 분인데요, 요즘도 전국 곳곳을 누비며 예쁜 사진을 찍고 다니십니다. hubris73@hotmail.com 으로 연락해 보시면 옛 사진들을 저장해놓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직장을 때려 치우고 여행을 갔다는 호들갑'에 대해서는... 저 역시 낯뜨거워지는 대목입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볼 필요가 있는 업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그런 표현을 즐겨 쓰시더군요. 인터뷰 할 때마다 '길거리 사진가'에 방점을 찍어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건만-_-;;

그리고, 저 '좌린'이 신랑이고 '비니'가 각시입니다. 아이디가 둘 다 중성적이라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저희 부부도 홍대앞에서 그 청년(요즘은 휴브리스라는 아이디를 쓰고 계십니다)의 카메라 앞에 여러번 서기도 했습니다. 세상이 좁은건지, 휴브리스님의 발이 넓은건지. 같은 카메라 앞에 섰다고 생각하니 왠지 반가와지네요.

홍대앞 희망시장은 겨울동안 휴장하고 오는 3월에 다시 열립니다. 댁이 머시면 http://www.zwarin.com/shop 에서 예쁘게 마운트 된 사진을 구입할 수도 있어요. 요건 광고였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로드무비 2005-01-1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너무 반가워요.^^

그런데 님의댓글을 제 페이퍼로 올리면 안될까요?

혼자 보기 너무 아까워서 말이죠.

싫다고 하시면 싣지 않을게요.^^

(남겨주신 주소로 꼭 놀러가겠습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1-10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린님이 직접 코멘트 남기셨네요. ^^

책과 리뷰의 매력이 어울러 있는 글이네요. 추천해요.

2005-01-10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5-01-10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비니'가 각시래요. 제가 저의 '좌린'을 만날 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

'비니'를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듣고 여자를 보내 주시면....헉.ㅋㅋ

stella.K 2005-01-1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진만 보고 추천합니다.^^

로드무비 2005-01-1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스텔라님 오랜만이죠? 추천 고마워요.^^

수선님, 네. 수선님의 좌린 하루빨리 만나시길 기도할게요.ㅎㅎ

이 안님, 껄렁한 제 리뷰에 추천까지 해주셔서 고맙기 한량없습니다.^^

플레져 2005-01-1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빨래... 어떤 화가의 그림 보다 더 멋져요.

로드무비님, 나타나셔서(?) 반가워요. 넘 늦게 달려왔죠? 오늘 제가 쬐끔 바빴습니다...^^ 당근, 추천이어요.

로드무비 2005-01-1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어제는 뭔 일로 그렇게 바쁘셨을까요?ㅎㅎ

추천 고마워요.^^

미누리 2005-01-1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추천 안 눌렀다고 뭐라고 하신 건 아니죠?^^ 빨리 추천 눌러야지.

로드무비 2005-01-13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누리님, 뭐라고 한 거 어떻게 아셨죠? ㅎㅎ

고마워요, 추천.
 
Snowcat in Paris 파리의 스노우캣
권윤주 지음 / 안그라픽스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여섯 시에 일어나 책꽂이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올해의 첫 책, 무얼 읽을까? 새벽 미명에 일어나 앉아 정색을 하고 읽는 책이니만큼 신중하게 고르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허공에서 몇 번인가 헤매이던 나의 손은 결국 <파리의 스노우캣>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파리의 이 골목 저 골목 한가롭게 산보하는 스노우캣 뒤를 열 발짝쯤 떨어져서 어슬렁 딴전부리며 따라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가 다니는 곳은 커피향 낭자한 카페와 미술관, 예쁜 가게가 소소하게 등장하는  뒷골목이 다였다. 스노우캣이 먹다 흘리는 바게뜨 부스러기와 쇼콜라쇼(핫초콜릿) 찌꺼기는 내 입에 너무 달았다. 어디 한국 식당에 들어가 김치찌개라도 한 냄비 시켜 먹었다면 염치불구하고 숟가락 들고 달려들었을 텐데......

<파리의 스노우캣>에는 사람 냄새가 없었다. 그 어떤 자기 성찰도......도움을 많이 받은 친구인지 후배인지가 한 명 나왔지만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스노우캣은 참으로 가배얍게 무심하게  목도리를 친친 두르고 파리 뒷골목을 배회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건 아마 사람으로 태어나 꿈꿀 수 있는 최상의 여행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다가 무슨 상점 문짝에 붙은 공연(팻 메스니와 찰리 헤이든) 포스터를 보더니 덜컥 파리 체류를 두 달 연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미련 없이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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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1-03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하. 정말 통쾌한 리뷰!!!! 추천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요....제 친구중에(남자) 맨날 전공 바꿔서 학교만 다니는 애 있는데요,

(40살까지는 공부를 하며 인생을 설계한데요) 꼭 그 친구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네요.

cool한 로드무비님의 리뷰, 맘에 들어요!

2005-01-03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1-03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통쾌한 리뷰라니 무지 기뻐요.

너무 감상이 짧아서 페이퍼로 올릴까 잠시 고민했는데...^^

.....님, 설마 이런 심통맞은 리뷰는 저밖에 쓸 수 없다는 그런 말은 아니겠지요?^^

릴케 현상 2005-01-0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제는 스노우캣 다이어리 사러 다녔더랬는데

깍두기 2005-01-0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히힛, 나도 읽었으면 쫌 열받았을 거 같네. 그래서 오히려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얼마나 열받나 시험해보게...^^

나는 아무 미련없이 책장을 덮었다. 작가가 봤다면 가슴이 철렁할 대사네요. 님, 무서워요.(그래서 난 좋다고...^^)

로드무비 2005-01-03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그림 참 예쁘죠?

그래 다이어리는 사셨습니까?^^

깍두기님, 뭐 그렇게 나쁜 의미는 아니었답니다.

너무 자유롭고 여유로운 여행기에 샘이 좀 나서요.^^

2005-01-03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1-04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노우캣을 좋아해요...

하지만...님의 시니컬한 리뷰도 좋은 건 무슨 아이러닐까요~!

암턴 추천!!

로드무비 2005-01-04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님의 말씀만 들어도 배부릅니다. 고맙습니다.^^

복순이언니님, 제 리뷰가 시니컬하다고요? 그럴 리가요.('')(..)

ㅎㅎ추천 고마워요.^^

잉크냄새 2005-01-04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아무 미련없이 추천을 눌렀다.

리뷰의 형식과 내용이 참신하네요.^^

bluehawaii77 2005-01-0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했습니다.... 저랑 어찌나 똑같은 생각을 하셨는지...그리고 통쾌한 글..ㅎㅎ

2005-01-04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참신합니다. 호평이 아니건만 어쩐지 책을 보고 싶게 만드는..^^ 아, 제목도 멋있습니다.

로드무비 2005-01-05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아무 미련 없이 추천을 누르시다니! 앞으로도 계속 그래 주시와요.^^

안젤리나님, 처음 뵙습니다. 반가워서 달려가 봤더니 방금 서재를 만드셨군요.

이 책을 읽고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셨다는 분이니 기대가 됩니다.^^

참나님, 우리 1년 만이죠? 반가워요.^^

anidia71 2005-01-1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내 기분을 정리해 주셨네요..


chika 2005-01-18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화악 와 닿아요. 저와는 정반대의 느낌인데도..참 좋은 리뷰야! 하는 느낌은 뭔지... 저도 몰라요!ㅋㅋ
저는 이 책 읽고 좋아라~ 한 사람중 하나인데요, 아마 그런 꿈이라도 꾸면서 사는게 좋아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가끔씩 그렇게 낭만적인 꿈을 꾸는 것도 좋쟎아요. 흐흐~
제가 아마 세상을 너무 편히 살아서 이런가봐요~ 이해해주세요~ ^^;;

2005-04-18 0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녀치마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 해의 마지막날을 나는 <처녀치마> 리뷰 쓰기와 딸아이 방 옷과 장난감 상자를 정리하는 것으로 보내기로 했다. 삶에는 뭔가 구체적인 실적이 중요하다. 내 아무리 허랑방탕한 인생이기로서니 2004년 마지막날을 맥주 깡통이나 우그러뜨리며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새벽 두 시쯤 책을 읽기 시작, 졸다 깨어 다시 읽다 또 침대밑에 책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쓰윽 침을 닦고 책을 집어들어 다시 읽기를 반복하다보니 책읽기는 다섯 시쯤 끝났다. 스탠드 불을 끄고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나는 맹렬하게 리뷰를 쓰고 있었다. 제목이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다. '기다리는 것은 결코 오지 않는다'.

권여선의 1996년 제 2회 상상문학상 수상작 <푸르른 틈새>는 북아현동 북풍한설 한옥 자취방 거주 경험이 있는 내게는 거의 나 자신, 혹은 친구의 일기장을 보는 것같은 쾌감을 불러일으킨 장편소설이었다. 방이 습해 푸른 곰팡이가 가득한 단칸방에는 옷장과 침대가 벽에서 뚝 떨어져 있고, 곰보유리문과 꽃무늬 이불호청을 찢어 철사에 걸어 둔 것에 불과한 문짝의 커튼, 매일밤 나에게 간택되기를 기다리는 아무렇게나 쌓인 책들, 중국집 홀에서의 대학 신입생 환영회, 가슴 떨리는 자기소개 시간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간결하면서 시니컬한 문장은 또 얼마나 마음에 쏙 들었는지......

아줌마 치마도 아니고 '처녀치마'가 뭔가 했더니 펼치면 치마 같다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풀 이름이었다. 근 10년 만에 들고 나온 이 소설집은 자신을 기다려왔을지 모를 단 한 명의 독자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당연히 그 한 명의 독자가 나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실 끝은 쥐고 이곳까지 찾아온 그 남자도 마당에 서서 느꼈을 것이다. 산다는 일엔 애당초 그 어떤 아름다운 실마리도 없다는 걸, 누군가 우연히 제 손가락 마디를 이용해 실을 감고 조심스럽게 덧감아나가면서 만들어놓은 빈 공간, 누군가의 손가락이 빠져나가버린 그 허사의 자리에 자신이 도착했다는 걸.('처녀치마' 중)

두 번 이혼한 남자와 10년째 사귀는 미혼의 주인공, 사흘 휴가를 내어 어머니가 죽은 지 6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 아무도 몰라주는 화가였던 아버지, 그리고 그악스럽게 남편과 자식을 돌보았던 엄마. 그녀는 부모님이 경영했던 여관 구석방에 아무도 모르게 기어드는데 서울에서 단체로 내려온 어느 극단의 단원들이 새벽까지 여관 마당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다. 혼자 방안에서 소주를 마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흘려 듣는 주인공 .

혼자 여행을 떠나 허름한 방을 잡아놓고 어둑어둑할 무렵 근처 가게에 가 소주 한 병을 사는 일은 나도 여러 번 해보았다. 사람의 기억은 간사하기 짝이 없어서 그걸 굉장히 미화시키고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 저녁으로 시켜먹은 백반의 반찬을 안주로 해서 소주 한 병으로 모자라 청하 한 병을 주인집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고 새벽에 모두 토했던 것은 운문사 언저리 민박집이었던가, 오대산 별장이었던가? 아무튼 <푸르른 틈새>의 여주인공 손미옥도 딱 내 이야기 같더니<처녀치마>에 나오는 세상에 마음붙이지 못하고 부유하는 등장인물들도 마음이 쓰이는 게 남의 일 같지 않다.

믹스 커피를 마시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언제나 같은 맛을 내기 때문이다. 결코 매혹되지 않을 것들에 둘러싸여 살기. 이제 그만, 다 고아먹은 사골 같은, 여생(餘生)이라 불리는 가볍고 다공한 삶을 살기. 이게 요즘 그녀가 거짓되이 추구하는 삶이었다. 꿈꾸는 데에 진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두리번거리다' 중.)

나도 요즘은 100개들이 커피믹스를 사다놓고 커피를 마신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는 행위도 귀찮아 정수기의 뜨신 물을 받아 뿌연 거품이 이는 커피를 휘젓기도 한다. 커피콩을 직접 볶아 갈아 커피를 마셔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부터 맛있는 커피를 골라 마시는 일조차 귀찮은 일로 여겨지게 되었을까.

어찌 보면 <처녀치마>는 <푸르른 틈새>에 대학 신입생으로 등장했던 인물들의 15년쯤 뒤 후일담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들이 받은 상처는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고 상처는 서둘러 봉합되었다. 내게는 가혹하지만 아름다운 성장소설로 읽혔던 <푸르른 틈새>. <처녀치마>는 내게 세월의 무상함과 기다리는 것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씁쓸함만을 확인시켰을 뿐이다. 이 두 책 앞날개를 펼쳐놓고 10년 전과 10년 후 작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세월은 사람들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간다.  이 작가의 편지를 앞으로도 가끔 받아보고 싶다.

 (이 책의 제목과 상관없이 국가보안법은 가까운 시일 내 꼭 폐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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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2-3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차력당 방으로 어떻게 옮겨야 하나요?^^;;;

비발~* 2004-12-3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옮깁니다. 그냥 퍼서 나르셔야할거야요.

로드무비 2004-12-3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사해서 붙여넣기도 안되는군요.^^;

플레져 2004-12-3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르른 틈새 갖고 있는데 읽어봐야겠어요.

얼마전에 헌책방에서 구한건데, 제목이 맘에 들었어요.

감칠맛 나는 리뷰, 군살 없는 리뷰... 좋은걸요~!!

hanicare 2004-12-3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말이지..한숨이 나오는 리뷰군요. 내 손금을 들여다 보는 듯도 하고.거짓되이 추구하는 삶이었다-라니.원...글쟁이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요.

로드무비 2004-12-31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푸르른 틈새> 읽고나서 이 책 읽고싶으시면 말씀하시라요.^^

군살없는 리뷰라니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

하니케어님, 님은 가끔 저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세요.

댓글 하나로 리뷰 한 개나 공들여 쓴 페이퍼의 울림을 전달하시거든요.

아, 하면 아, 어, 하면 어.

가끔 그런 느낌을 님에게 받는답니다.^^

kleinsusun 2004-12-31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아현동에서 자취를 하셨었군요.

제 친구가 거기서 자취해서 많이 갔었거든요.

음....추계예대에서 가까웠던 것 같은데....

한해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로드무비님의 글을 읽으니 센티해지네요. 북아현동에서 자취하던 그 친구랑 연락이 되지 않아요. 잘 지내려나?어디에 있건 행복하길...

로드무비 2005-01-01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저 추계예대 앞에서 살았어요.

거기 낡은 한옥이 많았거든요.

친구분과 연락이 되길 바랄게요.

모두모두 행복하시길......

숨은아이 2005-01-03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과 상관없이 국가보안법은... 하하... 꿈에서부터 정해놓은 제목을 쓰고도 마음이 불편하셨군요.

로드무비 2005-01-05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약간 부담이 되더라고요.^^;;;

내가없는 이 안 2005-01-05 0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댓글도 이제야 답니다. 죄송해라~ 이 리뷰, 너무 근사합니다. 리뷰도 소설처럼 쓸 수 있는 거군요. 한 작가에게서 10년의 간극이 있는 책을 보는 건 그 작가가 아니더라도 덤덤히 볼 수만은 없는 듯싶어요. 저도 몇 년쯤 전에 인상깊게 읽었던 소설의 작가가 코빼기도 안 보일 때 제 일인 양 마음이 아프더군요... 뒤늦은 추천, 누릅니다. ^^

nemuko 2005-04-2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을 읽다가 문득 궁금해서 찾았더니 역시 님의 리뷰가 있더군요. 정말로 뒤늦게나마 추천하고, 댓글 남기기도 민망할 정도의 지각이지만 잘 읽고 빌려 갑니다...
 
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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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컴퓨터 한 대를 놓고 남편과 신경전을 벌이게 되었다. 나는 당연히 알라딘 서재, 남편은 포커 게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포커 게임에 재미를 붙인 남편, 서재활동에 매진중인 아내를 구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독이야, 중독!" 내 뒤통수를 겨냥한 남편의 질타는 계속되고 나는 타의에 의해 컴을 꺼야 하는 수모를 견딜 수 없다. 급기야 열흘 전쯤 세 시간째 포커 게임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울화통을 터뜨렸다.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했어. 예전엔 나에게 안 그랬잖아!" 냉장고에 있는 소주 한 병을 들고 와 콸콸콸콸 소리도 요란하게 따르며 투덜거렸더니 그제서야 눈이 동그래진 남편이 달려나왔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는데 일어나보지도 않았다. 최소한 비타500한 병과 차 안에서 마시라고 생수통에 담은 녹차 한 병은 건네는데 말이다. 컨디션이 좋으면 생과일주스를 만들어 한 컵 가득 대령하기도 하는데......그 비율은 반반이다. 아무튼 싸우고 출근하는 데 코빼기도 안 보인 건 결혼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편도 화가 났는지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버린다.

그날 저녁 술자리가 있어 늦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는데도 "그러든지 말든지......"하고 모지락스럽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편은 다음날 토요일 정오경 폐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어디 있다가 이제 오느냐고 물었더니 경찰서란다. "혹시 음주운전?" 나의 물음은 비명에 가까웠다. 남편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면허취소에 1년간 운전을 할 수 없다니!

"도대체 어쩌다가!" 하고 등짝을 한 대 패주려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많이 놀랐겠네. 그래도 차라리 다행이다. 잡힌 거. 술마시고 운전하다가 사고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 굳어 있던 남편의 얼굴이 그제서야 풀어지는 듯했다.

딱 하루,  출근하는 남편에게 "운전 조심해!" 하는 인사를 빼먹었더니 지랄맞게 이 모양이다. 아무튼 이왕 벌어진 일이니 속을 끓여봤자 나만 손해 아닌가!(벌금은 얼마나 나오려는지.)

무슨 리뷰가 이 모양이냐고?

오늘 하루종일 <체호프 단편선>을 읽었다. 최근 우리 부부의 애정 이상전선과 투닥거림과 사건사고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화해와 그러고도 남는 앙금과 뭐 그런 것과 다를 바 없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오페라를 보다가 느닷없이 터진 재채기로 앞좌석 장군에게 침을 튀기는 바람에 며칠 동안 그를 찾아 사죄하러 다니는 등  전전긍긍하다가 배속에서 뭔가가 터져 죽어버린('관리의 죽음') 사람 이야기를 필두로 하여. 한마디로 체호프 단편의 주인공들은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간에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쩔쩔매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건 나의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책 뒤표지에 실린  "체호프의 단편들은 한없이 차갑지만 따뜻하고, 단호하지만 부드럽다. 그의 익살 뒤에는 천근같은 우수가 기대어 있다"는 서울대 노문학과 박현섭 교수의 짧은 글은  체호프의 문학을 사정없이 관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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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12-28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반가워서 한달음에 달려왔음...^^

날씨가 추워졌어요. 목감기에 걸렸다가 나았다가 다시 또 걸렸네요.

주사를 맞고 몸을 비비 꼬았어요. 20분쯤 지나니 괜찮아져서 열심히 하던 일을 하였지요. 무슨 댓글이 이모양이냐구요? 헤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중에 체홉의 집 단편이 떠올라요. 체홉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을 그린 소설인데, 요샌 체홉 하면 그 소설이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물만두 2004-12-28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홉의 골짜기를 조사한 차에 이 글을 만나다니... 저랑 친하지는 않은 작가지만요^^

urblue 2004-12-28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열심히 보시는군요! 전 아직도 놀기만 하는데..

책장수님은, 님 말씀대로 사고 안난게 다행이지요. 울 회사 사람 몇 년 전에 만취 상태로 운전하다 사고내서 여간 고생한게 아니거든요.


날개 2004-12-28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히 리뷰를 보러 들어왔는데, 이건 페이퍼잖아요!! 로드무비님은 어쩔수가 없단 말이야~ 흐흐~ 리뷰를 이리도 와닿게 쓰시다니 능력입니다요..

제 옆지기가 작년 딱 이맘때에 음주운전으로 면허취소를 당했답니다.. 벌금 한 200만원쯤 나옵니다..ㅜ.ㅠ 희안하게도 면허취소라고 바로 다음날부터 운전 못하는게 아니더군요.. 한달의 유예기간후에 취소더라구요.. 아마 생계형 운전자 때문인 듯..

아무튼, 벌금 내려면...ㅠ.ㅠ

poptrash 2004-12-2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체호프. 간결하면서도 따뜻한... 마치 손으로 짠 스웨터처럼.

로드무비 2004-12-2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그 단편 제목이 뭐죠?

레이몬드 카버라면 저도 두어 권 가지고 있는데......

(빨랑 알려주오. 책제목이랑)

물만두님, 체호프랑 친해두면 좋을 텐데요?^^

블루님, 그렇게 생각해야지 우짜겠어요?

얼마 전엔 또 족구하다가 다쳐 피를 철철 흘리고 들어오더니 내참.

날개님,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지금은 면허 다시 획득했겠네요?

산골짜기에 살면서 차까지 없는 1년을 보내야 한다니 공포스럽습니다.

poptrash님, 님도 언제 리뷰 쓰셨죠?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4-12-2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는 처음입니다. 역시, 추천 안 할 수가 없네요. 대체...이런 내공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깍두기 2004-12-28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아주 재미있는 리뷰입니다^^ 리뷰가 아니라 체홉 단편선 다음 이야기를 쓰셨다고나 할까?^^

2004-12-28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4-12-2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숏컷 (집사재) 에 있는 심부름이어요 ^^

하얀마녀 2004-12-28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는 절대로 안 하시면서 어떤 책인지는 확실하게 알려주셨네요. ^^

내가없는 이 안 2004-12-29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짝을 한 대 패주려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로드무비님, 멋지게 화해하셨어요. 물론 사단은 벌어졌지만 큰 사고 안 난 걸 다행으로 여기시니 그 마음도 멋집니다. ^^

kleinsusun 2004-12-2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정말....리얼해요.

다시 한번 느껴요. " 솔직한 글은 힘이 세다!"

추천하고 갑니당.

2004-12-29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2-29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남편의 구박에도 아랑곳없이 꿋꿋하게 서재활동에 매진하자고요?

그러문요, 그래야죠.^^

수선님, '리얼 리뷰'로 계속 나가려고요.

님의 칭찬 힘이 됩니다.^^

이 안님, 마음같아선 한 대가 아니라 수십 대 패주고 싶죠.

그래도 다독이며 살아야지 우짜겠습니까.^^;;

하얀마녀님, 컴퓨터 서로 차지하려고 신경전 벌이고 급기야 싸우고

그게 바로 체호프 단편의 소재들이거든요. 물론 당시에 컴퓨터는 없었겠지만...

플레져님, 숏컷은 없는데. 혹 가지고 계시면 나중에 빌려주세요.

빌려주실 거죠?^^

깍두기님의 호탕한 웃음소리로 시작되는 댓글이 안 보이면 허전해요.

추천 고맙슴다.^^

노웨이브님, 이것도 리뷰냐고 욕 안하시고 내공이라고 말씀해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니르바나 2004-12-29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글을 대할 적 마다 갖게 되는 상상은 기품있는 삶과 격조있는 사고를 하며 사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지금 여기에서 사시구요("도대체 어쩌다가!"/ "많이 놀랐겠네. 그래도 차라리 다행이다. 잡힌 거. 술마시고 운전하다가 사고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 ), 그렇다고 虛가 없다면 삭막한 生일텐데(냉장고에 있는 소주 한 병을 들고 와 콸콸콸콸 소리도 요란하게 따르며 투덜거렸더니) 낭만에 확실히 초를 치며 사시는군요. 로드무비님

부럽습니다.

어제 오늘 이 글만 5번째 읽고 있습니다.

요즘 이상한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추천과 댓글을 따로 따로 하는 습관이 들었어요.

추천은 어제 댓글은 오늘.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니지요. 로드무비님

로드무비 2004-12-29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기품과 격조는 저랑 영 상관이 없는 단어인데요.^^;;;

소주 '크라스'에 콸콸콸 따르는 사나운 면이 가끔 제게 있답니다.

아무튼 너무 잘봐주셔서 고맙기 그지없고요.

추천과 댓글은 마음 내키시는 대로 아무렇게나 하셔야지요.

저는 그저 이렇게 한마디 남겨주시는 것만도 감사할 뿐이랍니다.^^

숨은아이 2005-01-0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런! 아무도 안 다친 게 다행이네요, 정말. 로드무비님이 운전 면허를 따심이...

michelle 2005-03-14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끼가 여행할 때 가장 선호하는 책이 <체호프 전집>이라죠. 그 이유를 일곱가지나 나열했던 것 같은데 제일 재밌었던 건, 누가 표지를 보게 되어도 체호프를 읽는 사람은 대개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이유였죠. 그래서 저도 이번 여행에는 체호프를 넣어가려고요.

로드무비 2005-04-13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쉘님, 너무 늦게 봤어요.
맞아요, 여행길에 체호프 딱이에요.^^
숨은아이님, 항상 보면 뒤에 숨어서 댓글을 남겨놓으셔서.....
운전면허는 안 딸랍니다.(님은 운전자인가요?)